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들어가는 말

탕탕한 천문이 만고에 열렸으니 몇 사람이나 돌아가고 몇 사람이나 왔는가?

(蕩蕩天門萬古開,幾人歸去幾人來? 역주: 소강절의 《매화시》에서 인용)

반고(盤古)가 천지를 개벽하고 여와(女媧)가 사람을 만들고 하늘을 보수하고 후예(后羿)가 태양을 쏘는 등 억만 겁 생명의 긴 흐름에서 오랜 신화는 대대로 유전되어왔다. 역사의 최후 악장(樂章) 휘황한 오천년 문명 중에서 귀진(歸眞)의 길은 얼마나 될까?

황제(黃帝)는 인류문명의 시조로 인간세상에서 사명을 완성한 후 용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

2천년 후 노자는 오천언(五千言 역주: 《도덕경》을 지칭)을 남기고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나서 총총히 은거했다.

또 다시 5백년 후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유(儒), 석(釋), 도(道) 사상이 서로 비추고 섞이면서 불도(佛道)의 상호다툼이 천 년간 끊이지 않았다.

원(元)나라 헌종(憲宗) 8년(1258년) 쿠빌라이(忽必烈 훗날의 원 세조)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불도(佛道) 대논쟁을 직접 주관했다. 당시 변론에 참가한 저명한 승려와 이름 높은 도사가 약 5백여 명이었는데 논변에서 도교가 크게 패했다. 이에 황제는 칙령으로 도사들에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게 했으며 노자의 《도덕경》만 남기고 나머지 도서(道書)들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를 통해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려던 것인데 도(道)와 불(佛) 양가는 하나는 약해지고 하나는 성장했다.

조야(朝野)에서는 “(도교)가 병을 물리치고 장수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백일비승(白日飛昇 역주: 대낮에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것)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양생술은 인정하지만 신선에 관한 일은 인정하지 않는다”며 위아래가 모두 한 목소리를 냈다.

바로 이때 역사는 천고진인(千古真人) 장삼풍(張三豐)을 배출했다. 그는 조화의 기틀을 얻어 오고감이 신속했으며 건곤(乾坤)의 묘한 이치를 장악해 숨고 드러남이 오묘했다. 또 삼교(三敎)의 진리를 열어 미혹에 빠진 억만 중생을 일깨웠으며 무당산에 깊이 은거해 천년 도량을 열고 태극신권(太極神拳)을 창립해 후세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권을 연마하게 했다. 대도무적(大道無敵)이라 천지에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

제1장 진인이 속세에 내려와 호연하게 현묘함을 드러내다

1. 진인이 속세에 내려오다[真人臨凡]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은 본명이 장전일(張全一)이고 자(字)가 현현(玄玄)이며 삼풍은 호다. 원래 조상들이 살던 곳은 강서(江西) 용호산(龍虎山)이었다. 그의 조부가 점성술에 정통해 남송(南宋) 말년 천하의 왕기(王氣)가 북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가족을 이끌고 요양(遼陽) 의주(懿州)로 이주했다.

장삼풍은 원나라 정종(定宗) 정미(丁未) 2년 여름(1247년) 사월 초아드레 자시(子時)에 태어났다. 고서의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이 탄생하기 전날 밤 모친 임(林)씨가 “꿈에 두모원군(斗母元君)이 손으로 큰 학을 부르다 지붕에서 멈춰 긴 휘파람을 세 번 불었다.”[명나라 육서성(陸西星)의 《회해잡기(淮海雜記)》]고 한다. 여기서 두모원군은 북두 여러 별들의 어미를 말한다. 장삼풍이 출생할 때 또 선인(仙人)이 알려주고 지켰으니 그의 내력이 비범함을 알 수 있다.

장삼풍은 《구경도정(九更道情)》에서 인류의 생명은 우주의 보다 높은 층차에서 내원하며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에 내려와 동토신주(東土神州 역주: 중국) 미혹의 삼계에 내려왔다고 말했다.

“옛날 영산(靈山)을 떠난 이래 혼돈이 처음 나뉠 때 세간에 내려왔네. 서방에 근본이 있으나 근원을 잃어버렸네. 동토에 와서는 성명(性命)이 속세에 떨어졌구나. 애초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길을 잃었네.”(自從離了古靈山,混沌初分下世間。西方有本,丟下根原。來在東土,性命落凡。失迷了,老母當初未生前)[《구경도정》 ]

2. 속세에서 벗어나 도를 닦다[拜道脫翳]

장삼풍은 자태가 위엄이 있고 얼굴이 신기하게 생겨서 거북의 모습에 학의 뼈를 가졌고 귀는 크고 눈동자가 동그랬다. 다섯 살 때 괴상한 눈병이 생겨 시력이 점점 떨어졌다. 이때 방외(方外 세속을 벗어났다는 의미)의 이인(異人)이 장삼풍의 집을 찾아왔다. 자칭 장운암(張雲庵)으로 벽락궁(碧落宮)의 주지이며 호는 백운선로(白雲禪老)라 했다. 그는 장삼풍의 부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선풍도골이라 원래 비범한 그릇이지만 눈에 마장(魔障)이 걸렸습니다. 반드시 빈도의 제자가 되어 속세를 벗어나야 하며 지혜의 구슬이 다시 밝아져 시력을 되찾으면 돌려보내겠습니다.”[청나라 왕석령(汪錫齡)의 《삼풍선생본전(三豐先生本傳)》]

이에 어린 장삼풍은 벽락궁(碧落宮)에 가서 장운암 도장을 따라 도를 배우자 반년 후 눈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 하지만 즉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벽락궁에서 7년을 보냈으며 청소년시기를 도관에서 보냈다. 장삼풍은 천부적인 자질이 총명하고 지혜로워 도경(道經)을 배우면 눈으로 읽기만 해도 바로 알았고 한가할 때는 또 유가와 불가의 서적도 함께 읽곤 했다. 그의 독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로 빠르게 책장을 넘겨 대략적인 뜻만 알면 넘어가고 깊이 탐구하지 않았다. 어느 덧 7년의 세월이 흘러 모친의 아들 생각이 간절해지자 도장은 마침내 삼풍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돌아온 후 삼풍은 유학공부에 전념했다.

7년에 걸친 벽락궁 생활은 장삼풍이 나중에 도를 닦는데 깊고 튼튼한 기초를 다져주었고 소년시기에 수도(修道)할 뜻을 세우게 했다.

젊어서 뜻을 세우니 도심이 굳건하고
반롱을 뛰쳐나오니 물 밖에 나온 연꽃이라.
비단구름 씻어내듯 말끔히 흩어버리니
밝은 달이 먼 하늘에 걸려있구나.

 少年立志道心堅(소년입지도심견)
跳出樊籠出水蓮(도출번롱출수련)
散盡錦雲空似洗(산진금운공사세)
一輪明月掛長天(일륜명월괘장천)

(명나라 만력(萬曆) 《귀주통지(貴州通志)》 12권 《선석(仙釋)》)

3. 속세의 인연을 마무리

원 세조 중통(中統) 원년(1260년) 장삼풍의 나이 13세 때 조정에서 ‘거무재이(舉茂才異 역주: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관리로 선발하는 제도)’를 실행해 인재를 선발했다. 장삼풍도 빼어난 능력으로 추천을 받아 수재(秀才)가 되었고 이듬해 ‘문학재식(文學才識)’이 되었다. 원 세조 지원(至元) 갑자년(1264년) 가을 장삼풍은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을 여행하며 평장정사(平章政事) 염희헌(廉希憲)을 알게 되었다. 염희헌은 장삼풍이 삼교를 두루 알고 고금의 지식에 통한 기재(奇才)임을 알아보고 황제에게 주청해 중산(中山) 박릉(博陵 지금의 하북 보정)령으로 추천했다.

세간의 영예는 애초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던 장삼풍을 더할 수 없이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었다.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세상에 나섰지만 지음(知音)을 만나기는 어려웠고 높이 나는 기러기처럼 높아질수록 더 추워질 뿐이었다(高處不勝寒).

장삼풍은 당시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황금대에 오르길 원하지 않고
단지 황화주 마시길 바랄뿐이라.
술에 취해 아득하면 천지를 잊고
고금의 명리는 티끌에 불과할 뿐.

我不願登黃金台(아불원등황금대)
我只願飲黃花杯(아지원음황화배)
醉裏昏昏忘天地(취지혼혼망천지)
古今名利總塵埃(고금명리총진애)

(《갑자추유연경작(甲子秋遊燕京作)》--갑자년 가을 연경에 놀러가서 쓰다)

집과 나라를 저 사람에게 맡기고
다만 나 홀로 외롭고 슬프구나.
두 눈 가득 눈물이 흘러내리니
나는 기러기 그림자 비치는 높은 곳은 추워라

家國伊人任(가국이인임)
孤哀獨我單(고애독아단)
澘然雙淚落(산연쌍루락)
飛雁影高寒(비안영고한)

(장삼풍 《유감(有感)》)

여기서 황금대란 전국시기 연(燕)나라의 소왕(昭王)이 천하의 인재들을 널리 초빙하기 위해 세웠다는 건물이다. 소왕은 천금매골(千金買骨) 즉 천금으로 천리마를 사기 위해 먼저 500금을 주고 천리마의 뼈를 샀더니 이 소문을 듣고 1년 만에 3마리의 천리마를 샀다는 일화에 감동을 받아 황금대라는 높은 누대를 만들어 널리 인재를 구하고 우대함을 알렸다.

이 기간에 장삼풍은 진(晉)나라 때 갈홍(葛洪)이 수도했던 갈홍산(葛洪山)을 찾아 동천복지(洞天福地)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또 시선(詩仙) 이백이 시를 읊고 도를 논하던 곳들을 찾아다니고 싶어 “하루 빨리 속세 인연을 끝내고”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싶어졌다.

“모의(毛義 역주: 한나라 때 은자)는 여기에서 은거했으니 갈홍이 어찌 관직에 연연했으랴! 이태백을 찾아가 함께 대환단을 말하고 싶구나

(毛義從茲隱,葛洪豈戀官!欲尋李太白,同說大還丹)”(《유감(有感)》)

“속세 인연 빨리 마치고 오악삼산으로 돌아가리라.

(早將壯歲塵緣了,五嶽三山歸去來)”(《갑자추유연경작(甲子秋遊燕京作)》)

장삼풍은 또 염희헌의 추천으로 원나라 개국 재상 유병충(劉秉忠)을 만났다. 유병충은 장삼풍을 보고는 놀라서 “진짜 선재(仙才 신선의 재목)로다”라고 했다. 장삼풍은 삼교를 두루 관통했기에 유병충은 마침내 지음을 만났다는 생각에서 장삼풍을 발탁하려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유병충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장삼풍의 부모님이 잇따라 사망했다. 장삼풍은 어려서부터 수도하려는 뜻을 세웠지만 단지 속세의 인연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장삼풍은 유병충에게 편지를 써서 사의를 표하고 자신의 굳건한 도심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표명했다.

“태평성대의 훌륭한 재상이 천고에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풍수 술은 한가한 일에 불과하지만 제왕의 신하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공의 천금과 같은 중한 말씀을 얻으니 제게 주신 공의 편지는 제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말씀하신 지리는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오직 저만은 묵묵히 깊이 믿습니다. 공께서는 어찌하여 천한 저를 중히 여기시는지 이 은혜와 이 덕이 저를 들어 올리셨습니다. 오직 공의 편지 도착이 더딘 것이 한입니다. 부모님을 이미 장사지냈으니 감히 나설 수 없습니다. 명예를 바라지 않고 이익을 바라지 않으며 다만 부모님이 이 땅에서 편하시길 바랄뿐입니다. …중략…. 나중에 공께서 계신 형주도를 지날 때 팔반산 아래에서 공을 찾아뵙겠습니다.”(장삼풍 《답유상공서(答劉相公書)--유상공께 드리는 답신》)

이 편지에서 보듯이 본래 장삼풍은 부모님을 잘 안치한 후 유병충을 찾아가려 했지만 뜻밖에도 유병충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버렸다. 장삼풍은 이에 유병충을 추모하는 시를 한 수 지었다.

여러 가지 일에 해박한
오늘날의 옛 대신이셨네.
담박하게 욕망을 잊으시니
세속에서 벗어난 탈속함이여.
세상 그 누가 나를 알랴만
조정에서 여러 차례 천거하셨네.
언젠가 팔반산을 지나게 되면
공의 신위에 맑은 술 올리리라.

博學其餘事(박학기여사)
今之古大臣(금지고대신)
澹然忘嗜欲(담연망기욕)
高矣脫風塵(고의탈풍진)
舉世誰知我(거세수지아)
登朝屢薦人(등조누천인)
八盤他日過(팔반타일과)
清酒奠公神(청주전공신)

《요만유중회상공(遙挽劉仲晦相公)--멀리서 유상공을 애도하며》

장삼풍은 요양(遼陽)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대한 효를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지냈다. 또 구(丘)씨 성을 가진 도인의 방문을 받아 현리(玄理 도가의 현묘한 이치)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다. 도인이 떠나자 장삼풍은 곧바로 처자식과 작별하고 짐을 꾸려 운유에 떠났다. 이때 장삼풍의 나이 32세로 대도(大道)가 진리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행이 시작되었다.

수년 후 장삼풍은 구(邱)도인을 다시 만났고 함께 서산(西山)에 놀러간 후에야 비로소 구 도인이 구처기(丘處機 역주: 전진교 왕중양의 제자 장춘진인)임을 알게 되었다.

추운 대낮 조용한 유주(幽州)
연경(燕京)에서 옛 술집 다시 찾으니
새로 사귄 미치광이는 술꾼이 되고
전에 알던 호걸은 이미 거친 언덕 되었구나.
빠른 시간은 호로병 속의 해와 같지 않지만
개미 목숨은 오히려 물거품과 같구나.
지인을 만나 대도를 담론하니
눈 그친 서산에서 함께 마음껏 노니네.

天寒白日澹幽州(천한백일담유주)
燕市重尋舊酒樓(연시중심구주루)
新學瘋狂爲醉漢(신학풍광위취한)
故交豪傑已荒邱(고교호걸이황구)
駒光不似壺中日(구광불사호중일)
蟻命猶如水上漚(의명유여수상구)
我遇至人談大道(아우지인담대도)
西山晴雪共遨遊(서산청설공오유)

(장삼풍 《연조한유오구장춘수동유서산(燕趙閑遊䎸邱長春遂同遊西山)》)

구처기는 도교 전진도(全真道) 용문파(龍門派)의 조사로 일찍이 칭기즈칸을 찾아가 알현한 적이 있다. 몽골인들의 ‘장생천(長生天 역주: 몽골인들이 숭배하는 하늘 신으로 ‘텡그리’라고 한다)’이 바로 중원에서 말하는 ‘도(道)’로 중원은 신이 정한 하늘과 통하는 문이라고 말했다. 그 후 칭기즈칸은 구처기에게 천하의 도교를 관장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조서에서는 또 “짐은 평소 늘 신선을 동경해왔으니 신선은 짐을 잊지 마시라.”고도 언급했다. 구처기에 대한 칭기즈칸의 예우가 지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7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