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4. 감주(甘州)에 신물(神物)을 남기다

고대의 감주(甘州)는 지금의 감숙성 장액시(張掖市)로 하(夏)나라 때 서강(西羌)의 땅이었다. 고대 강족 사람들이 이곳에서 번성했다. 한 무제 때 이곳에 장액군을 설치했는데 “흉노의 팔을 꺾고 나라의 팔을 펼쳐 서역과 통한다(張國臂掖,以通西域)”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고대 실크로드의 찬란한 진주였고 자고로 ‘새상강남(塞上江南 변방의 강남)’이란 미칭으로 불려왔다.

명나라 왕조운(王兆雲)이 편집한 《백취쇄언(白醉瑣言)》, 명나라 양의(楊儀)가 편찬한 《고파이찬(高坡異纂)‧장삼풍전(張三豐傳)》 및 《감주부지(甘州府志)‧선석(仙釋)》 등에 모두 장삼풍이 감주에 남겨놓은 몇 가지 신기한 유물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청나라 건륭 시기 《성경통지(盛京通志)‧선석(仙釋)》에는 장삼풍이 일찍이 감주 장지휘원(張指揮園)에서 우화등선했다고 하며 또 다른 지방에서도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고 한다. 도가 대도(大道)의 수련법은 수련성취한 후 자신의 신체를 가져가는데 도가는 성명쌍수(性命雙修)라 육체 역시 수련성취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를 이뤘을 때의 육신은 이미 더는 평범하고 평범한 속인의 신체가 아니다. 이때의 육신은 이미 완전히 다른 공간의 고에너지물질로 전화된 것이라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갈 수 있으며 무소불능(無所不能)하다.

장삼풍 대도(大道)는 진인으로 성취된 후에도 아직 완수하지 못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신통을 사용해 대도문화(大道文化)를 오래고 순박한 민족들에게 남겨놓았다.

감주 서문(西門) 안의 사당은 당시에 삼풍암(三豐庵)라 불렀는데 장삼풍의 회문시(回文詩)가 있다. 회문시란 똑바로 읽어도 시가 되고 거꾸로 읽어도 시가 되는 특별한 문장을 가리킨다.

《회문시(回文詩)》

다리 옆 정원은 버드나무 제방의 굽이를 마주하는데
밤에 달 밝을 때 문이 반쯤 잠겼구나.
멀리서 학을 타고 느즈막히 동(洞)에 돌아와
조용히 거문고 타며 구름을 벗 삼아 앉았노라.
단을 태우려 불을 찾는데 빈 아궁이가 없고
약을 캐고 신선 찾으니 좋은 산이 있구나.
표주박 나무에 걸고 고인이 숨은 지 오래되니
시끄러운 속세소리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 끊어지네.

橋邊院對柳塘灣(교변원대유당만)
夜月明時半戶關(야월명시반호관)
遙駕鶴來歸洞晚(요가학래귀동만)
靜彈琴坐伴雲閑(정탄금좌반운한)
燒丹覓火無空灶(소단멱화무공조)
采藥尋仙有好山(채약심선유호산)
瓢掛樹高人隱久(표괘수고인은구)
囂塵絕水響潺潺(효진절수향잔잔)

이 시를 거꾸로 풀면 다음과 같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시끄러운 속세소리 끊어지고
오랜 은자는 높은 나무에 표주박 걸었노라.
산이 좋으니 약을 캐는 신선이 있고
아궁이 비어 불이 없으니 단을 태울 곳 찾네.
한가한 구름 벗 삼아 앉아 조용히 거문고 연주하고
느즈막하게 돌아오는데 멀리서 학을 타고 온다네.
관문이 반쯤 닫힐 때 밝은 달밤인데
만당의 버드나무는 뜰 옆의 다리를 마주하누나.

장삼풍은 감주에 약호로(藥葫蘆)를 하나 남겨 놓았다. 만약 질병에 걸린 사람이 풀 하나를 호로 속에 넣었다가 이튿날 달여 마시면 금방 호전되었다. 정서총병(定西總兵)이 집에서 잔치를 열어 국경을 지키는 신료들 및 예인(藝人)들을 초청해 잡극(雜劇 중국의 전통연극)을 공연하게 했다. 총병이 약호로를 꺼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며 재미로 돌려보게 하자 약호로가 갑자기 스스로 깨져버렸다. 약호로는 바로 장삼풍의 신물(神物)이기 때문에 만약 불경하게 대하면 자연히 더는 세상에 남길 수 없는 것이다.

장삼풍은 《촉시제(蜀市題)》에서 자신의 호로에 대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배임을 밝혔다.

《촉시제(蜀市題)》

아침에 청성에 은거하다 저녁에 아미산에 들어오니
촉(蜀) 중에는 왕래하며 교제하는 사람 많구나.
밝은 대낮이 바삐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입으로는 남채화 신선의 답답가를 부르네.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 호로 하나
양천(兩川 지명)의 풍월에 안락한 움막
산림과 저잣거리 마음껏 노닐며
도처에 시를 씀은 무엇을 인정함인가?

朝隱青城暮入峨(조은청성모입아)
蜀中來往閱人多(촉중래왕열인다)
眼看白日忙忙去(안간백일망망거)
口唱藍仙踏踏歌(구창람선답답가)
一個葫蘆無價寶(일개호로무가보)
兩川風月安樂窩(양천풍월안락와)
山林塵市遨遊遍(산림진시오유편)
到處題詩認得麼(도처제시인득마)

장삼풍은 또 감주에 팔선과해도(八仙過海圖 팔선이 바다를 건너는 그림) 1폭을 남겨놓았는데 중간에 수(壽)자가 있었다. 감주 도지휘(都指揮 역주: 명나라 때 지방 군사책임자)가 팔선과해도를 얻은 후 대당(大堂)에 걸어놓았는데 이것이 신물(神物)임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한 친척이 집에 와서 머무는데 밤에 파도가 맹렬히 몰아치는 소리가 들리자 흑하(黑河 강 이름)의 제방이 무너진 것으로 여겨 주인에게 알렸다. 나중에 파도 소리가 그림에서 나온 것임을 발견한 후에야 팔선과해도가 다른 공간과 서로 통함을 알게 되었다.

“장삼풍은 감주에 3가지 물건을 남기고 떠났다. 첫째는 도롱이와 삿갓, 둘째는 약호로로 풀 하나를 그 속에 넣었다가 다음날 끓여 마시면 병이 바로 나았다. 셋째는 팔선과해도인데 가운데 수(壽)자가 있다. 도지휘가 이것을 얻어 당에 걸어놓았는데 기이함을 몰랐다. 어느 날 저녁 친척이 와서 투숙하다 파도가 맹렬히 몰아치는 소리를 듣고는 흑하의 제방이 무너진 줄 알았다. 이튿날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이 괴이하게 여겨 찾아본 후에야 비로소 그 소리가 그림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나중에 황제의 총애를 받던 내관이 가져갔다.”(《백취쇄언》)

여기서 팔선(八仙)이란 도가의 여덟 신선으로 한종리(漢鍾離 종리권), 장과로(張果老), 한상자(韓湘子), 철괴리(鐵拐李), 여동빈(呂洞賓), 하선고(何仙姑), 남채화(藍采和) 및 조국구(曹國舅)를 가리킨다. “팔선이 바다를 건너며 각기 신통을 드러낸다(八仙過海,各顯神通)”는 내용은 중국 민간에 가장 널리 퍼진 신선이야기다.

장삼풍은 또 다른 시에서 여동빈과 함께 동정호에 놀러간 이야기를 언급했다.

《동정호에서 여순양선생을 따르다(洞庭䎸呂純陽先生)》

이번에 뵈니 인연이 없진 않은데
도를 방문하고 진인 찾길 수십 년이었네.
고상하게 펄펄 날며 풍적(風笛 악기)을 부시고
웅장하고 늠름하게 용천검 차셨도다.
해악(海嶽)에서 이 땅에 오시어
손으로 호수구름 떨치며 먼 하늘 바라보시네.
원컨대 선생을 배워 부지런히 구도하리라.
동정에서 갈라져 서천(西川)에 이르렀네.

這回相見不無緣(저회상견불무연)
訪道尋真數十年(방도심진수십년)
雅度翩翩吹風笛(아도편편취풍적)
雄風凜凜佩龍泉(웅풍름름패용천)
身從海嶽來斯地(신종해악래사지)
手拂湖雲看遠天(수불호운간원천)
願學先生勤度世(원학선생근도세)
洞庭分別到西川(동정분별도서천)

5. 파촉에서 난새를 부리다

《환촉음(還蜀吟)--촉에 돌아와 읊다》

육합이 내 집이오 해와 달은 내 촛불.
내 비록 요동 사람이지만 촉에서 노니니 다시 촉에 돌아온 것 같네.
옅디옅은 무산의 구름 구부러진 아미산의 달
곱디고운 금강 물결 화목한 파자국(巴子國 춘추시대 제후국)이여.
도처에서 현풍(玄風)을 드러내며 미친 듯이 즐거워하네.
난새를 어디서 멈출까나? 다시 청성에 와서 묵노라.

六合是我家(육합시아가) 二曜爲我燭(이요위아촉)
我雖遼東人(아수요동인) 遊蜀似還蜀(유촉사환촉)
淡淡巫山雲(담담무산운) 彎彎峨眉月(만만아미월)
鮮鮮錦江波(선선금강파) 熙熙巴子國(희희파자국)
到處闡玄風(도처천현풍) 顛狂自恰悅(전광자흡열)
鸞馭止何方(난어지하방) 又到青城宿(우도청성숙)

《환촉음(還蜀吟)》에서 장삼풍은 파촉(巴蜀)과의 인연을 말했다. 여기서 파촉이란 현재의 사천성에 해당하며 중화의 역사문화가 집결된 곳이다. 옛날 사람들은 상하(上下)와 동남(東南), 서북(西北)을 육방(六方)이라 칭했고 육방이 서로 이어진 것을 육합(六合)이라 했으니 바로 천지 사이를 뜻한다. 이요(二曜)란 해와 달을 가리킨다. 장삼풍은 난새와 선학을 타고 사방을 마음껏 노닐었는데 천지 사이를 집으로 삼고 해와 달을 촛불로 삼았으니 이 시에는 도를 얻은 사람의 대자재(大自在)함이 흘러넘친다.

장삼풍은 촉 지역 및 이곳 사람들과 전생의 인연이 있었다. 때문에 “촉에서 노니니 다시 촉에 돌아온 것 같네” “도처에서 현풍을 드러냈다.”

장삼풍은 또 《입촉(入蜀)》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아미봉 정상의 달”이라고 노래했다.

《입촉(入蜀)--촉에 들다》

웅장한 검문 촉 땅의 산 높고 높아
날아서 오가는 학마저 힘겨웁구나.
만 개의 봉우리 빼어나게 아름답고
천 겹 푸른 산 몇 번이나 만나려나.
때때로 목동의 피리소리 가을 풀에 들려오고
곳곳에 바람소리 저녁파도처럼 울어대네.
가장 사랑하는 건 아미산 정상의 달
도인 옷자락 위에 맑고 고운 빛 비추네.

劍門雄壯蜀山高(검문웅장촉산고)
飛去飛來鶴亦勞(비거비래학역로)
萬點蒼尖分曆落(만점창첨분력락)
千重碧嶂幾周遭(천주벽장기주조)
時時牧笛吹秋草(시시목적취추초)
處處樵風吼暮濤(처처초풍후모도)
最愛峨眉峰頂月(최애아미정봉월)
清暉白上道人袍(청휘백상도인포)

명나라 홍무 연간에 태조 주원장은 아들 주춘(朱椿 역주: 태조의 11번째 아들)을 촉왕(蜀王)에 봉했다. 당시 이 지역은 안정되어 있어 사람들이 편안히 즐겼다. 장삼풍이 어느 날 사대부의 복장인 네모난 관에 넓은 띠를 입고 신채를 드러내며 촉왕을 찾아와서는 도를 닦도록 권했다. 하지만 촉왕 춘은 도(道)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장삼풍이 나이가 들었어도 더 건강하고 날아갈 듯 가볍게 걷는 것은 부러울 따름이라 그를 잡아두고 싶었다. 하지만 장삼풍은 웃으면서 이렇게 읊었다.

《제현천관기촉왕(題玄天觀寄蜀王)--현천관에서 촉왕에게 부치다》

대수롭지 않게 자라 낚시를 끝내며
웃으며 돌아와 도연명을 본받네.
벽도(碧桃 푸른 복숭아)에 꽃 피니 봄은 한창인데
취죽(翠竹 비취색 대나무)에 새순 나와 마디가 높아지네.
마음에 봉궐의 용과 기린 같은 모임 품었으나
몸은 귀성(龜城 성도)에서 동분서주 하는구나.
하필이면 종남첩경을 논하는가?
벼슬욕은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네.

等閑釣罷海中鼇(등한조파해중오)
一笑歸來祖晉陶(일소귀래조진도)
花吐碧桃春正好(화토벽도춘정호)
筍抽翠竹節還高(순추취죽절환고)
心懷鳳闕龍鱗會(심회봉궐용린회)
身寓龜城馬足勞(신우구성마족로)
何必終南論捷徑(하필종남논첩경)
宦情於我似鴻毛(환정어아사홍모)

역주: 종남첩경(終南捷徑)은 '종남산(終南山)이 지름길'이라는 뜻으로, 출세를 이루기 위한 편법을 비유한 고사성이다. 중국 당(唐)나라 때 노장용(盧藏用)과 사마승정(司馬承幀)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당나라 때 노장용이란 서생이 있었는데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했음에도 관리로 임용되지 못했다. 이에 장안(長安) 근처 종남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노장용이 은자로 행세한 지 오래지 않아 유명해졌고 원하는 대로 조정 관리로 등용되었다. 한편 이때 천태산에 사마승정이란 도사(道士)가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한 은자로 명성이 높았는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한 번은 사마승정이 황제의 부름을 받아 하산했다가 관직을 사양하고 천태산으로 돌아가던 길에 노장용이 그를 배웅하다 종남산을 가리키며 “참으로 훌륭한 정취가 있는 산입니다”라고 했다. 노장용의 말 뜻인즉 벼슬을 하고 싶으면 도성이 가까운 종남산이 은거하기에 좋은데 왜 하필 천태산으로 돌아가느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사마승정이 냉소하면서 “내가 보기에는 종남산은 단지 관리가 되는 지름길일 뿐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노장용이 매우 부끄러워했다.

장삼풍은 촉왕에게 자신이 사실 장삼풍임을 알리고 장차 해도(海島 신선이 사는 곳)의 선인(仙人)과 함께 멀리 노닐 것이며 번왕(藩王) 노릇이 비록 좋긴 하지만 아무것도 구함이 없어야만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촉왕은 “우리 스승님 장량의 술법 깊이 얻어 조용히 단전을 기르며 곡신을 지키시네(吾師深得留侯術,靜養丹田保谷神)”라며 그를 보냈다. 촉왕은 장삼풍의 충고 덕분에 나중에 번왕의 지위가 깎이는 재앙을 피해갈 수 있었다.

장삼풍은 또 일찍이 성도환위(成都環衛) 강지휘(姜指揮)의 집에 기숙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장삼풍은 머리에 늘 큰 삿갓을 쓰고 다녔는데 아무리 작은 문으로 드나들어도 걸림이 없었다. 그가 손가는 대로 말라버린 매화 가지를 꺾어 땅에 심자 매화가 자랐는데 특이하게도 꽃송이가 아래를 향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성도에서는 ‘조수매(照水梅)’가 있다는 설이 돌았다.

《성도류제강씨가(成都留題姜氏家)--성도 강씨 집에 시를 남기다》

오고가며 중생을 제도하나니
호로병으로 금강성(錦江城 성도)에서 놀았네.
몸에 대도(大道)를 품어도 아는 사람 없으니
오직 사랑하는 매화가지 땅에 심을 뿐.

往往來來度有情(왕왕래래도유정)
葫蘆遊戲錦江城(호로유희금강성)
身藏大道無人識(신장대도무인식)
只愛梅枝插土生(지애매지삽토생)

《공주지(邛州志)》에는 “장삼풍이 명산(名山)을 운유하다 성도에 이르러 청양궁(青羊宮)에서 한달 넘게 머물렀고 나중에 대읍현(大邑縣) 학명산(鶴鳴山)에 왔다. 학명산은 북으로 청성산, 남으로는 아미산, 서쪽으로 무중산(霧中山)과 인접한 도가의 명산으로 24동이 있다. 산에 돌로 만든 학(石鶴)이 있는데 천년에 한번 울고 이 학이 울면 신선이 나타난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장삼풍이 산에 들어올 때 석학이 다시 울었다. 장삼풍은 《학명산》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학명산(鶴鳴山)》

술 마시며 공주(邛州 사천 서창시)에 와 푸른 산에 들어오니
천애객(穿崖客)이 흰 구름 지고 돌아왔네.
스물 넷 신선동을 자유롭게 노니는데
돌 학이 기뻐하더니 울면서 나는구나.

沽酒臨邛入翠微(고주임공입취미)
穿崖客負白雲歸(천애객부백운귀)
逍遙廿四神仙洞(소요입사신선동)
石鶴欣然嘯且飛(석학흔연소차비)

《장삼풍전집》에는 “홍무(洪武) 말에 어떤 도인이 공주의 학명산에서 노닐었다. 산에는 24동이 있는데 24절기와 대응한다. 도인이 산에 들어갈 때 돌 학이 다시 울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기이하게 여겼다. 반년을 머물다 천곡동(天谷洞)에 들어가서는 나오지 않았다. 동문(洞門)에 ‘삼풍이 이곳에서 노닐다(三豐遊此)’는 4글자를 남겼는데 이때가 이미 일백여 년이 지났다.”라고 기록했다.

학명산의 적지 않은 명승고적이 장삼풍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방선암(訪仙岩 신선을 찾는 바위), 영선각(迎仙閣 신선을 맞이하는 누각), 천곡동(天谷洞), 장신선사(張神仙祠 장 씨 신선의 사당), 장신선사당기비(張神仙祠堂記碑), 영선각기비(迎仙閣記碑) 등이다.

영락 15년(1417년) 용호산 도사 오백리(吳伯理)가 명 성조(成祖)의 어지를 받들어 황제의 편지를 지니고 학명산에 들어가 진선(真仙) 장삼풍을 초대하기 위해 영선각을 세웠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