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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외과의사, 크나큰 행운으로 대법을 만나다

중국대법제자 자오량(照亮)

[밍후이왕나는 올해 만 42세인 남성 외과의사이며 1996년에 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나는 여기에서 독자들에게 내가 법을 얻은 경력과 수련길에서의 일부 이야기와 체험을 간결하게 말해보려고 한다.

우주의 신비함을 탐색하던 데로부터 기공수련에 들어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책읽기를 무척 좋아해서 많은 과외서적을 읽었는데 이 세계에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그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과 수많은 초자연적인 현상공룡이라는 거대한 고대 생물의 생존과 멸종의 수수께끼그리고 현대과학을 훨씬 초과한 세계에서 발견된 수많은 고대문명의 유적들 중에 있는 과학기술 수준많은 사람들의 인체 특이공능 현상신비한 UFO와 외계인드넓은 우주의 기원과 왜소한 인류 중에 존재하는 무한한 미지의 영역 등등.

나는 정말로 이러한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기를 바랐다그리하여 장차 큰 과학자가 될 것이라는 포부를 세우고 시공을 초월하는 타임머신 등을 연구해 이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다.

고요한 한 밤중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자신은 도대체 누구일까왜 이 세상에 왔을까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까나의 생전과 사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상태일까설마 내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과정이 다만 우주의 우연한 현상이란 말인가?

중학교를 다닐 때 마침 지난세기 80년대 기공 붐이 일어났다들은 바로는 많은 사람들이 기공을 연마하고 또 특이공능이 나온 사람도 있다고 했다나도 현대과학을 이용해 기공을 연구한 일부 사람들의 서적을 보았는데 매우 흥미가 있어 배우려고 했다하지만 배울 곳이 없었다그리하여 한 두 마디 들은 말에 따라 연마하기 시작했다침대 옆에 앉아 두 손을 제인(結印)하고혀를 입천장에 붙이고두 눈을 감고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공() 중에서 일부 현상이 나타났는데 미묘하고 신기해서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다후에 대법을 수련하고서야 문뜩 크게 깨달았다.

한동안 연마하자 연공할 때 잡념도 없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져 매우 미묘하고 편안한 감을 느꼈다하루는 연공할 때 이마에 거무스름한 원이 하나 보였지만 규칙적이지 않았다계속 연공함에 따라 그것은 하얗게 변하면서 점차 눈부시게 빛났다그러다가 어느 날 이마에 커다란 눈 하나가 나타났다처음에는 똑똑히 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이 눈도 나를 보고 있었다그는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다가 곧 사라졌는데 당시 정말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감을 느꼈다.

천목이 열려 일부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몰랐으며 그냥 신기하기만 했다.

법을 얻지 못해 어떻게 수련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공() 중에서 나타난 일부 상태와 부딪친 일부 일에 대해 나는 매우 공포감을 느꼈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두렵기도 했다연공하면 편차가 생긴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연공하여 편차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했다.

() 중에서 나타나는 그런 미묘한 상태를 잘 모르고자신의 연공 편차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무슨 공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특별히 훌륭한 스승님을 찾아 그의 제자가 되어 잘 배우고 싶었다그 동안 일부 기공책을 보고 매우 잘못된 굽은 길을 걸었고 또 진정한 기공도 찾지 못해 하마터면 몸에 좋지 못한 부체가 붙을 뻔했다.

후에 기공책은 별로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종교의 책을 찾았다일부 도가의 경전을 사서 보았는데 나의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다심지어 책에서 말한 일부 현상을 보고나서 더욱 나를 두렵게 했다.

후에 공도 감히 연마하지 못하고 심지어 눈을 감고 잠을 자는 것까지도 근심했다분명하지 않은 공() 중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하지만 공 중에서의 그런 아름다운 현상과 상태를 나는 또 포기하지 않고 확실히 알고 싶어했다그리하여 더욱 훌륭한 스승님을 찾아 그의 조언을 얻고그의 보호를 받으려고 했다.

막혔던 앞길이 열려 다행히 대법을 만나다

정말로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을 발견했다(柳暗花明又一村)’. 대학에 가서 어느 날 학교 문 앞의 노점 책방에서 ‘파룬궁(法輪功)’ ‘전법륜(轉法輪)’이란 책을 보았다두꺼운 ‘전법륜을 보자 틀림없이 상세하게 명확히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당시 주머니에 돈이 없어 이튿날에 바로 가서 책을 샀는데 그 다음날에는 이 노점 책방이 보이지 않았다.

전법륜을 펼치자 사부님의 사진이 보였다사부님은 자비하게 나를 보셨는데 나는 매우 편안하고 마음이 놓이면서 마치 안면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법륜을 다 보고나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세계 수수께끼의 해답이 있었고 사람이 왜 사는지 알게 되었다이전에 연공 중에 나타난 그런 미묘한 현상과 부딪친 그런 두려운 일이 모두 어찌된 영문인지를 알게 되었다정말로 눈앞이 탁 트이고 밝아졌다사부님의 법신이 보호해주신다는 것을 알고 나서 이전의 그런 놀라움과 근심불안감이 없어졌다이것이 바로 내가 찾는 공법이고 내가 찾는 사부님이시다그리하여 끝까지 수련할 것이라고 결심을 내렸다이전의 그런 기공책과 관련된 책 등은 태울 것은 태우고 버릴 것은 버리고 전일하게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했다.

어느 날 저녁 침실에서 잠을 잘 때 나의 몸은 가뿐하게 떠올랐는데 덮고 있던 이불마저 같이 떠올랐다이전의 그런 불편한 상태가 없어지고 온몸이 개운했다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공부 때문에 피곤해 신경이 쇠약해져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은 눕기만 하면 아주 달콤하게 잠을 잤다몸과 마음 전체에 큰 변화가 생겨 정말로 환골탈태하는 것 같았다.

수련한 후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밤에 원신(元神)이 몸을 떠날 때는 정말로 자유자재였다한번은 원신이 해저 궁전에 도착하여 전설 중의 미인어를 보았다. 또 한 번은 대 사막으로 가서 낙타무리도 보았다아침에 깨어날 때는 또 강대하고 자비한 장이 나를 포위하고 있는 감을 느꼈다한번은 또 대학 선생님의 사무실에 갔는데 마침 새벽이어서 출근시간이 되지 않아 사무실과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 어느 한 번밤에 원신이 몸에서 떠나 한 층 한 층씩 아래로 날고 있었다마음속은 정말로 감개무량했다대법을 수련하기 전에는 한 층 한 층씩 아래로 떨어졌지만 지금은 한 층 한 층씩 계속해서 날고 있었다정말로 이전의 몸은 매우 무거웠는데 지금의 몸은 매우 홀가분해졌다.

마지막에 어슴푸레한 세계의 음산한 하늘에 도착했다나는 공중에서 날면서 그 세계가 아주 더러운 것을 보았는데 가는 곳마다 먼지투성이였다이때 옆에서 한 무리 새가 날아갔는데 손이 가는 대로 한 마리 잡고 보니 그 새도 온몸에 먼지투성이였다나는 또 한 숲속으로 날아갔는데 나무는 모두 말라 죽어 있었다나는 한 산꼭대기에서 내려 벼랑 아래를 보니 층층마다 철창이 있었는데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매 한 층의 철창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감금되었다그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절망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이 때 맞은편 산꼭대기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에게 “무모(無某)”라고 말했다나는 깨어난 후 어제 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보았다. “한 층 한 층씩 계속해서 날고층층마다 있는 철창” 그것은 지옥이 아닌가맞은편 정상에 있는 사람이 말한 무모, “는 바로 나의 이름이다그것은 지옥에 나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그것은 지옥에서 이름이 제거되었다는 것이 아닌가마음속으로 정말 사부님께 감격했다.

사부님께서 설법에서 언급한 일부 공능형식과 어떤 층차의 상태 표현을 이후의 수련 중에서 나는 보았다.

사부님께서 설법 중에서 말씀하신 세간법 수련 중에서의 요시공능 형식앞이마에 빠르게 뒤집어지는 작은 거울을 나는 공() 중에서 보았다그리고 세간법숙명통공능의 형식도 보았는데 앞이마에 텔레비전의 작은 화면 같은 것이 하나 있었고 마치 텔레비전에 신호가 없을 때 눈꽃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한번은 ‘꽌퉁량지파(貫通兩極法)’[1]를 할 때 두 손이 아랫배부위에서 파룬(法輪)을 돌리고 있었는데 나의 오른손 중지가 손바닥사이에 있는 파룬을 만졌다말하기 시작하면 매우 현묘하다비록 한 손가락으로만 부딪쳤지만 전체 파룬 안에 있는 네 개의 태극과 다섯 개의 만자부호가 회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공원으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공간에 있는 나의 머리위에 꽃이 세 송이 있는 것을 보았다꽃송이마다 또 하나의 빛줄기가 하늘을 직통하고 있었다이와 동시에 내 앞에서 걷던 몇 사람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나는 이것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삼화취정(三花聚頂)’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대법을 수련한 후 나는 매우 많은 아름다운 느낌이 있었다어떤 것은 말하면 수련하지 않는 사람은 매우 허황하다고 느껴 여기에서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 대법의 아름다움을 직접 증명

법공부를 통해, 수련은 동작만 연마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도덕 수준을 제고하고 심성을 제고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나는 일상생활 중에서 진선인에 따라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였다.

대법을 수련하기 전 우리 가정은 사이가 너무 안 좋아 나는 동생과 늘 다투었고 갈등도 매우 심했다한번은 타투다가 화가 치밀어 오른 동생이 심지어 식칼을 집어들어 나를 찌르려고까지 하였다아버지는 나와 동생이 사이가 나빠 항상 큰 소리로 꾸짖었는데 한번은 화가 나서 물병을 집어 들고 바닥에 던져 박살이 나기까지 했다수련 후 나는 동생에게 참고 양보하고선량하게 대하여 다시는 다투는 일이 없었고 온 가정이 화목하였다가족 간의 융화와 화목함은 정말로 복인데 이런 복은 대법이 우리 가정에 가져다준 것이다.

대학 기숙사의 침실은 한 층에 8명이 거주했다우리는 연령에 따라 순서를 배정하여 나는 침실에서 다섯째로 되었다침실에서 오랫동안 함께 지내자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고진실한 말을 하고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았다그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겨 서로 믿지 않을 때그들은 가서 다섯째에게 물어보자. 다섯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나로 하여금 증명하도록 했다.

우리가 공부하는 곳은 큰 교실이어서 백여 명이 앉을 수 있다어느 해 겨울에 교실의 출입문이 고장 나서 닫지를 못했다원래 교실안의 난방이 잘되지 않아 따뜻하지 않았는데 찬바람까지 교실로 들어와 문어귀에 앉은 사람은 몹시 추웠다하지만 오랫동안 이 일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리하여 나는 내 돈으로 스프링 두개와 경첩을 사서 드라이버로 출입문을 수리했다한 방에 있는 형들이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모두 함께 거들어주어 문을 다 수리했다이리하여 문어귀에 앉은 사람은 다시는 추운 고생을 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해정월 대보름 경축 모임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한 여학생이 나에게 와서 함께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우리가 방금 노래 부른지 얼마 안 되어 술에 잔뜩 취한 한 남성이 오더니 두말없이 나의 손에서 마이크를 빼앗고 그 여학생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와 따지지 않고 물러났다하지만 그 남성은 음치여서 곡조를 맞추지 못했다나는 내가 그보다 훨씬 더 잘 부른다고 생각해서 그가 노래를 다 부른 다음 또 그 여학생과 함께 재차 그 노래를 불렀다아주 신나게 부르고 있을 때 그 남성은 또 비틀거리며 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그래도 나는 그와 어떠한 논쟁도 하지 않았다내가 연공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의 과시심을 찾았다자신이 노래를 잘 불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는데 완전히 그 남성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았다그는 아마 나 때문에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발로 찾을 것이다내가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 탓이다이후에는 매사에 다른 사람을 많이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 친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 침실에 있던 여섯째가 그의 동생이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하는데 500위안(한화 약 85,000)을 빌려달라면서 반드시 갚겠다고 말했다나는 그의 집이 매우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한 달에 50위안밖에 벌지 못하고 어머니는 반신불수인데다가 세 명의 누나는 정신에 문제가 있고그들 형제 둘은 모두 대학을 다녀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다그는 평상시에도 매우 검소하게 살았다이런 일에 봉착하면 틀림없이 난처해질 것이다나는 생각하다가 그에게 1천 위안을 빌려주면서 급히 갚지 않아도 되고, 10, 20년 후에 정말로 능력이 있을 때 갚아도 된다고 말했다사실 당시 나의 한 달 월급은 겨우 500위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후 한 침실에 있는 둘째형이 나와 이 일을 말하면서 당시 그가 우리들에게 모두 전화하여 돈을 빌려달라고 하였지만 나만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말했다맞다당시 그의 가정형편을 고려하면 이 인정이 메마른 현실사회에서 누가 쉽게 그에게 돈을 빌려주겠는가나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고대법은 바로 선을 닦는 것이며또 사부님은 우리가 매사에 다른 사람을 고려하라고 요구하셨기에 내가 이렇게 한 것이다한 사람이 수련하면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덕을 볼 수 있다.

1999년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한 공장 병원의 외과의사로 되었다나는 대법의 진선인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면서 업무상에서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했다. 상사가 배치한 일을 고르지 않고적극적으로 공부하고업무를 깊이 연구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여러 선배들에게 가르침을 부탁했다환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선량하게 대하면서 환자들을 위해 많이 생각했다병원 안에 무슨 더러운 일과 힘든 일이 있으면 나는 앞장서서 하여 모두의 호평을 받았다.

대략 2002년 연말모범 노동자를 선발할 때 병원 전체의 직원은 모두 나에게 투표했다당시 원장님은 선발 결과를 가지고 모두에게 말했다. “모모씨를 선발하면 안 됩니다그는 파룬궁을 연마하기 때문에 그를 올려 보내면 위에서 비준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다른 사람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대법제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공인하는 것이다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대법이 사람을 선하게 가르치고좋은 사람으로 되도록 가르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그러나 대법에 대한 이번의 사악한 박해는 인간의 본성을 왜곡시키고 양심을 저버리도록 하였다.

법을 실증하고 박해를 반대하다

1999 ‘7.20’, 사악의 박해가 시작된 후 나는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기차역에서 경찰에 의해 저지당하여 나는 경찰에게 대법의 아름다움과 자신이 대법을 수련한 후에 얻은 덕을 말해주었고 직장에서도 동료들에게 법을 실증하였다.

2001년 초공장에서는 직원 모범대회가 열렸다공장장은 회의에서 업무를 마감할 때 갑자기 대법을 비방하는 말을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놀랐다그가 어찌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대법을 모독하는 말을 하지나는 마땅히 일어나서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려 그들이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만약 이렇게 일어나면 맞게 되고 붙잡혀 갈 것이 아닌가아직 심리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마음속은 이런 모순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러나 나중에 마침내 일어나서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려줘야 한다고 마음을 정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법: “이지(理智)로 법을 실증하고지혜로 진상(眞相)을 똑바로 알리며자비로 홍법(洪法)하고 세인을 구도하는이것이 바로 각자(覺者)의 위덕을 세우는 것이다.”[2]를 외우고 침착하게 연단으로 올라갔다연단으로 올라가서 말하고 있는 서기한테 마이크를 좀 빌려달라고 말하자 그는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나는 마이크를 잡고 연단 아래에 있는 500여명의 직원들을 바라보았다처음에는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결국 “파룬따파는 미신이 아니며 더욱 ×교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이때 서기는 단번에 나를 붙잡았고연단 아래에서는 공장의 경찰 몇 명이 뛰어올라와 나의 두 손에 수갑을 채우고 파출소로 압송해갔다.

그들은 강제로 내가 대회에 나가서 반성하고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했다내가 거절하자 그들은 한바탕 나를 때린 후 현지 파출소에 넘겨서 xx간수소에 보내 불법으로 감금했다.

내가 감금되던 며칠 전내가 눈을 뜨든지 아니면 눈을 감든지 온 하늘엔 층층이 겹쳐있는 신불(神佛)들이 더없이 장엄하고 범상한 것을 볼 수 있었다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도록 한 것은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간수소에 불법으로 한 달 넘게 감금된 후 또 xx구류소에 불법으로 감금되었다나는 구류소에서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릴 때 남색 옷을 입은 보살이 나의 앞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2001이른바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이 발생한 후 거짓말은 수많은 세인들을 독해했다나는 늘 자신의 외과의사 전공의 각도에서 세인에게 진상을 알렸다분신자살 사건의 거짓말을 폭로하면서 초점방담(焦點訪談녹화화면에서 화상환자에 대한 처치는 의학상식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사실 많은 사람들도 분신자살 사건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한번은 내가 우리 병원의 한 퇴직한 원장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그는 현지의 유명한 외과의사였다. “천안문 분신자살을 아십니까...”라고 말하자 그 원장님은 연거푸 손을 흔들며 “가짜에요가짜에요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에요!”라고 말하였다.

또 한 번은 한 외과의사 동료에게 “천안문 분신자살에서 나오는 여자 아이 류쓰잉(劉思影)이 불길에 의해 기도가 화상을 입어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았는데 나중에 말할 수 있고 또 목소리도 또렷하고 활력이 넘쳐 노래까지 불렀는데 가능할까요?”라고 말하자 동료는 웃으면서 이마 불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2003상급부서인 ‘610’ 사람들이 나를 병원에서 체포하여 세뇌반에서 박해하면서 강제로 내가 수련을 포기하도록 했다나는 단식으로 항의하여 또 xx간수소에 불법으로 감금되었다나는 간수소의 감방에 있는 범인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이른바 ‘천안문 분신자살사건의 거짓말을 폭로했다또 그들에게 대법 경문을 암송해주면서 자신의 선행으로 법을 실증하여 감방안의 환경을 모두 선화(善化)시켰다변화가 가장 큰 것은 감방안의 한 싸움꾼이 앞으로 나와 함께 파룬궁을 수련하겠다고 공개적으로 감방에서 선포했다그 후에 그는 정말로 사람을 때리지 않고 또 내가 연공하는 것을 엄호해주었다그가 나와 함께 ‘홍음을 외운 후 그는 아주 유쾌하고 밝게 웃었다.

xx노교소에서 악인과 악경이 나를 때리고 괴롭혀도 나는 여전히 대법수련을 견지했다후에 노교소에서 우리에게 강제로 노예노동을 시켰다. 7~8월의 여름에 강제로 우리에게 큰 돌을 짊어지게 하였고, 9~11추운날씨에는 강제로 물에 들어가 양어장의 흙을 파내게 하였다나는 일하는 기회를 이용해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다아주 전형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20대의 젊은이인데 그에게 처음으로 말할 때 그는 아예 듣지 않고 늘 화제를 딴 데로 돌리곤 했다후에 내가 끊임없이 기회를 찾아 그에게 천천히 말하자 그는 조용히 나의 말을 들었다그런 후에는 다시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나도 당신과 함께 파룬궁을 연마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해 11~12나와 다른 5명의 확고한 대법제자는 본 성() xx노교소에 이송되어 감금되었다그곳은 성에서 전문적으로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중점 감옥이었다 xx노교소에 도착하자 이곳의 공기마저 모두 사악이 가득한 것을 느꼈다확고한 대법제자를 제외하고 이곳의 사람들을 보면 모두 마성이 매우 컸다. 이곳의 악경은 마음입이 모두 악독하여 전혀 도덕적인 기준이 없으며무슨 추잡한 말이나 듣기 거북한 말도 다 내뱉었다그들은 사람을 때리지 않고욕만 해대는데 쥐구멍이라고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노교소에 들어가자 악경 몇 명이 나를 에워싸고 전기 곤봉과 화롯불로 나를 위협했다나는 계속 대법이 좋다고 말하면서 천안문 분신사건은 가짜이고 파룬궁을 모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그들은 내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몇 명의 유다(猶大, 배신자)에게 나를 맡겨 그들이 나를 상대하도록 하였다.

xx노교소는 이른바 ‘전향된 사람들을 여러 팀으로 나누어서 새로 온 대법제자에 대해 강제로 ‘전향시켰다이런 유다들 중에는 전문 폭력을 가하는 자도 있고불교에 입문한 사람도 있고사오(邪悟)한 사람도 있고악경을 모방하여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악경은 먼저 대법제자를 폭력으로 구타하는 두 명의 유다에게 나를 보냈다그들은 나를 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때리려고 했다나는 그 유다가 흉악한 빛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얼굴 생김새가 마치 악마처럼 보였다수련인의 자선(慈善)과 인자함이 전혀 없었다이때 나는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대법제자가 똑바로 악인을 정시(正視)하기만 하면 악인은 즉시 눈길을 피한다왜냐하면, 정념은 악인을 조종하는 사악한 생명으로 하여금 겁을 먹고 도주하게 하기 때문인데그것들은 좀 늦게 도망가다간 순식간에 대법제자의 정념에 의해 제거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3] 나는 눈빛으로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내가 똑바로 쳐다보자 그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서로 상대를 쳐다보았다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그는 버티지 못하고 눈을 깜박거렸다나는 그가 먼저 깜박거리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깜박거렸다그리고 잠시 쉬고 나서 여전히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잠시 후 그는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나의 눈길을 피했다. 사람 전체가 풀이 죽어 있었는데 옆에 있던 사람도 함께 풀이 죽어 있었다처음에 흉악하게 발광하던 기세가 완전히 사라졌다그런 후부터 그들 둘은 나를 만나면 거의 비교적 온화하고 선량했다나는 다른 공간의 사악이 그들을 조종한다고 생각했다나에게 폭행을 가하려고 할 때 내가 정념으로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면 다른 공간의 사악이 소멸되어 그들 둘은 사악해지지 못했다.

이어서 악경은 또 강제로 대법을 비방하고 날조하는 비디오를 보게 했다. ‘전향된 몇 사람이 번갈아 가며 나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다무슨 기한을 무한정 연장하고집에도 갈 수 없고맞아죽어도 개죽음을 당한다는 등 말로 위협했다하루에 3~4시간만 자게 하고밥 먹고 화장실을 가는 외에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법공부하고 법을 외울 시간이 아예 없었다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머리 주위에 나쁜 물질이 두껍게 쌓여있는 감을 느꼈다모두 그런 나쁜 것이 주입된 것이다. 그것들은 정념을 하지 못하게 나를 억제하고 또 늘 쓰세요, ‘5(五書)’를 쓰세요쓰면 바로 나갈 수 있어요....”라고 하면서 나쁜 생각을 가지도록 했다.

어느 날하루 종일 시달림을 받고 나서 침대에 누운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했다. “사부님나는 죽을지언정 전향하지 않을 것입니다나쁜 그런 생각은 내가 아닙니다사부님께서 그런 나쁜 것을 제거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일념이 나오자 갑자기 머리 주위에 있던 나쁜 물질이 전부 사라졌다머리도 맑아졌고, 정념도 할 수 있었고나쁜 생각도 없어졌다마지막에 큰 난을 돌파하여 사부님의 가지에 감사를 드렸다.

한번은 악경이 노교 인원을 조직하여 악당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나와 다른 한 확고한 대법제자는 노래 부르기를 거절했다그러자 한 악경은 손에 전기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부르며 나가라고 했다다른 방으로 와서 우리 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당시 나는 마음속으로 ‘당신이 다른 공간의 사악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나는 당신 배후의 이런 사악을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이 일념이 나오자 그 악경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면서 두려워했다말도 더듬거리면서 어쩌지 못하고 우리보고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확고한 수련생들 중에서 축쇄본(縮刷本) ‘전법륜이 비밀리에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때는 오랫동안 법공부를 하지 못해 마음속으로 대법책이 매우 보고 싶었다하지만 xx노교소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철저하게 대 수색을 했다침대, 캐비닛물건을 전부 다 뒤지고 또 아무 때나 수색했다만약 수색해서 책이 나오게 되면 한바탕 호되게 박해를 받았다그런데 그런 수련생들이 어디에다 책을 숨겨놓았는지 매우 이상할 때도 있었다.

마음속으로 법공부와 박해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다나중에 법에 대한 갈망이 우세를 차지하여 마음속으로 때려죽여도 법공부를 할 것이다!고 생각했다생사를 내려놓는 일념이 나오자 이어서 많은 신기한 일들이 발생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 ‘전법륜책이 나에게 전해졌는데 정말로 보배를 얻은 것만 같았다.

나의 침대 머리는 침실문을 향하여 있고문은 또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는데다 바로 복도에 있는 책걸상을 마주하고 있었다평상시 악경이 앉아 방안의 상황을 감시하고 있었다밤에는 또 일반 노교 인원이 왔다갔다하며 순찰을 하여 법공부하기가 불편했다또한 전향하지 않는 확고한 대법제자는 반드시 이 위치에서 잠을 자야한다고 규정했다하지만 그런 일념을 굴리지 않자 다른 방으로 옮겨갔고 또 그 방의 가장 안쪽으로 배치되었다머리는 창문을 향하고발은 출입문을 향하고 있어밤에 이불안에서 법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노교소는 강제로 노교 인원에게 노예노동를 시켰다나는 작업장에서 악경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구석에 배치되어 한편으로 일을 하고 한편으로는 시간을 짜내 법을 외웠다.

한번은 식사를 다하고 침실에 갔는데 악경이 갑자기 모두 복도에 나가 줄을 서라고 명령하고 차례대로 몸 수색을 했다당시 경문이 나의 몸속에 있었다하지만 반드시 사부님이 가지해 주고 있기에 나는 당시 두려운 감이 조금도 없었다악경의 손이 하마터면 경문에 닿을 뻔했지만 수색해내지 못하고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다.

한번은 악경 중대장이 갑자기 전체인원을 불러 복도에 서게 하고는 대 수색을 하기 시작했다그때에도 경문을 음식물 봉지에 넣었고 또 선명하게 보이는 위층 침대에 놓아 이번에는 틀림없이 발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위기일발의 이 시각에 악경 중대장은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수색하지 않을 테니 모두 방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사악한 환경과 가혹한 조건하에서 정말로 전부 사부님의 보호와 가지에 의존해서 ‘전법륜과 사부님의 신경문을 지켜낼 수 있었고 또 제자들의 정념으로 난관을 하나하나 이겨나갔다집에 가기 전 나는 또 이 ‘전법륜을 다른 수련생에게 전해주어 이후의 수련생들이 소중한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노예노동을 하기 전 나와 확고한 D수련생은 몇 명의 푸자오(普教파룬궁수련생에게 전문 세뇌를 시키는 자)와 바오자(包夾수감자로 이뤄진 감시원)들이 지켜보는 엄격한 방안에 갇혀 있었다노예노동의 수요로 작업라인 작업에 배치되어야 하기에 나는 전향된 많은 수련생들한테 배치되어 한 팀이 되었다사실 이런 수련생 대부분은 진심으로 ‘전향한 것이 아니다표면적으로는 일의 편리를 위해 기술상에서 교류하지만 우리 이 팀은 모두 한 침실에 거주한다한 침실에 12명이 거주하고 있고 그중에 2명이 푸자오이다.

하루는 외부 사람이 없어 나는 수련생들에게 사부님의 신 설법을 듣고 싶지 않는가고 물었다그들도 오랫동안 법을 배울 수 없어 모두 듣고 싶어했다나는 그들에게 ‘2003년 캐나다 밴쿠버 법회에서의 설법을 외워 주었다그것은 내가 어느 노교소에서 불법으로 감금될 때 외워 놓은 것이다아쉽게도 절반만 외우고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그 후부터 시간만 되면 나는 그들에게 법을 외워 주었다한동안 시간이 지나 나는 다른 팀으로 배치되어 일을 하게 되었고 또 다른 수련생들과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 그들에게 법을 외워 주었다.

어느 날악경은 갑자기 또 나와 D수련생을 엄관실(엄격하게 관리하는 방)로 이전시키면서 물었다. “당신을 왜 여기로 이전시키는지 알아요?”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마음속으로 내가 모두에게 법을 외워준 것이 그들이 알아버린 게 아닌가고 생각했다후에 원래 침실에 있던 수련생이 나에게 ‘전향된 모든 수련생들이 모두 ‘엄정성명을 섰다면서 이전의 억압아래에서 말하고 쓴 대법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언행을 전부 폐기한다고 성명하고 아울러 성명서를 노교소 악경에게 제출했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수련생들에게 성명을 쓰라고 권하지 않았다그런 사악하고 잔혹한 환경 중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매우 큰 용기와 정념이 필요했고정말로 생사를 내려놓는 정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이것은 완전히 사부님의 자비와 대법의 위엄대법의 위덕, 그리고 수련생들 자신의 정념이 있어야 이런 장거(壯舉)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엄정성명을 발표한 이런 수련생들은 이런 정념으로 더 큰 박해를 받지 않았고내 앞에서 만기가 된 수련생들도 형량이 가해지지 않았고 기준에 따라 형량이 줄어서 석방되었다이것은 전적으로 사부님의 자비와 가지(加持)의 덕분이다!

××노교소에서 불법으로 감금된 많은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모두 알고 있다즉 이른바 ‘전향된 수련생이 집에 갈 때에는 하늘이 음침하거나 심지어 비와 눈이 내리고 그와 반면 확고한 수련생이 집에 갈 때에는 모두 맑은 날씨였다.

내가 집에 돌아오던 그날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을 뿐만 아니라 5일간 눈부신 광경이 펼쳐졌다태양 주위에는 커다란 광환이 있었고 광환위에는 네 개의 빛나는 ‘작은 태양이 골고루 분포되었다나는 이것이 확고하게 수련하고수련의 길을 잘 걸으라고 사부님께서 격려하여 주신 거라고 생각했다.

진상을 알리는 항목 중에서 자신을 닦다

2011한성(韓星) 5호 위성이 대륙을 향해 신탕런(新唐人)에서 중계 방송했다나는 신당인 수신기 안테나를 설치하는 항목을 하기 시작했다나는 신탕런을 설치하는 과정을 수련의 과정으로 삼고 문제에 부딪치면 자신을 찾고자신을 닦았는데 효과가 매우 좋았다.

A수련생의 남편은 악당의 관리인데 붓글씨를 아주 잘 쓰며 일부 종교책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는다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종교계의 ‘명인을 포함한 일부 ‘명인도 접촉했지만 악당의 독해를 너무 깊게 받아 대법에 대한 진상을 알지 못했다.

그날 A수련생의 집에 가서 안테나를 설치했는데 우리가 대법제자인걸 알고 나서 그는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며 깔보는 듯한 기색이었다악당이 주입한 거짓말을 하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비난했다게다가 사부님의 존함도 함부로 부르면서 아주 오만했다우리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도 상관없지만 사부님에 대한 무례한 말은 자연스럽게 참을 수 없어 우리는 그와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다그의 말솜씨가 아주 뛰어나서 우리 4~5명의 수련생들이 합세해도 그를 당해 낼 수 없었다. B수련생이 격동되여 당신은 우리 사부님에 대해 무례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지만 그는 아예 듣지도 않았다나는 그에게 내가 가장 잘 아는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 진상을 말하자 그는 나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화제를 바꾸었다나는 그가 우리를 깔보기에 그에게 나의 직업을 말했다나의 직업이 속인 중에서 낮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런 방식으로 법을 실증하려고 했지만 그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이때 나는 자신이 사람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나는 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의식하고 잠깐 그와 떨어져서 조용히 자신을 찾아보았다자신이 아주 강한 쟁투심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선량하게 진상을 말하지 않고 그와 논쟁을 벌여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했다또 자신이 사람의 정으로 사부님을 대했다는 것을 발견했다다른 사람이 사부님에 대해 무례한 말을 하기만 하면 그에게 화를 내곤 했다나는 쟁투심과 사람의 정을 내려놓고 평화적으로 진상을 말해야 한다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자신의 행동으로이지적으로수련인의 상태로 법을 실증하고 사부님의 위대함을 실증해야 한다.

나는 차분하게 수련생 남편 앞에 다가갔다그는 한창 질문을 하고 있었다. “당신네 사부님은 당신들을 보호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그런데 당신네 사람들은 붙잡히고맞아대고또 맞아 죽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당신네 사부님은 왜 당신들을 보호하지 않나요?” 다른 몇 명의 수련생들은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문제를 찾았기 때문에 나의 심태는 매우 안정되어 상대방의 태도를 보아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은 많은 종교의 책을 보아서 어찌된 일인지를 알 것입니다불교가 500년 동안 박해받은 후에야 일어섰고 기독교도 300년을 박해받은 후에야 일어섰습니다그들은 현재 전 세계가 공인하는 정교입니다당신은 석가모니 부처와 예수가 그의 제자를 보호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러자 그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또 “당신네 사부님은 기껏해야 고등학생 수준인데 뭐가 그리 대단해요?”라고 말했다그리하여 나는 “당신은 알아요예수가 그 당시 수난을 당할 때 그의 제자는 세 차례나 그를 스승이라고 승인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대법이 박해를 받고 우리의 사부님이 모함을 당했을 때 수천수만의 우리 대법제자들은 모두 생사를 내려놓고 일어서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하고 사부님의 결백함을 실증했습니다당신이 말해보세요우리의 사부님은 위대하지 않나요나는 우리의 사부님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말을 했다말을 다 하고나서 나는 그가 받은 충격이 매우 컸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가 방금 좋은 것을 알면 집에서 연마하면 되지왜 또 나와서 진상을 해요가족들이 모두 연루되잖아요.”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당신은 알아요그 당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용감하게 예수를 위해 공정한 말을 하는 그의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예수는 그의 제자를 제도하기 위하여 생명의 대가를 지불했지만 그의 제자는 오히려 용감하게 나오지 못했습니다하지만 우리 대법제자는 용감하게 나왔습니다우리는 파룬궁을 연마하여 덕을 보았고 병이 나왔습니다파룬궁이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해주었습니다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모함과 박해를 받는데 우리가 일어서서 공정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당신이 방금 사람이 되려면 양심이 있어야 된다고 했잖아요나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양심이라고 생각해요.” 그러자 그는 침묵했다.

또 잠깐 말을 하다가 그는 한마디 말을 했다. “리훙쯔(李洪志대사님....” 당시 나는 듣고 나서 좀 격동되었다그가 사부님에 대해 존칭을 쓴 것은 그가 진상을 들은 후 다소 개변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점심밥을 먹을 때 그는 처음에 못마땅해 하고 깔보던 기색이 완전히 없어지고 매우 우호적으로 말했다. “오늘 여기에 앉은 우리는 모두 친구입니다사양하지 마시고남처럼 대하지 말고와서 식사합시다!”

후에 수련생들의 협조 하에 신탕런을 설치했다.

한동안 있다가 또 A수련생을 만났는데 그는 그의 남편이 신당인을 아주 잘 볼 뿐 만 아니라 진심으로 ‘삼퇴를 했다고 말했다.

한번은 한 수련생의 큰집에 가서 신탕런 안테나를 수리하러 갔다항렬로 따지면 내가 수련생의 집안 어르신을 외할아버지외할머니라고 불러야 했다그 집의 안테나는 한동안 신호가 없어 이미 철거되어서 다시 설치해야 했다할머니는 우리가 안테나를 수리하러 왔다고 하자 바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와 말했다. “늘 신호가 없어요그렇게 큰 물건을 그곳에 놓아 자리를 차지하게 하다니...” 할아버지는 아직도 즐겨 보시기에 새로 설치하려고 했다그러자 할머니는 큰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난리를 치셨다. “당신이 설치하기만 하면 나는 당신과 이혼할거에요.”라고 하면서 우리보고 빨리 안테나를 가져가라고 하였다우리는 좋은 말로 한번 권해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할머니는 갈수록 더 심한 말을 하여 나는 가져가겠다고 말했다우리는 먼저 이웃집에 가서 테스트를 하고 나서 다시 와서 안테나를 가져가기로 했다.

점심에 이웃집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할머니의 아들이 와서 내가 안테나를 가져가겠다고 해서 할머니가 화를 냈다고 말했다나는 듣고 나서 정말로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그가 가지지 않겠다면서 기어코 우리보고 안테나를 가져가라고 하더니 도리어 또 내 탓이라고 했다마음속으로 내가 연공인이기에 내가 옳고 그르든 지간에 할머니가 이렇게 말한 이상 내가 가서 사과하고 그에게 갈등을 초래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를 다 하고나서 나는 할머니 집에 갔다할머니는 내가 온 것을 보고 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나는 웃으면서 “할머니미안해요아까 내가 안테나를 가져가겠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사과드릴게요.” 할머니는 나의 이 말을 듣자 기뻐했다그래서 나는 “그럼 신탕런을 설치해드릴까요?”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웃으면서 “그래요설치하세요.”라고 말했다그리하여 우리는 할머니 집에 또 신탕런을 새로 설치하여 주었다.

우리가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도하는 것은 속인의 일이 아니다여기에는 수련인이 수련해서 제고해야 할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문제에 봉착하면 자신을 잘 닦아 자신의 심성을 제고하면 세인도 개변된다이렇게 하면 법을 실증할 뿐만 아니라 중생들에게 진상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더욱 많이 주게 된다.

신탕런을 이용하여 진상을 알리는 외에 평상시 시간이 되면 나와 다른 수련생들은 협조하여 거리에 나가서 혹은 시장이나 다른 곳에 가서 진상을 알리고 삼퇴(중공의 당대 조직 탈퇴)를 권한다과정 중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는데 어떤 사람은 원래부터 중공의 악당을 몹시 증오하여 듣자마자 바로 삼퇴에 동의한다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 진상은 알았는데 삼퇴하는 방법을 몰라 그에게 말해주면 바로 탈퇴하겠다고 동의한다또 어떤 사람은 진상을 알고나서 자신이 탈퇴할 뿐만 아니라 또 가족도 탈퇴하도록 도와달라고 한다또 어떤 사람은 ‘삼퇴란 말을 들으면 바로 욕을 퍼붓는데 한차례의 진상을 들으면 웃으면서 ‘삼퇴에 동의한다일부 악당의 관리와 공안인원경찰도 만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삼퇴를 했다.

한번은 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누군지 아는가고 물었다우리는 이런 말투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파룬궁을 전문적으로 박해하는 악당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리하여 그에게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당신은 선량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기뻐서 진상을 듣고 악당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이 몇 년 동안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사부님의 정법 형세에 따라 용맹하게 추진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세인들도 빠르게 깨닫고 있어 진상을 알리는 난이도가 크게 떨어져 세인들이 잘 받아들이려고 했다진상을 안 많은 세인들이 모두 진심으로 대법제자에게 감사를 표시하면 수련생들은 “나에게 감사를 드리지 말고 리훙쯔 대사님께 감사를 드리세요.”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상대방은 바로 “리 대사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 연장해주신 소중한 수련시간과 정법 수련의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겨 계속 법 중에서 정진하고 수련생들과 서로 협력하여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할 것이다!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대원만법-2. 동작도해(動作圖解)’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2-이성(理性)’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북미 순회 설법


원문발표
: 2018 5 31
문장분류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5/31/368201.html

명혜망

논-픽션: 질풍경초 (疾風勁草)

글/중팡충(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16일】




머리말

내 이름은 중팡충(鐘芳琼, 중밍팡,(鐘銘方)이라고도 불렀다.), 올해 39세의 여자로서,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얼환루(二環路) 둥싼돤(東三段) 36호 런허위안(仁和苑) 4동 (원래 27동) 3층 7호에서 거주하고 있다. 〔원적(原籍): 젠양(簡陽)시 윈룽(云龍)진 양밍(楊鳴)촌 7사(社)〕. 원래 가진 자산은 70만 위안 이상이고, 월수입이 1만 위안 이상인 개인사업자(個體戶)였다. 오른쪽 하지에 선천성 혈관종양(血管瘤)이 있었는데 30 여 년간 줄곧 병원치료를 해보았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1995년 육군종합병원에서 수술 할 때, 혈관 일부를 뽑아버리기까지 했으나 치료하지 못했다. 1997년 화시(華西)의과대학의 30여명 전문가들이 진단한 결과, 세계적인 난치병으로서 국제적으로도 아직 치료방법이 없다고 모두 다 인정하였다. 파룬궁을 두 달 연마했는데 혈관종양이 기적같이 사라졌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병이 없는 행복을 느꼈다. 1999년 7월 20일, 장(江)씨 집단이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위반하여 파룬궁을 미친 듯이 탄압하기 시작한 후, 나는 천천만만 대법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고통을 받았는데, 38개의 기관(單位)이 나에 대한 박해에 참여하여 불법감금을 하고 약 29차 743일에 걸친 노동교양을 시킴으로써 온갖 혹형의 시달림을 받았다. 현재는 핍박에 의해 살 곳을 잃었다......

목차

머리말

제 1 부 고난의 인생

제 1 장: 쓰라린 어린 시절
자줏빛 모반(胎記)
의사를 찾고 약을 수소문하다
고난의 진창길

제 2 장: 간난신고의 창업
실패한 첫 사랑
15위안을 가지고 청두(成都)로 가다
생명으로 돈을 바꾸다
실패한 혼인
압력이 있어야 동력이 있다
실패한 수술
수련이 싹트다

제 3 장: 절망의 인생
약을 달고 살다
세계적으로도 고칠 수 없는 혈관종양
악화
약간의 위안
혼비백산

제 2 부 새로운 삶

제 1 장: 연을 맺다
사저(師姐)의 변화
대법이 미혹을 타파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

제 2 장: 대법이 나에게 제2의 생명을 주었다
신기함을 체험하다
천상에 한 무리 선녀가 오가다
온 집안이 이득을 얻다
세계적으로 고치지 못하는 혈관종양이 사라졌다
옥같이 깨끗한 마음

제 3 장: 홍법
대법이 고향에 전해지다
시련이 닥치려고 하다

제 3 부 11차례 구류되다

제 1 장 탄압 초기(初期)
7.20. 대규모 체포
단체 법공부, 연공을 위해 집을 사다
상무조보(商務早報) 사건
경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총이다
핍박으로 직장을 잃다

제 2 장 힘겨운 청원의 길
처음 청원하러 가다
북경주재 청두(成都)사무소
진상을 알게 된 승무원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
쥬루(九茹)촌 구치소
동생이 경찰 웨이다핑(魏大平)에게 3,000위안을 뺐기다.

제 3 장 다시 청원하러 가다
층층의 가로막음을 피해가다
하나하나의 방어선을 돌파하다
민원접수처가 공안국으로 변하다
장(江)씨 집단이 봉건왕조의 연좌제(連坐制)를 이용하여 지역경찰을 연루시키다

제 4 장 새빨간 거짓말로 세상 사람을 속이다
시비가 전도된 쓰촨(四川)텔레비전 방송국 소식
구류소에 노(老) 홍군(红军)을 가두다
장기간 반복적으로 감금되었던 나날들
집단단식과 야만적 음식물 투입
어머니의 조우(遭遇)

제 5 장 사실의 진상을 똑똑히 밝히다
대법을 모욕하는 사진 전시실 입구에서 진상을 알리다
강제로 집을 수색하다

제 4 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을 받다

제 1 장 진상은 감출 수 없다
길 잃음(迷失)과 귀정(歸正)
위선적 연기
공산당이 좋다?
살아있는 광고

제 2 장 대법입자
감금되다
정념으로 마굴에서 뛰쳐나오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수련한다

제 3 장 여파가 가라앉지 않다
또 구치소에 들어가다
사악이 수단을 다 써도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다
신분증 풍파

제 5 부 나무가 조용히 있고자 해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제 1 장 정념으로 경찰의 악행을 제지하다
족제비가 세배를 하다
꿈에서 금방 깨어난 어린 이씨(小李) 간사(幹事)
떳떳치 못한 경찰
수련은 만에 하나가 없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제 2 장 인권박해
행동을 감시하다
인신자유를 제한하다
30만 위안이 11,500 위안으로 변하다
연루
온갖 생트집을 잡아 방해하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협하다
불법으로 집을 수색하고 감금하다

제 6 부 대법 중에서의 바른 믿음

제 1 장 도깨비 세계
경찰과 강도
개가 여동빈을 물다
모두 장쩌민이 해친 것이다
사형상(死刑床)
살 곳을 잃다

제 2 장 혹형 및 학살
특무와 조우하다
정념의 위력
반죽음이 되다
백가지 고생이 한 번에 들이닥치다

제 3 장 신이 창조한 기적

후기: 나는 당신에게 말하련다



제 1 부 고난의 인생

머리말: 수련하기 전, 나의 염원은 한사코 돈을 벌어 병을 치료하고 곧 마비되어 침대생활을 해야 하는 나를 위해 일체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제 1 장 쓰라린 어린시절

*자줏빛 모반(胎記)

1965년 8월 21일, 쓰촨(四川)성 젠양(簡陽)시 윈룽(云龍)진 양밍(楊鳴)촌 7사(社) 묘즈산 (廟子山)기슭의 한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고난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인간 세상에 오자마자 나의 오른쪽 아랫도리는 발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온통 자줏빛 모반(胎記)[주1]이 가득했다. 자매 넷 중에서 나는 둘째이다. 아버지는 탈장수술로 중노동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친정이 가난하여 어릴 적에 병이 있어도 돈이 없어 치료를 하지 못해 왼쪽 발이 걸을 때 쩔뚝거리는 불구로 되었다. 다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언니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오른쪽 발과 다리가 불구로 되어 마을에 이름난 절름발이가 되었다.

원래 오른쪽 다리의 발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자줏빛 모반이 가득 나 있었던 나는 여섯 살 되는 그 해 여름, 무심결에 오른쪽 다리의 발등에서부터 허벅지, 엉덩이까지 검은 선 같은 혈관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렇게 되자 크게 놀라신 아버지는 얼른 돈을 빌려 나를 대대 (大隊) 의료기관과 윈룽향(雲龍鄕) 위생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했다. 돈도 많이 쓰고 약도 많이 먹었지만 반년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았다. 겨울이 돌아와 날씨도 추워졌다. 하지만 불행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만은 춥게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픔은 돌보지 않고 나를 70리 밖 젠양시 한의원으로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게 했다. 검사결과 피가 안에서 죽어버려 혈맥이 통하지 않아 조성된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나에게 혈액순환이 잘되게 하는 대추만큼 큰 환약을 대량으로 조제해주면서 장기적으로 복용하라고 타일렀다. 약을 산 후, 아버지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버스를 타려면 비록 나는 키가 작아서 표를 살 필요가 없지만 아버지는 90전짜리 차표를 사야 했다. 그때의 90전은 한 농민으로 말하면, 절대로 작은 액수의 돈이 아니어서 아버지는 10여 일을 일해야 벌 수 있었다. 이리하여 여섯 살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갔는데 우리는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장장 8시간을 걸어서야 기나긴 70리 노정을 다 걸었다.

*의사를 찾고 약을 수소문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부터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거름을 줍고, 풀을 뜯으며 어른을 도와 돈을 벌었다. 중학교 다닐 때, 학교는 집과 8리 떨어진 시골에 있었는데 나는 아침에 광주리를 메고 학교를 가야 했다. 점심 때, 다른 학우들이 점심 잠을 잘 때, 나는 학교 부근의 야산에 가서 풀을 뜯었으며 오후수업이 끝난 후에는 길가의 풀을 뜯으며 집으로 갔는데 집에 도착하면 날은 이미 어두웠다. 저녁식사 후, 어른들이 잠들면 나는 그제야 콩알만 한 석유등잔 밑에서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숙제를 다 하고 나면 늘 한밤중이었다. 집 옆은 묘지였다. 여덟 살 때, 집 옆 채소밭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는데, 귀신의 음영이 늘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저녁이 되기만 하면 몹시도 겁이 나 라디오를 켜놓고 들어야 했다. 이렇게 하면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모님은 사방으로 의사를 찾아 다녔는데 중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겨우겨우 치료를 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친정에서 러즈(樂至)현 다포취(大佛區)가에 한 침구의사가 있는데 의술이 아주 고명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부모님께서는 상의한 후, 한 점의 희망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시어 한시도 지체할세라, 나더러 가서 한번 시험해보라고 하였다. 열두 살이었던 나는 토요일마다 하교 후 혼자 3, 40리 길의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며 치료하러 다녔다. 의사는 말하기를 혈맥이 통하지 않아 침구로 치료해야 하며 강제로 혈액을 순환시켜 혈관 안의 혈액이 더는 응고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수많은 침을 발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모든 혈에 꽂았는데 나의 마음은 마치 천만 마리 모기가 무는 것 같으면서 붓고, 아프고, 저렸으며 온갖 감회가 나를 향해 엄습해 왔다. 이것도 모자라 의사는 조금 있다가 또 온갖 은침을 몇 번 씩 번갈아 놓아 고통과 괴로운 느낌이 좀 줄었다가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매번 침을 놓으면 반나절이나 걸렸지만, ‘아파도 참자, 병이 나으면 행복해질 거야.’ 하면서 나는 늘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고난의 진창길

돈을 벌어 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매번 학교에서 방학을 하면 나는 나보다 5, 6세 많은 언니들과 함께 10여리 밖에 가서 풀을 뜯었다.

어머니는 내가 나가면 저녁에야 돌아오며 점심밥이 없는 것을 생각하여 마음 아파하면서 나에게 생 땅콩이나 오리 알 하나를 주거나 어름사탕을 좀 주었다. 나는 내가 장기적으로 언니들을 따라 같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길을 나서자 이런 먹을 것들을 그들에게 나눠주어 먹게 하였다.

한번은 하루 종일 3, 40근을 뜯었는데 열두 살 난 나는 허리가 다 눌리어 구부러졌지만 어두운 밤에 언니들을 바싹 따르면서 힘겹게 집으로 향해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서 진창길이 몹시 미끄러워 헝겊신을 신고 걷기가 불편하여 아예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발에 가시가 박히는데 아파 울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땀과 빗물, 눈물이 한데 뒤엉켜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씩 가야 했다. 양밍(樣鳴)5대 룽중퉈산(龍重陀山)까지 왔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졸졸 흐르는 작은 강의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우리가 산에서 발을 내디딜 때의 첫 받침돌은 매우 멀리 있었는데 받침돌 위에 또 작은 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작은 돌은 임시로 올려놓은 것이어서 이가 맞지 않아 발을 위에 밟으면 돌이 움직이므로 정말 아주 겁이 났다. 산간마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받침돌에는 두터운 한 층의 누런 흙이 쌓였는데 누런 흙은 이미 빗물로 진흙이 되어 마치 기름을 칠한 것처럼 미끄러워서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낭떠러지로 떨어져 강에 빠질 수 있었다. 가고 또 가고 하여 끝내 어렴풋이 집의 등불이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나는 정말 더는 메고 갈 수가 없어 언니들더러 집에 가서 소식을 알려 부모님에게 나를 마중 나오게 하였다. 아버지께서 나를 마중 나왔을 때, 내 마음속의 고통은 마치 어느 사이인가 터져버린 터진 홍수마냥 삽시간에 쏟아져 내려 나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마음속으로는 깊이깊이 원망하였다. 이 몹쓸 다리병만 아니라면 내가 어찌 이런 고생을 하겠는가!

[주1 : 모반 (母斑) [명사] 선천적인 원인으로 살갗에 나타난 갈색 또는 검은 점이나 사마귀·주근깨 따위]

제 2 장 고생스레 창업하다

*실패한 첫사랑

18세 되던 그 해, 다른 사람의 소개로 나는 본 대대의 초등학교 동창과 연애를 했다. 그의 부친은 집짓는 일을 맡아 하였고 그 역시 철근 일을 하는 사람이며 견습생 하나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본 지방에서는 이름이 좀 있었다. 그때는 그의 집도 먹고 살만하여 우선 흑백텔레비전을 샀는데 연속드라마 훠위안자(霍元甲)를 방영할 때,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우리는 반년 동안 연애하였다. 열렬히 사랑하는 중에 그가 갑자기 나와 헤어지자고 하여 나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알지 못할 눈물만 쉴 새 없이 흘렸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는 동창한테서 나의 오른쪽 다리가 병이 있어 출산(生育)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또 이 몹쓸 다리 때문에 내 일생의 대사를 망쳤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시 나의 중학교 한반 동창과 연애를 하면서 늘 짝을 지어 우리 집 문 앞을 지나갔다...... 나는 정말로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고향을 떠나 청두(成都)에서 사업을 개척하여 그와 누가 더 강하고 잘 되는지를 겨뤄 보기로 결심하였다.

*15위안을 가지고 청두(成都)로 가다

아버지는 내가 떠나는 것이 달갑지 않아 나에게 청두로 가는 왕복 차비 5위안만 주었다. 어머니는 나의 결심이 이미 결정되자 슬그머니 10위안을 빌려서 내게 주었다. 나는 15위안의 돈을 가지고 1985년 음력 2월 2일에 청두 와이시차뗀즈(外西茶店子) 훙써이뚜이(紅色一隊)의 친척집에 머물렀다.

내가 청두에 간지 얼마 안 되어 마침 영먼커우샹(營門口鄕)옷 공장(현재 西門역전)에서 근로자를 모집하였다. 몇 백 명이 지원했는데 60명을 모집했다. 언니가 재봉사였기 때문에 나는 어릴 적에 언니한테서 옷 만드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제일 첫 번째로 뽑혔을 뿐만 아니라 재봉 일을 몇 년 해야 갈 수 있는 생산라인에 직접 들어갔다. 나는 아침 5시면 걸어서 출근하여 연장근무를 하였다. 점심 때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면 나는 수빙(역자주: 밀가루에 기름, 설탕을 넣고 구운 파이)을 두 개 사서 먹고는 또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저녁에 남들은 모두 텔레비전을 보러 갔지만 나는 또 연장 근무하며 단추를 달았는데 밤중까지 하였다. 여름이면 더워서 신발을 신을 수 없어 종이판을 놓고 맨발로 밟을 수밖에 없었으며, 하루 종일 하고 나면, 두 발과 다리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붓는다. 매달 모두 두 몫의 월급을 받았으니 대략 60위안(元)이다. 다리를 고치기 위해, 나는 매 달 반드시 40위안을 저축해야 한다. 나는 평소의 생활에서 매우 절약했하였으며 그때 가장 싼 아동용 칫솔과 치약을 썼다. 나는 성이 장씨인 고향의 여동생과 둘이서 아침에는 1전 어치의 김치를 먹고, 점심은 5전 어치의 채소를 먹었다. 저녁이면 1층에서 수박장사가 ‘수박 하나에 10전이요.’ 라고 소리 높이 고함치지만 우리는 맛을 본적이 없다. 한두 달간 고기를 먹지 못해 속이 출출하여 기름이 많은 머리고기를 사서 먹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와 장씨 동생은 사무실의 사무용 책상 위에서 잤다. 밤이면 나는 책상 위의 것들을 정리해서는 책상을 밖으로 잡아당겨 안에서 자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책상은 우리 키보다 짧아 우리는 발이 있는 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발을 의자 위에 걸쳤다. 아침이면 또 책상과 의자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유리판, 잉크 같은 것들도 제자리에 놓는다. 이 기간에 나는 스후이제(石灰街)에 있는 훙광(紅光)병원에 가서 다리의 병을 보였는데 검사결과는 정맥이 굽어(曲張)져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이를 알게 된 후, 계란 50개를 메고 나를 보살피러 왔다. 병원에 침대까지 마련되었는데 다른 한 의사가 또 말하기를 이것은 신체에 영향이 없고 보기가 싫을 뿐이니 여름에 긴 치마를 입으면 되니까 수술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는 침대를 물리고 수술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또 청두 와이둥(外東) 공군병원에서 청소부 일을 하였고, 주옌차오(九眼橋), 로차오(老橋), 차오터우(橋頭)에서 물건을 판매하였으며, 류리창(琉璃場)거리에서 자동차 부품을 팔면서 아울러 담배장사도 하였다. 돈을 번 후, 나는 1987년 9월, 청두 와이난 (外南) 타이핑웬성(太平園省) 운전학원에서 화물차 운전을 배웠다. 1988년 3월, 운전학원을 졸업한 후, 매달 200위안의 월세를 내고 쓰촨 음악학원의 노해방(老解放) 화물차를 빌려 화물운반을 하였다. 1988년 연말, 노해방 중고차를 하나 사서 사장이 되었다. 처음에 원쟝(溫江) 진마허(金馬河)에서 모래를 운반하고, 룽징(榮 經), 펑(彭)현의 스원(思文), 워이웬(威遠)에서 석탄운반을 위주로 하다가, 나중에는 폐철, 시멘트를 운반하였다......

*생명으로 돈을 바꾸다

내가 노해방 자동차로 워이웬에서 석탄을 운반하던 나날들을 회상하면 마음이 몹시 괴롭지만, 고통스런 기억 중에서 나는 그래도 쓰라린 눈물을 머금고 이 한 단락의 일들을 써내련다.

돈을 많이 벌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개인이 경영하는 작은 탄갱에 가서 석탄운반을 하였다. 저울이 없어 무게를 달지 못하기 때문에 중량은 모두 추측하였다. 보통 추측한 5톤 석탄을 저울로 달면 7톤 정도가 된다. 이렇게 하여 화물 주인은 아주 많은 돈을 벌게 되며, 비교해서 운송비도 좀 더 주어야 한다. 워이웬현은 산이 많고 보통 간이 도로이며 길도 매우 좁아 차를 비킬 수 없었다. 자전거와 행인마저도 길옆에 서거나 혹은 적당한 곳을 찾아 길을 비킨다. 운전을 여러 해 한 남자 운전자마저도 한번 갔다가는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 도로 한쪽에는 산이고 한쪽은 강인데 길바닥이 무게를 받아내지 못할 까 바, 가급적 차를 산 쪽으로 붙이면서 운전하였다. 울퉁불퉁한 크고 작은 돌 위로 한 단락 노정을 운전하면, 자동차 기름상자 고정 끈마저 흔들거려 끊어졌으며, 차의 짐받이는 바위 돌에 걸려 헤어졌다. 나는 놀라서 안색이 창백해졌으며 마음이 조마조마하여며 운전하였다. 나중에도 이때의 경력을 생각하면 울렁거림(動悸)이 가라않앉지 않는다. 그때 나는 겨우 23세였으며 면허증을 금방 손에 쥐어 운전경험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돈을 벌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죽음을 무릅쓰면서라도 가서 일을 해야 했다.

한번은 비가 내린 후 날씨가 개여 7톤 가량의 석탄을 싣고 산에서 내려올 때였는데, 사이드 브레이크와 풋 브레이크만 가지고는 차의 속도를 조절할 수 없어서 나는 또 변속기의 위치를 한 단계 더 조절하여 완전히 엔진의 반동력으로 차의 속도를 통제하였다. 길이 미끄러우면서 굴곡이 심하고 좁아 나는 온 신경을 기울여 운전하였으며 가장 좋은 기능을 발휘하였지만 그래도 앞바퀴가 길에서 벗어나 완두콩밭에 굴러 떨어져 낭떠러지 곁에 걸리게 되었다. 속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화물주도 비록 차를 따라다닌 시간이 길고 경험이 좀 있지만 그는 필경 운전을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유일한 방법이란 바로 차를 후진하는 것인데 이야말로 목숨으로 도박하는 것이다! 무게가 있는 차인데다가 또 산을 내려가는 중이고 게다가 차가 미끄러워 조금이라도 손발이 맞지 않으면 바로 차는 망가지고 사람이 죽는다. 설사 이러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큰 돌을 안아다가 차의 네 개 바퀴에 고인 다음 운전실에 앉아서 가속페달을 밟고 조심스레 클러치를 놓으면서 손, 발을 배합을 잘하여 엔진의 동력이 커지면서 차가 막 떠는 때를 기다려서 천천히 사이드 브레이크를 놓았다. 나의 마음은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으며, 진짜로 생사존망의 선에서 발악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보호로 마침내 한번에 차를 후진시켰다.

또 한 번은 물이 불은 후, 내 차가 탄갱에 거의 왔을 무렵, 길바닥이 물의 충격에 의해 일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길이 너무나 좁고 위험하며, 뒤로 얼마나 가야 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 하에서 나와 화물주인은 거기에 서서 한참 생각하였는데 마지막에는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기로 결정하였다. 화물주인이 말하기를 “쇼중(小鐘), 나는 괜찮소, 이미 40이 넘었고 아들도 컸으며 무엇이든 다 겪었으니깐, 그런데 자네는 젊고 가정도 아직 안 이루었소.”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죽으면 그만이죠, 모든 것을 다 끝내버리니 살아서 고생할 것도 없고 뼈 빠지게 돈을 벌어 병을 고칠 필요도 없지요.” 제대로 말하면 노반(路盤)이 근본 든든하지 못한데 조금이라도 잘 장악하지 못하면 차와 사람이 모두 홍수에 말려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담을 키워서 가속페달을 끝에까지 밟았다. 차는 관성으로 돌진하여 비로소 이 목숨 하나를 건졌다.

또 한번은 워이웬에 석탄을 실으러 갔다가 나는 시난(西南)민족학원에서 집을 허물고 남은 낡은 재료를 한 차 실었다. 험한 길을 하도 많이 다녔으므로 나는 우선 화물주인에게 정식 도로인가, 큰 차가 통과할 수 있는가를 물었는데 그는 모두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은 그렇지 않았다. 차가 금방 즈양(資陽)의 우황(武黃)지역까지 갔을 때, 밤중에 나는 도로가 갈수록 좁아지고 앞의 길은 산의 형태에 따라 닦은 간이도로임을 발견하였다. 나중에는 날씨가 갑자기 변하더니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차창에 쏟아 붓는 듯하고 와이퍼(wiper)도 말을 듣지 않았다. 나의 차는 높이제한을 초과하여 짐을 실어 캐비지처럼 위가 무겁고 아래가 가벼웠다. 힘겹게 달리던 중, 갑자기 차가 기울어져 거의 뒤집어지려고 하였다. 이때, 나는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밖에는 큰비가 내리고 비가 새는 운전실에는 작은 비가 내렸다. 벌써 잠이 푹 들어버린 화물주인과 그의 손자를 바라보며 나는 혼자 눈물을 흘리면서 이 몹쓸 병이 있는 다리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장을 보러 가는 군중들이 당장 뒤집어질 듯 하는 차를 보고서는 제각기 떠들며 말했다. “어떻게 큰 차가 여기까지 다 왔나? 만약 차가 뒤집어지면 부품을 주울 수밖에 없지. 누가 감히 크레인을 몰고 여기까지 오겠는가!” 마지막에 나는 할 수 없이 길옆의 옥수수 대를 안아다 깔고는 다시 조심스레 차의 원심력에 따라 차를 바로 잡아놓아 비로소 재난을 모면하였다. 돈을 많이 벌어 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목숨으로 돈을 바꾸어야 한다. 매번 아침 3시쯤이면 나는 청두에서부터 차를 운전하여 워이웬의 개인 탄갱에 가서 순번대로 기다려 석탄을 싣고 나면 이미 밤중이며 밤사이 청두에 돌아와서 석탄을 부리고 또 그날 밤으로 가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되풀이하는데 늘 일주일 내내 침대구경을 해보지 못했으며 곤하면 차를 길옆 논이나 중흥구역에 세워놓고 핸들에 엎드려 자곤 하였다. 금방 꿈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또 뒤에서 오는 자동차 경적소리에 놀라 깨어 계속 앞으로 운전하였다. 과로로 인해 나는 수시로 쓸어 질 위험이 있었다. 심지어 줄을 설 때, 어떤 차는 자리를 차지하느라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 어떤 운전기사는 가지고 다니는 뱀을 풀어놓는다. 뱀은 내 차가 있는 쪽으로 기어오는데 나는 놀라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뛰어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더러 먼저 싣고 가게 한다. 고통 증에서 혼자 쓴 물을 마셔야 했으며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마음속의 쓴 물을 일기책장에 적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이렇게 썼다. “나는 마치 차바퀴처럼 돌면서 닳는데 어느 때에 가서야 끝인지. 차바퀴가 못에 찔릴 때가 바로 내가 병이 걸릴 때이며, 차바퀴가 터질 때가 바로 내가 인간세상을 떠날 때이다.” 아늑한 인간 세상에서 나는 늘 알고 싶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왜 인간 세상에 왔으며, 인간 세상에서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어떤 때는 점쟁이를 찾아간갔다. 점쟁이는 “당신은 명(命) 중에 귀인이 도울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나는 귀인이 나타나 나를 도와주기를 고대하였다.

실패한 혼인

첫 사랑의 실패로 말미암아 나로서는 더 이상 무엇을 고를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내 다리가 보기 싫고 병이 있는 것을 꺼리지만 않으면 되며, 결혼 후 아이를 하나 낳아서 다리가 출산(生育)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면 되었다. 결국 경솔하게 한 노동자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겨우 3살 난 아들이 아직 아무 기억이 없을 때 우리는 헤어졌다. 그래서 아들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존재란 없었다......

압력이 있어야 동력이 있다

아들을 잉태한지 얼마 안 되어 충칭(崇慶)현 시멘트공장 샤오융차이(肖永才) 사장의 시멘트를 운반하였다. 그의 것을 한동안 운반한 후, 그는 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내게 그의 친척 후스푸(胡師傅)와 장기적으로 그의 일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여 후스푸보다 한 차 더 운반하였다. 그래서 샤오사장은 후스푸에게 “후란왕(胡懶王, 게으름뱅이)”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사내 대장부가 임신한 여자보다 못하다고 말하면 후스푸는 질투하여 말하기를 “압력(壓力)이 있어야 동력(動力)이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렇다! 나의 마음에는 확실히 아주 큰 압력이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늘 돈을 반드시 많이 벌어 그때 가서 오른쪽 다리의 병을 고치겠다고 생각하였다. 오랜 병에는 효자가 없다고 하는데 내가 침대에 들어 눕게 될 때, 보살펴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아들을 낳고 3개월이 안 되어 다시 차운전을 시작했는데 밤을 새우며 물건을 운송하였다. 낮에는 시멘트를 운송하고 밤에는 구이(桂溪)시 위즈창(預制場) 리화청(李華成)의 벽돌을 운송하였다. 젖먹이기 편하도록 운전실 긴 의자에 눕혀둔 아들도 나와 함께 밤을 지새워야 했다. 쇼사장의 집에서 일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성실하고 선량하고 신용이 있다고 생각하여 1991년 말 청두 간다오(干道) 지휘부 재료처에 나를 소개시켜주어 장기적으로 시멘트운송을 하게 했다. 제 2 순환도로를 수리할 때, 지휘부에서는 나에게 제 2 순환도로 긴급 운송차량 “전용증(專用證)”을 발급하여 나는 이 “전용증”을 가지고 무제한으로 시멘트를 꺼내 과적한 채 1차선도로를 막힘없이 달릴 수 있었다. 공사현장에서 시멘트가 급히 필요한데, 내 차로 미처 운송이 따라가지 못할 때, 나는 현금으로 시(市) 자동차 운송 5대(隊)의 차량을 불러와 돌격하였다. 매 달 지휘부와 시멘트공장이 결제를 했는데 약간의 착오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줄곧 청두시 간다오 지휘부의 운송업무를 도맡아하였다......

실패한 수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사도 갈수록 잘 되었다. 그러나 오른쪽 다리의 병은 갈수록 심해져서 혈관이 엄지손가락 굵기만큼 밖으로 튀어 나왔다. 어떤 곳은 혹으로 되었는데 운전시간이 길면 혈관이 붓고 아프며 마작을 하고 텔레비전을 볼 때에도 혈액이 과다하게 아래로 흘러가 혈관이 파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리를 평평하게 놓아야 했다.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 1995년 설을 며칠 앞두고 청두 육군종합병원에 가서 검진하였는데 결과는 소인의 정맥곡장(小引靜脈曲張)이라서 급히 수술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설 연휴시간을 이용하여 담당의사 천충뎬(陳崇典)의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오전 9시부터 시작하였는데 수술을 하는 전 과정에서 하반신만 마취시켰기 때문에 나는 수술 칼, 집게를 쟁반에 놓을 때의 소리를 또렷이 들었으며 전반 상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의사는 나의 발목 외측(外側) 혈관과 허벅지 내측(內側)뿌리 부분 혈관을 잘라내고 묶은 다음 허벅지 혈관 바깥면의 살을 떼어 낸 후, 혈관을 뽑아내었는데 아픔을 참기가 힘들었으며 마음은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러나 내내 감히 움직이지는 못했다. 간신히 혈관을 뽑아낸 의사는 나에게 “이것이 바로 당신의 혈관입니다.” 라고 말했다. 닭의 목 줄기 같은 기다란 혈관을 유리컵에 넣으니 즉시 짧아지는 것이 보였다. 의사는 말하기를 “다시 대인(大引)을 갈라 보자.” 고 하였다. 천충덴 의사는 또 나의 발목 내측을 자르고는 “대인(大引)에는 곡장(曲張)이 없다.” 고 말했다. 이때 한 의사가 “혈관종양이야.” 라고 말하자 더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나는 듣고 나서 오진으로 하지 말아야 할 수술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무슨 방법이 있는가? 나는 아예 감히 많이 생각할 수가 없었고 결과는 정말 너무나도 무서웠다. 이렇게 모든 수술을 12시까지 하였다. 일주일 뒤, 실을 뽑은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상처를 치료하였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상처는 전부 회복되었으나 혈관을 뽑았던 자리는 여전히 부풀어 오르며 호전되지 않았다. 나는 또 불안한 심정으로 육군종합병원 천충텐 의사를 찾아갔다. 천 의사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연구를 거쳐 미국에서 들여온 견인수술을 당신에게 무료로 해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재삼 생각해보았다. 만에 하나 어려운(深度) 수술을 하다가 불구라도 되면 어떻게 하지? 지금 비록 팽창하고 아프지만 혈관은 아직 파열되지 않았으며 또한 아직 사람이 젊고 혈관은 탄성이 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고 더는 수술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수련이 싹트다

1996년 8월, 나는 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칭청(靑城) 뒷산에 유람을 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우리는 옆의 나뭇가지나 암석을 잡으면서 힘겹게 기어올랐다. 내가 신은 굽 높은 신발은 뒷굽이 다 떨어졌으며 다리 또한 붓고 아팠다. 그러나 일로일소(一老一小)와 동행하려고 나는 억지로 지탱하였다. 조금 가다가 또 조금 쉬었다가 하면서 산 중턱까지 갔을 때, 20명쯤 되고 나이가 60세가량 되어 보이는 한 무리 보살 아주머니들이 몸에 붉은 보자기를 메고 빠른 속도로 우리 뒤를 따라잡더니 또 재빨리 우리를 앞서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보아하니 그들은 마치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는 듯 하며, 종종 함께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한 무리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산을 잘 오를까. 진짜로 신이 있어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걷는 것이 이다지 가볍고 이처럼 빠르다. 우리는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백운사까지 올라갔다. 우리는 그녀들과 함께 공덕을 행하는데 기꺼이 참가하였으며 신께서 우리를 가호하여 내 병을 낮게 해주시고, 장사가 번창하게 해주시고, 가정이 행복하게 해주십사 라고 빌었다.

다음 날 백운사를 떠날 때, 대문 입구에서 30세가량 되어 보이는 삭발한 비구니가 사람들이 제비뽑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올라가서 위에 것을 하나 뽑았다. 나는 호기심으로 물었다. “당신은 이렇게 젊은데 왜 절에 왔는지요? 그녀는 나에게 속세에서 그녀의 불행한 혼인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속세를 버리고 절에 들어와서 수련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수련 두 글자를 듣고 아주 신성하게 느껴져 수련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나의 마음속을 보아내고는 나보고 ”당신도 수련하세요.” 라고 말했다. “당신이 보기에 나는 일로일소(一老一小)가 있고 또 인간세상의 돈과 재물 등등을 내려놓을 수 없는데 수련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집에서 수련하며 경서를 읽으면 됩니다.” 나는 두꺼운 책을 만져보면서 계속 물었다. “내가 수련하면 백운사에 또 와야 합니까?” 그녀는 “또 와야 한다.” 고 했다. 나는 높이 솟은 산 정상을 바라보며 그만두자, 이 산은 너무 높고, 길 또한 걷기가 안 좋으니 여기서 수련하지 말고 나중에 집과 가까운 곳에서 수련하자 라고 생각했다.

제 3 장 절망의 인생

약을 달고 살다

수술이 실패한 후, 정신적 압박은 더욱 커졌으며 내가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고 수시로 마비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증세가 엄중해도 친인과 친구들이 들으면 걱정할까보아 말을 하지 못하고 밤에 혼자서 울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격동하거나 화를 내면 대뇌의 혈관이 마치 악기의 현(弦)마냥 팽팽하게 죄어 지며 온몸은 마비되어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 나의 손가방에는 화장품이 아니면 뇌혈관을 치료하는 약이었다. 비시린(比西林), 인싱예팬(銀杏葉片), 쉬안윈팅(眩暈停) 등등...... 심지어 어떤 때는 길을 걸을 때 안절부절 못하면서 아울러 순간적인 실명이 따랐다. 한번은 내가 작은 차를 운전하며 선샌쑤(神仙樹) 자동차 운수회사 5대(隊) 입구까지 갔을 때,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나는 얼른 차를 한쪽 옆에 갖다대고 세운 후, 약을 먹고 핸들에 엎드렸는데 대략 한 시간 쯤 지나서 회복되었다.

또 한번은 우리가 왕쟝(望江)공원에서 낚시질 할 때, 보험을 하는 사람이 나더러 보험에 가입하라고 하였다. 내가 보험이 증식(增値)되는 가를 물으니 그는 “ 증식(增値)되지 않는다.” 고 했다. 나중에 나는 나의 모든 예금으로 2급 시장의 주식을 샀다. 주식이 오른 후, 그 돈으로 노후를 보내고 병을 치료하려고 하였다.

세계적으로 고칠 수 없는 혈관종양

미루고 또 미루고 1997년까지 미루다가 나는 다시 화시(華西)의과대학에 다리를 치료하러 갔다. 교수가 보고나서 병증세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감히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나에게 말하기를 “매주 수요일 오후는 전문의가 진찰하는 날인데 전문적으로 난치병을 진단하니 당신은 가서 번호를 등록하여 시간을 약속하고 다시 오세요.” 라고 했다. 후에 30여명의 전문의들이 진단한 결과 선천성 광범위해면상부종형 혈관종양(先天性大面積海綿狀腫脹型血管瘤)이었는데 세계적으로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당신의 지난번 수술은 잘 못되었다, 예를 들면 본래 두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것을 현재는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니 더욱 엄중한 것이다. 수술시 주의하지 않으면, 혈관 벽을 묶을 때, 소뇌신경을 손상하여 후유증을 남기기 쉽다.’고 말했다. 허! 나의 뇌혈관 병은 수술을 잘못해서 야기된 것인가? 전문의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이름, 주소, 전화 등을 남겨놓으세요. 치료할 수 있을 때, 다시 통지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지금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다......

1998년 상하이에서 온 전문의가 위생간부 병원에서 진찰을 했는데 또 가서 검진하였다. 의사는 혈관종양이라고 하면서 나더러 10만 위안을 들여 상하이에 가서 수술을 해보라고 하였다. 내가 “만약 치료만 할 수 있다면 20만 위안이라도 가겠는데 보증을 하지 못하면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보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나는 내내 가지 않았다.

악화

1997년 가을, 아들의 아버지가 나에게 호출문자를 보내 그의 상점에 한번 왔다가라고 했다. 내가 갔더니 그는 나보고 돈을 달라고 했다. 나는 방금 차를 샀는데 동생의 돈 3,000위안까지 빌려 지금 돈이 없다고 했다.(내 돈은 나중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부 2급 시장의 주식을 샀기 때문이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식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직원 노동자와 친구들이 얼른 그를 끌어안았는데 나는 놀라서 의자에 주저앉았으며 삽시에 전신이 떨리고 마비되고 차가워지고 혀가 굳어지고 입술이 자색으로 변하고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멍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또 감히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가방에 있던 약도 다 먹었으므로 나는 겨우 떨리는 손으로 삐뚤삐뚤하게 몇 글자를 썼다. 비시린(比西林), 인싱예팬(銀杏葉片), 쉬안윈팅(眩暈停)......

그 후부터 나의 뇌혈관 병은 더욱 엄중해졌고 늘 재발하였으며 얼굴의 황갈색 얼룩이 더욱 뚜렷해졌고 오른 쪽 다리는 늘 부어 아팠다. 발작할 때면 나는 침대에 누워 발을 높이 들어 벽을 밟아 혈액이 거꾸로 흐르게 하였다......

약간의 위안

하늘은 그래도 공평하다, 비록 내가 결혼에 실패하고 신체적으로는 고통이 심하지만 사업에서는 늘 순조로웠으며 생각하는 대로 일이 잘 풀렸다. 이것은 아마 하늘이 불쌍한 나에게 자그마한 위안과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저번 사건이 있은 후, 우리는 이혼할 것을 협의하였지만 돈과 재산문제 때문에 이혼은 지금까지 진척되지 않았다. 비록 이혼이 성사되지 않았지만 나의 사업은 갈수록 좋아졌다. 내가 운전하는 화물차는 늘 적재량을 초과하였는데 낮에는 벌금도 많아 밤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병마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 내가 아무리 의지력이 있다고 해도 이 현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며, 벌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혼자서 야간 운전을 할 수 없어 1997년 봄에 큰 화물차는 팔고 작은 차를 사서 운송 업무를 맡아했다. 예전에 내가 맡은 업무는 펑저우(彭州)시의 한 개인업자인 둥펑(東風) 큰 화물차가 나를 도와 운송하고 있다. 1998년, 산환로(三環路) 건설이 시작되자 일이 아주 많아져 청화구 운송회사를 도급 맡은 업자가 적재함을 덧댄 둥펑(東風) 자동차 4대로 밤낮 쉴 새 없이 나를 도와 운송하였는데, 운전기사, 짐꾼이 모두 30여명이나 되었다. 나의 일은 아주 수월하였는바, 매일 오전 11시쯤에 차를 운전하여 지휘부에 가서 화물 인도서를 받아오는 것인데 일하는 시간이 매일 한 시간쯤이지만 나의 월수입은 만 위안 이상이며, 심지어 어떤 때는 거의 2만 위안에 가까웠다. 나는 아파트가 있는가 하면 자동차도 있고 핸드폰도 있으며 아들도 유명한 학교에서 공부한다. 내가 정한 목표인 거의 40만 위안을 주고 산 2급 시장의 100수(手) 주식도 손안에 들어왔으니 나도 이제는 편안히 향수를 해야 하리라.

혼비백산

하지만 사람마다 다 알다시피 돈이 있어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으며, 약물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다.

오른 쪽 다리의 혈관종양은 지워버릴 수 없는 한 덩이 마음의 병(心病)이며, 시종 나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 하나의 큰 산이다. 후반생에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서만 살아야 하는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나는 미래를 계획해보았는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바로 젊었을 때, 돈을 많이 벌어 주식을 사서 이후에 반신불수인 나를 돌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100수(手)의 2급 시장 주식을 사놓고 시세를 봐서 내다 팔려고 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래도 주식으로 돈을 벌 수 있겠는가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1997년 주가가 폭락하였을 때, 하루 밤 사이에 20만 위안을 손실 보았다. 나는 밥맛이 다 떨어지고 잠이 오지 않고 차를 운전할 때 가속페달을 밟는 것마저 힘이 없었으며, 온 종일 혼비백산 하였는데 주식도 나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시련 속에서 생활하고 공허 중에서 생활하며 병마 중에서 생활하고 공포 속에서 생활하고 있던 나는 매일 한 시간 전후 출근시간을 제외하고는 미용을 하고 머리를 메만지며 마작을 하는 등등으로 자극을 찾았다. 어떤 때는 또 생각했다. 죽어버리고 말자, 지금 반신불수가 되기 전에 어머니, 아들에게 돈을 남겨주고 말자. 그러나 또 그들은 내가 없으면 얼마나 고독하겠는가를 생각하고 그 생각을 포기하였다. 종일 눈물로 지냈으며 혼자서 쓴 물을 삼켰다.

(다음에 계속 이음)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6일
문장갱신: 2004년 8월 8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6/79558.html





논-픽션: <질풍경초 (疾風勁草)> (2)

글/중팡츙(鐘芳琼)

제2부 새로운 삶

머리말 : 법을 얻은 후 나는 처음으로 무엇이 무병 상태에서 온몸이 가벼운가를 체험했다.

제1장 연을 맺다

- 사저(師姐:동문여자선배)의 변화

1998년 8월, 운전 기사인 사저(나보다 한 살 연상임)가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싸허보(沙河堡)의 한 남자 수련자는 원래 대머리 였는데 수련 후 머리카락이 모두 자라났고, 랜화춘(蓮花村)의 한 할머니는 수련 후 흰 머리카락이 모두 검어졌단다. 너도 파룬궁을 수련하렴.” 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연공 하는 것은 퇴직한 노인들이나 하는 일이지요. 나야말로 그건 하지않겠어요.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먹고, 입고 싶은 것 있으면 입다가 죽으면 그뿐인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한 친구가 수련하지 않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나는 그냥 사저네 집에 가서 그 남편과 또 그녀의 남편 직장의 친구 두분들과 함께 마작을 했는데, 때로는 밤을 지새곤 했다. 그러나 사저는 혼자서 책을 보았는데, 나는 그녀가 이렇게 크게 변한 것이 이해 되지 않았다.

제 3 순환 도로(三還路) 건물 보수를 시작하자, 나의 장사도 바쁘게 되었다. 사저의 남편은 메이산(眉山)의 사료 공장에서 지배인으로 임명되어 “삐야오쯔”(標致)세단승용차까지 배정 받았다. 사저는 남편을 도와 차를 운전하였다. 겨울이 되니 장사는 더욱 바빴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바삐 움직였다. 그들은 청두(成都)로 돌아오는 기회가 매우 적었다. 설 전에 사저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는데, “내가 너에게 줄 설 물건을 사놓았다. 모두 메이산(眉山) 특산물인데 네가 한번 와서 가져가려무나.”라고 했다. 내가 그의 집에 갔을 때 발견한 일이다. 그전에는 온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하여 자식에게까지 “못난 어머니”라고 불리 웠던 사저였는데, 얼굴위의 주근깨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윤기가 돌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동하여 “어느 미용원에 가서 피부를 바꾸었어? 효과가 너무 좋은데”라고 말했다. 그는 “바꾸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면 어느 미용원에 가서 미용을 했어? 무슨 피부 보호제를 발랐는데?”라고 연속 물었다. 그녀는 “미용도 하지 않았고 그 무엇도 바르지 않았어.”라고 했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녀는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찬물로 얼굴을 씻고 올 테니 네가 보아라.”라고 하고는 즉시 얼굴을 씻고는 나에게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단번에 피부가 이토록 좋아질 수가 있어?”라고 나는 물었다. 그는 “파룬궁을 수련해서이지.”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반감이 일어나 사상상에서 저촉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들 파룬궁은 천상은 있고 지상은 없다고 억지를 한다지?”라고 풍자해서 말했다. 그녀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으나 실제 자신의 눈으로 본 사실이어서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피부는 확실히 좋게 변해 있었다.



집에 와서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6년 동안 나는 얼굴의 황갈색 반점 때문에 매주마다 끊임없이 미용을 했다. 청두(成都) 한의원에서 한약도 많이 복용 했을 뿐 아니라 대량으로 국내외 이름난 건강음료도 먹었다. 예를 들면 춘부로(春不老), 진주가루(珍珠粉), 샌니레이더(仙尼雷得) 등등 이다. 심지어는 아름다워지기 위해 반점이 있는 곳에 미국의 정화소(精華素) 미용을 한 후, 여러 차례 침을 맞았으며 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돈을 썼다. 그러나 모두가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10년간이나 보아왔던, 그녀의 얼굴에 넓게 깊이 박혀있던 주근깨가 어찌하여 몽땅 없어졌단 말인가?

- 대법이 미혹을 타파하다.

나는 호기심을 품고 사저를 찾아갔으나 입을 열기가 거북스러웠다. 그녀는 나의 이런 심사를 보고는 곧 나에게 이홍지 선생님의 설법비디오 하나를 주었다. “당신이 매일마다 절을 하며 머리가 터지도록 절을 해도 소용이 없고 향을 한줌 한줌씩 피워도 소용이 없다. 당신이 진정으로 확실히 당신의 그 마음을 수련 해야만 된다.” 사부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을 들을 때 나는 단번에 수수께끼가 풀린 것처럼 똑똑히 알게 되었다. 원래 내가 그처럼 많은 돈을 쓰고서,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향을 피우고, 불상 앞에서 절을 한 것이 모두 헛수고였으니,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없다. 나는 줄곧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나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행복하고 아름다움이 가득한 가정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일체의 희망을 신과 부처에 기탁 했었다. 나는 일찍이 돈을 내어 고향 마을 관음당(觀音堂)에 불상 하나를 세웠으며, 특별히 승용차 한대를 전세 내어 전문업을 하는 노인 한 분을 모셔와서 찐탕현(金堂県)의 동자원(童子園)에 봉안되어있는 보살에 금색칠을 하게 하였다. 청두(成都)의 사원과 러산(樂山)의 대불상에 향을 피우고 불상에 절하러 갔을 뿐만 아니라 또 특별히 차를 몰고 스찐사(石勁寺)에 가서 고급향을 피웠고, 칭청산(靑成山) 바이웬사(白元寺)에 가서 거사들과 함께 희사하는 공덕과 신불의 보호를 기원하였다. 허난성(河南省) 하오산 소림사(篙山少林寺)에 갔었고, 산시성(陝西省)의 천하제일 험한 화산(華山)에도 가서 신의 강림과 부처의 영통을 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의 희망은 비누 거품마냥 한번 또 한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어떤 하나의 신과 불도 나를 보호하여 병마에서 빠져 나오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전 생활 따라 그대로 절망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만 했었는데…… 알고 보니 바깥에서 찾으려고 하면 모두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며 다만 자신에 의존하여 마음을 닦고 쩐, 싼, 런(眞, 善, 忍)을 수련해야만 하는 것이었구나! 나는 사부님이 말씀 하신 것이 매우 도리가 있다고 느껴져, 한번 시도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또 자신은 신분이 있고, 지위가 있는 사람인데 주민 할머니들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연공 한다는 것이 보기가 너무 고상하지 못하고 얼굴이 깎이는 것으로, 만일 낯익은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생각했다. 생각 끝에 일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사저가 돌아온 후 다시 차를 몰고 그의 집 가까이에 있는 연공장에 가서 그와 함께 연공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일요일이 되어 내가 연공장에 가보니 적어도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눈을 감고 서서 연공 하고 있었는데 동작들이 정연하고 우아했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점잖고 고상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저 모자는 시종 찾지 못했다. 나는 또 차를 몰고 그의 집까지 가서 그를 찾았다. 대문 어귀에서 급히 연공장으로 향하여 달려가는 그들을 만났다. 연공장에 간 후 사저는 한 남성분더러 나를 가르치게 하고는 곧 연공 하러 갔다. 나는 당시 많은 의문을 제기 했는데 그는 인내하면서 모두 해석해 주었다. 후에 그는 나에게 “당신이 거주하고 있는 부근의 신화공원에도 여러 개 연공장이 있습니다. 공원의 앞문, 뒷문, 공원 안에도 있으며 뒷문에 있는 성화 초등학교 화원 내에도 있습니다. 가십시오. 그들은 모두 무료로, 기뻐하며 인내력 있게 당신을 가르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

1999년 3월 5일 아침 6시 반이 되자 나는 제 때에 신화공원 앞문 연공장에 도착했다. 리제(李姐, 이씨 언니)가 나를 데리고 동공(動功)을 연마하였다. 후에는 또 나에게 가부좌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앉아서 얼마 안되었는데 두 다리가 부풀면서 아팠고, 마음도 아파서 참기 어려웠다. 두발은 마치 자색의 가지와 같았고, 아파서 머리와 얼굴에도 땀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내의도 땀에 흠뻑 젖었는데 정말로 괴로웠다. 이때 나는 참아야 한다는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줄곧 억지로 참았다. 조금 지나자 나는 내가 하나의 매우 청정한 한 사원 밖의 큰 평지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몸에는 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가사는 번쩍번쩍 큰 빛을 발산하고 있어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했다. 아! 이 사원이 곧 나의 집이구나. 몇 천년, 몇 만년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구나 라고 나는 느껴졌다. 집에 돌아온 심정은 격동으로 그칠 줄 몰랐다. 감동의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나는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억지로 참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쑥스러워서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마음에서 솟구치는 격동을 누를 길 없었는데, 결국에 이르러서는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연공 음악이 끝났다. 내가 눈을 뜨고 보니 사람들은 모두 떠나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두 다리에서 아직도 무슨 물건이 멈추지 않고 돌고 있음을 느꼈다. 이때 몇몇 할머니들이 다가와서 관심 있게 말하기를 “다리가 몹시 아프면 내려 놓으시고, 울면서까지 연공 하지 않아도 되요.”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방금 본 정경을 말했다. 그들은 모두 “당신은 근기가 좋습니다. 천목이 열린 것입니다.” 라고 했다. “무엇이 천목 입니까? 나는 오늘 처음 와서 연공 합니다. 책조차도 아직 없는데요?” 나는 또 그들에게 “나의 다리에는 줄곧 무엇이 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파룬(法輪)이 돌고 있습니다. 당신의 다리에 병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당신들이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고는 마음속으로 ’당신들은 정말 점쟁이 보다 더 영험하구나, 나는 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점을 쳐 보았으나 종래로 이처럼 영험하지 못했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파룬이 당신의 신체를 조정하여 주고 있습니다. 어디에 병이 있으면 그는 모두 조정해 주지요.”라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다리를 내려 놓으라고 하였지만, 파룬이 여전히 돌고 있기에 다리를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발바닥을 서로 대립시키지 말라 하여 나는 겹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파룬은 여전히 돌고 있었다.


그날 나는 즉시 대법책을 얻어 집에 돌아와서는 손에 놓기 아쉬워하면서 읽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는 게으르게 늦잠을 자지 않았으며, 다시는 마작놀이를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꼭 연공장에 가서 연공 했고, 연공이 끝나면 그 길로 출근했다. 하는 일들을 잘 안배하여, 시간만 있으면 책을 보았는데 밤늦게까지 보곤 했다. 심지어 승용차에 있는 유행 가곡 음악테이프를 모두 사부님의 설법 테이프로 바꾸어 버렸다.

제2장: 대법은 나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었다.

- 신기함을 체험하다.

3월8일. 나는 진작에 아들 애의 선생님 멍위룽( 蒙玉蓉 )과 그녀의 대만 친구, 나의 큰 어머니와 함께 스즈산장(狮子山庄)에 가서 놀기로 약속 했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일어나니, 얼굴이 바싹 조여지고, 열이 나서 매우 불편한 감을 느꼈다. 하여 즉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는데, 그 순간 나는 그만 당혹하여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나의 온 얼굴이 부은데다가 붉기까지 하였는데 마치 관공(関公- 관우에 대한 존칭) 같았다. 이를 어떻게 한담? 나는 찬물로 얼굴을 씻어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간은 이미 11시가 다 되었지만 나는 문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큰 어머니는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멍 선생님 일행은 진작에 스즈산장에 도착 하여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사저의 핸드폰을 눌렀다. 나는 “보세요, 언니가 나더러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라고 해서 했는데 수련하여 얼굴을 부어 오르게 했어요. 약속한 사람들은 이미 나를 더 기다릴 수 없는 지경인데, 나는 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라고 했다. 사저는 그 즉시로 ”좋은 일이다. 사부님께서 너의 신체를 조정 해주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더는 다른 방법이 없자 체면상 할 수 없이 억지로 그들을 만나러 갔다. 절반쯤 갔을 때 큰 어머니가 “너 오늘 분을 발랐느냐? 얼굴색이 이다지도 보기 좋으니 말이다” 라고 물으셨다. 그녀는 나의 얼굴이 열이 나고 있음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 물으니 나도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얼굴의 증상에 대해서 내가 감각이 있는 이외에, 그녀들은 다만 약간 불그스레한 것으로 보았을 뿐 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튿날,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리제( 李姐-이씨 성의 언니 )가 나를 보더니 즉시 물었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기쁜 일을 만나면 정신이 상쾌해 진다니깐, 샤오중 (小鈡 ) 오늘 너의 얼굴은 어찌 이처럼 이쁠 수가 있어, 무슨 좋은 일 있었어?” 나는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어” 라고 했다. “法轮功(파룬궁)이 이처럼 좋단 말이야! 우리도 가서 수련해야지……” 라고 했다.

일주일 후 얼굴의 증상은 없어졌다. 더욱 신기한 것은, 얼굴에 몇 년간 미용 하여도 효과가 없었던, 오래되어 짙어진 겉표면의 황갈색 반점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 천상에 한 무리 선녀가 오가다
이때 나는 法轮功(파룬궁)에 더 큰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사부님이 책에서 하신 매 한마디의 말들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러던 중 십 여 년 간 나의 마음속에 묻혀있던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었다. 24살 되던 그 해 어느 하루 저녁, 나는 고철을 가득 실은 해방화물차(解放貨车)를 몰고 청두(成都)에서 두짱앤(都江)까지 왔다. 차가 투쵸우(土橋)지역에서 달리고 있을 때 이라, 대략 이른 새벽 4시경쯤 되었을 때다. 나는 선녀들이 떼를 지어 하늘에서 날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차 한참 보다가 생각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줄곧 나의 앞에서 날고 있는 거니? 아예 내가 차를 좀더 빨리 몰아보자, 누가 더 빠른가를 보자 하여 나는 가속페달을 더욱 세게 밟았다. 그들은 여전히 나로부터 그만큼 가까이 떨어져 있어서 나는 곧 또 생각했다. 아예 내가 차를 좀 천천히 몰아 보자 하여 가속페달을 늦추니 차가 천천히 달리었다. 그런데 그 선녀들은 여전히 나와 그만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날았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옆에 앉은 물건 주인을 불러 깨웠다. “이 사장님, 빨리 보세요, 하늘에 떼를 지어 선녀들이 날고 있어요.” 그는 잠기가 가득찬 눈으로 몽롱하게 말했다. “어디에?”, “사장님 어서 보세요, 하늘에 저렇게 많고 많습니다. 아직도 날고 있어요, 사장님 보이지 않으셔요?” 정말 유감스러웠다. 그는 그처럼 눈을 크게 떳으나 그토록 아름다운 선녀들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들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다만 일반 사람들로서는 볼 수 없을 뿐이었다.

- 온 집안이 이득을 얻다.

직접 몸으로 法轮功(파룬궁)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체험한 후 나는 일심으로 나의 아들과 어머니가 이 아름다운 공법을 배우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나의 권고를 듣더니 기뻐하면서, 나를 따라 수련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많은 공력을 들여서야만 비로서 수련의 문에 들어섰다. 나는 “어머니, 우리 함께 가서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합시다. 내가 어머니에게 1억되는 돈을 드린다 해도 어머니 더러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게 하는 것만 못 합니다. 한 사람이 한 평생 병이 없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어머니, 보십시오, 저는 연공 한지 일주일 만에 과거 만원을 넘게 써서 치료해도 안되던 얼굴의 황갈색 반점이 전부 없어졌습니다. 이것을 어머니는 친히 보셨지요?”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나도 法轮功(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자야 하지, 또 포룬(抱轮)하려면 반 시간 씩이나 서 있어야 하니 그야말로 살아서 고통을 받는 격이다. 나는 지금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려야겠다.” 라고 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식사 후 아들이 “외할머니, 우리 같이 가서 연공 해요.”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나는 안 간다. 너희들이나 가거라.” 라고 했다. 아들은 할머니의 팔을 잡아 끌면서, “가세요. 할머니가 가서 해 보고 좋다고 느껴지면 계속 하시고, 아니면 그만 두셔요. 여하튼 돈 한 푼도 낼 필요가 없는데요.” 라고 했다. 이렇게 되자 어머니는 거절 하기가 미안하였다. 손자는 그를 끌고 연공장으로 갔다.

연공장에 가니 연공하는 분들이 어머니를 매우 친절히 맞아 주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몸소 연공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기에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9시가 넘자 단체 법 학습이 끝났다. 나는 차를 몰아 아들을 학교 선생님 집에 데리고 갔다. 어머니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녀가 발을 씻고 잠을 자려고 준비 하는데 갑자기 뇌혈관 병이 재발했다. 하늘과 땅이 빙빙 돌았고, 집 마저 따라서 돌아 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발을 씻은 물마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급급히 침대에 누워서 내가 돌아가서 약을 찾아 주기를 기다렸다. 내가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의 이 말씀을 듣고: “좋은 일이에요. 어머니는 매우 인연이 있으세요. 사부님께서 어머니를 책임지기 시작하셨어요. 이미 어머니의 신체를 정화 시키기 시작하고 있거든요.” 라고 말했다. 나는 곧바로 어머니에게 <전법륜>을 읽어 드렸다. 읽고 있으니 그녀는 잠이 들었다. 밤중에 깨어나 보니 어머니의 몸은 모두 회복되어 병 증상이 모두 없어졌다. 그녀는 의아해 했다. 괴상하구나, 어제 저녁 그처럼 심하던 병은 과거 같으면 반드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야 했단다. 영양주사도 10일 내지 반 달간 맞아야 비로소 회복이 가능한데 이번에는 어찌 되어, 딸이 책을 읽어 주는 것을 한참 듣고 나니 병이 완전히 나았단 말인가? 나는 이 선생님을 만나본 적도 없고 그가 나의 맥을 짚어 본 적도 없는데 이 병이 어떻게 나아 졌는가? 法轮功(파룬궁)은 정말 신비롭구나. 만약 직접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말해도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씀 하였다.

그때로부터, 어머님은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法轮功(파룬궁) 수련을 했다. 그는 수련 하는 것이 돈을 벌기보다도 나으며, 돈은 백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느끼셨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연공장에 갔다. 연공한지 한 달이 지나자 어머니의 모든 병은 치료를 하지 않았는데 모두 나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50여 년간, 길을 걸으면 절룩 거리던 왼 발이 신비하게도 절룩 거리지 않았으며, 길을 걷는 것이 정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그녀를 본 후, 모두 法轮功(파룬궁)이 좋다고 했다. 하여 시골에 있는 두 딸, 남편, 사돈집 사람들 등등 모두가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7.20 이후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서 수련하지 않았다.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불가사의하게 한 것이 있다. 어머니가 연공한지 두 달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파하더니 토하기 시작했다. (마치 <전법륜>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았다.) 토한 것은 모두 검은 색이었는데 매일 토하기만 하고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벌레 두마리까지 토했다. 이미 5일간 토했다. 어머니는 생각하셨다: “사부님, 이렇게 토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너무 더러워 합니다. 만약 설사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다. 괴상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자 기적이 나타났다. 오후쯤 되자 과연 토하던 것이 설사로 변했다. 설사한 것 역시 모두 검은 색이었는데 또 7일간 설사했다. 7일간 밤낮 어머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다만 입술이 건조하여 껍질이 좀 일어났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찬물로 입술을 적시곤 했다. 8일째 되던 날 더는 설사 하지 않았다. 약간의 미음을 좀 먹고 싶다 하였고, 곧 죽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차로 그녀를 연공장에 까지 모셔갔다. 그녀는 서서 한 시간 동안 동공을 다 했을 뿐만 아니라 가부좌도 한 시간 했는데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연공과 법 학습을 통하여 한 주일 사이에 어머님의 신체는 완전히 회복 되었고 얼굴색도 좋아졌다. 내외(內外)풍습통, 좌골신경통, 담결석, 증세가 심한 맹장염, 뇌 혈관병 등이 치료하지 않았는데 모두 나았다.

아들도 수련을 시작한 후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가 어렸을 때는 “여윈 원숭이” 라고 들 했다. 그러나 수련을 거쳐 ‘통통하게 살찐 꼬마’ 로 되었다. 어렸을 때 아들애는 성실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국어 시험에서 65점을 맞았다. 아들애는 그 시험지를 나에게 보이면 훈계를 당할까 봐 두려워 틀린 것을 고쳐 놓았다. “X”를 “V”로 고치고 65점을 100점으로 고쳐 놓았다. 수련을 시작한 후로는 더는 속이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애가 성실하고 귀엽게 변했다고 했다. 이번 시험에서 그 애는 그 반의 수석을 차지했다. 그 애 역시 이 모든 것이 대법의 위력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그 애에게 쩐, 싼, 런( 眞, 善, 忍 )에 따라 하라고 요구 하셨기 때문이다.

- 세계적으로 고칠 수 없는 혈관 종양이 사라졌다.

두 달 후, 사저(師姐)가 나에게: “쇼중(小鈡), 너는 연분이 그토록 좋으니 오른쪽 하지 혈관종양도 다 나을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일깨워 주어서야 나는 비로서 깨달았다. 나는 아들애를 선생님 집에 전학 시키고 매일 회사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시간에는 대법 책을 읽고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며 연공 하였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는 매우 늦어서야 잠을 잤다. 몹시 바삐 돌아가니 그 병마저 잊어 버렸다. 돌이켜 생각 해 보았다. 이 두 달간 나는 밤 늦게까지 앉아 책을 보았고 종전과 마찬가지로 운전했다. 그런데 어째서 혈관을 뽑아낸 부위가 부풀어 오르지 않았는가? 뇌혈관 병도 반응이 없지 않은가? 그래 나의 이런 병들이 모두 나았단 말인가? 그렇다! 연공을 해서이다! 파룬궁을 수련해서이다!! 사부님의 파룬궁이 나의 병을 낫게 하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격동되어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파룬궁이 나를 구하였고,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나에게 두 번째 생명과 처음으로 건강을 주었으며,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나로 하여금 마음이 옥같이 아름답게 맑아지게 하였음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무병 상태에서 전신이 가벼워 짐이 어떠한 것인가를 체험했다

- 옥같이 깨끗한 마음

병이 없어지니 정신상 압력도 없어져 기분도 좋았다. 늘 웃음을 담고 있으니 얼굴색도 밝았고 말투도 상서로웠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나에게 말씀하기를 “만약, 좀 더 일찍이 파룬궁을 수련 했더라면 좋았을 걸, 말을 잘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없었을 텐데,” 라고 하셨다. 아들은 말하기를 “어머니의 성격이 좋아졌다.”고 하였다. 친구들도 “우리는 전에 네가 너무 독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좋게 변하였니? 지금 너와 접촉 해보니 너 이 사람이 너무 좋다고 느껴지는구나. 사장의 허세도 없고, 붙임성도 매우 좋구나.” 라고 농담 삼아 말하였다. 나는 “파룬궁이 나를 개변시켰어” 라고 말했다.

참으로 파룬궁은 너무도 아름답다. 또 너무도 신비롭다. 나는 꼭 수련을 견지해 나갈 것이다. 그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나의 모든 친인, 친구들 에게 알려주어 그들도 모두 파룬궁을 수련 하게끔 하겠다!

제 3장 홍법

그리하여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에 관한 간단한 소개와 선생님께서 제남에서 하신 설법 테이프, <<전법륜>> 책 20여권을 가지고 연공장의 두 보도원, 또한 젊은 동수, 세 명의 꼬마 대법제자, 그리고 어머님까지 모시고 내가 직접 차를 몰고 홍법하러 고향 마을인 잰양(簡陽)으로 향하였다. 나는 격동된 심정을 누를 길 없어 마음 속으로 외쳤다: 고향에 계시는 여러분, 대법이 당신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당신들은 절대 이 만고에도 없는 기회를 놓쳐 버리지 마세요. 우리 일행은 큰 언니 집에 도착했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와서 우리와 만났다. 내가 그들에게 연공 하는 것을 배워주려고 고향에 왔다고 명확하게 말하자 그들도 매우 기뻐하면서 서로 이 소식을 전하였다. 이튿날 오전, 우리들은 사람이 많이 집중되는 큰 길옆의 한 편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연공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배우는 사람도 20여 명이나 되었으며,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우리는 대법의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이야기 했다. 여러 사람들도 모두 파룬궁이 좋다며 서로 전해 가면서 말했다.

돌아온 후 나는 일분이라도 지체할세라 파룬궁의 신비로움을 이모에게 알렸다. 이모도 수련 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나는 북경에 전화를 걸어 군에서 고급 장관으로 계셨던(이미 퇴직 했음.) 작은 아버지께 수련을 거쳐 나의 혈관종양이 완전히 나아진 아주 큰 희소식을 알렸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파룬궁에 깊은 감격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도 수련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더러 연공장을 찾아 가시라고 했다. 며칠 후 나는 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연속 며칠 연공장을 찾아 보았는데도 찾지 못했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나는 “아침 일찍 공원에 가서 찾으세요. 낮에는 모두 출근하러 갑니다.” 라고 말했다.

- 시련이 닥치려고 하다.

며칠이 지나 이미 6월 말일이 되었다. 나는 또 작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연공장과 연계 되었는가를 알아 보았다. 그는 “지금 이미 나라에서 파룬궁의 수련을 금지 시켰다. 당원과 군인은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 하도록 되었다” 라고 하고는 사부님에 대한 좋지 못한 말까지 하면서, “내가 보기에 너도 수련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미 수련하여 병이 다 나았으면 되었다. 네가 지금 이 정도에까지 걸어 올 수 있는 것만도 매우 쉬운 일이 아니다.
나라에서 수련하지 말라고 하니 수련하지 말아라.” 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다만, 마음이 말 할 수 없이 아팠다.

작은 아버지는 나의 마음속에 가장 문화가 있고, 가장 사리를 똑똑히 알며, 가장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무슨 큰일이 있으면 나는 모두 그에게 묻곤 하였다. 만약 그의 말씀이 도리가 있다고 느껴지면 나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나의 심정이 몹시 모순 되었다. 이 일은 예삿일이 아니다. 반드시 나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신이 나쁘다고 말하나 손수 실천한 것으로서 이것은 생동한 현실 입니다. 당신이 나쁘다고 말하나 내가 처음 연공 할 때에는 책마저 없었는데 천목으로 본 다른 공간의 광경은 <<전법륜>> 책에 쓴 것과 꼭 같았습니다. 당신은 나쁘다고 말하지만 나의 혈관종양과 뇌혈관 병이 어떻게 하여 나았습니까? 당신이 나의 병이 나았는지 낫지 않았는지는 보지 못할 수는 있지만 나의 얼굴에 넓게 깊이 퍼져 있던 황갈색 반점이 없어진 것은 볼 수 있지요, 이것은 사람마다 모두 볼 수 있는 현상이지요. 그렇다면 어찌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 하여 같이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본 것은 확실하지만 소문은 믿을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2일간 반복되는 사고를 거쳐 나는 많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나는 수련을 포기 하려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대법이 너무나 좋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속 수련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생으로 바꾸어온 장사에 누가 미칠까봐 두려웠다. 하여 나는 한번 또 한번 가슴 아프게 울었다. 최후에는 마(麻)처럼 얽힌 사유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 냈다: 어떠하든지를 막론하고 나 역시 견정하게 수련해야 한다.

그즈음에 연공장에는 보도원이 늘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홍음 ( 洪吟 ) >>중에 있는 시 세수를 암송하였다.

<법을 돕다>: “중생을 제도하리라 품은 마음, 스승을 도와 세상에서 행하네. 나를 도와 법륜을 돌리나니, 법은 이루어 천지간에 행하네.”

<위덕>: “대법이 몸을 떠나지 않거니, 쩐, 싼, 런(眞, 善, 忍)이 마음속에 있네. 세상에 대나한을, 귀신도 굉장히 두려워하네.”

<무존>: “태어나 바라는 것 없고, 죽어 애석할 것 없네. 망령된 생각을 탕진하거니, 부처로 수련되기 어렵지가 않노라.”

여러 사람들은 한차례 아주 큰 시련이 곧 닥쳐올 것임을 희미하게 감지했다.
(계속 이음)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7일
문장갱신: 2004년 8월 8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7/79559.html



논-픽션: <질풍경초(疾風勁草)> (3)

글/중팡충(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18일】(전번 글을 이음)

제 3 부 11차례 구류되다

머리말: 박해 중에서 나는 한 차례 또 한 차례 감금과 혹형의 시달림 중에서 걸어 나왔다.

제 1 장 탄압 초기

7.20 대규모 체포

어느덧 1999년 7월 20일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을 금지하기 시작했으며 또 일부 보도소장을 붙잡았다. 사부님의 한 수 시 <<진성이 보이다>> 가 생각났다. “대법을 굳게 수련하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지라, 층차를 제고함이 근본이로다, 고험 앞에서 진성이 보이나니, 공성원만하여 불도신이 되노라.” 나는 대법을 굳게 수련하려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내가 대법 중에서 이득을 얻은 것이 적지 않은데 틀림없이 정부에서 잠시 파룬궁 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초래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나는 차를 타고 온 집 식구와 동수들과 함께 법에 따라 성(省) 정부에 청원하러 가서 불법적으로 체포된 모든 대법제자들을 무조건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아울러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백 가지 이익만 있고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는 진실한 정황을 성 정부에 반영하였다. 우리는 쓰촨성 정부청사 밖의 거리로 갔는데 동수들도 아주 많이 와 있었다. 우리는 성 정부 문밖의 인도에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목격했다. 전신을 무장한 경찰들이 줄을 서서 사면팔방으로부터 뛰어왔으며 경찰차들도 경적을 길게 울리면서 달려 왔는데 여러 가지 경적소리가 한데 뒤엉켜 공포가 극에 달했고 공기는 마치 응고된 듯 하였다. 여러분들은 숨을 죽인 채 비장하고 공손하게 서서 그들이 나와 우리들에게 하나의 합리적인 대답을 주기를 기다렸다. 비디오카메라는 이런 장면을 부지런히 촬영하였고 전신 무장한 경찰들은 굳은 표정으로 오고 갔다. 오후 2시경, 한 경찰이 큰 스피커를 들고 “당신들은 모두 차에 오르시오.” 라고 외쳤다. 결국 우리더러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게 하면서 모두 싣고 먼저 청두 올림픽 경기장으로 갔다가 후에 랑중(閬중) 호텔로 옮겼다. 경찰은 또 불법적으로 우리 몸을 수색하였고 대법책을 수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신훙루(新鴻路) 파출소로 옮겨 한 밤중까지 불법적인 심문을 한 후에야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 온밤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많은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파룬궁이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신기한 효과를 보도하지 않았는가? 바로 5월 말, ‘요언을 믿지 말고 요언을 퍼뜨리지 말자.’라는 문장이 신문에 실리지 않았는가? “당원, 군인이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요언인가?” 라는 문장에서 똑똑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나라에서는 여태껏 파룬궁을 금지시킨 적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하루 밤 사이에 변하였는가? 이 정부는 도대체 어찌된 판국인가?

곧이어 전국 각지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에서 천지를 뒤덮을 듯이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모욕하였다. 전 중화(中華)의 대지는 요언에 휩싸였다. 한 뙈기의 오염된 공기는 그야말로 “검은 구름이 성을 뒤덮어 성이 무너질 것 같은” 기세였다. 나의 온 마음은 울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대법이 까닭 없이 탄압을 받고 있음을 울었다. 나의 온 마음은 슬픔에 잠겼다. 슬픈 것은 다재다난(多災大難)한 중국인민들이 또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정치박해를 받아야 하는가 함이었다. 나의 온 마음은 외치고 있었다. 우리 민중들은 무엇 때문에 마음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이 하나의 자유, 이 하나의 권리마저도 박탈당해야 한단 말인가!

단체 법공부와 연공을 위해 집을 사다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개창(開倉)해주신 밖에서 단체연공하는 환경을 잃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한 끝에 괴로운 나머지 사저(師姐, 동문의 여자 선배)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큰 객실이 달린 집을 매입하여 단체로 법공부와 연공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전과 같이 그렇게 조용하고 상화한 연공환경이 있고 우리가 전과 같이 자유스럽게 쩐, 싼, 런(眞, 善, 忍)을 신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리하여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수많은 집을 둘러본 끝에 그 해 8월 8일, 나는 런허웬(仁和苑) 안에 있는 객실 면적 33평의 집을 샀다.

집을 사서 꾸미고 수리하는데 20여 만 위안을 썼다. 비록 집을 사는데 내가 여러 해 부지런히 모은 수중의 적금 전부를 썼지만 그래도 매우 기뻤다. 오직 단체 법공부와 연공하는 환경만 있다면 뒷일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돈은 나중에 또 벌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10월 10일, 아직 집을 꾸미고 수리하면서 온 가족이 다음 달 새집에 이사하는 일을 상의하고 있을 때, 단지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둥퉁쑨(東通順) 파출소에 의해 압송되어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지옥, 청두시 쥬루(九茹)촌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상무조보 (商務早報) 사건

1999년 10월 1일, 50주년 경축일에 청두 『상무조보 (商務早報)』는 파룬궁을 10대 주요사건의 하나로 뽑았을 뿐만 아니라 또 “x교”라고 말했다. 보도는 완전히 옳고 그름을 뒤바꾸고 흑백을 헛갈리게 했는데 그야말로 틀림없는 정치 폭력단의 허튼소리다. 나는 보고 난 후, 신문을 가지고 차를 운전하여 5명의 동수와 함께 『상무조보 (商務早報)』편집장실에 도리를 따지러 갔다. 편집장이 자리에 없어 신문사 직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하자 그들은 기자를 불러 우리들의 말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비디오 촬영을 하게 하였다. 그때 우리는 모두 기뻐하며 순진하게 그들이 파룬궁에 대해 정면보도를 하는 줄 알고 그들에게 우리가 대법을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 이득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다. 결국 신문사에서 둥퉁쑨(東通順) 파출소에 알려 우리를 불법적으로 파출소에 붙잡아가 아침 5시까지 심문하였으며 또 밤중에 불법적으로 우리를 쥬루(九茹)촌 구치소로 보내어 각기 15일을 구류시켰다. (『상무조보』는 후에 악의 보응을 받아 사악끼리 서로 악을 행하던 중, 2001년 전 쓰촨성위(四川省委) 서기이며, 파룬따파(法輪大法)와 대법제자를 박해한 사악자인 저우융캉(周永康)에 의해 폐쇄 되었는데, 그 원인은 『상무조보』의 두 명 기자가 난충(南充)시 모(某)현, 부현장이 차를 운전하던 중 사람을 치어 죽인 후 뺑소니 친 사건을 보도해서였다. 저우융캉은 『상무조보』가 공산당원의 추행을 폭로한 것에 대하여 불만이 대단하여 고함쳤다. “우리의 신문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 이리하여 쓰촨(四川)에서는 신문을 크게 통폐합하였는데 『상무조보』는 이때 사라졌다.)

그날 밤 내내 가랑비가 내려 춥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고단하기도 했던 나는 캄캄한 방에 들어서자 널판자 세 쪽을 이어 붙여 벽에 기대어 놓은 간이침대에 쓰러졌다. 베개도 없고 이불도 없어 움츠리고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하였는데 경찰이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한참 뒤치락거리다가 얼떨결에 죽밥을 한 사발 받아왔다. 너무 뜨거워 내려놓고 식혀서 먹으려고 하는데 경범(輕犯) 죄수가 내게 말했다. “빨리 먹어요. 몇 분 있으면 사발을 거두러 옵니다. 만약 채 먹지 못하면 욕을 먹지요. 여기 경찰들은 아주 사납습니다.” 나는 듣고 나서 억울하여 눈물이 나왔다. 왜 참말을 했는데 여기에 갇혀야 하는가? 나는 늘 아들에게 가르치기를, 어릴 때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해도 갇혀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정부는 우리더러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인가?



*경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총이다

구치소에서 경찰은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 강제로 우리에게 『모택동선집』을 읽으라고 했다...... 우리는 경찰에게 말하였다. “모주석은 말씀하시기를
1)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2) 인민들이 말한 것이 훌륭하다면 우리는 그것에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파룬궁 문제에서 우리는 모두 직접 실천을 거쳤으며 파룬궁은 몸과 마음의 건강에 백 가지 이익만 있지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민원 청원실은 공안국으로 변하였습니까? 무엇 때문에 청원의 길은 감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바뀌었습니까?”

슝(熊) 부소장은 말했다. “우리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총을 든 것과 같이 다른 사람(장쩌민을 가리킴)의 돈을 받았으니 그가 우리에게 뭘 하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지요......”

우리는 종일 캄캄한 방에 갇혀 있었는데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전화도 하지 못하게 하고 일반 구속자의 권리마저도 없었으며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었다. 점심은 흙이 묻은 썩은 감자를 조금 먹고 저녁은 아침과 점심에 먹다 남은 반찬과 밥을 먹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개수통에 버린 밥을 한데 모아 끓여 “팔보죽(八寶粥)”이라고 하면서 주는데 이것이 바로 장(江)씨 집단이 말하는 “중국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의 진상이다. 반 달간을 시달림 받아 나는 이미 여위어 몰골이 바뀌었다. 집식구들이 보고는 상심하여 나를 위해 남 몰래 눈물을 흘렸다.

*핍박으로 직장을 잃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더 이상 주식을 하지 말 것이며 나머지 30만 위안의 주식을 내다 팔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친구의 외삼촌이 말하기를 “지금은 주가가 너무 낮기 때문에 매주(買主)를 찾기가 쉽지 않다, 네가 집 내부 장식을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면 먼저 조금 꺼내 쓰면 될 것이고 주식은 먼저 나에게 맡겨두었다가 천천히 매주를 찾아 팔면 된다.” 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주식을 몽땅 그에게 주었다.

몇 달을 이어오면서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는 여전히 계속 쉴 사이 없이 파룬궁을 모함하였다.

1999년 11월, 나는 깐또(干道) 지휘부에 영수증을 끊으러 갔는데, 이씨 언니가 사무실에서 내게 직접 말했다. “우리 직장에서 만약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을 조사해내면 직장은 10만 위안을 벌금 당하게 되오. 쇼중(小鍾), 자넨 비록 직장 직원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여기에서 업무를 보고 있지 않소. 우리는 위로 노인이 있고 아래로는 자식들이 있는데 직장을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자네는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수련을 하지 말아요. 만약 자네가 계속 수련하겠으면 우리도 더는 자네에게 업무를 맡길 수 없으니 자네가 우리들의 입장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당신이 봐요. 매일 석간신문들은 근본 볼만한 것이 없어요. 모두 두 이씨가 차지했습니다. 하나는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임)이고, 하나는 당신 사부인 리훙쯔(李洪志)이지요.” 마지막에 그녀는 또 말하기를 “당신은 수련하지 않겠다는 입장표시를 해요.” 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이(李) 언니, 내가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서 이득을 얻은 일을 당신들은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텔레비전에 한 말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것을 당신들도 응당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쩐, 싼, 런(眞,善,忍)을 수련하므로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돈을 벌기 위해 양심을 어기고 대법에 미안하고 사부님에게 미안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내가 왜 거짓말하기를 싫어하는가 하는 이유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 1 강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가(道家)는 眞(쩐)、善(싼)、忍(런)을 수련함에 진(眞)을 중점으로 수련한다. 그러므로 도가는 수진양성(修眞養性)을 하여 참말을 하고, 참된 일을 하며, 참된 사람이 됨으로써 반본귀진(返本歸眞)하여 최후에 진인(眞人)으로 수련되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忍)도 있고 선(善)도 있는데, 중점을 진(眞)에 두고 수련한다. 불가는 眞(쩐)、善(싼)、忍(런)의 선(善)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 선(善)을 수련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수련해 낼 수 있다. 자비심이 나오면 중생을 모두 고생스럽게 보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려는 소원을 품게 된다. 그러나 진(眞)도 있고 인(忍)도 있는데 선(善)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 이 한 법문은 우주의 최고 표준-眞(쩐)、善(싼)、忍(런)에 따라 함께 수련하므로 우리가 연마하는 공(功)은 대단히 크다.”)

이러한 정황과 압력, 이러한 정책 하에서, 나는 9년간 지속해온 거래처를 부득불 떠나야 했다. 이전의 매달 만 여 위안 수입이 갑자기 없어지게 되었다. 세 식구인 우리 가정은 어떻게 생활하겠는가? 아이가 학교를 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장(江)씨 집단이 파룬궁 수련생들을 핍박하여 신념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경제적인 압박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절대로 수련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주 진리의 큰 길에서 영원히 영원히 걸어 나갈 것을 결심하였다.

제 2 장 힘겨운 청원의 길

*처음 청원하러 가다

불공평한 대우 하에서 1999년 12월 3일, 나는 여덟 살 되는 아들을 데리고, 청두 안캉(安康) 병원(정신병원)에서 박해를 받다가 나온 동수와 함께,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고 내가 연공을 한 후, 몸과 마음에 이득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정부에 반영하기 위해 북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대법제자들의 북경 청원 길을 가로 막는 사복 경찰들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버스를 타고 맨양(綿陽)에 갔고, 맨양에서 기차를 타고 쩡저우(鄭州)까지 갔으며, 쩡저우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스쟈쫭(石家庄)에 간 다음, 또 800위안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간신히 북경 라이광영(來廣營)의 임시로 거주할 연공장에 와서는 전국 각지 대법제자들과 교류한 후, 마침내 청원하러 가려고 했다. 12월 6일 아침 북경에 도착하였다. 아들은 돌아가서 학교에 가야하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그는 다른 한 동수와 함께 천안문에 가서 세인들에게 파룬따파(法輪大法)의 공법을 시범 보였다. 나는 북경 교외 라이광영에서 이틀간 묵었다가 다시 청원사무실에 찾아가려고 생각했다. 나는 아들과 헤어졌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한 모르는 사람이 우리에게 (나를 제외하고 또 외지에서 온 3명의 동수가 있었다)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가 그렇다고 하자 그 사람은 핸드폰으로 사람을 오라고 통지하고는 우리를 붙들어 라이광영 파출소에 데리고 가서는 10시간 후, 북경주재 쓰촨(四川) 사무소로 옮겼다.

*북경주재 청두(成都) 사무소

북경주재 사무소 뒤는 사합원(四合院 - ‘정방(正房)’ 과 동서(東西)의 집채 및 뒤에 앉은 네 채로 된 집)인데 3면은 작은 집이며 한 면은 문이다. 동수들은 여기 온 후, 모두 작은 방에 갇혀 몸을 수색 당했다. 그들은 몸을 수색할 때, 나를 작은 칸에 데리고 가서 나에게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고 옷을 몽땅 벗으라고 하였다. 불법 몸수색을 책임진 여자가 입은 옷은 종업원복이었다 추측으로 북경주재 사무소 영빈관의 종업원 같았다. 나와 한 여 동수가 같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의 대법책과 조금밖에 없는 몇 백 위안의 돈을 수색해 갔으며, 다른 한 동수의 몸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찾아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나는 그들이 이 번호로 동수들에게 박해를 하지 못하도록, 한입에 종이쪽지를 삼켜버렸다. 악인 청두 1처장, 펑쥬위이(발음대로 썼음)는 즉시 성이 왕씨인 보안요원에게 명하여 나를 수갑 채워 밖으로 끌고 나가 북경주재 사무소 문밖 돌사자에다 채워놓았다. 그때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이렇게 채운 채로 나를 불법 심문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죄가 없다. 나의 청원은 국민의 합법적인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지금 여기에다 묶어 놓았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핍박하여 누가 청원하러 가는 것을 조직했는가 말하라고 하였으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어떠한 조직도 없으며 모두 자발적인 행위다.” 그들은 나에 대해 방법이 없자 나를 6호실에 가두었다. 경찰이 불법으로 나를 심문할 때, 중차이이(鐘才一)가 나의 아들인지를 물었다. 아들도 여기에 갇혀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와 아들을 갈라서 5일 동안 가둔 후, 우리를 청두로 보내려고 할 때에야 나는 비로소 아들과 만났다. 떠나는 날 오후 3시 경에 펑쥬워이 처장이 또 나에게 “30분 내에 당신이 그날 삼켜버린 전화번호를 말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청두에 전화 한 통만 해도 최소한 당신은 3년 판결을 받을 수 있소.” 라고 겁을 주었다. 그가 무엇을 말해도 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지난 후, 아들이 내게 물었다. “엄마,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그 경찰 아저씨가 왜 안 오지요!” 그가 한 말은 나를 겁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아들은 나에게 나와 헤어질 때의 마음과 헤어진 후에 겪은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날 엄마가 우리를 차 타는데 까지 바래다 줄 때, 나는 여전히 마음이 무거워 말을 하지 않았어요. 역전에 거의 다 왔을 때, 나는 발걸음을 점점 느리게 하여 시간이 조금이라도 천천히 지나가기를 바랐으며,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나에게 “아들아, 돌아가서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또 확고하게 수련해야 한다.”라고 했을 때 나는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여 흐느껴 울면서 “예” 하고 대답했지요. 그때 나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워 말로서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도 엄마에게 물었지요. “엄마, 언제면 돌아와요?” 엄마는 “나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울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여덟 살인 나는 이렇게 생이별 하듯이 엄마와 헤어졌는데 나는 이후 엄마와 또 만날 수 있을지를 잘 몰랐습니다. 나의 눈앞은 이미 흐릿하였습니다. 나는 차에 올라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고 점점 멀어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고, 멀어져 갔습니다......

나와 네(聶) 아저씨는 차를 타고 천안문에 도착하여 긴장한 심정으로 천안문 광장 중앙으로 걸어갔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제 2 장 공법(포륜)을 연마하였습니다. 연공을 시작한지 1분도 안 되어 나는 경적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보니 주변의 행인들이 나와 네(聶) 아저씨가 연공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경찰차 한 대가 나는 듯이 달려와서 우리 앞에 멈춰 섰습니다. 차에서 몇몇 경찰이 내려오더니 우리를 경찰차에 끌어올렸습니다. 내가 보니 차 안에는 붙잡힌 대법제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 경찰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너 이 어린 녀석이 여긴 뭘 하러 왔어?” 내가 “호법(護法)하러 왔습니다!”라고 하자 경찰은 말했습니다. “호법하러 왔다고? 머리카락을 보호하러 왔단 말인가?” 나머지 경찰들도 나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나에게 묻던 경찰이 나의 뺨을 때려 나는 즉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 젊은 여 동수가 나를 그의 품으로 끌어당겨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울면 안 돼요, 대법 어린 제자는 울지 않지요, 사부님께서는 어린 제자를 가장 예뻐하신데요.” 경찰은 아주 빨리 우리를 한 커다란 집으로 싣고 갔습니다. 큰 집의 정면 벽은 모두 쇠 난간으로 만들었으며 안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었고 집 정도의 길이이며 벽에 붙인 침대가 있었습니다. 위에는 매우 많은 동수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대략 반시간 머물러 있었는데 경찰은 다시 나와 네(聶)아저씨를 북경주재 사무소의 한 호실로 보냈습니다. 방에는 10여 개의 의자와 책상이 있었습니다. 잠 잘 때는 의자를 한데 모아 침대로 썼는데 네(聶) 아저씨는 그의 옷을 벗어 나의 몸에 덮어주었습니다. 한번은 꿈속에서 떠드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습니다. 원래는 한 경찰이 네(聶) 아저씨를 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찰은 네(聶) 아저씨보고 나에게 옷을 덮어주지 말라고 말하면서 네(聶) 아저씨의 뺨을 때렸습니다. 경찰이 간 후, 나는 네(聶) 아저씨에게 방금 뺨 맞은 것이 아프지 않은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방금 얼굴이 얼어서 맞아도 감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좋은 마음,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 영하 몇 도 되는 날씨에 어린아이에게 옷을 덮어주었다고 하여 경찰에게 뺨을 맞다니 세상에 어디 이런 도리가 있습니까!

그 방에는 종일 전등을 켜고 있었으며, 커튼으로 가리워져 창문 밖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느 때가 낮이고 어느 때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며 내가 여기에서 며칠 있었는지는 더욱 몰랐습니다. 하루는 네(聶) 아저씨께서 “너희 어머니가 오셨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디에 계신지 다급히 물었습니다. “밖에 계신다.” 나는 얼른 커튼 모서리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또 다시 내려앉았습니다. “너희 어머니는 이미 호실로 들어가셨다.”고 네(聶)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다시 또 이틀쯤이 지나 내가 석방되어 나와 엄마를 보았을 때, 얼른 엄마 곁으로 뛰어갔지요.“

아들의 말을 듣고 난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했으며 아들의 쇠약한 몸을 바라보니 마음속에서 애처로운 마음이 우러나왔다. “아들아, 네가 참 잘 했구나!”

한 경찰이 청두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가는 김에 우리 네 명의 대법제자를 압송해 갔다. 경찰은 강제로 우리 네 명의 대법제자에게서 매 사람마다 50위안씩 받아냈는데 말로는 북경주재 사무소에서 북경 기차역까지의 차비라고 했다. 경찰은 우리를 북경 기차역까지 압송해온 후, 강제로 우리 돈에서 두 장의 침대표 값을 제했다


*진상을 알게 된 승무원

기차 칸에서 경찰은 휴식의 편의를 위해, 침대차 한 칸을 맡았다. 양쪽 상, 중, 하에 모두 6개 좌석이 있는데 우리 4명 대법제자는 자신들이 돈을 내어 2개의 자리를 썼다. 밤에 경찰이 잠 잘 때, 한 경찰이 우리를 지키고 아울러 우리를 수갑으로 쇠 침대에 채워놓았다.

어느 날 아침, 몇몇 승무원들이 우리가 파룬궁이라는 말을 듣고 문의 커튼을 열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경찰은 말하기를 “조심들 하세요, 파룬궁은 모두 공(功)이 있어 당신들을 상하게 할 수도 있지요.” 라고 했다. 한 승무원이 말했다. “사실 우리 열차 팀(車務段)에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누나가 있는데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주 좋아 우리는 모두 그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부에서 파룬궁을 반대하자 그녀 역시 영문도 모르게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

이틀 후 아침 7시경, 기차가 청두에 도착하자마자 벌써부터 와서 우리를 기다린 경찰차에 실려 바로 청두시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에 압송되었다. 그곳의 고음 스피커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귀청을 찢을 듯한 큰 소리로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모욕하는 요언을 방송하였다. 보안요원들은 우리를 엄밀하게 감시하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점심 때 경찰은 아들을 데리고 갔다. 저녁식사 후, 그들은 우리를 큰 방에 가두어 놓고 “세뇌” 시켰다. 나는 그들이 지껄이는 거짓말이 듣기 싫어 일어서서 연공을 하였다. 보안요원이 발견한 후, 나를 발로 차서 밖으로 끌어내 강제로 우리더러 가죽 옷과 외투를 벗으라고 하고는 찬바람에 얼게 하였다. 보안요원들은 비바람을 막는 비닐 천을 걷어치우고 우리를 지켰는데 비록 그들이 한편 우리를 지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선로 요리를 끓여 먹었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그들도 추워서 할 수 없이 비닐 천을 닫고는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오래 동안 땅바닥에 쪼그려 앉게 하였다. 시간이 길어지자 다리와 발이 마비되기 시작했으며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려고 하였다. 나는 얼른 손으로 옆의 쇠틀에 지탱하며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또 쪼그리고 앉았다......

*쥬루(九茹)촌 구치소

이틀간 강제적으로 “세뇌” 시킨 후, 쥬루(九茹)촌 구치소에 송치하여 불법적으로 15일간 감금하였다. 불법 감금된 대법제자들이 너무 많아 여자 감방이 모자라서 남자감방을 비워 여자 대법제자를 감금하였다. 구치소 안에 고음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귀청을 찢을 듯한 큰 소리로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모욕하는 거짓말을 방송하였다. 이 더러운 환경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 미신을 다시 논함 』중에서 말씀하신 법이 생각났다.

“대법을 수련하는 수련생의 우주 진리에 대한 인식은 이성(理性)과 실천(實踐)의 승화로서 인류가 어떠한 입장에 입각하여 인류사회의 일체 이론보다 높은 우주 법리를 부정하든지 막론하고 모두 헛수고이다. 특히 인류사회의 도덕이 전면적으로 붕괴될 때 위대한 우주는 다시 한번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사람에게 이 최후의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인류가 반드시 극히 소중히 여겨야 할 희망이었건만 사람은 도리어 사욕을 위하여 우주가 인류에게 부여한 이 최후의 희망마저도 파괴하였는바 천지(天地)로 하여금 크게 노하게 하고 있다. 무지한 사람은 여전히 각종 재앙을 자연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주는 인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단지 가장 낮은 한 층의 생명존재의 표현형식일 뿐이다. 만약 인류가 우주 이 한 층에서의 생존표준을 잃어버린다면 그러면 우주의 역사에 의하여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인류여! 깨어나라! 역사상 신(神)의 서약(誓約)은 실현 중에 있는 것으로 대법은 일체 생명을 가늠하고 있다. 인생의 길은 자신이 걷는 것이다. 사람 자신의 일념도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소중히 여기라, 우주의 법리는 바로 당신들 앞에 있다.”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포기하고 그들의 거짓말을 접수하게 하기 위해, 그들은 또 우리를 핍박하여 그들이 뜯어 고친 “세뇌”된 대법제자의 문장과 그들이 뜯어 고친 “세뇌”된 대법제자의 비디오를 보게 하였다. 장기적으로 캄캄한 방에 갇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우리들에게 법공부도 하지 못하게 하고 연공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경찰은 늘 대법제자들을 불러가서 전기 충격기 “맛”을 보여주었으며 끈으로 몸을 묶어 비를 맞게 했다. 장쩌민의 후원으로 말미암아 경찰들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아주 사나웠다. 쥬루(九茹)촌 구치소에서 왕씨 수련생이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경찰은 그에게 전기충격을 가한 후, 밥도 먹지 못하게 하고 비가 오는데 끈으로 묶어 내몰아 까무러치게 하였다. 그러나 사악의 일체 표현은 우주의 진리를 알고 있는 대법제자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헛수고이다. 반달 후면, 이미 2000년 원단이다. 청두시 룽탄쓰 파출소의 탕씨 경찰이 나를 데리러 왔는데 나는 나를 집에 돌려보내 설을 쉬라고 하는 줄로 알았다. 결국 나를 다시 룽탄쓰 파출소로 데려갔다. 탕씨 경찰이 나보고 계속 수련하지를 물어 나는 “수련하겠다.(煉)” 고 말했다. “煉” 이 한 글자 때문에 점심 식사 후, 그가 형사구류 통지서를 작성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청두시 제 2 간수소(롄화촌)에 보내 한 달간 형사구류를 시켰다. 내가 들어가서 보니 한 감방에 20여 명 대법제자가 갇혀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당번을 서야 했으며, 매일 반드시 침대에 앉아 형법 (刑法)을 학습하여야 했다. 만약 연공하는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중형(重型) 족쇄와 수갑을 채웠다. 나는 싱천(邢琛, 여자, 20여세, 대학생)의 두 발과 두 손이 이미 수갑과 족쇄에 시달려 붓고 검붉은 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는데 아예 밥을 먹고 잠을 잘 수가 없었으며 화장실에 가서 생리대를 바꾸는 일마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단식으로 박해를 제지하는 것을 보면 콧구멍을 통하여 야만적으로 음식물을 강제 투입시키는데 이렇게 할 때마다 대법제자는 죽을 지경이다. 일주일이 되어서야 감방 두목들을 불러서는 통일적으로 물건을 한번 사온다. 게다가 가격도 밖의 슈퍼마켓보다 2-3배나 비싸다. 불법 형사구류 한 달 만기가 되면 바로 구정이다, 나는 마음 놓고 집에 가서 설을 쇨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룽탄쓰 파출소 탕씨 경찰이 또 와서 나를 보고 아직도 수련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수련할 겁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다시 또 나를 완낸창(萬年場) 파출소에 맡겼다. 그는 내가 룽탄쓰의 소도시 호구(戶口)를 샀고, 집을 사고, 살고 있는 집은 모두 완낸창에 있으므로 사람과 호구가 갈라져 있음에 속해 나는 마땅히 완낸창 파출소에 속한다고 했다. 완낸창 파출소에 온 후, 나는 계속해서 “수련한다.” 고 말했다. 그들은 또 나를 쥬루(九茹)촌 구치소에 보냈다.....나는 이렇게 축구공을 차듯이 구치소에서 파출소로 가고 또 파출소에서 구치소로 갔으며 마지막에는 또 간수소로 갔는데 여태껏 집으로 가지 못하게 했으며 여태껏 목욕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나는 북경에 합법적으로 청원을 갔다가 문마저도 찾지 못하고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감금 당했다. 1999년 12월 7일에 내가 북경에서 체포되어서부터 2000년 3월 2일까지 반복해서 6차례 감금하였다(북경주재 사무소,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 구류소, 간수소를 포함) 모두 96일 감금 당했는데 중간에 한 번도 감금장소를 떠나지 못했다.

바로 법에 따라 북경에 청원하러 간 것 때문이다. 하지만 민원접수 사무실의 문마저도 찾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불법적으로 형사구류 1차례, 치안구류 3차례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은 아직도 계속 감금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장(江)xx가 부르짖고 있는 “중국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에 발생한 엄중하게 국민이 마땅히 향유해야 할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고 인신의 자유를 침해한 추잡한 행위이다.

*동생이 경찰 웨이다핑(魏大平)에게 3,000위안을 뺐기다.

간신히 2000년 3월 2일까지 견뎌왔다. 또 한번 불법구류 만기석방일이 돌아왔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번에는 어떻게 하든지 더는 경찰에게 무기한으로 감금되어서는 안 되며, 어떻게 하든지 북경에 가서 청원을 해야 하고, 상급 정부로 하여금 하급 경찰들이 우리가 이런 연공을 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인신의 자유와 권리를 어떻게 침범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오후 3시 경, 경찰 웨이다핑이 다시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예전처럼 이불을 안고 나갔는데 웨이다핑을 만나자 그가 나에게, “중팡충, 이불을 여기에다 놓아. 어차피 조금 있다가 또 돌아 올 것이니.”라고 했다. 내가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듣고 나서 기뻐 말했다. “설득되었나. 수련을 그만 두기로 했는가?” “내가 여기에서 한 번 갇히면 거의 석 달씩인데 매일 도둑질하고 빼앗고 몸 파는 사람들과 한데 갇혀있다 보니 그런 악담들을 듣기만 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져요. 집에 돌아가 조용히 생각해 보겠어요.” 그는 나의 말투가 어쩌다 변하고 “전화(轉化)”할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내가 이불을 파출소로 가지고 가는 것에 동의 하였으며 내 동생더러 3,000위안의 보증금을 가지고 와서 나를 데려가라고 전화로 통지하였다.

동생이 쏜살같이 2,000위안을 마련해 가지고 왔다. 웨이다핑은 말하기를 “3,000위안에서 한 푼이 모자라도 안 된다, 이 돈은 당신 둘째 누나가 다시는 북경에 가지 않겠다는 보증금이니 당신 둘째 누나가 만약 또 북경에 간다면, 우리는 이 3000위안을 당신 누나 데리러 가는 비용으로 쓰겠다.” 웨이다핑은 영수증을 떼어주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내 동생에게 그가 쓴 메모지에 사인을 하라고 하였다. 어찌할 방법이 없어 동생은 또 1000위안을 빌려와 밤 9시경에 나를 데리고 나갔다. 떠나기 전 웨이다핑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반드시 매일 아침 파출소에 와서 신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북경에 다시 청원하러 가기 위해, 나는 마음을 어기고 아침 9시에 신고하러 가겠다는 쪽지를 썼다. 나중에 나는 이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엄정성명을 써서 내가 쓴 쪽지를 폐지한다고 그에게 직접 알려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동생이 내게 말했다. “둘째 누나, 나는 모든 방법을 다 썼는데도 누나를 구해내지 못했는데 오늘 끝내 나왔으니 우리 온 식구가 함께 가서 신선로 요리나 먹어요.” 집에 오니 밤 12시 넘었다. 동생은 소파 위에서 자면서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또 북경에 갈까봐, 내가 또 경찰에게 붙들려 나오지 못 할까봐 두려워서였다. 내가 ”동생, 이젠 그만 집으로 가보렴, 올케가 집에서 기다리겠는데.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올케가 걱정할 것이네.”라고 하며 안심시키자,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동생은 불안한 심정을 지니고 나를 떠났다.

(계속 이어짐)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8일
문장갱신: 2004년 7월 24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8/79560.html




논-픽션:<질풍경초(疾風勁草) >(4)


글 / 중팡츙(钟芳琼)

【명혜망 2004년 7월19일】(앞 문장에 이어)

제3장 다시 청원하러 가다

겹겹의 가로막음을 피해가다

이튿날 아침(3월3일) 7시경, 나는 친구 집에 가서 돈을 찾아가지고 베이징(北京)에 가서 청원하려고 준비하였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말했다. "9시가 넘어 파출소와 사무소 사람들이 너를 찾아 왔었단다. 벨을 누르면서 이름을 불렀지만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점심을 먹고 나는 다급히 길을 떠났다.

겹겹의 경찰 제지를 피하여 둘러가기 위해 나는 길을 우회하여 버스를 타고 중칭(重慶)에 이르고 우한(武漢)을 지나 다시 차를 바꿔 타고 베이징에 갔다. 길에서 놀란 일은 있었지만 위험은 없었다. 버스가 중칭에 갓 도착하자 나는 라디오에서 인대(人大, 주: 인민대표대회), 정협회의(政協會議)가 오늘 오후 3시 30분경 베이징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가슴은 빠르게 뛰었는데 가장 빠른 속도로 베이징 민원실에 가야 했다. 누가 알았으랴, 내가 탑승한 것은 유람선이라 장장 4일 밤낮을 지나 7일 오전에도 우한에 도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차역에 도착해보니 오후 1시가 넘어 베이징에 가는 특급 에어컨침대열차가 있었다.

검표구는 두 줄로 나뉘었고 나는 오른 쪽 첫 번째 줄 중간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갑자기 나의 왼쪽 첫줄에 앉은 앞의 두 명 사복경찰이 한사람씩 묻기 시작했다. "파룬궁을 연마하는가?" 나는 보고서 조급했다. 절대로 이 곳에서 잡히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 도와주세요, 저는 반드시 민원실(信访局)에 가야 합니다. 사복경찰은 아주 빨리 검사하였고 나는 매 사람마다 모두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았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주 빨리 나의 이 한 줄을 검사하기 시작하였고 내 마음은 조급해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위기의 순간에 마침 검표가 시작되었다. 나는 일체를 마다하고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밀고나가 표를 검표원에게 주었다...

하나하나의 방어선을 돌파하다

2000년 3월8일 아침 5시가 넘어 나는 베이징 서부역(西客站)에 도착하였다. 인대, 정협, 양회(兩會) 기간은 국민들이 말할 수 있는 시기이다. 법률은 공민(公民)에게 신앙의 자유권과 청원의 자유권이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장씨 집단 한 무리들은 오히려 법을 알면서 법을 위배하고 일체 방법을 다하여 파룬궁수련생의 입을 막으려 하였으며 파룬궁수련생들이 청원하지 못하게 하였다. 날씨가 하도 추워 원래 대기실에서 몸을 좀 녹이고 7시가 되어서 다시 역전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또 안에는 사복경찰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니 안전하지 못하였다. 만일에 청원하는 대사를 그르치면 평생에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해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큰 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였다.

아침밥을 먹은 후 나는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를 달았으며 손가방을 챙긴 후 차를 타고서 탠안먼(天安門)에 갔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탠안먼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더니 모두들 양회기간에는 탠안먼 경비가 삼엄하여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인력삼륜차 한대를 불렀고 민원실에 가자고 하였다. 인력거를 끄는 할아버지가 길에서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아가씨, 당신은 민원실에 가서 소송하려는 거요? 이 양회기간은 민원실에 들어가기 힘든데 만약 들어갈 수 있다면 소송은 모조건 이길 수 있네."

할아버지는 느릿느릿 차도를 따라 걸어갔는데 마침 민원실 문 앞이었다. 사복경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아주 노련하게 길 맞은편으로 가서 거슬러 올라가 민원실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인력거를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고발장은 잘 적었소? 당신이 볼 때 맞은편 옆에 많은 사람들이 에워싼 곳이 있는데 이 곳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민원실일세. 조심하게." 나는 길 양옆에 전국 각지의 경찰차가 가득 주차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당당하게 걸어갔다. 골목 안은 전부 사복경찰과 붙잡힌 대법제자들이었는데 이미 골목길을 물샐 틈 없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바로 앞으로 걸어갔고 백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눈으로 골목길을 주시하면서 대법제자들을 찾고 있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으며 약간의 실수라도 해서는 안 되었다. 어렵사리 사람무리에서 벗어나 길고 긴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골목길에도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사복경찰들이 순찰하고 있었다. 나는 두 눈으로 앞을 주시하였고 이때 내심으로 조금 긴장하였다. 마음속으로 사부님, 저를 도와 반드시 민원실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라고 생각했다.


민원접수처가 공안국으로 변하다

어렵게 길목마다 가로 놓인 방어선을 돌파하고 민원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에는 신분증을 맞기고 표를 받는다는 팻말이 적혀있었다. 어이구! 나는 전번에 베이징주재사무소(駐京辦)에서 신분증을 몰수당하였는데 지금 무슨 증거물로 표를 얻는단 말인가? 나는 묘한 수가 생각나서 두 중년남자의 옆에 앉아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나를 도와 표 한 장을 얻어주세요." 그는 "우리가 천리 밖에서 청원하러 온지 이미 5번째인데 당신에게 표를 얻어줄 마음이 어디 있겠소?" 라고 하였다. 내가 "돈을 드릴게요."라고 하니 다른 한 사람은 돈을 준다는 소리에 마음이 움직여 말했다. "내가 가서 한번 해보지요." 그가 돌아온 후 나는 호주머니의 돈 전부를 가만히 그의 손에 밀어 넣었다.(대략 80위안 정도) 그리고 한 장의 표에 진상을 침착하게 적어 넣었다. 파룬따파의 억울함과 내가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 이익을 얻은 것, 진실한 말을 함으로써 현지에서 불법으로 수감된 진실한 정황들이었다. 대법의 결백을 돌려주고 사부님 결백을 돌려주며 대법서적을 공개적으로 출판하도록 허락하고, 우리에게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주는 동시에 불법으로 수감된 모든 대법제자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민원실 안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복경찰들이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나는 단지 적어놓은 부분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절반가량 적었을 때 사복경찰은 젊은이 한명이 대법제자임을 발견하고 그를 붙잡았다. 잇달아 또 젊은 여사도 대법제자임이 발견되어 그녀도 붙잡혔다. 주위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었다. 나는 일체를 불구하고 시간을 다그쳐 적었고 그들이 다가와서 나에게 "어디 사람이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어차피 당신 그 쪽이 아니요."라고 어물쩍하고는 계속 적었다.

이때 기색이 흉악한 경찰이 다가왔는데 아마 민원실 안의 사람이었다. 한 손으로 나의 목덜미를 잡고 나를 걸상에서 끌어내더니 앞으로 힘껏 밀었다. 나는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 하였다. 내가 겨우 일어서자 그는 또 힘껏 밀었으며 나를 밖으로 밀어 내었다. 이때 나는 중칭(重慶), 베이징의 십여 명 대법제자들이 두 다리를 벌린 채 아주 납작하게 바닥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 경찰이 다가오더니 조금 전에 붙잡힌 여사에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그녀가 "베이징 모모 파출소이다."라고 말하자 경찰은 "당신들 그 구역은 나의 동창생 구역인데 당신은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방법이 없군, 당신이 방금 전에 적은 표는 이미 사이트에 올려졌다. 어이구! 나의 동창생도 당신과 함께 재수 없게 되었네... ..."라고 하였다. (양회기간에 만약 관할구역의 대법제자 한명이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면 장(江)씨 집단은 그 구역의 경찰들을 연좌시켰다). 나중에 우리는 채 적지 못한 표를 우리에게 돌려주어 마저 적을 수 있게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한 경찰이 이에 동의하였고 우리는 비로소 표를 마저 적어서 올려 보냈다. 후에 그들은 각 자의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통지하였다.

장(江)씨 집단이 봉건왕조의 연좌제(連坐制)를 이용하여 지역경찰을 연루시키다

내가 베이징에 가서 민원실에 청원할 때 공안은 민원실을 불법으로 봉쇄하고 기타 파룬궁 수련생들을 함께 각 지역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보냈다.

베이징 주재 스촨 청두 사무소(四川成都驻京办)에 도착하자 처장 스(石)xx는 여직원더러 또 전처럼 옷을 발가벗기고 몸을 수색하게 하였다. 그리고 완녠창(万年场) 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魏大平)과 사무소 주임 황(黄)××, 사무원 황(黄)××에 알렸고 그들은 전화를 받은 후 아주 빨리 달려왔다. 이 세 사람은 나의 청원 때문에 그들이 관직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였는데 일찌감치 베이징 기차역과 탠안먼광장, 민원실 문 앞에서 일주일간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사무원 황xx은 기세등등하여 말했다. "나는 너를 때려서 고기 소 (肉漿)로 만들고 싶다." 그들은 나의 청원할 권리를 침해하였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사무원 황xx가 말했다. "너는 정말로 사람을 화나게 한다! 네 남동생이 3천위안을 써서 더 이상 베이징에 가지 않는다고 보증하여 집에 되돌려 보낸 이튿날 우리는 네가 집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비행기표 3장을 사서 베이징에 날아왔다. 서부역에서 너를 잡으려고 청두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마다 우리는 모두 놓치지 않았다. 깊은 밤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출구(站口)에 서서 한사람 한사람씩 사람을 가려내느라고 눈마저 부었지만 여전히 너를 찾지 못하였다. 삼일이 지난 후 우리는 또 할 수없이 역전에서 잡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북경주재 사무소의 펑소장에게 전화하여 너의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하였다. 매일 나와 황주임이 아침부터 밤까지 탠안먼에서 찾았다. 날씨는 춥고 바람은 또 크게 불어 닥쳤고 발마저 물집이 생겼다. 네가 한번 보라! 웨이다핑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민원실 문 앞에서 기다리며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루 또 하루 찾아 헤매면서 우리는 모두 실망하였다. 마침내 처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웨이다핑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댔고 우리는 당신을 놓칠까봐 식사조차 못하였다. 며칠동안 모두 지쳐서 말할 나위 없이 피곤하였다. 황주임의 병은 재발하였고 나도 감기에 걸려 온 몸이 영 말이 아니다. 젊은 웨이다핑마저 한바탕 야위었는데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당신을 찾아서 난리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청원은 공민의 합법적인 권리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이 나를 제지하니 고생이 아닌가?"

웨이다핑은 또 나에게 물었다. "중팡츙, 당신은 어떻게 민원실에 들어갔는가?" 내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다."고 대답하자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계속 민원실 골목길을 지키면서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단단히 주시하고 있었다. 한 사람도 나의 눈앞에서 도망갈 수 없었다. 아마 차가 당신을 실어서 들어갔거나 당신은 바로 뒷문으로 들어간 것이다."고 하였다. 나는 "민원실도 뒷문을 여는가? 어디가 뒷문인지 모르고 또 차를 타지도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제4장, 새빨간 거짓말로 세상 사람을 속이다

시비가 전도된 쓰촨(四川)텔레비전 방송국 소식

나는 또 북경주재 스촨 청두 사무소 작은 방안에 일주일간 갇힌 후 방폭대대(防暴大隊)의 경찰에 의해 청두청양구(成都青羊區) 마약퇴치센터로 압송되었다. 강제로 이틀 동안 세뇌당한 후(청원한 매 한명 대법제자들은 청두에 보내진 후 모두 먼저 마약퇴치소에서 이틀간 "세뇌"당했다.) 다시 보름동안 불법으로 수감되었다. 나는 기타 수감인원과 같이 문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당하였다. 그들은 대법제자로부터 주로 경문과 돈을 수색해냈다. 우리는 반드시 하루당 생활비 15위안을 낸 후 물을 가득 담은 큰 그릇 속에서 썩고 더러우며 이가 나간 밥그릇과 간단한 젓가락, 그리고 이른바 소독 종이 두장을 들고 감방으로 들어가는데 한번 들어가면 보름이었다.

점심식사 후 연공을 하는데 1장 공법을 끝내기도 전에 실내의 한 구류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 다리에 혈관종양이 있네요."

“당신이 어떻게 알지요?”나는 매우 이상하였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들어올 때 얼굴이 아주 익었고 말하는 목소리도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어디서 당신을 보았는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파룬궁을 연마하니까 생각났는데 나는 텔레비전에서 당신을 보았어요. 작년 겨울 내가 고향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은 후 온 가족이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당신이 나오는 장면이 나타났는데 몇 사람이 방 안에 있었고 당신은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하고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 사람이라고 말했지요. 당신이 말하면서 바지를 걷어 올려 우리에게 보여주었지만 곧 당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화면만 나오는데 내레이터(播音員)가 말하기를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했기 때문에 혈관종양이 생겼다고 했어요. 파룬궁이 당신에게 침을 맞지 못하게 하고 약을 먹지 못하게 하여 당신은 지금 이미 불구가 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곳에 왔지요? 원래 불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

"나는 전혀 불구가 된 적이 없습니다. 작년 겨울 경찰에게 잡힌 나는 구치소에 계속 갇혀 있었는데 이번에 방법을 생각하여 베이징에 가서 청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갇힌 것이지요. 당신이 본 텔레비전은 우리가 1999년 10월1일 <<상무조보(商務早報)>신문사에 갔을 때입니다. 그날<<상무조보(商務早報)>신문은 파룬궁이 "x교"라는 글을 실었으므로 우리는 신문사에 가서 그들에게 우리가 파룬궁을 연마한 후 심신(心身)이 이익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말하였고 기자가 기록을 했습니다. 촬영기로 촬영도 했지요. 나는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른쪽 다리에 선천성 광범위해면상부종형 혈관종양(先天性大面積海綿狀腫脹型血管瘤)이 있어 오랫동안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수술할 때 혈관 한 가닥을 잘라내기까지 했지만 완쾌되지 않았고 오히려 또 소뇌신경을 다쳐 뇌빈혈(腦缺血) 후유증을 얻었습니다. 심할 때는 길을 걸으면 모든 것이 날아가는 듯 하였고 일시적인 실명까지 생겼습니다. 또한 여러 해 동안 광범위하게 심한 황갈색 반점이 나타나 6년 동안 수 만 위안을 들여 미용을 하였지만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파룬궁을 일주일간 연마한 후 얼굴의 점들이 전부 없어졌고 2달 후에는 왼쪽 다리의 혈관종양과 뇌빈혈이 저절로 나았습니다.‘ "

그녀는 놀라서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당신은 원래 파룬궁이 좋다고 말했습니까? 어째서 당신이 텔레비전에 화면이 나올 때 내레이터가 오히려 파룬궁이 나쁘다고 했지요?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매스컴이 뉴스에서 새빨간 거짓말을 하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였는지 모르겠군요. 직접 눈으로 당신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텔레비전에서 말한 것이 진짜인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 텔레비전에서는 그것을 한번만 방송한 것이 아니에요. 그날 밤 우리가 본 다음, 이튿날 내가 샤워할 때 아들이 나를 부르면서 엄마, 빨리 와서 보세요. 어젯밤에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그 여자가 또 나왔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물었다. "당신이 본 것은 어느 텔레비전방송이지요?" 그녀가 대답하였다. "우리 마을은 스촨 텔레비전방송국 한개 채널만 나옵니다." 내가 또 물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이 일을 조사한다면 당신은 의연히 실증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실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장샌비(蒋先碧)라고 해요. 집이 스촨 러즈현 팡성향(四川乐至县放生乡)에 있지요. 나는 도시에서 자전거가게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장물 자전거 한대를 사는 바람에 구류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20여명은 듣고서 모두 놀라워하였다. 모두들 언론매체가 이다지도 흑백을 뒤집어놓고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여 은밀하게 시청자를 기만하는 것은 파룬궁을 먹칠할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인 것을 깨달았는데 무슨 수단인들 해내지 못하랴... ... 그녀들은 파룬궁의 진상을 들은 후 그 당시 절반 이상이 나에게서 파룬궁을 배웠고 또 어떤 이는 돌아간 후에도 연마하겠다고 표명하였다. 또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텔레비전에서 연출한 파룬궁은 가짜임을 반드시 알릴 것이라고 하였다. 감방 안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움에 따라 경찰이 알게 되었고 곧바로 그녀들을 불러내어 만약 그들이 따라서 공법을 연마하면 석방 날짜를 연기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단호하게 파룬궁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었고 그녀들은 모두 강제로 서있는 벌을 받았다.

구류소에 노(老) 홍군(红军)을 가두다

며칠이 지난 후 경찰은 또 연속적으로 끊임없이 몇 차례나 수감된 적이 있는 70여세 나는 할머니 류찬(劉燦)을 보내왔다.

류찬 할머니는 원래 류쥬자제학교(六九子弟校)의 교장으로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압록강 노 지원군(志願軍)이며 자녀 두 명은 모두 해외에 있었다. 류찬은 파룬궁을 연마하기 때문에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고 돌아온 후 나와 똑같이 구류소와 파출소로 왔다 갔다 하면서 갇혀 있었다.

이번에 그녀가 파출소에 돌아오기 전 남편이 거리에서 찐빵을 사다가 인도의 넘어진 난간에 다리가 부딪쳐 엄중하게 상하여 자립할 수 없어서 매일 차가운 찐빵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 남편을 돌보기 위하여 죽자 살자 구치소에 있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잰서루(建設路)파출소의 경찰 세 명이 한 발로 노인의 등을 밟고서 손을 뒤로 묶은 후 경찰차 뒤 칸에 던져 넣어, 쭈그린 채 강제로 싣고 온 것이었다.

점심 때 우리는 구류소 내의 슈퍼에 가서 물건을 샀는데 경찰은 우리 몇몇 대법제자들이 류찬과 말을 했다고 강제로 우리를 뜨거운 햇볕에 내리 쬐게 하였다. 내가 산 비누마저 바닥에서 햇볕에 녹았지만 경찰은 70세의 류찬 할머니로 하여금 그늘에 가지 못하게 하여 그녀는 계속 우리와 함께 뜨거운 햇볕 아래 서 있었다. 발은 뜨거운 시멘트 바닥을 밟고 있었다... ...

장기간 반복적으로 감금되었던 나날들

구류소에는 나처럼 반복적으로 오랫동안 불법 수감된 파룬궁수련생들이 아주 많았고 연세가 높은 이들도 많았다.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소장은 대법제자들을 전부 불러 제방 둑(坝子)에 세운 뒤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더 이상 이 곳에 오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이 곳은 아예 당신들이 머물 곳이 아닙니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50도에 못지않고 통풍설비 또한 좋지 못합니다. 환풍기도 큰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데 당신들 이렇게 많은 노인들이 이 속에 있으면 신체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대답하였다. "소장님, 우리도 오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보세요, 우리는 도무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또 잡혀오게 되니까요... ..."

나중에 구치소에서 당일 반복적으로 불법 수감되는 수련생들을 접수하지 않자 파출소는 방식을 바꾸어 파출소로 보내진 파룬궁수련생들을 일단 파출소 유치장에 하룻밤 가둔 후 이튿날 다시 불법으로 구치소에 보냈다. 파출소의 유치장은 몹시 비좁아 오로지 몇 평방 미터에 창문 하나 없는 검은 방이며 안에는 또 대소변이 들어 있는 변기통이 하나 있는데 얼마나 오랜 시일에 한번씩 쏟아버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4, 5월에 어두운 방은 악취가 하늘을 찔렀고 구더기와 모기가 무리를 지어 나를 습격하고 온 몸에 달라붙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너무나 피곤하여 잠깐 졸았다. 내가 눈을 한번 떠보니 옆에 두꺼비 한마리가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쫓아내었지만 도망가지도 않았다.

경찰은 보름에 한번씩 나를 파출소에 보냈는데 모두 일요일이었다. 아들은 모두 한번씩 와서 나를 만났다. 후에 경찰 웨이다핑은 모질게도 매번 15일간 구류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10일 구류로 고쳐, 내가 보름마다 아들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하였다. 바로 이렇게 나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5차례나 구류되었다.

오랫동안 불법 수감되어 작은 차는 운전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할 수없이 남동생에게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그것을 팔아버리게 하였다.

대법제자들은 바로 이렇게 장기간 반복적으로 불법 수감되었다. 경찰들은 파룬궁수련생으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게 하기 위하여 여름에는 고의적으로 물을 끊었고 십여 평방미터의 방안에 20여명이나 있게 하였다. 대, 소변을 항상 물로 씻어 내리지 못하게 하여 우리는 할 수 없이 종이로 덮었다. 실내는 악취가 하늘을 찔렀지만 대, 소변을 곁에 두고 밥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리가 보고(報告)를 제출하여 물을 받아 화장실을 청소하겠다고 하니 소장은 마구 욕을 해댔다. "편안하려고 하면 진장(錦江)호텔에 가서 살아라. 이 곳은 바로 이런 모습인데 누가 당신더러 오라고 했는가?" 위에서 검사하러 오면 경찰은 총 개폐기를 열었다.

집단단식과 야만적 음식물 투입

2000년 5월경, 지속적인 불법 수감을 제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5월 하순에 단체로 단식하였다. 이때 소장은 두려워서 우리더러 단식을 포기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못하겠소. 우리가 眞善忍(쩐싼런)을 닦고 진실한 말을 한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우린 집에 가겠습니다."고 하였고 소장은 "당신들은 모두 파출소에서 보낸 사람들이고 우리는 단지 당신들을 감시할 뿐이오. 시간이 되면 그들이 와서 데려갈 것입니다. 우리는 숫자대로 그들에게 보내면 되는데 우리도 당신들을 마음대로 돌려보낼 권리가 없어요."라고 하였다. 이에 우리들이 말했다. "그럼 우리는 생명으로 법을 실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 사람마다 모두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단식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청두시 공안국에 통지하였고 처장 펑쥬웨이와 다른 몇몇 공안국 경찰은 안캉(安康)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한 무리를 데리고 와서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시작하였다. 경찰은 몇 명의 남자들을 시켜 여자 감방에 들어가 한 사람씩 붙잡아 나오게 한 후 7,8명의 남자들이 대법수련생을 긴 널판자 2대로 이어 맞춘 "침대" 위에 눌렀다. 어떤 자는 머리를 누르고 어떤 자는 손을 누르고 어떤 자는 다리를 누르고 어떤 자는 발을 누르고 어떤 이는 코를 잡았고 어떤 자는 입을 잡고 또 어떤 자는 목을 졸랐다. 한 동안 몸부림친 후 대법수련생이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없어질 때 간호사는 호스를 밀어 넣었다. 농혈, 거품을 한바닥 토해내고 아파서 눈물을 계속 흘렸으며 숨이 막혀 아주 괴로웠다. 나는 늘 사부님의 경문 『심자명』을 외우면서 그들의 박해를 제지하였다.

나는 스촨(四川)면방직공장의 대법제자 옌딩후이(鄢定慧,여, 50여세)가 음식물을 주입당할 때 여러 차례 농과 혈, 거품을 한바닥 토하는 것을 보았다. 아파서 눈물을 계속 흘리고 숨이 막혀 괴롭지만 여전히 주입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단체로 단식한 후 고소장을 썼으며 5월24일 어렵게 조건 없이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 많은 친구들이 나를 보러 왔는데 어떤 이는 텔레비전에서 나를 본 후 걱정이 되어 내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사방으로 찾아다녔다고 하였다. 지금 나를 본 후 나를 위하여기뻐하며 또한 텔레비전에서 나에 대한 왜곡된 보도를 본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어머니의 조우 (遭遇)

손님들이 간 후 어머니는 나에게 나와 헤어진 후의 경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전에(1999년 12월3일) 너와 외조카가 함께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후 이튿날 나는 후회하였다. 무엇 때문에 너희들과 함께 가지 않았던가! 후회한 나머지 나는 12월 6일 혼자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고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진실한 정황을 정부에 반영하였다. 그 결과 민원실에 가지도 못하고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갇혔는데 민원실은 이미 공안국으로 변하였다. 베이징 주재사무소 방에는 오직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만 있었고 침대가 없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나는 두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몸을 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王)씨 성의 보안이 이를 보고 연공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강제로 나를 밖에 내보내 벌을 서게 하였다. 동수 왕수화(王素华)는 "그녀는 연세가 너무 많아 밖에 서 있으면 너무 추우니 내가 대신 서 있겠다."고 말하였다. 한참 뒤에 그는 나를 발로 차서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틀 뒤, 경찰은 나를 강제로 마약퇴치소에 보냈는데 안에서는 귀청을 찢는 듯한 대법을 비방하는 고음 스피커가 울렸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를 제방 둑으로 내몰아 달리기를 시켰는데 나는 나이가 많아 달리기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또 벌로 서있었고 배고파도 말하지 못한 채 다시 쥬루촌구치소(九茹村拘留所)로 보내졌다. 여전히 밥을 주지 않아 나는 춥고 배고픈 상태로 구치소에서 긴 밤을 지새웠는데 나는 그 고통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다. 구치소에서 늘 한밤중에 나에게 연마 하겠는가 연마하지 않겠는가를 물었고 내가 "연마 하겠다"고 말하자 경찰은 또 나를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구간에 세워 벌을 주었다. 힘들게 보름을 보내고 나니 비로소 완녠창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이 파출소로 데리고 갔다. 웨이다핑은 나를 속이면서 말하기를, 당신 딸이 연공으로 노동개조 3년형을 받았으니 이제 당신은 딸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또 딸네 집에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점심식사 후에 또 강제로 나를 아들집으로 내쫓았다. 아들집에 간 후에도 조용한 날이 없었고 파출소 사람들은 나의 거처를 살피면서 계속 박해하려고 망상하였다.

2000년 구정 이후, 8살 난 어린 외손자가 학교에 가야 하므로 나는 가만히 너의 집에 왔다(집에는 이미 먼지가 가득하여 나는 3일 동안 청소하였다). 파출소에서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 나를 쫓아낼 까봐 감히 문 밖을 나서지 못하였다. 주말에 어린 외손자가 돌아와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반찬도 아들이 외손자를 데려가고 데려올 때 조금씩 가져오게 하였고 반찬을 다 먹으면 짠지를 먹었고 짠지를 먹고 싶지 않으면 죽에 소금을 넣어 먹었다. 이렇게 먹은 시간이 길어지자 또한 습관이 되었다. 나는 너희 장뤄(江羅) 범죄집단이 어떻게 박해하여도 나에게 숨 한 모금 남아있으면 파룬궁을 연마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의 대법에 대한 단호함에 진심으로 위안이 되었다. 또한 장(江)씨 집단이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대법과 대법제자를 박해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만들어 민중을 기만한 것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느꼈다.

제5장, 사실의 진상을 똑똑히 밝히다

대법을 모욕하는 사진전시실 입구에서 진상을 알리다

2000년 6월8일, 정부는 스촨성의 전시관에서 대법을 모함하는 사진전시회를 열었다. 더욱 많은 세인들로 하여금 더는 기만당하지 않고 시비를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여 나는 자신의 경력을 써내었으며 복사지로 몇 부 복사해 내었다. 6월12일 아침 나는 지역경찰 웨이다핑을 찾아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쓴 이 진상자료를 좀 보시오. 내가 직접 베이징에 가서 올릴까요. 아니면 당신이 중앙지도자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웨이경찰이 "나에게 맡기면 내가 당신을 도와 전해주면 될 것이오." 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2부를 주었는데, 그더러 한 부는 나를 도와 위에 전해주고 한 부는 파출소와 사무소에 남겨 서로 돌려 보게 하였다. 그는 승낙하였다.

그 다음 나는 인민남로(南路)전시관에 가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복사해 간 진상자료를 대법비방 사진전시회를 보고 나온 사람들에게 배포하였다. 제목은 『사실의 진상을 밝히고 파룬따파의 결백을 돌려주다』이다.

강제로 집을 수색하다

2000년 6월13일 오후, 완녠창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이 나를 파출소로 불러서 갔다. 청두시 공안1처의 펑쥬웨이(冯久伟)는 나에게 누가 이 자료를 썼으며 얼마나 많이 배포하였는지를 물었다. 나는 나 혼자 쓴 것이라고 하였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놓은 작문수준이 있는지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저녁에 그들은 나의 집을 불법으로 수색하였고 나 개인에 속하는 사유재산을 불법으로 압수해갔다. 대법서적, 카세트테이프, 비디오테이프, 카세트, 신분증, 가부좌용 방석 등이었다. 집을 수색하는 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웨이다핑이 수색한 대법책을 보호하였다. 그 결과 두 명의 경찰은 나를 침대에 넘어뜨렸다. 나의 두 다리는 바닥에 꿇어져 있었고 경찰이 나의 목을 죽으라고 졸라 나는 숨을 쉬지 못했다. 경찰은 한 쪽 무릎으로 나의 등 위를 누른 채 또 나의 두 손을 등 뒤로 한 후 힘껏 위로 잡아당기어 나의 두 팔은 끊어지듯이 아팠다. 나는 많은 경찰들 앞에서 대법책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력함에 대하여 통곡하였다. 어머니는 경찰에게 감시당하여 경찰의 가택수색을 가로 막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질책과 울음소리를 들은 후 경찰에게서 벗어나와 나를 보러 왔다. 내가 경찰에 의해 무참히 당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무더기 대법책이 수색된 것을 보고 70세 가까이 된 어머니는 비통하게 엉엉 울었다. 두렵고, 처참하고, 비장한 분위기가 온 방안에 가득했다. 경찰들은 아예 어머니가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객실로 밀고 가 강제로 앉혔다. 아울러 어머니를 위협하였다. "움직이지 말라. 그녀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어머니가 대답했다. ”딸의 일이 곧 내 일이다. 너희 경찰들은 참으로 무법천지로구나!" 이어 내가 신발도 신지 않은 정황 하에서 경찰은 나를 아래 3층까지 강제로 끌고 내려가 나의 발등은 층계에 부딪쳐 벗겨졌으며 양말은 마찰되어 구멍이 났다. 그들은 나를 경찰차에 던져 넣고 강제로 파출소까지 실어갔다. 파출소 사무실에서 나는 그들이 빼앗아간 대법책 때문에 상심하여 한 밤중까지 울었다...

나는 오로지 생명으로 대법을 실증할 수밖에 없어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였다. 이튿날 점심 펑쥬웨이는 또 파출소에 와서 나를 불법으로 심문하였다. 나는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나갔다. 그는 나를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당신, 이 모습에 어디 사장님의 형상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남들은 머리에 혹이 생겼다고 하는데(사람이 멍청함을 말함) 내가 볼 때 당신의 머리에는 농구공이 자랐다. 남(장쩌민을 가리킴)은 파룬궁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좋다고 말한다. 당신이 좋은 것을 알면 마음속으로 알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XX당과 맞서면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진실한 말을 견지하는 것이 어찌 XX당과 맞서는 것인가?" 라고 하였다. 오후에 어떠한 절차도 없는 정황 하에서 그들은 또 나를 강제로 연꽃촌에 위치한 청두시 제2간수소로 보냈다.

이때 나는 이미 11차례나 불법 수감되었다. 11일간 형사 구류된 후 나는 불법 노동개조 1년형을 받고 청두시 제1간수소 닝샤가 좐윈참(宁夏街转运站) 에 보내졌다. 좐윈참에 들어가자마자 감옥의 우두머리가 강제로 400위안 돈을 뜯어 가는데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돈이 없으면 매 맞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보니 돈이 없는 잡범(杂案犯)들은 감옥 우두머리에게 매를 맞아 등이 시퍼렇게 멍들고 허리를 펴지 못하였으며 몸을 뒤척이지 못하였지만 경찰은 상관도 하지 않았다. 안의 생활용품은 밖의 슈퍼에서 파는 것보다 3배나 비쌌다.

보름 후 나는 다시 불법으로 즈중난무스 여자노교소(资中楠木寺女子劳教所)에 보내졌다.

(다음에 계속 이음)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9일
문장갱신: 2004년 8월 13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9/79561.html

논-픽션: <질풍경초(疾風勁草)> ( 5 )

글/중팡츙(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20일】

제4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을 받다

머리말: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수용된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자문자답한다.: 중국에서 제일 큰 사교가 무엇인지 아는가?--강제 노동교양이다!

제1장 진상은 감출 수 없다

길 잃음(迷失)과 귀정(歸正)

2000년 7월 28일 내가 쓰촨성 즈중난무스 여자 강제 노동수용소에 끌려간 후에 경찰은 마약 중독자 한명을 시켜 내 곁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강제 노동수용소에 있는 죄인들은 반드시 감옥 규칙 35조를 외워야 한다. 나는 법을 어긴 적이 없다는 이유로 규칙 외우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경찰은 나의 수면을 박탈하였으며 암암리에 나를 감시하는 자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나를 감시하는 자들도 이 일에 말려들어 같이 잠을 자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경찰은 ‘유다’까지 파견하여 ‘세뇌’를 시도하였으며 나를 다른 파룬궁 수련생과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3일 후 나는 나와 같이 산에 간 대법제자들이 모두 5중대를 떠나 7중대(파룬궁 대대)로 간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외롭고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 때 나는 아직 법의 이치에서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관념을 가지고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이 나보다 교육도 많이 받고 수련한 기간도 길며 전부터 견정한 마음으로 걸어 왔다는 이유로 다른 수련생들이 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본심에 어긋나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을 따라서 ‘회개서’를 썼다. 8월1일 나는 7중대에 가게 되었다.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매일 사부님의 경문을 외우면서 겉과 속이 다른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마음속으로는 매우 고통스럽고 정신이 아득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 기간에 나는 나와 같이 연공장에 있던 왕쉬쯔(남, 28)의 사건을 들었다. 그는 북경에 가서 청원한 탓에 불법으로 강제노동을 받게 되어 멘양(綿陽) 신화수용소에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독방에 있거나 아니면 구타를 당하거나 전기 고문을 받거나 모욕을 받아야 했다. 경찰은 심지어 다른 범인을 시켜 강제로 똥오줌 먹이기도 하였다. 왕쉬쯔는 8개월이나 견지하면서 쩐(眞), 싼(善), 런(忍)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2000년 8월에 박해 받아 세상을 떠났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이부자리에서 뒤척이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3개월을 보냈다. 참 고되고도 긴 3개월 이었다. 사부님의 새로운 경문 <사악을 질식시키자>는 길 잃은 나의 표지가 되었다. 나는 틀렸다는 것을 알고 바르게 시정하여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많은 동수(특히 청두 동수)들과 서로 토론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대부분 엄정성명을 썼고 견정한 마음으로 수련하겠다고 표명하였다. 나도 2000년11월25일에<마음속 말을 당신에게 털어놓다>란 제목으로 문장을 써서 엄정성명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내가 전에 쓴 본심에 어긋나는 모든 글은 무효이다.” 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수련하여 온 과정을 써서 수용소의 우(吳)소장, 관리과의 리쯔챵(李自强) 과장, 7중대 중대장 리쥔(李軍), 그리고 대법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날 나는 대장 장샤오팡(張小芳)으로부터 대회에서 지적을 받았다. 아울러 즉각 두 명의 마약 중독자가 24시간 나를 감시하였으며 다른 동수와 말하는 것을 금하였다. 더는 펜을 들어 문장을 쓰지 못하게 하였고 강제 노동 기간도 3개월 추가 되었으며, 이러한 조치로 나로 하여금 이미 자유를 잃은 환경에서 또 자유를 잃게 하였다. 감옥살이가 더욱 가중된 셈이다.

2001년 4월 경에 펑쥬위는 방송국의 기자들과 7중대를 인터뷰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마침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펑쥬위가 나를 불렀다. 그는 기자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이 사람이 바로 중팡츙입니다. 이전에는 사업하는 분이었는데 참 능력이 대단했어요.”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메라며 마이크는 이미 내 앞에 놓여 있었다. 펑쥬위는 이어서 “중팡츙! 전에 한동안 ‘전화’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또 번복하는 것이지?”라고 물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는 전혀 ‘전화’한 적이 없으며 그런 개념도 없다. 어떻게 변하라고 하는가?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변하라고 하는가? 나는 줄곧 파룬따파가 좋다고 여겨 왔는데 오로지 비인간적인 정신적 육체적 시달림을 이겨내지 못하여 어느 순간에 진실을 말하지 못한 것뿐이다. 지금 잘못을 뉘우치고 즉시 시정하려 하고 있으며 계속 진실만 말하려고 한다.”라고 답하였다.

위선적인 연기

2001년 구정이 돌아왔다. 청두시 노동교양 관리국은 강제 노동수용소에 와서 모든 수용인원을 위문하는 공식적인 행정 업무를 수행하였다. 대회가 끝나고 몇몇 작은 소그룹로 나누어 좌담회를 열었다. 소그룹마다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모두 같은 고향 사람이니까 어떠한 어려움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책임지고 해결하여 줄께요.”라고 하였다. 나는 “ TV에서 나의 일을 인용하여 부실적인 보도로 대중을 기만하는 내용을 보도하였다. 나는 진상을 밝히려고 사실을 밝히는 문장을 써서 보냈는데 불법으로 강제 노동수용소에 오게 되었다. 나는 억울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해 왔고 진실을 말하는 것도 죄가 있는가? 나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자 그들은 매우 놀란 표정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어느 구에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청화구’라고 답하였다. “돌아가서 꼭 물어 볼께요.”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회답이 없었고 무소식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번 좌담회 비디오 촬영한 것을 TV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정부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어떻게 따뜻한 보살핌을 주고.........

경찰은 장기적으로 ‘사오(邪悟)’한 사람을 시켜 나를 찾아와서 말을 나누게 하였는데 그들은 항상 ‘고층차’에서 수련하고 있는 것으로 위장 하였으며 사악하고 그릇되게 깨달은 자신들의 이치를 주장하면서 나를 미혹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교체시켜가면서 대법을 모욕하고 사부님을 비방하는 방법으로 내가 수련을 포기하기를 바랬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듣지 않으면 끝없는 비웃음과 모욕하는 말을 듣게 된다.

사부님은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란 문장에서 “여러분 생각해 보라. 현재 이 하나의 큰 검증은 바로 사부가 계시지 않을 때 대법이 어떠한가, 수련생이 어떠한가의 큰 심사(大考核)이다. 사부가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당신들이 어떻게 가서 하라고 더 알려 줄 수 있는가? 또한 그것들이 사악한 사람을 통제하여 사람의 일체 마음, 일체 집착에 대하여, 전면적이고도 빠짐없이 와해식으로 대법과 제자를 검증하고 있다.” 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법을 외우면서 그들의 사악한 사기극에 흔들리지 않았다.

공산당은 좋다?

경찰은 우리들에게 “공산당은 좋다”라는 노래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부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나는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떨리고 목이 막혀 갑갑하여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여기까지 들어 온 것이 아닌가? 공산당이 좋아서 나처럼 쩐, 싼, 런(眞, 善, 忍)을 믿는 사람들을 강제로 여기에 잡아들여 ‘전화’하려는 것인가?
대장 장쏘팡은 내가 ‘공산당이 좋다’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은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몰아 세웠다.

살아있는 광고

매번 말할 기회가 있으면 나는 말하였다. TV와 신문에서 발표한 것은 모두 대법을 모욕하고 옳고 그름을 뒤집어 놓은 수작이며, 나는 나를 예로 들어 대법을 모욕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것은 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지적하였다. 나는 TV에서 내가 대법을 배운 후에 혈관에 암이 생긴 것도 나았다는 사실을 방영하지 않고 파룬궁을 연마하여 혈관에 암이 생겨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다고 허위 선전을 하면서 내가 나가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기에 가두어 놓았다고 말하였다.
나는 중대에서 ‘파룬따파 하오(法輪大法好)’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광고가 되었다. 이 사실은 나중에 간수로 하여금 이를 악물고 욕을 하게 할 정도였다. “입 닥쳐 결국 너는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올거야.....”

제 2장 대법입자

감금되다

2001년7월 나와 다른 10명의 견정한 대법 수련생들은 작은 방에서 같이 감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장기적인 감시와 인신공격을 받으면서 한 발자국도 방문을 넘지 못하게 되었다. 아침6시부터 시작하여 밤10시30분 까지 하루 종일 군인이 앉아 있는 자세를 유지 하면서 두 눈은 수평으로 앞을 보고 허리를 굽히지 못하며 두 손은 무릎에 놓아야 하였다. 앉은 자세에서 눈을 감지 못하며 말하는 것은 더욱 심하게 금지하고 엉덩이를 걸상에서 떼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는 거의 50도가 넘는 고온의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 나는 동수 이광칭의 옷이 땀에 젖어 마른 적이 없는 것을 보았으며 너무 습한 환경이라 곰팡이까지 난 것을 발견하였다. 다른 동수 황리싸는 온몸에 난 옴으로 참기가 어려웠으며 손을 대지도 못하여 옷에는 피와 황색 이물질이 섞여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후에 그녀는 박해 받아 세상을 떠났다. 물까지 주지 않았다. 일주일에 물 한번 주는 것으로 머리 감고 샤워하고 빨래를 해야 했다. 물을 주었다는 표시만 한 것이다. 매일 고온으로 인해 몇 사람이 혼미상태로 들어가는 까닭에 간수는 저녁에 인원 파악을 하고는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대법제자가 무엇 때문에 사악에 의하여 잔혹하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正信)을 견지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대법 중의 한 입자이기 때문이다.” < 대법은 견고하여 파괴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내가 9월에 9중대에 가기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남아 있는 동수들은 계속 그러한 환경에서 견지하여 나갔다. 뿐만 아니라 눈으로 동수들이 비인간적인 박해를 받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면 나와 같은 난무스 여자 노동 수용소에 있는 파륜공 수련생 주샤(여, 32)의 경우이다. 수용소 7중대 중대장 장쇼팡의 지시에 의해 두 명의 마약 중독자가 그녀의 입을 막고 모래땅에 눕혀 끌고 다녔다. 그들은 CCTV 감시 범위에 들어서면 그녀를 풀어주고(CCTV를 피하기 위하여) 말하고 웃는 척하다가 CCTV의 촬영범위를 벗어나면 다시 묶어 끌고 다녔다. 몇 명이 돌아가면서 2명씩 짝을 지어 교대로 계속 진행하였다. 그녀의 등과 다리는 온통 모래였고 피와 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쇼팡은 비록 그녀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식으로 계속 시달림을 주었다. 그는 열 몇 명의 ‘유다’를 시켜 그녀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잡고 손을 비틀고 침을 뱉고 위에 올라서서 때리도록 하였는데 그들이 지쳐 맥이 빠져서야 그만두었다. 그 결과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장쇼팡은 마지못해 의사를 불러 살에 들어간 모래를 제거하라고 하였지만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녀는 결국 고액의 치료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다.
1년6개월의 불법 강제 노동교양과 10개월 동안 연속 3차례의(삐현 펑주 신진 세뇌반) 세뇌를 한 결과, 잔혹한 박해와 비인간적인 시달림으로 그녀는 정신이상이 되었다. 정신과 육체 모두가 인간의 한계를 넘는 잔혹한 핍박을 받은 것이다. 실로 2003년 9월에 펑주에서 세뇌를 하였을 때 그녀는 이미 시달림으로 인해 환각, 헛소리,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악인 허휀후는 그녀를 집에 돌려 보내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계속 세뇌를 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그녀의 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환각, 환청, 헛소리를 하게 했다. 무의식 중에 창문을 때리고 대소변을 아무데서나 보며…… 이런 상황에서 외부의 압력을 받고 악인은 부득불 2004년 4월 2일 그녀를 집에 보냈다. 지금 주샤의 정황은 아직도 집에서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며 완전히 어머니(70세)에 의지해야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와 동시에 또 문화대혁명 중에서 박해를 받아 정신이상에 걸린 그녀의 아버지를 돌봐야 했으며 4살 난 아이까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온갖 시달림에 최선을 다한 상황이라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하여 나갈 힘이 없었다. 그녀의 남편 왕스린도 대법제자여서 지금 세 번째 불법으로 멘양신화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

장펑칭(여, 50), 경찰에 의해 불법으로 1만 여 위안의 벌금을 낸 후 또 불법구류를 당한 후에 불법으로 강제 수용소에 오게 되었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녀는 장기적으로 7중대장 장쇼팡에게 전기봉으로 전기 고문을 받았으며 양말로 입을 막아 나무에 매달아 놓은 적이 많았다. 십자가 형태로 문을 등지고 두 손을 양 창문에 매달아 놓은 때도 많았다. 어느 하루 호위대에 있는 남자 경찰이 땅에 눕혀 놓고 밧줄로 목을 졸라 생명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또 한번은 7-8명이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 팔, 다리, 목 등을 고정시키고 호박국을 강제로 먹였는데 호박 덩어리가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한 순간 숨이 넘어갈 뻔하였다. 장평칭은 2002년 5월 석방되어 집에 돌아갔다. 집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2003년 8월경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불법으로 피현 구치소에 납치되어 갔는데 그곳에서 이름 모를 약물을 주사하여 정신이상이 되어 기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박해를 심하게 받아 다리도 정상적인 보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비록 2004년 1월에 석방되어 집에 다시 돌아갔지만 지금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에 또 불법납치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감옥에 있는 경찰이나 간수, 범인에게 비열하고 잔혹한 각종 수단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다. 어떤 사람은 춘절 당일 호위대 경찰에게 심하게 맞고 비가 오는 상황에서 나무에 매달려 중도에 의식을 잃은 적이 있었다. 경찰의 지시를 받은 마약 중독자가 강제로 화장실에 끌고 가 피 묻은 화장지를 입에 강제로 넣는가 하면 옷을 벗겨 나체로 거울 앞에 서있게 하고, 모욕을 당하거나 몽둥이로 얻어맞아 의식을 잃은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물고문을 하였는데 벽돌로 문을 막고 그 안에 물을 채운 다음 대법제자를 강제로 밀어 넣어 그 속에 있게 하였다. 혹은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고 이빨을 강제로 뽑은 일도 있었으며, 지속되는 무더위 속에서 대법제자를 구타한 다음 두 손을 묶고 두꺼운 이불을 덮은 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경찰이 고압 전기봉으로 지속적으로 전기고문을 가한 경우도 있었다. 30여세 여자 수련생이 강제적인 ‘전화’에 굴복하지 않자 800번 이상의 일어서고 앉는 동작을 반복하게 하여 바지가 찢어져 살이 보일 정도였다. 이 수련생은 벌을 받고 1주일이 지난 후에도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으며 화장실에서 가도 앉지를 못했다……

한번 또 한번, 파룬궁 수련생들은 선(善)한 마음으로 감옥의 경찰과 범인들을 감화시켰다. 부단히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주었고 많은 경찰은 파룬궁은 전혀 TV나 매체에서 선전한 것처럼 나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경찰은 공적인 장소에서 그저 겉으로만 우리에게 흉악한 표정을 지을 뿐 사적인 장소에서는 우리에게 “우리도 파룬궁 수련생이 좋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 그러나 우린 다른 사람(장쩌민)이 주는 돈을 받지. 우리는 다른 사람 손에 쥔 총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라서 할 뿐이야.”라고 말하였다. 비록 경찰들도 수련자를 박해하여 죄를 지었지만 이들을 시켜 진정으로 대법을 모욕하고 온갖 혹형으로 수련자에게 시달림을 주며 심지어 대법제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진정한 원흉은 장쩌민이다.

정념으로 마굴에서 뛰쳐나오다

9중대는 파룬궁 수련생과 마약 중독자가 섞여있는 중대이다. 그곳에서 매일 경찰은 두 명 이상의 마약 중독자를 시켜 수련생을 감시하면서 대법을 모욕하는 문장을 읽게 하고 일주일에 한 번 강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도록 했다. 나는 계속하여 TV에서 전에 보도되었던 것이 대법을 비방하는 보도라고 주장하면서 다리에 있는 상처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마약 중독자들은 이 사실을 듣고 모두 파룬궁이 억울하다고 여겼으나 마음속으로만 알고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

어느 날 후 간부는 내게 말하기를 “중팡츙, 그저 ‘전화’하지 않아서 그렇지 개인적으로 말하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통하지 않는가? 너무 고집 부리지 말고 ‘전화’하기만 하면 집에 보낼게.”라고 하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전화자’를 시켜 삼박 삼일 동안 나에 대한 ‘전화’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들은 “전화’하지 않으면 어떻게 나가? 아니면 여기서 날아 나갈 참인가?”라고 하였다. 나는 “누가 나를 여기에 가두었다면 바로 그가 날 원상태대로 복귀시켜야 해! 착한 사람은 죄가 없으니까?”라고 답하였다. 경찰은 “지금 파룬궁 수련자를 반혁명으로 몰고 있는데 ‘전화’하지 않으면 모두 신쟝에 보내어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고 종신 감금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압력과 협박에 견디다 못해 ‘전화’한 수련생이 집에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난 당당하게 수련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심지어 총살형을 받아도 난 진실만 말할 것이고 사부님을 배신하지 않고 대법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을 지켜 나갈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전화’하지 않는 수련생은 한 명도 놓아 주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1년 이상 더 구속하였다. 그 후로 나는 매일 법을 외우기 시작하였으며 매일 <홍음>을 외우는 외에 기억에 남는 경문 40여 편을 두 번 외우고 나서 잠을 잤다.


대법의 지도 하에서 정념으로 마굴을 벗어나다

2001년 9월30일, 이 날은 나의 만기 석방의 날에서 3개월이나 더 구속 당한 날이다. 오후 3시 경 경찰은 갑자기 나더러 짐을 싸라고 하였다. 나는 신쟝에 가서 종신토록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감금 생활을 하게 되는가 하여 모든 물건을 챙겼다. 대문을 나서 완낸창 파출소 경찰 위따핑과 사무실 사람이 보이자 집에 간다는 것을 눈치 챘다. 나는 따라온 수용소 간부에게 “내 짐을 9중대에 넘겨주세요. 집에 가는데 이렇게 많은 짐은 필요 없어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위(魏)경찰도 차에 짐을 실을 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간부는 “이미 가지고 나온 물건은 다시 돌려보내면 안되지.”라고 하였다. 나는 알았다. 내 짐을 중대에 돌려 보내면 다른 대법제자들은 내가 집에 갔다는 것을 눈치 챌 것이 아닌가? 경찰은 기타 견정한 대법제자를 속이지 못할 것이 아닌가?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수련한다

차에서 위경찰은 내게 물었다. ‘중팡츙 아직도 수련을 계속하는가?’ 나는 ‘한다.’라고 말하였다. 차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수련을 계속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비웃었다. “교훈이 아직도 적어? 좀 깨어나야 하는 것 아니야? 지금 우리 사무실에 이주임이 새로 왔는데 돌아가서 천천히 말하여 주지.”라고 하였다. 가는 길에서 나는 강제노동 수용소에 있는 경찰이 어떻게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나를 박해하였는가를 알려주었다. 대법의 아름다움, 신비함, TV, 신문에서 어떻게 파룬궁을 모욕하였는가를 말해주고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련이야기를 알려 주면서 그들이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고 사기에 넘어가지 말라고 권유하였다. 경찰은 “강제 노동수용소에 보냈더니 ‘전화’는 커녕 더 견정해졌네! 이번에는 돌아와서 우리를 ‘전화’하네. 우리도 당신처럼 강제 노동 수용소에 들어가라는 건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강제노동 수용된 것은 오로지 진실만 말하고 착한 사람이어서 간 것인데 당신들은 이런 일이 정상이라고 보는가? 냉정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하여 보라.”라고 권유하였다.

저녁 8시 경에 파출소에 도착하였다. 나는 간단한 서류절차만 밟고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경찰 위따핑이 말하기를 “소장이 퇴근하였으니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소장이 오면 해결 합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견결히 반대하여 나서며 “아니오. 난 집에 가야 합니다. 난 이미 자유의 몸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을 보고 왜 여기에 있으라고 하는 것 입니까?”라고 묻자 위경찰은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저 여기서 하루 밤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나를 강제로 파출소에 머무르게 하였다.

나는 혼자서 음습하고 좁은 공간에서 지내야 했다. 아침이 되자 나는 연공을 시작하였다. 출근 시간이 되어 소장은 랑모모를 데리고 카메라를 가지고 오더니 위경찰과 같이 방에 들어 왔다. 나를 보자 “사람은 예쁘게 생겼는데 어떻게 여기에 와서도 계속 연공을 하는가?”라고 했다. 나는 “연공인은 어디를 가거나 시간만 있으면 연공을 합니다.”라고 하자 그는 “그럼 오늘 아침에 연공한 것을 다시 한번 보여 줄 수 있나?”라고 물었다. 나는 연공 시범을 보여 주었다. 옆에 있던 사람은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들이 이것을 증거로 삼아 계속 박해하려고 하는지를 몰랐다.

제3장 여파가 가라앉지 않다 (餘波未平)

다시 구치소에 들어가다

오후가 되자 위따핑은 나를 구치소로 압송하려고 하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아무 죄도 없으니 가지 않을 것이다.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다시 구치소에 들어가라고 하는가. 당신들은 법을 어기고 있다. 나는 당신들을 고소할 것이다.”라고 하자 웨이다핑은 “고소하려면 구치소에 가서 하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또 한번 웨이다핑에 의해 쥬루춘 구치소에 압송되었다.


구치소에서 나는 당직 경찰에게 말하기를“ 나는 상소를 제기하려 합니다. 나는 노교소에서 오늘 만기 석방되었는데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파출소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강제로 여기에 데려왔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경찰은 “오늘은 국경일이어서 모두 휴가를 갔으니 3일 날 돌아오면 다시 얘기합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국경일, 99년 국경일에도 나는 여기에 있었어요. 이 몇 년 동안 모든 명절날을 난 모두 감옥에서 보냈어요. 왜 그랬는지 아세요? 오로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진실을 말한 탓에 열 한 번이나 불법으로 구속되었고 심지어 감옥살이 까지 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강제 노동을 받게 되었는지 아세요? 그것은 TV에서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않고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여 반신불수가 되었다.’라고 선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당신들이 제일 잘 알고 있어요. 그것은 내가 노교소에 가기 전에 여기서 열 번이나 구류되었기 때문이죠. 당신들은 당사자 입니다. 결국은 내가 쓴 한편의 문장 때문에 강제 노동 수용을 하게 되었죠. 당신이 말해보세요 억울한가, 억울하지 않겠는가를. 장(江)씨 집단은 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두려워할까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어요?”라고 하자 경찰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힘들게 3일을 기다렸다. 아침에 경찰이 감방을 검사하러 왔는데 나는 그에게 “나는 상소를 제기하련다"고 말했다. 나는 직접 상소장(申訴)을 양**소장에게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는 내게 이렇게 알려 왔다. “전화를 하여 완년창 파출소에 물어 봤는데 국경일 휴가가 8일까지라고 하니 8일까지 기다리시오.”라고 하였다.


사악이 수단을 다 써도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다
8일 오전 소장 양**의 호출을 받고 나는 소장 사무실에 갔다. 사무실에는 파출소에서 온 경찰 위따핑과 사무실 주임 이챵쥔, 그리고 주민위원회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수련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쓸 것을 요구하면서 쓰면 즉시로 집에 돌려보낸다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좋은 공법을 무슨 이유로 수련하지 않겠어요? 각서를 쓰려했다면 2년 전에 벌써 썼지요. 이제 와서 뭘 쓰겠어요? 당신들은 나를 안지 이미 2년이 되었는데 나와 파룬궁에 대해 모두 일정하게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라고 하자 그들은 “당신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다 좋아!”라고 하였다. 나는 “이것도 파룬궁을 배우고 나서 좋아 진 것 아닌가요? 그럼 당신들이 말해 보세요. 파룬궁이 도대체 어디가 나쁜가?”라고 하자 그들은 “어찌됐던 정부가 나쁘다고 하면 나쁜 것이지 뭐, 우리는 정부의 말을 들을 거야.”라고 하였다.


내가 각서를 쓰지 않는 것을 알고 그들은 즉시로 떠났다. 나는 그들을 붙잡고 그들과 같이 집에 가겠다고 하면서 죽어도 여기에 있지 않겠다고 하였다. 소장 양**는 이런 상황을 보고 나를 만류하면서 “중팡츙, 인내성 있게 15일만 기다려,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라고 말했다. 바로 사부님이 <워싱턴 DC 국제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말씀한 것처럼“사악 그것이 어떻게 악독한가 만을 보지 말라. 지금 그것은 이미 있는 술수를 다 쓴 것으로 단지 성질을 규정(定性)하는 것을 끊임없이 승급시키는 것과 여론에서 가짜를 조작해 내고 변태적인 심리로 줄곧 그런 수련생들을 핍박하여 무슨 회개서(悔過書)를 쓰게 하고 무슨 싸인을 하게 할 뿐이다. 가짜이고 사람의 마음을 개변 시키지 못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왜 기어코 이처럼 하는가? 왜 기어코 당신더러 그 싸인을 하라고 하는가? 왜 당신이 기어코 연마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야만 비로소 당신을 풀어주는가? 이쪽에서 연마 한다면 유죄판결을 하고 저쪽에서 연마하지 않는다고 한마디 말을 하면 사람을 풀어줄 수 있는데 이 차이가 너무나 큰 것이 아닌가? 정상적인가? 정상적이 아니다. 그건 아주 뚜렷하지 않는가? 바로 당신더러 떨어지게끔 하고 바로 당신더러 그 한 마디 말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10일 오전 9시쯤에 갑자기 나를 찾았다. 나는 또 무슨 일이 생겼겠지 라고 생각하였다. 문 앞까지 가서야 경찰 위따핑을 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 “가서 짐을 챙겨 집에 갑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감방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였다. 같이 있었던 두 대법제자는 나를 보고 “ 15일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라고 묻자 나는 “원래부터 불법인데 규칙상으로 하면 하루도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야.”라고 대답 했다. 후에 그 중 한 여자 아이 펑소윈이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잡혀 들어갔는데 매우 견정하게 나서서 사악을 저지하였다고 들었다. 그녀는 청두전자과학기술대학(成都電子科技大學)를 졸업하였다.


신분증 풍파

내가 집을 산 후 바로 불법 노동 수용소에 들어간 탓에 집에 관한 문서를 처리하지 못하였다. 내 어머니는 9살 애를 데리고 살면서 여기에 관하여 알지 못해 그때까지 방치하여 두고 있었었다. 집문서를 정리하려면 신분증이 필요하였는데 내 신분증은 처음으로 북경에 갔을 때 경찰서에서 몰수 하였으며 파출소에 가서 다시 발급을 받아야 했다.
11월, 나는 호적이 있는 룽탄스(龍潭寺)파출소에 가서 담당 경찰 랴오유량을 찾았다. 그는 만나자마자 “지금 어때요?”라고 물었다. 나는 “지금 집에 돌아와서 많이 나아졌고 오늘 와서 신분증을 재발급 받아서 등기를 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럼 이 일에 대한 인식을 써 오세요.”라고 하면서 종이와 펜을 주었다. 나는 앉아서 진지하게 써내려 갔다. : 파룬궁은 나에게 건강과 생명을 주었다. 그러나 장(江)씨 집단의 박해를 받아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어 집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는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좋다. 법륜대법(法輪大法)는 유례없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 나는 더욱 견정하게 수련을 하려고 한다. 이런 내용을 써내려 갔다. 그는 이것을 보고 노발대발하여 말했다. “이런 인식이면 지금이라도 감옥에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 나는 즉시 일어나 위엄있게 말했다. “당신이 문제 삼을 일이 아니야! 당신 같은 경찰들은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는데 내가 거짓말하는 걸 들어야만 당신 마음이 편하겠어?” 저는 계속 정념으로 저지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그럼 이것을 개인 파일에 보관하여 둘게요.....”라고 하였다.


등기소(辦證中心)에 갔더니 직원이 말하기를 아직도 많은 신청서와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또 룽탄스 파출소에 갔다. 전에 있던 랴오 경찰은 회의를 하고 있어 나 더러 사무실에 가서 도장을 찍어도 된다고 하였다. 나는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계속 발정념을 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서 인사를 하고나서 자신을 소개하고 온 목적을 말했다. 그들은 듣고 놀란 표정으로 “당신이 바로 중팡츙인가? 당신 때문에 우리가 수많은 반성문을 썼고 늘 상사의 비평을 받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본인을 보네.”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법을 얻은 후로 몸이 좋아진 사실과 강제 노동 교양소에 들어간 원인을 알려 주었다. 그들은 나의 말을 듣고 동정하면서 “당신은 참 능력도 좋은 사람이야. 이런 능력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 사무실에 좀 기부하여 보기에 좀 좋게 하면 좋지 않는가? 지금 당신의 상황을 봐 너무 그렇지 않아? 돈도 없고.”라고 했다. 저는 “그렇지! 만약 내가 장(江)씨 집단의 박해를 받지 않고 운수사업을 계속했다면 이 몇 년 사이에 운수 사업이 많이 발전하여 수십만 위안 버는 것은 문제없지요.”라고 답하였다. 신청서를 쓸 때 나는 사실대로 적으려고 했다. 그들은 “북경에 가서 청원을 하다가 주민등록증을 몰수당했다고 하면 안 되고 잘 못하여 물에 빠졌거나 불에 태웠다고 쓰세요.”라고 말 했다. 나는“사부님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라고 하였다. 옆에있던 누군가가 “이것만 보더라도 난 파룬궁이 좋다고 생각해!”라고 말하였다. 결국 아주 순조롭게 신분증을 받고 돌아왔다.

(다음에 계속)

문장 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 발표: 2004년 7월 20일
문장 갱신: 2004년 7월 22일
문장 분류: [인심과 인과]
문장 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20/79562.html



논-픽션 <질풍경초(疾風勁草) > (6)

글/중팡츙

[명혜망 2004년 7월 21일] (이전 글에서 이어짐)

제 5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머리말: 박해를 반대하며 또 한번 정념으로 사악의 음모를 제지하다.

제1장 정념으로 경찰의 악행을 제지하다.


-족제비가 세배를 하다

매 년 명절이나 4.25, 7.20등 민감한 날짜가 되면 파출소 경찰이나 주민 위원회, 610사무실에서는 각종 명분을 만들어 대법제자를 괴롭혔다.

2001년 12월 22일 완낸창 파출소 경찰 웨이다핑은 사무실 주인 리챵쥔과 달력을 준다는 명분을 걸고 ‘보러’ 왔으며 26일 부녀위원회 주석이 나를 ‘보러’왔다. 28일에는 완낸창 파출소 사무실 그리고 청화구 정치법제위원회 서기 허우웬 등 몇 사람이 집에 와서 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나는 인내성 있게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28일 밤 중 12시에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문 밖에 사람이 손으로 도어 스코프(확인창)를 가려서 나는 복도에 불이 안 켜져 있나 보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열자 갑자기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완낸창 파출소 사무실 주민위원에서 온 사람들 이었다. 주민위원회에 새로 임명된 주임과 웨이다핑은 즉시 내 아들 방에 들어가더니 책상 위에 있는 <전법륜>과 사부님 사진, 경문 한 편을 몰수 하고 나를 파출소로 끌고 갔다. 다음날 나는 강제로 피현 구치소에 불법 압송되었다. 의사가 와서 신체검사를 하였는데 나는 의사보고 “제 몸에 옴이 심하여 접수하면 안돼요.”라고 하였으나 의사는 “어떠한 병이 있어도 우리는 모두 접수야.”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는 한 달 동안 불법 구류되었다.


-꿈에서 금방 깨어난 어린 이씨(小李) 간사(幹事)

2001년 12월 29일 피현 구치소에서 어느 감방에 40여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대법제자가 12명 이었다.

월요일 오후, 감방장(牢頭)이 나더러 나오라고 했다. 내가 방문을 나가자 여(20) 경찰이 큰 소리로 나를 보고 ‘쪼그리고 앉아라!’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서서 마주 보면서 발정념을 하였다.

2분이 지났다. 그녀는 다시 “쪼그리고 앉으라 했는데 못 들었어!?”하고 고함을 쳤으나 나는 조용히 그녀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녀를 향한 발정념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면서 감방장을 향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귀머거리야, 아니면 벙어리야, 왜 말을 하지 않아!”라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감방장은 겁이 나서 얼굴색이 변하였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내게 와서 “언니, 말하세요. 이분은 여기 간사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다시 2분이 흘러갔다. 나는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말하는 것이 생김새와 너무 다르네요?” 라고 하자 태도가 돌변하면서 호의적으로 말하였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들은 너무 힘들어요.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야근을 하고 매일 80여 명이 드나드는 것을 관리하여야 하니 한 시도 쉴 수가 없어요.” 라고 하였다. 나는 “매일 범인과 실랑이를 하는 것이 무척 짜증나는 줄은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억울하게 여기에 갇혀 있는데, 본래 여기에 있지 말아야 할 사람들에요.”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녀의 말도 많이 부드러워 졌다. “몇 번이나 구류되었던 겁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한 번 알아 맞혀 봐요.”라고 하자 그녀는 “3번, 5번?” 하고 물었는데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음 놓고 농담하듯 물어보기를 “아무래도 10번은 되지 않겠죠?”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엄숙한 표정으로 “구류 13번, 1년 강제 노동교양, 3개월 추가.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강제 노동교양을 받았었다고요? 우리들이 회의를 할 때 영도가 분명히 강제 노동 교양소에서 ‘전화’된 사람이 100%에 달한다고 하였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안심하라고 하는 거짓말이고 만약 영도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면 지금 난 네 앞에 서 있지 않을 거 아닌가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여기에 들어 왔지 않았습니까?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이 몇 년 동안 장사도 못하고 감옥살이를 하겠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거짓말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내게 일어난 일에 관한 얘기를 계속 들었다. 그녀는 나의 얘기를 듣고 호의로 “돌아간 후에 조심하세요. 다시는 여기에 들어오지 마세요.”라고 하였다. 나는 “우리가 만날 곳은 여기가 아닐 겁니다. 전 조카딸이 있는데 나이는 당신과 비슷한데 예쁘게 생겼어요. 이담에 친구로 사귀어 우리 집에 놀러 와요.”라고 말하였다.

감방에 돌아가자 어느 대법제자가 내게 말하기를: “당신 이만 저만이 아닌데. 어떻게 이 간사를 다 설복시켰어요? 당신 알아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녀를 무서워한다고요. 그들은 (범인) 말을 걸다가 이 간사에게 발각되면 무조건 TV를 끄고 감방 규칙을 20번 써야 돼요! 당신이 일찍 왔으면 좋았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감방에 경제 문제로 들어온 사람(기업의 사장)이 있었는데 밖에서 증거를 수집하다 경찰과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경찰은 “안에서 지내기가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안에서 파룬궁 덕분에 같이 말도 하고 하여 마음이 편하고 시간도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낸창 파출소에서 온 중팡츙과 같이 있어요.”라고 하자 경찰은 “그 사람은 대단한 인물이야, 견정하고 강인한 사람이지.” 라고 하였다


-떳떳치 못한 경찰

아침에 나는 바람 부는 둑 위에서 눈을 감고 2장 공법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에 통증이 와 눈을 뜨고 보니 누군가 나를 찌르는 것 이었다. 행동이 이상한 경찰이 긴 대나무 막대기로 나를 찌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말은 하지 않고 내가 쳐다보자 도망쳤다.

어느 날 밤 12시경에 당직을 하고 있던 소장이 문을 열더니 대법제자인 텐(田) 아주머니를 보고 짐을 싸라고 하였다. 나는 소장을 보고 “소장님 보세요. 이것이 경찰이 하는 짓입니까? 매 번마다 밤에 사람을 집에 데려가고 왜 낮에는 데리러 오지 않아요? 민중들이 보고 경찰이 착한 사람만 잡아간다고 분노를 일으킬 염려가 있어서 하는 짓이지요?” 라고 묻자 소장은 묵묵히 답이 없었다. 급히 짐을 싸고 있던 텐(田)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오늘은 너무 늦어서 돈을 찾지 못하겠네. 내가 통장을 줄 테니 네가 올 때 좀 갖다 줘! 부탁해.”라고 말했다. 나는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라고 하면서 통장을 받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소장이 “당신은 매일 앉아서 입장(발정념을 가리킴)이나 하고 이렇게 해서 집에 가겠나?”라고 물었다. 나는 “며칠 후면 집에 꼭 갈 거에요. 내가 집에서 연공하고 발정념을 하면 당신들 눈에 보이지 않을 것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소장을 할 말이 없다는 듯 문을 닫고 가버렸다.


-수련은 만일의 경우가 없다

어느 날 오후에 감방의 문이 열리더니 감방장이 “언니 또 동수 한 명이 들어 왔어요.”라고 알려 주었다. 이 분은 문을 들어서자마자 “당신은 어느 구에서 왔으며 그는 어느 구에서 왔는가?” 물었다. 결과 청화구에서 온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청화구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가지 못해! 구치소에서 기한이 되면 수용소에 가고, 수용소에서 기한이 되면 다시 구치소에 돌아오는 거야. 구치소에 가보면 대부분 청화구에서 온 사람들이야. 모두 반복하여 구속되는 사람들이지. 나 자신도 청화구에서 왔어! 바로 수용소에서 이송하여 온 거야.”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말했다. “난 그런 헛소리를 믿지 않아! 난 꼭 집에 돌아가야 돼.”

우리 중에 다음 날이면 만기가 되어 집에 갈 수 있게 된 50여세 된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여태 쓰던 물건을 남겨두고 내일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는 긴장되어 “내일 가더라도 모든 짐을 다 챙겨야겠어! 만일 집에 가지 못하면 어쩌지?” 라고 말했다. 나는 “아주머니의 그 일념은 틀린 것이에요. 수련은 만일이 없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계속 피현(郫縣)의 세뇌반에 남아 있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시멘트 바닥에서 잔 결과 심한 류머티즘에 걸렸고 등이 아파서 허리를 굽히지 못하였다. 다리는 류머티즘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으며 장기간 기침을 하였고 체중이 급격히 줄어 본래 모습을 잃었다. 집의 가족들이 와서 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아 가족들은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였다. ‘세뇌반’에서 보낸 시간도 1년이 지났다. 2003년 2월, 아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어 어머니를 위하여 시정부에 가서 두 번이나 청원(上訪)을 시도하였다. 시장을 찾아 어머니를 구하려 했지만 도리어 파출소에 잡혀간 후에야 석방되었다. 아들은 “어머니도 구하지 못한 아들이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란 생각에 죽겠다는 마음을 품고 술을 먹고 취한 후,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자살한다고 하였다. 전화를 걸고 창문을 닫고 가스를 틀어...... 경찰이 쫓아 왔을 때 그는 이미 입에서 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경찰은 인명 사건이 발생할까 봐 두려워하여 박해를 받아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된 숨만 붙어 있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 왔다. 나는 한달 동안 구류되었다가 경찰 웨이다핑 사무실 주임 이챵쥔이 나를 파출소로 데려 갔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소장 란(冉)**는 이렇게 내게 물었다. “중팡츙, 돌아가서 어떻게 할 작정인데?” 나는 “의연히 쩐(真), 싼(善), 런(忍)의 이치로 나의 일언일행을 요구하지요.”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듣자 그는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대노하여 “다시 잡아들여!” 라고 고함을 치면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걸상에 앉아 있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일어서며 손으로 책상을 쳤다. 나는 당당하게 말하기를 “당신이 결정할 수는 없어요, 나는 오늘 곧바로 집에 돌아갈 겁니다.”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경찰 웨이다핑은 이런 상황을 보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달려와서 나를 잡더니 “잠깐만 기다리면 동생에게 연락하여 데려가라고 할게.”라고 말 했다. 나는 “내 동생은 장사하느라 바빠요! 시간 없어요! 난 혼자 갈겁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걸상에 앉아 집에 돌아가는 일념을 더 확고히 하였다. 시간이 좀 지나 경찰 웨이다핑은 “중팡츙 잠깐이라도 대기실에 있어 그러면 풀어 줄게. 란소장님의 체면을 좀 봐 줘! 파출소 24시간 대기실에 있으면서 조사하라는 명령에 란소장이 사인했어!”라고 하였다. 나는 “체면? 체면을 세워 달라구요? 그럼 누가 나의 사부님의 체면을 세워 주었습니까? 그 누가 대법의 체면을 세워 주었습니까? 그리고 누가 나에게 체면을 주었어요? 속인 사회에서 난 그보다 더 신분이 있는 사람이고 지위가 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서 란소장과 면담할겁니다.” 라고 하자 그는 “란소장은 회의 중이야” 라고 하였다. 가보니 확실히 회의 중이었다. 나는 웨경찰이 일하는 사무실에 돌아가 조용히 걸상에 앉아 란소장을 향하여 발정념을 하였다.

5시쯤이 되자 동생은 나를 데리러 왔다. 이것을 본 란소장은 “중팡츙 소문을 들으니 집을 잘 꾸며 놓았다던데, 나도 같이 가서 한번 보자!”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는 집에 돌아왔다.




제2장 인권 박해


-행동을 감시하다

집에 돌아 온 나는 란**소장의 결정에 의해 매일 저녁 9시에 집 전화로 당직실에 전화를 걸어 행방을 보고해야 하였다. 일이 있어 청두를 떠나려면 반드시 보고를 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걸면 거는 것이지 뭐? 그들도 장(江)씨 집단의 박해를 받아 불쌍한데...”라고 생각하였다. 구정이 다가 왔다. 몇 년 동안 고향에 가보지 못한 나는 고향 생각이 났다. 이 일을 말하였더니 가도(街道) 주임 이챵쥔은 “위에 보고하여 결정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단계별 허가를 받고 가도 위원회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고향 땅을 밟게 되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파출소 소장 란**는 “돌아간 후에 매일 전화로 파출소나 이 주임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해야 한다.”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모두 그들이 나의 행동을 장악하려는 것 이었다. (나중에 가서야 나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청두를 벗어날 때 그들에게 보고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그들의 지시대로 한다면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 연공인이 또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라고 생각하였다.

3월에 나는 일이 있어 보고를 하지 않고 고향에 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저녁에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는데 란**소장이 당직을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전화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휴대폰으로 건 것임을 알고는 “지금 어디에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젠양 고향에 있어요.”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언성을 높이며 “누가 허락하였는데?”라고 물었다. 나는 “내 마음입니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가도 사무실 주임 이챵쥔으로부터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건 전화에서 그는 강경한 어조로 “누가 가는 것을 허락하였어?”라고 물어서 나는 전화를 꺼 버렸다. 집에 돌아가서야 어머니는 나에게 “이챵쥔이 아침 일찍 왔는데 난 그저 네가 일이 있어 고향에 갔다고 하고 가능하면 오늘 온다고 하였다. 오후 1시에 이챵쥔은 또 왔다가 네가 돌아오면 파출소에 가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또 와서 네가 돌아와서 파출소에 가지 않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고 저녁 6시에 와서는 ‘아직도 오지 않았는가?’고 묻자 돌아 왔는데 일보러 나갔다고 .”라고 알려 주었다. 저녁 8시에 또 우리 집에 왔는데 내가 집에 있는 것을 보고 돌아갔다.


-인신자유를 제한하다

2000년 5월부터 지금까지 내가 집에 있거나 없거나 집의 가족과 나를 모두 감시하여 왔다. 완낸창 파출소소장 란**는 매일 저녁 9시에 반드시 집 전화로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보고 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일이 있어 청두를 떠날 때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모두 정념으로 부정하였다.

2003년 5월11일은 엄중한 박해를 받아 반신불수 상태로 된 내가 정상으로 회복되어 문을 나선 첫날 이었는데,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아들에게 신발을 사주려고 나갔다. 이 일을 사보안이 보고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보고 하였다. 결국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2층에 올라서자마자 파출소 경찰과 사무실의 이챵쥔에게 잡혔다. 그들을 보고 나는 “어디에 가는 길이오?”라고 묻자 그들은 “당신을 보러 왔어.”라고 했다. 나는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챵쥔은 3층의 나의 방문을 열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당신들은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닌가요. 여기서 얘기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꼭 방에 들어오려고 하는데요?”라고 하자 이챵쥔은 “문을 열어 들어가서 이야기 할게.”라고 하였다. 나는 “방문을 열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챵쥔은 “그럼 당신이 얼마나 버티는가 보자. 우리는 여기에 서서 기다릴 테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하기를 “몇 년 동안 난 당신들을 친구처럼 대해 주었어요! 매번 어떠한 이유로 나의 집에 왔던지 간에 난 모두 과일과 녹차를 드렸고 힘들게 당신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었어요! 그런데 나에게 돌아 온 것은 무엇인가요? 2년 동안의 감옥살이, 혹형, 두 번이나 생명을 잃을 번 하였는데, 지금 나는 경험을 쌓았으니 다시는 당신들이 집에 들어와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겠어요!”라고 하였다.

이챵쥔은 “도대체 문을 열거야 안 열거야!”라고 위협하듯 말했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안 열어요! 방에 들어와서 뭘 하려고 합니까? 당신들이 방에 들어 갈 때 마다 사람을 납치하지 않으면 물건을 가져가고 하였어요! 무슨 좋은 일을 한 적이 있어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경찰은 급히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어! 중팡츙 다시는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마. 당신 때문에 웨이다핑이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야 부부가 모두 실업하였고 아들이 당신 아들만 한데 ..... 그래서 보러 온 거야.”라고 하여 나는 “내가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박해하면 악보를 받기 마련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경찰은 계속하여 “이주임 이 분이 문을 열지 않으면 여기서 말하지요.”라고 하였다. 이챵쥔은 “그럼 좋아, 중팡츙 잘 들어! 지금부터 ‘런허왠’을 한 발자욱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일어난 일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나는 반문하였다. “누가 결정한 겁니까, 증거를 내놔요! 만약 증거가 없으면 글이라도 쓰던지요? 이러면 내가 고발할 때 증거라고 있지요! 도대체 그 어느 누가 중팡츙의 인신의 자유를 침범하는가 봅시다.”라고 하자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 우물쭈물하다가 가버렸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 후 나는 산책하러 나갔다. 보안 요원인 천 씨는 어떤 할아버지를 시켜 나를 미행을 하더니 후에 전화를 걸어 사무실 주임 이챵쥔에게 알렸다. 이챵쥔은 급히 택시를 타고 왔다. 그는 저는 완낸창 “국미”백화점에서 나를 강제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그들의 무리한 행위를 견결히 제지 하였다. 이챵쥔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고 나를 때리려고 시도 하였으나 주위의 사람들이 볼까 봐 보안을 시켰다. 청도은하창신 회사의 당직하는 보안이 이창쥔의 지시를 받고 나를 때리려고 하자 나는 “누가 감히 좋은 사람을 때려요!”하고 말했다. 결국 그는 나의 정념에 억제되어 손을 대지 못하였다. 후에 이챵쥔은 나를 집으로 강제로 끌어갔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장쩌민은 이미 여러 나라 대법제자로부터 다른 나라에서 기소 당하였고 그를 따라 나쁜 일을 계속한다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챵쥔은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오자 이챵쥔은 천과 샤 두 보안에게 “집을 한발자국도 떠나서는 안 된다. 만약 듣지 않으면 때릴 거야! 사건이 벌어 지면 내가 책임져!”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나는 “누가 감히 사람을 때려요! 이것은 인권침해야 당신이 결정할 수 없어요, 내 일은 내가 결정을 내릴 겁니다. 밖에 나가고 나가지 않는 것은 나의 자유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와 이챵쥔은 집 대문에서 오랫동안 논쟁을 했지만 결과가 없었다. 날이 저물자 이챵쥔은 할 수없이 집에 돌아갔다.


-30만 위안이 11,500 위안으로 변하다

장쩌민이 1999년 7월 20일부터 전면적으로 전국에서 파룬궁을 탄압하여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경제상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나는 원래 재산이 70만 위안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집 한 채와 자가용을 산 돈을 빼고 94년부터 97년까지 노후대책으로 38만 위안을 당지 지방정부에서 개설한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사들였다. 99년 10월 수련한지 6개월 만에 나는 쥬루춘 구치소에 구치되는 기간에 주식은 변질한 도박이라는 것을 깨달고 (나는 수련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도박을 하면 안된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 30만 위안 되는 주식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나는 주식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 아는 사람에게 처리하여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어서 3년이라는 기간을 나는 장기적으로 불법으로 강제 노동 교양소에 구치되어 있었고 반복으로 구치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2002년까지 지속되어 후에 박해를 받아 떠돌아다니는 동안 생활이 힘들게 되자 전에 주식을 부탁하였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분이 말하기를 장기간 주식을 관리하지 않아 30만 위안 되는 가치가 지금은 11500 위안 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그 중에서 나의 불법강제 노동교양기간 동안 어머니와 아들의 생활비며 등록금 10000 위안을 떼면 1500 위안이 남을 것 이었다.

내게 남은 1500 위안이 떠돌아다니는 기간의 명줄이 된 셈이었다. 이 돈으로 3개월 집세를 내고 3개월 생활비로 쓰려고 하였다. 하지만 뜻밖에 며칠 후 청두시 광룽파출소 경찰 장쯔등 열 몇 명이 집 수색을 할 때 강제로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내가 보유하고 있던 자가용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매달 관리비용만 나가고 하여 싼값에 팔아버렸다.


-연루

장(江)씨 집단은 탄압에서 연좌제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대법제자에 대한 잔혹한 형벌 이었다. 1999년 11월, 나와 9년 동안 거래를 해 왔던 회사는 압력을 받아 나와의 합작을 포기해야 했다. 이리하여 매달 1만 위안에 달하는 수입이 없어졌다. 나는 직업을 잃었고 어머니는 시골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라 퇴직금도 없었다. 온 가족이 경제적인 수입원이 없어진 것이다. 아들은 중학교 1학년을 다녀야 하는데 단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도시 호적을 올릴 수 없어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 많은 돈을 내고 공부해야 했다.(한 학기에 3000위안, 학비 잡비 제외)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지금 살고 있는 100여 평의 큰집을 다른 사람에게 세를 내주고 가족과 같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작은 집에 살면서 그 차액으로 생활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우리 온 가족이 이러한 곤경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괴롭힘은 계속되었다. 티오덩허(현재 파출소 합병)파출소 경찰, 런허왠의 경찰 손융, 류잉팡 등은 몇 번이나 내 동생의 가게에 와서 괴롭히며 위협하였다. “당신 누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수배령을 내릴거야.”라고 하면서 “당신 누나 집은 세를 놓아도 안돼! 누가 이사하여 들어가면 내쫓을 거야.”라고 하면서 종일 집 아래에서 감시하며 세 놓는 것을 방해하였다.


-온갖 생트집을 잡아 방해하다

2003 년 4월 아들이 중학교를 가는데 도시호적이 필요하였다.(지금 아들이 가지고 있는 호적은 농촌 호적이다) 국가 규정에 의하면 ①90평 이상의 도시 집을 사면 두 사람의 호적을 신청할 수 있다. ②자녀는 아버지를 따라 호적을 올릴 수 있다. 라는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적을 관리하는 경찰 웨이다핑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괴롭혔다. "당신의 집은 집문서를 신청하지 않아서 호적을 못 올려!"라고 하여 나는 '아들이 학교 다니는 것인데 3000위안을 빌려서라도 집문서부터 하자'라고 생각하여 서류를 밟기 시작하였다. 웨이다핑은 계속하여 "먼저 토지 증명서를 내고 집문서를 내야 하는데 대개 2만 위안이 들어.”라고 하였다. 나는 경제적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더는 돈을 빌려 토지 증명서와 집문서를 낼 수 없었다. 더 이상 산더미 같은 빗이 가져다 준 정신적 압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 명의로 아들의 호적 문제를 해결하려던 길이 장(江)씨 집단에 의해 막혀 버렸다.

아들이 학교 다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생을 시켜 아들도 모르는 나와 10년 별거한 남편을 찾아 아들의 호적을 그한테로 올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재지 집도 허문 것이어서 그도 역시 세를 내고 사는 형편이다. 그의 호적도 옮겨가야 하는 판인데 아들의 호적을 그가 있는 곳에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후에 생각하여낸 방법은 아들 아버지의 호적을 내가 살고 있는 완낸창 파출소로 옮기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 하면 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경찰 웨이다핑은 "반드시 아버지가 사는 파출소에 가서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는 증명을 떼야 한다."고 말하여 주었다. 증명을 가져다주었으나 웨이다핑은 또 "아들 아버지의 회사에서 그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고 증명해야 한다." 고 알려 주었다. 또 증명서를 떼어왔지만 이번에는 "아들 아버지가 사는 주민위원회에서 그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 라는 증명을 하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나에게 생트집을 잡는 것이 아닌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쩐, 싼, 런(眞, 善, 忍)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으로 되려고 하는 것이 죄가 있단 말인가? 여성, 아동보호법은 말로만 그쳐도 되겠는가? 밖에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주민위원회에서 뭘 안다고 증명을 하여 줄 것인지? 그리고 그전에 있던 호적도 돈으로 산 것이라, 호적을 올릴 수 없었다. 학교에서 통지서가 왔는데 이번 학기에 반드시 나머지 비용 만 위안을 모두 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해마다 9000위안을 내야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비싼 등록금을 놓고 나는 학교 보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학교를 다니지 않을 수는 없다. 그는 필경 12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애다. 문제는 이와 같이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아주 많고, 학교를 중단해야 하는 애들도 아주 많으며,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가정도 아주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회 각 계층에 많은 도움을 보내어 나의 집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특히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며 진정하게 인권을 체현시켜 모든 어린이들로 하여금 유쾌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한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협하다

집에 있지 않으면 나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하여, 완낸창 가도 사무실 주임 이챵쥔은 계속 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나의 어머니를 5번이나 협박하였다.

2003 년 2월 박해를 받아 침대에 누워있었고 언니도 병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70세 되는 어머니는 비통을 참고 나를 보살폈다. 11살 밖에 되지 않는 아들도 초등학교 6학년이라 힘들고 고된 공부를 밤늦게 하고는 나의 기저귀를 갈아 댔고, 더운 수건으로 다리와 발의 딱딱한 살을 찜질하여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경찰 웨이다핑과 진씨 보안은 나의 집에 뛰어 들어와 나를 괴롭히면서 가지고 있는 대법 책을 몰수 하고 나를 체포하려고 했다. 우리는 정념으로 그들의 악행을 제지하여 나서자 그는 책을 돌려주었다.

웨이 경찰이 간 후에 어머니는 나에게 알려주기를 "네가 간 후에 그들이 몇 번이나 여기에 와서 괴롭혔어"라고 하였다. 사무실 주임 이챵쥔과 웨이다핑은 3000위안을 내라고 위협까지 하였는데 어머니는 "지금 밥도 못 먹는 형편인데 돈이 어디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이챵쥔은 "그러면 TV와 세탁기를 다 팔아야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람은 이러하다. 웨이다핑이 나에게 "난 위에 늙은 노인이 계시고 밑에는 애가 있어 방법이 없네! 만약 중팡츙이 매달마다 나에게 2000위안을 주면 당신을 위하여 일할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말에서 그들의 모든 행위는 돈을 위해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江)씨 일당은 바로 국민이 피땀으로 번 대량의 돈으로 이런 사람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악인을 도와 나쁜 일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돈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마음으로 대법을 수호하고 있다.

완낸창 파출소 사람들은 몇 번이고 나의 집에 와서 위협하고 괴롭혔다.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걸음을 좀 걷자 2003년 4.25 직전에 나를 찾으러 왔다. 점심 때라서 객실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웨따핑과 이챵쥔은 갑자기 집에 들어오더니 나를 납치하려고 하였다. 나는 발정념을 하여 그들의 배후에 조종하고 있는 사악을 제거하기 시작하였으며 나는 주불의 제자다. 다른 어떠한 배치도 요구하지 않고 승인하지 않는다는 강한 정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때 아들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의 집에 와서 아들 호적 문제를 논의 하려고 들어섰다. 이것을 본 그들은 아들의 아버지에게 신분증 출시를 요구하였는데 "신분증은 집에 있어!"라고 아들의 아버지가 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같이 가서 신분증 확인하러 집 문을 나서게 되어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되돌아 왔는데 두 사람은 문 밖에서 고함을 지르며 벨을 누르고 전화까지 하면서 문을 발로 찼지만 나의 정념에 제지 되였고 더 이상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번의 위험은 이럭저럭 넘어갔다.

2003 년 7.22 전날 오후에 광룽아파트 단지 사무실에 있는 두 사람이 집에 와서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나는 정념으로 사악을 제지하면서 문을 열지 않았다. 저녁 11시에 파출소 리커(李科, 발음대로 썼음) 등 두 명이 또 집에 와서 문을 열라고 반 시간 이상 괴롭히었다. 나는 도어 스코프(門鏡)에서 내다보니 파일을 뒤지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기록된 사람을 찾아 대법제자를 감금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문을 열지 않으면서 정념으로 제지 하였다.

7.22일 11시가 넘어서 집을 나서자 2층 계단에서 완낸창 파출소 경찰이 찾아온 것을 보았다. 경찰은 문을 열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경찰은 "중팡츙, 요즘 어디에 나간 적이 있어? 집에 책은 아직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나가지. 매일 나가서 일을 보고 있어. 지금 바로 일이 있어 나가는 중이예요?"라고 하면서 계단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경찰도 저와 같이 내려갔다. 경찰은 앞에서 있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얼마 내려가지 않았는데 완낸창 파출소 소장 란**가 경찰을 데리고 아파트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나를 납치하려고 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매우 자연스럽게 그들이 계단을 오르지 못하게 하는 정념을 발하고는 3층 집으로 올라가서 문을 닫고 발점념을 하였다. 시간은 정확히 모르는데 얼마 후에 그들은 가버렸다.

10월 1일 오전에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 집에 와서 나를 괴롭혔다. 도오 스코프로 보니 알지 못한 중년 남자였다. 경찰이라고 짐작하고 정념으로 제지하였다. 경찰은 장기적으로 시간과 때를 가르지 않고 와서 괴롭혔고 우리도 조건반사가 되어 문 벨이 울리거나 전화가 울리면 먼저 경찰인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문으로 가는 동안 발정념을 하면서 문 벨을 누르는 사람(그들을 시키는 사람을 포함)이나 뒤에 있는 사악한 것을 제거한 후에 도어 스코프에서 보고 문 열 것을 결정하였다. 어머니와 애는 몇 번이고 나를 납치하는 현장을 목격하여 문 벨이 울리면 습관상으로 공포감을 느껴 아들의 어린 마음에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


-불법으로 집을 수색하고 감금하다

몇 년 동안 경찰은 나의 집을 5번이나 불법 수색을 강행하였으며 그중 4번은 아무런 서류를 제시 하지 못하였다. 완낸창 파출소 경찰은 합법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는 불법으로 많은 것을 강행하였으며, 대담하게도 그들이 증인으로 내세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폭행하였다.

경찰은 매번 나를 불법으로 납치 할 때 마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썼으며 강도와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대법에 관여한 모든 물건을 가져갔을 뿐 더러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집에 있는 물건을 훔쳐갔다. 2002년 9월 박해로 인하여 떠돌아다니는 동안 완내창 파출소와 주민위원회는 악행을 그치지 않고 불법 수색을 강행하여 주민위원회 주임은 집에 있는 에어컨에 쓰는 선을 가져갔다. 후에 어머니가 경찰 웨이다핑을 재삼 추궁하서야 비로소 내 동생이 되찾아왔다. 그들은 심지어 11살 나는 아들의 570위안 세배 돈을 훔친 적도 있었다.

나에 대한 불법 구치는 밥을 먹는 듯 하였고 무법천지였다. 나는 대략 통계해 보았는데, 1999년 7.20 후로 약 38개 단위나 소속기관이 박해에 동참하였으며 불법 구류는 29차례이고 총 날짜 수는 743일에 달하였다. 그중에서 형사구류는 4차례이고 93일이며, 치안구류는 10차례이고 140일이다. 그 중 치안구류는 10차례이고 140일이다. 감금, (북경주재 사무소, 칭양구 마약제거 중심, 올림픽체육장 완낸창 파출소) 13차례이고 25일이다; 아무런 허가 없이 형사고문이 1차례이고 30일이다,(바이푸룽 호텔 및 병원). 강제노동교양 1차례, 아울러 기한을 3개월 초과하였고 455일이다.

내가 뒤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후에 내가 잔혹한 박해를 받아 두 번이나 생명을 잃을 번 한 사연이다.

(다음에 계속)

문장 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 발표: 2004년 7월 21일
문장 갱신: 2004년 8월 8일
문장 분류: [인심과 인과]
문장 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4/7/21/79563p.html


논-픽션:< 질풍 경초(疾風勁草) >(7)

문장/중팡츙(钟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22일】

제6부 대법 중에서의 바른 믿음

머리말: 정법 중 나는 대법의 신기함을 몸소 체험했다. 

제1장 도깨비 세상

-경찰과 강도

요즘 민간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하고 있다. 옛날 도적떼(土匪)는 심산 속에 있었는데 지금 도적떼는 공안내부에 있다. 십악(十惡)에 독해된 이 세상은 정말 너무나 엉망진창이다. 동수가 진상자료를 나누어 주다가 잡혔는데 나도 말려들었다. 2002년 4월 2일 오전, 호적관리경찰(戶警) 웨이다핑(魏大平)이 내가 파출소에 도착 신고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출소에 데려다 놓고 전화를 걸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때 청화(成華)구 610, 완낸창(萬年場)파출소, 사무소와 젠양(簡陽)시 610, 국안대(國安隊), 윈룽전(雲龍鎭) 파출소 등 10여 명이 우리 집을 벌컥 뒤집어 놓았는데 심지어 베란다에 놓아둔 타구[역자주: 가래나 침을 뱉도록 만든 그릇]도 뒤져 보았다. 내가 집에 돌아갔을 때 집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영화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다. 어떤 경찰은 계속 트렁크와 옷장을 뒤집으면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기회를 타 이득을 보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먼저 번에 집을 수색하면서 집수리하고 남은 에어콘선 한 묶음을 가져갔다.) 갑자기 핸드폰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떤 사람은 못 봤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전에 확실히 보았으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들은 웨이다핑과 다른 한 경찰에게 억지로 나를 3층에서 끌어 내리라고 하였는데 나의 두 무릎과 발등이 계단에 긁혀 피가 났다. 끌려가면서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경찰이 좋은 사람을 붙잡아 가요. 경찰이 좋은 사람을 붙잡아 갑니다... ..."

우리 집 아래층에는 찻집이 있는데 그때 진상을 모르는 군중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주고 천안문 분신사건, 쓰촨(四川)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나를 모함한 사실, 경찰들이 집 수색하는 기회를 틈타 나의 핸드폰을 훔친 사실 등을 이야기 했다...

호적 경찰 웨이다핑 등은 내가 진상 이야기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다. 사악은 워낙 노출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억지로 나를 경찰차에 밀어 넣으려 했다. 내가 단호히 협조하지 않고 계속 진상을 이야기하며 밀고 당기는 와중에 원피스 옷깃 단추까지 떨어졌다. 나중에 경찰은 나의 핸드폰을 몰래 다른 방에 갖다 놓았다. 핸드폰은 못 가져 가고 11살 나는 아들의 세뱃돈 570원을 훔쳐가 버렸다. 그들은 다시 나를 억지로 젠양시 간수소에 보냈다. 


-개가 여동빈(吕洞宾)을 물다 

나는 집에서 젠양시 간수소로 끌려갔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것이 죄가 없고 간수소에 감금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단호히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윈룽진 파출소의 현 소장 정융창(郑永强)이 한발로 나의 등허리를 밟고 있다가 (당시 나는 원피스만 입고 있었다.) 발로 감방에 차 넣었다.

비록 몸은 감옥에 있어도 나는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간수소에서 범인들에게 규정한 모든 것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 점호하고 숫자를 보고하며 감옥규칙 외우는 것을 거절하고 평시대로 연공하고 법을 외우고 입장하여 정념을 내보내었다. 이로 인하여 황씨 경찰이 원씨 보안을 시켜 억지로 나에게 차가운 수갑과 족쇄를 채웠다. 나는 의연하게 선의로써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내가 연공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에는 죄가 없다. 당신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서라도 파룬궁 수련생들을 잘 대우해야 한다." 황씨 경찰은 "아직도 감히 씨부렁거리다니" 하면서 원씨더러 큰 자물통을 가져다 나의 수갑과 족쇄를 한데 잠궈 내가 허리도 펼 수 없고 밥도 못 먹게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사회에서 접촉한 일체 사람은 모두 진상을 똑바로 밝혀줄 대상이므로 진상을 똑바로 밝히는 가운데 체현해 낸 것은 대법제자의 자비요 세상 사람의 구도(救度)이다." 라고 하셨다.(『북유럽법회 전체 수련생에게))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진상을 똑똑히 밝히는 이 문제에서 여러분은 아주 잘 하였다. 동시에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이 일 역시 위대한 것이며 자비로운 것이다. 보건대는 우리가 한 장의 전단지를 한 속인에게 주었고 보건대는 우리가 진상을 속인에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 주겠다. 만약 법을 바로잡는 일이 결속된 후에 인류는 곧 다음 장의 일로 진입할 것인데 머리 속에 "우주대법은 나쁘다"는 것을 지닌 이 사람, 이 생명은 첫 번째로 도태될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 중에서 더없이 나쁜 생명보다도 더 나쁘며 그가 반대하는 것은 우주의 법이기 때문이다."(『북아메리카 대호구법회에서 하신 설법))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나는 모든 방법을 다하여 내가 수련한 후 몸에 나타난 기적과 이 몇 년간 무단히 받은 박해를 써내어 직접 황씨 경찰에게 주면서 소장에게 전달하여 그들이 정면으로 파룬궁을 이해하고 대법제자를 잘 대해 줄 것을 요구 하였다. 그들은 본 후 선량한 마음과 동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오히려 위협하면서 "당신이 전에 십 여일 구류 당했었는데 그래 또 단식해서 나가겠다는 말인가? 이번에는 다를 걸. 두고 봐."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장기간 나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우고 핍박하여 나는 단식하고 단수하면서 박해에 저항하였다. 나흘 후 그들은 나에게 야만적으로 음식물을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원씨 보안은 나를 침대에서 억지로 끌어내린 후 7~8 명이나 달려들어 나를 사형침대(死刑床)에 올려놓고 머리, 손, 발을 눌러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한편 또 목을 조이고 코를 비틀면서 새끼손가락만큼 굵은 비닐호스를 나의 콧구멍으로부터 나의 위에까지 억지로 꽂아 넣었다. 호스가 너무 굵어서 오랫동안 애써도 호스가 들어가지 않아 콧구멍의 피와 입안의 거품을 잔뜩 토하게 되었는데 눈물이 나도록 아팠다. 겨우겨우 들어가면 그들은 혹독하게 강냉이 죽을 부어 넣어 나중에 강냉이 죽이 호스로 도로 흘러나올 때에야 멈추고는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가? 대법제자들은 세인들을 구도하기 위해 왔는데 도리어 당신들에게 이렇게 박해를 받고 있다니? 당신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지 아는가? 여동빈이 오죽하면 짐승을 구도하지 사람을 구도하지 않겠다고 했겠는가. 사람은 정말 구도하기 어렵다.

-모두 장쩌민이 해친 것이다.

윈룽진 파출소의 경찰은 내 집에 있는 대법 자료의 출처와 유통경로를 알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썼다. 그는 나의 첫사랑 옛 친구를 데리고 왔다. 친구는 전화를 받자 나는 듯이 달려왔다고 했다. 그는 평소 그렇게 선량하고 바르게 살던 내가 족쇄와 수갑을 차고 절뚝거리면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보안에게 책망하듯 물었다. "저 사람이 무슨 죄를 범했기에 저 모양이 되었소? 수갑의 녹이 손목에 묻도록 끄르지 않는단 말이요?" 경찰이 말했다. "저 사람은 감옥규칙을 지키지 않고 안에서 입장(立掌)하고 연공하였으며 다른 수련생에게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고 또 금식하였소." 친구는 내가 이 정도로 박해받은 것을 보고 매우 괴로워하고 가슴 아파하면서 "당신이 연공하지 않겠다는 말만하면 내가 금방 데려나갈 수 있소. 이 경찰들은 모두 나의 친구들이요. 하필 여기서 이 고생을 할게 뭐요?" 라고 말하였다. 나는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나는 나의 양심을 배반하기 싫었다.

코로 음식물을 투입할 때 원씨 경찰은 위협조로 말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너의 친구더러 돈을 지불하게 하겠다. 한번 투입하는데 50원씩 말이야. 그래도 안 먹으면 너의 외사촌 오빠더러 직접 투입하게 하겠다." 외사촌 오빠는 전에 윈룽진 경찰이었는데 젠양시로 전근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점검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서있는 사람들이 숫자를 보고하자 감방장이 감방 검사를 나온 경찰에게 "침대에 한 사람 앉아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경찰은 "당신은 왜 내려가서 인원 점검을 안 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나는 죄인이 아니오." 라고 대답하면서 경찰을 보는 순간 나도 몰래 "오빠"하고 외쳤다. 본래 외사촌 오빠가 간수소로 전근하여 온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 우리는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나중에 면담할 때 나는 시간을 틀어쥐고 외사촌 오빠한테 진상을 알렸다. 오빠가 내게 말했다. "네가 여기에 있어도 나는 조금도 도와 줄 수가 없구나. 파룬궁은 일반 안건과 달리 그들이 모든 걸 주관하니 말이다. 나는 정말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너 같은 여걸이 오늘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모든 것은 장쩌민 때문이에요." 라고 내가 대답했다.

-사형상(死刑床)

젠양시 간수소에서 나는 오래 동안 사형침대(死刑床)에 묶여 있었다.

형틀침대는 철판으로 만들어 졌는데 작은 구멍 몇 개는 밧줄을 매기 위해 뚫어 놓은 것이었다. 한사람이 누워서 겨우 손을 놓을 수 있게 만들었으며 엉덩이 부위에 큰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대소변을 보면 이 큰 구멍으로 흘러내려가게 되어있다. 그들은 나를 반듯이 눕혀 사형 침대에 묶어 놓았다. 밧줄은 젓가락만큼 굵은 삼바였는데 두 사람이 목에서 두 팔을 비끌어 맨 후 한바퀴 돌려 침대에 홀쳐 매놓고 다시 위에서 아래로 침대에 꽁꽁 묶어 놓아 머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턱 아래의 밧줄이 파고들어 몹시 아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두 팔이 아프기 시작했고 연이어 목, 잔등이 몹시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가 마치 일년처럼 지루하였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가는 시간외에 하루 종일 침대에 묶어 놓았다. 나는 발정념하고 사부님 경문을 외우면서 아픔을 참았다. 사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련이란 곧 어려운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든지 간에, 사악이 미친 듯이 박해하고 생사에 관계되거나 할 때, 당신이 여전히 수련의 이 한 갈래 길에서 확고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어려운 것이며, 인류사회 중의 어떠한 일도 수련 길에서의 행보를 교란할 수 없게끔 하기란 어렵다.”(《길))

나중에 그들은 나에게 음식물을 강제로 주입시키고는 오히려 화장실에 못 가게 하면서 나에게 고통을 가했다. 방광에 소변이 가득 차서 극한에 이르렀는데 어떤 방법을 써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마에는 땀이 났고 속옷이 다 젖었다. 이런 고통은 정말 일각이 삼추 같았다. 부득이 한 상황이라 나는 다른 사람들보고 나의 밧줄을 풀어 달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나의 이 가장 기본적인 요구마저 혹독한 물매를 면치 못했다. 

범인의 두목 리잉(黎英)이 주먹으로 나의 가슴을 쥐어박았고 사형수 마약범은 자신의 수갑으로 나의 머리를 내려 쳤다. 나는 발정념으로 그들 배후의 사악들을 제거한 후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래도 덕은 남겨 두라.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대한 것을 장래에 꼭 받아낼 것이다." 두 사람은 한쪽으로 나를 때리면서 한편으로 욕하는 것이었다. "너는 真、善、忍(전,싼,런)을 수련하니까 참을 수 있겠지." 결국 나의 머리가 수갑에 맞아 두 곳에 구멍이 뚫어져 선혈이 목을 타고 흘러 내려 옷깃을 적셨고 베개를 적셔 놓았다. 판씨 경찰이 들어오면서 "싸다. 누가 너더러 밥을 먹지 말라고 했나."라고 말했다.

원래 이 모든 것은 경찰이 범인들에게 지시하여 제멋대로 하게 한 것이다. 

바로 그날 낮 한시가 넘자 지난날 살인마같이 기세가 당당하던 원씨 보안이 갑자기 애처로운 모습을 해가지고 범인 두목 리밍에게 "나 곧 갈 겁니다."라고 말하였다. "어디로 가는데?" "나도 잘 몰라. 친구를 찾아보고 직장이 나면 당신 보러 올거요." 분명한 것은 그가 현세현보를 받아 해고당한 것이다.

내가 단식, 단수한지 반달이 되었고 또 상처가 엄중하여 생명이 위기에 처했다. 간수소에서는 내가 그곳에서 죽으면 책임을 질것이 두려워 먼저 젠양시 법원과 국안대에 알렸다. 여러 사람이 내 신체가 정말 허약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청두시 완낸장 파출소의 경찰과 판공실의 리챵쥔(李强軍) 등에게 나를 청두로 데려가라고 통지하였다.

젠양시 간수소에서는 그들의 죄증을 덮어 감추고 다른 사람들이 나의 상처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 청도의 경찰이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나에게 목이 낮은 티셔츠를 입게 한 후(내게는 겉옷이 없다.) 부축하여 데리고 나갔다. 완낸창 호적경찰 웨이다핑이 나를 데려 가려고 하다가 나의 머리와 목에 많은 핏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찌된 일이요?" 나는 "범인들이 때린 거예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소장 중xx가 "누가 감히 당신을 때릴 수 있소?"하고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서 나는 그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이미 발생한 이 일체를 감히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웨이 경찰은 나를 때린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후에야 나를 데려갔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내가 젠양 간수소에서 나올 때 파출소에서는 나더러 서명하라고 하였다. 나는 형사 구류 통지서에 "체포"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7시 전후에 그들은 또 나를 진(進)시 6병원에 보냈다. 나는 그들의 위선을 보아냈다. 그들은 나를 치료한 후 계속하여 박해하려 한다.나는 단호하게 그들과 협조하지 않고 정념으로 제지하여 퇴원을 요구했다. 퇴원 후 파출소에서는 사무실의 황xx더러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면서 24시간 감시하게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경문 『치사(致詞)』 중에서 “대법제자로서, 지금 한 일체는 모두 대법과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제압시키는 것이다. 진상을 똑바로 알림은 사악에 대한 폭로인 동시에 사악을 억제하는 것이자, 박해를 감소하는 것이고, 사악을 폭로하는 동시에 민중 두뇌 속의 사악에 의한 유언비어와 가상(假象)의 독해(毒害)를 깨끗이 제거하는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는 최대의 자비이다. 왜냐하면 미래에는 몇 십억 사람이 법을 얻게 되는데, 만약 사람의 두뇌 속에 대법을 저촉하는 사상이 담겨 있다면, 이 한차례 사악이 지나가면, 인류는 큰 도태가 시작될 것이고, 아마 법을 얻을 인연이 있는 사람 또는 더욱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체는 모두 위대하고 자비로운 것이며 자신의 최후의 길을 원만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이 박해를 받는 진상을 요해하게 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나는 정념으로 사부님께서 가지해 주시기를 바랐고 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 진상을 말하고 중생을 구도하게 해 주시며 절대로 그들이 계속 박해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기회가 왔다. 나를 감시하는 황xx가 나보고 같이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오자고 하였다. 나는 계속하여 발정념을 하면서 황xx 배후의 일체 사악을 청리한 후 사부님께서 나를 가지해 달라고 빌었다. 채소 살 때 그를 그곳에 멈춰 세워 주시고 내가 빠져 나가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세가지 일을 잘할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결국 진짜로 내가 원하던 대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쓰라린 가슴을 안고 마음속 고통을 참으면서 70세 나는 노모와 11살 나는 아들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게 되였다.


제2장 혹형과 학살

-특무와 조우하다

떠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임시 청두시 광룽시루(光榮西路) 시장 아파트 6층 22호를 세 얻어 살게 되였다. 2002년 12월 9일, 나는 다시 불법적으로 납치를 당했다. 사실은 이러하였다.

오후 2시 30분경, 나는 역전에 가서 화물을 부치고 나서 임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큰 보따리를 맨 사람이 차고 앞에 앉아 있었는데 낮 익어 보였다. 수련하기 전에 주식시장에서 만났던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개의치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멜빵을 메고 채소 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가 나를 따라 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손에 든 채소를 땅에 내려놓고 신발 끈을 묶으면서 그가 앞서 가길 바랐다. 그는 뒤에 멈추어 서서 더 나가지 않았다. 나는 걸으면서 발정념을 하였는데 그는 줄곧 나의 뒤를 따랐다. 6층까지 올라온 후 멈춰 서서 그가 앞서 가길 기다렸다. 그는 다가오더니 나더러 방문을 열라는 것이었다. 나는 " 당신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문을 열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경찰증을 꺼내 보였다. 이때에야 나는 똑바로 그를 쳐다 보았다. 갑자기 한사람이 뇌리를 스쳤다.--샤오위 (小雨)

며칠 전 동교(東郊)의 동수가 샤오위라는 "동수"를 내게 소개하여 CD만드는 방법을 배워 주었는데 내가 배운 후에 그는 씨디 라이트(刻錄機)를 나한테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샤오위는 겨우 몇 분밖에 이야기 하지 못하고 일이 있다고 하면서 급히 가버렸다.

그는 다리 후리치기로 나를 땅에 넘어뜨리고 나의 두 손을 등 뒤로 비틀어 올린 후 한쪽 무릎으로 나의 등을 눌렀다. 나는 큰소리로 "사악이 좋은 사람을 잡아가요!"하고 외쳤다. 이때 아래서 많은 경찰들이 뛰어 올라왔고 나의 손에서 키를 빼앗았다. 나는 또 큰 소리로 "문을 열지 못한다."하고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한참 애쓰더니 끝내 문을 열었다. 이리 하여 실내에 있던 한 동수-단식 3개월 하다가 집에 돌아 온지 한주도 안 되는 동수마저도 납치되었다.

그들은 나의 두 손을 뒤로 틀어서 밧줄로 묶은 후 객실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또 밧줄로 두 발을 묶었다. 어떤 사람이 샤오위(가명. 실명은 모름)에게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요?"하고 묻자 그는 "바로 그야. 틀림없어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집을 수색할 때 나는 샤오위가 혼자말로 "씨디 라이트는 왜 없지? 옮겨 갔나?"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말 속에서 나는 이 사람이 바로 며칠 전 내게 CD를 배워주던 샤오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와 소개 해주던 동수 외에 아무도 그 일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나에게 씨디 라이트 조작 방법을 배워주고 돌아 간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기계가 고장이 났다. 호출해도 회답이 없었고 전화를 해도 집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기계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며칠 뒤에 찾아오려고 했는데 소개한 동수만 알고 있었다. 기계 고장은 샤오위가 간 뒤의 일이라 그는 내가 그날 씨디 라이트를 집에 가져 온 걸로 생각하고 나의 방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때, 나는 그를 내게 소개해주던 동수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요. 동문의 동수들이 자료를 만들기 위해 아껴먹고 아껴 쓴 돈을 모두 그가 관리하게 하고 있소. 또한 자료를 사이트에 올리고 다운받는 일들을 모두 그가 책임지고 있어요." 맙소사! 본래 그가 공안의 밀정이었단 말인가? 한때 11개의 자료실이 파괴되더니 정말 그와 다 연결이 되어 있단 말인가? 며칠 전 나에게 조작 방법을 배워준 후 그냥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감히 더 생각해 내려 갈수 없었다... ...내가 이번에 납치당한 것은 특무 샤오위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몇 년 이래 샤오위는 청두 및 외지의 많은 대법 제자들과 자료 때문에 연결이 되어 있고 많은 동수들과 (특히 자료실의 동수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나온 후 샤오위의 추격을 받아 납치까지 당한 사실을 동수들에게 이야기 하였을 때 모두들 샤오위가 당시 특무였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동수들이여! 피의 교훈을 잊지 말자!

경찰 장즈융(張智用)이 한 치 넓이 테이프로 머리를 몇 바퀴 돌려가면서 나의 입을 봉했다. 비닐 주머니를 머리에 씌워서 경찰 몇 사람이 억지로 나를 6층에서 끌어내려 쌀자루를 던지듯 차에 던져 버리더니 나를 광룽(光榮) 소구(小區) 파출소에 끌고 갔다. 한 경찰이 혹독하게 나의 뺨을 한대 쥐어박더니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나의 온몸은 진흙 투성이었고 얼굴은 꼭 코크스를 줍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또 나를 바이푸룽진(白芙蓉鎭) 호텔 4층으로 옮겨 불법 감금하기 시작하였다.

-정념의 위력

바이푸룽진 호텔에 도착하자 610의 일당은 경찰에게 '창턱 이쪽은 바깥이 큰길과 연결돼 있어 안전하지 못하오. 이 사람이 이리로 뛰어내리지 못하게 감시를 잘해야겠소."하고 말했다.

호텔 4층의 한 방에서 그들은 수갑으로 나를 의자에 묶어 놓고 광룽소구 파출소 경찰들이 24시간 교대로 나를 감시하면서 자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사부님께서 가지해 주시기를 빌면서 발정념을 하였다. 대법의 자료실이 더 파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동수들의 안전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의 진상을 알게 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라도, 층집에서 뛰어내려서라도 나는 여기에서 빠져 나갈 것이다. 그 샤오위라는 자를 폭로하여 그가 더 나쁜 일을 못하게 할 것이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라고 강요하면서 경찰 셰한성(谢寒生 남 30살 좌우)은 주먹으로 마구 쥐어박았다. 손으로 때리다가 지치자 발로 찼고 나중에는 칼자루로 나의 손등을 마구 때렸고 나중엔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아 나의 신발을 벗기더니 신바닥으로 혹독하게 때리는 것이었다. 그는 때리면서 욕하였다. "말 할 거야, 말거야? 말 할래 안 할래? 말 안하면 죽여 버릴 거다. 때려 죽여도 자살이라 할 수 있어. 직접 화장해 버리면 넌 끝장이야. 너... 너 ...도대체 말 할 거야 말거야? " 내가 의연히 말을 안 하자 계속 악담을 퍼부었고 우리 사부님을 공격하였다. 나의 온몸은 퍼렇게 멍이 들었고 화장실도 겨우 벽을 짚고 다녀야 했고 허리도 펼 수 없었다.

그때 사부님께서 『정념으로 사악을 제지하자』는 경문을 발표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대법제자가 사악의 이런 박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 가지해 달라고 빌면서 발정념으로 셰한성 뒤에 있는 사악을 제거한 후 모든 아픔을 그의 몸으로 전환 시켰다. 정념의 작용 하에 그도 아픔을 느꼈는지 자꾸 방법을 바꾸더니 반나절 안에 폭행을 멈추었다. 나중엔 나를 보면 피했고 경찰이 그더러 들어와 과일을 먹으라고 하자 과일을 들고 밖에 나가면서 나를 감히 정시하지도 못했다.

사부님이 『추풍량』에서 “사악한 무리들아 난폭함을 멈추거라, 천지가 다시 밝아오면 끓는 물에 떨어지리라. 주먹과 발로 인심을 흔들기 어렵거늘, 광풍이 불어오니 가을은 더욱 차갑구나.” 라고 하신 법을 생각하자 나는 악도들은 필연코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반죽음이 되다

그날 내가 또 달거리가 생겨 나이 젊은 여경 차이츙(蔡琼)에게 생리대를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경찰이 집을 수색할 때 가져간 3,000위안에서 계산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차이츙이 생리대를 사온 후 나더러 이름과 주소, 집에 있는 모든 자료의 출처와 배포경로를 말한 다음에야 쓸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단호하게 협조하지 않자 그녀는 나에게 생리대를 건네주지 않았다. 나의 바지 몇 개가 모두 피투성이 되어 사람들 보기가 민망스럽게 되어도 시종 입을 다물고 있자 비로소 할 수없이 생리대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경찰은 장시간 나를 의자에 묶어 놓고 잠을 못 자게 하였다. 눈만 감으면 경찰은 무정하게 냉수를 퍼부었다. 실습경찰 뚱보(루저우 사람, 泸洲人)가 새로운 도구(사람을 때리는 전문 도구임. 딱딱한 비닐로 만들었는데 두 치 가량 넓고 한 자 가량 길다.)로 심하게 때리면서 연기를 콧구멍에 쏘이고 술을 얼굴에 퍼부었다. 나는 술이 눈에 들어가 눈물을 흘렸다. 뚱보 경찰은 루저우에 돌아가기 전 다른 경찰에게 "그녀가 타협하기만 하면 당장 나에게 전화를 해주오. 이 기쁜 소식을 기다릴 것이요. 그녀가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봅시다 "하고 말했다.

경찰 단쉐쥔(旦学军)이 당직 설 때면 나는 여전히 경찰에게 진상을 얘기하였다. 그는 "우리가 당신을 자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당신의 의지를 꺾으려는 것이요."하고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나를 암만 그렇게 하여도 그건 헛수고이고 아무런 작용도 못 일으킬 것이요." 하고 말했다. 그는 실습경찰 앤루(彦露)와 궈칭(國慶) 두 사람을 시켜 갖은 수단으로 나를 구타하였다. 단식, 단수 5일 만에 나는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며칠동안 나의 머리 속에는 가끔 경문 <<정념 정행>>이 떠오를 뿐이었다. “대각자는 고달픔을 두려워하지 않거늘,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어졌네. 생사의 집착이 없거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구나." 많은 시간은 경찰들에게 진상을 말하느라 머리를 쉴 새가 없었다. 혼미 상태에서 나는 실내의 모든 가구가 우리 집의 가구와 똑 같아 보였고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이렇게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모진 마음을 먹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때 그들은 미친 듯이 번갈아 나를 흔들면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마구 때렸고 냉수를 머리에 쏟아 부었다(때는 12월이었음). 나는 경찰 단쉐쥔이 명령하는 소리를 들었다. "흔들어, 계속 흔들어, 힘껏 흔들어. 냉수 한 대야를 가져와. 또 가져 와. 계속 퍼오란 말이야. 힘껏 해봐. 깨어나나 안나나 보자." 계속하여 그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고 물을 나의 몸과 머리에 퍼 붓는 소리를 들었으며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내 몸을 때리는 짝짝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들이 헐떡이는 소리도 들었다. 그 뒤로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얼마나 지났는지 나는 추위를 느끼며 깨어났다. 온몸은 흠뻑 젖어 있었고 손목은 붉은색 스웨터에서 빠진 물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침에 교대하러 온 여경찰은 이 광경을 보고 또 마구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저녁때가 되자 경찰 리커(李科. 발음 데로 적은 것임)가 형사 구류 통지서를 보내왔다. 나는 단호하게 이 일체를 부정하였다. 관리쯤 되어 보이는 경찰이 나에게 물었다. "중팡츙,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봐." 나는 단호하게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는 화가나 이를 갈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렇게 물어도 대답을 안 하더니 집에 가고 싶다고? 오늘 밤엔 내가 당직 설 차례인데 다시 한번 너를 혼내 줄 거야. 기다려봐." 나는 발정념을 하였다. 네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밤 꼭 나갈 것이다. 나중에 그 경찰은 당직 서러 오지 않았다.

나는 발정념으로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그냥 이렇게 박해를 받을 수 없습니다.층집에서 뛰어 내려서라도 나는 오늘 나가서 "동수"라는 샤오위를 폭로하여 다른 동수들이 모두 그를 알게 하여 더는 우리 대법 제자들 속에서 계속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장시간 견정히 발정념을 하자 오른쪽 수갑이 열렸고 조금 후에 왼쪽의 수갑도 열렸다. 나는 나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침 5시, 경찰들이 교대시간이 되자 실습 경찰 궈칭이 근무하게 되였다. 나는 계속 발정념을 하여 두 경찰이 깊이 잠들라고 하였다. 7시쯤 되자 그들은 끝내 잠들었다. 나는 지금 방문을 연다면 그들이 문소리에 놀라 깰 것이다. 하물며 나의 신이 방 저쪽 창문아래에 있음에랴. 나는 층집에서 뛰어 내려야 나갈 수 있는 희망이 크고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벽 모서리를 짚고 하리를 구부리고 방을 지나 신을 신고 창문턱에 올라서서 아무 주저심도 없이 몸을 던져 4층에서 뛰어내렸다. 혼미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이 "인중을 눌러."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후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오후 5시쯤 되어 깨어났는데 내가 승용차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차에는 경찰이 지키고 있었는데 아무런 구급 처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층집에서 뛰어 내린 후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9시간 동안이나 내가 차에 누워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내가 죽은 후 몰래 화장해 버리려고 했단 말인가? 내가 살아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들은 할 수없이 오후 6시경에 나를 병원으로 실어 갔다.

병세가 너무 중하여 병원에서 접수하지 않자 그들은 나를 이환루(一環路) 시싼돤(西三段) 골상(骨傷)병원 입원처 11호에 보내 주었다. 나중에 실습경찰의 말에 의하면 둘러서서 구경하던 군중이 120에 전화를 걸었기에 그나마 병원에 실려 왔다고 말했다.

-백가지 고생이 한번에 들이 닥치다

골상 병원의 검사 결과는 골반 삼각구(三角區) 골절, 오른 다리 골절, 왼쪽 발 손상, 하반신 완전 마비상태였다. 병원의 양(楊) 주임은 "당신 복부에 이미 피가 가득하므로 수술을 해야 하오." 하고 말했다. 나는 "수술하지 않을래요. 나는 돈이 없어요."라고 했다. 양주임은 "당신이 감금되어 있는 기간에 사고가 발생했으므로 경찰이 이미 2만원을 지불했소."하고 알려 주었다. 나는 이 모든 돈이 인민들의 피땀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후에 수술 마취사가 "수술하면 위험하니 하지 마세요."하고 알려 주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줄곧 수술을 하지 않았다,

나는 병원에서 그들에게 진상을 얘기하는 외에는 언제나 발정념을 하였다. 법을 암기하는 시간도 적었다. 한사람이 나의 호실에 들어 올적마다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나 때문에 오므로) 나는 즉시 그한테 발정념을 하였다. 그들이 링거 병을 들고 들어오면 나는 이렇게 발정념하였다. ‘모든 약물이 나한테는 무효다. 대법제자는 단호히 승낙하지 않는다. 사부님 가지하여 주십시오. 모든 약물은 다시 뿜어나가 나를 박해하는 모든 악인, 악경과 사악한 낡은 세력들한테로 가라.’ 결국 약물이 나한테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한번은 그들이 다리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는데 오히려 다리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상처가 화농하여 고름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다시는 약을 바르지 못했다. 지금도 나의 오른쪽 무릎 아래에 엄지손가락만큼 큰 허물이 나 있다. 또 한 번은 양주임이 "다른 병자는 이 약물 링거를 맞으면 모두 살이 찌는데 이 사람은 왜 아무 반응이 없지?"하고 놀래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이야기 하였다. 한번은 나를 감시하는 사람한테 텔레비전이나 매스컴이 보도한 파룬궁 기사는 모두 가짜이므로 쉽게 요언을 믿지 말라. 당신에게 해롭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단도직입적으로 나한테 "지금의 매스컴은 오직 년 월일만이 진짜일 뿐이요."하고 대답했다.

매일 광룽소구 파출소의 경찰들이 교대로 나를 감시하였고 24시간을 침대에 묶어 놓았다. 나에 대한 계속되는 박해에 저항하기 위해 나는 또 병원에서 단식, 단수를 24일간 하였다. 코로 음식을 투입하기 위해 위에 호스를 꽂아 놓아 아주 고통스러웠다. 후에 나는 발정념을 하였다. “사부님 가지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제자는 이런 박해를 단호히 감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념의 작용 하에 나를 지키고 있던 사람이 "당신의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 견딜 수가 없구먼."하고 말하였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냄새가 난다고 접근하기를 꺼렸다. 경찰은 하는 수없이 나더러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으라고 하여 호스를 뽑을 수 있었다. 나는 위에서 뽑아낸 호스가 이미 검은 색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 간호사가 "당신은 식사를 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또 호스로 투입할 것이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발정념을 하였다. 네 말은 소용없다. 그는 내가 의연히 단식하자 의사를 불러와 계속 호스를 꽂아 나를 박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사는 오히려 "이 사람의 위가 이미 수축되어 있으므로 호스를 꽂으면 위험하오. 꽂지 마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때 나는 이미 몹시 여위여 뼈밖에 남지 않았고 사람 모양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본래 110근 정도 나가던 체중이 겨우 60여근밖에 남지 않았다. 전신(얼굴을 포함해)의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고 입술은 갈라 터져 딱지가 일어났고 두 다리는 자줏빛이 나고 몹시 부어있어 바지를 입을 수없게 되었고 오랫동안 바로 누워 몸을 움직이지 못하여 두 발꿈치가 썩으면서 고름이 흘렀다. 근육이 위축되어 수혈할 때 혈관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손목 정맥혈관을 세 바늘 꿰맬 정도로 베었어도 혈관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엔 새해 휴가를 낸 간호장을 병원으로 불러 한참 고생을 한 끝에 겨우 혈관 하나를 찾아 수혈한 뒤 다시는 침을 빼지 못하고 장장 24시간을 유지하였다.

광룽소구 파출소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진뉴(金牛)구 610에 통지하였다. 610은 몇 사람이 보고 확실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확인하고 나서 2003년 1월 10일 오전에 병원 구급차로 실고 온 다음 관룽소구 파출소의 경찰들이 들것에 담아 나를 집에 들여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 나의 하반신은 이미 벌써 완전 마비상태였고 자활능력이 없었다. 병원에서 도뇨관으로 소변을 보았고 단식하여 대변도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 온 후 음식을 조금씩 먹어도 대 소변을 배출할 수가 없었다. 배가 공처럼 부풀어 올라도 오줌을 눌 수가 없었고 그 고통을 참기가 너무 어려웠다. 10일, 보름이 지나도 대변을 보지 못해 배가 아파 작은 공기로 밥을 먹어도 몇 번씩 쉬어가며 먹어야 했다. 집식구들은 내가 아파하는 모양과 이마에 솟은 땀을 보면서 모두 나 몰래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오랫동안 한 가지 자세로 반듯이 누워 있었으므로 나의 등은 말할 수 없이 아팠고 두 발꿈치도 그냥 고름이 흐르면서 좀처럼 낫지를 않았다....
(다음에 계속)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22일
문장갱신: 2004년 7월 24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22/79564.html


논-픽션: <질풍경초 (疾風勁草)> (8)

글/중팡충(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23일】(앞글에서 이어짐)

제 3 장 신이 창조한 기적

나는 매일 침대에 누워 70세 노모(老母)와 11살 되는 아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매일 법공부와 발 정념을 견지하였고, 노(老), 소(小)의 보살핌으로 기적은 또 다시 나의 몸에서 나타났다. 1개월이 지나 앉을 수 있었고, 2개월 후 일어나 연공할 수 있었으며, 3개월째는 걸을 수 있었다.

2003년 9월 초, 나는 과일과 해바라기, 사탕을 사 들고, 자전거를 타고 정형외과(骨伤)병원으로 가서 예전에 내게 관심을 기울여 주었던 의사, 간호사들을 방문하였다. 정형외과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주치의 양성원(杨生文)을 만나 그에게 인사를 했으나 그는 이미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내가 바로 당신이 다리를 이어준 그 파룬궁 입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바로 당신입니까? 다리를 자르지 않았는데 다 낳았습니까? 어떻게 낳았지요?” 하며 놀라워했다. “파룬궁을 수련했습니다, 저는 오늘 당신들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시간을 내어왔습니다. 함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는 흔쾌히 나를 2층 의사사무실에 데려가 들어가면서 말했다. “봐라. 누가 왔는가?”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 중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나는 자신을 소개했다. “제가 바로 오래 전 골반골절에、다리가 부러졌던 11번 병실의 파룬궁 중팡츙입니다. 오늘은 병원에 있을 때 저를 보살펴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자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멍해있었다.

양주임은 놀라서 “다리가 낳았습니까? 당신이 한번 걸어 보세요.”라고 했다.

내가 사무실을 두 번 왕복하여 걸었더니 그는 내가 정상인 것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당신은 어느 병원에서 치료했기에 효과가 이렇게 좋습니까? “

나는 말하였다. “치료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간 후, 줄곧 집에서 파룬궁 법공부하고 연공을 하여 3개월이 지나 걸을 수 있었습니다.”

양주임은 말하였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당신이 이 정도로 회복할 수 있다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내가 오늘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지 못할 것입니다.”

간호사 류민이 이어서 말하였다. “그녀의 골반은 당시 삼각부위 분쇄성(粉碎性) 골절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회복하는건 그야말로 불가사의합니다. 파룬궁이 이렇게 좋다면 집에서 계속 연마하십시오. “

나는 대답하였다. “그렇지요! 파룬궁을 이해하고 파룬궁을 접촉했던 사람들은 모두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수련합니다. 그러나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자 장쩌민은 질투심이 생겨 파룬궁을 X교로 내몰고 심지어 파룬궁 수련하는 사람들을 반혁명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저는 오른쪽 하지가 선천성 광범위해면상부종형 혈관종양(先天性大面積海綿狀腫脹型血管瘤)에 걸렸었는데 몇 년을 치료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고, 수술할 때 혈관 한 가닥을 잘라내기까지 했지만 완쾌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뇌신경을 다쳐 뇌빈혈(腦缺血) 후유증까지 얻었습니다. 심할 때는 길을 걸을 때 비틀비틀 거렸고, 일시적인 실명까지 생겼습니다. 또한 얼굴에는 여러 해 동안 넓은 부위에 심한 황갈색 반점이 나타나 6년 동안 수 만 위안을 들여 미용을 하였지만 치료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파룬궁을 일주일간 연마한 후 얼굴의 점들이 전부 없어졌고 2달 후에는 왼쪽 다리의 혈관종양과 뇌빈혈이 저절로 나았습니다. 나는 집에서 부지런히 장사를 하면서 노인을 보살피고, 아들을 돌봤으며, 속인들이 마작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여유시간에 법 공부하고, 연공하였는데 공안경찰에게 불법으로 감옥에 감금되어 속인이 상상할 수 없는 혹형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나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최근에 나는 또 기차역에서 화물을 운반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붙잡혔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해 보세요. 나의 70 노모와 11살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당신들과 같이 진상을 모르고 방송과 뉴스의 거짓에 속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문에 나는 한명의 대법제자로서 대법 중의 한 입자로서 모든 것을 바친다 해도, 심지어 생명까지 바치면서라도 나는 전력을 다하여 세인들에게 우리가 박해 받은 진상을 알릴 것이며, 대법의 초상적(超常的)임과 아름다움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어 더욱 많은 세인들로 하여금 우리들이 박해 받은 진상을 이해하도록 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있게 할 것입니다.”

류민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넘어져 상하여도 밥을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무쇠라면 밥은 강철이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신체야말로 본전입니다. 당신은 너무 어리석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생명의 진귀함을 알고 매우 소중히 여기는데, 대법제자들은 더욱 자신의 생명을 아낍니다. 우리들도 생명을 사랑하며, 또 가족들과 천륜(天倫)을 함께 누리기 바라지만, 쩐, 싼, 런(眞, 善, 忍)의 광명한 법리는 생명으로 지켜야 할 소중한 것입니다. 국민 동포들의 정의와 양심도 진귀한 가치가 있고, 이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근본이며, 대법제자들은 사악을 폭로하는 것을 통하여 진상을 알리고 민중들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만약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해 각성할 수 있다면 이미 생명을 바친 대법제자 그들의 피는 헛되지 않으며, 내가 오늘 받은 무수한 고통도 헛되지 않습니다.”

류민은 말하였다. “당신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찍 우리들에게 말하였더라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었지요.” 양주임이 말하였다. “종일 24시간 내내 경찰이 감시하는데 그녀가 무슨 기회가 있어 우리들에게 이것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간호사 류민은 이어서 물었다. “그럼 천안문 분신사건은 진짜입니까, 아니면 가짜입니까? 좀 말해 보세요.”

나는 당신들에게 설명하겠습니다. 《전법륜》제7강의에는, “살생 이 문제는 아주 민감한바, 연공인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의 요구도 비교적 엄격하기에 연공인은 살생을 하지 못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자살하면 죄가 더욱 큽니다. 우리 연공인은 닭, 물고기를 먹어도 모두 죽은 것을 사는데, 가서 분신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당신들 의사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화상환자들은 모두 살을 내놓아야 하는데, 텔레비전에서 보았다시피 그렇게 꽁꽁 싸매서 뭘 하려는 것입니까? 화상 환자들의 방에서 격리복을 입지 않고 자유롭게 인터뷰할 수 있습니까? 12살의 류쓰잉은 기관지 절개수술을 하고 4시간 후 말을 하였는데 목소리가 그렇게 또렷할 수가 있겠습니까? 류보룽 할머니는 그렇게 많은 휘발유를 마시고 불을 붙이기 전에 후회하고는, 곧 기자의 취재를 받았는데, 그래도 아무런 증상이 없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마신 것이 사이다인가, 아니면 휘발유인가? 또 속인들의 입장에서 분석해 본다면, 왕진둥은 사람이 다 검게 타버렸는데도 사타구니에 끼고 있던 페트병만은 여전히 타지 않는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는가? 경찰은 1분 내에 소화기를 4개나 들고 왔는데, 천안문 경찰들은 소화기를 들고 순찰하는지요? 무엇 때문에 소화 담요를 뒤덮어 즉각 불을 끄지 않고 기다렸다가 왕진둥이 "파룬궁" 구호를 외친 다음에서야 소화 담요를 덮었습니까?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연기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들은 자세히 생각해 보았습니까? 또 연공인의 동작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한번만 봐도 가짜인 것을 압니다. 텔레비전에는 더욱 많은 누락이 있어서, 당신이 비디오테이프를 슬로우 모션으로 분석한다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천안문 분신 사건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당신 자신이 한번 분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들은 후 말하였다: “오늘 직접 눈으로 당신 파룬궁을 보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모두 신문과 뉴스의 파룬궁이 진짜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진상을 알게 되어서 무척 기뻤다.

2004년 3월 이후부터 내가 박해 받은 일부 경력이 폭로되면서, 청화구 정치법제위원회 서기 하오우웬(郝武元)은 구 정치법제위원회의 사람과 티오떵허(跳䠬河)파출소의 경찰을 데리고 내 동생 가게에 두 번이나 가서 일을 방해하였으며, 또 위선적으로 말하였다. "너의 둘째 누나를 집으로 옮겨와 있게 해라. 우리들은 그녀를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남몰래 나의 고향에 가서 나의 행방을 조사하였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현재까지도 핍박에 의해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고 있다. 나의 불쌍한 어머니는, 사방으로 숨어 다니는 딸과 간신히 한번 만났지만 몇 분 후 빨리 떠나야 했으며, 나의 불쌍한 아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잃고, 장(江)씨 집단의 야만적인 탄압 하에서, 또 한 번 어머니와 헤어져야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믿는다. 먹장구름은 영원히 하늘을 가리지 못할 것이다. 장(江)씨 건달 집단이 세상을 속이는 거짓말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며, 우리들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후기: 나는 당신에게 말하련다.

선량한 사람들이여! 나의 이야기를 본 후,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좋으면 집에서 수련하면 되지 문장까지 쓸 필요가 있나?”

사부께서는 <이성> 중에서 “착함을 타격하는 것은 틀림없이 사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것들이 수련생과 대법을 파괴하고 해치는데 채용한 행위는 모두 극히 사악한 것이고, 면목 없는 너절한 것이라, 노출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반드시 그것들의 사악함을 세인들더러 알게끔 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세인들을 구도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마음을 비우고 한번 생각하기 바란다. 당신은 내가 직접 겪은 경력과 당신이 예전에 TV에서 이해한 파룬궁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법이 내 몸에서 일으킨 여러 가지 기적은 나를 개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득을 얻게 하였다. 현재 대법은 전 세계 60여 개 국가에 전해졌으며, 1,200여 개의 포상을 받았고(2004년 5월까지 통계한 것임), 파룬궁(法輪功) 창시자의 저작은 30여종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발행되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마음을 닦고 신체를 건강히 하는 신기한 효과는 세계인으로부터 보편적인 인정을 받았는데 유일하게 중국 대륙에서 장(江)씨 집단에 의해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5년 동안 민간에서 전하는 소식이 실증하기를, 적어도 968명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 받아 치사하였다.(2004년 5월까지의 통계임) 2001년 10월 말,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통계한 바는 당시 붙잡힌 파룬궁 수련생 중에 박해 받아 죽은 사람 수는 1,600여명에 달하였고, 불법 판결을 받은 사람이 적어도 6,000명 되며, 불법적인 노동 교화를 받고 있는 사람의 수가 10만 명이 넘었다. 이외에도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은 세뇌반에 납치되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았으며, 세뇌반과 노교소(勞敎所)에서 여성들을 강간하고, 임산부를 강제로 유산시키는 등 성적 박해를 엄중하게 자행하였다. 그들은 또 수 천 명의 대법제자들을 정신병원 혹은 노교소에 보내어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약물을 주사하였다. 무수한 대법제자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고 있다.

당신은 파룬궁을 똑똑히 이해하기 바란다. 그들은 나와 같이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다. 왜 그들이 박해를 받아야 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겪고, 감수하고 실증한 “파룬따파는 좋다(法輪大法好).” 라는 이 한마디 진실한 말을 했다고 하여 이처럼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때문에 당신들은 절대로 장(江)씨 집단에게 함부로 이용당하여 대법 수련생들을 박해하지 말 것이며, 또 잘 이해하지 못하고서 맹목적으로 대법이 나쁘고, 대법제자들이 나쁘다고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한다. 대법제자들은 가장 선량한 단체이다, 세계는 쩐, 싼, 런(眞, 善, 忍)이 필요하며, 전 세계가 “파룬따파는 좋다! (法輪大法好)”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인연이 있는 당신들이여! 소중한 당신들이여! 꼭 대법을 선하게 대하고,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시라! 이는 바로 당신 자신을 선하게 대하는 것이다. 아시는가? 오늘날 대법을 박해한 사악의 우두머리가 이미 미국, 벨기에, 독일, 스페인, 한국, 캐나다 등 여러 국가에서 법정에 기소되었고, “전 세계 장쩌민 공개심판” 대 연맹은 이미 성립되었다. 파룬궁과 대법제자를 박해한 모든 사악들은 머지않아 그 모두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 앉게 될 것이다.

당신이 파룬궁을 하루 속히 이해하기를 희망하고, 대법과 대법제자들을 선하게 대하고, 하루 속히 당신을 바른 위치에 올려놓기를 희망하며,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이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기원한다.

부기: 아래는 박해에 동참한 회사와 개인 전화번호이다.
(주: 악인은 “&”; 진상을 알아야 하는 사람은 “#”)

청두(成都)지역번호: 028

티오떵허(跳蹬河)파출소: 84126643

티오떵허지역 류잉팡(刘应芳): 13666190200 (#)

호적(户籍) 경찰 쑨융(孙勇): 13881936443 (#)


꽝룽(光荣) 쇼취(小區) 파출소: 87656434

리(李)소장: 89845906 13708055906 (#)

경찰 장쯔(张智): 88012728 (#)

부소장: 88151930 (#)


완낸창(万年场)파출소: 84457853

호적경찰 웨이다핑(魏大平): 88035031 (&)

사무실 주임 리챵쥔: (인터넷에서 검색하기 바랍니다) (&)


잰양(簡陽)시 지역번호: 0832

윈룽쩐(云龙镇)파출소: 7761165

쩡융챵(郑永强) 소장: 7761116 13088305006 (&)

리칭린(李庆林) 지도원: 13183949385 (#)

쒸창허(徐长和) 경찰: 7761128 (자택) (#)

청화구 정치법제위원회서기 하오우왠(郝武元) 사무실: 84372800 자택: 84307297 (&)
청화구 공안분국(公安分局): 83261024, 86406411


(끝)

문장 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 발표: 2004년 7월 23일
문장 갱신: 2004년 7월 24일
문장 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 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23/79565.html

명혜망

글/ 청위

[밍후이왕] 지금까지도 파룬궁을 잘 알지 못하는 중국인은 많고, 여전히 중국의 대중매체는 중공의 거짓, 모함에 일조하고 있다. 파룬궁은 도대체 무엇인가? 왜 아직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확고하게 파룬궁을 수련하는가? 심지어 중공이 광적으로 박해하는 중에도 여전히 파룬궁 수련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놀라운 현상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2017년 12월 25일, 파룬따파 밍후이왕의 보도에는 두 파룬궁 수련생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들은 모두 중공의 박해 이후에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기로 하자.

“파룬궁 수련을 하여 건강을 찾은 뤄밍춘 3개월 수감”이란 문장에서 보도한 뤄밍춘(罗明春)여사 일가는 쓰촨 량산주 시창성 안에서 찐빵, 만두 등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했다. 1972년에 출생한 그녀는 15살에 우울증에 걸렸고 30살 때 신우신염, 메니에르 증후군에 걸렸다. 몸은 아프고 장사마저 잘 안 되어 살기가 아주 어려웠다. 고난 속에서 헤맬 때, 2008년에 뤄밍춘은 한 파룬궁수련생을 만났다. 그녀는 자신도 온몸에 병투성이였으나 파룬궁을 수련하고 모든 병이 다 나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뤄밍춘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으며, 얼마 안 되어 모든 병이 기적과도 같이 다 나았다. 그녀 병이 다 나은 것을 보고 그녀 부모도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그녀 모친의 신염, 급성 인후염도 나았고, 부친의 위병, 위벽천궁, 신염도 다 나았다. 온 집안은 웃음꽃이 피었고 장사도 잘 되었다.

“지린 바이청시 여 교원과 모친 납치, 가택 수색당해”에서 보도한 리양버(李杨波)는 지린성 바이청시 철로 제1초등학교 교원이다. 1999년 12월 그녀는 병원에서 재생불량성 빈혈로 진단을 받았다. 여러 병원의 치료를 거쳤으나 호전되지 않았고 몸은 몹시 나빠졌다. 그녀의 모친은 파룬궁을 수련하는데 그녀에게 파룬궁을 수련하기를 여러 번 권했다. “얘야, 파룬궁을 연마해라. 일전 한 푼 들이지 않고 병을 뗄 수 있는데 너는 왜 믿지 않냐? 엄마가 널 속이겠니?” 리양버가 말했다. “엄마, 그렇게 좋으면 엄마나 연마하세요, 나는 교육받은 사람이어서 미신을 믿지 않아요, 게다가 뉴스를 보세요, 사람이 분신자살 하는 건 뭐예요.” 모친이 말했다. “바보야 믿지 말마라, 그건 모함하는 거야. 파룬궁이 1992년부터 전해져 1999년까지는 전국 각지에서 모두 찬양했지만, 분신자살은 한 사람도 없었어? 왜 1999년 7월 20일 장쩌민 무리가 파룬궁을 박해하라고 명령을 내린 후 분신자살이 나타났겠느냐? 파룬궁은 사람에게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공법이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말을 믿지 마라, 그들은 국민을 속여 진상을 알지 못하게 하고 파룬궁을 증오하게 하여 나중에는 국민과 국민이 투쟁하게 하려는 거야, 결국엔 해를 입는 것은 국민이다.”

모친은 파룬궁을 수련함으로 당연히 파룬궁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데 딸을 속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모친이 얼마나 입이 닳게 말해도 그녀는 듣지 않았다.

2003년, 리양버의 몸은 더 나빠져 밥 한 끼를 먹는데도 세 번은 쉬어야 했다. 온몸이 무력하고 어깨가 늘 시큰거리고 얼굴은 혈색이란 없고, 몹시 고통스러웠다. 2005년에 이르러 그녀는 자신이 이젠 생명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현대 의학이 그녀에게는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시험 삼아 해보자는 심리를 품고 파룬궁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기적이 나타났다. 20일의 연공을 거쳐 신체는 건강을 회복하여 온몸에 기운이 솟았고 얼굴엔 홍조가 어렸으며,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리양버처럼 혈육이 파룬궁을 수련하면서 어떻게 권해도 믿지 않는 사람은 정말로 드물다. 그들이 파룬궁을 믿지 않는 것은 많게는 중공의 거짓말을 믿은 것 때문이다. 더 깊게는 그들에게는 한 가지 우려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파룬궁을 인정해주면 파룬궁을 수련하는 가족이 더욱 확고하게 권할까 두려운 것이다. 누군들 안정된 생활을 누리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중공의 탄압이 이렇게 잔혹한데 자기 가족은 파룬궁에 이렇듯 확고하니 그냥 이렇게 견지하다가 중공의 마수가 가족에게 뻗칠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줄곧 파룬궁을 인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같은 달 23일, 밍후이왕에는 또 “광둥 러창 우수교원 수감, 열 살 딸 엄마 구출에 나서다”라는 보도가 실렸다. 이 보도에 실린 파룬궁 수련생 차오리핑(曹丽萍)은 리양버와 비슷한 상황이다. 차오리핑은 남편이 법원에 불법기소 당하자 법관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2004년 나는 선전 뤄후구에 출근했습니다. 10월의 어느 날 오후 4시경, 나는 자라탕 두 사발을 마시고 잠시 후부터 배가 아파 급히 화장실에 갔습니다. 변기 안에 피가 가득했고 배가 찌르듯 몹시 아팠습니다. 머리가 무겁고 다리가 휘청거려 온몸은 무기력했습니다. 곁에는 아무도 없고 병원에 갈 힘조차 없었습니다. 나는 의식적으로 이는 자라탕 중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곧 죽게 되리라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염하라고 알려 주던 9글자가 생각났습니다. 평소에 이 9글자를 의심하던 심리가 있었지만, 살고 싶은 마음에 속으로 온 밤을 염했더니 이튿날 아침에 기적으로 나아서 출근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2010년, 나는 광서장족자치구 북해시에 있었습니다. 6월 24일, 급성심부전 때문에 배 안에는 아직도 태독이 있어 주치의 4명이 48시간 내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 중의 우 의사는 내가 아마도 후사를 준비해야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 병원 간호사는 모두 나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나는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깨어난 후에야 알았지만, 그때 나는 사흘째였고, 귀가에는 남편이 염하는 파룬따파하오, 쩐산런하오 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남편은 아침에 여기로 달려왔는데 내가 눈을 떴을 때는 밝은 하늘을 볼 수 없고 겨우 어둠침침한 방안만 보였습니다. 흐릿한 가운데 남편의 몸 그림자를 보고 “왔어요!”라고 말했고 의사들은 이 목소리를 듣고 마침내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24시간 눈을 붙이지 못한 남편은 마침내 한시름을 놓았습니다.”

“일찍이 텔레비전의 보도는 나를 뒷걸음치게 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도한 부면적인 내용은 내 신변의 친인이 수련하는 파룬궁과는 천양지차였습니다. 호기심에 나는 파룬궁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를 알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당신의 책을 내가 좀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은 대법을 파괴하는 경찰이 집에 뛰어들어 빼앗아 갔습니다. 어느덧 2012년이 되었습니다. 나는 곳곳으로 수소문하던 끝에 ‘전법륜’책 한 권을 얻게 됐고, 3일 만에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읽고 난 후의 첫 번째 생각은 ‘사람은 왜 이렇게 얼떨떨한가!’였습니다. 자신이 명백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 때문에 스스로 탐구하지 못하는가? 남이 말하는 대로 주관 없이 따랐는가! 나는 자신의 저능함에 괴로웠습니다.”

“파룬따파는 나의 마음을 활짝 열어준 동시에 눈에는 대법 책에서 말한 상태가 나타났습니다. 눈에서 많은 눈곱이 나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대법에서 말한 것처럼 몸을 조정하는 것임을 알고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며칠 후부터 그런 나쁜 물질이 적게 나오더니 약 일주일 되자 눈은 밝은 하늘을 볼 수 있었고, 파룬궁의 5장 공법의 연마를 통해 몸은 뚜렷한 개변을 가져 왔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5년 동안, 나는 어떠한 약물도 쓰지 않았지만, 정신 상태는 아주 좋습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파룬궁 수련자들이 왜 파룬궁을 이렇듯 열애하는가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원래 이 책은 병을 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사람의 영혼을 구할 수 있습니다. 박해가 이렇듯 심각해도 수련자들이 포기하지 않는지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차오리핑은 편지를 아주 명백하게 썼다. 어떻게 믿지 않던 데로부터 파룬궁을 수련하게 됐는지에 대한 그녀의 깨달음은 아주 명확했다. 하지만 이런 편지가 법원장의 손에 넘어갔을 때 원장은 편지를 넘겨준 보안에게 한바탕 욕을 했다. 이는 사람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차오리핑이 자신의 경력을 써낸 것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정확히 대함으로써 죄를 짓지 말라고 권유해 준 것이 아닌가? 파룬궁이 그녀에게 위험을 제거해 주었는데 아직도 파룬궁을 이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자기 일생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할 수 있는가? 만일 원장이 생명 위험에 봉착했을 때, 피할 수 없는 재난이 있을 때 그가 당신에게 재난을 피할 방법을 앞당겨 알려 준 게 아닌가? 사람이 어쩌면 이렇듯 양지가 없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중공의 거짓날조만 믿고 중공의 파룬궁 박해에 동조하는 중공 패거리의 비애인 것이다.

사실 그들처럼 이렇게 잔혹한 박해 속에서 파룬궁 수련을 선택한 사람이 아직도 아주 많다. 단지 그들 혹은 그들 가족의 박해를 피하게 하려고 밍후이왕에는 이런 실명 보도가 없는 것이다. 지금 박해 당하는 사람에 대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실명과 경력을 모았을 뿐이다. 파룬궁에 대하여 아직도 정확한 인식이 없는 사람은 정말이지 잔혹한 박해 속에서 파룬궁 수련을 선택한 이런 사람에 대하여 요해해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사상 전변 과정 및 수련 후의 신체가 수익을 본 상황을 보면, 그들의 경력은 당신에게 어쩌면 정말로 조금의 깨우침이라도 있을 것이다.

원문발표: 2018년 1월 4일
문장분류: 시사평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4/359171.html

명혜망

글/ 대륙 수련생 구이쩐

[밍후이왕] 나는 올해 53세이며 헤이룽장 농촌에 살고 있다. 이전에 우리 여섯 형제자매는 모두 모 종교를 믿었고 게다가 텔레비전의 모함하는 선전을 믿고 파룬궁(法輪功)을 적대시했다.

2015년, 삯일을 하다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할머니 몇 분을 만났다. 7~80세 되는 할머니들이 모두 몸이 좋고 정력이 충족하며 열정적이고 선량한 것을 보니 텔레비전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무섭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들은 진·선·인(眞·善·忍)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고, 일을 함에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을 보니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사람들이었다. 점차 그 나쁜 인상은 사라졌다.

그 때 나는 여러 가지 병으로 괴롭기 그지없었다. 나는 이 파룬궁 수련생들과 한 동안 접촉한 후 파룬궁을 배우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나도 당신들과 함께 연마하렵니다.” 내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 나의 몸이 가벼워져 계단을 올라도 아주 쉬움을 느꼈다. 바로 이렇게 나는 파룬궁을 연마하게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나의 병이 다 나아 일신이 무병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속으로 사부님께 감사드리고 파룬따파(法輪大法)에 감사드렸다.

격동된 나는 ‘나는 이렇게 좋은 법을 얻었는데 반드시 집 식구와 자매들에게 알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 모 종교 신도들이어서 나의 말을 들으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서로 통화하여 내 말을 듣지 말라고 하며 아주 완고했다. 이 때문에 나는 몹시 괴롭고 조급했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2017년 말, 둘째 언니가 ‘골 결핵’ 진단을 받았다. 원래 약골이어서 내내 약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류머티즘관절염, 고혈압, 심장병, 뇌경색, 신장결석 등 십여 종의 병이 있었는데 이번에 또 병이 더해졌다. 벌써 한 달째 식사를 못했고 먹으면 토했다. 식구들은 식사를 할 때면 그를 멀리했다. 그녀가 토하고 토하니 모두들 괴로워했다. 현지의 몇몇 병원에서도 치료할 수 없어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에 가서 치료하려 했지만 형제자매들 중 누구도 간호하러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나를 찾아왔다. 나는 수련인이므로 상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내가 가겠다고 했다. 이 때 큰 오빠도 따라 가겠다고 했다. 오빠는 언니를 보살피러 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위장병을 치료하러 가려는 것이었다. 오빠의 위장병은 몹시 중해서 온 몸에 힘이 없고 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은 베이징으로 가게 되었다.

우리는 고속철도표를 연이은 좌석으로 3장을 사서 나와 오빠는 서고 둘째 언니를 세 사람 좌석에 눕게 했다. 언니는 말라서 장작개비 같았고 얼굴은 까매서 몹시 무서웠다. 그녀가 쉴 새 없이 토했다. 차 안의 사람들은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우리도 겁이 났다. 만일 잘못되면 이 차 안에서 어찌하겠는가? 둘째 언니는 자기가 죽으면 유골을 집에 가지고 가달라고 당부했다. 그 때 우리는 모두 가장 나쁜 준비를 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둘째 언니의 아들이 베이징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우리를 호텔에 묵게 했다. 나는 온 밤을 설치며 한 잠도 자지 못했다. 아침에 오빠는 위장병을 치료하러 갔다.

나는 언니에게 옷을 입히고 결핵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 위독한 언니를 보면서 나는 갑자기 나도 모르게 어디서 그렇게 많은 말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언니 보세요, 우리 집에 형제자매들 누가 병이 없는 사람이 있어요?, 오늘은 이 사람이 입원하고 내일은 저 사람이 입원하고 어디 건강한 사람이 있어요? 이게 무슨 모양이에요. 저를 보세요, 지금 얼마나 건강해요, 아무 병도 없잖아요. 내가 언제 입원한적 있어요? 내가 언제 약을 먹었어요? 내가 예전에는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 언니도 알잖아요?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여 이렇게 좋아졌는데 언니는 믿지 않았어요, 나는 언니의 친 동생인데 내가 언니를 해치는 말을 하겠어요? 이렇게 좋은 일이 자기 집까지 전해왔는데 언니는 믿지 않고……” 언니가 갑자기 물었다.” 너희 공법에는 무슨 요구가 있니?” 내가 말했다. “아무런 요구도 없어요, 그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우면 돼요.” 했더니 “그렇게 간단해?”, “그래요, 이렇게 간단해요.”, “그럼 외워보겠어!” 나는 한 글자 한 글자씩 그에게 읽어 줬다. 조카가 오늘은 ‘전문의 특진’을 볼 수 없게 됐다는 전화가 왔다.

언니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웠다. 그때부터 언니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 나에게 수련생 교류문장을 녹음한 것이 있었다. 언니는 들으면서 한 편으로는 그냥 외웠다. 나는 눈을 뜬 채 언니 몸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다. 그녀는 일분일초마다 호전되고 있었다. 조금씩 일어나 앉았고, 침대에서 내려와 물건을 들 수 있었으며, 오후에는 그녀에게 목욕을 시켜 주었다. 이전에는 온 몸이 아파서 문지를 수 없었고 만지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반시간 넘게 문질러 주었지만 아프단 말을 하지 않았다. 또 스스로 옷을 입었다. “나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 이 공법 참 대단하구나! 나는 열심히 외울 거야!” 언니는 침대에 올라가서도 계속 교류 문장을 들었다. 저녁때가 되자 배고프다고 해서 우리는 나가서 만두 두 곽을 사왔다. 언니는 두 개를 먹고 메스꺼워 했으나 토하지는 않았다. 또 딸기 한 근을 사왔다. 언니는 계속 외웠고 나는 10시가 되어 잤지만 언니는 계속 외웠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만두도 딸기도 다 없어졌다. 언니는 자기가 먹었다면서 조금도 메스껍지 않았고 토하지도 않았고 자꾸 먹고 싶다고 했다. 식욕이 돌게 되었다. 언니는 또 나에게 알려 주었다. 꿈에 키 큰 남자가 자기 손에 물건 하나를 놓아주었다 (집에 돌아간 후 사부님 법상을 보더니 격동해서 말했다. 바로 이 분이야!)고 했다. 언니는 손목에 류머티즘 증상으로 딴딴한 혹이 나 있었는데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 하루 밤 사이에 손목이 펴지고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알려 주었다. “사부님께서 언니를 책임지고 계셔요.”

둘째 언니가 말했다. “힘이 있어! 날 것 같아! 어떻게 사부님께 감사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 사부님께서 나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셨어!” 언니는 좋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 이것은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다.

오빠는 호텔에 돌아와서 둘째 언니의 변화를 보더니 그 자리에서 즉각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우기 시작했다.

이튿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니 ‘골 결핵이며, 약물로 간이 손상되었다’ 고 했다. 언니가 말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약을 먹었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 이 약을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약도 먹지 않을 거야, 그저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 사부님은 좋습니다.’를 외우고 파룬궁을 연마할거야.”

일주일이 지나서 우리는 집에 돌아왔다. 식구들은 둘째 언니의 변화를 보고 놀란 나머지 자기 눈을 의심했다. 다 죽게 된 사람이 어찌 이렇게 건강해졌단 말인가? 언니가 약 한 알 먹지 않고 ‘파룬따파하오’ 만을 외워서 나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는 대법의 신기함이라고 했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깊이 생각하고 있음을 보아낼 수 있었다. 며칠 후부터 막내 여동생이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고 또한 약골이 건강을 회복했다.

둘째 형부는 언니의 변화를 보더니 파룬따파에 대한 태도를 철저히 개변했고, 언니의 호신부 두 개를 가져가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 3일 후, 둘째 형부의 20여 년간의 신장병이 나았다.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웠던 유전병이 철저히 나았던 것이다. 그는 친척을 만나기만 하면 ‘파룬궁은 아주 신기해! 정말 신기해!’ 라고 말한다.

둘째 언니의 건강은 아주 좋다. 먹고 마실 수 있으며 세끼 밥을 꼭꼭 챙겨 먹고도 늘 배고프다고 한다. 20여 일 동안 몸무게가 4kg이 늘었고 얼굴표정도 아주 밝아졌다. 며칠 전 병원에 가서 재검사 했더니 혈압이 원래의 85에서 54로 내려갔다. 언니의 병을 보았던 의사는 깜짝 놀랐다. 언니는 그에게 ‘파룬따파 하오, 쩐싼런 하오’를 외워서 나았다고 했다. 의사가 말했다. 이전에 “파룬궁이 병을 낫는데 아주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믿지 않았는데 이번엔 믿게 되었어요.”

우리 자매들 간에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또 새로운 소식은 큰 오빠의 위장병이 나아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막내여동생의 과민성도 좋아졌다. 큰 언니도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우게 되었고…… 오늘도 좋은 소식, 내일도 좋은 소식이었다. 파룬궁을 연마하여 복을 얻는 것은 우리 집의 큰 사건이었다.

동네 어르신과 마을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말한 것은 모두 파룬궁을 날조한 것이며, 텐안먼 분신자살은 속임수다.’ 라고 하신다. 사부님께서는 살생하지 말라고 하셨고, 이전에 우리는 모두 거짓말에 속았다. 파룬궁은 가장 바르고 가장 바르다. 인연 있는 모든 사람이 모두 명백해 지고, 모두 파룬따파의 불광 속에 잠길 수 있기를 기원한다. 자비하시고 위대하신 사부님의 고생스런 구도를 저버리지 말며, 더는 만고의 기연을 놓치지 말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우리 집 모든 사람은 자비하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큰 절 올립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17년 12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27/358325.html

명혜망

파룬궁, 파룬따파는 도대체 무엇인가?


[밍후이왕] 파룬궁(法輪功)은 바로 파룬따파(法輪大法)다. ‘파룬따파는 도대체 무엇인가?’는 파룬궁수련생이 진상을 알리면서 자주 듣는 질문이다. 파룬궁이 박해받는 진상을 잘 아는 사람들도 늘 이 문제를 제기한다. 아래에 이에 대하여 설명을 해보고자 한다.

그럼 ‘수련(修煉)’ 이 개념부터 말해보자.

수련은 인류 문명에서 오래되고 오묘한 영역이다. 수련은 통상적으로 심법(心法-원칙이라고도 부른다)과 공법(功法)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내포는 철학이나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범주를 벗어났다. 공법은 일반적으로 몸을 닦는데(修身) 쓰이는 부분이다. 심법은 사람에게 마음을 닦도록 가르치고 경지를 제고하게 하는 관건이다. 수련의 정화(精華)는 예부터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연구 토론되거나 보급되지는 않았지만 인류, 물질이 존재하는 각개 공간, 생명 및 우주의 신비함을 밝힐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중국문화와 서양문명에서 각종 흔적을 남겼다. 중국 고대의 태극(太極)・하도(河圖)・낙서(洛書)・팔괘(八卦), 인도의 고대 요가, 서방의 일부 수행법은 모두 수련의 오묘한 비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과 심법의 실전으로 현대인은 이미 원래의 그 깊은 뜻과 접촉하기 힘들어졌다.

파룬따파(파룬궁)는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이 전한 상승불가(上乘佛家) 수련대법이다. 우주의 특성 ‘진선인(眞善忍)’을 원칙으로 하며 5세트의 완만하고 아름다운 동작을 포함하는데 1992년부터 중국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전수됐다. ‘진선인(眞善忍)’은 우주의 근본특성이고 우주에서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이다. 파룬따파를 수련함에 있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반복적으로 ‘전법륜(轉法輪)’을 통독하며 책에서 논술한 대로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개인 심성을 제고하고 연공을 보조로 하면 단기간에 상상하기 어려운 높은 차원에 도달해 반본귀진(返本歸眞-원래의 순수하고 순박한 상태로 돌아감)할 수 있다.

리훙쯔 선생님이 전한 파룬따파는 진선인(眞善忍)을 수련의 표준으로 하므로 선(善)을 닦고 평화롭다. 모든 활동은 공개적이고 자발적이며 무료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련자는 모두 사회의 일원이다. 개인으로 말하면 파룬궁을 수련하면 병이 제거되고 사람이 성실, 선량, 평화로워질 뿐만 아니라 지혜도 열려 점차적으로 인생과 우주의 비밀을 꿰뚫어 보는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파룬궁을 수련하면 사회의 안정, 포용과 평화를 증가시키고 사람의 정신생활 수준을 제고시킨다. 그래서 사람에서 사람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 수련자는 나날이 많아졌다.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간 파룬궁은 중국과 세계 50여 개 나라와 지역에 전해져 각 정부와 단체에서 700여 개의 표창과 지지를 받았다. 현재 전 세계 수련자는 1억 명을 초과한다.

1999년 7월 20일부터 중공(중국공산당)의 일부 권력자는 파룬궁 창시자에 대한 질투로 선량한 파룬궁 수련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중의 훔쳐온 권력으로 국가 선전기구를 협박해 파룬궁을 모함하고 테러를 가했으며 사회에서 간격과 원한을 조성했다. 3년 이래 1억이 넘는 파룬궁 수련자를 무고하게 박해하고 십 수만 명을 감옥, 노동교양소와 정신병원에 가두었으며 수천 명을 무고하게 박해해 살해했는데 이런 박해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번 박해는 중국의 파룬궁수련생을 겨냥했을 뿐만 아니라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고 인류의 정의, 도덕과 양심에 대한 잔혹한 훼멸이다. 그리하여 각국 파룬궁수련생은 최선을 다해 각국 정부와 전 세계인들에게 이번 박해의 진상과 사악한 정도를 알리고 있다.

3년 이래 심상치 않은 잔혹한 박해 중에서 많은 파룬궁수련생은 믿음을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수련 중에서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갈수록 이성적이 되었고 성숙되었다. 이 단체는 거대한 어려움 속에서 주목 받을 만한 용기와 평화로운 품성을 체현해냈다. 파룬궁수련생은 사람들에게 순정함을 주었고 박해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경지를 보여주었다. 또 전 세계 파룬궁수련생이 공동으로 평화로운 여정을 걸어와 수련계에서 찬란한 역사적 본보기를 세웠고 인류 도덕수준을 제고시키는데도 중요한 촉진 작용을 일으켰다.

파룬따파는 수련자를 용감하고 성실하며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육성했다. 현재 대법제자들은 자신의 언행으로 세인들에게 파룬따파를 실증하려고 노력하며, 더 많은 사람을 도와 이 천재일우의 기연을 잡고 반본귀진(返本歸眞)의 노정에 올라서게 했다. 머지않은 장래에 파룬따파의 비할 바 없는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세상에 뚜렷이 드러나게 되면 복이 있는 사람들은 그 획기적인 중대한 역사시기를 운 좋게 목격하게 될 것이다.



문장발표: 2002년 7월 5일
문장분류: 파룬궁 소개
영문위치: http://www.clearwisdom.net/emh/articles/2002/7/18/24242.html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2/7/5/32819.html

명혜망

— 헤이룽장 우창시의 호인(好人) 장옌차오의 이야기


[밍후이왕] (밍후이왕통신원 헤이룽장보도) 12년 전 3월 28일은 황치촌(黃旗村) 마을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생 장옌차오(張延超)가 경찰에게 납치되어 다시는 돌아 올수 없었던 비분하고도 비통한 날이다.

2002년의 이른 봄,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날, 헤이룽장(黑龍江) 우창시(五常市) 라린진(拉林鎮) 시황치촌(西黃旗村)의 청년 장옌차오는 그를 낳아주고 키워준 흑토를 영원히 떠났고, 그를 생각하고 그를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을 떠났다. 몇 년 이래,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장옌차오가 살해당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장옌차오가 좋은 사람이 되려한 것 때문인가? 그가 마을 사람 모두에게 진심으로 잘 대해준 것 때문이란 말인가? 정말 아직도 하늘의 이치가 있다는 것인가?


장옌차오(張延超)

장옌차오가 박해로 사망했지만 12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시황치촌의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끊임없이 장옌차오를 말하고 있다. 모두가 장옌차오에 대한 평가는 이상하리만치 모두 일치했다. “장옌차오는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누구도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우리 마을에서 가장 좋은 사람입니다!” 지난 일이 눈에 선한데, 모든 시작은 1999년의 그 겨울이었다.

대법을 얻은 뒤의 거대한 변화

1997년 말, 장옌차오는 하얼빈시(哈爾濱市)로 가서 일을 했는데, 난방의 총각을 만났다. 이 난방인은 매일 짬을 내어 책 한 권을 보았다. 어느날, 남방인은 장옌차오에게 이 책을 권하면서 그도 책을 잘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장옌차오는 책을 받아 보자마자, 책표지 위의 ‘전법륜(轉法輪)’ 세 글자가 뜻밖에 그의 눈앞에서 반짝반짝 빛나면서 바로,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인과 일찍이 만나지 못해 한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것은 보통 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꼭 열심히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숨에 ‘전법륜’을 다 보았다. 장옌차오는 ‘전법륜’은 사람에게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해 반본귀진(返本归真)하게 하는 귀중한 책임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그는 다시는 ‘전법륜’을 놓지 않았다.

장옌차오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해 오래지 않아, 몸에 강렬한 반응이 생겼다. 그날 그는 수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 했는데, 설사가 너무 심해 탈진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장옌차오는 이것은 대법사부님께서 그를 관할하셔서 그의 몸을 청리해 주시는 수련과정 중의 한 상태임을 깨달았다. 그는 매일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먹을 것을 보내고, 약을 보내고, 차를 집 앞까지 몰고 가서 그를 병원으로 보내려 하고, 말로 권했다……그러나 장옌차오는 그것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겨우 이틀 후, 원기가 왕성하고, 얼굴색이 좋고, 풍만하고 생기발랄한 장옌차오가 마을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다. 모두 자신의 눈이 믿기지 않았다. 그저께만 해도 초췌하고 얼굴색이 어둡던 사람이 오늘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여위었던 사람이 뜻밖에 단지 이틀 사이에 가장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그야말로 불가사의했다. 이웃집 아저씨는 “사람이 살이 찐다해서 갑자기 살이 찌는 것이 아니잖아?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가! 이것은 너무 빠르다! 파룬궁은 너무 신기하다,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장옌차오는 병 없이 온몸이 가벼운 미묘한 감수를 이해했다. 동시에 그의 일언일행은 또 더욱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게 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같지 않음을 보게 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불리는 그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몇 십 명, 심지어 몇 백 명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장옌차오는 바로 몇 백 명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배추를 심은 이야기

1999년 봄은 가물었다. 장옌차오가 심은 콩은 마을 사람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가물어서 싹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가 잘 자라도록 땅에 물대기’를 시작했다. 장옌차오의 집에는 차 한대가 있었는데, 그는 차를 몰고 도와 물을 길어 땅에 물을 댔다. 땅이 많고 차가 적어서,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물을 길어 땅에 대어 모가 자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물을 길어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은, 돈을 주는 사람도 있었고, 또 돈을 주지 않는 사람도 적잖게 있었다. 그러나 장옌차오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매일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까지 싱글벙글거리며 모두를 위해 분주히 바삐 보냈다.

맨 마지막 한 집의 땅에 물을 다 댔을 때는, 농사짓는 과정에서 맨 마지막에 모가 잘 자라도록 땅에 물을 대는 시기도 끝났을 무렵이었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 모두 숨을 좀 돌렸을 때 날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물을 길러 대주었던 장옌차오의 콩밭에는 물 한 방울도 대지 못했음을 발견하고 모두 놀랐다. 옥토였던 장옌차오의 땅은 바짝 마른 묵정밭으로 변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미안해하는 표정과 위안의 말에, 장옌차오는 인자하게 “괜찮아요! 다시 다른 걸로 심으면 되죠!”라고 말했다. 말은 이렇게 했으나 생산량이 높고 경제 수입이 높은 가을철 작물을 심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어쩔 수없이 생장기가 짧은 가을 채소를 심을 수밖에 없었다. 장옌차오는 콩밭을 배추밭으로 바꿔 심었다. 농가에서 보기에는, 채소를 심은 수입은 경제 작물 콩의 수입과 비교할 수 없는바, 장 씨 집의 경제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닐것이라 모두 걱정했다.

장옌차오의 집 배추는 매우 빨리 싹이 텄고, 채소 모종은 매우 건실했다. 마을 사람들은 장옌차오에게, 화학비료를 사서 따라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가을이 되어도 통이 내려앉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옌차오는 모두의 건의를 인정하고 진으로 가서 화학비료를 구매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다른 처리할 일이 생겨 화학비료도 제때에 주지 못했다. 그가 시간이 있어서 화학비료를 사려 했을 때에는, 하늘도 무심하게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는 3일 동안이나 내렸는데, 배추가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게 뻔히 보였다. 비가 멎고 날이 개이자, 푸르싱싱한 배추는 자라나서 밭이랑을 막아놓아, 사람이 밭에 들어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옌차오가 화학비료를 사서 돌아와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자 아내는 장옌차오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장옌차오는 아내에게 “일체는 자연스러움에 따릅시다. 땅위에 심었지만, 거둬들임은 하늘에 달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내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약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은 것 때문에 배추가 통이 내려앉지 않게 된다면, 반 헥타르(半坰)가 넘는 땅의 배추를 누구에게 팔겠는가? 그때면 땅위에서 썩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은 배추가 자라는 속도는 사람을 기쁘게 했다. 키도 컸을 뿐만 아니라, 모두 통이 내려앉았다. 가을이 되자 포기마다 모두 통이 꽉 차서 내려앉았고, 포기마다 크고 속이 꽉꽉찼다. 장옌차오가 심은 통배추에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맛도 좋아 생것으로 먹어도 단맛이 났고, 익힌 뒤에도 부드럽지만 물렁물렁하지 않았다. 전 촌의 사람들은 모두 장옌차오의 통배추를 사서 겨울에 저장하고 배추절임을 담갔다. 당연히 배추의 질이 좋아 자연히 또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맨 마지막에 결산했는데, 수확이 콩보다 나았다.

모두 몹시 기뻐했는데 결과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보기에는 ‘일마다 순리롭지 못하고 걸음마다 고비’인 장옌차오가, 어떻게 우연하게 하느님의 총애가 있는지? 장옌차오의 외삼촌댁은 사람이 말을 시원시원하게 했는데, “선악에는 인과응보가 있는바, 좋은 사람은 좋은 보상을 받습니다. 우리 장옌차오가 대법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으로 되려 했습니다.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그림자마저 모두 그를 좋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마땅히 좋은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전 촌의 사람은 장옌차오의 이야기를 통해, 파룬따파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수박을 심은 이야기

장옌차오가 심은 수박은, 현지에서 명성이 매우 높았다. 그의 좋은 명성은 그의 진실함과 선량함으로 세워진 것이다.

어떻게 수박을 잘 심을지는 일 년 내내 농촌에서 생활하는 농민들에게는 몹시 어려운 기술이 아니었고, 또 절대 무슨 최상의 비밀적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심태였다. 어떠한 심태로 수박을 심느냐가 중요했는바, 질이 좋고 나쁨, 맛있고 맛이 없다는 것의 구별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반적인 수박은 농종(農種)인데, 빨리 자라게 해서 수확을 높이기 위해 모두 화학비료로 성장을 촉진했다. 이러한 수박은 맛이 보통이고 또 오래 보존할 수 없었으며 쉽게 부식되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심은 수박은 걱정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었고 간단했으며, 인력 물력도 적게 들었다. 때문에 절대다수의 수박농(瓜農)은 모두 이런 재배방식을 채용했다.

대법을 학습한 뒤, 장옌차오는 좋은 사람의 심태로 수박을 심었다. 첫 번째는 바로, 그는 전통적인 재배 방식을 회복해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농가 비료를 사용하려고 결정했다. 그는 집마다 가서 닭똥 및 기타 유기 비료를 사들여서 땅에 묻어 밑거름을 했다. 비료 원료가 크게 바뀌어, 장옌차오의 생산원가, 경제적, 물질적, 인적인 부담이 컸다. 친척, 친구마저 그를 대신해 ‘가치가 없다’,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한다’, ‘부질없는 짓을 한다’고 말들이 많았다.

장옌차오는 태연히 웃고 넘어갔으며, 그것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매일 부지런하게 땅을 갈고 김을 매면서 바쁘게 보냈다.

얼마만큼 부지런하게 일하면 얼마만큼의 수확이 있는 것이다. 장옌차오는 수확의 계절을 맞이했다. 장씨 집의 수박은 즉시 잘 팔렸다. 사람들은, 단맛이 딱 좋고 크며 껍질도 얇고 장시간 보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이런 수박을 심는 사람이 없었다며, 마을 사람들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소식은 매우 빨리 전해졌다. 장옌차오의 고향과 몇 리 떨어진, 어느 한 군용 비행기장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 뒤, 군용차를 파견해 하루걸러 한 번씩 와서 한 차씩 사갔는데, 매 번에 모두 천근을 넘게 사갔다. 정말 좋은 물건은 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씨 좋은 사람은 바른 심태로 수박을 심고, 질 좋은 수박을 수확하니 잘 팔려 돈이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이번에 더욱 깨달았다. “장옌차오가 심은 수박은, 그것은 바로 좋은 마음으로 좋은 보상을 받은 것이다!”

위폐를 찢은 이야기

장옌차오는 수박을 팔기위해 하얼빈 도시 지역으로 왔다. 수박 한 차는 순조롭게 잘 팔았다. 저녁 무렵에 돈을 정리할 때, 그는 위조를 알아보기 어려운 3, 4백 위안의 위폐를 발견했다. 장옌차오는 현장에서 곧 이 위폐들을 찢어버렸다. 어떤 ‘마음씨 좋은 사람’은 그에게 “찢지 마세요. 이 돈은 매우 비슷하네요. 써버릴 수 있어요!”고 권고했다. 장옌차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에게 “나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해쳤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해치면 안 됩니다.”고 말했다. 말을 하는 사이에 근 4백 위안의 위폐는 종이 부스러기로 되어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그가 너무 바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더욱 많은 사람은 이에 대해 인상이 깊었다.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확실히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다!’

‘우리 집 차’에 대한 이야기

장옌차오의 집에는 자동차 두 대가 있는데, 이것은 전 촌의 어른이나 아이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총각은 친절하게 이 두 대의 차를 ‘우리 집 차’라고 불렀다. 이것은 전 촌의 사람이 누구나 일이 있으면 장옌차오의 차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두 싱글벙글하며 모두의 요구를 만족시켰고, 누가 부탁해도 빌려주었다. 이 일로 친척들이 확실히 장옌차오를 좀 ‘멍청’하다고 말했다.

과일과 채소가 여무는 계절이 되면, 일부 차가 없는 이웃은 장옌차오에게 자기 집 농산품을 그의 차에 실어, 가는 김에 장으로 가서 팔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저녁 무렵에 그는 또 사람을 태워 돌아오기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이 일체는 모두 무료였다. 이러한 일은 수시로 발생했다. 얼마나 했는지를 장옌차오 자신도 똑똑히 말하지 못했다.

어떤 때에는 이런 일도 일어났다. 어느 한 번, 한 이웃은 장옌차오에게 몇 포의 화학비료를 부탁했다. 돌아올 때 이웃은 일이 좀 있어서 따라 돌아오지 못했다. 화학비료를 집까지 싣고 가서 몇 십 포의 화학비료를 집안까지 옮겨주었다. 그는 지쳐서 땀에 흠뻑 젖었으며 신고 있던 그 포말 슬리퍼마저 비틀려 터졌다. 이웃은 천만 번 사례를 드렸으나, 장옌차오는 그의 집 물 한 모금도 마실 줄 몰랐다.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하다

1999년 7월, 중공(중국공산당)은 파룬궁을 박해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대변인 매체에서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모독함이 천지를 뒤덮을 듯이 중화대지에 해를 끼쳤다.

2000년 초 겨울, 장옌차오는 베이징으로 청원하러 가서, 자신이 파룬따파를 수련해 심신에 이로움을 얻은 실제 상황을 알렸다가 베이징에서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당시 라린(拉林)분국, 진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의 악독한 경찰 추이얼(崔二)이 소식을 들은 뒤, 장옌차오의 장모에게 “당신의 사위는 반혁명 길을 걷습니다. 우리는 베이징으로 마중하러 가는데, 당신의 집에서 노비를 꺼내야 합니다.”고 말했다. 생활이 극히 어려운 장인집에서는, 추이얼에게 2백 위안을 갈취 당했다. 장옌차오는 베이징에서 붙잡혀 돌아온 뒤, 우창(五常) 신화산(杏花山) 제2구치소에 갇혔다. 장인은 또 관계자를 찾아 늙은 소 한 마리를 팔아 부탁하여, 또 악독한 경찰에게 천 위안을 갈취 당했다. 그제야 장옌차오는 돌아왔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뒤, 장옌차오는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는 수련의 여정을 시작했다. 2002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장옌차오와 다른 한 대법제자는 영하 30도의 추운날씨를 무릅쓰고 인근 마을로 파룬궁 진상자료를 배포하러 갔다. 막 뤄자(羅家) 워바오툰(窩堡屯)에 도착해서, 곧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과 마주쳤다. 그가 함부로 외친 것 때문에 마을의 진상에 명백하지 못한 한 무리의 촌민들이 덮쳐 장옌차오를 한 바탕 혹독하게 구타했다. 귀는 또 칼에 찍혔다. 장옌차오는 손으로 피가 흐르는 상처를 막으면서 큰 소리로 ‘저는 좋은 사람입니다!’고 외치면서, 진상자료를 꺼내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게다가 상세하게 마을 사람에게 파룬궁이 박해당한 진실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촌민은 진상을 명백히 안 뒤, 장옌차오가 그들에게 선사한 진상 자료를 들고 부끄러워하며 잇달아 떠났다.

부상을 입은 장옌차오가 집으로 돌아온 뒤, 선혈은 이미 솜옷을 흠뻑 적셨다. 장모는 그에게 좀 조용히 있으라고 권했으나, 그는 오히려 “대법제자의 사명은 마땅히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대법제자의 자격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부상당한 아픔을 참으면서, 또 진상자료를 찍으러 갔다.

좋은 사람이 박해당하다

바로 이렇게 일생을 모두 마을 사람들을 위해 성실하게 대가를 치르고도 보답을 구하지 않은 좋은 사람은, 오히려 파룬따파를 수련했다는 이유 때문에 사당의 악독한 경찰에게 이유 없이 납치당했고, 또 고문박해로 사망했다.

2002년 3월 28일 오전, 우창시 훙치향(紅旗鄉)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 구지웨이(賈繼偉) 한 패는 허우황치(後黃旗) 인근에서 장옌차오(張延超)를 납치했다. 그리고 장옌차오가 자가용 진와패(金蛙牌) 농업용 삼륜차를 판 돈 2천 8백 여 위안을 강탈해갔는데(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음), 장옌차오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구지웨이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오히려 화를 내며 “당신들 대법제자는 때려 죽여도, 당신은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는데, 당신이 아직도 감히 우리와 맞서.”라고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훙치파출소에서 장옌차오는 구지웨이 등 여러 사람에게 악독한 구타를 당했다. 악독한 경찰들은 무차별폭력을 가한 뒤에 또 흰 플라스틱관(소백룡이라고 속칭함)으로 장옌차오를 혹독하게 구타했다. 이런 형의 형구는 일곱 개의 구멍(눈ㆍ귀ㆍ코 및 입을 합한 일곱 개의 구멍)에서 피가 나게 할 수 있으나, 오히려 외상흔적은 없었다. 악독한 경찰들은 악행을 행한 뒤, 상처투성인 장옌차오를 우창시 공안국 제2구치소로 납치해갔다. 당시 제2구치소에서 늘 대법제자를 구타하는 악독한 경찰이, 장옌차오가 이렇게 심각하게 구타당한 것을 보더니, 깜짝 놀라서 “와, 좋아! 이 훙치의 구지웨이가 우리에 비해 더 악독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다 한 뒤, 이 인간의 쓰레기는 또 다른 악독한 경찰과 결탁해 또 장옌차오에 대해 무차별폭력, 전기고문을 가했는데, 한 시간 넘게 광적으로 폭행을 가했다. 그들은 구타하다 지쳐서야 손을 멈추었다.

그날 오후, 훙치 파출소의 악독한 경찰은 또 장옌차오를 우창시 감옥으로 압송했다. 장옌차오는 그곳에서 또 우창시 공안국 악독한 경찰 천수린(陳樹森), 잔즈강(戰志剛), 우창시 ‘610’의 악도 황잔산(黃占山), 주셴푸(朱憲福), 푸슈춘(付秀春) 등 한 패에 의해 폭력적인 학대를 당했다.

넷째 날인 3월 31일, 세 차례나 고문학대를 당해 이미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왼쪽 다리가 구타로 부러진 장옌차오는, 죄수 호송차에 끌려 하얼빈시공안국7처로 압송 당했다.

4월 1일, 하얼빈공안 7처의 사람들이 모르는 40여 종의 형구를 사설한 고문 방안에서, 악독한 경찰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장옌차오에 대해 잔인무도한 고문으로 괴롭혔다. 큰 괘에 올리기 고문(上大掛), 호랑이의자 고문, 소백룡으로 구타하기, 전기 고문 등으로 괴롭혔는데, 겨우 하루사이에 장옌차오는 학대로 사경을 헤맸다.

4월 6일, 악도들은 장옌차오의 시신을 하얼빈시공안국 구치소(야쯔취안(鴨子圈)이라고 속칭함) 비정상적 사망 해부실로 옮겼다.

장옌차오가 실제 사망한 날짜는 지금까지 분명하지 않다. 우창시 ‘610’악도 푸슈춘은 사건이 발생한 뒤에 다른 사람에게 “장옌차오는 하얼빈공안국 7처에서 이틀도 되지 않아 구타로 죽었습니다.”고 한 적이 있다.

강제로 화장하다

장옌차오가 하얼빈으로 보내진 뒤부터, 가족에게 그의 소식이 끊겼다. 그의 아내 관잉화(關英華)는 사처로 가서 알아보다가, 그도 불행하게 악독한 경찰에게 납치당해 악명이 극히 높은 완자(萬家) 노동교양소로 납치당해 2년 동안 박해를 당했다. 그녀는 2004년 1월 17일에 출소한 뒤, 지금까지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

2002년 4월 27일 저녁, 우창시 공안국 라린(拉林)공안분국에서는 갑자기 장옌차오의 가족에게 통지를 내려, 장옌차오는 단식을 한 이유로 사망했다고 하며, 가족에게 즉시 가서 시신을 식별해 화장하도록 했다. 4월 28일, 29일에 장옌차오의 두 남동생과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가 하얼빈 공안국으로 가서 이틀을 기다려도, 장옌차오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 단지 몇 번이나 그들에게 화장한 서명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지만 친인들은 당연히 서명을 하지 않았다.

4월 30일, 가족과 소식을 듣고 서둘러 온 마을 사람들의 강력한 요구로 마지못해 시신을 보는 것을 허락했다. 조건은, 단지 가족이 가는 것만 허락했을 뿐이고, 시신을 본 뒤에 반드시 서명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자신이 감당하라는 것이었다.

장옌차오의 가족은 하얼빈시공안국 구치소로 끌려갔다. 뒤이어 서둘러 온 마을 사람은 밖에서 엄밀한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가족을 마중한 사람은 60여 명의 완전 무장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경찰이었는데, 그날 하얼빈시 다오리구(道裡區)와 둥리구(動力區)공안분국에서 임시 파견해 온 사람이라 했다.

장옌차오의 가족은 20여 명 경찰에게 소름이 끼치고 공포적인 방안으로 끌려갔다. 어두컴컴한 등불 아래에서 그들은 방안에 몇 십 개의 시체가 있었는데, 따로따로 유리 창문이 있는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친인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위에 장옌차오의 시신이 있었는데 참혹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한 쪽 눈은 없었으며, 입은 벌리고 있었고 치아는 완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래턱은 구타로 깨졌고 한 쪽 다리는 구타로 부러졌다. 현장에서, 이 사람은 온 지 이미 21일이 된다고 했다.

가족의 참사에 직면해, 비통하여 죽고 싶은 가족은 단호히 화장서 위에 서명함을 거부했다. 하얼빈시공안국 7처의 악독한 경찰들은 즉시, 만약 협력하지 않고 소란을 피운다면 곧 반혁명으로 간주해 붙잡겠다고 위협했다. 악독한 경찰은 거듭 장옌차오는 단식으로 사망했다고 딱 잡아뗐다. 게다가 가족 앞에서 장옌차오의 해부당한 시신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내장을 꺼내 가족에게 보여주어, 친척들은 모두 멍해졌다.

악독한 경찰의 위협 하에, 주견이 없는 장옌차오의 둘째 삼촌은 부들부들 떨면서 화장서 위에 서명을 했다. 이때 악독한 경찰은 놀라 멍해진 가족에게 위선적인 웃음을 드러내며, “당신들은 협력을 매우 잘했습니다. 화장하는 일체 비용과 차비는 우리가 전부 도맡아 처리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이 장면을 친인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라린 공안분국 판리웨이(範立偉), 훙치향 정부의 간부 구충(賈從), 우창시 공안국 악독한 경찰 잔즈강, 훙치향 시황치대대 사당 지부서기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이 비참한 장면을 목격했고, 이 사람들도 이번 폭행 참여자와 사정을 아는 사람이다.

동시에 이것도 친인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의혹스럽게 한 장면이다. 구타로 20여 일 동안 사망한 사람을, 당국에서는 무엇 때문에 기어이 그에게 배를 갈랐는지? 해부한 지 20여 일 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또 선혈이 낭자한지?

좋은 사람의 장례

당시 장엔차오의 아내는 납치감금을 당했고, 그의 딸은 집이 있어도 돌아갈 수 없었다. 장옌차오의 다른 친인이 그의 유골을 받들고 시황치촌으로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장옌차오의 장례에 참가했다. 한 노인은 심각한 기관지염, 천식에 걸려 빨리 걷지 못해 다른 사람이 모두 묘지에 도착했으나 노인은 그제야 절반을 걸어갔다. 한 사람이 노인에게 가지 말라고 권고하자, 노인은 “이 보기 드믄 좋은 사람을 내가 그를 보내러 가지 않으면, 나는 양심에 찔리네!”라고 했다.

전 마을 사람은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이끌며, 근 2백 명 되는 사람이 장옌차오의 장례에 참가했다. 작은 유골함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20여 일 전에만 해도 얼굴이 싱글벙글하고 씩씩하던 젊은이가, 전 마을 사람이 모두 좋아하고 신뢰하던 좋은 사람이, 뜻밖에 애매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그를 낳아주고 키워준 시황치촌을 떠났음을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위로는 8,90세인 노인에서 아래로는 5,6세인 아이까지, 다시는 마음속의 비분을 억제하지 못했다. 장례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은 대성통곡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거세게 흐르는 황소하(牤牛河)는 노호하고, 구불구불한 라린하(拉林河)는 울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울음소리는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들었다. 소식에 따르면, 10여 리 밖의 촌마을에서까지 모두 시황치촌 사람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한다. 이 비분의 울음소리는 푸른 하늘을 향한 성토였다.

장옌차오가 구체적으로 희생당한 날이 지금까지 분명하지 못하다. 그는 2002년 3월 28일에 납치를 당했는데, 그날부터 친인들은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매년 3월 28일은, 시황치촌의 마을 사람들이 장옌차오에게 제사를 지내고 추모하는 날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분명히 알 수 없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뜻밖에 경찰에게 이렇게 무참하게 구타당해 죽었는지? 그래 좋은 사람이 되려한 것이 왜 또 유죄인가? 옌차오야! 너는 억울하게 죽었다!’


문장발표: 2014년 3월 22일
문장분류: 대륙소식> 더욱 많은 박해사례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3/22/289005.html

명혜망

기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비는 낮은 곳으로 떨어져 만물을 적시고 햇빛은 산천을 비추며 보답을 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둘 다 세상의 명리밖에 있고 세간의 득실과 우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에 들어가지 않아야 밖으로 해탈할 수 있고 이익지심이 있으면 반드시 재물에 끌려가고 욕망이 있으면 반드시 정사(情絲)에 사로잡힌다. 수련자가 만약 아직 사람 마음이 있으면 세간의 어떤 물건에도 끌려갈 수 있다.

우리는 사람 속에서 수련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이런 복잡한 환경에서 해탈해 나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보고 문제를 고려하는 기점은 영원히 사람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청풍이 물위를 거닐 듯 산림을 지나지만 바람은 그곳에 빠져들지 않는다. 오고 갈 때 세간의 어떤 물건도 가져가지 않고 수련하는 사람은 세간에 있지만 마음은 그 속에 없고, 사람 속의 어떤 물건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렇게 수련해야 자유로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 속에서 수련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속인과 어떤 형식상의 구분이 없이 단지 법공부를 하고 사상 속에서 끊임없이 승화해 점차 사람의 사상관념과 사유방식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수련하면 속인의 복, 사람 속의 아름다움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수련의 목적은 이런 것을 위한 것이 아니고 더욱 높은 층차로 승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사상이 사람 속에 있다. 내가 좀 잘 수련했기에 내 몸은 마땅히 좀 더 좋아질 것이고, 내가 잘 하면 마땅히 일정한 복을 받을 것이며, 내가 많은 사람을 탈퇴시키면 나의 장사는 마땅히 더욱 번창할 것이고, 내가 대법을 굳게 믿기에 우리 집안은 순조롭게 변할 것이다 등등이다. 이런 것은 모두 초범적인 수련과 사람속의 득실을 연결한 것이다. 사실 그들 둘은 어떤 관계도 없다. 하지만 어떤 수련인은 이렇게 생각하고, 특히 사람 마음이 중한 수련인은 무의식 중에 수련을 사람 속에서 좋은 점을 얻는 일종 방식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수련으로 신과 값을 흥정하는 식이고 기점을 사람 속에 맞춘 것이며 사람 속의 물건을 얻기 위해 수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과 물론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다.

진주 상자를 사고 진주는 되돌려 주는 이야기와 같다. 구매자의 취사선택이 적당하지 않아 포장만 사고 진주를 버린 격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수련인은 원신의 운반체인 육체 및 육체가 존재하는 공간의 모든 것을 너무 중히 보는 것이고, 반대로 반본귀진해야 수련의 근본이라는 것을 잊은 것과 같다.

수련은 얼마나 신성하고 얼마나 엄숙한가? 그러므로 일할 때의 동기 및 일하는 기점(당신이 아주 잘한다는 일을 포함해)을 엄숙하게 찾아봐야 하고 사람 마음의 사욕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바르고 좋게 수련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지금 단계에서 약간의 체득이며 적절하지 않으면 수련생이 자비로 시정해주시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17년 9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9/28/354284.html

명혜망

美언론 “中공산당, 산 사람 장기 적출해”


[밍후이왕] 지난 9월 29일 미국 언론에 ‘믿기 힘든 사실(Hard To believe)’이라는 한 다큐멘터리가 공개 방영돼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다큐는 최근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수련생의 장기를 적출한 만행을 다룬 것으로 언론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장기이식을 위해 파룬궁수련생들을 집단 학살했고, 게다가 당국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한 시간 정도 분량으로 중국공산당의 파룬궁수련생 집단학살 및 언론계, 정계, 의학계 등의 침묵에 대해 연구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9월 29일자 미국 언론 ‘데일리 비스트(The Daily Beast)’는 이렇게 보도했다.

당신은 삼삼오오의 사람들이 도시 길가에서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묵묵히 항의하고 있다. 런던의 24시 철야 촛불시위나 뉴욕 유엔본부 앞에서의 항의 활동 등을 막론하고 그들의 평화로운 행동을 누구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배부하는 소책자에 찍힌 고문 장면과 참혹한 시신과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또 그들이 펼쳐든 현수막에는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생체 장기적출 만행을 저지하자’라고 쓰여 있다. 그들은 파룬궁수련생들이다. 중국공산당이 고문 혹형으로 그들을 괴롭히고 있고 그들의 장기를 적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사람들이 그러한 자신들을 주목하지 않는지 알고 싶어 한다. 다큐멘터리 ‘믿기 힘든 사실’은 파룬궁수련생들이 고문을 당하고 생체로 장기적출당하고 암살당하고 있다고 호소하며, 무엇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못 본 척 하는지 연구하려는데 제작 목적이 있다.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산사람 몸에서 장기 적출

다큐멘터리 ‘믿기 힘든 사실’은 중국공산당 정권이 여전히 살아있는 수감자들의 몸에서 장기를 적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그토록 많은 증거 앞에서도 왜 세상 사람들이 무관심한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알아보려고 했다. 결론은 중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파룬궁 박해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중국 방송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믿기 힘든 사실’은 인터넷사이트에서 일주일간 방영할 예정이며 이 기간은 마침 중국공산당 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의 방미 기간이다. 지난 주 파룬궁수련생 수백 명이 시진핑의 미국의 첫 도착지인 시애틀에서 현수막을 펼쳐들고 중국공산당의 파룬궁 박해와 생체 장기적출 만행을 폭로하고 규탄했다.

파룬궁은 지난 90년대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가부좌 연공을 포함한 심신수련 방법인 파룬궁은 중국인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급속도로 확산돼 불과 7년 사이에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련하게 됐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1999년부터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수천수만 수련자들이 노동교양소와 감옥에 감금당했다. 현재도 중국공산당의 파룬궁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중국문제 전문가 에단 구트만(Ethan Gutmann)은 6만5천 명 파룬궁수련생들의 장기가 산채로 적출됐다고 밝혔다.

파룬궁수련생 6만5천 명이 생체에서 장기 적출당해 사망

다큐멘터리 ‘믿기 힘든 사실’에서는 작가이자 중국문제 전문가인 에단 구트만, 캐나다조사국, 국제의학윤리학자 등이 함께 중국공산당에 감금당한 적이 있는 파룬궁수련생들을 인터뷰했다. 전 민주보호재단 연구원 구트만은 중국문제 전문가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파룬궁 박해가 시작될 당시 중국에 체류 중이었다. 구트만은 100만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이 구치소에 감금되어 있다고 추정했다. 그는 또 중국공산당이 사형을 집행한 사형수와 생체 장기적출을 당한 인원을 비교해보면 2000년부터 2008년 사이에 파룬궁수련생 6만5천 명이 장기적출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세상에, 이것이(생체 장기적출) 정말 사실이었구나!”

구트만은 중국공산당에 생포되어 감금됐다 풀려난바 있는 파룬궁수련생을 인터뷰하면서 처음으로 생체 장기적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파룬궁수련생들이 감옥에서 받은 신체검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감옥은 통상적인 신체검사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장기를 검사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검사받을 때 간장, 신장, 각막 등을 포함해 모두 검사를 받는다. 구트만은 당시를 화상하면서 말했다.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세상에! 이것이(생체 장기적출) 정말 사실이었구나!”

구트만이 런던에서 생체 장기적출과 관련한 내용을 강연할 때 그 회의에 참석했던 한 사람이 이전에 중국에서 장기적출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한 적이 있다고 공개했다. 그는 위구르족 출신 의사인 엔버 토티(Enver Tohti)로, 다큐멘터리와 유럽 증인석에서 1994년 그가 소속된 병원 상사로부터 이동수술팀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사형장 현장으로 호출된 그는 완전히 사망하지 않은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상사는 “오늘 발생한 모든 일들을 잊어라!”라고 말했다. 중국에서 도주한 일부 사람들도 사형수 몸에서 장기를 적출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후 장기이식 건수 대폭 증가

중국은 1984년 사형수에게서 장기를 적출할 수 있다는 법규를 제정했다. 미국 인권단체 통계에 의하면, 2013년 중국은 죄수 2,400명이 처형했으나 중국에서는 해마다 장기이식 수술이 1만여 차례 시행된 것으로 집계됐다.

캐나다 인권변호사 데이비드 마타스는 2006년부터 장기이식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룬궁 박해가 시작되자 장기이식 건수가 대폭 증가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캐나다 전 아태담당 국무장관 데이비드 킬고어와 함께 발표한 조사보고에서 2000~2005년 사이 4만5천5백 건의 장기이식 수술이 중국에서 단행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사형수와 중국의 장기이식 건수를 비교해보면 장기이식을 제공한 시신과 이식수술 건수가 맞지 않으므로 설명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장기이식 사업은 이윤이 막대하다. 그들은 중국 병원에서 각막 하나에 3만 달러, 신장이식은 6만2천 달러, 간장이나 심장 이식은 13만 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국 의사, 장기 공급체가 확실히 파룬궁수련생이라고 시인

다큐멘터리 ‘믿기 힘든 사실’은 중국 의사와 간호사들과의 전화 인터뷰 녹음도 담겨 있다. 그들은 환자에게 장기기증자는 살아있는 파룬궁수련자가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파룬궁수련생들은 건강해 이상적인 장기 공급자로 취급 받습니다. 사형수의 장기보다 좋습니다”라고 밝혔다.


미국 뉴욕주립대 랭건 의학센터의 아서 캐플란 의료윤리부장은 ‘믿기 힘든 사실’ 다큐멘터리에 대해 “우리 이 시대에 눈여겨봐야 할 엄중한 인권침범 행위다. 그 사건은 사람들을 심히 불안하게 하는 진술 내용”이라고 말했다.


미국 저명한 윤리학자이며 미국 뉴욕주립대(NYU) 랭건 의학센터의 아서 캐플란(Arthur Caplan) 의료윤리부장은 “문제는 우리가 어느 때부터 무엇을 하기 시작하는 가이다”라고 지적했다.

유럽의회는 2013년 결의안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생체 장기적출 만행을 규탄하고 믿기 힘든 중국공산당의 장기 이식수술 과정에 대해 해명할 것을 촉구했다. 중국에서 해마다 1만여 차례씩 장기이식 수술을 하고 있는데 165개 장기이식 센터에서는 “2~4주내에 수요자에게 맞는 장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광고했다. 그러나 중국에는 유효한 장기기증 체계와 조직기구가 전무한 상태다. 이런 문제를 감안해 볼 때 중국의 장기이식이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한 이스라엘과 스페인 등 일부 국가에서는 자국민이 중국에 가서 장기이식 수술을 받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믿기 힘든 사실’의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 이 시대의 가장 두려운 의학범죄 행위에 대해 엄숙히 조사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만행이 십 몇 년간 계속됐는데도 왜 일부 사람들만 주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문장발표: 2015년 9월 30일
문장분류: 해외소식>언론보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9/30/316892.html
The Daily Beast:
p://www.thedailybeast.com/articles/2015/09/29/does-china-harvest-organs-from-living-prisoner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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