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2장 감춘 듯 드러나는 대도진기(大道真機)

1. 대도의 연원[大道淵源]

천고(千古) 이래 중화 자손들은 신주대지(神州大地)에서 태어나고 자라왔다. 이곳에는 아주 오래된 전설들이 유전되어 오는데 ‘반고가 천지를 개벽하고’, ‘여와가 사람을 만들고’, ‘여와가 하늘을 수리’했다는 등이다. 또 수많은 신화 이야기가 전해져오는데 황제가 용을 타고 승천한 이야기, 후예(后羿)가 태양을 쏜 이야기, 항아가 달나라로 달아난 이야기 및 세계 각국의 여러 민족들이 앙모하는 유구한 문화인 태극, 하도, 낙서, 주역, 팔괘 등이 있다. 상고의 이런 문명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신이 창조했고 사람은 신이 만들었으며 사람이 생존하는 환경은 신이 개창해 준 것임을 알려준다.

이번 차례 인류 문명의 초기에 상제(上帝)께서는 오제(五帝)에게 서로 이어가며 인간 세상에 내려가 백성들을 교화하게 했다. 청제(青帝)인 태호복희(太皞伏羲)가 가장 먼저 세상에 내려와 천체의 운행규칙을 관찰하고 비로소 성위(星緯)의 글이 생기고 황하에서 용도(龍圖)가 나오고 낙수에서 귀서(龜書)가 나타나 괘를 그리고 책을 만들어 덕과 은혜를 널리 베풀었다.

뒤이어 적제(赤帝)인 염제신농(炎帝神農)이 세상에 내려와 백곡(百穀)을 심고 길러 백성들이 식량을 얻게 했다. 수(水)와 화(火)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조짐이기에 적제(역주: 火에 해당)의 뒤를 이어 현제(玄帝 역주: 水에 해당)가 내려왔다. 현제는 무당산에서 도를 이뤄 하늘로 날아오른(飛昇) 후 요마(妖魔)들을 제압하고 더러운 재앙을 쓸어버렸다.

황제(黃帝)는 중주(中州)에 거처해 온갖 신이 넘어설 수 없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덕을 닦고 큰 덕을 지녀(具修德,有茂德)’ 백관(百官)을 설치하고 집을 건축하고 배와 수레를 만들었다. 또 문자를 일으키고 간지(干支)를 제작했으며 악기를 만들고 의학을 창립해 후세에 무량한 공덕을 세웠다고 한다.

당시 “농부들은 서로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고 어부들은 자리를 다투지 않았으며 시장에선 값을 속이지 않았다. 시장에서는 인색하지 않았고 상인과 여행객이 서로 재물을 양보했으며 바깥문을 닫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은 부드럽고 거짓이 없었으며 평소 일을 하는데 꾸미지 않아 도(道)로 천하를 통일했다. “천하에 이치가 갖춰져 사물의 쓰임이 구비된” 것을 보고 황제는 이에 이산(黟山 지금의 황산)으로 가서 금단(金丹)을 연마했다.

금단 연마가 완성되었을 때 구슬상자, 성대한 의상, 보배로운 관, 진주신발 및 감로와 경장(瓊漿)이 든 옥병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뒤이어 하늘에서 백룡(白龍), 화려한 깃발(彩幡), 진주덮개가 내려왔고 황제는 70여 명의 신하들을 데리고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휘황한 장거를 직접 목격했으며 후세에까지 전해지며 찬송되었다.

황제 이후 성인(聖人) 요, 순, 우가 대홍수 기간에 세상에 내려와 하늘의 도를 관찰하고 하늘의 운행을 집행해 세간에서 사명을 완수한 후 도를 닦아 원만한 후 하늘로 되돌아갔다.

사람에게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주에는 성주괴멸(成住壞滅)의 법칙이 있다. 삼계(三界) 내의 물질은 모두 음양(陰陽) 양성(兩性)을 지녀 인간세상을 만들 때 선악(善惡)이 공존하고 정(正)과 사(邪)가 서로 관여했다. 요, 순, 우 이후 2천여 년의 번성을 거쳐 춘추시기가 되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이 일어나면서 마(魔)가 세간을 혼란시키고 사람의 사상을 혼란케 했다. 창세주(創世主)께서는 노자(老子)를 파견해 세상에 내려가 도를 전하게 하고, 석가모니는 불법을 전하게 하여 사람들이 덕을 중시하고 선을 행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 중화 자손들의 도덕수준이 상대적으로 안정되게 하셨다.

노자는 사람들에게 《도덕경(道德經)》 오천 자(字)를 남겨 성인(聖人)이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와 덕(德)에 대해 남김없이 설명했다. 성인은 만물을 일으키지만 스스로 크다고 여기지 않으며, 생성하고 길러주지만 자신의 소유로 자처하지 않으며, 베풀어주지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공이 이뤄져도 자신의 공으로 자처하지 않는다. 공에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은 오히려 영원불멸한다.

노자가 붓으로 써낸 성인은 바로 중화자손들의 조상인 황제, 요, 순, 우를 말한다. 노자는 “도를 잃은 후에 덕이 나타났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나타났다. 인을 잃은 후에 의가 나타났고 의를 잃은 후에 예가 나타났다. 무릇 예란 충과 신이 얇아진 것으로 혼란의 시작이다(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라고 했다. 그리고는 서쪽으로 함곡관을 나가 총총히 숨어버렸다.

2. 불(佛)과 도(道)의 경쟁

불교는 중토에 전해 들어온 후 그 보편적인 가치인 자비(慈悲)로 백성들을 교화하고 중원 황제들의 인정을 받아 신속히 전파되었다.

최후에 사람을 제도해 하늘로 돌아가는 창세주의 배치를 믿고, 창세주가 최후에 법을 전하고 도를 전하는 보편적인 형식이 되기 위해 일부 수도자들은 역대로 단독전수(單傳)하던 도가의 전통을 고쳐 널리 문도(門徒)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러 원시천존(元始天尊)을 최고의 신선으로 모시고 노자를 개산비조(開山鼻祖)로 삼으면서 《도덕경》을 떠받드는 도교가 형성되었고 역사적으로 수백 년에 걸쳐 불도(佛道)의 다툼이 나타났다.

남북조 시기부터 여러 차례 도사와 승려들이 불교와 도교 두 종교의 선후를 놓고 논쟁이 나타났다. 변론 중에서 당시 불교와 도교의 여러 폐단들이 폭로되었는데 결론은 불교와 도교 모두 청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북주(北周) 멸불(滅佛)시기에는 “불교와 도교 두 종교를 없애고 경전과 상을 모두 파괴하고 승려와 도사들을 백성으로 환속시켰다.”[당나라 영호덕분(令狐德棻)의 《주서(周書)》]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의 《의사태석리조병계(議沙汰釋李詔並啟)》에 따르면 당시 인구의 절반 가량이 승려와 도사였는데 모두 청정하지 않아 도관과 사찰에 요사한 기운이 가득했다고 한다.

수당(隋唐)시기에 들어와서도 승려와 도사들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당태종은 이 문제에 관해 따로 조서를 반포해 도선불후(道先佛後)의 규정을 정했다.

“노군(老君 노자)의 가르침은 그 뜻이 청허(淸虛)에 있고, 석가가 남긴 가르침은 그 이치가 인과(因果)에 있다. 그 가르침에서 보면 흡인하여 교화한 행적은 다르나, 그 근본에서 보면 널리 이롭게 하는 풍모는 일치한다. 그러나 대도(大道)의 실행은 머나먼 옛날에 비롯된 것이고, 그 기원은 무명(無名)의 시작에서 나왔으며 일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넘어섰다…….

하물며 짐의 조상이 노자에서 일어났음에랴. 이제 새로운 왕조가 극히 번창함은 조상의 은덕에 힘입은 것이고 천하가 크게 안정된 것 또한 무위(無爲)의 공에 의지함이다. 마땅히 제도를 고쳐 이 현화(玄化: 도교의 교화)를 널리 펼쳐야 한다. 앞으로는 재(齋 도교 의식)를 받들어 행하고 호칭에 있어서도 도사(道士)와 여도사(女官)를 승려의 앞에 두게 하라. 근본의 풍속을 널리 확장시켜 구주(九有)에 창달하게 하고 조상의 풍속을 존중해 모든 백성에게 이로움을 주도록 하라.” (《도사와 여관을 승니의 위에 두라는 조서(道士女冠在僧尼之上詔)》)

한편 불교의 밀종(密宗)이 중국에 전해진 후 남녀쌍수(男女雙修)의 수련법이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에 당나라 무종(武宗) ‘회창멸불’ 시기 밀종은 한인 지역에서 제거되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위(魏)나라 이후 불교(像教)가 점차 흥성해졌다. 말세의 혼란한 때에 이런 이국 풍속이 전해져 점차 습속이 되어 만연하게 되었다. 나라의 풍속을 갉아먹는데 이르러도 점차 자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의 뜻을 유혹하고 뭇 사람들을 더 미혹시켰다. 구주(九州)의 산간에서 장안과 낙양에 이르기까지 승려의 무리가 날로 많아지고 불교 사찰이 날로 숭배되고 있다. 토목공사에 많은 인력이 소모되고 금은보화의 장식을 위해 사람들의 돈을 빼앗으며 승려와 신도 관계에서 임금과 부모를 버리고 계율 때문에 배우자를 위배한다. 법을 파괴하고 사람을 해치는 것이 이 도(道 불교)보다 심한 게 없다.”라고 했다.

원나라 헌종(憲宗) 8년(1258년)의 불도(佛道) 대논쟁은 중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규격이 높은 토론회였다. 당시 회의는 쿠빌라이가 직접 주재했고 변론에 참가한 고승과 도사들이 모두 5백여 명에 달했는데 논쟁에서 도교가 크게 패했다. 결국 도사 17명이 칙령으로 도사 자격을 박탈당해 승려가 되었고 노자의 《도덕경》을 제외한 나머지 도가서적 및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 등을 모두 소각시켜 근본을 바로 잡았다.

원나라 때 몽골인들은 장밀(藏密 라마교)을 신봉했다. 불도의 상호다툼은 또 간접적으로 사람이 수련해서 신이 되고 반본귀진(返本歸真)하는 바른 신앙(正信)에 영향을 주었다. 중원 대지에서 사람들은 천고에 유전되어 온 도가(道家)수련 및 신통공능(神通功能)의 관계 및 개념에 대해 미혹되거나 의심에 빠졌다.

송대의 저명한 이학자 정이(程頤)는 당시 사람들이 도를 상실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질문: 신선의 설이 있습니까? 대답 : 어떠한지 모른다. 만약 백일비승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산림에 거처하며 형을 지키고 기를 단련해 연년익수(延年益壽)하는 거라면 있다고 할 수 있다.”(《정씨유서(程氏遺書)》) 이처럼 유명한 이학자 정이마저도 병을 물리치고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는 인정하지만 백일비승은 없다고 했으니 후세에 도(道)에 대한 이해가 미끄러져 내려간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원말명초(元末明初)에 장삼풍은 대도를 이뤄 진인이 되었고 속세를 벗어나 성인의 경지에 들어섰다. 나중에 명성조(明成祖) 주체(朱棣 영락제)는 무당산을 대대적으로 수리했고 역사적으로 대명 왕조가 도가문화를 숭상하는 최고봉에 다시 도달하게 했으며 현천상제(玄天上帝)를 주신(主神)으로 하고 장삼풍을 조사(祖師)로 삼는 무당 도가수련법문을 형성했다. 이는 인구의 절반이 넘는 중국인들을 흡인해 향불을 사르고 예배하게 했으며 전성기 때는 집집마다 정(鼎)을 안치하고 단을 연마할 정도였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