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송명(宋明)

【정견망】

중국 고대에는 승려든 도사든 그가 오직 출가하기만 하면 세인들은 그를 ‘반신(半神 역주: 절반은 신이고 절반은 사람이란 의미)’으로 간주했고 더 이상 평범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역사상의 불교와 도교는 비록 한가지 수련형식에 불과했지만 그 속에서 진정으로 수련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다.

부처 수련을 말하면 최후의 목표는 바로 초과나한(初果羅漢)에서 시작하는 부동한 정과(正果)의 과위를 얻는 것이고, 수도(修道)를 말하면 소위 장생하는 도에서 최후에는 진인(真人)으로 수련성취 되는 등이다. 다시 말해 이는 불도(佛道) 양대 체계의 차이가 조성한 각기 다른 표현이다.

한 평범한 사람이 신불(神佛)처럼 그런 위대한 생명으로 수련 성취되는 이것은 신불이 중생에게 개창해준 일종의 개인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생명을 구도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 수련자에 대해 말하자면, 분명한 것은 인류라는 이런 생명형식을 초월한, 보다 높은 표준과 요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출가인을 ‘반신(半神)’으로 간주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다.

또 다른 원인이라면 역사상의 수련은 어느 가(家) 어느 문(門)을 막론하고, 첫 시작부터 대부분 사람 신체의 가장 표면에서부터 시작해서 개변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면 일부 신통한 공능이 나오기가 아주 쉽다. 그렇다면 세인들은 곧 그를 ‘신(神)’으로 여기게 된다. 사실 수련의 각도에서 말하자면 그는 겨우 방금 입문한 것에 불과하며 아울러 정법문(正法門) 수련은 모두 공능이나 신통 따위를 중시하지 않는 것으로 대도(大道)와 불법(佛法)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왜 ‘반신’인가? 왜냐하면 필경 수련인에게 잘 닦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인데, 잘 닦이지 못한 그 일면은 바로 사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중국 고대, 특히 주(周)나라 이전 고대 역사 속에서, 당시의 인류사회는 도덕표준이 상대적으로 비교적 높았기 때문에 한편으론 세인들에게 아주 쉽게 펼쳐낼 수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론 사람이 신(神)에 대해 이런 바른 믿음(正信)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수련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람과 신이 함께 하던(人神同在) 시기였다. 우리는 《봉신연의》 속에서 당시의 그런 구체적인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해나감에 따라 인류의 사상 역시 갈수록 복잡해졌으니 바로 사람마음이 갈수록 더 자사(自私)하게 변한 후 전체 사회도덕 역시 아래로 더욱 빨리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렇다면 신불(神佛)은 더는 쉽사리 사람에게 현현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사람 역시 신불에 대해 갈수록 믿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도덕이 계속해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소위 세상 기풍이 날로 저락해 인심이 예전과 같지 않은데 이런 전반적인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불은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에게 경고하고, 선을 향하도록 권고해, 생명이 진정으로 구도 받을 수 있는 기연을 기다릴 수 있도록 했다.

“고개를 들면 석 자 머리 위에 신령이 있다.”

“사람 사이의 비밀스런 말도 하늘은 우레처럼 듣는다.”

“사람마음에 일념(一念)이 생겨나면 천지가 모두 안다.”

“선악은 언젠가는 보응이 있으며 단지 빠르고 늦은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세상이란 이런 미혹의 환경 속에서 신불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고, 신불에 대한 바른 믿음이 있을 수 있는가 여부는, 사람에게 있어 하나의 아주 관건적인 문제가 되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신(神)이 정말로 사람을 만들었다면 그럼 신과 사람은 아주 깊고 끊으려 해도 끊어버릴 수 없는 연원관계가 있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신을 믿지 않거나 심지어 신을 배신한다면 그럼 이 사람은 어떤 방향으로 가겠는가? 이는 몹시 두려운 후과(後果)가 아닌가?

중공 사당의 사악함을 말하자면 그것은 사람이 신불을 배반하게 만들어 사람을 뿌리가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사람이 진정으로 신의 구도를 받을 수 있는 희망을 단절시켰다. 바로 그것이 무신론(無神論)을 선양해 조성한 사악한 범죄의 하나다.

세계적으로 많은 민족의 문화 속에는 서로 다른 신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고 또한 역사적으로 오늘날 신이 돌아온다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서는 신이 장차 돌아와 사람에 대해 최후의 심판을 진행한다고 한다. 불경에는 우담바라 꽃이 활짝 피어날 때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세상에 내려와 법을 전하고 사람을 구도한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예언은 이보다 더욱 체계적이고 더욱 다양한데 거의 매 조대(朝代)마다 하나의 체계적인 예언을 후인들에게 남겨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역사상 오늘날 한 가지 큰 사건이 발생한다고 예언하는데 그중 한 가지 표현이 바로 사람이 신과 함께 하는 시기다.

이상 수많은 사례와 예언들이 모두 다음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 억만의 사람들이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는 현상과 중공사당의 사악한 탄압 및 이 때문에 생겨난 파룬궁 수련자들이 반박해(反迫害) 중에서 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하는 활동이다.

파룬궁은 또 파룬따파(法輪大法)라고도 불리는 불가(佛家)의 상승수련대법이다. 1992년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이 중국에서 전하셨고 우주 최고의 특성 ‘진선인(真善忍)’을 지도로 삼아 불과 7년 만에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방식으로 수련인 수가 억 명에 달했다. 하지만 1999년 7월 20일 중공사당이 당파의 이익을 위해 잔혹한 탄압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중단되지 않고 있다.

파룬궁이 대표하는 ‘진선인(真善忍)’과 공산당이 대표하는 사악(邪惡)이 보여준 지난 십수년간의 박해와 반박해란 심각하고 선명한 대비는 파룬궁 진상을 알 기회가 있는 매 세인에게 각기 다른 정도로 내심 깊이 충격을 주었고 세인들에게 진일보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파룬궁은 대체 무엇인가? 공산당은 왜 이렇게 사악한가? 왜 이번 박해가 있을 수 있는가? 이번 박해에 직면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번 박해가 비록 사악하고 또 관련된 사람의 수가 아주 많으며 박해의 표현 역시 대단히 잔혹하지만 억만 파룬궁 수련자들은 모두 신의 길 위에서 걸어가는 수련인들이다. 그들은 반신(半神)이며 그들은 잘 닦인 신(神)의 일면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역사상의 수련자들과는 같지 않다. 그들은 생명의 가장 미시적인 곳부터 개변이 시작되기에 표면적으로는 큰 면적으로 신통한 공능을 표현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신(神)을 박해할 수 없는 것으로 진정한 파룬궁 수련자는 모두 장차 원만해서 귀위(歸位)할 것이니 박해자의 끝장은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박해받는 것은 사실 세인들이다. 세인은 진상을 모르기 때문에 중공사당이 날조한 거짓말을 듣고 믿거나 또는 이번 박해는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면서 사실을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생명을 진정한 위기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 위기는 바로 정의(正義)와 사악(邪惡)의 사이에서 당신이 정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곧 사악을 따라갈 것이며 사악의 끝장, 공산사당의 끝장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파룬궁을 박해하기로 선택한 그 날부터, 우주대법 ‘진선인(真善忍)’과 대립면에 선 그때부터, 그것의 끝장은 이미 잘 정해진 것이다.

동서고금에 무수한 사람들이 신불(神佛)을 찾아왔고 신불이 걸었던 길을 찾아왔다. 하지만 신불의 출현은 오직 신불의 의지에 따라 출현할 수 있을 뿐 사람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세간에서 행하고 사람의 언어로 법리(法理)를 알려야 하니”(《정진요지 2》〈신(神)의 서약은 실행 중이다〉) 신불의 귀래(歸來)는 오늘날의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이 진정으로 구도받을 수 있는 기연(機緣)이 도래한 것이다.

세인이 깨달을 수 있는가 여부, 믿을 수 있는가 여부는 그가 구도 받는데 있어 지극히 중요한 조건이자 또한 구체적인 표준이 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줄 때, 당신이 한 장의 전단지나 CD를 볼 때,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신불이 이미 인간 세상에 있다고 알려줄 때, 당신의 태도가 장차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전세계 순회공연을 하고 있는 예술의 성대한 축제인 ‘션윈(神韵)’을 본 관객들이 공연이 끝난 후 집에 돌아가는 것조차 잊게 만드는 이유는 진정한 수련인이 연기하는 예술의 표현력 때문이자 또한 진정으로 신불이 무대 위에서 인간 세상에 왔노라고 펼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관중은 정말로 신불(神佛)이 내려왔다고 경탄하고, 어떤 이는 그것은 신불의 자비로운 구도라면서 감동한다. 역사가 오늘날 이 한 페이지를 넘길 때면 미래의 사람들은 대법 수련자의 위대함을 보게 될 것이며 파룬따파(法輪大法)와 파룬따파를 중생에게 가져다주신 리훙쯔(李洪志) 대사님의 큰 은혜에 더욱 감사하게 될 것이다.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118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