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송명(宋明)

【정견망】

중국인들은 예부터 신주(神州)라 불린 이 땅 위에서 번성하고 대를 이어 전승해가면서 5천 년간 휘황찬란한 중화신전문명(中華神傳文明)을 창조했다. 지금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역사를 돌아볼 때면 사서(史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다시피, 특히 최근 2천여 년간 조대(朝代)가 어떻게 교체되고, 세상일이 어떻게 변천했든, 화하(華夏)문명은 경탄스러울 정도로 완정하고 연속적이며 풍부하고 다원적인 형식으로 전승해 내려왔다.

비록 역사의 장하(長河) 속에서 때로 잃어버린 것도 있었지만 문자기록, 역사유적, 음악이나 회화, 건축과 복식, 민간전설 등의 방면에서 우리의 뼛속 내심 깊은 곳에 문화 내함(內涵)이 스며들었고 오늘날 중국인들이 여전히 중화신전문화에 대해 높이 우러러보고 동경하며 자부심을 갖게 한다.

신전문화의 핵심인 수련문화(修煉文化) 역시 대대로 전승되어 중국인들의 다양한 각종 생활방면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이고 내심의 정신세계에 훨씬 깊은 영향을 끼쳤다.

선진(先秦 진나라 이전) 시기의 중국은 사람이 신(神)과 함께 하는 시기였으나 점차 예악(禮樂)이 붕괴되고 도덕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신에 대한 바른 믿음이 사라져버렸다. 신(神) 역시 더는 쉽게 드러낼 수 없게 되었고 세인들 역시 신을 찾기 위해 보다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다.

때문에 우리가 역사 속에서 진시황(秦始皇)・한무제(漢武帝) 두 제왕은 신선의 약초를 구하기 위해 사람을 파견했다는 황당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시피 위에서 하면 아래에서 무조건 추종하는 도(道)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한 명제(明帝) 때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는데, 《위서(魏書)·석로지(釋老志)》에는 명제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고 사신을 파견해 부처를 찾게 했고 나중에 낙양에 백마사를 건립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불교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한 순제(順帝) 때 장도릉(張道陵)은 또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창립했으니 중국 본토의 도교(道敎)는 여기서부터 흥성했다.

삼국시대에는 또 도인양성술(導引養性術)이 있어서 많은 사대부들 사이에 큰 유행이 되었다. 위진(魏晉)시기에는 자연을 숭상하고 청담(淸淡)을 좋아해 선비들이 오석산(五石散 역주: 5가지 돌을 재료로 만든 가루약으로 주로 연단에 사용됨)을 즐겨 먹었고 도가 외단술(外丹術)의 기원이 되었다.

남북조(南北朝) 시기에는 불교가 번창해서 오늘날의 돈황, 용문, 운강 마애석굴에 새겨진 조상(造像)을 보면 당시 불교가 얼마나 성대했는지 알 수 있다. 소위 ‘남조(南朝) 680사’란 말이 있었으니 남조에만 큰 절이 680개나 있어 당시 불교를 믿는 백성들이 아주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선종(禪宗)을 창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당대(唐代)는 중화신전문명의 전성시기이자 포용하는 도량이 커서 불도(佛道) 양대교(兩大敎) 모두 크게 발전했다. 황족이나 사대부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부처를 믿고 도를 믿는 분위기가 크게 성했다. 당나라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진짜 경전을 구해온 공(功)을 말했고 특히 당태종이 직접 쓴 서문은 정교(正敎)의 덕(德)을 널리 드러냈다. 또 이 시기에 《추배도(推背圖)》 예언이 세상에 전해졌고 손사막(孫思邈)과 같은 약왕(藥王)이 있었으며 해와 달 및 뭇별이 빛을 내듯이 각자의 장점을 드러냈다.

송나라 태조는 화산(華山)에서 진단(陳摶)이란 도사를 만났고 금나라 때의 도사 구처기(丘處機)는 새외에서 칭기즈칸을 만났으니 도교가 흥성할 때였다. 아울러 명조(明朝)에서는 또 한 번 도교가 정상에 올랐으니 지금 사람들이 잘 아는 태극권은 명대 도사 장삼풍(張三豐)이 전한 것이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불교, 특히 티베트 불교가 큰 발전을 보이며 전파되었다. 강희제의 부친인 순치제(順治帝)는 젊은 나이에 제위를 버리고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강건성세(康乾盛世 역주: 청나라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는 시기)는 당나라 태종의 정관(貞觀)성세나 현종의 개원(開元)성세와 비교할 수 있는 중국 역사상 최후의 태평성세였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해야 할 것은 종교 자체는 수련이 아니며 신불(神佛) 역시 종교 형식은 중시하지 않고 오직 사람 마음만 본다는 점이다. 물론 종교 중에서, 특히 원시 불교나 도교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종교라는 수련형식을 통해 공을 이뤘지만 근대에 이르러, 특히 중공이 나라를 훔치고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종교의 부패상이 잇따라 드러났고 종교는 더 이상 수련인이 깨끗하게 닦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역사상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련을 했을까? 이 숫자를 따지는 것은 사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여기서는 일단 선진(先秦) 시기는 논외로 하고, 그것도 우리가 잘 아는 역사인물에 국한해서 말해보자.

진(秦)나라 이후 누구에게나 익숙한 서한 초기 개국공신 삼인방(역주: 한신, 소하, 장량) 중에서 장량(張良)은 결국 도를 닦으러 떠났다. 앞서 언급한 장도릉은 바로 장량의 8대손이자 중국 도교의 창시인이다.

제갈량 역시 도가 인물로 《마전과(馬前課)》란 예언을 남겼다. 위진 시기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유명한 혜강(嵇康)은 도인술(導引之術)에 능했다. 당나라의 대 시인 중 청련거사(青蓮居士) 이백은 도를 좋아한 도사였고 향산거사(香山居士) 백거이는 부처수련을 좋아했으며 왕유(王維)는 호가 마힐(摩詰)거사일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송대의 소옹(邵雍 소강절)은 역수(易數)를 깊이 연구해 하늘과 사람을 연구했으며 미래를 예지할 수 있었다. 《매화시(梅花詩)》는 바로 그가 남겨놓은 예언이다. 명나라의 유백온(劉伯溫)은 태조 주원장이 천하를 차지하는 것을 도왔고 또한 후세를 겨냥해 《소병가(燒餅歌)》와 《금릉탑비문(金陵塔碑文)》 등의 예언을 남겨놓았다. 역사적으로 불교의 고승대덕은 셀 수 없이 많았으면 후인들에게 4부의 《고승전(高僧傳)》을 남겨놓았다.

이상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 외에도 다양한 업종마다 수많은 인물들이 존재한다. 어떤 이는 늘 우리 귀에 익숙하고 또 어떤 이는 그 생애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설속에 유전된 인물도 있다.

가령 목장(木匠)의 조사(祖師)라 할 수 있는 노반(魯班)은 전설에 따르면 하늘을 나는 나무새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또 그림의 성인인 화성(畫聖)으로 불리는 오도자(吳道子)는 그림이 실물과 너무나도 똑같이 닮았고 또 그의 화풍을 가리켜 오대당풍(吳帶當風)이라 불리는 여예를 누렸다. 신불(神佛)의 두광(頭光)을 단번에 한 붓으로 그려내도 모습이 아주 생생했다.

또 음악의 성인인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사광(師曠)은 그가 ‘청치(清徵)’를 연주하면 검은 학이 내려와서 대열을 이뤄 춤을 추웠고 ‘청각(淸角)’을 연주하면 비바람이 몰아쳐 휘장을 찢고 기와까지 날라 갔다고 한다.

또 유명한 의사 편작과 화타는 세상에서 신의(神醫)로 불렸다.

이외에 손빈(孫矉), 방연(龐涓), 소진(蘇秦), 장의(張儀), 모수(毛遂), 서복(徐福) 등의 제자를 배출한 귀곡자(鬼谷子)는 민간에서 왕선노조(王禪老祖)로 불리는데 풍수지리의 조사로 불린다.

이원행(梨園行 역주: 현종이 만든 일종의 종합예술단)의 조사라 할 수 있는 명황(明皇)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의 뜨거운 사랑이야기는 백거이의 손을 거쳐 《장한가(長恨歌)》로 불리며 천년이 넘게 전해지고 있는데 이 역시 신선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또한 중국 각지에 널리 퍼진 역사문화유적이나 고대의 건축예술, 고대 불교 조상, 가령 돈황 막고굴(莫高窟)의 비천(飛天)선녀와 같은 수많은 마애석굴의 조상들은 장인들의 정교한 공예를 반영하지 않음이 없다. 소위 ‘기예는 도에 가깝다(技近乎道)’고 하는데 다시 말해 신불(神佛)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부터 걸출한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학생을 유생(儒生)이라고 불렀는데, 수업 전에 모두 가부좌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조용히 한 후에야 책을 보았다. 과거에는 이랬는데, 옛날 중국의 각 분야에서는 거의 다 호흡을 조절하고 마음을 조용히 함을 중시했다. 이런 상태에서 평소에 하지 못하는 많고도 많은 일들을 해내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기공 수련과 아주 근접한 것이다. 옛 중국인의 사상관념 속에는 줄곧 이런 문화가 관통하고 있었다.”(《싱가포르 불학회 설립식 설법》)

13세기 말부터 시작해 16세기에 흥성한 르네상스 시기에 유럽에서는 단테,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인물들이 용솟음치듯이 나타나 오늘날 인류문명에 전해지는 불후의 걸작들을 창조해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경건한 정교(正敎) 신도였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근대에 들어와 서양에서 건너온 공산사령(共產邪靈)의 통제 하에서 무신론을 선양하는 공산사당이 중화신전문화에 대해 약 1세기에 가까운 전면적이고 훼멸적인 파괴와 중국인들의 육체와 정신에 잔혹한 박해를 가한 후 중화신전문화는 전승이 거의 단절될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스러운 점은 파룬궁(法輪功 또는 파룬따파라고도 한다)이 전해져 나와 중화신전문명의 부흥을 위한 진정한 희망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곧 이 한 페이지를 넘길 때면 모든 중국인들은 반드시 선택에 직면해야 한다. 염황(炎黃 신농과 황제)의 전인(傳人)이 될 것인가 아니면 마르크스레닌의 자손이 될 것인가? 또한 모든 사람이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 대체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은 무엇인가? 중공의 사악한 박해는 왜 중화대지 위에서 오늘날까지 자행되고 있는가?

또한 이를 통해 사람과 신불(神佛)・천지・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새롭게 수립해야 하며 더 나아가 우리가 대대로 전승할 만한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현재 세계 순회공연을 펼치고 있는 션윈(神韵) 예술단의 성대한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션윈이 펼쳐낸 중화5천년 신전문화의 정수에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다. 마치 신불이 직접 인간 세상에 강림한 것처럼 보이는 생생한 스크린과 순선(純善)순미(純美)한 예술표현이 세인들을 감동시켰고, 사람들 역시 점차적으로 이는 신불(神佛)의 회귀이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간절히 고대해왔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118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