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6. 태극진전(太極真傳) 어디에?
“태극권을 배우는 것은 입도의 기초가 된다.(學太極拳,爲入道之基)” 그러나 장삼풍은 태극권을 수련하는 심법(心法)을 남겨놓지 않았고 다만 동작만 전해져 내려온다. 때문에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태극권 연마를 배워 도를 닦을 수 있는지 모른다.
태극권의 자세(架子)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현재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수억 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속에 장삼풍이 남겨놓은 동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어떤 이들은 태극권을 신체를 단련하는 건강체조로 여기며 내외겸수하는 태극권의 내포를 이해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도가 무공(武功)문파에서는 “조사만 언급할 뿐 스승은 언급하지 않으며(言祖不言師)”, “3자에게 도를 전하지 않는(六耳不傳道)” 전승습관이 있다. 때문에 도제를 선별하는 요구가 아주 엄격해서 차라리 전수하지 않을지언정 결코 함부로 전수하지 않았다. 또 전수하는 사람 사이에 마음으로 전하고 입으로 전수할 뿐이라 역대로 그림이나 문자를 남기지 않았다. 설령 기록이 있다 해도 대개 구결로 된 은어(隱語)를 많이 사용해 암시할 뿐이라 전인(傳人)이 아니면 그 속의 오묘한 비밀을 깨달을 수 없다.
장삼풍이 태극권을 창립한 후 여러 유파에서 모두 태극권 이론을 흡수했고 모두들 장삼풍을 조사로 삼았다. 예를 들면 무당 태을신검문(太乙神劍門)의 전인은 자신의 검법이 장백산의 사부로부터 얻은 것으로 17대를 가전(家傳)되어 왔다고 한다. 역대 사부들이 모두 ‘조사를 말하고 사부는 언급하지 않는’ 사훈(師訓)에 따라 장삼풍 조사는 말하지만 자기 사부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역시 장삼풍 조사가 전했다는 것만 알뿐 역대 사부들의 이름은 모른다. 청나라 말기 봉천(奉天) 북진현(北鎮縣)의 《무당단파검술(武當丹派劍術)》에서는 “무당검술은 바로 동현진인(洞玄真人) 장삼풍이 진무(真武)로부터 전수받은 대법(大法)이다.”라고만 했다. 이런 특수한 원인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도문(道門) 중의 사람들조차도 오직 조사 장삼풍만 알뿐 역대 전인(傳人)이 누구인지 모른다.
한편 민간에서는 태극권이 민간에 유입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장삼풍 태극권의 원래 모습과는 차이가 아주 멀어졌다. 가장 주요한 원인은 민간의 태극권은 수련과의 연결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수련내포가 담긴 동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태극권 자세를 바꾸지 않았지만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 실전되었다. 예를 들어 앞서 황백가가 자신이 전수받은 태극권이 마치 혜강의 《광릉산》처럼 세상에서 전수가 끊어진 것에 대해 슬퍼한 것과 같다.
또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감수에 근거해 태극권 자세를 바꿨으며 이렇게 여러 대를 지나면서 고쳐져 오늘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일찍부터 면모가 완전히 달라졌다. 또 어떤 이는 스스로 문파를 만들어 장삼풍 조사의 명성을 패괴(敗壞)시켰으며 더욱 심한 자는 태극조사(太極祖師)라는 이름마저 찬탈해 천지를 놀라게 했다.
오늘날 현대의 내가권(內家拳)은 장삼풍을 기치로 삼으며 여러 문파가 생겨났다. 배우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지면서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천하무적의 영웅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들은 초능력과 공능(功能)을 동경하고 기교가 뛰어난 쿵푸영화에 도취하지만 실제로 무술연습이나 무술시합 중에서 태극권의 장법(章法)을 제대로 체현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안에 진정한 공부가 없기 때문이며 출수한 자세 역시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안에 진정한 공부가 있다면 앞서 소개한 장송계처럼 맨손으로 수백 근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 3개를 절단할 수 있다. 이는 단번에 목숨을 앗아갈 수 있으며 사람이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다. 지금 사람들은 태극권 동작 속에 이렇게 뛰어난 기술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1950년대에 들어와 태극권은 중국에서 체육활동의 하나로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고 1980년대에는 전례 없는 기공(氣功)열풍이 일어났다. 태극권은 동작이 느리고 완만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효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기공 애호가들을 끌어들였다. 이를 통해 천지와 우주에 대한 중국 전통문화의 인식을 새로 사고하게 했고 생명의 내원과 존재의 진실한 의미에 대해 사고하게 했다.
1992년 리훙쯔(李洪志 이홍지) 선생은 “우주 최고의 특성 ‘眞(쩐)·善(싼)·忍(런)’에 동화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우주 최고의 특성을 지도로 삼아, 우주의 연화(演化)원리에 따라 수련하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세상에 전했다. 파룬따파는 성명쌍수(性命雙修)하는데 “파룬따파에서 성(性)을 닦음이란 心性(씬씽)을 닦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心性(씬씽)수련을 첫 자리에 놓으며 心性(씬씽)을 공이 자라는 관건으로 본다.” “명(命) 닦음이란 장생지도(長生之道)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연공을 통하여 本體(번티)를 개변해, 本體(번티)를 잃지 않고 主意識(주이스)와 육체가 합일, 정체(整體)로 수련 성취하는 것이다.”(《파룬따파대원만법(法輪大法大圓滿法)》)
이에 태극권을 연습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파룬따파 수련으로 들어와 대법과 인연을 맺었다.
제4장 시방을 도화해 많은 자취를 남기다
《대월과무공비행지잔(帶月過武功飛行至棧)--달빛에 무공을 지나 잔도까지 비행하다》
누더기 옷에 빈랑 표주박 깔끔하지 못해서
밤에 위하 서쪽을 날아서 지난다.
흰 구름 큰 소리로 양산 기러기를 부르고
차가운 달은 노점(魯店)의 닭을 재촉하네.
출세하여 진촉의 길을 여러 번 노닐었는데
마애에서 스스로 오고간 제목을 보네.
험한 잔도를 평지처럼 다니니
비로소 난거(鸞車 신선의 수레)가 말발굽보다 나음을 알겠노라.
布衲榔瓢欠整齊(포납낭표흠정제)
夜來飛過渭河西(야래비과위하서)
白雲叫破梁山雁(백운규파양산안)
涼月催回魯店雞(양월최회노점계)
出世多遊秦蜀路(출세다유진촉로)
摩崖自看往來題(마애자간왕래제)
身行險棧如夷坦(신행험잔여이탄)
始識鸞車勝馬蹄(시식난거승마제)
역사적으로 도가는 중생을 널리 제도함을 중시하지 않았고 수진양성(修眞養性)과 성명쌍수(性命雙修), 신통술류(神通術類)를 연마하는 것 등을 중시하며 역대로 단독전수해 왔다. 신통법술(神通法術)을 현대인들은 초능력 또는 특이공능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의 눈(육안)으로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인간세상에서의 표현에 불과하다. 다른 공간에서 진정한 연화(演化)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볼 수 있거나 똑똑히 볼 수 있다.
대도진인(大道真人)이 성취하는 것은 “천지처럼 오래 살고 일월처럼 밝아(與天地同久,日月同明)”, “만겁에 신이 존재하며(萬劫存神)”, “형신이 오묘함을 갖춰 도와 더불어 진에 합하는 것(形神俱妙,與道合真)”이니 신성하기가 비할 바 없다.
장삼풍은 대도에서 진인이 된 후 대지대혜(大智大慧)하여 우주의 진상을 환히 알았고 사람들을 위해 태극신권(太極神拳)을 남겨주었지만 오히려 심법만은 남기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불도(佛道)를 초월하는 대도(大道)대법(大法)이 있음을 알려주었지만 불도를 초월하는 이 대도대법을 남겨놓진 않았다.
장삼풍은 도를 성취한 후 속세에 크게 은거해(大隱朝世) 사방을 운유하면서 인연 있는 사람들을 도화(道化)했다. 이에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도를 숭상하고 신을 공경했으며 가가호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살아있는 신선(活神仙)이 되었다.
명나라 때 임자원(任自垣)의 《대악태화산지(大嶽太和山志)》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은 손에 방척(方尺 직각자)을 들고 다니며 춥거나 덥거나 늘 홑옷을 입었으며 때로는 궁벽한 산골에 있거나 때로는 시끄러운 시장을 다니며 사방을 운유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하루에 천리를 가는 것을 보았다. 장삼풍은 한번 본 것은 다 기억할 수 있는 재주를 지녔고 농담을 잘했으며 옆에 누가 있든지 의식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방술(方術)의 비결을 물으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교의 경서에 대해 물으면 거침없이 설명해주었고 말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전적으로 도덕(道德) 인의(仁義)와 충효(忠孝)에 근본 했으며 길흉화복을 함부로 말하거나 사람을 속이는 말은 없었다. 때문에 마음(心)으로 신(神)이 통하고 신(神)이 도(道)와 합해 매사에 모두 선견지명이 있었다.
1. 보계금대관—죽었다 다시 살아나다
보계(寶雞) 금대관(金台觀)은 섬서성 보계시 북쪽 교외의 능원산(陵原山) 위에 있다. 고대에는 보계를 진창(陳倉)이라 불렀다. 그러다 당나라 숙종 지덕(至德) 2년(757년) “석계가 우는(石雞啼鳴)” 상서로운 조짐 때문에 보계로 바꿨다. 보계는 역사가 유구해서 태호복희(太昊伏羲)가 일찍이 진창을 다스린 적이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 역시 이곳에 나라를 세운 적이 있고 초한(楚漢)이 서로 다툴 때 한신(韓信)이 “겉으로는 잔도를 수리하면서 몰래 진창을 건너” 최종적으로 한실(漢室)의 천하를 다진 곳이다. 삼국시대 때는 촉한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이 5차례에 걸쳐 위나라를 북벌하기 위해 헌신한 곳으로 그는 보계 오장원에서 선서(仙逝)했다.
장삼풍은 일찍이 보계 진창산 아래에 움막을 짓고 수련한 적이 있다. 나중에 도를 이룬 후에 또 금대관에서 수년을 머물며 《보계만행(寶雞晚行)》, 《소려제벽(小廬題壁)》, 《귀진(歸秦)》 등의 시를 지었다.
《보계만행(寶雞晚行)》
문득 진봉을 노닐다
표연히 보계에 이르네.
물 따라 흐르는 길은 먼데
저녁구름 산 아래 낮게 깔리네.
마주보는 세 봉우리 우뚝 섰는데
관심은 거처하는 침상.
띠풀 엮어 잠시 발을 멈추면
나는 또 반계 늙은이(老磻溪 강자아)로다.
倏爾遊秦鳳(숙이유진봉)
飄然到寶雞(표연도보계)
路隨流水遠(노수유수원)
山壓暮雲低(산압모운저)
對面三峰立(대면삼봉립)
關心一榻棲(관심일탑서)
結茅聊息足(결모료식족)
吾亦老磻溪(오역노반계)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이 보계 금대관에 있을 때 한번은 7일간 혼이 떠난 적이 있었다. 원나라 지정(至正) 26년 병오년(1366년) 늦가을 장삼풍의 나이 120살 때 그는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서거를 기리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 하지만 시신을 매장하려던 날 다시 살아났다. 되살아난 후 제자 양궤산(楊軌山)에게 게(偈)를 하나 주었는데 원나라의 멸망과 명나라의 탄생을 예언했다.
《대원 지정 26년 병오년 늦가을에 금대관에서 유혼 7일 만에 돌아와 양궤산에게 주는 게(大元至正二十六年丙牛暮秋金台觀遊魂七日歸來付楊軌山一偈)》
원기가 희미해져 태청으로 돌아가
다시 주작을 따라 요경(瑤京)에서 내려왔네.
박상(剝床) 7일만에 혼이 다시 돌아오니
천하가 일제히 일월이 밝음을 보는구나.
元氣茫茫返太清(원기망망반태청)
又隨朱雀下瑤京(우수주작하요경)
剝床七日魂來複(박상칠일혼래복)
天下齊看日月明(천하제간일월명)
장삼풍의 신적(神跡)이 보계에서 끊이지 않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장삼풍이야말로 진정한 신선이라고 여겼다. 금대관은 장삼풍 덕분에 천하에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장삼풍의 조묘(祖廟)가 되었다. 장삼풍이 금대관의 정신(正神)이 되자 이곳을 찾아와 참배하는 남녀신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향불이 흥성해졌다.
명나라 천순(天順 1457~1464) 연간 이부우시랑(吏部右侍郎) 장용완(張用浣)이 금대관에 《장삼풍유적기(張三豐遺跡記)》란 비석을 세웠다. 이 글에서 그의 부친이 장삼풍을 직접 만난 장면을 서술했다. 비문에서는 장삼풍이 떠날 때 “발이 땅을 밟지 않았다.”고 했다. 장삼풍은 금대관을 떠날 때 구절등장(九節藤杖)과 혼원의(混元衣)를 남겨놓았다.
명나라 말기인 1611년 보계현령 주병연(朱炳然)이 또 이 두 가지 물건을 보고는 비석에 시를 새겨놓았다.
구장에는 여전히 아홉 마디 남았는데
노을 옷은 오수전보다 가벼워 보이네.
노래 마치고 신선을 생각하며 휘파람 길게 부니
저녁노을 온산을 붉게 비추네.
鳩杖尚留九節在(구장상류구절재)
霞衣猶見五銖輕(하의유견오수경)
歌罷懷仙一長嘯(가파회선일장소)
昔陽紅照萬山明(석양홍조만산명)
보계에는 또 장삼풍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온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나라 건륭 연간에 금대관을 중수했다. 그런데 나무를 세우면 이튿날이면 기둥과 들보가 무너지곤 해서 며칠간 실패를 거듭했다. 이에 공사 책임을 맡은 회장(會首)의 마음이 타들어갔다. 어느 날 저녁 회장이 선방에서 조는데 학발동안(鶴髮童顔)에 도롱이를 입은 한 노도사를 보았다. 그는 오른 손에 구절등장 왼손에 검고 반짝이는 물건을 들고와서는 말했다. “내가 보계에 다년간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하고 두터우며 선행과 베풀기를 좋아하는 걸 잘 안다. 이에 고향 친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특별히 신철(神鐵) 2덩이를 보내니 내일 나무를 세우고 기초 위에 두면 초석이 견고해지고 건물이 평안해질 것이며 세속의 일도 무사태평할 것이다.”
회장이 깜짝 놀라 깨어났는데 깨어난 후에야 비로소 꿈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두 덩이 호미철판(鐵鋤板)이 있었다. 이튿날 꿈에서 시킨 대로 작업하자 과연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삼청전(三清殿)이 새로 수리되어 개축되었다. 사람들은 나중에야 비승동(飛升洞)에 모셨던 장삼풍의 유물 중에서 도롱이, 도포, 구절등장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김을 매던 호미 2개가 나무자루만 남고 쇠로 된 부분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비로소 기둥을 고정시킨 신철이 장삼풍이 사용하던 호미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삼청전은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치긴 했지만 기초만은 아주 튼튼했는데 이 두 개의 호미철판이 줄곧 처마기둥 아래를 지탱하고 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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