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2. 거부 심만삼을 도화

명청(明淸)시대 필기소설 중에는 장삼풍 및 그 제자들의 사적에 관한 내용이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내용은 바로 장삼풍과 천하갑부 심만삼(沈萬三)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신묘불측(神妙不測)한 살아 있는 신선이고 또 한 사람은 강남 제일의 갑부라 이들의 일화가 미혹에 빠진 세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장삼풍전집》에 따르면 심만삼의 부는 당시 천하 으뜸이라 장삼풍이 연금술을 시도할 수 있는 근원이 되었다.

심만삼의 집은 원래 장강(長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인 주장(周莊)으로 처음에는 지역의 평범한 어민에 불과했다. 원나라 순제 지정(至正) 19년(1359년) 우연히 한 도사를 만났는데 “신채(神采)가 맑고 고상하며 거북 같은 외모에 학 같은 골격, 큰 귀와 둥근 눈, 큰 키에 창모양의 수염을 지녔다.”

심만삼이 보니 그는 “머리에 언월관(偃月冠 반달 모양의 관)을 쓰고 손에 삿갓과 도척(刀尺 칼자)을 들었는데 춥거나 덥거나 늘 삿갓 하나에 아무 장식도 없는 누더기 옷 한 벌만 걸치고 다녔다.” 또 보니 “하루에 천리를 다녔고” 밥을 먹을 때면 “한말 이상을 먹거나” 또는 “수개월을 먹지 않고 벽곡(辟榖)했는데” 음식을 먹지 않아도 용모가 여전히 풍만하고 윤기가 있었다. 심만삼은 이에 그가 방외(方外)의 이인(異人)임을 알았다.

심만삼은 본래 “마음이 너그럽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장삼풍에 대해서는 더욱 “극진히 모셨다.” 어느 날 장삼풍이 술에 취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이를 들은 심만삼이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면서 장삼풍을 조사(祖師)로 모시고 가르침을 청했다.

“어리석고 속세에 찌든 저를 구제해주시기 바라오며 부나 장수 따위는 감히 바라지 않겠습니다.” 장삼풍이 이에 그를 도제(徒弟)로 받아들이고 연금술을 가르쳐주었다. “이에 약재를 준비하고 날짜를 선택해 제련을 시작했다.” 칠칠 사십구 일간 화로에 불을 피웠지만 이루지 못하자 장삼풍이 탄식해마지 않았다.

심만삼은 스스로 기연(機緣)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여겨 이에 전 재산을 투입하고 또 갖고 있던 배와 그물까지 다 팔아서 모은 돈으로 다시 제련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연금(煉金)이 절반 정도 되었을 때 갑자기 불이 나서 연금을 하던 단로(丹爐)와 초가집마저 전부 불타버리고 말았다. 심만삼은 자신에게 복이 없음을 깊이 탄식했고 장삼풍 역시 그에게 더는 연마하지 말라고 권했다.

심만삼 부부는 추호의 원망하는 마음도 없이 장삼풍에게 다시 제련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돈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부부는 어린 딸을 팔기로 상의했다. 장삼풍은 부부의 뜻이 정말로 굳센 것을 보고는 속으로 기뻐했다.

결국 장삼풍은 “다시 구리, 철에 수은을 뿌려서 황백(黃白 금과 은) 및 옥석(玉石)을 모두 이루고 이어서 장생(長生)하게 했다.” 장삼풍은 또 심만삼이 나중에 변방으로 유배당하는 재앙이 닥칠 것을 미리 알고 떠나기 전에 당부했다. “동남쪽에 왕기가 크게 성하니 서남쪽에서 자네와 만날 것이다.(東南王氣大盛,當晤子於西南也)”

이에 심만삼이 “화로를 설치하고 제련을 크게 하자” 1년이 못되어 “천하제일의 갑부가 되었으며” “무릇 가난하거나 궁핍하거나 재난을 당한 사람을 만나면 널리 베풀었다.” 심만삼은 또 무역을 하면서 “전국을 두루 다녔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심만삼이 취보분(聚寶盆 보배를 모으는 화분)을 얻었기 때문에 재물이 끊이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심만삼을 가리켜 “자산이 거만에 달하고 전답이 옛날 오(吳)나라 땅보다 넓다”고 했다.

한편 《전남천약(滇南踐約)》의 기록에 따르면 명 태조 홍무(洪武) 연간에 남경성(南京城)의 성벽이 홍무문(洪武門)에서 수서문(水西門)까지 붕괴되었다. 그런데 성벽 아래 수괴(水怪)가 잠복한 굴이 있어 성벽을 쌓기만 하면 다시 무너져 내리곤 했다. 주원장이 심만삼을 불러 “네 집에 보배를 모을 수 있는 화분이 있다는데 흙을 모아서 문(門)을 만들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심만삼이 감히 따지지 못하고 명령을 받들어 성벽을 건축했다. 막 기초를 세웠는데 3분의 1이 무너졌다. 심만삼이 몰래 연단해서 만든 금을 투입해 겨우 완성할 수 있었고 거만금을 소비했다. 이때 주원장은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어 했다. 심만삼을 불러 “우리 군사가 백만인데 일인당 한 냥이면 충분할 것이다.”라며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심만삼은 원하는 대로 돈을 주면서도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홍무 25년(1392년) 심만삼이 태조 주원장에게 죄를 지어 온가족이 요양(遼陽)으로 쫓겨났다가 나중에 운남(雲南)으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온갖 마난을 거친 후 운남에서 다시 장삼풍을 만난 후 공성원만하여 백일비승(白日飛昇)했다.
심만삼 일가족은 모두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 장삼풍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유금릉증심만삼(遊金陵贈沈萬三)》--금릉에서 노닐며 심만삼에게 주다
 
진회(秦淮 강 이름)의 너그러운 대부호가
부귀영화는 저녁노을 같음을 간파했네.
달밤에 배를 띠워 녹주를 사면서
그대 날 따르며 단사(丹砂) 물음에 감동했네.
황중(黃中)의 오묘한 이치 어느 누가 알리오?
백하(白下 남경의 지명)의 영웅이란 이는 과장이라.
전 재산 들여 도법(道法) 깨닫길 원하니
같이 있던 처자식도 한탄하지 않는구나.

秦淮落落大漁家(진회낙락대어가)
看破浮雲似暮霞(간파부운사모하)
乘月泛舟沽綠酒(승월범주고록주)
感君從我問丹砂(감군종아문단사)
黃中妙理何人識(황중묘리하인식)
白下英雄此個誇(백하영웅차개과)
願把貲財參道法(원파자재참도법)
一堂妻子不咨嗟(일당처자부자차)

《별삼만(別萬三)--삼만과 헤어지며》

뭇 영웅 어지럽게 모두 정벌하는데
나는 선생과 도를 담론하네.
지금 동남쪽에 왕기가 성하니
언젠가 서남에서 그대와 만나리라.

群雄擾擾盡征戡(군웅요요진정감)
我與先生把道談(아여선생파도담)
今日東南王氣盛(금일동남왕기성)
他年晤子到西南(타년오자도서남)

《장지운남선기고인병서(將之雲南先寄故人並序)》--운남으로 떠날 친구에게 미리 부치다 및 서문

나는 홍무 2년 기유년부터 24년 신미년까지 무당산에서 23년을 거처했다. 이 사이에 단경(丹經)을 저술하고 맑은 휘파람 불며 자취를 감추고 구름과 학을 타고 다녔다. 근자에 듣자하니 심만삼이 조정에 죄를 지어 운남으로 유배를 간다는데 그 사위 여(余)군도 연좌되었다 한다. 서남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내가 실행할 때가 되었는가? 이에 이 글을 적어 먼저 멀리 외진 곳에서 수자리 하는 사람을 위로한다.

호리병 속 해와 달 동천 속의 봄 맞으며
이 몸이 23년간 정(靜) 속에 있었는데,
멀리 운남으로 유배간단 소식 듣고
남만(南蠻)의 비바람에 옛 벗을 떠올리네.

壺中日月洞中春(호중일월동중춘)
二十三年靜裏身(이십삼년정리신)
遙知遠徙雲南客(요지원사운남객)
蠢雨蠻風憶故人(준우만풍억고인)

《전남회심자삼산겸증령천여십사(滇南會沈子三山兼贈令倩余十舍)》

일가권속이 노니는 신선
장인과 사위가 함께 운남에 사니
옥간(玉澗)의 사위는 여십사요
빙청(冰清)의 늙은 장인은 심삼산이라.
모두 상아 때문에 재앙을 당하니
역린을 건드리기 전에 이미 용안을 범했구나.
오늘 내가 제(齊) 땅에서 와서 제도하리니
대단(大丹)이 돌아옴이 전투에서 승리해 개선하는 것보다 낫도다.

一家眷屬小遊仙(일가권속소유선)
翁婿同居滇海間(옹서동거전해간)
玉澗郎君余十舍(옥간랑군여십사)
冰清老丈沈三山(빙청노장심삼산)
都因象齒能爲禍(도인상치능위화)
未觸龍鱗早犯顏(미촉용린조범안)
今日我來齊度脫(금일아래제도탈)
大丹還勝大刀環(대단환승대도환)

《심선양 여비하 두 여선에게 주다(贈沈線陽余飛霞兩女仙)》

“선양선녀(線陽仙女)는 설진양(薛真陽)의 뛰어난 제자로 심삼산(沈三山 심만삼)의 큰 딸이다. 약관의 나이에 속세를 떠났다가 부친이 운남으로 오자 홀연히 문안인사를 왔다. 여 씨의 딸과 함께 대약(大藥)을 복용하고는 신선이 되어 날아올라갔다. 여 씨의 딸은 바로 여십사의 딸이니 서평후(西平侯) 목춘(沐春)의 부인인데 외가 쪽에서 외단(沐春)을 전수받았다. 비하(飛霞)는 내가 준 호(號)이며 일찍이 작은 전기(傳記)가 있다.”

여십사는 자식이 없는 게 아니고
심만삼 역시 아들이 있네.
선고와 조카딸은
낭원(閬苑 곤륜산 정상 신선의 정원)의 두 영지로
나의 천원약(天元藥)을 먹고
곤명지(昆明池)에서 날아올랐네.
노인이 눈웃음 지으니
내 제자들 예쁘고 천진하구나.

十舍非無子(십사비무자)
三山亦有兒(삼산역유아)
仙姑與妹女(선고여매녀)
閬苑兩靈芝(낭원양영지)
服我天元藥(복아천원약)
飛升昆明池(비승곤명지)
老翁開笑眼(노옹개소안)
吾道屬嬌癡(오도속교치)

3. 운남에 남긴 신선의 자취

운남(雲南)은 중국의 축소판으로 이곳의 여러 민족들은 중원과 천 갈래 만 갈래로 연계되어 있다. 예를 들면 경파족(景頗族)은 자칭 ‘포희(袍姬)’라 하는데 주(周)나라 민족과 동성인 희(姬)성의 씨족이다. 오늘날 경파족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명을 참조해보면 그들의 조상이 이주하는 과정 중에 예전에 머물렀던 지역을 거슬러 찾을 수 있다.

또 납서족(納西族)은 단지 북방에서 이주해왔다는 설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을 통해 볼 때 납서 고악(古樂)은 내용이 대부분 중원(中原)지역의 궁정음악과 동경음악(洞經音樂 도교음악)이다. 역사적으로 천고영웅이 중국 오천년 역사문화의 정화(精華)를 운남에 가져와 그곳에 남겨놓은 것이다.

장삼풍은 무당산에서 23년을 거주하다 심만삼이 조정에 죄를 짓고 운남으로 유배를 간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홍무 25년 가을 무당산을 떠나 운남으로 와서 서남쪽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실천했다. 장삼풍은 민간에서 운유하면서 여러 차례 신이(神異)를 드러냈고 수많은 신화를 남겨놓아 이곳 오래된 민족들을 고통과 재난에서 구원해주는 대신선(大神仙)이 되었다.

운남 대리(大理) 낙등촌(諾鄧村)의 호두산(虎頭山)에는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건축물들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 도관이 바로 장선사(張仙祠 장삼풍을 모시는 사당)다. 안에는 장삼풍 진인의 상을 조각해놓았고 기둥 앞에 걸린 대련에는 “납탑은 자칭 삿갓 하나와 누더기 한 벌만을 사랑한다 말하지만 신선이 탈화되어도 이 세상과 이 백성 잊지 못하네.(邋遢自稱名只愛一蓑一衲;神仙隨脫化不忘斯世斯民)”라고 붙어 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