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3장 도로 음양을 관통하고 건곤이 태극을 운행

장삼풍이 드러낸 것은 보다 높은 우주관으로 당시 세간의 유(儒), 석(釋), 도(道) 각 가를 훨씬 초월해 대명(大明) 왕조에 도를 숭상하는 현풍(玄風)을 불러일으켰다. 장삼풍은 “귀하거나 천하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음을 막론하고 또 노소를 막론하고 오직 평소 음덕(陰德)을 행하고 인자하고 자비하며 충성스럽고 효도하며 진실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된다. 인도(人道)에 완전하면 선도(仙道)는 자연히 멀지 않다.(不拘貴賤賢愚、老衰少壯,只要素行陰德,仁慈悲憫,忠孝信誠。全於人道,仙道自然不遠也)”(《대도론》)고 했다.

하지만 인간세상은 미혹의 세계다. 노자는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하며(天得一以清,地得一以寧)”라고 했다. 노자가 은거한 지 2천 년이 지나 장삼풍은 《등천지미설(登天指迷說)》에서 “사람 몸의 조화는 천지와 같지만 하늘은 어째서 하나를 얻어 맑아지고 땅은 어째서 하나를 얻어 편안해짐을 모르는가? 또 조화를 주재하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는가?”라고 말했다.

생사를 초월하는 대법정도(大法正道)를 찾기 위해 장삼풍은 집을 버리고 벼슬을 내려놓고 장장 35년에 걸쳐 온갖 고생을 겪었다. 전국의 명산고찰을 두루 찾아다니다 고희가 되어서야 비로소 대도를 듣게 되었다. 장삼풍은 수도(修道)의 어려움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큰 자비심을 내어 태극권(太極拳)을 창립했다. 태극이란 만물의 어머니로 장삼풍의 태극권은 대도의 천기를 내포하고 있어 만물을 초월해 신의 영역과 직접 통할 수 있다.

태극권은 천백 년간 형성된 사람의 관념을 단번에 타파했으니 바로 눈으로 보는 것이 실제가 아니다. 태극권 동작은 완(緩 느리고), 만(慢 완만하며), 원(圓 둥글어)해서 겉으로 보면 주먹이나 발차기 모두 몹시 느려 보이지만 오히려 상대방을 아주 빠르게 가격할 수 있다. 태극권의 매 초식에는 모두 현기(玄機)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이쪽에서 아무리 빠르다 해도 다른 공간에서 그의 손만큼 빠르지 못하다.

장삼풍은 고희의 나이에 “홀로 백여 명의 적을 죽였다”고 하여 힘으로 이긴 게 아님을 분명히 했다. 태극권은 사람들에게 육안으로 보는 것의 제한성을 인식하게 했다. 빠르고 늦은 개념, 정(靜)과 동(動)의 개념, 크거나 작은 개념은 모두 진짜가 아니다. 진정한 힘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동시에 같은 곳에 존재하는데 옛사람들은 이를 내공(內功) 또는 내력(內力)이라고 불렀다. 진정한 공부(功夫 쿵푸)는 안에서 유래하며 태극권은 내가공부(內家功夫)의 선구를 열어주었으며 정묘하고 절륜하다.

1. 독보천하(獨步天下)

5천년 중국역사라는 큰 연극에서 무(武)에는 독특한 문화 내함(內涵)이 주입되었다. 무력으로 천하를 정벌한 세월 속에서 많은 영웅호걸이 풍류를 남김없이 드러냈는데 몸에 좋은 무예를 갖추자면 비범한 체력이 필요했다. 발군의 무예를 지는 대부분의 영웅호걸은 천부적으로 태어나는데, 예를 들면 “키가 팔 척이 넘고 힘은 솥을 들어 올릴 수 있는”(《사기‧항우본기》)서초패왕 항우(項羽)나 “나면서부터 신력(神力)을 지녀 약관이 되기 전에 삼백 근의 활과 8석의 쇠뇌(弩)를 당긴” 항금(抗金)영웅 악비(岳飛) 등이 그렇다.(《송사‧악비전》)

장삼풍의 시대에 오면 무술에는 이미 다양한 문파가 형성되어 중토에서 널리 유전되었다. 천하에 이름을 떨친 소림사 안에서도 각종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무술문파들이 유전되었다. 13곤승(棍僧 곤봉을 무기로 쓰는 승려)이 당왕(唐王 역주: 당나라 무덕 3년 이세민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소림사 무술 승려들의 도움으로 강적 두건충의 부하를 제압한 적이 있다.)을 구했기 때문에 소림무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중 소림권(少林拳)은 주먹을 사용할 때 힘으로 신속하고 맹렬하게 하여 기세는 크지만 초식은 가라앉는다(勢大招沉). 마치 광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것과 같아서 손발이 화살 같고 바람소리만 “휙휙” 들릴 뿐이다.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의 대학자 황종희(黃宗羲)는 《왕정남묘지명(王征南墓志銘)》에서 “소림권은 용맹으로 천하에 이름을 얻었지만 주로 사람을 타격하는 것을 위주로 했고 사람들 역시 여기에 편승했다. 소위 내가(內家)란 정(靜)으로 동(動)을 제압하는 것이니 공격자의 손이 들어오는 것에 상응해 적을 넘어뜨린다. 때문에 소림 외가(外家)와는 다르며 모두 송나라 때 장삼풍에서 비롯되었다.”라고 했다.

《장삼풍전집(張三豐全集)》에서는 “권법의 용맹한 기예는 소림을 외가(外家)로 하고 무당 장삼풍을 내가(內家)로 한다. 삼풍 이후에는 관중(關中 지금의 섬서 일대) 사람 왕종(王宗)이 있었는데 왕종이 온주(溫州)의 진주동(陳州同)에게 전수했다. 진주동은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의 사람이다. 이에 오늘날 양가(兩家)의 전승이 절동(浙東)에서 성행했다. 청나라 순치(順治) 연간에 왕래함(王來咸 자가 정남征南)이 가장 유명했는데 은(鄞 지금의 절강성 영보 인근)사람이다.”라고 했다.

장삼풍이 무당산을 떠난 후 태극권이 민간에 유입되었고 2백년 후에야 비로소 장삼풍이 내가권을 창립했다는 문자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정남은 내가권 전수자의 하나로 만년에 황종희를 알게 되어 서로 좋은 벗이 되었다. 그는 평생 제자를 받는데 아주 엄격해서 내가권의 진수는 단지 황종희의 아들인 황백가(黃百家)에게만 전수했다.

황백가는 《내권가법(內拳家法)》에서 장삼풍이 소림 공부(功夫)에 정통했지만 소림권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권법을 창조해 내가(內家)라고 불렀는데 “그 하나둘만 얻어도 소림을 이기는데 충분하다.(得其一二者,足以勝少林)”고 했다. 이에 무학(武學)에서 처음으로 내가와 외가가 나뉘기 시작했고 외가는 소림을 으뜸으로 치고 내가는 무당을 존숭하게 되었다.

“장삼풍은 이미 소림에 정통했지만 다시 이를 뒤집어 내가라 했다. 그 하나나 둘만 얻어도 족히 소림을 이길 수 있다.(張三豐既精於少林,複從而翻之,是名內家。得其一二者,足以勝少林)”(황백가 《내권가법》)

한편 청나라 가정 연간의 《영파부지(寧波府志)》에는 장송계(張松溪)의 신기한 무공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스스로 장삼풍을 본받은 거라고 했다.

장송계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신중해서 마치 유생과 같았으며 체격이 마르고 약해 겉보기엔 옷 무게조차 감당하기 힘들어보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음을 알고 그를 불러 시험해보려 했으나 그는 늘 겸손히 물러나곤 했다. 당시 소림승려가 소림권의 용맹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일본 강도가 나타났다. 지방 관아에서 소림승려들을 모집해 일본강도를 공격하게 했다. 소림승려가 장송계에 관한 소문을 듣고 만나기를 청했지만 송계는 모습을 감추고 나타나지 않았다.

한번은 송계가 여러 승려들이 무술을 연습하는 것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웃으며 나타났다. 소림승려는 그가 장송계임을 알고 시합을 요구했다. 송계가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정 무술을 겨루고 싶다면 향리(鄕吏 지방관)를 증인으로 세워 설령 시합 도중 죽더라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노라고 약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소림승려가 이에 동의하자 송계는 팔짱을 끼고 앉았다. 한 승려가 도약하며 비각(飛腳 역주: 모둠발차기로 양발을 동시에 머리 높이까지 올려 차는 것.)을 날리자 송계는 몸을 약간 옆으로 굽히면서 손을 들어 맞섰다. 그러자 승려가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누각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고 겨우 숨만 남았다. 여러 승려들이 깜짝 놀랐고 진심으로 탄복했다.

장송계 고향에서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젊은이들은 늘 그와 시합을 하려 했다. 한번은 젊은이 몇 명이 성(城)안 한 지역을 막아놓고 송계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오늘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으니 반드시 우리와 시합을 하셔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된 송계가 그들에게 수백 근 가량 나가는 큰 돌을 한곳에 모아놓게 하자 그들은 끙끙거리며 3개의 큰 돌을 한곳에 쌓아놓았다. 송계가 “나는 쓸모없는 칠십 노인에 불과하니 자네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겠군.” 하면서 왼손 손날을 들어 가르자 세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의 신기한 능력이 이와 같았다.

또 왕정남(王征南)이 있었다. 그는 사람됨이 아주 기민하고 눈치가 빨라서 태극권을 배운 후에는 결코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몹시 곤란한 지경에 처하지 않는다면 결코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왕정남묘지명(王征南墓志銘)》에는 그가 태극권을 이용해 적을 물리친 2가지 일화가 나온다.

왕정남이 일찍이 군대에 들어간 적이 있다. 한번은 밤에 정찰을 나갔다가 적에게 체포되어 어느 복도 기둥에 뒤로 결박당해 있었다. 수십 명이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 정남이 사기조각을 하나 집어 몰래 밧줄을 끊었다. 가슴에서 은냥을 꺼내 공중에 던지자 지키던 병사들이 돈을 줍기 위해 앞을 다퉈 달려들었다. 이 틈을 타서 정남이 탈출하자 수십 명의 간수들이 급하게 추격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바닥에 뻗어버렸다.

또 한번은 정남이 혼자 밤에 길을 가는데 우연히 7~8명의 탈영병을 만났다. 그들은 왕정남을 붙잡고는 등에 무거운 물건을 지게 했다. 정남이 애걸하며 봐달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정남이 다리를 건너다 등에 진 무거운 물건을 버리자 병사들이 칼을 꺼내 정남을 찌르려했다. 정남은 맨손이었지만 순식간에 병사들이 땅에 쓰러졌고 쨍그랑하고 칼이 땅에 떨어졌다. 왕정남은 결국 그들의 칼을 가져다 모두 우물 속에 던져버렸다. 탈영병들이 칼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왕정남은 자신의 기예를 황종희의 아들 황백가에게만 전수했다. 나중에 황백가는 자신의 기예를 전수할 도제를 찾지 못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내가 정남 선생님의 기예를 저버렸구나. 이 기예는 이제 광릉산(廣陵散)이 되어버렸도다.”

역주: 광릉산(廣陵山) 위진 시대 죽림칠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혜강(嵇康)이 기인의 전수를 받아 혼자만 연주할 수 있었던 거문고 연주곡의 이름이다. 나중에 혜강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에 처해지면서 실전되었다. 이후 광릉산은 전수자를 찾지 못하고 실전된 기예(技藝)의 대명사로 쓰인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