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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2. 현제를 꿈꾸고 무당에서 절학을 창립

《왕정남묘지명》에 따르면 장삼풍이 “밤에 꿈에서 현제(玄帝)로부터 권법을 전수받고 그 다음날 단신으로 백여 명의 적을 죽였다.(夜夢玄帝授之拳法,厥明以單丁殺賊百餘)”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현제란 현천상제(玄天上帝)를 가리키는데 다시 말해 무당산에서 도를 닦았던 진무대제(真武大帝)를 말한다. 도서(道書)에 따르면 현천상제는 원시화신(原始化身)이자 태극의 별체(別體)다. 상삼황(上三皇) 시기에는 세상에 내려와 태시진인(太始真人)이 되었고 중삼황(中三皇) 때는 세상에 내려와 태을진인(太乙真人)이 되었으며 헌원 황제 때는 세상에 내려와 현천상제가 되었다.

또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진무대제(真武大帝)는 정락국(淨樂國) 국왕과 선승(善勝) 왕후의 아들이다. 왕후가 꿈에 태양을 삼켰는데 깨어나자 임신했고 14개월이 지난 후 왕궁에서 탄생했다. 성장한 후 집을 떠나 부모님과 이별한 후 무당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는데 42년 만에 공을 이루고 과위가 원만해져 백일승천(白日昇天)했다.

《현천상제계성록(玄天上帝啟聖錄)》에서는 진무가 도(道)를 이루고 승천한 후 다시 하계(下界)에 내려왔다고 한다.

“7일 동안 천하의 요마가 모두 다 처리되었다. 사람과 귀신이 분리되고 원혼이 흩어졌으며 떠나간 백(魄)이 초도되어 올라갔다.(七日之中,天下妖魔,盡皆收斷。人鬼分離,冤魂解散,逝魄超升)”

또 “현제는 천변만화하여 주교종사(主教宗師)가 되었다. 분신해서 세상에 내려와 만물과 사람을 제도함에 무량(無量)무변(無邊)했다. 동천복지에서도 신령함을 드러내지 않음이 없었다. 감응한 사적이 얇은 책으로는 다 기록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현천상제계성록‧신장교법(神將教法)》에서는 송나라 진종 건흥(乾興) 2년(1023년) “검주(黔州) 장효녕(張孝寧)의 부친이 진무에게 공양하며 매사에 구첨(求簽 역주: 신불 앞에서 제비를 뽑아 점치는 것)을 한 후 행동하면 모두 신령한 감응이 있었다. 효녕 역시 부친을 따라 진무에게 공양하곤 했는데 성실하고 어김이 없었다. 한번은 조정에서 주최한 무술시합에서 무장으로 발탁되었다. 효녕이 밤에 꿈속에서 ‘진무전(眞武殿) 아래의 하괴신장(河魁神將)을 보았는데 직접 창과 활을 쓰는 법 및 기마술을 가르쳐주자 갑자기 빨리 터득했다.’고 한다. 효녕은 이 대회에서 1등을 했고 나중에 영주방어사(瀛州防禦使)에 제수되었다.

자고로 도가에서는 무예를 연마하는 전통이 있었고 수많은 수도인(修道人)들이 무예를 연마하며 내외겸수(內外兼修)했다. 하지만 도가에서는 청정과 무위를 중시하며 그 취지가 반본귀진(返本歸真)에 있기 때문에 무술을 ‘급하지 않은 말학(不急之末學)’으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설사 무술을 지니고 있어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대로 기록이 아주 드물었다. 게다가 수도하는 사람은 대부분 속세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기 때문에 무공과 절기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또 도가무공의 공법(功法)은 단법(丹法) 및 도법(道法)과 일체로 대부분 구전심수(口傳心授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전수)하기 때문에 세인들 중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있어 도가무술이란 마치 기린의 뿔이나 봉황의 발톱처럼 진귀한 것이다.

현천상제가 장삼풍에게 태극권을 창시하게 한 것에는 필경 심원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현재 내가무술은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닌 권공(拳功)과 검법(劍法)을 형성했지만 그 공리(功理)와 공법(功法), 체계적인 동작과 주지요령에 있어 그 어느 것도 장삼풍의 태극권 이론을 넘어서지 못했다.

3. 태극을 운용해 몸에서 온갖 변화 생성

도가 태극학설은 그 연원이 아주 길고 오래되는데 태극학설에서는 음양(陰陽) 양기(兩氣)를 강조한다. 음양 양기가 생기지 않았을 때가 혼돈상태인데 무극(無極)이라고 하며 그 후 태극(太極)이 생겨난다. 음양 양기가 존재한 후 태극이 만사만물을 생성한다.

장삼풍은 《태극권을 배우려면 반드시 신을 수렴하고 기를 모아야 한다는 주장(學太極拳須斂神聚氣論)》에서 “태극에 앞서 본래 무극이 된다. 홍몽(鴻濛) 일기(一氣)가 섞여 나뉘지 않기 때문에 무극은 태극의 어머니가 되는데 즉 만물의 선천의 기(先天之機)가 된다. 두 기가 나뉘면 천지가 갈라지고 비로소 태극이 생긴다. 두 기는 음양이 되는데 음은 고요하고 양은 움직이며 음은 쉬고 양은 생성한다. 천지가 청탁으로 나뉘면 맑은 것은 떠오르고 탁한 것은 가라앉는데 맑은 것은 높고 탁한 것은 낮다. 음양이 서로 사귀고 청탁이 서로 친해지면 인온(氤氳)이 생겨나는데 비로소 만물을 양육한다.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 본래 하나의 무극으로 선천의 기틀이 이것이다. 후천에 들어가면서 태극을 이룬다. 그러므로 만물은 무극이 없는 것이 없으며 또 태극이 없는 것이 없다.”(太極之先,本爲無極。鴻蒙一氣,混然不分,故無極爲太極之母,即萬物先天之機也。二氣分,天地判,始成太極。二氣爲陰陽,陰靜陽動,陰息陽生;天地分清濁,清浮濁沉,清高濁卑;陰陽相交,清濁相媾,氤氳化生,始育萬物。人之生世,本有一無極,先天之機是也;迨入後天,即成太極;故萬物莫不有無極,亦莫不有太極也.)라고 했다.

장삼풍이 여기서 논술한 태극은 《대도론(大道論)》과 같은 맥락이다.

앞에서는 “한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가리켜 도라고 하며 수도자는 이 음양의 도를 닦는 것이다.(一陰一陽之謂道,修道者修此陰陽之道也)”라고 했다.

여기서는 두 기를 음양이라고 하면서 “두 기가 나뉘면 천지가 갈라지고 비로소 태극을 이룬다.(二氣分,天地判,始成太極)” “그러므로 만물은 무극이 없는 것이 없으며 또한 태극이 없는 것이 없다.”

사람 몸은 ‘본래 하나의 무극이 있으니’ ‘선천의 기(先天之機)’가 되고 후천(後天)에 진입해 ‘태극’을 이룬다. 사람의 신체는 한번 동(動)하고 한번 정(靜)하니 동정(動靜)이 서로 원인이 되어 마치 고리처럼 끝이 없는 하나의 천연적인 태극이 된다. 또 사람에게 물질 신체만 존재해서는 살아 숨 쉬는 사람을 이룰 수 없는데 다시 말해 ‘신기(神氣)’야말로 사람 생명의 주재자가 된다. 즉 ‘신기상교(神氣相交)’ 또한 하나의 태극이다.

장삼풍은 자신의 태극권법을 전수받으려면 우선 태극의 이 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람의 작용은 동(動)이 있으면 반드시 정(靜)이 있고 정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동하게 되니 동과 정이 서로 원인이 되어 음양으로 나뉘며 합치면 하나의 태극이 된다. 사람의 생기(生機)는 전적으로 신기(神氣)에 의지한다. 기가 맑으면 위로 떠서 상천(上天)과 다름이 없다. 신을 모아 안으로 수렴하면 하지(下地)와 다름이 없다. 신기가 서로 교제하면 또한 완연한 하나의 태극이다. 그러므로 나의 태극권법을 전수받으려면 반드시 우선 태극묘도(太極妙道)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이를 잘 모른다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人之作用,有動必有靜,靜極必動,動靜相因,而陰陽分,渾然一太極也。人之生機,全恃神氣。氣清上浮,無異上天。神凝內斂,無異下地。神氣相交,亦宛然一太極也。故傳我太極拳法,即須先明太極妙道。若不明此,非吾徒也)”(《태극권을 배우려면 반드시 신을 수렴하고 기를 모아야 한다는 주장》)

장삼풍은 태극권 배우기는 수도(修道)의 기초를 다져주기 위함이며 수도(修道)란 수심연성(修心煉性)을 위주로 한다고 했다. 태극권은 내외겸수의 아주 많은 것을 지니고 있어 신체가 변화함에 따라 사상경지 역시 제고될 수 있고 (수련의) 것들을 연마해낼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심성(心性)을 닦지 않으면 심신(心神)이 정(定)에 들지 않고 신기(神氣)가 조화를 이루지 못해 단지 태극권자세(투로套路-한 세트의 동작)만을 배운 것으로 진짜 공부를 연마해낼 수 없다.

“태극권 배우기는 입도(入道)의 기초를 위한 것으로 입도는 마음을 기르고 성을 안정시키고(養心定性) 기를 모으고 신을 수렴함(聚氣斂神)을 위주로 한다. 그러므로 이 권법을 연마하려면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만약 마음이 안정될 수 없다면 성(性)이 어지러워질 것이다. 기가 밖에서 모이지 않으면 신(神)은 반드시 혼란해진다. 심성(心性)이 서로 이어지지 못하고 신기(神氣)가 서로 어울리지 못하면 전신의 팔다리와 백맥(百脈)이 전부 죽지 않음이 없다. 비록 자세에 의지해 작용할 수는 있지만 법은 효과가 없다. 심성을 안정시키고 신기를 수렴하고 모으려면 가부좌를 빼놓을 수 없으니 행공(行功)의 법은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동정(動靜)의 가운데서 태극의 이익을 찾아야 하며 팔괘와 오행 중에서 생극(生克)의 이치를 구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칠(七)과 이(二)의 수를 섞어 하나가 되면 무극(無極)을 이룬다. 심성(心性)과 신기(神氣)는 서로 따르며 작용하기에 심성이 편안하고 안정되며 신기가 수렴되고 모이면 일신(一身) 중의 태극이 이뤄지고 음양이 어우러지며 동정이 합해져서 전신의 팔다리와 백맥이 원활하게 유통되어 달라붙거나 막히는 곳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나의 법을 전수할 수 있다.”(學太極拳,爲入道之基,入道以養心定性,聚氣斂神爲主。故習此拳,亦須如此。若心不能安,性即擾之。氣不外聚,神必亂之。心性不相接,神氣不相交,則全身之四體百脈,莫不盡死。雖依勢作用,法無效也。欲求安心定性,斂神聚氣,則打坐之舉不可缺,而行功之法不可廢矣。學者須於動靜之中尋太極之益,於八卦、五行之中求生克之理,然後混七二之數,渾然成無極。心性神氣,相隨作用,則心安性定,神斂氣聚,一身中之太極成,陰陽交,動靜合,全身之四體百脈周流通暢,不粘不滯,斯可以傳吾法矣。)

(《태극권을 배우려면 반드시 신을 수렴하고 기를 모아야 한다는 주장》)

장삼풍은 《대단시팔수서시무당도실시제제자(大丹詩八首書武當道室示諸弟子)-대단시 8수를 무당도실에 적어 여러 제자들에게 보이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真)을 찾으려면 허무의 규를 알아야 하니
공부는 오직 뜻이 이르는 곳에 달렸네.
순역(順逆)을 왕래하며 음양을 연마하니
감리(坎離)의 오르내림 전도되어 있구나.
황홀하고 황홀한 가운데 태극이 생기고
아득하고 어두운 가운데 영아가 나오네.
현빈(玄牝)에 들고남은 자연에서 말미암으니
없는 듯 있는 듯 하는 가운데 단조(壇灶)를 지키네.

尋真要識虛無竅(심진요식허무규)
功夫只在意所到(공부지재의소도)
往來順逆煉陰陽(왕래순역연음양)
升降坎離在顛倒(승강감리재전도)
恍恍惚惚太極生(황황홀홀태극생)
杳杳冥冥嬰兒兆(묘묘명명영아조)
出玄入牝由自然(출현입빈유자연)
若忘若存守壇灶(약망약존수단조)

순역(順逆)을 왕래하며 음양을 연마하니 무심한 가운데 태극이 생기고 이에 아득하고 어두운 가운데 원영(元嬰)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바로 수도자의 진신(眞身)이다.

인생은 태극과 음양의 사이에 존재하는데 장삼풍은 심오한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태극이 사람 몸의 체내에서 형성되는 기제와 이치를 사람들에게 드러내 태극권과 연단(煉丹)의 관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후인들은 그의 저작을 가리켜 태극연단비결(太極煉丹秘訣)이라 부른다.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node/154926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3장 도로 음양을 관통하고 건곤이 태극을 운행

장삼풍이 드러낸 것은 보다 높은 우주관으로 당시 세간의 유(儒), 석(釋), 도(道) 각 가를 훨씬 초월해 대명(大明) 왕조에 도를 숭상하는 현풍(玄風)을 불러일으켰다. 장삼풍은 “귀하거나 천하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음을 막론하고 또 노소를 막론하고 오직 평소 음덕(陰德)을 행하고 인자하고 자비하며 충성스럽고 효도하며 진실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된다. 인도(人道)에 완전하면 선도(仙道)는 자연히 멀지 않다.(不拘貴賤賢愚、老衰少壯,只要素行陰德,仁慈悲憫,忠孝信誠。全於人道,仙道自然不遠也)”(《대도론》)고 했다.

하지만 인간세상은 미혹의 세계다. 노자는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하며(天得一以清,地得一以寧)”라고 했다. 노자가 은거한 지 2천 년이 지나 장삼풍은 《등천지미설(登天指迷說)》에서 “사람 몸의 조화는 천지와 같지만 하늘은 어째서 하나를 얻어 맑아지고 땅은 어째서 하나를 얻어 편안해짐을 모르는가? 또 조화를 주재하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는가?”라고 말했다.

생사를 초월하는 대법정도(大法正道)를 찾기 위해 장삼풍은 집을 버리고 벼슬을 내려놓고 장장 35년에 걸쳐 온갖 고생을 겪었다. 전국의 명산고찰을 두루 찾아다니다 고희가 되어서야 비로소 대도를 듣게 되었다. 장삼풍은 수도(修道)의 어려움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큰 자비심을 내어 태극권(太極拳)을 창립했다. 태극이란 만물의 어머니로 장삼풍의 태극권은 대도의 천기를 내포하고 있어 만물을 초월해 신의 영역과 직접 통할 수 있다.

태극권은 천백 년간 형성된 사람의 관념을 단번에 타파했으니 바로 눈으로 보는 것이 실제가 아니다. 태극권 동작은 완(緩 느리고), 만(慢 완만하며), 원(圓 둥글어)해서 겉으로 보면 주먹이나 발차기 모두 몹시 느려 보이지만 오히려 상대방을 아주 빠르게 가격할 수 있다. 태극권의 매 초식에는 모두 현기(玄機)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이쪽에서 아무리 빠르다 해도 다른 공간에서 그의 손만큼 빠르지 못하다.

장삼풍은 고희의 나이에 “홀로 백여 명의 적을 죽였다”고 하여 힘으로 이긴 게 아님을 분명히 했다. 태극권은 사람들에게 육안으로 보는 것의 제한성을 인식하게 했다. 빠르고 늦은 개념, 정(靜)과 동(動)의 개념, 크거나 작은 개념은 모두 진짜가 아니다. 진정한 힘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동시에 같은 곳에 존재하는데 옛사람들은 이를 내공(內功) 또는 내력(內力)이라고 불렀다. 진정한 공부(功夫 쿵푸)는 안에서 유래하며 태극권은 내가공부(內家功夫)의 선구를 열어주었으며 정묘하고 절륜하다.

1. 독보천하(獨步天下)

5천년 중국역사라는 큰 연극에서 무(武)에는 독특한 문화 내함(內涵)이 주입되었다. 무력으로 천하를 정벌한 세월 속에서 많은 영웅호걸이 풍류를 남김없이 드러냈는데 몸에 좋은 무예를 갖추자면 비범한 체력이 필요했다. 발군의 무예를 지는 대부분의 영웅호걸은 천부적으로 태어나는데, 예를 들면 “키가 팔 척이 넘고 힘은 솥을 들어 올릴 수 있는”(《사기‧항우본기》)서초패왕 항우(項羽)나 “나면서부터 신력(神力)을 지녀 약관이 되기 전에 삼백 근의 활과 8석의 쇠뇌(弩)를 당긴” 항금(抗金)영웅 악비(岳飛) 등이 그렇다.(《송사‧악비전》)

장삼풍의 시대에 오면 무술에는 이미 다양한 문파가 형성되어 중토에서 널리 유전되었다. 천하에 이름을 떨친 소림사 안에서도 각종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무술문파들이 유전되었다. 13곤승(棍僧 곤봉을 무기로 쓰는 승려)이 당왕(唐王 역주: 당나라 무덕 3년 이세민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소림사 무술 승려들의 도움으로 강적 두건충의 부하를 제압한 적이 있다.)을 구했기 때문에 소림무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중 소림권(少林拳)은 주먹을 사용할 때 힘으로 신속하고 맹렬하게 하여 기세는 크지만 초식은 가라앉는다(勢大招沉). 마치 광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것과 같아서 손발이 화살 같고 바람소리만 “휙휙” 들릴 뿐이다.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의 대학자 황종희(黃宗羲)는 《왕정남묘지명(王征南墓志銘)》에서 “소림권은 용맹으로 천하에 이름을 얻었지만 주로 사람을 타격하는 것을 위주로 했고 사람들 역시 여기에 편승했다. 소위 내가(內家)란 정(靜)으로 동(動)을 제압하는 것이니 공격자의 손이 들어오는 것에 상응해 적을 넘어뜨린다. 때문에 소림 외가(外家)와는 다르며 모두 송나라 때 장삼풍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했다.

《장삼풍전집(張三豐全集)》에서는 “권법의 용맹한 기예는 소림을 외가(外家)로 하고 무당 장삼풍을 내가(內家)로 한다. 삼풍 이후에는 관중(關中 지금의 섬서 일대) 사람 왕종(王宗)이 있었는데 왕종이 온주(溫州)의 진주동(陳州同)에게 전수했다. 진주동은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의 사람이다. 이에 오늘날 양가(兩家)의 전승이 절동(浙東)에서 성행했다. 청나라 순치(順治) 연간에 왕래함(王來咸 자가 정남征南)이 가장 유명했는데 은(鄞 지금의 절강성 영보 인근)사람이다.”라고 했다.

장삼풍이 무당산을 떠난 후 태극권이 민간에 유입되었고 2백년 후에야 비로소 장삼풍이 내가권을 창립했다는 문자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정남은 내가권 전수자의 하나로 만년에 황종희를 알게 되어 서로 좋은 벗이 되었다. 그는 평생 제자를 받는데 아주 엄격해서 내가권의 진수는 단지 황종희의 아들인 황백가(黃百家)에게만 전수했다.

황백가는 《내권가법(內拳家法)》에서 장삼풍이 소림 공부(功夫)에 정통했지만 소림권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권법을 창조해 내가(內家)라고 불렀는데 “그 하나둘만 얻어도 소림을 이기는데 충분하다.(得其一二者,足以勝少林)”고 했다. 이에 무학(武學)에서 처음으로 내가와 외가가 나뉘기 시작했고 외가는 소림을 으뜸으로 치고 내가는 무당을 존숭하게 되었다.

“장삼풍은 이미 소림에 정통했지만 다시 이를 뒤집어 내가라 했다. 그 하나나 둘만 얻어도 족히 소림을 이길 수 있다.(張三豐既精於少林,複從而翻之,是名內家。得其一二者,足以勝少林)”(황백가 《내권가법》)

한편 청나라 가정 연간의 《영파부지(寧波府志)》에는 장송계(張松溪)의 신기한 무공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스스로 장삼풍을 본받은 거라고 했다.

장송계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신중해서 마치 유생과 같았으며 체격이 마르고 약해 겉보기엔 옷 무게조차 감당하기 힘들어보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음을 알고 그를 불러 시험해보려 했으나 그는 늘 겸손히 물러나곤 했다. 당시 소림승려가 소림권의 용맹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일본 강도가 나타났다. 지방 관아에서 소림승려들을 모집해 일본강도를 공격하게 했다. 소림승려가 장송계에 관한 소문을 듣고 만나기를 청했지만 송계는 모습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한번은 송계가 여러 승려들이 무술을 연습하는 것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웃으며 나타났다. 소림승려는 그가 장송계임을 알고 시합을 요구했다. 송계가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정 무술을 겨루고 싶다면 향리(鄕吏 지방관)를 증인으로 세워 설령 시합 도중 죽더라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노라고 약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소림승려가 이에 동의하자 송계는 팔짱을 끼고 앉았다. 한 승려가 도약하며 비각(飛腳 역주: 모둠발차기로 양발을 동시에 머리 높이까지 올려 차는 것.)을 날리자 송계는 몸을 약간 옆으로 굽히면서 손을 들어 맞섰다. 그러자 승려가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누각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고 겨우 숨만 남았다. 여러 승려들이 깜짝 놀랐고 진심으로 탄복했다.

장송계 고향에서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젊은이들은 늘 그와 시합을 하려 했다. 한번은 젊은이 몇 명이 성(城)안 한 지역을 막아놓고 송계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오늘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으니 반드시 우리와 시합을 하셔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된 송계가 그들에게 수백 근 가량 나가는 큰 돌을 한곳에 모아놓게 하자 그들은 끙끙거리며 3개의 큰 돌을 한곳에 쌓아놓았다. 송계가 “나는 쓸모없는 칠십 노인에 불과하니 자네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겠군.” 하면서 왼손 손날을 들어 가르자 세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의 신기한 능력이 이와 같았다.

또 왕정남(王征南)이 있었다. 그는 사람됨이 아주 기민하고 눈치가 빨라서 태극권을 배운 후에는 결코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몹시 곤란한 지경에 처하지 않는다면 결코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왕정남묘지명(王征南墓志銘)》에는 그가 태극권을 이용해 적을 물리친 2가지 일화가 나온다.

왕정남이 일찍이 군대에 들어간 적이 있다. 한번은 밤에 정찰을 나갔다가 적에게 체포되어 어느 복도 기둥에 뒤로 결박당해 있었다. 수십 명이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 정남이 사기조각을 하나 집어 몰래 밧줄을 끊었다. 가슴에서 은냥을 꺼내 공중에 던지자 지키던 병사들이 돈을 줍기 위해 앞을 다퉈 달려들었다. 이 틈을 타서 정남이 탈출하자 수십 명의 간수들이 급하게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바닥에 뻗어버렸다.

또 한번은 정남이 혼자 밤에 길을 가는데 우연히 7~8명의 탈영병을 만났다. 그들은 왕정남을 붙잡고는 등에 무거운 물건을 지게 했다. 정남이 애걸하며 봐달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정남이 다리를 건너다 등에 진 무거운 물건을 버리자 병사들이 칼을 꺼내 정남을 찌르려했다. 정남은 맨손이었지만 순식간에 병사들이 땅에 쓰러졌고 쨍그랑하고 칼이 땅에 떨어졌다. 왕정남은 결국 그들의 칼을 가져다 모두 우물 속에 던져버렸다. 탈영병들이 칼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왕정남은 자신의 기예를 황종희의 아들 황백가에게만 전수했다. 나중에 황백가는 자신의 기예를 전수할 도제를 찾지 못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내가 정남 선생님의 기예를 저버렸구나. 이 기예는 이제 광릉산(廣陵散)이 되어버렸도다.”

역주: 광릉산(廣陵山) 위진 시대 죽림칠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혜강(嵇康)이 기인의 전수를 받아 혼자만 연주할 수 있었던 거문고 연주곡의 이름이다. 나중에 혜강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에 처해지면서 실전되었다. 이후 광릉산은 전수자를 찾지 못하고 실전된 기예(技藝)의 대명사로 쓰인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901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6. 정(正)과 사(邪)를 분명히 하다

유석도(儒釋道)의 다툼과 상호 비방은 사람들로 하여금 삼교(三敎)의 이론 형식에 대해 추구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삼교 역시 상호 침투해 사람들로 하여금 수련의 초심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장삼풍은 《정교편(正教篇)》에서 사실 삼교가 아니라 오직 양교(兩教) 다시 말해 하나의 정교와 하나의 사교(一正一邪)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표면형식을 중시하지 말고 그 실질적인 작용이 어떠한가를 중시해야 한다.

“고금에 삼교란 없고 양교가 있다. 어떤 것이 양교인가 바로 정(正)과 사(邪)다.”

(古今有兩教,無三教。奚有兩教:曰正,曰邪)(《정교편》)

“공자는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함부로 장담하지 않았고 고집을 피우거나 자기만을 내세우지 않았다(毋意,毋必,毋固,毋我).’ 노자는 ‘혼백을 싣고 하나를 껴안는다(載營魄抱一)’고 했으며 석가모니는 공(空)을 말했다. 형식적으로는 셋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모두 자신을 수련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모두 정교(正敎)의 범주에 속한다.”(孔子講“毋意,毋必,毋固,毋我”,老子講“載營魄抱一”,釋迦牟尼講空,形式上有三,實質都講修自己,修己利人,都屬正教範疇)(《정교편》)

“공자가 네 가지를 하지 않은 것과 노자가 하나를 껴안은 것 및 석가모니가 다섯 가지가 모두 공하다고 한 것은 모두 자신을 닦는 것이다. 공자가 백성을 사랑하고 노자가 세상을 제도하고 석가모니가 고통에서 구원함은 모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자신을 닦고 남을 이롭게 하니 그 귀추는 하나이다.”(孔之絕四,老之抱一,牟尼之空五,皆修己也;孔之仁民,老之濟世,牟尼之救苦,皆利人也。修己利人,其趨一也) (《정교편》)

“공자 노자 석가모니는 모두 옛 성인이다. 성인의 가르침은 바름(正)을 교로 한다.(孔、老、牟尼,皆古聖人。聖人之教,以正爲教)”(《정교편》)

“유가의 양주(楊朱)와 묵적(墨翟), 도가의 방사(方士), 불가의 요승(妖僧 요사한 승려) 역시 삼교이다. 비록 삼교로 나누지만 여전히 하나의 사(邪)다. 그러므로 삼교를 나누는 자는 어리석고 사(邪)와 정(正)으로 나누는 자는 지혜롭다.”(《정교편》)

즉 유가의 남우(濫竽 역주: 실력도 없이 지위만 차지하는 자), 도가의 방사, 불문의 요승 역시 삼교에 속하지만 오히려 모두 사교에 속한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자는 실질을 보지만 세인들은 삼교로 나눈다.

“대개 이름으로 나누고 실질을 살피지 않으며 형태로 나누고 이치는 따지지 않는다.(蓋以名分,不察實也,抑以形分,不按理也)”(《정교편》)

도를 얻은 선가(仙家)를 두루 살펴보면 “모두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꼈다.” “삼천공행(三千功行)은 사람을 구제하고 세상을 이롭게 함을 우선적인 바탕으로 하며 24명의 효자 중 오맹(吳猛)과 정란(丁蘭)은 모두 선객(仙客 도가 수련자)이다.”(《대도론》)

옛날의 현인들은 “충효(忠孝)를 두루 갖추고 인의(人義)를 널리 베풀었으며 남몰래 방편으로 묵묵히 음공(陰功 역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공덕)을 쌓았다. 오직 죽고 사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며 명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낮에는 생각을 적게 해 근심을 없애고 밤에는 마음을 청정히 하여 욕심을 비웠다. 이로써 신(神)을 완전케 하고 기(炁)를 충만하게 하여 골수가 가득차고 정(精)이 충만하게 했다.”(忠孝兩全,仁義博施,暗行方便,默積陰功,但以死生爲念,不以名利關心,日則少慮無思,夜則清心寡欲,以此神全氣壯,髓滿精盈)(《대도론》)

“나는 후인이 이 바른 도를 닦길 원하기 때문에 직언한다. 수도(修道)는 수신(修身)을 중시하지만 수신에는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뜻을 성실히(誠意) 함이 우선이다. 뜻이 성실해지고 마음이 바르게 되면 물욕이 모두 사라지는데 그런 후에야 기초를 세우는 근본을 말할 수 있다.”(吾願後之人修此正道,故直言之。修道以修身爲大,然修身必先正心誠意。意誠心正,則物欲皆除,然後講立基之本)(《대도론》)

장삼풍은 여기서 수도하려면 반드시 먼저 수신해야 하며 수신에는 반드시 정심(正心)성의(誠意)를 먼저 해야 한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이는 중화문화 외유내도(外儒內道)의 정수이자 천기(天機)를 남김없이 드러낸 것이다.

7. 저자에 은거해 수심연성(修心煉性)

역사적으로 정교(正敎)는 모두 수심(修心 마음 닦음)을 강조하는데 장삼풍은 특히 속세 속에서 수심연성(修心煉性)하라고 주장했다. 속세에서 마음을 닦으면 수련이 빠르고 착실해진다. 하지만 과거 불도(佛道)의 출가하는 수련형식은 가장 나쁜 환경 속에서 직접 고험하고 심성을 제고하는데 적합하지 않은 수련방법이며 또 가장 사악한 환경 속에서 오직 사람마음만을 보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르는 시비와 선악표준을 똑똑히 분별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장삼풍은 덕(德)을 쌓고 선(善)을 행하며 몸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수련의 근본임을 강조했다.

“귀하거나 천하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를 막론하고 노소를 막론하고 오직 평소 음덕을 행하고 인자한 자비심으로 충효신성(忠孝信誠)해야 한다. 인도(人道)를 완전히 한다면 선도(仙道)는 자연히 멀지 않다.(不拘貴賤賢愚、老衰少壯,只要素行陰德,仁慈悲憫,忠孝信誠。全於人道,仙道自然不遠也)”(《대도론》)

“사람이 심신을 바르게 닦을 수 있다면 진정(眞情)과 진신(眞神)이 그 가운데 모이고 큰 재주와 큰 덕이 그 속에서 나온다.(人能修正身心,則真精真神聚其中,大才大德出其中)”(《대도론》)

수련인은 내심에서 표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법리에 확고해야 한다.

“밖으로는 인륜을 극진히 하는 것이 그 이치요 안으로는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 그 이치다.(則外盡倫常者其理,內盡慎獨者其理)”(《대도론》)

“충효우공(忠孝友恭)이 안을 충실히 하면 그 빛이 드러남이 밖에 있는 것이고, 희로애락이 겉으로 드러나지만 그 발동하지 않음을 지키는 것이 안에 있는 것이다.(忠孝友恭,衷乎內也,然著其光輝,則在外也;喜怒哀樂,見於外也,然守其未發,則在內也)”(《대도론》)

즉 내재적인 공부가 잘 닦아지면 외재적인 공부 역시 자연히 이뤄지게 된다는 뜻이다.

또 참을 수 있어(能忍)야지만 수련이 비로소 승화할 수 있다.

“함양 속에 큰 학문이 있고 화평하게 거처함에 진짜 성정(性情)이 있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남들이 포용할 수 없는 것을 포용해야 하고 남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마음을 닦을수록 더욱 고요해지고 성(性)이 커질수록 더욱 순수해진다.”(涵養中有大學問,和平處有真性情。諸子須要容人之所不能容,忍人之所不能忍,則心修愈靜,性大愈純)(《수석한담(水石閑談)》)

한편 수련이란 유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지만 또 무위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무릇 공부를 시작하려면 유위(有爲)에 집착해선 안 된다. 유위는 모두 후천(後天)인데 오늘날 도문(道門)에 이런 폐단이 많기 때문에 세상에 진(真)을 온전히 지니는 자가 드물다. 또한 무위(無爲)에 집착하지도 말아야 한다. 무위는 공(空)을 고집함에 떨어지기 쉬운데 오늘날 석문(釋門)에 이런 폐단이 많기 때문에 천하에 진정한 불자(佛子)가 적다. 이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는 도(道)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처음 단계에서 하는 공부는 세속의 정(情)과 연(緣)을 끊고 잡념을 제거하는데 있다. 잡념을 제거함이 가장 먼저 착수하는 축기(築基)와 연기(煉己)의 공부다. 사람마음이 제거되면 하늘마음(天心)이 회복되고 인욕(人欲)이 청정해지면 천리(天理)는 늘 존재한다.”(夫功夫下手,不可執於有爲,有爲都是後天,今之道門,多流此弊,故世間罕全真;亦不可著於無爲,無爲便落頑空,今之釋門,多中此弊,故天下少佛子。此道之不行,由於道之不明也。初功在寂滅情緣,掃除雜念,除雜念是第一著築基煉己之功也。人心既除,則天心來複;人欲既淨,則天理常存)(《현기직강(玄機直講)》)

장삼풍은 수심단욕(修心斷欲 마음을 닦고 욕심을 없애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수련인이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환단(還丹)은 쉽지만 연기(煉己)가 가장 어렵다! 지혜의 검에 의지해 홍몽(鴻濛 우주가 분화되기 이전의 혼돈)을 깨뜨려 쪼개고 천천히 뛰어난 솜씨로 혼돈을 뚫어 통하게 한다.(還丹容易,煉己最難!憑慧劍剖破鴻蒙,舒匠手鑿開混沌)” (《대도론》)

“범부를 벗어나 성인이 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반드시 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아야 하며 온갖 근심을 모두 잊고 실오라기만큼도 마음에 걸림이 없도록 단칼에 관계를 끊어 영원히 타향의 객이 되어야 하며 끝까지 후퇴하거나 후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要超凡入聖,豈是小可的事?必須要一塵不染,萬慮俱忘,絲毫無掛,一刀兩斷,永作他鄉之客,終無退悔之心)(《반환증험설(返還證驗說)》)

장삼풍은 《소경수심(掃境修心)》에서 수련 중에서 천목(天目)으로 무엇을 보았든 수련의 근본을 망각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집착심이 완전히 없어져야만 비로소 반본귀진(返本歸真)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경수심(掃境修心)》

안과 밖의 경치 삼처럼 어지러워
땅에서 말 달리는 일 과장할 만하지만,
손 떼고 미혹되지 않음이 진짜 첩경이고
고개 돌려 반조하면 바로 내 집이라네.
육근(六根)이 청정하면 장애가 없어지고
오온(五蘊)이 공허하면 허물이 끊어지네.
모든 것을 잊으니 방촌(方寸 마음)이 적막하고
한 바퀴 밝은 달이 남화(南華)를 비추누나.

紛紛內外景如麻(분분내외경여마)
有地馳驅事可誇(유지치구사가과)
撒手不迷真捷徑(살수불미진첩경)
回頭返照即吾家(회두반조즉오가)
六根清淨無些障(육근청정무사장)
五蘊虛空絕點瑕(오온허공절점하)
了了忘忘方寸寂(요료망망방촌적)
一輪明月照南華(일륜명월조남화)

장삼풍은 《도정가(道情歌)》에서 수심(修心)이야말로 채약연단(採藥煉丹)의 기초라고 강조했다.

《도정가(道情歌)》--일부

도정가는 한가한 노래가 아니니
이미 천기를 알았다면 소홀히 하지 말라.
먼저 세속의 정일랑 일제히 내려놓고
연후에 도의 이치를 자세히 연구하라.
환단을 연마하기 전에 연성(煉性)이 먼저요
대약(大藥)을 닦기 전에 마음을 닦아야 하네.

마음을 닦으면 단의 정보가 자연히 오리니
성정이 청정해진 후 약재가 생겨나네.

道情非是等閒情(도정비시등한정)
既識天機不可輕(기식천기불가경)
先把世情齊放下(선파세정제방하)
次將道理細研精(차장도리세연정)
未煉還丹先煉性(미련환단선연성)
未修大藥且修心(미수대약자수심)
心修自然丹信至(심수자연단신지)
性清然後藥材生(성정연후약재생)

역주: 도정(道情)이란 창(唱)을 중심으로 하는 곡예(曲藝)의 일종이다. 보통 어고(魚鼓 북의 일종)와 간판(簡板)의 반주에 맞춰 도사(道士)들이 탁발하면서 도교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노래를 말한다. 형식은 우리나라에서 거지들이 구걸하면서 부른 각설이 타령과 유사하지만 사실은 노래 가사의 형식으로 대도(大道)의 천기를 전한 것이다.

8. 선가홍연(仙家汞鉛) 인의(仁義)종자

사람의 심성은 수련자의 공부 및 층차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보다 깊은 층면에서 보자면 심성이 제고되면 늘 음덕(陰德)을 쌓는데 심층 공간에서는 소중한 물질이다. 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仁)과 의(義)가 도가수련에서 필수불가결한 홍(汞 수은)과 연(鉛 납)이다.

“공자는 ‘뜻(志)을 구한다’ 했고 맹자는 ‘뜻을 숭상한다(尚志)’ 했는데 어떤 뜻을 말하는가? 바로 ‘인(仁)’과 ‘의(義)’뿐이다. 인(仁)은 오행에서 목(木)에 속하는데 목 속에 화를 갈무리해 대체로 화육(化育)하고 광명(光明)의 작용을 한다. 그래서 인이라 한다. 의(義)는 오행에서 금(金)에 속하는데 금에서 수를 낳으므로 대체로 제제하고 유통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의라 한다. 선가(仙家)의 연홍(鉛汞)이란 바로 인의의 종자다.”(《대도론》)

“사람들로 하여금 이 도(道) 역시 유도(儒道)이며 수은을 기르고 납을 배양함이 인(仁)에 거처하고 의(義)를 따름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했다.”(使人知此道亦儒道也,養汞培鉛,無異乎居仁由義)(《대도론》)

즉 사람이 인의(仁義)와 음덕(陰德)을 충분히 쌓고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야만 비로소 대도(大道)를 수련할 수 있는 물질을 구비하게 된다.

“금(金)과 목(木)이 서로 아우르고 수(水)와 화(火)가 서로 기른다. 그러므로 일찍이 은거하여 뜻(志 오행의 土)을 구하고 그 뜻을 고상하게 한 후에야 홍연(汞鉛 水火)이 생기고 단도(丹道)가 응결된다. 뜻은 인의홍연(仁義汞鉛)을 포함하며 또 금목수화(金木水火) 사상(四象)을 겸한다. 뜻을 추구하고 숭상하는 자가 성의(誠意)로 하면 의토(意土)가 합해져 오행이 완전해지고 대도의 일이 갖추어진다.”(金木交並,水火交養,故嘗隱居求志,高尚其志,而後汞鉛生,丹道凝。志包仁義汞鉛,而兼金木水火之四象,求之尚之者,誠意爲之,意土合而五行全。大道之事備矣。)(《대도론》)

역주: 오행이론에 따르면 인(仁)은 목(木), 의(義)는 금(金)에 속하며 수은(汞 홍)은 수(水), 납(鉛 연)은 화(火)가 되고 뜻(志나 意)는 토(土)에 속한다. 장삼풍은 도가에서 단도를 연마하는 관건은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닦는 수심(修心)에 있으며 이는 유가에서 중시하는 인의(仁義)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9. 구전심수(口傳心授)

장삼풍은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용렬한 스승을 만나 맹목적으로 닦거나 이치를 제대로 모르고 연마하면 마환(魔幻)을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

“세상에 배우는 자들이 진가(眞假)를 구별하지 못하고 정인(正人)을 만나지 못하니 모두 맹목적으로 수련하는 것이다. 성명(性命)을 착실히 닦는 선비가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책을 보아야 한다. 옛 성인(聖人)의 단서(丹書)에는 한 글자 한 구절도 빈말이나 망언이 없다. 단지 후인이 정(正)과 사(邪)를 모르고 또 성현의 글이 모두 은어와 비유임을 모르면서 용렬한 스승을 만나 방문(旁門)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모두 맹목적으로 수련하는 것이다.”(《복식대단설(服食大丹說)》)

“속세에서 자신을 연마할 수 없고 저자거리에서 적연(積鉛)을 얻지 못하면 기맥(氣脈) 또한 대정(大定)에 들지 못해”(《등천지미설(登天指迷說)》) 맹목적으로 수련하게 되는데 이 경우 심신이 황홀해져 신(神)이 집을 지키지 못하면 음마(陰魔)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음마란 무엇인가?

“진양(眞陽)이 한번 흩어지면 음기(陰氣)가 일을 주관해 밤낮으로 몸속에서 귀신(神鬼)의 해를 당한다. 눈을 뜨나 감으나 귀신이 왕래함을 보고 귀에서도 귀신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는다.”(《등천지미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바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마땅히 조심하고 뜻을 낮춰야 한다. 공(功)을 쌓고 덕행을 누적하며, 마를 만나도 물러서지 말고 비방을 당해도 화내지 말며 도를 중히 여기고 재물을 가벼이 여겨야 한다. 만약 바른 사람을 만나면 뜻을 돈독히 하고 고생스럽게 구해야 한다.”(學者未遇正人時,當小心低意。積功累行,遇魔莫退,遭謗勿嗔,重道輕財;一遇正人,篤志苦求。)(《복식대단설》)

장삼풍은 또 “대도(大道)의 진기(眞機)는 만금(萬金)으로도 바꿀 수 없고 백가지 보배로도 구하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다. (《대도론》)

《타좌가(打坐歌)》--일부

선(仙)이 불(佛)이요 불이 선이로다
일성(一性)이 원명하면 둘이 아니라네.
삼교는 본래 한집안이니
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네.
거짓으로 향 사르고 절하고 참선한다면
대도(大道)가 눈앞에 있음을 어찌 알랴.
혼미해서 소식(素食)하며 잘못을 범해
사람 몸을 잃게 되면 만겁에도 어렵도다.
우매하게 미혹되어 서천 길을 망상하니
애꾸눈이 밤에 깊은 산에 들어감이라.

仙是佛(선시불) 佛是仙(불시선)
一性圓明不二般(일성원명불이반)
三教原來是一家(삼교원래시일가)
饑則吃飯困則眠(기즉흘반곤즉면)
假燒香(가소향) 拜參禪(배참선)
豈知大道在目前(기지대도재목전)
昏迷吃齋錯過了(혼미흘재착과료)
一失人身萬劫難(일실인신만겁난)
愚迷妄想西天路(우미망상서천로)
瞎漢夜走入深山(할한야주입심산)

장삼풍은 《대도론‧하편》에서 “무릇 도가 어찌 방문(旁門)의 작은 기술이겠는가. 바로 지인(至人)이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전수한 것이니 금액환단의 오묘한 도로다.(夫道者,豈是旁門小技,乃至人口傳心授,金液還丹之妙道也。)”라고 지적했다.

또 《청양궁유제도정4수(青羊宮留題道情四首)》에서도 “도(道)를 찾으려면 모름지기 선천(先天)을 찾아야 하는데 선천은 신선이 직접 신선에게 입으로 전한 것이다.(訪道須要訪先天,先天是神仙親口傳神仙)”라고 했다.

당시의 수련공법 중에서 공(功)의 연화(演化)는 모두 단도(丹道)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모두 단을 연마해야 했다. 그러자면 반드시 진정한 사부가 구전심수(口傳心授)해야만 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885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3. 삼교를 총괄하는 대도(大道)

장삼풍의 《대도론(大道論)》은 약 5천자로 높고 깊은 경지를 평이한 언어로 대도의 근원을 설명하고 당시 세간의 유석도(儒釋道)를 초월한 보다 높은 우주관을 명백히 논술했다. 또 천지 사이에서 물질을 생기게 하는 근본원인과 생명의 기원에 대해 논술하고 미혹의 나루를 건너는 방법을 명시했다. 진실로 장삼풍이 말한 것과 같으니 “내 말이 비록 통속적이긴 하지만 의리는 가장 아름다우며 소위 진실하여 헛됨이 없다.”

그는 《대도론‧상편》에서 천지만물을 생기게 하는 것이 ‘도’라며 종지를 분명히 했다.

“무릇 도(道)란 하늘을 낳고, 땅을 낳고, 사람을 낳고, 만물을 낳는 것을 통괄함을 이른다. 음양(陰陽)과 동정(動靜)의 기틀을 머금고 조화(造化)현미(玄微)의 이치를 갖추고 있으며 무극을 통어하고 태극을 낳는다. 무극은 무명(無名)이니 무명이 천지의 시작이다. 태극은 유명(有名)이니 유명은 만물의 어머니다. 무명에서 말미암아 유명이 나오면 하늘을 낳고, 땅을 낳고, 사람을 낳으며 만물을 낳는다.”(夫道者,統生天、生地、生人、生物而名,含陰陽動靜之機,具造化玄微之理,統無極,生太極。無極爲無名,無名者,天地之始;太極爲有名,有名者,萬物之母。因無名而有名,則天生、地生、人生、物生矣。)

여기서 장삼풍이 논술한 대도는 유불도(儒佛道)의 공통적인 근원으로 보다 높은 대도(大道)・대법(大法)이다.

“나 역시 재주는 없지만 일찍이 제자백가를 두루 읽고 삼교의 이치를 종합해 삼교가 모두 이 하나의 도임을 알았다. 유가가 이 도를 떠나면 유(儒)가 될 수 없고 불가가 이 도를 떠나면 부처가 될 수 없으며 선가도 이 도를 떠나면 신선이 될 수 없다. 선가는 특별히 도문(道門)이라 일컫기에 더욱이 도로 자임한다.”(予也不才,竊嘗學覽百家,理綜三教,並知三教之同此一道也。儒離此道不成儒,佛離此道不成佛,仙離此道不成仙,而仙家特稱爲道門,是更以道自任也.)

장삼풍은 당시에 보다 높은 이 도를 널리 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대도론(大道論)은 사람들의 시야경계를 넓혀주었고 나중에 창세주께서 우주대법(宇宙大法)・대도(大道)를 널리 전하기 위한 기초를 다져주었다. 이 대도(大道) 아래에서 유불도(儒佛道) 삼자는 단지 각가(各家)의 장점을 펼친 것에 불과하다.

“유가는 도를 행하여 그 시대를 구하고, 불가는 도를 깨닫고 세상을 깨우치며, 선가는 도를 간직하고 사람을 제도한다.”(儒也者,行通濟時者也;佛也者,悟道覺世者也;仙也者,藏道度人者也.)

“각각 나름의 오묘한 이치를 강론하고 합하여 좋은 점을 강론하면 될 뿐인데 말로 시비를 논할 필요가 무엇인가? 무릇 도란 궁리진성(窮理盡性)하여 명(命)에 이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공자는 드물게 말씀하신 내용에 감췄고 선가는 드러내어 말했지만 비유로 말했다. 글자 모양은 다양하고 도의(道義)가 미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를 따름이다.”(各講各的妙處,合講合的好處,何必口舌是非哉!夫道者,無非窮理盡性以至於命而已矣。孔子隱諸罕言,仙家暢言之,喻言之。字樣多而道義微,故人不知耳。)

또 유석도(儒釋道) 삼교는 모두 태극음양의 법리를 뛰어넘지 못했다.

“한번 음이 되고 한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하며 수도(修道)란 이 음양의 도를 닦는 것이다. 일음(一陰)일양(一陽) 일성(一性)일명(一命)에 불과하다. 《중용》에서는 ‘수도(修道)를 일러 가르침(敎)이라 했다.’ 삼교의 성인은 모두 이 도를 근본으로 그 가르침을 세웠다. 이 도는 성(性)에 근본하고 명(命)에 바탕을 두었다.”(一陰一陽之謂道,修道者修此陰陽之道也。一陰一陽,一性一命而已矣。《中庸》雲:‘修道之謂教。’三教聖人,皆本此道以立其教也。此道原於性、本於命。)

이를 통해 장삼풍은 소위 불도 사이의 논쟁이란 한낱 말다툼에 불과하며 전혀 불필요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각각의 수련법문은 모두 보다 높은 같은 뿌리의 대도(大道)에서 내원해 각각의 수련법문으로 내려간 것이다.

4. 사람몸의 생성

사람의 생명은 우주공간 중에서 생겨나는데 도가에서는 성명쌍수(性命雙修)를 말한다.

그렇다면 성명이란 무엇인가?

장삼풍은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이 낳기 전에 하나의 태허(太虛)가 심원한 근원적 이치[穆]에 깃드는데 이것이 무극(無極)의 때다. 무극은 음(陰)이 고요한데 음이 고요하면 양(陽)도 고요하다. 부모가 생명을 베풀기 시작할 때 한 가닥 영기(靈氣)가 태속에 들어가니 이는 태극의 때다. 태극은 양(陽)이 움직이는데 양이 움직이면 음도 움직인다. 이로부터 음양이 서로 밀치고 강유(剛柔)가 서로 마찰하며 팔괘가 서로 출렁여 건도(乾道)는 남자가 되고 곤도(坤道)는 여자가 된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 교접하는 처음에 남자의 정(精)과 여자의 혈(血)이 뒤섞여 한 물건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신(人身)의 근본이다. 뒤이어 아버지의 정(精)은 신(腎)에 저장되고 어머니의 혈(血)은 심(心)에 저장되어 심과 신의 맥이 이어져 어머니의 호흡에 따라 열 달이 되면 완전한 형태를 이루어 모태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이때 성(性)은 식(識)이 없는 것에 뒤섞여 있으며 또 무극으로 그 신(神)을 잠복케 한다. 명(命)은 생명 있는 것에 의지하면서 또 태극으로 그 기(氣)를 자라게 한다. 기맥(氣脈)이 고요해져 안으로 원신(元神)이 쌓임을 일러 진성(眞性)이라 하고 생각(神思)이 고요한 가운데 원기(元氣)가 자람을 일러 진명(眞命)이라 한다. 혼돈한 상태의 아기 몸이 바로 소위 말하는 천성(天性)천명(天命)이다.”(《대도론(大道論)》)

5. 수신치국(修身治國)과 성인의 도

황제, 요, 순, 우가 중화 자손들에게 신기원을 개창한 이래 도가문화는 중국에서 줄곧 주축이 되어 왔다. 2천년 후 노자는 《도덕경》 5천자를 남겼고 공자는 옛 성인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행동을 닦은 핵심을 정리해 후인들로부터 유가(儒家)로 불렸다. 사람들은 수도(修道)는 청정과 무위를 근본으로 속세를 떠나 은일(隱逸)하는 반면 유가는 세간에 들어가 민생을 관리하고 정치하는 것으로 오인했고 일부 유생들이 불도(佛道) 수련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비방하는 현상이 생겨나기도 했다.

당나라의 한유(韓愈 한퇴지)와 송나라의 주희(朱熹 주자), 이들의 학설은 세간에서 아주 큰 영향력을 지닌다. 장삼풍은 세인들이 오해하는 지점을 분명히 관찰해 인자하게 선을 권고했다.

“당송(唐宋) 이래 한유(韓愈)와 주희(朱熹) 두 현인이 이씨(二氏 역주: 석가와 노자)를 극력 물리치자 여러 대유(大儒)들이 이에 화답했고 많은 소유(少儒)들은 그 찌꺼기를 얻어 끝에 붙으려 했다. 하지만 필경 무엇을 물리친단 말인가? 오히려 세존의 웃음거리가 되고 노자를 길게 탄식하게 했다.”(唐、宋以來,乃有韓、朱二賢,力辟二氏,諸大儒和之,群小儒拾其唾餘,以求附尾,究竟辟著何處?反令世尊含笑,太上長歎。)

주희는 어려서부터 유가와 도가 서적 읽기를 좋아했지만 끝내 진정한 도(道)를 만나지 못했고 불도(佛道)의 기치를 든 소도(小道)와 요승(妖僧)들에게 미혹되었다. 만년에 주희의 학식이 두루 넓어진 후 다시 《주역참동계》를 읽고 깨달음이 많아진 후에야 “선도(仙道)에서 흥미진진한 재미를 보고 있다.”고 했다. 반면 그런 소유(小儒)의 무리들은 쓸데없이 허풍을 떠는 데 불과할 뿐 진정으로 밝은 식견이 없다.

“한유와 주희가 이씨(二氏 불가와 도가)를 배척했지만 배척한 것은 불가도 도가도 아닌 어중간한 자들이며 진정으로 불도(佛道)를 배우는 자를 배척한 게 아니다.”

“또 한유의 집안에 한상자란 신선이 있어 유배 가던 한유가 남관에서 눈 속에 길을 잃었을 때 나타나 길을 인도해준 적이 있으니 아마 오래 전부터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았을 것이다. 주자는 소년시절 일찍이 불가와 도가에 출입한 적이 있다.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잘못된 이씨(二氏) 무리들의 미혹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도가는) 허무하고 황당하며 (불가는) 공적(空寂)하고 아득하다고 의심했을 뿐이다. 하지만 만년에는 학문이 넓어지자 《참동계(參同契)》를 애독했고 아울러 ‘《참동(參同)》의 책들은 본래 《주역(易)》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고 대체로 역을 빌려 나아가고 물러나며 행하고 머무는 절후를 가탁했을 뿐이다.’라고 했다. 또 다른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요즈음은 길을 다닐 때 다른 책은 지니지 않고 《참동계》만을 숙독하는데 선도(仙道)에 흥미진진한 재미가 있다.’고 했다.”(《대도론》)

“무릇 황제와 노자가 전한 것 역시 정심(正心),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이치이니 어찌 이단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아 진정(真精)과 진신(真神)을 그 가운데 모은다면 대재(大才 큰 재주)와 대덕(大德 큰 덕)이 그 속에서 나올 것이다.”(《대도론》)

장삼풍은 ‘황로의 선도(仙道)’와 유가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치가 둘이 아니며 사실은 불교가 동방에 전해지기 전 중토의 선성(先聖)들이 하신 것이라고 했다. 소위 “수도는 수신을 중시한다(修道以修身爲大)”고 하는데 ‘수신(修身)’의 근본문제에서 유가는 고층차에 이르면 도가로 귀속된다.

장삼풍은 사람마다 제갈량(諸葛亮)에게 탄복하는 것을 예로 들어 “제갈량은 남양(南陽)에서 편안히 누워 도를 이루고 세상에 머물다 유비의 촉(蜀)나라를 보좌해 위(魏)나라를 정벌했다. 벼슬길에 나서 백성을 편안히 했으며 임금에 대한 인의(仁義)의 마음은 만세의 귀감이 되었다!”고 했다.

또 유가에서 높이 떠받드는 ‘대장부(大丈夫)’의 이상적 인격에 대해 장삼풍은 “천지처럼 오래 존재하고 해와 달처럼 밝게 비추는 이것이 바로 대장부의 본분(與天地同久,日月同明,此正大丈夫分內事也)”이며 “형(形)과 신(神)이 오묘함을 갖추고 도와 더불어 진(眞)에 합일하는 이것이 대장부가 공을 이루고 이름을 날릴 때이다.(形神俱妙,與道合真。此大丈夫功成名遂之時也)”라고 말했다.

그는 진정한 유가의 ‘대장부’라면 마땅히 생명의 경지가 있어야 함을 명확히 밝혀 명나라 및 후세의 유생들에게 수신(修身)이란 한 가닥 광명한 대도를 알려주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870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2장 감춘 듯 드러나는 대도진기(大道真機)

1. 대도의 연원[大道淵源]

천고(千古) 이래 중화 자손들은 신주대지(神州大地)에서 태어나고 자라왔다. 이곳에는 아주 오래된 전설들이 유전되어 오는데 ‘반고가 천지를 개벽하고’, ‘여와가 사람을 만들고’, ‘여와가 하늘을 수리’했다는 등이다. 또 수많은 신화 이야기가 전해져오는데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한 이야기, 후예(后羿)가 태양을 쏜 이야기, 항아가 달나라로 달아난 이야기 및 세계 각국의 여러 민족들이 앙모하는 유구한 문화인 태극, 하도, 낙서, 주역, 팔괘 등이 있다. 상고의 이런 문명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신이 창조했고 사람은 신이 만들었으며 사람이 생존하는 환경은 신이 개창해 준 것임을 알려준다.

이번 차례 인류 문명의 초기에 상제(上帝)께서는 오제(五帝)에게 서로 이어가며 인간 세상에 내려가 백성들을 교화하게 했다. 청제(青帝)인 태호복희(太皞伏羲)가 가장 먼저 세상에 내려와 천체의 운행규칙을 관찰하고 비로소 성위(星緯)의 글이 생기고 황하에서 용도(龍圖)가 나오고 낙수에서 귀서(龜書)가 나타나 괘를 그리고 책을 만들어 덕과 은혜를 널리 베풀었다.

뒤이어 적제(赤帝)인 염제신농(炎帝神農)이 세상에 내려와 백곡(百穀)을 심고 길러 백성들이 식량을 얻게 했다. 수(水)와 화(火)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조짐이기에 적제(역주: 火에 해당)의 뒤를 이어 현제(玄帝 역주: 水에 해당)가 내려왔다. 현제는 무당산에서 도를 이뤄 하늘로 날아오른(飛昇) 후 요마(妖魔)들을 제압하고 더러운 재앙을 쓸어버렸다.

황제(黃帝)는 중주(中州)에 거처해 온갖 신이 넘어설 수 없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덕을 닦고 큰 덕을 지녀(具修德,有茂德)’ 백관(百官)을 설치하고 집을 건축하고 배와 수레를 만들었다. 또 문자를 일으키고 간지(干支)를 제작했으며 악기를 만들고 의학을 창립해 후세에 무량한 공덕을 세웠다고 한다.

당시 “농부들은 서로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고 어부들은 자리를 다투지 않았으며 시장에선 값을 속이지 않았다. 시장에서는 인색하지 않았고 상인과 여행객이 서로 재물을 양보했으며 바깥문을 닫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은 부드럽고 거짓이 없었으며 평소 일을 하는데 꾸미지 않아 도(道)로 천하를 통일했다. “천하에 이치가 갖춰져 사물의 쓰임이 구비된” 것을 보고 황제는 이에 이산(黟山 지금의 황산)으로 가서 금단(金丹)을 연마했다.

금단 연마가 완성되었을 때 구슬상자, 성대한 의상, 보배로운 관, 진주신발 및 감로와 경장(瓊漿)이 든 옥병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뒤이어 하늘에서 백룡(白龍), 화려한 깃발(彩幡), 진주덮개가 내려왔고 황제는 70여 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휘황한 장거를 직접 목격했으며 후세에까지 전해지며 찬송되었다.

황제 이후 성인(聖人) 요, 순, 우가 대홍수 기간에 세상에 내려와 하늘의 도를 관찰하고 하늘의 운행을 집행해 세간에서 사명을 완수한 후 도를 닦아 원만한 후 하늘로 되돌아갔다.

사람에게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주에는 성주괴멸(成住壞滅)의 법칙이 있다. 삼계(三界) 내의 물질은 모두 음양(陰陽) 양성(兩性)을 지녀 인간세상을 만들 때 선악(善惡)이 공존하고 정(正)과 사(邪)가 서로 관여했다. 요, 순, 우 이후 2천여 년의 번성을 거쳐 춘추시기가 되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이 일어나면서 마(魔)가 세간을 혼란시키고 사람의 사상을 혼란케 했다. 창세주(創世主)께서는 노자(老子)를 파견해 세상에 내려가 도를 전하게 하고, 석가모니는 불법을 전하게 하여 사람들이 덕을 중시하고 선을 행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 중화 자손들의 도덕수준이 상대적으로 안정되게 하셨다.

노자는 사람들에게 《도덕경(道德經)》 오천 자(字)를 남겨 성인(聖人)이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와 덕(德)에 대해 남김없이 설명했다. 성인은 만물을 일으키지만 스스로 크다고 여기지 않으며, 생성하고 길러주지만 자신의 소유로 자처하지 않으며, 베풀어주지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공이 이뤄져도 자신의 공으로 자처하지 않는다. 공에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은 오히려 영원불멸한다.

노자가 붓으로 써낸 성인은 바로 중화자손들의 조상인 황제, 요, 순, 우를 말한다. 노자는 “도를 잃은 후에 덕이 나타났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나타났다. 인을 잃은 후에 의가 나타났고 의를 잃은 후에 예가 나타났다. 무릇 예란 충과 신이 얇아진 것으로 혼란의 시작이다(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라고 했다. 그리고는 서쪽으로 함곡관을 나가 총총히 숨어버렸다.

2. 불(佛)과 도(道)의 경쟁

불교는 중토에 전해 들어온 후 그 보편적인 가치인 자비(慈悲)로 백성들을 교화하고 중원 황제들의 인정을 받아 신속히 전파되었다.

최후에 사람을 제도해 하늘로 돌아가는 창세주의 배치를 믿고, 창세주가 최후에 법을 전하고 도를 전하는 보편적인 형식이 되기 위해 일부 수도자들은 역대로 단독전수(單傳)하던 도가의 전통을 고쳐 널리 문도(門徒)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러 원시천존(元始天尊)을 최고의 신선으로 모시고 노자를 개산비조(開山鼻祖)로 삼으면서 《도덕경》을 떠받드는 도교가 형성되었고 역사적으로 수백 년에 걸쳐 불도(佛道)의 다툼이 나타났다.

남북조 시기부터 여러 차례 도사와 승려들이 불교와 도교 두 종교의 선후를 놓고 논쟁이 나타났다. 변론 중에서 당시 불교와 도교의 여러 폐단들이 폭로되었는데 결론은 불교와 도교 모두 청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북주(北周) 멸불(滅佛)시기에는 “불교와 도교 두 종교를 없애고 경전과 상을 모두 파괴하고 승려와 도사들을 백성으로 환속시켰다.”[당나라 영호덕분(令狐德棻)의 《주서(周書)》]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의 《의사태석리조병계(議沙汰釋李詔並啟)》에 따르면 당시 인구의 절반 가량이 승려와 도사였는데 모두 청정하지 않아 도관과 사찰에 요사한 기운이 가득했다고 한다.

수당(隋唐)시기에 들어와서도 승려와 도사들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당태종은 이 문제에 관해 따로 조서를 반포해 도선불후(道先佛後)의 규정을 정했다.

“노군(老君 노자)의 가르침은 그 뜻이 청허(淸虛)에 있고, 석가가 남긴 가르침은 그 이치가 인과(因果)에 있다. 그 가르침에서 보면 흡인하여 교화한 행적은 다르나, 그 근본에서 보면 널리 이롭게 하는 풍모는 일치한다. 그러나 대도(大道)의 실행은 머나먼 옛날에 비롯된 것이고, 그 기원은 무명(無名)의 시작에서 나왔으며 일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넘어섰다…….

하물며 짐의 조상이 노자에서 일어났음에랴. 이제 새로운 왕조가 극히 번창함은 조상의 은덕에 힘입은 것이고 천하가 크게 안정된 것 또한 무위(無爲)의 공에 의지함이다. 마땅히 제도를 고쳐 이 현화(玄化: 도교의 교화)를 널리 펼쳐야 한다. 앞으로는 재(齋 도교 의식)를 받들어 행하고 호칭에 있어서도 도사(道士)와 여도사(女官)를 승려의 앞에 두게 하라. 근본의 풍속을 널리 확장시켜 구주(九有)에 창달하게 하고 조상의 풍속을 존중해 모든 백성에게 이로움을 주도록 하라.” (《도사와 여관을 승니의 위에 두라는 조서(道士女冠在僧尼之上詔)》)

한편 불교의 밀종(密宗)이 중국에 전해진 후 남녀쌍수(男女雙修)의 수련법이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에 당나라 무종(武宗) ‘회창멸불’ 시기 밀종은 한인 지역에서 제거되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위(魏)나라 이후 불교(像教)가 점차 흥성해졌다. 말세의 혼란한 때에 이런 이국 풍속이 전해져 점차 습속이 되어 만연하게 되었다. 나라의 풍속을 갉아먹는데 이르러도 점차 자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의 뜻을 유혹하고 뭇 사람들을 더 미혹시켰다. 구주(九州)의 산간에서 장안과 낙양에 이르기까지 승려의 무리가 날로 많아지고 불교 사찰이 날로 숭배되고 있다. 토목공사에 많은 인력이 소모되고 금은보화의 장식을 위해 사람들의 돈을 빼앗으며 승려와 신도 관계에서 임금과 부모를 버리고 계율 때문에 배우자를 위배한다. 법을 파괴하고 사람을 해치는 것이 이 도(道 불교)보다 심한 게 없다.”라고 했다.

원나라 헌종(憲宗) 8년(1258년)의 불도(佛道) 대논쟁은 중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규격이 높은 토론회였다. 당시 회의는 쿠빌라이가 직접 주재했고 변론에 참가한 고승과 도사들이 모두 5백여 명에 달했는데 논쟁에서 도교가 크게 패했다. 결국 도사 17명이 칙령으로 도사 자격을 박탈당해 승려가 되었고 노자의 《도덕경》을 제외한 나머지 도가서적 및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 등을 모두 소각시켜 근본을 바로 잡았다.

원나라 때 몽골인들은 장밀(藏密 라마교)을 신봉했다. 불도의 상호다툼은 또 간접적으로 사람이 수련해서 신이 되고 반본귀진(返本歸真)하는 바른 신앙(正信)에 영향을 주었다. 중원 대지에서 사람들은 천고에 유전되어 온 도가(道家)수련 및 신통공능(神通功能)의 관계 및 개념에 대해 미혹되거나 의심에 빠졌다.

송대의 저명한 이학자 정이(程頤)는 당시 사람들이 도를 상실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질문: 신선의 설이 있습니까? 대답 : 어떠한지 모른다. 만약 백일비승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산림에 거처하며 형을 지키고 기를 단련해 연년익수(延年益壽)하는 거라면 있다고 할 수 있다.”(《정씨유서(程氏遺書)》) 이처럼 유명한 이학자 정이마저도 병을 물리치고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는 인정하지만 백일비승은 없다고 했으니 후세에 도(道)에 대한 이해가 미끄러져 내려간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원말명초(元末明初)에 장삼풍은 대도를 이뤄 진인이 되었고 속세를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들어섰다. 나중에 명성조(明成祖) 주체(朱棣 영락제)는 무당산을 대대적으로 수리했고 역사적으로 대명 왕조가 도가문화를 숭상하는 최고봉에 다시 도달하게 했으며 현천상제(玄天上帝)를 주신(主神)으로 하고 장삼풍을 조사(祖師)로 삼는 무당 도가수련법문을 형성했다. 이는 인구의 절반이 넘는 중국인들을 흡인해 향불을 사르고 예배하게 했으며 전성기 때는 집집마다 정(鼎)을 안치하고 단을 연마할 정도였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840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자호를 삼풍이라 하다

장삼풍은 남행에서도 수확이 없자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해 서악 화산(華山)을 거쳐 보계(寶雞)에 이르렀다. 이곳은 산과 못이 맑고 그윽한데다 소나무 숲이 울창해서 조용히 수련하기에 좋은 지방으로 보였다. 이에 “움막을 짓고 발걸음을 멈췄다(結茅聊息足).” 또 산 속의 삼첨산(三尖山 봉우리 3개가 뾰족한 산)을 보니 수려하고 신령한 기운이 하늘꼭대기까지 직접 뻗친 것을 보고 자호를 삼풍(三豐) 또는 삼봉(三丰)이라 했다. 또 전일(全一)이라고도 했는데 그 의미는 “곤토(坤土)의 가운데에 한 가닥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심는다”는 뜻이다. 장삼풍에겐 이외에도 몇 가지 호칭이 더 있는데 《장삼풍전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일찍이 스스로 이르길 나의 명호(名號)가 고금의 사람과 같은 것을 알면 고쳐야만 마음이 편했기 때문에 아득해서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 일명 통(通)이라 하니 이는 우리 파의 오래 전 조상인 고공(高公)의 아들과 이름이 같았다. 일명 금(金)이라 하니 이는 또 다른 파의 오래 전 조상인 한나라 때 대사마(大司馬)와 이름이 같았다. 이 내용은 모두 《유후세가(留侯世家)》에 나온다. 일명 사렴(思廉)이라 하니 원나라 때 옥사생(玉笥生)의 자(字)와 같았다. 일명 현소(玄素)라 하자니 당태종 때 언관과 이름이 같고, 현화(玄化)라 하자니 갈현(葛玄)의 제자와 이름이 같았다. 이에 두 이름에서 하나씩 따서 현현자(玄玄子)라 했다. 또 태상(太上)의 성스런 호칭과 같아 다시 산봉(山峰)으로 바꿨다. 그런데 이 이름 역시 박양자(樸陽子)와 같아 다시 삼봉(三峰)으로 바꿨다. 그래도 또 채전자(采戰者)와 같으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삼봉이란 글자가 전해진 지 오래되어 더는 바꾸고 싶지 않았다. 건괘(乾卦)의 효가 연결된 것을 생각하니 곤괘(坤卦)는 효가 단절되어 순수한 건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생각해 이에 곤토의 가운데에 한 가닥 호연지기를 심어 그 단절을 보완하면 하나가 완전해질 것이다. 앞으로는 마땅히 전일(全一)이라 고쳐 부르고 자를 삼풍(三豐, 三丰)이라 고정한다. 하지만 그 용모가 거칠고 꾸미지 않아 세인들은 나를 장랍타(張邋遢)라 부르니 이는 천고에 독특하고 기이하면서도 유일무이한 이름이다.”

종남산에서 스승을 만나다

원나라 인종(仁宗) 연호(延祜) 원년(1314년) 장삼풍은 67세가 되었다. 삼십 여 년간 도를 찾고 진리를 구했지만 얻지 못했고 몸은 점차 쇠약해져 가는데 망망 천하에서 대체 어디 가서 대도(大道)를 묻는단 말인가? 30여 년 간 명산고찰을 다니는 동안 십만의 황금도 빈 손이 되었고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옷은 헤지고 신도 닳았지만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장삼풍은 향을 사르고 신께 자신의 길을 지시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향이 종남산으로 가서 찾아보라고 예시해주었다. 장삼풍이 신의 계시에 따라 종남산에 올라가니 마침 화룡진인(火龍真人)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삼풍은 만감이 교차하며 너무 늦게 만남을 한탄했다.

장삼풍 《소려제벽(小廬題壁)》--작은 오두막 벽에 쓰다

진창산(보계 학봉산) 아래 도인의 집에는
뽕도 심지 않고 마도 심지 않네.
성도 이름도 숨기고 벽지에 숨어
스스로 나무하고 물 길으며 생애를 보내네.
첩첩의 가파른 돌산 범처럼 버티는데
달팽이 같은 작은 오두막 있네.
기운 굳세고 몸 건장해도 나이가 이미 많아지니
건곤 어느 곳에 단사를 물으리오!

陳倉山下道人家(진창산하도인가)
不種桑田不種麻(부종상전부종마)
埋姓埋名藏僻地(매성매명장벽지)
自薪自汲老生涯(자신자급노생애)
幾重石嶂撐如虎(기중석장탱여호)
一個茅廬小似蝸(일개모려소사와)
氣健身強年已暮(기건신강년이모)
乾坤何處問丹砂(건곤하처문단사)

장삼풍 《서회(書懷)》--마음 속 생각을 쓰다

마음이 당혹스럽고 또 가련하구나
바람 등불 빗속 번개 좋은 시절 핍박하네.
곤륜산에 오르지 못하면 끝내는 귀신이 되리니
어느 곳 구름 봉우리에서 신선을 처음 뵐 수 있으랴.
아홉 번 죽어도 도력을 늘 지니고 있었느나
삼생에 다시 속세 인연 떨어지기 두려워라.
향 피워 종남산 향해 미리 기원하나니
마땅히 진인께서 바위에 앉아계시리라.

心命惶惶亦可憐(심명황황역가련)
風燈雨電逼華年(풍등우전핍화년)
不登浪苑終爲鬼(부등낭원종위귀)
何處雲峰始遇仙(하처운봉시우선)
九死常存擔道力(구사상존담도력)
三生又恐落塵緣(삼생우공낙진연)
瓣香預向終南祝(판향예향종남축)
應有真人坐石邊(응유진인좌석변)

장삼풍 《종남정화룡선생(終南呈火龍先生)》--종남산 정화룡 선생님께 바치며

흰 구름 푸른 아지랑이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이미 신선의 벽옥 병에 이르렀네.
낡은 신발 물리치고 종남산을 찾으니
처음으로 대도(大道)가 천도(天都 장안)에 있음을 보았네.
건곤의 일기를 단실(丹室)에 갈무리하니
일월 두 환(丸)이 적로를 비추는구나.
선생님과의 만남 진실로 늦었으나
가난한 선비 자비롭게 속히 구도해주시길 바라노라.

白雲青靄望中無(백운청애망중무)
已到仙人碧玉壺(이도선인벽옥호)
拼卻茫鞋尋地肺(병각망혜심지폐)
始瞻大道在天都(시첨대도재천도)
乾坤一氣藏丹室(건곤일기장단실)
日月兩丸曜赤爐(일월양환요적로)
實與先生相見晚(실여선생상견만)
慈悲乞早度寒儒(자비걸조도한유)

화룡진인은 종남산에 몸을 숨기고 성명도 숨겨 그의 생애와 내력에 대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신선감(神仙鑒) 역주: 역대 신선들에 관한 기록을 정리한 《역대신선통감(曆代神仙通鑒)을 지칭하는 듯》》에도 단지 그의 호만 전하며 속세를 벗어난 풍모가 있어 세인들은 단지 그가 옛날 신선임을 알뿐이라고 했다. 화룡진인은 칠언절구 한 편을 남겨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가 오직 장삼풍을 제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장삼풍전집‧시담(詩談)》 기화룡선생우음(記火龍先生偶吟)--화룡선생님이 읊으신 시를 기록

도호가 우연히 정화룡과 같으니
성명은 태허 속에 숨겼노라.
스스로 삼풍을 제도한 후
봉래산 약수 동쪽으로 되돌아가리.

道號偶同鄭火龍(도호우동정화룡)
姓名隱在太虛中(성명은재태허중)
自從度得三豐後(자종도득삼풍후)
歸到蓬萊弱水東(귀도봉래약수동)

5. 학을 타고 푸른 하늘로

화룡진인은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온 것을 보자 곧 온 정성으로 이끌어 수도(修道)의 진기(眞機)와 비밀구결을 장삼풍에게 자세히 전해주었다. “소위 말하는 입에서 입으로 서로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서로 전수했다.”(장삼풍 《현요편(玄要篇)》자서) 4년 후 화룡진인은 또 다시 장삼풍에게 단사(丹砂)를 점화하는 구결을 전해주고는 그더러 산을 나가서 수련하라고 명했다.

장삼풍은 눈물을 흘리며 스승과 작별하고 “산을 나와 큰 공 도와줄 도반을 찾으며(出山尋侶助元功)” 수년간 세속에서 섞여 지냈다. 원나라 태정제 갑자년(1324년) 봄 장삼풍이 무당산에 이르렀는데 수련 9년 만에 마침내 대도(大道)를 이뤘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아흔이 가까웠다. 이에 구름과 비 사이에서 모습을 감췄다 드러내며 마음대로 노닐 수 있었다. 소위 “학을 타고 푸른 하늘에 오르는 것이 마치 큰 길을 다니는 것 같고 푸른 바다가 뽕나무밭으로 바뀌도록 내버려두니”, “비로소 이런 출세(出世)의 법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현요편(玄要篇)》 자서)

《출종남이수(出終南二首)》--종남산을 나서며 2수

평생 선을 좋아해 선옹을 찾으며
십만의 황금 뿌려 빈손 되었네.
오묘한 구결 알려주신 지인께 깊이 감사드리며
산을 나와 큰 공 도와줄 도반을 찾네.
도롱이와 삿갓 쓰고 종남산 내려오니
흰 구름 푸른 산에 만상을 담았구나.
언젠가 대단을 단련하게 되면
되돌아와 신선암자에 머리 숙여 절하리라.

生平好善訪仙翁(평생호선방선옹)
十萬黃金撒手空(십만황금살수공)
深謝至人傳妙訣(심사지인전묘결)
出山尋侶助元功(출산심려조원공)
一蓑一笠下終南(일사일립하종남)
雲白山清萬象涵(운백산청만상함)
他日大丹熔煉就(타일대단용련취)
重來稽首拜仙庵(중래계수배선암)

《태화산구점이절(太和山口占二絕)》--태화산에서 읊다(칠언절구 2수)

태화산 위 흰 구름 머무는 곳에서
면벽의 공력 달마처럼 깊었다네.
오늘 도 이루고 도를 논함이 오묘하니
말하자면 부족하나 해보려면 많구나.

太和山上白雲窩(태화산상백운와)
面壁功深似達摩(면벽공심사달마)
今日道成談道妙(금일도성담도묘)
說來不及做來多(설래불급주래다)

구년간 일 없어 시도 짓지 않으며
묵묵히 어리석은 듯 아무것도 모르네.
천하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원컨대 단의 비결 남김없이 전하리라.

九年無事亦無詩(구년무사역무시)
默默昏昏不自知(묵묵혼혼부자지)
天下有人能似我(천하유인능사아)
願拈丹訣盡傳之(원념단결진전지)

“현소(玄素 장삼풍)는 인생의 시간이 짧고 유한하며 부귀가 무상함이 마치 바람 앞의 등불이나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존재하는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는바 예부터 지금까지 모두 그러함을 탄식하며 깊이 경계하며 살피지 않을 수 없었노라. 이에 조석으로 대도(大道)를 바라며 공명과 권세를 버리고 천하를 운유하며 두루 유명한 스승들을 찾아다녔노라. 비록 전수 받은 것은 많았지만 모두 방문(旁門) 소법(小法)으로 실천해도 심신에 유익함이 없었다. 또 여러 단경(丹經)들을 살펴봐도 서로 부합하지 않았고 도(道)와 괴리되었다. 각고의 노력이 헛고생이 되자 지인을 뵙고 내 평생소원을 이룰 수 없음에 불안에 떨었다.

그러다 인종 연우(延佑) 연간에 다행히도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종남산에 들어가자마자 화룡선생님을 만났다. 큰 뜻을 품은 제자인지 물으시는데 푸른 수염과 붉은 얼굴이 그야말로 세상 밖의 신선이셨고 연세가 얼마나 되신 지도 알 수 없었다. 현소가 기이하게 여겨 절을 올리고 스승으로 모신 후 무릎을 꿇고 대도(大道)에 대해 여쭈었다. 자비하신 사부님께선 내 정성을 살펴보신 후 처음에는 연기공부를 알려주시고 다음에 약을 얻는 구결을 전해주셨다. 이후 미세한 화후(火候)와 온양(溫養)의 절도와 탈태신화(脫胎神化) 및 요당허공(了當虛空)의 뜻을 다시 알려주셨다. 어느 하나도 일일이 갖춰주지 않음이 없으시니 진실로 입에서 입으로 서로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서로 받으니 이 도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열 달 만에 공(功)을 이루니 성태(聖胎 역주: 원영을 가리킨다)가 모습을 드러내고 9년 면벽으로 여도합진(與道合真)하니 학을 타고 푸른 하늘에 오르는 것이 마치 큰 길을 다니는 것 같고 푸른 바다가 뽕나무밭으로 바뀌도록 내버려두니 이것이 바로 대장부가 공명(功名)을 이룬 때로다. 비로소 이런 출세(出世)의 법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비록 공벽(拱壁 역주: 귀한 보배)을 지니고 4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탄다 해도 앉아서 이 도에 정진하는 것만 못하도다. 이는 모두 널리 음공(陰功)을 쌓고 덕행을 실천한 후 지인을 만나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현요편(玄要篇)》 자서)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839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4. 진리를 찾아 도를 방문

장삼풍은 《하늘 사다리를 오르다(上天梯)》에서 자신이 반석처럼 굳은 결심으로 속세를 떠나 수도할 뜻을 노래했다.

《하늘 사다리를 오르다(上天梯)》

대원(大元)의 출가 수련자 창처럼 긴 수염 있다네.
하늘사다리 오르는 노래 하늘의 선물로 간주하라.
도를 찾던 처음 되돌아보니 돌이킬 수 없는 마음 돌과 같았네.
관직 버리고 산과 바다 유람하며 고생스레 단의 비밀 찾아다녔네.
돌아가신 부모님 묘도 버리고 고향 산도 남기지 않았네.
중년의 처와 이별하고 이른 새벽 문을 나서
어린 아들마저 버리고 고개 돌려 집을 떠났네.
사람들이 끝내기 어려운 것을 수행인은 이미 끝냈고
사람들이 자르기 어려운 것을 수행인은 모두 자를 수 있네.
장생과를 증득하고 싶어 신선되어 선학을 타네.
후천 배양 든든해 두 발은 멀리 다닐 수 있건만
내 마음 가로막는 근심 흐르는 세월이 너무 빨라서
고개 들어 종남산 바라보며 하늘 향해 길게 탄식하누나!

大元飄遠客(대원표원객) 拂拂髯如戟(불불염여극)
一曲上天梯(일곡상천제) 可當飛空錫(가당비공석)
回思訪道初(회사방도초) 不轉心如石(부전심여석)
棄官遊海嶽(기관유해악) 辛苦尋丹秘(신고심단비)
舍我亡親墓(사아망친묘) 鄉山留不得(향산유부득)
別我中年婦(별아중년부) 出門天始白(출문천시백)
舍我丱角兒(사아관각아) 掉頭離火宅(도두이화택)
人所難畢者(인소난필자) 行人已做畢(행인이주필)
人所難割者(인소난할자) 行人皆能割(행인개능할)
欲證長生果(욕증장생과) 沖舉乘仙鶴(충거승선학)
後天培養堅(후천배양견) 兩足邁於役(양족매어역)
悠悠摧我心(유유최아심) 流年駒過隙(유년구과극)
翹首終南山(교수종남산) 對天三歎息(대천삼탄식)

장삼풍은 요양의 고향집을 떠나 태항산(太行山)을 목표로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전에 근무했던 하북을 지나며 느낀 무한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장삼품 《32세북유(三十二歲北遊)--32세에 북에서 노닐다》

유주와 기주를 다시 오니 감개를 잊었는데
관복 대신 도인의 행장이로다
내일 아침 검을 차고 거문고 메고 떠나
서산에 올라가 태항산을 바라보리라.

幽冀重來感慨忘(유기중래감개망)
烏紗改作道人裝(오사개작도인장)
明朝佩劍攜琴去(명조패검휴금거)
卻上西山望太行(각상서산망태항)

항산에서 필묘(畢昴)에 응하다

장삼풍이 검과 거문고를 지니고 태항산맥을 경유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도가의 동천복지 중 하나인 항산(恒山)이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도가 팔선(八仙)의 하나인 장과로(張果老)가 바로 항산에 은거한 채 수련했고 수많은 자취와 유적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유명한 현공사(懸空寺)는 항산 금룡협(金龍峽) 서측 취병봉(翠屏峰) 절벽에 매달려 있다. 현공사는 북위(北魏) 효문제 태화(太和) 15년(491년)에 건립되었다. 위로는 위태로운 바위가 있고 아래로는 깊은 계곡이 있으며 중간에 누각이 공중에 매달린 기이하고 오묘한 구조는 가히 세계일절(世界一絕)이라 할 수 있다.

우주 천지만물에는 대응관계가 있다. 지상의 산은 천상의 별에 대응하며 천상의 별은 또한 천신(天神)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때문에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에서는 “하늘의 도를 살펴 하늘의 운행을 조종할 수 있다면 다 된 것이다.(觀天之道,執天之行,盡矣)”라고 했으며 중국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천문관측을 중시했다. 필성(畢星)과 묘성(昴星)은 고대 28수 중의 두 별이다. 장삼풍은 항산이 천상에서 필성과 묘성의 정(精)과 대응되는 도가 동천복지의 하나라고 말했다.

장삼풍《항악(恒嶽)》

필묘의 정이 응결된 곳
항산은 기상이 높아라!
등 넝쿨 절벽을 당기고
송백은 파도처럼 울부짖네.
북녘 들판 어찌나 광활한지
신령한 바람 성난 듯 울부짖네.
선령 위에 지은 오두막에서
바라보면 호방한 흥이 이누나.”
畢昴精凝處(필묘정응처)
恒山氣象高(항산기상고)
藤蘿牽絕壁(등라견절벽)
松柏吼飛濤(송백후비도)
朔野何空闊(삭야하공활)
靈風乃怒號(영풍내노호)
結廬仙嶺上(결로선령상)
望裏興飛豪(망리흥비호)

장삼풍은 선령 위에 오두막을 짓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를 찾았다. 그러나 장장 16년이 흘렀음에도 대도(大道)를 만나지 못했다. 장삼풍은 《유유가(悠悠歌)》 한 수를 남겨 짧은 인생과 진정한 도를 찾기 어려움을 탄식했다.

《유유가(悠悠歌)》

유유한 노래여 유유한 노래여
48년을 헛살았도다.
인생 수명이 얼마나 되랴!
항산을 16년간 지켜왔건만
연(燕)과 조(趙)를 왕래한 게 쓸모없게 되었구나.
차라리 거문고와 칼 들고 삿갓에 도롱이 쓰고
동쪽 봉래로 가서 도가를 불렀더라면.

悠悠歌(유유가) 悠悠歌(유유가)
四十八歲空銷磨(사십팔세공소마)
人生壽命能幾何(인생수명능기하)
株守恒山十六載(주수항산십육재)
燕趙往來成逝波(연조왕래성서파)
到不如攜琴劍整笠蓑(도불여휴금검정립사)
東走蓬萊唱道歌(동주봉래창도가)

봉래선산(蓬萊仙山)

장삼풍은 이에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옛날 제나라와 노나라 지역(지금의 산동성)에 가서 신선세계를 찾아보기로 했다.

《동유(東遊)》--동쪽에서 노닐다

이 몸이 오랫동안 물과 구름 사이에 처하여
제로에서 맘껏 노니 흥이 절로 한가하다.
방곤(신선의 산)과 원교 찾아가 손님이 되고파라
예부터 신선은 삼신산에 살았노라.

此身長放水雲間(차신장방수운간)
齊魯遨遊興自閑(제로오유흥자한)
欲訪方壼圓嶠客(욕방방곤원교객)
神仙萬古住三山(신선만고주삼산)

《일관조기관일(日觀早起觀日)》--일관에서 일찍 일어나 해를 보다

하늘 닭이 한번 우니 바다문이 열리고
태양은 파도를 타고 바다에서 나오네.
만 리에 붉은 빛 끊이지 않는데
삼신산 정상이 푸른 언덕 되었네.
멀리 생황소리 들리고 공중에서 학이 내려오니
바라보니 구름용이 비를 싣고 돌아오네.
따로 나는 신선 있어 사슴을 거느리니
목 빼고 봉래산을 바라보게 하노라.

天雞一唱海門開(천계일창해문개)
日湧波濤出海來(일용파도출해래)
萬里眼光紅不斷(만리안광홍부단)
三山頭腦綠成堆(삼산두뇌녹성퇴)
遙聞笙鶴從空降(요문생학종공강)
只見雲龍帶雨回(지견운룡대우회)
別有飛仙揮鹿麈(별유비선휘록주)
令人企首望蓬萊(영인기수망봉래)

이 시에서 말하는 방곤(方壼)과 원교는 전설에 나오는 발해의 신산(神山)이다. 《열자(列子)‧탕문(湯問)》에는 “발해의 동쪽에 다섯 산이 있는데 첫째는 대여(岱輿), 둘째는 원교(員嶠), 셋째는 방곤(方壼), 넷째는 영주(瀛洲), 다섯째가 봉래(蓬萊)다.”라고 했다. 나중에 대여와 원교가 깊은 바다에 가라앉고 오직 방곤, 봉래, 영주 삼신산만 남았다. 삼신산은 신선이 거처하는 곳으로 궁전은 모두 금과 옥으로 만들어졌고 산에 나는 꽃과 과일은 달콤하기 그지없으며 이를 먹으면 장생불로한다. 역사상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사람을 파견해 선약을 찾게 했다.

《사기‧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이 서불(徐巿)을 바다로 보내 신선을 찾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나라 사람 서불 등이 상서를 올려 바닷속에 삼신산이 있으니 이름이 봉래, 방장, 영주라 하며 신선이 거주합니다. 청컨대 재계하시고 동남동녀와 함께 구하게 하십시오. 이에 서불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에 들어가 신선을 찾게 했다.”

《사기‧봉선서(封禪書)》에는 한무제가 방사를 바다로 보내 신선을 찾게 한 기록이 있다.

“소군이 주상에게 아뢰길 ‘……신이 일찍이 발해에서 노닐다 안기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안기생은 참외처럼 큰 대추를 먹었습니다. 안기생은 신선으로 봉래 가운데를 통할 수 있습니다. 만약 황상께서 그와 의기가 합하면 나타나겠지만 합하지 않으면 모습을 감출 것입니다.’ 이에 천자가 친히 부엌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방사를 바다로 보내 봉래의 안기생과 같은 무리를 찾게 했다.”

해상의 선산 노산(嶗山)이 장삼풍의 발걸음을 멈추게 해 장삼풍이 이곳에 머물러 수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장삼풍은 봉래각(蓬萊閣)에 올라가 멀리 선경(仙境)을 조망하며 속으로 마음이 아득해졌다.

장삼풍 《단암산(丹岩山)》

단암산 정상 봉래각
봉래산 바라볼 수 있지만 다가갈 순 없네.
하늘 바람 바닷물 가슴을 흔들고
푸른 파도는 저절로 열고 닫네.
내가 동모에 오니 눈앞이 텅 비고
시정이 영웅처럼 호방해지누나.
아침 햇살 저 멀리 부상 위로 나오니
누대 각종 금은보배로 장식된 신선의 궁궐
박수 치며 노래 부르니 구름 학이 일어나고
느릿느릿 선인이 앞으로 오네.
바다에 술잔 올리고 해신에게 축원하니
천만리에 광명이 펼쳐지네.
멀리 바다 밖 하늘을 보려하니
하늘이 바다 위로 뜨니 바다는 끝이 없어라.
폭풍 수레 타고 날아가고 싶지만
아직 우화등선 못하여 망연자실하구나.

丹岩頂上蓬萊閣(단암정상봉래각)
可望蓬萊不可卻(가망봉래불가각)
天風海水蕩心胸(천풍해수탕심흉)
蒼蒼浪浪自開闔(탕탕랑랑자개합)
我到東牟眼界空(아도동모안계공)
詩情豪放若英雄(시정호방약영웅)
朝㬑遠出扶桑外(조확원출부상외)
樓台貝闕金銀宮(누대패궐금은궁)
拍手長歌雲鶴起(박수장가운학기)
仙人冉冉來前矣(선인염염래전의)
把杯祭海祝海神(파배제해축해신)
爲展光明千萬里(위전광명천만리)
遙情欲觀海外天(요정욕관해외천)
天浮海際海無邊(천부해제해무변)
欲駕飆車飛過去(욕가표거비과거)
未能羽化心茫然(미능우화심망연)

장삼풍은 황하 동쪽에서 3년을 두루 다니며 대종(岱宗 태산)에 올라 “인생이 여기에 이르러 웅대한 경관을 열고(人生到此拓雄觀)” 조래산(徂徠山)에 노닐며 “산속의 여섯 은자는 지금 어디 있는가(山間六逸今安在)?”라고 노래했다. 멀리 봉래의 선경을 바라보며 우화등선하여 날아갈 수 없고 대도(大道)를 얻지 못하니 선산(仙山)의 빼어난 경치도 모두 헛되었다.

장삼풍 《하동(河東)》

삼년간 하동을 두루 다니며
소맷자락 휘날리며 밤낮으로 걸었다네.
산을 오르면 대나무에 의지해 미소 짓고
강을 만나면 한가하게 거문고 타네.
해악에선 언제쯤이나 도반을 만나려나?
티끌세상 어느 곳에서 신선을 방문할까?

三年步履遍河東(삼련보리편하동)
戴月披星兩袖風(대월피수양수풍)
登山笑倚一根竹(등산소의일근죽)
遇水閑彈三尺桐(우수한탄삼척동)
海嶽幾時逢道侶(해악기시봉도려)
塵寰何處訪仙翁(진환하처방선옹)

중주기행(中州紀行)

장삼풍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중주(中州 지금의 하남 일대) 일대에 두루 족적을 남겼다. 장삼풍이 중악 숭산(嵩山)에 이르자 이곳은 불문(佛門) 정토라 소림사가 숭산 안쪽 소실산(少室山)의 무성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숭산은 또 도가의 선산(仙山)으로 한무제가 숭악에 와서 산신(山神)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산이 만세를 외치는 소리를 듣고 만세관(萬歲觀)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장삼풍에 따르면 숭산은 팔괘(八卦) 중 리(離)의 위치에 해당하는데 리는 화(火)에 속한다. 높고 가파른 주봉(主峯)은 하늘로 우뚝 솟아 위로는 삼태성(三台星)에 대응하고 아래로는 태실산과 소실산을 나누는 기준이 되니 바로 하늘이 낸 천연의 연단선로(煉丹仙爐)가 된다.

장삼풍은 자신을 청련(靑蓮 시선 이백)에 비유하며 숭산 36기봉(奇峰)을 두루 찾아다녔지만 진정한 스승은 만나지 못했다. 후인들은 장삼풍이 소림권(少林拳)에 정통했기 때문에 나중에 태극권을 창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장삼풍 《숭악(嵩嶽)》

리괘(離掛)가 중첩된 큰 불에 단벽이 열리니
중주의 진정한 준극(峻極)을 표현하노라.
선령은 은은하게 삼태(三台)를 세워
우뚝 솟은 태실과 소실산을 나누는구나.
내 지금 이백(李白)처럼 도를 찾아서
서른여섯 기이한 봉 정상까지 나아갔네.
바위 위에서 거문고 타니 생각이 아득해지고
구름 속에선 학이 훨훨 나는구나.
문득 입이 말라 느껴 현주(玄酒 맑은 물)가 생각나니
늦게 나온 밝은 달이 계곡 소나무에 걸렸구나.
소나무 물결 우레처럼 울리는데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 있고 움직이면 곧 한가하다.
야자 표주박과 먼지 털이로 바위 사이에 앉으니
참 스승 만나지 못해도 역시 즐거웁구나.
장차 내가 지난 흔적 남겨 숭산에 기록하리라.

重離大火開丹壁(중리대화개단벽)
表正中州真峻極(표정중주진준극)
仙靈隱隱立三台(선련은은입삼태)
太少峩峩分兩室(태소아아분양실)
我今訪道如青蓮(아금방도여청련)
奇峰六六造其巔(기봉육육조기전)
石上彈琴思縹緲(석상탄금사표묘)
雲中飛鶴鱗翩翩(운중비학인편편)
忽然口渴憶玄酒(홀연구갈억현주)
手掬山泉聊漱口(수국산천료수구)
晚來明月掛溪松(만래명월괘계송)
松濤幾陣如雷吼(송도기진여뢰후)
靜中有動動偏閑(정중유동동편한)
椰瓢棕拂坐岩間(야표종불좌마간)
不遇真師亦快活(불우진사역쾌활)
留將鴻爪記嵩山(유장홍조기숭산)

숭산을 떠난 장삼풍은 도가(道家) 십대동천(十大洞天)의 으뜸인 왕옥산(王屋山 역주: 산속의 동굴이 마치 제왕의 궁궐과 같다고 해서 왕옥산이라 불린다)에 올랐다. 소위 동천(洞天)이란 “산속 동굴로 여러 산을 관통해 직접 하늘에 도달한다(山中有洞,貫通諸山,直達上天).”는 뜻이다. 주봉 정상에는 돌로 된 단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헌원(軒轅)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 황제는 치우(蚩尤)와 큰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데 아무리해도 승리할 방법이 없었다. “황제가 이에 하늘에 고하니 마침내 구천현녀와 서왕모를 감동시켜 《구정신단경(九鼎神丹經)》, 《음부책(陰符策)》을 얻어 마침내 치우의 무리를 이길 수 있었다.”[《정통도장(正統道藏)》 동신부(洞神部)의 《천단왕옥산성적기(天壇王屋山聖跡記)》]
장삼품은 이곳 왕옥산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장삼풍 《왕옥산(王屋山)》

해내 큰 동천 중에서
왕옥이 제일이라 하네.
예부터 흰 구름 날다
지금은 원나라 황실을 지키네.
바위 골짜기엔 생황소리 울리고
뾰족한 정상에 해와 달이 걸리누나.
내가 움막 짓고 살면서
신선의 자질 단련하고 싶어라.

海內大洞天(해내대동천)
王屋稱第一(왕옥칭제일)
終古飛白雲(종고비백운)
至今護元室(지금호원실)
岩壑響笙簧(암학향생황)
峰尖掛日月(봉첨괘일월)
我欲結茅居(아욕결모거)
煉取神仙質(연취신선질)

장삼품은 중주의 남북, 고도(古都 옛 도읍)의 안팎을 두루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다만 “제왕의 무덤에 아득히 해가 지는(“茫茫日落帝王墳)”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장삼풍 《중주기행(中州紀行)》

중주 남북 두루 다니며 진리를 찾으며
가는 곳마다 옛날을 생각하는 노래 높이 불렀어라.
재상 저택에 도도하던 수레흐름 끊어지고
제왕의 무덤엔 아득히 해가 지누나.
이 몸은 잘려진 가지처럼 물 따라 흐르고
어깨엔 거문고 메고 저녁노을 둘렀어라.
내일은 또 하내를 떠나리니
소맷자락엔 태항산 구름 지니리라.

中州南北遍尋真(중주남북편심진)
到處高歌吊古文(도처고가조고문)
滾滾涸飛卿相宅(곤곤학비경상택)
茫茫日落帝王墳(망망일락제왕분)
身如斷梗隨流水(신여단경수류수)
肩負瑤琴帶夕曛(견부요금대석훈)
來日又從河內去(내일우종하내거)
袖中攜取太行雲(수중휴취태항운)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797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들어가는 말

탕탕한 천문이 만고에 열렸으니 몇 사람이나 돌아가고 몇 사람이나 왔는가?

(蕩蕩天門萬古開,幾人歸去幾人來? 역주: 소강절의 《매화시》에서 인용)

반고(盤古)가 천지를 개벽하고 여와(女媧)가 사람을 만들고 하늘을 보수하고 후예(后羿)가 태양을 쏘는 등 억만 겁 생명의 긴 흐름에서 오랜 신화는 대대로 유전되어왔다. 역사의 최후 악장(樂章) 휘황한 오천년 문명 중에서 귀진(歸眞)의 길은 얼마나 될까?

황제(黃帝)는 인류문명의 시조로 인간세상에서 사명을 완성한 후 용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

2천년 후 노자는 오천언(五千言 역주: 《도덕경》을 지칭)을 남기고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나서 총총히 은거했다.

또 다시 5백년 후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유(儒), 석(釋), 도(道) 사상이 서로 비추고 섞이면서 불도(佛道)의 상호다툼이 천 년간 끊이지 않았다.

원(元)나라 헌종(憲宗) 8년(1258년) 쿠빌라이(忽必烈 훗날의 원 세조)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불도(佛道) 대논쟁을 직접 주관했다. 당시 변론에 참가한 저명한 승려와 이름 높은 도사가 약 5백여 명이었는데 논변에서 도교가 크게 패했다. 이에 황제는 칙령으로 도사들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게 했으며 노자의 《도덕경》만 남기고 나머지 도서(道書)들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를 통해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려던 것인데 도(道)와 불(佛) 양가는 하나는 약해지고 하나는 성장했다.

조야(朝野)에서는 “(도교)가 병을 물리치고 장수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백일비승(白日飛昇 역주: 대낮에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것)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양생술은 인정하지만 신선에 관한 일은 인정하지 않는다”며 위아래가 모두 한 목소리를 냈다.

바로 이때 역사는 천고진인(千古真人) 장삼풍(張三豐)을 배출했다. 그는 조화의 기틀을 얻어 오고감이 신속했으며 건곤(乾坤)의 묘한 이치를 장악해 숨고 드러남이 오묘했다. 또 삼교(三敎)의 진리를 열어 미혹에 빠진 억만 중생을 일깨웠으며 무당산에 깊이 은거해 천년 도량을 열고 태극신권(太極神拳)을 창립해 후세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권을 연마하게 했다. 대도무적(大道無敵)이라 천지에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

제1장 진인이 속세에 내려와 호연하게 현묘함을 드러내다

1. 진인이 속세에 내려오다[真人臨凡]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은 본명이 장전일(張全一)이고 자(字)가 현현(玄玄)이며 삼풍은 호다. 원래 조상들이 살던 곳은 강서(江西) 용호산(龍虎山)이었다. 그의 조부가 점성술에 정통해 남송(南宋) 말년 천하의 왕기(王氣)가 북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가족을 이끌고 요양(遼陽) 의주(懿州)로 이주했다.

장삼풍은 원나라 정종(定宗) 정미(丁未) 2년 여름(1247년) 사월 초아드레 자시(子時)에 태어났다.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이 탄생하기 전날 밤 모친 임(林)씨가 “꿈에 두모원군(斗母元君)이 손으로 큰 학을 부르다 지붕에서 멈춰 긴 휘파람을 세 번 불었다.”[명나라 육서성(陸西星)의 《회해잡기(淮海雜記)》]고 한다. 여기서 두모원군은 북두 여러 별들의 어미를 말한다. 장삼풍이 출생할 때 또 선인(仙人)이 알려주고 지켰으니 그의 내력이 비범함을 알 수 있다.

장삼풍은 《구경도정(九更道情)》에서 인류의 생명은 우주의 보다 높은 층차에서 내원하며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에 내려와 동토신주(東土神州 역주: 중국) 미혹의 삼계에 내려왔다고 말했다.

“옛날 영산(靈山)을 떠난 이래 혼돈이 처음 나뉠 때 세간에 내려왔네. 서방에 근본이 있으나 근원을 잃어버렸네. 동토에 와서는 성명(性命)이 속세에 떨어졌구나. 애초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길을 잃었네.”(自從離了古靈山,混沌初分下世間。西方有本,丟下根原。來在東土,性命落凡。失迷了,老母當初未生前)[《구경도정》 ]

2. 속세에서 벗어나 도를 닦다[拜道脫翳]

장삼풍은 자태가 위엄이 있고 얼굴이 신기하게 생겨서 거북의 모습에 학의 뼈를 가졌고 귀는 크고 눈동자가 동그랬다. 다섯 살 때 괴상한 눈병이 생겨 시력이 점점 떨어졌다. 이때 방외(方外 세속을 벗어났다는 의미)의 이인(異人)이 장삼풍의 집을 찾아왔다. 자칭 장운암(張雲庵)으로 벽락궁(碧落宮)의 주지이며 호는 백운선로(白雲禪老)라 했다. 그는 장삼풍의 부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선풍도골이라 원래 비범한 그릇이지만 눈에 마장(魔障)이 걸렸습니다. 반드시 빈도의 제자가 되어 속세를 벗어나야 하며 지혜의 구슬이 다시 밝아져 시력을 되찾으면 돌려보내겠습니다.”[청나라 왕석령(汪錫齡)의 《삼풍선생본전(三豐先生本傳)》]

이에 어린 장삼풍은 벽락궁(碧落宮)에 가서 장운암 도장을 따라 도를 배우자 반년 후 눈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 하지만 즉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벽락궁에서 7년을 보냈으며 청소년시기를 도관에서 보냈다. 장삼풍은 천부적인 자질이 총명하고 지혜로워 도경(道經)을 배우면 눈으로 읽기만 해도 바로 알았고 한가할 때는 또 유가와 불가의 서적도 함께 읽곤 했다. 그의 독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로 빠르게 책장을 넘겨 대략적인 뜻만 알면 넘어가고 깊이 탐구하지 않았다. 어느 덧 7년의 세월이 흘러 모친의 아들 생각이 간절해지자 도장은 마침내 삼풍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돌아온 후 삼풍은 유학공부에 전념했다.

7년에 걸친 벽락궁 생활은 장삼풍이 나중에 도를 닦는데 깊고 튼튼한 기초를 다져주었고 소년시기에 수도(修道)할 뜻을 세우게 했다.

젊어서 뜻을 세우니 도심이 굳건하고
반롱을 뛰쳐나오니 물 밖에 나온 연꽃이라.
비단구름 씻어내듯 말끔히 흩어버리니
밝은 달이 먼 하늘에 걸려있구나.

 少年立志道心堅(소년입지도심견)
跳出樊籠出水蓮(도출번롱출수련)
散盡錦雲空似洗(산진금운공사세)
一輪明月掛長天(일륜명월괘장천)

(명나라 만력(萬曆) 《귀주통지(貴州通志)》 12권 《선석(仙釋)》)

3. 속세의 인연을 마무리

원 세조 중통(中統) 원년(1260년) 장삼풍의 나이 13세 때 조정에서 ‘거무재이(舉茂才異 역주: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관리로 선발하는 제도)’를 실행해 인재를 선발했다. 장삼풍도 빼어난 능력으로 추천을 받아 수재(秀才)가 되었고 이듬해 ‘문학재식(文學才識)’이 되었다. 원 세조 지원(至元) 갑자년(1264년) 가을 장삼풍은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을 여행하며 평장정사(平章政事) 염희헌(廉希憲)을 알게 되었다. 염희헌은 장삼풍이 삼교를 두루 알고 고금의 지식에 통한 기재(奇才)임을 알아보고 황제에게 주청해 중산(中山) 박릉(博陵 지금의 하북 보정)령으로 추천했다.

세간의 영예는 애초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던 장삼풍을 더할 수 없이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었다.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세상에 나섰지만 지음(知音)을 만나기는 어려웠고 높이 나는 기러기처럼 높아질수록 더 추워질 뿐이었다(高處不勝寒).

장삼풍은 당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황금대에 오르길 원하지 않고
단지 황화주 마시길 바랄뿐이라.
술에 취해 아득하면 천지를 잊고
고금의 명리는 티끌에 불과할 뿐.

我不願登黃金台(아불원등황금대)
我只願飲黃花杯(아지원음황화배)
醉裏昏昏忘天地(취지혼혼망천지)
古今名利總塵埃(고금명리총진애)

(《갑자추유연경작(甲子秋遊燕京作)》--갑자년 가을 연경에 놀러가서 쓰다)

집과 나라를 저 사람에게 맡기고
다만 나 홀로 외롭고 슬프구나.
두 눈 가득 눈물이 흘러내리니
나는 기러기 그림자 비치는 높은 곳은 추워라

家國伊人任(가국이인임)
孤哀獨我單(고애독아단)
澘然雙淚落(산연쌍루락)
飛雁影高寒(비안영고한)

(장삼풍 《유감(有感)》)

여기서 황금대란 전국시기 연(燕)나라의 소왕(昭王)이 천하의 인재들을 널리 초빙하기 위해 세웠다는 건물이다. 소왕은 천금매골(千金買骨) 즉 천금으로 천리마를 사기 위해 먼저 500금을 주고 천리마의 뼈를 샀더니 이 소문을 듣고 1년 만에 3마리의 천리마를 샀다는 일화에 감동을 받아 황금대라는 높은 누대를 만들어 널리 인재를 구하고 우대함을 알렸다.

이 기간에 장삼풍은 진(晉)나라 때 갈홍(葛洪)이 수도했던 갈홍산(葛洪山)을 찾아 동천복지(洞天福地)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또 시선(詩仙) 이백이 시를 읊고 도를 논하던 곳들을 찾아다니고 싶어 “하루 빨리 속세 인연을 끝내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싶어졌다.

“모의(毛義 역주: 한나라 때 은자)는 여기에서 은거했으니 갈홍이 어찌 관직에 연연했으랴! 이태백을 찾아가 함께 대환단을 말하고 싶구나

(毛義從茲隱,葛洪豈戀官!欲尋李太白,同說大還丹)”(《유감(有感)》)

“속세 인연 빨리 마치고 오악삼산으로 돌아가리라.

(早將壯歲塵緣了,五嶽三山歸去來)”(《갑자추유연경작(甲子秋遊燕京作)》)

장삼풍은 또 염희헌의 추천으로 원나라 개국 재상 유병충(劉秉忠)을 만났다. 유병충은 장삼풍을 보고는 놀라서 “진짜 선재(仙才 신선의 재목)로다”라고 했다. 장삼풍은 삼교를 두루 관통했기에 유병충은 마침내 지음을 만났다는 생각에서 장삼풍을 발탁하려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유병충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장삼풍의 부모님이 잇따라 사망했다. 장삼풍은 어려서부터 수도하려는 뜻을 세웠지만 단지 속세의 인연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장삼풍은 유병충에게 편지를 써서 사의를 표하고 자신의 굳건한 도심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표명했다.

“태평성대의 훌륭한 재상이 천고에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풍수 술은 한가한 일에 불과하지만 제왕의 신하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공의 천금과 같은 중한 말씀을 얻으니 제게 주신 공의 편지는 제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말씀하신 지리는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오직 저만은 묵묵히 깊이 믿습니다. 공께서는 어찌하여 천한 저를 중히 여기시는지 이 은혜와 이 덕이 저를 들어 올리셨습니다. 오직 공의 편지 도착이 더딘 것이 한입니다. 부모님을 이미 장사지냈으니 감히 나설 수 없습니다. 명예를 바라지 않고 이익을 바라지 않으며 다만 부모님이 이 땅에서 편하시길 바랄뿐입니다. …중략…. 나중에 공께서 계신 형주도를 지날 때 팔반산 아래에서 공을 찾아뵙겠습니다.”(장삼풍 《답유상공서(答劉相公書)--유상공께 드리는 답신》)

이 편지에서 보듯이 본래 장삼풍은 부모님을 잘 안치한 후 유병충을 찾아가려 했지만 뜻밖에도 유병충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렸다. 장삼풍은 이에 유병충을 추모하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여러 가지 일에 해박한
오늘날의 옛 대신이셨네.
담박하게 욕망을 잊으시니
세속에서 벗어난 탈속함이여.
세상 그 누가 나를 알랴만
조정에서 여러 차례 천거하셨네.
언젠가 팔반산을 지나게 되면
공의 신위에 맑은 술 올리리라.

博學其餘事(박학기여사)
今之古大臣(금지고대신)
澹然忘嗜欲(담연망기욕)
高矣脫風塵(고의탈풍진)
舉世誰知我(거세수지아)
登朝屢薦人(등조누천인)
八盤他日過(팔반타일과)
清酒奠公神(청주전공신)

《요만유중회상공(遙挽劉仲晦相公)--멀리서 유상공을 애도하며》

장삼풍은 요양(遼陽)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대한 효를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지냈다. 또 구(丘)씨 성을 가진 도인의 방문을 받아 현리(玄理 도가의 현묘한 이치)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다. 도인이 떠나자 장삼풍은 곧바로 처자식과 작별하고 짐을 꾸려 운유에 떠났다. 이때 장삼풍의 나이 32세로 대도(大道)가 진리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수년 후 장삼풍은 구(邱)도인을 다시 만났고 함께 서산(西山)에 놀러간 후에야 비로소 구 도인이 구처기(丘處機 역주: 전진교 왕중양의 제자 장춘진인)임을 알게 되었다.

추운 대낮 조용한 유주(幽州)
연경(燕京)에서 옛 술집 다시 찾으니
새로 사귄 미치광이는 술꾼이 되고
전에 알던 호걸은 이미 거친 언덕 되었구나.
빠른 시간은 호로병 속의 해와 같지 않지만
개미 목숨은 오히려 물거품과 같구나.
지인을 만나 대도를 담론하니
눈 그친 서산에서 함께 마음껏 노니네.

天寒白日澹幽州(천한백일담유주)
燕市重尋舊酒樓(연시중심구주루)
新學瘋狂爲醉漢(신학풍광위취한)
故交豪傑已荒邱(고교호걸이황구)
駒光不似壺中日(구광불사호중일)
蟻命猶如水上漚(의명유여수상구)
我遇至人談大道(아우지인담대도)
西山晴雪共遨遊(서산청설공오유)

(장삼풍 《연조한유오구장춘수동유서산(燕趙閑遊䎸邱長春遂同遊西山)》)

구처기는 도교 전진도(全真道) 용문파(龍門派)의 조사로 일찍이 칭기즈칸을 찾아가 알현한 적이 있다. 몽골인들의 ‘장생천(長生天 역주: 몽골인들이 숭배하는 하늘 신으로 ‘텡그리’라고 한다)’이 바로 중원에서 말하는 ‘도(道)’로 중원은 신이 정한 하늘과 통하는 문이라고 말했다. 그 후 칭기즈칸은 구처기에게 천하의 도교를 관장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조서에서는 또 “짐은 평소 늘 신선을 동경해왔으니 신선은 짐을 잊지 마시라.”고도 언급했다. 구처기에 대한 칭기즈칸의 예우가 지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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