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질풍경초 (疾風勁草)
글/중팡충(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16일】
머리말
내 이름은 중팡충(鐘芳琼, 중밍팡,(鐘銘方)이라고도 불렀다.), 올해 39세의 여자로서,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시 얼환루(二環路) 둥싼돤(東三段) 36호 런허위안(仁和苑) 4동 (원래 27동) 3층 7호에서 거주하고 있다. 〔원적(原籍): 젠양(簡陽)시 윈룽(云龍)진 양밍(楊鳴)촌 7사(社)〕. 원래 가진 자산은 70만 위안 이상이고, 월수입이 1만 위안 이상인 개인사업자(個體戶)였다. 오른쪽 하지에 선천성 혈관종양(血管瘤)이 있었는데 30 여 년간 줄곧 병원치료를 해보았지만 모두 효과가 없었다. 1995년 육군종합병원에서 수술 할 때, 혈관 일부를 뽑아버리기까지 했으나 치료하지 못했다. 1997년 화시(華西)의과대학의 30여명 전문가들이 진단한 결과, 세계적인 난치병으로서 국제적으로도 아직 치료방법이 없다고 모두 다 인정하였다. 파룬궁을 두 달 연마했는데 혈관종양이 기적같이 사라졌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병이 없는 행복을 느꼈다. 1999년 7월 20일, 장(江)씨 집단이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위반하여 파룬궁을 미친 듯이 탄압하기 시작한 후, 나는 천천만만 대법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고통을 받았는데, 38개의 기관(單位)이 나에 대한 박해에 참여하여 불법감금을 하고 약 29차 743일에 걸친 노동교양을 시킴으로써 온갖 혹형의 시달림을 받았다. 현재는 핍박에 의해 살 곳을 잃었다......
목차
머리말
제 1 부 고난의 인생
제 1 장: 쓰라린 어린 시절
자줏빛 모반(胎記)
의사를 찾고 약을 수소문하다
고난의 진창길
제 2 장: 간난신고의 창업
실패한 첫 사랑
15위안을 가지고 청두(成都)로 가다
생명으로 돈을 바꾸다
실패한 혼인
압력이 있어야 동력이 있다
실패한 수술
수련이 싹트다
제 3 장: 절망의 인생
약을 달고 살다
세계적으로도 고칠 수 없는 혈관종양
악화
약간의 위안
혼비백산
제 2 부 새로운 삶
제 1 장: 연을 맺다
사저(師姐)의 변화
대법이 미혹을 타파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
제 2 장: 대법이 나에게 제2의 생명을 주었다
신기함을 체험하다
천상에 한 무리 선녀가 오가다
온 집안이 이득을 얻다
세계적으로 고치지 못하는 혈관종양이 사라졌다
옥같이 깨끗한 마음
제 3 장: 홍법
대법이 고향에 전해지다
시련이 닥치려고 하다
제 3 부 11차례 구류되다
제 1 장 탄압 초기(初期)
7.20. 대규모 체포
단체 법공부, 연공을 위해 집을 사다
상무조보(商務早報) 사건
경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총이다
핍박으로 직장을 잃다
제 2 장 힘겨운 청원의 길
처음 청원하러 가다
북경주재 청두(成都)사무소
진상을 알게 된 승무원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
쥬루(九茹)촌 구치소
동생이 경찰 웨이다핑(魏大平)에게 3,000위안을 뺐기다.
제 3 장 다시 청원하러 가다
층층의 가로막음을 피해가다
하나하나의 방어선을 돌파하다
민원접수처가 공안국으로 변하다
장(江)씨 집단이 봉건왕조의 연좌제(連坐制)를 이용하여 지역경찰을 연루시키다
제 4 장 새빨간 거짓말로 세상 사람을 속이다
시비가 전도된 쓰촨(四川)텔레비전 방송국 소식
구류소에 노(老) 홍군(红军)을 가두다
장기간 반복적으로 감금되었던 나날들
집단단식과 야만적 음식물 투입
어머니의 조우(遭遇)
제 5 장 사실의 진상을 똑똑히 밝히다
대법을 모욕하는 사진 전시실 입구에서 진상을 알리다
강제로 집을 수색하다
제 4 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을 받다
제 1 장 진상은 감출 수 없다
길 잃음(迷失)과 귀정(歸正)
위선적 연기
공산당이 좋다?
살아있는 광고
제 2 장 대법입자
감금되다
정념으로 마굴에서 뛰쳐나오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수련한다
제 3 장 여파가 가라앉지 않다
또 구치소에 들어가다
사악이 수단을 다 써도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다
신분증 풍파
제 5 부 나무가 조용히 있고자 해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제 1 장 정념으로 경찰의 악행을 제지하다
족제비가 세배를 하다
꿈에서 금방 깨어난 어린 이씨(小李) 간사(幹事)
떳떳치 못한 경찰
수련은 만에 하나가 없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제 2 장 인권박해
행동을 감시하다
인신자유를 제한하다
30만 위안이 11,500 위안으로 변하다
연루
온갖 생트집을 잡아 방해하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협하다
불법으로 집을 수색하고 감금하다
제 6 부 대법 중에서의 바른 믿음
제 1 장 도깨비 세계
경찰과 강도
개가 여동빈을 물다
모두 장쩌민이 해친 것이다
사형상(死刑床)
살 곳을 잃다
제 2 장 혹형 및 학살
특무와 조우하다
정념의 위력
반죽음이 되다
백가지 고생이 한 번에 들이닥치다
제 3 장 신이 창조한 기적
후기: 나는 당신에게 말하련다
제 1 부 고난의 인생
머리말: 수련하기 전, 나의 염원은 한사코 돈을 벌어 병을 치료하고 곧 마비되어 침대생활을 해야 하는 나를 위해 일체의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제 1 장 쓰라린 어린시절
*자줏빛 모반(胎記)
1965년 8월 21일, 쓰촨(四川)성 젠양(簡陽)시 윈룽(云龍)진 양밍(楊鳴)촌 7사(社) 묘즈산 (廟子山)기슭의 한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고난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인간 세상에 오자마자 나의 오른쪽 아랫도리는 발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온통 자줏빛 모반(胎記)[주1]이 가득했다. 자매 넷 중에서 나는 둘째이다. 아버지는 탈장수술로 중노동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친정이 가난하여 어릴 적에 병이 있어도 돈이 없어 치료를 하지 못해 왼쪽 발이 걸을 때 쩔뚝거리는 불구로 되었다. 다섯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언니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오른쪽 발과 다리가 불구로 되어 마을에 이름난 절름발이가 되었다.
원래 오른쪽 다리의 발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자줏빛 모반이 가득 나 있었던 나는 여섯 살 되는 그 해 여름, 무심결에 오른쪽 다리의 발등에서부터 허벅지, 엉덩이까지 검은 선 같은 혈관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렇게 되자 크게 놀라신 아버지는 얼른 돈을 빌려 나를 대대 (大隊) 의료기관과 윈룽향(雲龍鄕) 위생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게 했다. 돈도 많이 쓰고 약도 많이 먹었지만 반년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았다. 겨울이 돌아와 날씨도 추워졌다. 하지만 불행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만은 춥게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픔은 돌보지 않고 나를 70리 밖 젠양시 한의원으로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게 했다. 검사결과 피가 안에서 죽어버려 혈맥이 통하지 않아 조성된 것이라고 했다. 의사는 나에게 혈액순환이 잘되게 하는 대추만큼 큰 환약을 대량으로 조제해주면서 장기적으로 복용하라고 타일렀다. 약을 산 후, 아버지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버스를 타려면 비록 나는 키가 작아서 표를 살 필요가 없지만 아버지는 90전짜리 차표를 사야 했다. 그때의 90전은 한 농민으로 말하면, 절대로 작은 액수의 돈이 아니어서 아버지는 10여 일을 일해야 벌 수 있었다. 이리하여 여섯 살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집으로 갔는데 우리는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장장 8시간을 걸어서야 기나긴 70리 노정을 다 걸었다.
*의사를 찾고 약을 수소문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부터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거름을 줍고, 풀을 뜯으며 어른을 도와 돈을 벌었다. 중학교 다닐 때, 학교는 집과 8리 떨어진 시골에 있었는데 나는 아침에 광주리를 메고 학교를 가야 했다. 점심 때, 다른 학우들이 점심 잠을 잘 때, 나는 학교 부근의 야산에 가서 풀을 뜯었으며 오후수업이 끝난 후에는 길가의 풀을 뜯으며 집으로 갔는데 집에 도착하면 날은 이미 어두웠다. 저녁식사 후, 어른들이 잠들면 나는 그제야 콩알만 한 석유등잔 밑에서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숙제를 다 하고 나면 늘 한밤중이었다. 집 옆은 묘지였다. 여덟 살 때, 집 옆 채소밭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는데, 귀신의 음영이 늘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저녁이 되기만 하면 몹시도 겁이 나 라디오를 켜놓고 들어야 했다. 이렇게 하면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모님은 사방으로 의사를 찾아 다녔는데 중학교에 올라갈 때까지 겨우겨우 치료를 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친정에서 러즈(樂至)현 다포취(大佛區)가에 한 침구의사가 있는데 의술이 아주 고명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부모님께서는 상의한 후, 한 점의 희망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시어 한시도 지체할세라, 나더러 가서 한번 시험해보라고 하였다. 열두 살이었던 나는 토요일마다 하교 후 혼자 3, 40리 길의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너며 치료하러 다녔다. 의사는 말하기를 혈맥이 통하지 않아 침구로 치료해야 하며 강제로 혈액을 순환시켜 혈관 안의 혈액이 더는 응고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길고, 짧고, 크고, 작은 수많은 침을 발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모든 혈에 꽂았는데 나의 마음은 마치 천만 마리 모기가 무는 것 같으면서 붓고, 아프고, 저렸으며 온갖 감회가 나를 향해 엄습해 왔다. 이것도 모자라 의사는 조금 있다가 또 온갖 은침을 몇 번 씩 번갈아 놓아 고통과 괴로운 느낌이 좀 줄었다가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매번 침을 놓으면 반나절이나 걸렸지만, ‘아파도 참자, 병이 나으면 행복해질 거야.’ 하면서 나는 늘 마음속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고난의 진창길
돈을 벌어 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매번 학교에서 방학을 하면 나는 나보다 5, 6세 많은 언니들과 함께 10여리 밖에 가서 풀을 뜯었다.
어머니는 내가 나가면 저녁에야 돌아오며 점심밥이 없는 것을 생각하여 마음 아파하면서 나에게 생 땅콩이나 오리 알 하나를 주거나 어름사탕을 좀 주었다. 나는 내가 장기적으로 언니들을 따라 같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길을 나서자 이런 먹을 것들을 그들에게 나눠주어 먹게 하였다.
한번은 하루 종일 3, 40근을 뜯었는데 열두 살 난 나는 허리가 다 눌리어 구부러졌지만 어두운 밤에 언니들을 바싹 따르면서 힘겹게 집으로 향해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비가 쏟아져서 진창길이 몹시 미끄러워 헝겊신을 신고 걷기가 불편하여 아예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발에 가시가 박히는데 아파 울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땀과 빗물, 눈물이 한데 뒤엉켜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씩 가야 했다. 양밍(樣鳴)5대 룽중퉈산(龍重陀山)까지 왔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졸졸 흐르는 작은 강의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우리가 산에서 발을 내디딜 때의 첫 받침돌은 매우 멀리 있었는데 받침돌 위에 또 작은 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작은 돌은 임시로 올려놓은 것이어서 이가 맞지 않아 발을 위에 밟으면 돌이 움직이므로 정말 아주 겁이 났다. 산간마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받침돌에는 두터운 한 층의 누런 흙이 쌓였는데 누런 흙은 이미 빗물로 진흙이 되어 마치 기름을 칠한 것처럼 미끄러워서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낭떠러지로 떨어져 강에 빠질 수 있었다. 가고 또 가고 하여 끝내 어렴풋이 집의 등불이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 나는 정말 더는 메고 갈 수가 없어 언니들더러 집에 가서 소식을 알려 부모님에게 나를 마중 나오게 하였다. 아버지께서 나를 마중 나왔을 때, 내 마음속의 고통은 마치 어느 사이인가 터져버린 터진 홍수마냥 삽시간에 쏟아져 내려 나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마음속으로는 깊이깊이 원망하였다. 이 몹쓸 다리병만 아니라면 내가 어찌 이런 고생을 하겠는가!
[주1 : 모반 (母斑) [명사] 선천적인 원인으로 살갗에 나타난 갈색 또는 검은 점이나 사마귀·주근깨 따위]
제 2 장 고생스레 창업하다
*실패한 첫사랑
18세 되던 그 해, 다른 사람의 소개로 나는 본 대대의 초등학교 동창과 연애를 했다. 그의 부친은 집짓는 일을 맡아 하였고 그 역시 철근 일을 하는 사람이며 견습생 하나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본 지방에서는 이름이 좀 있었다. 그때는 그의 집도 먹고 살만하여 우선 흑백텔레비전을 샀는데 연속드라마 훠위안자(霍元甲)를 방영할 때,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우리는 반년 동안 연애하였다. 열렬히 사랑하는 중에 그가 갑자기 나와 헤어지자고 하여 나는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알지 못할 눈물만 쉴 새 없이 흘렸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는 동창한테서 나의 오른쪽 다리가 병이 있어 출산(生育)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또 이 몹쓸 다리 때문에 내 일생의 대사를 망쳤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시 나의 중학교 한반 동창과 연애를 하면서 늘 짝을 지어 우리 집 문 앞을 지나갔다...... 나는 정말로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고향을 떠나 청두(成都)에서 사업을 개척하여 그와 누가 더 강하고 잘 되는지를 겨뤄 보기로 결심하였다.
*15위안을 가지고 청두(成都)로 가다
아버지는 내가 떠나는 것이 달갑지 않아 나에게 청두로 가는 왕복 차비 5위안만 주었다. 어머니는 나의 결심이 이미 결정되자 슬그머니 10위안을 빌려서 내게 주었다. 나는 15위안의 돈을 가지고 1985년 음력 2월 2일에 청두 와이시차뗀즈(外西茶店子) 훙써이뚜이(紅色一隊)의 친척집에 머물렀다.
내가 청두에 간지 얼마 안 되어 마침 영먼커우샹(營門口鄕)옷 공장(현재 西門역전)에서 근로자를 모집하였다. 몇 백 명이 지원했는데 60명을 모집했다. 언니가 재봉사였기 때문에 나는 어릴 적에 언니한테서 옷 만드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제일 첫 번째로 뽑혔을 뿐만 아니라 재봉 일을 몇 년 해야 갈 수 있는 생산라인에 직접 들어갔다. 나는 아침 5시면 걸어서 출근하여 연장근무를 하였다. 점심 때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면 나는 수빙(역자주: 밀가루에 기름, 설탕을 넣고 구운 파이)을 두 개 사서 먹고는 또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저녁에 남들은 모두 텔레비전을 보러 갔지만 나는 또 연장 근무하며 단추를 달았는데 밤중까지 하였다. 여름이면 더워서 신발을 신을 수 없어 종이판을 놓고 맨발로 밟을 수밖에 없었으며, 하루 종일 하고 나면, 두 발과 다리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붓는다. 매달 모두 두 몫의 월급을 받았으니 대략 60위안(元)이다. 다리를 고치기 위해, 나는 매 달 반드시 40위안을 저축해야 한다. 나는 평소의 생활에서 매우 절약했하였으며 그때 가장 싼 아동용 칫솔과 치약을 썼다. 나는 성이 장씨인 고향의 여동생과 둘이서 아침에는 1전 어치의 김치를 먹고, 점심은 5전 어치의 채소를 먹었다. 저녁이면 1층에서 수박장사가 ‘수박 하나에 10전이요.’ 라고 소리 높이 고함치지만 우리는 맛을 본적이 없다. 한두 달간 고기를 먹지 못해 속이 출출하여 기름이 많은 머리고기를 사서 먹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나와 장씨 동생은 사무실의 사무용 책상 위에서 잤다. 밤이면 나는 책상 위의 것들을 정리해서는 책상을 밖으로 잡아당겨 안에서 자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책상은 우리 키보다 짧아 우리는 발이 있는 쪽에 의자를 갖다 놓고 발을 의자 위에 걸쳤다. 아침이면 또 책상과 의자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유리판, 잉크 같은 것들도 제자리에 놓는다. 이 기간에 나는 스후이제(石灰街)에 있는 훙광(紅光)병원에 가서 다리의 병을 보였는데 검사결과는 정맥이 굽어(曲張)져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이를 알게 된 후, 계란 50개를 메고 나를 보살피러 왔다. 병원에 침대까지 마련되었는데 다른 한 의사가 또 말하기를 이것은 신체에 영향이 없고 보기가 싫을 뿐이니 여름에 긴 치마를 입으면 되니까 수술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는 침대를 물리고 수술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또 청두 와이둥(外東) 공군병원에서 청소부 일을 하였고, 주옌차오(九眼橋), 로차오(老橋), 차오터우(橋頭)에서 물건을 판매하였으며, 류리창(琉璃場)거리에서 자동차 부품을 팔면서 아울러 담배장사도 하였다. 돈을 번 후, 나는 1987년 9월, 청두 와이난 (外南) 타이핑웬성(太平園省) 운전학원에서 화물차 운전을 배웠다. 1988년 3월, 운전학원을 졸업한 후, 매달 200위안의 월세를 내고 쓰촨 음악학원의 노해방(老解放) 화물차를 빌려 화물운반을 하였다. 1988년 연말, 노해방 중고차를 하나 사서 사장이 되었다. 처음에 원쟝(溫江) 진마허(金馬河)에서 모래를 운반하고, 룽징(榮 經), 펑(彭)현의 스원(思文), 워이웬(威遠)에서 석탄운반을 위주로 하다가, 나중에는 폐철, 시멘트를 운반하였다......
*생명으로 돈을 바꾸다
내가 노해방 자동차로 워이웬에서 석탄을 운반하던 나날들을 회상하면 마음이 몹시 괴롭지만, 고통스런 기억 중에서 나는 그래도 쓰라린 눈물을 머금고 이 한 단락의 일들을 써내련다.
돈을 많이 벌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개인이 경영하는 작은 탄갱에 가서 석탄운반을 하였다. 저울이 없어 무게를 달지 못하기 때문에 중량은 모두 추측하였다. 보통 추측한 5톤 석탄을 저울로 달면 7톤 정도가 된다. 이렇게 하여 화물 주인은 아주 많은 돈을 벌게 되며, 비교해서 운송비도 좀 더 주어야 한다. 워이웬현은 산이 많고 보통 간이 도로이며 길도 매우 좁아 차를 비킬 수 없었다. 자전거와 행인마저도 길옆에 서거나 혹은 적당한 곳을 찾아 길을 비킨다. 운전을 여러 해 한 남자 운전자마저도 한번 갔다가는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 도로 한쪽에는 산이고 한쪽은 강인데 길바닥이 무게를 받아내지 못할 까 바, 가급적 차를 산 쪽으로 붙이면서 운전하였다. 울퉁불퉁한 크고 작은 돌 위로 한 단락 노정을 운전하면, 자동차 기름상자 고정 끈마저 흔들거려 끊어졌으며, 차의 짐받이는 바위 돌에 걸려 헤어졌다. 나는 놀라서 안색이 창백해졌으며 마음이 조마조마하여며 운전하였다. 나중에도 이때의 경력을 생각하면 울렁거림(動悸)이 가라않앉지 않는다. 그때 나는 겨우 23세였으며 면허증을 금방 손에 쥐어 운전경험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돈을 벌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죽음을 무릅쓰면서라도 가서 일을 해야 했다.
한번은 비가 내린 후 날씨가 개여 7톤 가량의 석탄을 싣고 산에서 내려올 때였는데, 사이드 브레이크와 풋 브레이크만 가지고는 차의 속도를 조절할 수 없어서 나는 또 변속기의 위치를 한 단계 더 조절하여 완전히 엔진의 반동력으로 차의 속도를 통제하였다. 길이 미끄러우면서 굴곡이 심하고 좁아 나는 온 신경을 기울여 운전하였으며 가장 좋은 기능을 발휘하였지만 그래도 앞바퀴가 길에서 벗어나 완두콩밭에 굴러 떨어져 낭떠러지 곁에 걸리게 되었다. 속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화물주도 비록 차를 따라다닌 시간이 길고 경험이 좀 있지만 그는 필경 운전을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유일한 방법이란 바로 차를 후진하는 것인데 이야말로 목숨으로 도박하는 것이다! 무게가 있는 차인데다가 또 산을 내려가는 중이고 게다가 차가 미끄러워 조금이라도 손발이 맞지 않으면 바로 차는 망가지고 사람이 죽는다. 설사 이러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큰 돌을 안아다가 차의 네 개 바퀴에 고인 다음 운전실에 앉아서 가속페달을 밟고 조심스레 클러치를 놓으면서 손, 발을 배합을 잘하여 엔진의 동력이 커지면서 차가 막 떠는 때를 기다려서 천천히 사이드 브레이크를 놓았다. 나의 마음은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으며, 진짜로 생사존망의 선에서 발악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보호로 마침내 한번에 차를 후진시켰다.
또 한 번은 물이 불은 후, 내 차가 탄갱에 거의 왔을 무렵, 길바닥이 물의 충격에 의해 일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길이 너무나 좁고 위험하며, 뒤로 얼마나 가야 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 하에서 나와 화물주인은 거기에 서서 한참 생각하였는데 마지막에는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기로 결정하였다. 화물주인이 말하기를 “쇼중(小鐘), 나는 괜찮소, 이미 40이 넘었고 아들도 컸으며 무엇이든 다 겪었으니깐, 그런데 자네는 젊고 가정도 아직 안 이루었소.”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죽으면 그만이죠, 모든 것을 다 끝내버리니 살아서 고생할 것도 없고 뼈 빠지게 돈을 벌어 병을 고칠 필요도 없지요.” 제대로 말하면 노반(路盤)이 근본 든든하지 못한데 조금이라도 잘 장악하지 못하면 차와 사람이 모두 홍수에 말려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담을 키워서 가속페달을 끝에까지 밟았다. 차는 관성으로 돌진하여 비로소 이 목숨 하나를 건졌다.
또 한번은 워이웬에 석탄을 실으러 갔다가 나는 시난(西南)민족학원에서 집을 허물고 남은 낡은 재료를 한 차 실었다. 험한 길을 하도 많이 다녔으므로 나는 우선 화물주인에게 정식 도로인가, 큰 차가 통과할 수 있는가를 물었는데 그는 모두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은 그렇지 않았다. 차가 금방 즈양(資陽)의 우황(武黃)지역까지 갔을 때, 밤중에 나는 도로가 갈수록 좁아지고 앞의 길은 산의 형태에 따라 닦은 간이도로임을 발견하였다. 나중에는 날씨가 갑자기 변하더니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차창에 쏟아 붓는 듯하고 와이퍼(wiper)도 말을 듣지 않았다. 나의 차는 높이제한을 초과하여 짐을 실어 캐비지처럼 위가 무겁고 아래가 가벼웠다. 힘겹게 달리던 중, 갑자기 차가 기울어져 거의 뒤집어지려고 하였다. 이때, 나는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밖에는 큰비가 내리고 비가 새는 운전실에는 작은 비가 내렸다. 벌써 잠이 푹 들어버린 화물주인과 그의 손자를 바라보며 나는 혼자 눈물을 흘리면서 이 몹쓸 병이 있는 다리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끝내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장을 보러 가는 군중들이 당장 뒤집어질 듯 하는 차를 보고서는 제각기 떠들며 말했다. “어떻게 큰 차가 여기까지 다 왔나? 만약 차가 뒤집어지면 부품을 주울 수밖에 없지. 누가 감히 크레인을 몰고 여기까지 오겠는가!” 마지막에 나는 할 수 없이 길옆의 옥수수 대를 안아다 깔고는 다시 조심스레 차의 원심력에 따라 차를 바로 잡아놓아 비로소 재난을 모면하였다. 돈을 많이 벌어 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반드시 목숨으로 돈을 바꾸어야 한다. 매번 아침 3시쯤이면 나는 청두에서부터 차를 운전하여 워이웬의 개인 탄갱에 가서 순번대로 기다려 석탄을 싣고 나면 이미 밤중이며 밤사이 청두에 돌아와서 석탄을 부리고 또 그날 밤으로 가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되풀이하는데 늘 일주일 내내 침대구경을 해보지 못했으며 곤하면 차를 길옆 논이나 중흥구역에 세워놓고 핸들에 엎드려 자곤 하였다. 금방 꿈속으로 들어갔는가 하면 또 뒤에서 오는 자동차 경적소리에 놀라 깨어 계속 앞으로 운전하였다. 과로로 인해 나는 수시로 쓸어 질 위험이 있었다. 심지어 줄을 설 때, 어떤 차는 자리를 차지하느라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 어떤 운전기사는 가지고 다니는 뱀을 풀어놓는다. 뱀은 내 차가 있는 쪽으로 기어오는데 나는 놀라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뛰어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더러 먼저 싣고 가게 한다. 고통 증에서 혼자 쓴 물을 마셔야 했으며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마음속의 쓴 물을 일기책장에 적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이렇게 썼다. “나는 마치 차바퀴처럼 돌면서 닳는데 어느 때에 가서야 끝인지. 차바퀴가 못에 찔릴 때가 바로 내가 병이 걸릴 때이며, 차바퀴가 터질 때가 바로 내가 인간세상을 떠날 때이다.” 아늑한 인간 세상에서 나는 늘 알고 싶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왜 인간 세상에 왔으며, 인간 세상에서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어떤 때는 점쟁이를 찾아간갔다. 점쟁이는 “당신은 명(命) 중에 귀인이 도울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나는 귀인이 나타나 나를 도와주기를 고대하였다.
실패한 혼인
첫 사랑의 실패로 말미암아 나로서는 더 이상 무엇을 고를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내 다리가 보기 싫고 병이 있는 것을 꺼리지만 않으면 되며, 결혼 후 아이를 하나 낳아서 다리가 출산(生育)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면 되었다. 결국 경솔하게 한 노동자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겨우 3살 난 아들이 아직 아무 기억이 없을 때 우리는 헤어졌다. 그래서 아들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존재란 없었다......
압력이 있어야 동력이 있다
아들을 잉태한지 얼마 안 되어 충칭(崇慶)현 시멘트공장 샤오융차이(肖永才) 사장의 시멘트를 운반하였다. 그의 것을 한동안 운반한 후, 그는 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내게 그의 친척 후스푸(胡師傅)와 장기적으로 그의 일을 해달라고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여 후스푸보다 한 차 더 운반하였다. 그래서 샤오사장은 후스푸에게 “후란왕(胡懶王, 게으름뱅이)”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사내 대장부가 임신한 여자보다 못하다고 말하면 후스푸는 질투하여 말하기를 “압력(壓力)이 있어야 동력(動力)이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렇다! 나의 마음에는 확실히 아주 큰 압력이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늘 돈을 반드시 많이 벌어 그때 가서 오른쪽 다리의 병을 고치겠다고 생각하였다. 오랜 병에는 효자가 없다고 하는데 내가 침대에 들어 눕게 될 때, 보살펴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아들을 낳고 3개월이 안 되어 다시 차운전을 시작했는데 밤을 새우며 물건을 운송하였다. 낮에는 시멘트를 운송하고 밤에는 구이(桂溪)시 위즈창(預制場) 리화청(李華成)의 벽돌을 운송하였다. 젖먹이기 편하도록 운전실 긴 의자에 눕혀둔 아들도 나와 함께 밤을 지새워야 했다. 쇼사장의 집에서 일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성실하고 선량하고 신용이 있다고 생각하여 1991년 말 청두 간다오(干道) 지휘부 재료처에 나를 소개시켜주어 장기적으로 시멘트운송을 하게 했다. 제 2 순환도로를 수리할 때, 지휘부에서는 나에게 제 2 순환도로 긴급 운송차량 “전용증(專用證)”을 발급하여 나는 이 “전용증”을 가지고 무제한으로 시멘트를 꺼내 과적한 채 1차선도로를 막힘없이 달릴 수 있었다. 공사현장에서 시멘트가 급히 필요한데, 내 차로 미처 운송이 따라가지 못할 때, 나는 현금으로 시(市) 자동차 운송 5대(隊)의 차량을 불러와 돌격하였다. 매 달 지휘부와 시멘트공장이 결제를 했는데 약간의 착오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줄곧 청두시 간다오 지휘부의 운송업무를 도맡아하였다......
실패한 수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사도 갈수록 잘 되었다. 그러나 오른쪽 다리의 병은 갈수록 심해져서 혈관이 엄지손가락 굵기만큼 밖으로 튀어 나왔다. 어떤 곳은 혹으로 되었는데 운전시간이 길면 혈관이 붓고 아프며 마작을 하고 텔레비전을 볼 때에도 혈액이 과다하게 아래로 흘러가 혈관이 파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리를 평평하게 놓아야 했다. 정말 더는 미룰 수가 없어 1995년 설을 며칠 앞두고 청두 육군종합병원에 가서 검진하였는데 결과는 소인의 정맥곡장(小引靜脈曲張)이라서 급히 수술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설 연휴시간을 이용하여 담당의사 천충뎬(陳崇典)의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오전 9시부터 시작하였는데 수술을 하는 전 과정에서 하반신만 마취시켰기 때문에 나는 수술 칼, 집게를 쟁반에 놓을 때의 소리를 또렷이 들었으며 전반 상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의사는 나의 발목 외측(外側) 혈관과 허벅지 내측(內側)뿌리 부분 혈관을 잘라내고 묶은 다음 허벅지 혈관 바깥면의 살을 떼어 낸 후, 혈관을 뽑아내었는데 아픔을 참기가 힘들었으며 마음은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러나 내내 감히 움직이지는 못했다. 간신히 혈관을 뽑아낸 의사는 나에게 “이것이 바로 당신의 혈관입니다.” 라고 말했다. 닭의 목 줄기 같은 기다란 혈관을 유리컵에 넣으니 즉시 짧아지는 것이 보였다. 의사는 말하기를 “다시 대인(大引)을 갈라 보자.” 고 하였다. 천충덴 의사는 또 나의 발목 내측을 자르고는 “대인(大引)에는 곡장(曲張)이 없다.” 고 말했다. 이때 한 의사가 “혈관종양이야.” 라고 말하자 더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나는 듣고 나서 오진으로 하지 말아야 할 수술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무슨 방법이 있는가? 나는 아예 감히 많이 생각할 수가 없었고 결과는 정말 너무나도 무서웠다. 이렇게 모든 수술을 12시까지 하였다. 일주일 뒤, 실을 뽑은 후,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상처를 치료하였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상처는 전부 회복되었으나 혈관을 뽑았던 자리는 여전히 부풀어 오르며 호전되지 않았다. 나는 또 불안한 심정으로 육군종합병원 천충텐 의사를 찾아갔다. 천 의사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연구를 거쳐 미국에서 들여온 견인수술을 당신에게 무료로 해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재삼 생각해보았다. 만에 하나 어려운(深度) 수술을 하다가 불구라도 되면 어떻게 하지? 지금 비록 팽창하고 아프지만 혈관은 아직 파열되지 않았으며 또한 아직 사람이 젊고 혈관은 탄성이 있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고 더는 수술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수련이 싹트다
1996년 8월, 나는 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칭청(靑城) 뒷산에 유람을 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우리는 옆의 나뭇가지나 암석을 잡으면서 힘겹게 기어올랐다. 내가 신은 굽 높은 신발은 뒷굽이 다 떨어졌으며 다리 또한 붓고 아팠다. 그러나 일로일소(一老一小)와 동행하려고 나는 억지로 지탱하였다. 조금 가다가 또 조금 쉬었다가 하면서 산 중턱까지 갔을 때, 20명쯤 되고 나이가 60세가량 되어 보이는 한 무리 보살 아주머니들이 몸에 붉은 보자기를 메고 빠른 속도로 우리 뒤를 따라잡더니 또 재빨리 우리를 앞서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보아하니 그들은 마치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는 듯 하며, 종종 함께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한 무리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산을 잘 오를까. 진짜로 신이 있어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걷는 것이 이다지 가볍고 이처럼 빠르다. 우리는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백운사까지 올라갔다. 우리는 그녀들과 함께 공덕을 행하는데 기꺼이 참가하였으며 신께서 우리를 가호하여 내 병을 낮게 해주시고, 장사가 번창하게 해주시고, 가정이 행복하게 해주십사 라고 빌었다.
다음 날 백운사를 떠날 때, 대문 입구에서 30세가량 되어 보이는 삭발한 비구니가 사람들이 제비뽑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올라가서 위에 것을 하나 뽑았다. 나는 호기심으로 물었다. “당신은 이렇게 젊은데 왜 절에 왔는지요? 그녀는 나에게 속세에서 그녀의 불행한 혼인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속세를 버리고 절에 들어와서 수련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수련 두 글자를 듣고 아주 신성하게 느껴져 수련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나의 마음속을 보아내고는 나보고 ”당신도 수련하세요.” 라고 말했다. “당신이 보기에 나는 일로일소(一老一小)가 있고 또 인간세상의 돈과 재물 등등을 내려놓을 수 없는데 수련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집에서 수련하며 경서를 읽으면 됩니다.” 나는 두꺼운 책을 만져보면서 계속 물었다. “내가 수련하면 백운사에 또 와야 합니까?” 그녀는 “또 와야 한다.” 고 했다. 나는 높이 솟은 산 정상을 바라보며 그만두자, 이 산은 너무 높고, 길 또한 걷기가 안 좋으니 여기서 수련하지 말고 나중에 집과 가까운 곳에서 수련하자 라고 생각했다.
제 3 장 절망의 인생
약을 달고 살다
수술이 실패한 후, 정신적 압박은 더욱 커졌으며 내가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고 수시로 마비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증세가 엄중해도 친인과 친구들이 들으면 걱정할까보아 말을 하지 못하고 밤에 혼자서 울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격동하거나 화를 내면 대뇌의 혈관이 마치 악기의 현(弦)마냥 팽팽하게 죄어 지며 온몸은 마비되어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그 이후부터 나의 손가방에는 화장품이 아니면 뇌혈관을 치료하는 약이었다. 비시린(比西林), 인싱예팬(銀杏葉片), 쉬안윈팅(眩暈停) 등등...... 심지어 어떤 때는 길을 걸을 때 안절부절 못하면서 아울러 순간적인 실명이 따랐다. 한번은 내가 작은 차를 운전하며 선샌쑤(神仙樹) 자동차 운수회사 5대(隊) 입구까지 갔을 때,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졌다. 나는 얼른 차를 한쪽 옆에 갖다대고 세운 후, 약을 먹고 핸들에 엎드렸는데 대략 한 시간 쯤 지나서 회복되었다.
또 한번은 우리가 왕쟝(望江)공원에서 낚시질 할 때, 보험을 하는 사람이 나더러 보험에 가입하라고 하였다. 내가 보험이 증식(增値)되는 가를 물으니 그는 “ 증식(增値)되지 않는다.” 고 했다. 나중에 나는 나의 모든 예금으로 2급 시장의 주식을 샀다. 주식이 오른 후, 그 돈으로 노후를 보내고 병을 치료하려고 하였다.
세계적으로 고칠 수 없는 혈관종양
미루고 또 미루고 1997년까지 미루다가 나는 다시 화시(華西)의과대학에 다리를 치료하러 갔다. 교수가 보고나서 병증세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감히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나에게 말하기를 “매주 수요일 오후는 전문의가 진찰하는 날인데 전문적으로 난치병을 진단하니 당신은 가서 번호를 등록하여 시간을 약속하고 다시 오세요.” 라고 했다. 후에 30여명의 전문의들이 진단한 결과 선천성 광범위해면상부종형 혈관종양(先天性大面積海綿狀腫脹型血管瘤)이었는데 세계적으로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당신의 지난번 수술은 잘 못되었다, 예를 들면 본래 두 사람이 짊어져야 하는 것을 현재는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이니 더욱 엄중한 것이다. 수술시 주의하지 않으면, 혈관 벽을 묶을 때, 소뇌신경을 손상하여 후유증을 남기기 쉽다.’고 말했다. 허! 나의 뇌혈관 병은 수술을 잘못해서 야기된 것인가? 전문의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이름, 주소, 전화 등을 남겨놓으세요. 치료할 수 있을 때, 다시 통지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지금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다......
1998년 상하이에서 온 전문의가 위생간부 병원에서 진찰을 했는데 또 가서 검진하였다. 의사는 혈관종양이라고 하면서 나더러 10만 위안을 들여 상하이에 가서 수술을 해보라고 하였다. 내가 “만약 치료만 할 수 있다면 20만 위안이라도 가겠는데 보증을 하지 못하면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보증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나는 내내 가지 않았다.
악화
1997년 가을, 아들의 아버지가 나에게 호출문자를 보내 그의 상점에 한번 왔다가라고 했다. 내가 갔더니 그는 나보고 돈을 달라고 했다. 나는 방금 차를 샀는데 동생의 돈 3,000위안까지 빌려 지금 돈이 없다고 했다.(내 돈은 나중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부 2급 시장의 주식을 샀기 때문이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식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직원 노동자와 친구들이 얼른 그를 끌어안았는데 나는 놀라서 의자에 주저앉았으며 삽시에 전신이 떨리고 마비되고 차가워지고 혀가 굳어지고 입술이 자색으로 변하고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멍해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또 감히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가방에 있던 약도 다 먹었으므로 나는 겨우 떨리는 손으로 삐뚤삐뚤하게 몇 글자를 썼다. 비시린(比西林), 인싱예팬(銀杏葉片), 쉬안윈팅(眩暈停)......
그 후부터 나의 뇌혈관 병은 더욱 엄중해졌고 늘 재발하였으며 얼굴의 황갈색 얼룩이 더욱 뚜렷해졌고 오른 쪽 다리는 늘 부어 아팠다. 발작할 때면 나는 침대에 누워 발을 높이 들어 벽을 밟아 혈액이 거꾸로 흐르게 하였다......
약간의 위안
하늘은 그래도 공평하다, 비록 내가 결혼에 실패하고 신체적으로는 고통이 심하지만 사업에서는 늘 순조로웠으며 생각하는 대로 일이 잘 풀렸다. 이것은 아마 하늘이 불쌍한 나에게 자그마한 위안과 생활해 나갈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저번 사건이 있은 후, 우리는 이혼할 것을 협의하였지만 돈과 재산문제 때문에 이혼은 지금까지 진척되지 않았다. 비록 이혼이 성사되지 않았지만 나의 사업은 갈수록 좋아졌다. 내가 운전하는 화물차는 늘 적재량을 초과하였는데 낮에는 벌금도 많아 밤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병마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 내가 아무리 의지력이 있다고 해도 이 현실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며, 벌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혼자서 야간 운전을 할 수 없어 1997년 봄에 큰 화물차는 팔고 작은 차를 사서 운송 업무를 맡아했다. 예전에 내가 맡은 업무는 펑저우(彭州)시의 한 개인업자인 둥펑(東風) 큰 화물차가 나를 도와 운송하고 있다. 1998년, 산환로(三環路) 건설이 시작되자 일이 아주 많아져 청화구 운송회사를 도급 맡은 업자가 적재함을 덧댄 둥펑(東風) 자동차 4대로 밤낮 쉴 새 없이 나를 도와 운송하였는데, 운전기사, 짐꾼이 모두 30여명이나 되었다. 나의 일은 아주 수월하였는바, 매일 오전 11시쯤에 차를 운전하여 지휘부에 가서 화물 인도서를 받아오는 것인데 일하는 시간이 매일 한 시간쯤이지만 나의 월수입은 만 위안 이상이며, 심지어 어떤 때는 거의 2만 위안에 가까웠다. 나는 아파트가 있는가 하면 자동차도 있고 핸드폰도 있으며 아들도 유명한 학교에서 공부한다. 내가 정한 목표인 거의 40만 위안을 주고 산 2급 시장의 100수(手) 주식도 손안에 들어왔으니 나도 이제는 편안히 향수를 해야 하리라.
혼비백산
하지만 사람마다 다 알다시피 돈이 있어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으며, 약물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다.
오른 쪽 다리의 혈관종양은 지워버릴 수 없는 한 덩이 마음의 병(心病)이며, 시종 나의 마음을 누르고 있는 하나의 큰 산이다. 후반생에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서만 살아야 하는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나는 미래를 계획해보았는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바로 젊었을 때, 돈을 많이 벌어 주식을 사서 이후에 반신불수인 나를 돌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100수(手)의 2급 시장 주식을 사놓고 시세를 봐서 내다 팔려고 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래도 주식으로 돈을 벌 수 있겠는가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1997년 주가가 폭락하였을 때, 하루 밤 사이에 20만 위안을 손실 보았다. 나는 밥맛이 다 떨어지고 잠이 오지 않고 차를 운전할 때 가속페달을 밟는 것마저 힘이 없었으며, 온 종일 혼비백산 하였는데 주식도 나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시련 속에서 생활하고 공허 중에서 생활하며 병마 중에서 생활하고 공포 속에서 생활하고 있던 나는 매일 한 시간 전후 출근시간을 제외하고는 미용을 하고 머리를 메만지며 마작을 하는 등등으로 자극을 찾았다. 어떤 때는 또 생각했다. 죽어버리고 말자, 지금 반신불수가 되기 전에 어머니, 아들에게 돈을 남겨주고 말자. 그러나 또 그들은 내가 없으면 얼마나 고독하겠는가를 생각하고 그 생각을 포기하였다. 종일 눈물로 지냈으며 혼자서 쓴 물을 삼켰다.
(다음에 계속 이음)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6일
문장갱신: 2004년 8월 8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6/79558.html
논-픽션: <질풍경초 (疾風勁草)> (2)
글/중팡츙(鐘芳琼)
제2부 새로운 삶
머리말 : 법을 얻은 후 나는 처음으로 무엇이 무병 상태에서 온몸이 가벼운가를 체험했다.
제1장 연을 맺다
- 사저(師姐:동문여자선배)의 변화
1998년 8월, 운전 기사인 사저(나보다 한 살 연상임)가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싸허보(沙河堡)의 한 남자 수련자는 원래 대머리 였는데 수련 후 머리카락이 모두 자라났고, 랜화춘(蓮花村)의 한 할머니는 수련 후 흰 머리카락이 모두 검어졌단다. 너도 파룬궁을 수련하렴.” 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연공 하는 것은 퇴직한 노인들이나 하는 일이지요. 나야말로 그건 하지않겠어요.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먹고, 입고 싶은 것 있으면 입다가 죽으면 그뿐인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한 친구가 수련하지 않는 것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나는 그냥 사저네 집에 가서 그 남편과 또 그녀의 남편 직장의 친구 두분들과 함께 마작을 했는데, 때로는 밤을 지새곤 했다. 그러나 사저는 혼자서 책을 보았는데, 나는 그녀가 이렇게 크게 변한 것이 이해 되지 않았다.
제 3 순환 도로(三還路) 건물 보수를 시작하자, 나의 장사도 바쁘게 되었다. 사저의 남편은 메이산(眉山)의 사료 공장에서 지배인으로 임명되어 “삐야오쯔”(標致)세단승용차까지 배정 받았다. 사저는 남편을 도와 차를 운전하였다. 겨울이 되니 장사는 더욱 바빴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바삐 움직였다. 그들은 청두(成都)로 돌아오는 기회가 매우 적었다. 설 전에 사저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는데, “내가 너에게 줄 설 물건을 사놓았다. 모두 메이산(眉山) 특산물인데 네가 한번 와서 가져가려무나.”라고 했다. 내가 그의 집에 갔을 때 발견한 일이다. 그전에는 온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하여 자식에게까지 “못난 어머니”라고 불리 웠던 사저였는데, 얼굴위의 주근깨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윤기가 돌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동하여 “어느 미용원에 가서 피부를 바꾸었어? 효과가 너무 좋은데”라고 말했다. 그는 “바꾸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면 어느 미용원에 가서 미용을 했어? 무슨 피부 보호제를 발랐는데?”라고 연속 물었다. 그녀는 “미용도 하지 않았고 그 무엇도 바르지 않았어.”라고 했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녀는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찬물로 얼굴을 씻고 올 테니 네가 보아라.”라고 하고는 즉시 얼굴을 씻고는 나에게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단번에 피부가 이토록 좋아질 수가 있어?”라고 나는 물었다. 그는 “파룬궁을 수련해서이지.”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반감이 일어나 사상상에서 저촉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들 파룬궁은 천상은 있고 지상은 없다고 억지를 한다지?”라고 풍자해서 말했다. 그녀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으나 실제 자신의 눈으로 본 사실이어서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피부는 확실히 좋게 변해 있었다.
집에 와서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6년 동안 나는 얼굴의 황갈색 반점 때문에 매주마다 끊임없이 미용을 했다. 청두(成都) 한의원에서 한약도 많이 복용 했을 뿐 아니라 대량으로 국내외 이름난 건강음료도 먹었다. 예를 들면 춘부로(春不老), 진주가루(珍珠粉), 샌니레이더(仙尼雷得) 등등 이다. 심지어는 아름다워지기 위해 반점이 있는 곳에 미국의 정화소(精華素) 미용을 한 후, 여러 차례 침을 맞았으며 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돈을 썼다. 그러나 모두가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10년간이나 보아왔던, 그녀의 얼굴에 넓게 깊이 박혀있던 주근깨가 어찌하여 몽땅 없어졌단 말인가?
- 대법이 미혹을 타파하다.
나는 호기심을 품고 사저를 찾아갔으나 입을 열기가 거북스러웠다. 그녀는 나의 이런 심사를 보고는 곧 나에게 이홍지 선생님의 설법비디오 하나를 주었다. “당신이 매일마다 절을 하며 머리가 터지도록 절을 해도 소용이 없고 향을 한줌 한줌씩 피워도 소용이 없다. 당신이 진정으로 확실히 당신의 그 마음을 수련 해야만 된다.” 사부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을 들을 때 나는 단번에 수수께끼가 풀린 것처럼 똑똑히 알게 되었다. 원래 내가 그처럼 많은 돈을 쓰고서,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향을 피우고, 불상 앞에서 절을 한 것이 모두 헛수고였으니,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없다. 나는 줄곧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나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행복하고 아름다움이 가득한 가정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일체의 희망을 신과 부처에 기탁 했었다. 나는 일찍이 돈을 내어 고향 마을 관음당(觀音堂)에 불상 하나를 세웠으며, 특별히 승용차 한대를 전세 내어 전문업을 하는 노인 한 분을 모셔와서 찐탕현(金堂県)의 동자원(童子園)에 봉안되어있는 보살에 금색칠을 하게 하였다. 청두(成都)의 사원과 러산(樂山)의 대불상에 향을 피우고 불상에 절하러 갔을 뿐만 아니라 또 특별히 차를 몰고 스찐사(石勁寺)에 가서 고급향을 피웠고, 칭청산(靑成山) 바이웬사(白元寺)에 가서 거사들과 함께 희사하는 공덕과 신불의 보호를 기원하였다. 허난성(河南省) 하오산 소림사(篙山少林寺)에 갔었고, 산시성(陝西省)의 천하제일 험한 화산(華山)에도 가서 신의 강림과 부처의 영통을 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의 희망은 비누 거품마냥 한번 또 한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어떤 하나의 신과 불도 나를 보호하여 병마에서 빠져 나오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전 생활 따라 그대로 절망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만 했었는데…… 알고 보니 바깥에서 찾으려고 하면 모두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며 다만 자신에 의존하여 마음을 닦고 쩐, 싼, 런(眞, 善, 忍)을 수련해야만 하는 것이었구나! 나는 사부님이 말씀 하신 것이 매우 도리가 있다고 느껴져, 한번 시도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또 자신은 신분이 있고, 지위가 있는 사람인데 주민 할머니들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연공 한다는 것이 보기가 너무 고상하지 못하고 얼굴이 깎이는 것으로, 만일 낯익은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생각했다. 생각 끝에 일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사저가 돌아온 후 다시 차를 몰고 그의 집 가까이에 있는 연공장에 가서 그와 함께 연공 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일요일이 되어 내가 연공장에 가보니 적어도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눈을 감고 서서 연공 하고 있었는데 동작들이 정연하고 우아했다. 노인과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점잖고 고상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저 모자는 시종 찾지 못했다. 나는 또 차를 몰고 그의 집까지 가서 그를 찾았다. 대문 어귀에서 급히 연공장으로 향하여 달려가는 그들을 만났다. 연공장에 간 후 사저는 한 남성분더러 나를 가르치게 하고는 곧 연공 하러 갔다. 나는 당시 많은 의문을 제기 했는데 그는 인내하면서 모두 해석해 주었다. 후에 그는 나에게 “당신이 거주하고 있는 부근의 신화공원에도 여러 개 연공장이 있습니다. 공원의 앞문, 뒷문, 공원 안에도 있으며 뒷문에 있는 성화 초등학교 화원 내에도 있습니다. 가십시오. 그들은 모두 무료로, 기뻐하며 인내력 있게 당신을 가르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
1999년 3월 5일 아침 6시 반이 되자 나는 제 때에 신화공원 앞문 연공장에 도착했다. 리제(李姐, 이씨 언니)가 나를 데리고 동공(動功)을 연마하였다. 후에는 또 나에게 가부좌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앉아서 얼마 안되었는데 두 다리가 부풀면서 아팠고, 마음도 아파서 참기 어려웠다. 두발은 마치 자색의 가지와 같았고, 아파서 머리와 얼굴에도 땀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내의도 땀에 흠뻑 젖었는데 정말로 괴로웠다. 이때 나는 참아야 한다는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줄곧 억지로 참았다. 조금 지나자 나는 내가 하나의 매우 청정한 한 사원 밖의 큰 평지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몸에는 가사를 입고 있었는데 가사는 번쩍번쩍 큰 빛을 발산하고 있어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했다. 아! 이 사원이 곧 나의 집이구나. 몇 천년, 몇 만년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구나 라고 나는 느껴졌다. 집에 돌아온 심정은 격동으로 그칠 줄 몰랐다. 감동의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나는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억지로 참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쑥스러워서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마음에서 솟구치는 격동을 누를 길 없었는데, 결국에 이르러서는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연공 음악이 끝났다. 내가 눈을 뜨고 보니 사람들은 모두 떠나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두 다리에서 아직도 무슨 물건이 멈추지 않고 돌고 있음을 느꼈다. 이때 몇몇 할머니들이 다가와서 관심 있게 말하기를 “다리가 몹시 아프면 내려 놓으시고, 울면서까지 연공 하지 않아도 되요.”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방금 본 정경을 말했다. 그들은 모두 “당신은 근기가 좋습니다. 천목이 열린 것입니다.” 라고 했다. “무엇이 천목 입니까? 나는 오늘 처음 와서 연공 합니다. 책조차도 아직 없는데요?” 나는 또 그들에게 “나의 다리에는 줄곧 무엇이 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파룬(法輪)이 돌고 있습니다. 당신의 다리에 병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당신들이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고는 마음속으로 ’당신들은 정말 점쟁이 보다 더 영험하구나, 나는 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점을 쳐 보았으나 종래로 이처럼 영험하지 못했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파룬이 당신의 신체를 조정하여 주고 있습니다. 어디에 병이 있으면 그는 모두 조정해 주지요.”라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다리를 내려 놓으라고 하였지만, 파룬이 여전히 돌고 있기에 다리를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발바닥을 서로 대립시키지 말라 하여 나는 겹치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파룬은 여전히 돌고 있었다.
그날 나는 즉시 대법책을 얻어 집에 돌아와서는 손에 놓기 아쉬워하면서 읽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는 게으르게 늦잠을 자지 않았으며, 다시는 마작놀이를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꼭 연공장에 가서 연공 했고, 연공이 끝나면 그 길로 출근했다. 하는 일들을 잘 안배하여, 시간만 있으면 책을 보았는데 밤늦게까지 보곤 했다. 심지어 승용차에 있는 유행 가곡 음악테이프를 모두 사부님의 설법 테이프로 바꾸어 버렸다.
제2장: 대법은 나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었다.
- 신기함을 체험하다.
3월8일. 나는 진작에 아들 애의 선생님 멍위룽( 蒙玉蓉 )과 그녀의 대만 친구, 나의 큰 어머니와 함께 스즈산장(狮子山庄)에 가서 놀기로 약속 했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 일어나니, 얼굴이 바싹 조여지고, 열이 나서 매우 불편한 감을 느꼈다. 하여 즉시 얼굴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는데, 그 순간 나는 그만 당혹하여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나의 온 얼굴이 부은데다가 붉기까지 하였는데 마치 관공(関公- 관우에 대한 존칭) 같았다. 이를 어떻게 한담? 나는 찬물로 얼굴을 씻어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간은 이미 11시가 다 되었지만 나는 문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큰 어머니는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멍 선생님 일행은 진작에 스즈산장에 도착 하여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사저의 핸드폰을 눌렀다. 나는 “보세요, 언니가 나더러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라고 해서 했는데 수련하여 얼굴을 부어 오르게 했어요. 약속한 사람들은 이미 나를 더 기다릴 수 없는 지경인데, 나는 문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라고 했다. 사저는 그 즉시로 ”좋은 일이다. 사부님께서 너의 신체를 조정 해주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더는 다른 방법이 없자 체면상 할 수 없이 억지로 그들을 만나러 갔다. 절반쯤 갔을 때 큰 어머니가 “너 오늘 분을 발랐느냐? 얼굴색이 이다지도 보기 좋으니 말이다” 라고 물으셨다. 그녀는 나의 얼굴이 열이 나고 있음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 물으니 나도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얼굴의 증상에 대해서 내가 감각이 있는 이외에, 그녀들은 다만 약간 불그스레한 것으로 보았을 뿐 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튿날,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리제( 李姐-이씨 성의 언니 )가 나를 보더니 즉시 물었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기쁜 일을 만나면 정신이 상쾌해 진다니깐, 샤오중 (小鈡 ) 오늘 너의 얼굴은 어찌 이처럼 이쁠 수가 있어, 무슨 좋은 일 있었어?” 나는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어” 라고 했다. “法轮功(파룬궁)이 이처럼 좋단 말이야! 우리도 가서 수련해야지……” 라고 했다.
일주일 후 얼굴의 증상은 없어졌다. 더욱 신기한 것은, 얼굴에 몇 년간 미용 하여도 효과가 없었던, 오래되어 짙어진 겉표면의 황갈색 반점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 천상에 한 무리 선녀가 오가다
이때 나는 法轮功(파룬궁)에 더 큰 신심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사부님이 책에서 하신 매 한마디의 말들을 더욱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러던 중 십 여 년 간 나의 마음속에 묻혀있던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었다. 24살 되던 그 해 어느 하루 저녁, 나는 고철을 가득 실은 해방화물차(解放貨车)를 몰고 청두(成都)에서 두짱앤(都江)까지 왔다. 차가 투쵸우(土橋)지역에서 달리고 있을 때 이라, 대략 이른 새벽 4시경쯤 되었을 때다. 나는 선녀들이 떼를 지어 하늘에서 날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차 한참 보다가 생각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줄곧 나의 앞에서 날고 있는 거니? 아예 내가 차를 좀더 빨리 몰아보자, 누가 더 빠른가를 보자 하여 나는 가속페달을 더욱 세게 밟았다. 그들은 여전히 나로부터 그만큼 가까이 떨어져 있어서 나는 곧 또 생각했다. 아예 내가 차를 좀 천천히 몰아 보자 하여 가속페달을 늦추니 차가 천천히 달리었다. 그런데 그 선녀들은 여전히 나와 그만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날았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옆에 앉은 물건 주인을 불러 깨웠다. “이 사장님, 빨리 보세요, 하늘에 떼를 지어 선녀들이 날고 있어요.” 그는 잠기가 가득찬 눈으로 몽롱하게 말했다. “어디에?”, “사장님 어서 보세요, 하늘에 저렇게 많고 많습니다. 아직도 날고 있어요, 사장님 보이지 않으셔요?” 정말 유감스러웠다. 그는 그처럼 눈을 크게 떳으나 그토록 아름다운 선녀들을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들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다만 일반 사람들로서는 볼 수 없을 뿐이었다.
- 온 집안이 이득을 얻다.
직접 몸으로 法轮功(파룬궁)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체험한 후 나는 일심으로 나의 아들과 어머니가 이 아름다운 공법을 배우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나의 권고를 듣더니 기뻐하면서, 나를 따라 수련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많은 공력을 들여서야만 비로서 수련의 문에 들어섰다. 나는 “어머니, 우리 함께 가서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합시다. 내가 어머니에게 1억되는 돈을 드린다 해도 어머니 더러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게 하는 것만 못 합니다. 한 사람이 한 평생 병이 없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어머니, 보십시오, 저는 연공 한지 일주일 만에 과거 만원을 넘게 써서 치료해도 안되던 얼굴의 황갈색 반점이 전부 없어졌습니다. 이것을 어머니는 친히 보셨지요?”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나도 法轮功(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자야 하지, 또 포룬(抱轮)하려면 반 시간 씩이나 서 있어야 하니 그야말로 살아서 고통을 받는 격이다. 나는 지금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려야겠다.” 라고 했다. 어느 일요일 저녁 식사 후 아들이 “외할머니, 우리 같이 가서 연공 해요.”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나는 안 간다. 너희들이나 가거라.” 라고 했다. 아들은 할머니의 팔을 잡아 끌면서, “가세요. 할머니가 가서 해 보고 좋다고 느껴지면 계속 하시고, 아니면 그만 두셔요. 여하튼 돈 한 푼도 낼 필요가 없는데요.” 라고 했다. 이렇게 되자 어머니는 거절 하기가 미안하였다. 손자는 그를 끌고 연공장으로 갔다.
연공장에 가니 연공하는 분들이 어머니를 매우 친절히 맞아 주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몸소 연공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기에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9시가 넘자 단체 법 학습이 끝났다. 나는 차를 몰아 아들을 학교 선생님 집에 데리고 갔다. 어머니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녀가 발을 씻고 잠을 자려고 준비 하는데 갑자기 뇌혈관 병이 재발했다. 하늘과 땅이 빙빙 돌았고, 집 마저 따라서 돌아 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발을 씻은 물마저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급급히 침대에 누워서 내가 돌아가서 약을 찾아 주기를 기다렸다. 내가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의 이 말씀을 듣고: “좋은 일이에요. 어머니는 매우 인연이 있으세요. 사부님께서 어머니를 책임지기 시작하셨어요. 이미 어머니의 신체를 정화 시키기 시작하고 있거든요.” 라고 말했다. 나는 곧바로 어머니에게 <전법륜>을 읽어 드렸다. 읽고 있으니 그녀는 잠이 들었다. 밤중에 깨어나 보니 어머니의 몸은 모두 회복되어 병 증상이 모두 없어졌다. 그녀는 의아해 했다. 괴상하구나, 어제 저녁 그처럼 심하던 병은 과거 같으면 반드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야 했단다. 영양주사도 10일 내지 반 달간 맞아야 비로소 회복이 가능한데 이번에는 어찌 되어, 딸이 책을 읽어 주는 것을 한참 듣고 나니 병이 완전히 나았단 말인가? 나는 이 선생님을 만나본 적도 없고 그가 나의 맥을 짚어 본 적도 없는데 이 병이 어떻게 나아 졌는가? 法轮功(파룬궁)은 정말 신비롭구나. 만약 직접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말해도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씀 하였다.
그때로부터, 어머님은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法轮功(파룬궁) 수련을 했다. 그는 수련 하는 것이 돈을 벌기보다도 나으며, 돈은 백병을 치료할 수 없다고 느끼셨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연공장에 갔다. 연공한지 한 달이 지나자 어머니의 모든 병은 치료를 하지 않았는데 모두 나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50여 년간, 길을 걸으면 절룩 거리던 왼 발이 신비하게도 절룩 거리지 않았으며, 길을 걷는 것이 정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그녀를 본 후, 모두 法轮功(파룬궁)이 좋다고 했다. 하여 시골에 있는 두 딸, 남편, 사돈집 사람들 등등 모두가 法轮功(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7.20 이후 어떤 사람들은 두려워서 수련하지 않았다.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불가사의하게 한 것이 있다. 어머니가 연공한지 두 달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파하더니 토하기 시작했다. (마치 <전법륜>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았다.) 토한 것은 모두 검은 색이었는데 매일 토하기만 하고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벌레 두마리까지 토했다. 이미 5일간 토했다. 어머니는 생각하셨다: “사부님, 이렇게 토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너무 더러워 합니다. 만약 설사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다. 괴상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자 기적이 나타났다. 오후쯤 되자 과연 토하던 것이 설사로 변했다. 설사한 것 역시 모두 검은 색이었는데 또 7일간 설사했다. 7일간 밤낮 어머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었다. 다만 입술이 건조하여 껍질이 좀 일어났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찬물로 입술을 적시곤 했다. 8일째 되던 날 더는 설사 하지 않았다. 약간의 미음을 좀 먹고 싶다 하였고, 곧 죽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차로 그녀를 연공장에 까지 모셔갔다. 그녀는 서서 한 시간 동안 동공을 다 했을 뿐만 아니라 가부좌도 한 시간 했는데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연공과 법 학습을 통하여 한 주일 사이에 어머님의 신체는 완전히 회복 되었고 얼굴색도 좋아졌다. 내외(內外)풍습통, 좌골신경통, 담결석, 증세가 심한 맹장염, 뇌 혈관병 등이 치료하지 않았는데 모두 나았다.
아들도 수련을 시작한 후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가 어렸을 때는 “여윈 원숭이” 라고 들 했다. 그러나 수련을 거쳐 ‘통통하게 살찐 꼬마’ 로 되었다. 어렸을 때 아들애는 성실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국어 시험에서 65점을 맞았다. 아들애는 그 시험지를 나에게 보이면 훈계를 당할까 봐 두려워 틀린 것을 고쳐 놓았다. “X”를 “V”로 고치고 65점을 100점으로 고쳐 놓았다. 수련을 시작한 후로는 더는 속이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애가 성실하고 귀엽게 변했다고 했다. 이번 시험에서 그 애는 그 반의 수석을 차지했다. 그 애 역시 이 모든 것이 대법의 위력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그 애에게 쩐, 싼, 런( 眞, 善, 忍 )에 따라 하라고 요구 하셨기 때문이다.
- 세계적으로 고칠 수 없는 혈관 종양이 사라졌다.
두 달 후, 사저(師姐)가 나에게: “쇼중(小鈡), 너는 연분이 그토록 좋으니 오른쪽 하지 혈관종양도 다 나을 수 있을 거야” 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일깨워 주어서야 나는 비로서 깨달았다. 나는 아들애를 선생님 집에 전학 시키고 매일 회사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시간에는 대법 책을 읽고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며 연공 하였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는 매우 늦어서야 잠을 잤다. 몹시 바삐 돌아가니 그 병마저 잊어 버렸다. 돌이켜 생각 해 보았다. 이 두 달간 나는 밤 늦게까지 앉아 책을 보았고 종전과 마찬가지로 운전했다. 그런데 어째서 혈관을 뽑아낸 부위가 부풀어 오르지 않았는가? 뇌혈관 병도 반응이 없지 않은가? 그래 나의 이런 병들이 모두 나았단 말인가? 그렇다! 연공을 해서이다! 파룬궁을 수련해서이다!! 사부님의 파룬궁이 나의 병을 낫게 하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격동되어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파룬궁이 나를 구하였고,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나에게 두 번째 생명과 처음으로 건강을 주었으며,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나로 하여금 마음이 옥같이 아름답게 맑아지게 하였음을 느끼게 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무병 상태에서 전신이 가벼워 짐이 어떠한 것인가를 체험했다
- 옥같이 깨끗한 마음
병이 없어지니 정신상 압력도 없어져 기분도 좋았다. 늘 웃음을 담고 있으니 얼굴색도 밝았고 말투도 상서로웠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나에게 말씀하기를 “만약, 좀 더 일찍이 파룬궁을 수련 했더라면 좋았을 걸, 말을 잘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없었을 텐데,” 라고 하셨다. 아들은 말하기를 “어머니의 성격이 좋아졌다.”고 하였다. 친구들도 “우리는 전에 네가 너무 독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좋게 변하였니? 지금 너와 접촉 해보니 너 이 사람이 너무 좋다고 느껴지는구나. 사장의 허세도 없고, 붙임성도 매우 좋구나.” 라고 농담 삼아 말하였다. 나는 “파룬궁이 나를 개변시켰어” 라고 말했다.
참으로 파룬궁은 너무도 아름답다. 또 너무도 신비롭다. 나는 꼭 수련을 견지해 나갈 것이다. 그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나의 모든 친인, 친구들 에게 알려주어 그들도 모두 파룬궁을 수련 하게끔 하겠다!
제 3장 홍법
그리하여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에 관한 간단한 소개와 선생님께서 제남에서 하신 설법 테이프, <<전법륜>> 책 20여권을 가지고 연공장의 두 보도원, 또한 젊은 동수, 세 명의 꼬마 대법제자, 그리고 어머님까지 모시고 내가 직접 차를 몰고 홍법하러 고향 마을인 잰양(簡陽)으로 향하였다. 나는 격동된 심정을 누를 길 없어 마음 속으로 외쳤다: 고향에 계시는 여러분, 대법이 당신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당신들은 절대 이 만고에도 없는 기회를 놓쳐 버리지 마세요. 우리 일행은 큰 언니 집에 도착했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와서 우리와 만났다. 내가 그들에게 연공 하는 것을 배워주려고 고향에 왔다고 명확하게 말하자 그들도 매우 기뻐하면서 서로 이 소식을 전하였다. 이튿날 오전, 우리들은 사람이 많이 집중되는 큰 길옆의 한 편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연공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배우는 사람도 20여 명이나 되었으며,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우리는 대법의 아름다움을 그들에게 이야기 했다. 여러 사람들도 모두 파룬궁이 좋다며 서로 전해 가면서 말했다.
돌아온 후 나는 일분이라도 지체할세라 파룬궁의 신비로움을 이모에게 알렸다. 이모도 수련 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나는 북경에 전화를 걸어 군에서 고급 장관으로 계셨던(이미 퇴직 했음.) 작은 아버지께 수련을 거쳐 나의 혈관종양이 완전히 나아진 아주 큰 희소식을 알렸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파룬궁에 깊은 감격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도 수련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더러 연공장을 찾아 가시라고 했다. 며칠 후 나는 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연속 며칠 연공장을 찾아 보았는데도 찾지 못했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나는 “아침 일찍 공원에 가서 찾으세요. 낮에는 모두 출근하러 갑니다.” 라고 말했다.
- 시련이 닥치려고 하다.
며칠이 지나 이미 6월 말일이 되었다. 나는 또 작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연공장과 연계 되었는가를 알아 보았다. 그는 “지금 이미 나라에서 파룬궁의 수련을 금지 시켰다. 당원과 군인은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 하도록 되었다” 라고 하고는 사부님에 대한 좋지 못한 말까지 하면서, “내가 보기에 너도 수련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미 수련하여 병이 다 나았으면 되었다. 네가 지금 이 정도에까지 걸어 올 수 있는 것만도 매우 쉬운 일이 아니다.
나라에서 수련하지 말라고 하니 수련하지 말아라.” 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무슨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다만, 마음이 말 할 수 없이 아팠다.
작은 아버지는 나의 마음속에 가장 문화가 있고, 가장 사리를 똑똑히 알며, 가장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무슨 큰일이 있으면 나는 모두 그에게 묻곤 하였다. 만약 그의 말씀이 도리가 있다고 느껴지면 나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나의 심정이 몹시 모순 되었다. 이 일은 예삿일이 아니다. 반드시 나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당신이 나쁘다고 말하나 손수 실천한 것으로서 이것은 생동한 현실 입니다. 당신이 나쁘다고 말하나 내가 처음 연공 할 때에는 책마저 없었는데 천목으로 본 다른 공간의 광경은 <<전법륜>> 책에 쓴 것과 꼭 같았습니다. 당신은 나쁘다고 말하지만 나의 혈관종양과 뇌혈관 병이 어떻게 하여 나았습니까? 당신이 나의 병이 나았는지 낫지 않았는지는 보지 못할 수는 있지만 나의 얼굴에 넓게 깊이 퍼져 있던 황갈색 반점이 없어진 것은 볼 수 있지요, 이것은 사람마다 모두 볼 수 있는 현상이지요. 그렇다면 어찌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 하여 같이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본 것은 확실하지만 소문은 믿을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2일간 반복되는 사고를 거쳐 나는 많고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나는 수련을 포기 하려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대법이 너무나 좋기 때문이었다. 나는 계속 수련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생으로 바꾸어온 장사에 누가 미칠까봐 두려웠다. 하여 나는 한번 또 한번 가슴 아프게 울었다. 최후에는 마(麻)처럼 얽힌 사유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 냈다: 어떠하든지를 막론하고 나 역시 견정하게 수련해야 한다.
그즈음에 연공장에는 보도원이 늘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홍음 ( 洪吟 ) >>중에 있는 시 세수를 암송하였다.
<법을 돕다>: “중생을 제도하리라 품은 마음, 스승을 도와 세상에서 행하네. 나를 도와 법륜을 돌리나니, 법은 이루어 천지간에 행하네.”
<위덕>: “대법이 몸을 떠나지 않거니, 쩐, 싼, 런(眞, 善, 忍)이 마음속에 있네. 세상에 대나한을, 귀신도 굉장히 두려워하네.”
<무존>: “태어나 바라는 것 없고, 죽어 애석할 것 없네. 망령된 생각을 탕진하거니, 부처로 수련되기 어렵지가 않노라.”
여러 사람들은 한차례 아주 큰 시련이 곧 닥쳐올 것임을 희미하게 감지했다.
(계속 이음)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7일
문장갱신: 2004년 8월 8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7/79559.html
논-픽션: <질풍경초(疾風勁草)> (3)
글/중팡충(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18일】(전번 글을 이음)
제 3 부 11차례 구류되다
머리말: 박해 중에서 나는 한 차례 또 한 차례 감금과 혹형의 시달림 중에서 걸어 나왔다.
제 1 장 탄압 초기
7.20 대규모 체포
어느덧 1999년 7월 20일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을 금지하기 시작했으며 또 일부 보도소장을 붙잡았다. 사부님의 한 수 시 <<진성이 보이다>> 가 생각났다. “대법을 굳게 수련하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지라, 층차를 제고함이 근본이로다, 고험 앞에서 진성이 보이나니, 공성원만하여 불도신이 되노라.” 나는 대법을 굳게 수련하려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내가 대법 중에서 이득을 얻은 것이 적지 않은데 틀림없이 정부에서 잠시 파룬궁 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초래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나는 차를 타고 온 집 식구와 동수들과 함께 법에 따라 성(省) 정부에 청원하러 가서 불법적으로 체포된 모든 대법제자들을 무조건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아울러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백 가지 이익만 있고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는 진실한 정황을 성 정부에 반영하였다. 우리는 쓰촨성 정부청사 밖의 거리로 갔는데 동수들도 아주 많이 와 있었다. 우리는 성 정부 문밖의 인도에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목격했다. 전신을 무장한 경찰들이 줄을 서서 사면팔방으로부터 뛰어왔으며 경찰차들도 경적을 길게 울리면서 달려 왔는데 여러 가지 경적소리가 한데 뒤엉켜 공포가 극에 달했고 공기는 마치 응고된 듯 하였다. 여러분들은 숨을 죽인 채 비장하고 공손하게 서서 그들이 나와 우리들에게 하나의 합리적인 대답을 주기를 기다렸다. 비디오카메라는 이런 장면을 부지런히 촬영하였고 전신 무장한 경찰들은 굳은 표정으로 오고 갔다. 오후 2시경, 한 경찰이 큰 스피커를 들고 “당신들은 모두 차에 오르시오.” 라고 외쳤다. 결국 우리더러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게 하면서 모두 싣고 먼저 청두 올림픽 경기장으로 갔다가 후에 랑중(閬중) 호텔로 옮겼다. 경찰은 또 불법적으로 우리 몸을 수색하였고 대법책을 수색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신훙루(新鴻路) 파출소로 옮겨 한 밤중까지 불법적인 심문을 한 후에야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 온밤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많은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파룬궁이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신기한 효과를 보도하지 않았는가? 바로 5월 말, ‘요언을 믿지 말고 요언을 퍼뜨리지 말자.’라는 문장이 신문에 실리지 않았는가? “당원, 군인이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요언인가?” 라는 문장에서 똑똑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나라에서는 여태껏 파룬궁을 금지시킨 적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하루 밤 사이에 변하였는가? 이 정부는 도대체 어찌된 판국인가?
곧이어 전국 각지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에서 천지를 뒤덮을 듯이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모욕하였다. 전 중화(中華)의 대지는 요언에 휩싸였다. 한 뙈기의 오염된 공기는 그야말로 “검은 구름이 성을 뒤덮어 성이 무너질 것 같은” 기세였다. 나의 온 마음은 울고 있었다. 이렇게 좋은 대법이 까닭 없이 탄압을 받고 있음을 울었다. 나의 온 마음은 슬픔에 잠겼다. 슬픈 것은 다재다난(多災大難)한 중국인민들이 또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정치박해를 받아야 하는가 함이었다. 나의 온 마음은 외치고 있었다. 우리 민중들은 무엇 때문에 마음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이 하나의 자유, 이 하나의 권리마저도 박탈당해야 한단 말인가!
단체 법공부와 연공을 위해 집을 사다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개창(開倉)해주신 밖에서 단체연공하는 환경을 잃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한 끝에 괴로운 나머지 사저(師姐, 동문의 여자 선배)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큰 객실이 달린 집을 매입하여 단체로 법공부와 연공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전과 같이 그렇게 조용하고 상화한 연공환경이 있고 우리가 전과 같이 자유스럽게 쩐, 싼, 런(眞, 善, 忍)을 신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리하여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수많은 집을 둘러본 끝에 그 해 8월 8일, 나는 런허웬(仁和苑) 안에 있는 객실 면적 33평의 집을 샀다.
집을 사서 꾸미고 수리하는데 20여 만 위안을 썼다. 비록 집을 사는데 내가 여러 해 부지런히 모은 수중의 적금 전부를 썼지만 그래도 매우 기뻤다. 오직 단체 법공부와 연공하는 환경만 있다면 뒷일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돈은 나중에 또 벌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10월 10일, 아직 집을 꾸미고 수리하면서 온 가족이 다음 달 새집에 이사하는 일을 상의하고 있을 때, 단지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둥퉁쑨(東通順) 파출소에 의해 압송되어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지옥, 청두시 쥬루(九茹)촌 구치소에 감금되었다.
*상무조보 (商務早報) 사건
1999년 10월 1일, 50주년 경축일에 청두 『상무조보 (商務早報)』는 파룬궁을 10대 주요사건의 하나로 뽑았을 뿐만 아니라 또 “x교”라고 말했다. 보도는 완전히 옳고 그름을 뒤바꾸고 흑백을 헛갈리게 했는데 그야말로 틀림없는 정치 폭력단의 허튼소리다. 나는 보고 난 후, 신문을 가지고 차를 운전하여 5명의 동수와 함께 『상무조보 (商務早報)』편집장실에 도리를 따지러 갔다. 편집장이 자리에 없어 신문사 직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하자 그들은 기자를 불러 우리들의 말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비디오 촬영을 하게 하였다. 그때 우리는 모두 기뻐하며 순진하게 그들이 파룬궁에 대해 정면보도를 하는 줄 알고 그들에게 우리가 대법을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 이득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다. 결국 신문사에서 둥퉁쑨(東通順) 파출소에 알려 우리를 불법적으로 파출소에 붙잡아가 아침 5시까지 심문하였으며 또 밤중에 불법적으로 우리를 쥬루(九茹)촌 구치소로 보내어 각기 15일을 구류시켰다. (『상무조보』는 후에 악의 보응을 받아 사악끼리 서로 악을 행하던 중, 2001년 전 쓰촨성위(四川省委) 서기이며, 파룬따파(法輪大法)와 대법제자를 박해한 사악자인 저우융캉(周永康)에 의해 폐쇄 되었는데, 그 원인은 『상무조보』의 두 명 기자가 난충(南充)시 모(某)현, 부현장이 차를 운전하던 중 사람을 치어 죽인 후 뺑소니 친 사건을 보도해서였다. 저우융캉은 『상무조보』가 공산당원의 추행을 폭로한 것에 대하여 불만이 대단하여 고함쳤다. “우리의 신문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 이리하여 쓰촨(四川)에서는 신문을 크게 통폐합하였는데 『상무조보』는 이때 사라졌다.)
그날 밤 내내 가랑비가 내려 춥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고단하기도 했던 나는 캄캄한 방에 들어서자 널판자 세 쪽을 이어 붙여 벽에 기대어 놓은 간이침대에 쓰러졌다. 베개도 없고 이불도 없어 움츠리고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하였는데 경찰이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한참 뒤치락거리다가 얼떨결에 죽밥을 한 사발 받아왔다. 너무 뜨거워 내려놓고 식혀서 먹으려고 하는데 경범(輕犯) 죄수가 내게 말했다. “빨리 먹어요. 몇 분 있으면 사발을 거두러 옵니다. 만약 채 먹지 못하면 욕을 먹지요. 여기 경찰들은 아주 사납습니다.” 나는 듣고 나서 억울하여 눈물이 나왔다. 왜 참말을 했는데 여기에 갇혀야 하는가? 나는 늘 아들에게 가르치기를, 어릴 때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해도 갇혀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정부는 우리더러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인가?
*경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총이다
구치소에서 경찰은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신 강제로 우리에게 『모택동선집』을 읽으라고 했다...... 우리는 경찰에게 말하였다. “모주석은 말씀하시기를
1)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2) 인민들이 말한 것이 훌륭하다면 우리는 그것에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파룬궁 문제에서 우리는 모두 직접 실천을 거쳤으며 파룬궁은 몸과 마음의 건강에 백 가지 이익만 있지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민원 청원실은 공안국으로 변하였습니까? 무엇 때문에 청원의 길은 감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바뀌었습니까?”
슝(熊) 부소장은 말했다. “우리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총을 든 것과 같이 다른 사람(장쩌민을 가리킴)의 돈을 받았으니 그가 우리에게 뭘 하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지요......”
우리는 종일 캄캄한 방에 갇혀 있었는데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전화도 하지 못하게 하고 일반 구속자의 권리마저도 없었으며 완전히 세상과 단절되었다. 점심은 흙이 묻은 썩은 감자를 조금 먹고 저녁은 아침과 점심에 먹다 남은 반찬과 밥을 먹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개수통에 버린 밥을 한데 모아 끓여 “팔보죽(八寶粥)”이라고 하면서 주는데 이것이 바로 장(江)씨 집단이 말하는 “중국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의 진상이다. 반 달간을 시달림 받아 나는 이미 여위어 몰골이 바뀌었다. 집식구들이 보고는 상심하여 나를 위해 남 몰래 눈물을 흘렸다.
*핍박으로 직장을 잃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더 이상 주식을 하지 말 것이며 나머지 30만 위안의 주식을 내다 팔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친구의 외삼촌이 말하기를 “지금은 주가가 너무 낮기 때문에 매주(買主)를 찾기가 쉽지 않다, 네가 집 내부 장식을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면 먼저 조금 꺼내 쓰면 될 것이고 주식은 먼저 나에게 맡겨두었다가 천천히 매주를 찾아 팔면 된다.” 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나는 주식을 몽땅 그에게 주었다.
몇 달을 이어오면서 텔레비전과 신문에서는 여전히 계속 쉴 사이 없이 파룬궁을 모함하였다.
1999년 11월, 나는 깐또(干道) 지휘부에 영수증을 끊으러 갔는데, 이씨 언니가 사무실에서 내게 직접 말했다. “우리 직장에서 만약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을 조사해내면 직장은 10만 위안을 벌금 당하게 되오. 쇼중(小鍾), 자넨 비록 직장 직원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여기에서 업무를 보고 있지 않소. 우리는 위로 노인이 있고 아래로는 자식들이 있는데 직장을 의지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자네는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수련을 하지 말아요. 만약 자네가 계속 수련하겠으면 우리도 더는 자네에게 업무를 맡길 수 없으니 자네가 우리들의 입장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당신이 봐요. 매일 석간신문들은 근본 볼만한 것이 없어요. 모두 두 이씨가 차지했습니다. 하나는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임)이고, 하나는 당신 사부인 리훙쯔(李洪志)이지요.” 마지막에 그녀는 또 말하기를 “당신은 수련하지 않겠다는 입장표시를 해요.” 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이(李) 언니, 내가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서 이득을 얻은 일을 당신들은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텔레비전에 한 말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하는 것을 당신들도 응당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쩐, 싼, 런(眞,善,忍)을 수련하므로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서 돈을 벌기 위해 양심을 어기고 대법에 미안하고 사부님에게 미안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내가 왜 거짓말하기를 싫어하는가 하는 이유를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제 1 강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가(道家)는 眞(쩐)、善(싼)、忍(런)을 수련함에 진(眞)을 중점으로 수련한다. 그러므로 도가는 수진양성(修眞養性)을 하여 참말을 하고, 참된 일을 하며, 참된 사람이 됨으로써 반본귀진(返本歸眞)하여 최후에 진인(眞人)으로 수련되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忍)도 있고 선(善)도 있는데, 중점을 진(眞)에 두고 수련한다. 불가는 眞(쩐)、善(싼)、忍(런)의 선(善)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 선(善)을 수련하기 때문에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수련해 낼 수 있다. 자비심이 나오면 중생을 모두 고생스럽게 보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려는 소원을 품게 된다. 그러나 진(眞)도 있고 인(忍)도 있는데 선(善)에 중점을 두고 수련한다. 우리 法輪大法(파룬따파) 이 한 법문은 우주의 최고 표준-眞(쩐)、善(싼)、忍(런)에 따라 함께 수련하므로 우리가 연마하는 공(功)은 대단히 크다.”)
이러한 정황과 압력, 이러한 정책 하에서, 나는 9년간 지속해온 거래처를 부득불 떠나야 했다. 이전의 매달 만 여 위안 수입이 갑자기 없어지게 되었다. 세 식구인 우리 가정은 어떻게 생활하겠는가? 아이가 학교를 가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은 장(江)씨 집단이 파룬궁 수련생들을 핍박하여 신념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한 경제적인 압박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절대로 수련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주 진리의 큰 길에서 영원히 영원히 걸어 나갈 것을 결심하였다.
제 2 장 힘겨운 청원의 길
*처음 청원하러 가다
불공평한 대우 하에서 1999년 12월 3일, 나는 여덟 살 되는 아들을 데리고, 청두 안캉(安康) 병원(정신병원)에서 박해를 받다가 나온 동수와 함께, 파룬궁을 위해 청원하고 내가 연공을 한 후, 몸과 마음에 이득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정부에 반영하기 위해 북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대법제자들의 북경 청원 길을 가로 막는 사복 경찰들이 도처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버스를 타고 맨양(綿陽)에 갔고, 맨양에서 기차를 타고 쩡저우(鄭州)까지 갔으며, 쩡저우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스쟈쫭(石家庄)에 간 다음, 또 800위안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간신히 북경 라이광영(來廣營)의 임시로 거주할 연공장에 와서는 전국 각지 대법제자들과 교류한 후, 마침내 청원하러 가려고 했다. 12월 6일 아침 북경에 도착하였다. 아들은 돌아가서 학교에 가야하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그는 다른 한 동수와 함께 천안문에 가서 세인들에게 파룬따파(法輪大法)의 공법을 시범 보였다. 나는 북경 교외 라이광영에서 이틀간 묵었다가 다시 청원사무실에 찾아가려고 생각했다. 나는 아들과 헤어졌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한 모르는 사람이 우리에게 (나를 제외하고 또 외지에서 온 3명의 동수가 있었다)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가 그렇다고 하자 그 사람은 핸드폰으로 사람을 오라고 통지하고는 우리를 붙들어 라이광영 파출소에 데리고 가서는 10시간 후, 북경주재 쓰촨(四川) 사무소로 옮겼다.
*북경주재 청두(成都) 사무소
북경주재 사무소 뒤는 사합원(四合院 - ‘정방(正房)’ 과 동서(東西)의 집채 및 뒤에 앉은 네 채로 된 집)인데 3면은 작은 집이며 한 면은 문이다. 동수들은 여기 온 후, 모두 작은 방에 갇혀 몸을 수색 당했다. 그들은 몸을 수색할 때, 나를 작은 칸에 데리고 가서 나에게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고 옷을 몽땅 벗으라고 하였다. 불법 몸수색을 책임진 여자가 입은 옷은 종업원복이었다 추측으로 북경주재 사무소 영빈관의 종업원 같았다. 나와 한 여 동수가 같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의 대법책과 조금밖에 없는 몇 백 위안의 돈을 수색해 갔으며, 다른 한 동수의 몸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찾아내어 책상 위에 놓았다. 나는 그들이 이 번호로 동수들에게 박해를 하지 못하도록, 한입에 종이쪽지를 삼켜버렸다. 악인 청두 1처장, 펑쥬위이(발음대로 썼음)는 즉시 성이 왕씨인 보안요원에게 명하여 나를 수갑 채워 밖으로 끌고 나가 북경주재 사무소 문밖 돌사자에다 채워놓았다. 그때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이렇게 채운 채로 나를 불법 심문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죄가 없다. 나의 청원은 국민의 합법적인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지금 여기에다 묶어 놓았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핍박하여 누가 청원하러 가는 것을 조직했는가 말하라고 하였으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어떠한 조직도 없으며 모두 자발적인 행위다.” 그들은 나에 대해 방법이 없자 나를 6호실에 가두었다. 경찰이 불법으로 나를 심문할 때, 중차이이(鐘才一)가 나의 아들인지를 물었다. 아들도 여기에 갇혀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와 아들을 갈라서 5일 동안 가둔 후, 우리를 청두로 보내려고 할 때에야 나는 비로소 아들과 만났다. 떠나는 날 오후 3시 경에 펑쥬워이 처장이 또 나에게 “30분 내에 당신이 그날 삼켜버린 전화번호를 말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청두에 전화 한 통만 해도 최소한 당신은 3년 판결을 받을 수 있소.” 라고 겁을 주었다. 그가 무엇을 말해도 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지난 후, 아들이 내게 물었다. “엄마,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그 경찰 아저씨가 왜 안 오지요!” 그가 한 말은 나를 겁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아들은 나에게 나와 헤어질 때의 마음과 헤어진 후에 겪은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날 엄마가 우리를 차 타는데 까지 바래다 줄 때, 나는 여전히 마음이 무거워 말을 하지 않았어요. 역전에 거의 다 왔을 때, 나는 발걸음을 점점 느리게 하여 시간이 조금이라도 천천히 지나가기를 바랐으며,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나에게 “아들아, 돌아가서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또 확고하게 수련해야 한다.”라고 했을 때 나는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여 흐느껴 울면서 “예” 하고 대답했지요. 그때 나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워 말로서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도 엄마에게 물었지요. “엄마, 언제면 돌아와요?” 엄마는 “나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울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여덟 살인 나는 이렇게 생이별 하듯이 엄마와 헤어졌는데 나는 이후 엄마와 또 만날 수 있을지를 잘 몰랐습니다. 나의 눈앞은 이미 흐릿하였습니다. 나는 차에 올라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고 점점 멀어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고, 멀어져 갔습니다......
나와 네(聶) 아저씨는 차를 타고 천안문에 도착하여 긴장한 심정으로 천안문 광장 중앙으로 걸어갔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제 2 장 공법(포륜)을 연마하였습니다. 연공을 시작한지 1분도 안 되어 나는 경적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보니 주변의 행인들이 나와 네(聶) 아저씨가 연공하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경찰차 한 대가 나는 듯이 달려와서 우리 앞에 멈춰 섰습니다. 차에서 몇몇 경찰이 내려오더니 우리를 경찰차에 끌어올렸습니다. 내가 보니 차 안에는 붙잡힌 대법제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한 경찰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너 이 어린 녀석이 여긴 뭘 하러 왔어?” 내가 “호법(護法)하러 왔습니다!”라고 하자 경찰은 말했습니다. “호법하러 왔다고? 머리카락을 보호하러 왔단 말인가?” 나머지 경찰들도 나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나에게 묻던 경찰이 나의 뺨을 때려 나는 즉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 젊은 여 동수가 나를 그의 품으로 끌어당겨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울면 안 돼요, 대법 어린 제자는 울지 않지요, 사부님께서는 어린 제자를 가장 예뻐하신데요.” 경찰은 아주 빨리 우리를 한 커다란 집으로 싣고 갔습니다. 큰 집의 정면 벽은 모두 쇠 난간으로 만들었으며 안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었고 집 정도의 길이이며 벽에 붙인 침대가 있었습니다. 위에는 매우 많은 동수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대략 반시간 머물러 있었는데 경찰은 다시 나와 네(聶)아저씨를 북경주재 사무소의 한 호실로 보냈습니다. 방에는 10여 개의 의자와 책상이 있었습니다. 잠 잘 때는 의자를 한데 모아 침대로 썼는데 네(聶) 아저씨는 그의 옷을 벗어 나의 몸에 덮어주었습니다. 한번은 꿈속에서 떠드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습니다. 원래는 한 경찰이 네(聶) 아저씨를 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찰은 네(聶) 아저씨보고 나에게 옷을 덮어주지 말라고 말하면서 네(聶) 아저씨의 뺨을 때렸습니다. 경찰이 간 후, 나는 네(聶) 아저씨에게 방금 뺨 맞은 것이 아프지 않은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방금 얼굴이 얼어서 맞아도 감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좋은 마음,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 영하 몇 도 되는 날씨에 어린아이에게 옷을 덮어주었다고 하여 경찰에게 뺨을 맞다니 세상에 어디 이런 도리가 있습니까!
그 방에는 종일 전등을 켜고 있었으며, 커튼으로 가리워져 창문 밖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느 때가 낮이고 어느 때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며 내가 여기에서 며칠 있었는지는 더욱 몰랐습니다. 하루는 네(聶) 아저씨께서 “너희 어머니가 오셨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디에 계신지 다급히 물었습니다. “밖에 계신다.” 나는 얼른 커튼 모서리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또 다시 내려앉았습니다. “너희 어머니는 이미 호실로 들어가셨다.”고 네(聶)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다시 또 이틀쯤이 지나 내가 석방되어 나와 엄마를 보았을 때, 얼른 엄마 곁으로 뛰어갔지요.“
아들의 말을 듣고 난 나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 했으며 아들의 쇠약한 몸을 바라보니 마음속에서 애처로운 마음이 우러나왔다. “아들아, 네가 참 잘 했구나!”
한 경찰이 청두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가는 김에 우리 네 명의 대법제자를 압송해 갔다. 경찰은 강제로 우리 네 명의 대법제자에게서 매 사람마다 50위안씩 받아냈는데 말로는 북경주재 사무소에서 북경 기차역까지의 차비라고 했다. 경찰은 우리를 북경 기차역까지 압송해온 후, 강제로 우리 돈에서 두 장의 침대표 값을 제했다
*진상을 알게 된 승무원
기차 칸에서 경찰은 휴식의 편의를 위해, 침대차 한 칸을 맡았다. 양쪽 상, 중, 하에 모두 6개 좌석이 있는데 우리 4명 대법제자는 자신들이 돈을 내어 2개의 자리를 썼다. 밤에 경찰이 잠 잘 때, 한 경찰이 우리를 지키고 아울러 우리를 수갑으로 쇠 침대에 채워놓았다.
어느 날 아침, 몇몇 승무원들이 우리가 파룬궁이라는 말을 듣고 문의 커튼을 열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경찰은 말하기를 “조심들 하세요, 파룬궁은 모두 공(功)이 있어 당신들을 상하게 할 수도 있지요.” 라고 했다. 한 승무원이 말했다. “사실 우리 열차 팀(車務段)에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누나가 있는데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주 좋아 우리는 모두 그녀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정부에서 파룬궁을 반대하자 그녀 역시 영문도 모르게 직장에서 쫓겨났어요......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
이틀 후 아침 7시경, 기차가 청두에 도착하자마자 벌써부터 와서 우리를 기다린 경찰차에 실려 바로 청두시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에 압송되었다. 그곳의 고음 스피커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귀청을 찢을 듯한 큰 소리로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모욕하는 요언을 방송하였다. 보안요원들은 우리를 엄밀하게 감시하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점심 때 경찰은 아들을 데리고 갔다. 저녁식사 후, 그들은 우리를 큰 방에 가두어 놓고 “세뇌” 시켰다. 나는 그들이 지껄이는 거짓말이 듣기 싫어 일어서서 연공을 하였다. 보안요원이 발견한 후, 나를 발로 차서 밖으로 끌어내 강제로 우리더러 가죽 옷과 외투를 벗으라고 하고는 찬바람에 얼게 하였다. 보안요원들은 비바람을 막는 비닐 천을 걷어치우고 우리를 지켰는데 비록 그들이 한편 우리를 지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선로 요리를 끓여 먹었지만 시간이 길어지자 그들도 추워서 할 수 없이 비닐 천을 닫고는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오래 동안 땅바닥에 쪼그려 앉게 하였다. 시간이 길어지자 다리와 발이 마비되기 시작했으며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려고 하였다. 나는 얼른 손으로 옆의 쇠틀에 지탱하며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또 쪼그리고 앉았다......
*쥬루(九茹)촌 구치소
이틀간 강제적으로 “세뇌” 시킨 후, 쥬루(九茹)촌 구치소에 송치하여 불법적으로 15일간 감금하였다. 불법 감금된 대법제자들이 너무 많아 여자 감방이 모자라서 남자감방을 비워 여자 대법제자를 감금하였다. 구치소 안에 고음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귀청을 찢을 듯한 큰 소리로 대법을 비방하고 사부님을 모욕하는 거짓말을 방송하였다. 이 더러운 환경에서 나는 사부님께서 『 미신을 다시 논함 』중에서 말씀하신 법이 생각났다.
“대법을 수련하는 수련생의 우주 진리에 대한 인식은 이성(理性)과 실천(實踐)의 승화로서 인류가 어떠한 입장에 입각하여 인류사회의 일체 이론보다 높은 우주 법리를 부정하든지 막론하고 모두 헛수고이다. 특히 인류사회의 도덕이 전면적으로 붕괴될 때 위대한 우주는 다시 한번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사람에게 이 최후의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인류가 반드시 극히 소중히 여겨야 할 희망이었건만 사람은 도리어 사욕을 위하여 우주가 인류에게 부여한 이 최후의 희망마저도 파괴하였는바 천지(天地)로 하여금 크게 노하게 하고 있다. 무지한 사람은 여전히 각종 재앙을 자연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주는 인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단지 가장 낮은 한 층의 생명존재의 표현형식일 뿐이다. 만약 인류가 우주 이 한 층에서의 생존표준을 잃어버린다면 그러면 우주의 역사에 의하여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인류여! 깨어나라! 역사상 신(神)의 서약(誓約)은 실현 중에 있는 것으로 대법은 일체 생명을 가늠하고 있다. 인생의 길은 자신이 걷는 것이다. 사람 자신의 일념도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소중히 여기라, 우주의 법리는 바로 당신들 앞에 있다.”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포기하고 그들의 거짓말을 접수하게 하기 위해, 그들은 또 우리를 핍박하여 그들이 뜯어 고친 “세뇌”된 대법제자의 문장과 그들이 뜯어 고친 “세뇌”된 대법제자의 비디오를 보게 하였다. 장기적으로 캄캄한 방에 갇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우리들에게 법공부도 하지 못하게 하고 연공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경찰은 늘 대법제자들을 불러가서 전기 충격기 “맛”을 보여주었으며 끈으로 몸을 묶어 비를 맞게 했다. 장쩌민의 후원으로 말미암아 경찰들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아주 사나웠다. 쥬루(九茹)촌 구치소에서 왕씨 수련생이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경찰은 그에게 전기충격을 가한 후, 밥도 먹지 못하게 하고 비가 오는데 끈으로 묶어 내몰아 까무러치게 하였다. 그러나 사악의 일체 표현은 우주의 진리를 알고 있는 대법제자들에 대해서는 모두가 헛수고이다. 반달 후면, 이미 2000년 원단이다. 청두시 룽탄쓰 파출소의 탕씨 경찰이 나를 데리러 왔는데 나는 나를 집에 돌려보내 설을 쉬라고 하는 줄로 알았다. 결국 나를 다시 룽탄쓰 파출소로 데려갔다. 탕씨 경찰이 나보고 계속 수련하지를 물어 나는 “수련하겠다.(煉)” 고 말했다. “煉” 이 한 글자 때문에 점심 식사 후, 그가 형사구류 통지서를 작성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청두시 제 2 간수소(롄화촌)에 보내 한 달간 형사구류를 시켰다. 내가 들어가서 보니 한 감방에 20여 명 대법제자가 갇혀있었는데 마찬가지로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당번을 서야 했으며, 매일 반드시 침대에 앉아 형법 (刑法)을 학습하여야 했다. 만약 연공하는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중형(重型) 족쇄와 수갑을 채웠다. 나는 싱천(邢琛, 여자, 20여세, 대학생)의 두 발과 두 손이 이미 수갑과 족쇄에 시달려 붓고 검붉은 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는데 아예 밥을 먹고 잠을 잘 수가 없었으며 화장실에 가서 생리대를 바꾸는 일마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단식으로 박해를 제지하는 것을 보면 콧구멍을 통하여 야만적으로 음식물을 강제 투입시키는데 이렇게 할 때마다 대법제자는 죽을 지경이다. 일주일이 되어서야 감방 두목들을 불러서는 통일적으로 물건을 한번 사온다. 게다가 가격도 밖의 슈퍼마켓보다 2-3배나 비싸다. 불법 형사구류 한 달 만기가 되면 바로 구정이다, 나는 마음 놓고 집에 가서 설을 쇨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룽탄쓰 파출소 탕씨 경찰이 또 와서 나를 보고 아직도 수련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수련할 겁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다시 또 나를 완낸창(萬年場) 파출소에 맡겼다. 그는 내가 룽탄쓰의 소도시 호구(戶口)를 샀고, 집을 사고, 살고 있는 집은 모두 완낸창에 있으므로 사람과 호구가 갈라져 있음에 속해 나는 마땅히 완낸창 파출소에 속한다고 했다. 완낸창 파출소에 온 후, 나는 계속해서 “수련한다.” 고 말했다. 그들은 또 나를 쥬루(九茹)촌 구치소에 보냈다.....나는 이렇게 축구공을 차듯이 구치소에서 파출소로 가고 또 파출소에서 구치소로 갔으며 마지막에는 또 간수소로 갔는데 여태껏 집으로 가지 못하게 했으며 여태껏 목욕을 하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나는 북경에 합법적으로 청원을 갔다가 문마저도 찾지 못하고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포되어 감금 당했다. 1999년 12월 7일에 내가 북경에서 체포되어서부터 2000년 3월 2일까지 반복해서 6차례 감금하였다(북경주재 사무소, 칭양(靑羊)구 계독소(戒毒所), 구류소, 간수소를 포함) 모두 96일 감금 당했는데 중간에 한 번도 감금장소를 떠나지 못했다.
바로 법에 따라 북경에 청원하러 간 것 때문이다. 하지만 민원접수 사무실의 문마저도 찾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불법적으로 형사구류 1차례, 치안구류 3차례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은 아직도 계속 감금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장(江)xx가 부르짖고 있는 “중국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에 발생한 엄중하게 국민이 마땅히 향유해야 할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고 인신의 자유를 침해한 추잡한 행위이다.
*동생이 경찰 웨이다핑(魏大平)에게 3,000위안을 뺐기다.
간신히 2000년 3월 2일까지 견뎌왔다. 또 한번 불법구류 만기석방일이 돌아왔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번에는 어떻게 하든지 더는 경찰에게 무기한으로 감금되어서는 안 되며, 어떻게 하든지 북경에 가서 청원을 해야 하고, 상급 정부로 하여금 하급 경찰들이 우리가 이런 연공을 하여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인신의 자유와 권리를 어떻게 침범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오후 3시 경, 경찰 웨이다핑이 다시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예전처럼 이불을 안고 나갔는데 웨이다핑을 만나자 그가 나에게, “중팡충, 이불을 여기에다 놓아. 어차피 조금 있다가 또 돌아 올 것이니.”라고 했다. 내가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듣고 나서 기뻐 말했다. “설득되었나. 수련을 그만 두기로 했는가?” “내가 여기에서 한 번 갇히면 거의 석 달씩인데 매일 도둑질하고 빼앗고 몸 파는 사람들과 한데 갇혀있다 보니 그런 악담들을 듣기만 하면 머리가 어지러워져요. 집에 돌아가 조용히 생각해 보겠어요.” 그는 나의 말투가 어쩌다 변하고 “전화(轉化)”할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내가 이불을 파출소로 가지고 가는 것에 동의 하였으며 내 동생더러 3,000위안의 보증금을 가지고 와서 나를 데려가라고 전화로 통지하였다.
동생이 쏜살같이 2,000위안을 마련해 가지고 왔다. 웨이다핑은 말하기를 “3,000위안에서 한 푼이 모자라도 안 된다, 이 돈은 당신 둘째 누나가 다시는 북경에 가지 않겠다는 보증금이니 당신 둘째 누나가 만약 또 북경에 간다면, 우리는 이 3000위안을 당신 누나 데리러 가는 비용으로 쓰겠다.” 웨이다핑은 영수증을 떼어주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내 동생에게 그가 쓴 메모지에 사인을 하라고 하였다. 어찌할 방법이 없어 동생은 또 1000위안을 빌려와 밤 9시경에 나를 데리고 나갔다. 떠나기 전 웨이다핑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반드시 매일 아침 파출소에 와서 신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북경에 다시 청원하러 가기 위해, 나는 마음을 어기고 아침 9시에 신고하러 가겠다는 쪽지를 썼다. 나중에 나는 이 모두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엄정성명을 써서 내가 쓴 쪽지를 폐지한다고 그에게 직접 알려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동생이 내게 말했다. “둘째 누나, 나는 모든 방법을 다 썼는데도 누나를 구해내지 못했는데 오늘 끝내 나왔으니 우리 온 식구가 함께 가서 신선로 요리나 먹어요.” 집에 오니 밤 12시 넘었다. 동생은 소파 위에서 자면서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또 북경에 갈까봐, 내가 또 경찰에게 붙들려 나오지 못 할까봐 두려워서였다. 내가 ”동생, 이젠 그만 집으로 가보렴, 올케가 집에서 기다리겠는데.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올케가 걱정할 것이네.”라고 하며 안심시키자,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동생은 불안한 심정을 지니고 나를 떠났다.
(계속 이어짐)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8일
문장갱신: 2004년 7월 24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8/79560.html
논-픽션:<질풍경초(疾風勁草) >(4)
글 / 중팡츙(钟芳琼)
【명혜망 2004년 7월19일】(앞 문장에 이어)
제3장 다시 청원하러 가다
겹겹의 가로막음을 피해가다
이튿날 아침(3월3일) 7시경, 나는 친구 집에 가서 돈을 찾아가지고 베이징(北京)에 가서 청원하려고 준비하였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말했다. "9시가 넘어 파출소와 사무소 사람들이 너를 찾아 왔었단다. 벨을 누르면서 이름을 불렀지만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점심을 먹고 나는 다급히 길을 떠났다.
겹겹의 경찰 제지를 피하여 둘러가기 위해 나는 길을 우회하여 버스를 타고 중칭(重慶)에 이르고 우한(武漢)을 지나 다시 차를 바꿔 타고 베이징에 갔다. 길에서 놀란 일은 있었지만 위험은 없었다. 버스가 중칭에 갓 도착하자 나는 라디오에서 인대(人大, 주: 인민대표대회), 정협회의(政協會議)가 오늘 오후 3시 30분경 베이징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가슴은 빠르게 뛰었는데 가장 빠른 속도로 베이징 민원실에 가야 했다. 누가 알았으랴, 내가 탑승한 것은 유람선이라 장장 4일 밤낮을 지나 7일 오전에도 우한에 도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기차역에 도착해보니 오후 1시가 넘어 베이징에 가는 특급 에어컨침대열차가 있었다.
검표구는 두 줄로 나뉘었고 나는 오른 쪽 첫 번째 줄 중간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갑자기 나의 왼쪽 첫줄에 앉은 앞의 두 명 사복경찰이 한사람씩 묻기 시작했다. "파룬궁을 연마하는가?" 나는 보고서 조급했다. 절대로 이 곳에서 잡히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 도와주세요, 저는 반드시 민원실(信访局)에 가야 합니다. 사복경찰은 아주 빨리 검사하였고 나는 매 사람마다 모두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았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아주 빨리 나의 이 한 줄을 검사하기 시작하였고 내 마음은 조급해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위기의 순간에 마침 검표가 시작되었다. 나는 일체를 마다하고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밀고나가 표를 검표원에게 주었다...
하나하나의 방어선을 돌파하다
2000년 3월8일 아침 5시가 넘어 나는 베이징 서부역(西客站)에 도착하였다. 인대, 정협, 양회(兩會) 기간은 국민들이 말할 수 있는 시기이다. 법률은 공민(公民)에게 신앙의 자유권과 청원의 자유권이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장씨 집단 한 무리들은 오히려 법을 알면서 법을 위배하고 일체 방법을 다하여 파룬궁수련생의 입을 막으려 하였으며 파룬궁수련생들이 청원하지 못하게 하였다. 날씨가 하도 추워 원래 대기실에서 몸을 좀 녹이고 7시가 되어서 다시 역전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러나 또 안에는 사복경찰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니 안전하지 못하였다. 만일에 청원하는 대사를 그르치면 평생에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해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큰 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였다.
아침밥을 먹은 후 나는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를 달았으며 손가방을 챙긴 후 차를 타고서 탠안먼(天安門)에 갔다. 길가는 사람들에게 탠안먼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더니 모두들 양회기간에는 탠안먼 경비가 삼엄하여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인력삼륜차 한대를 불렀고 민원실에 가자고 하였다. 인력거를 끄는 할아버지가 길에서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 "아가씨, 당신은 민원실에 가서 소송하려는 거요? 이 양회기간은 민원실에 들어가기 힘든데 만약 들어갈 수 있다면 소송은 모조건 이길 수 있네."
할아버지는 느릿느릿 차도를 따라 걸어갔는데 마침 민원실 문 앞이었다. 사복경찰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아주 노련하게 길 맞은편으로 가서 거슬러 올라가 민원실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인력거를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고발장은 잘 적었소? 당신이 볼 때 맞은편 옆에 많은 사람들이 에워싼 곳이 있는데 이 곳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민원실일세. 조심하게." 나는 길 양옆에 전국 각지의 경찰차가 가득 주차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당당하게 걸어갔다. 골목 안은 전부 사복경찰과 붙잡힌 대법제자들이었는데 이미 골목길을 물샐 틈 없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바로 앞으로 걸어갔고 백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눈으로 골목길을 주시하면서 대법제자들을 찾고 있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으며 약간의 실수라도 해서는 안 되었다. 어렵사리 사람무리에서 벗어나 길고 긴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골목길에도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사복경찰들이 순찰하고 있었다. 나는 두 눈으로 앞을 주시하였고 이때 내심으로 조금 긴장하였다. 마음속으로 사부님, 저를 도와 반드시 민원실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라고 생각했다.
민원접수처가 공안국으로 변하다
어렵게 길목마다 가로 놓인 방어선을 돌파하고 민원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에는 신분증을 맞기고 표를 받는다는 팻말이 적혀있었다. 어이구! 나는 전번에 베이징주재사무소(駐京辦)에서 신분증을 몰수당하였는데 지금 무슨 증거물로 표를 얻는단 말인가? 나는 묘한 수가 생각나서 두 중년남자의 옆에 앉아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오라버니, 나를 도와 표 한 장을 얻어주세요." 그는 "우리가 천리 밖에서 청원하러 온지 이미 5번째인데 당신에게 표를 얻어줄 마음이 어디 있겠소?" 라고 하였다. 내가 "돈을 드릴게요."라고 하니 다른 한 사람은 돈을 준다는 소리에 마음이 움직여 말했다. "내가 가서 한번 해보지요." 그가 돌아온 후 나는 호주머니의 돈 전부를 가만히 그의 손에 밀어 넣었다.(대략 80위안 정도) 그리고 한 장의 표에 진상을 침착하게 적어 넣었다. 파룬따파의 억울함과 내가 수련한 후 몸과 마음에 이익을 얻은 것, 진실한 말을 함으로써 현지에서 불법으로 수감된 진실한 정황들이었다. 대법의 결백을 돌려주고 사부님 결백을 돌려주며 대법서적을 공개적으로 출판하도록 허락하고, 우리에게 합법적인 수련환경을 주는 동시에 불법으로 수감된 모든 대법제자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민원실 안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복경찰들이 왔다 갔다 하였기 때문에 나는 단지 적어놓은 부분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절반가량 적었을 때 사복경찰은 젊은이 한명이 대법제자임을 발견하고 그를 붙잡았다. 잇달아 또 젊은 여사도 대법제자임이 발견되어 그녀도 붙잡혔다. 주위의 분위기는 아주 긴장되었다. 나는 일체를 불구하고 시간을 다그쳐 적었고 그들이 다가와서 나에게 "어디 사람이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어차피 당신 그 쪽이 아니요."라고 어물쩍하고는 계속 적었다.
이때 기색이 흉악한 경찰이 다가왔는데 아마 민원실 안의 사람이었다. 한 손으로 나의 목덜미를 잡고 나를 걸상에서 끌어내더니 앞으로 힘껏 밀었다. 나는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 하였다. 내가 겨우 일어서자 그는 또 힘껏 밀었으며 나를 밖으로 밀어 내었다. 이때 나는 중칭(重慶), 베이징의 십여 명 대법제자들이 두 다리를 벌린 채 아주 납작하게 바닥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 경찰이 다가오더니 조금 전에 붙잡힌 여사에게 어디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그녀가 "베이징 모모 파출소이다."라고 말하자 경찰은 "당신들 그 구역은 나의 동창생 구역인데 당신은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방법이 없군, 당신이 방금 전에 적은 표는 이미 사이트에 올려졌다. 어이구! 나의 동창생도 당신과 함께 재수 없게 되었네... ..."라고 하였다. (양회기간에 만약 관할구역의 대법제자 한명이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면 장(江)씨 집단은 그 구역의 경찰들을 연좌시켰다). 나중에 우리는 채 적지 못한 표를 우리에게 돌려주어 마저 적을 수 있게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한 경찰이 이에 동의하였고 우리는 비로소 표를 마저 적어서 올려 보냈다. 후에 그들은 각 자의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통지하였다.
장(江)씨 집단이 봉건왕조의 연좌제(連坐制)를 이용하여 지역경찰을 연루시키다
내가 베이징에 가서 민원실에 청원할 때 공안은 민원실을 불법으로 봉쇄하고 기타 파룬궁 수련생들을 함께 각 지역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보냈다.
베이징 주재 스촨 청두 사무소(四川成都驻京办)에 도착하자 처장 스(石)xx는 여직원더러 또 전처럼 옷을 발가벗기고 몸을 수색하게 하였다. 그리고 완녠창(万年场) 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魏大平)과 사무소 주임 황(黄)××, 사무원 황(黄)××에 알렸고 그들은 전화를 받은 후 아주 빨리 달려왔다. 이 세 사람은 나의 청원 때문에 그들이 관직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였는데 일찌감치 베이징 기차역과 탠안먼광장, 민원실 문 앞에서 일주일간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보자마자 사무원 황xx은 기세등등하여 말했다. "나는 너를 때려서 고기 소 (肉漿)로 만들고 싶다." 그들은 나의 청원할 권리를 침해하였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사무원 황xx가 말했다. "너는 정말로 사람을 화나게 한다! 네 남동생이 3천위안을 써서 더 이상 베이징에 가지 않는다고 보증하여 집에 되돌려 보낸 이튿날 우리는 네가 집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비행기표 3장을 사서 베이징에 날아왔다. 서부역에서 너를 잡으려고 청두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열차마다 우리는 모두 놓치지 않았다. 깊은 밤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출구(站口)에 서서 한사람 한사람씩 사람을 가려내느라고 눈마저 부었지만 여전히 너를 찾지 못하였다. 삼일이 지난 후 우리는 또 할 수없이 역전에서 잡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북경주재 사무소의 펑소장에게 전화하여 너의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달라고 하였다. 매일 나와 황주임이 아침부터 밤까지 탠안먼에서 찾았다. 날씨는 춥고 바람은 또 크게 불어 닥쳤고 발마저 물집이 생겼다. 네가 한번 보라! 웨이다핑은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민원실 문 앞에서 기다리며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하루 또 하루 찾아 헤매면서 우리는 모두 실망하였다. 마침내 처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웨이다핑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댔고 우리는 당신을 놓칠까봐 식사조차 못하였다. 며칠동안 모두 지쳐서 말할 나위 없이 피곤하였다. 황주임의 병은 재발하였고 나도 감기에 걸려 온 몸이 영 말이 아니다. 젊은 웨이다핑마저 한바탕 야위었는데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당신을 찾아서 난리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청원은 공민의 합법적인 권리이다. 그런데도 당신들이 나를 제지하니 고생이 아닌가?"
웨이다핑은 또 나에게 물었다. "중팡츙, 당신은 어떻게 민원실에 들어갔는가?" 내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다."고 대답하자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계속 민원실 골목길을 지키면서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단단히 주시하고 있었다. 한 사람도 나의 눈앞에서 도망갈 수 없었다. 아마 차가 당신을 실어서 들어갔거나 당신은 바로 뒷문으로 들어간 것이다."고 하였다. 나는 "민원실도 뒷문을 여는가? 어디가 뒷문인지 모르고 또 차를 타지도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제4장, 새빨간 거짓말로 세상 사람을 속이다
시비가 전도된 쓰촨(四川)텔레비전 방송국 소식
나는 또 북경주재 스촨 청두 사무소 작은 방안에 일주일간 갇힌 후 방폭대대(防暴大隊)의 경찰에 의해 청두청양구(成都青羊區) 마약퇴치센터로 압송되었다. 강제로 이틀 동안 세뇌당한 후(청원한 매 한명 대법제자들은 청두에 보내진 후 모두 먼저 마약퇴치소에서 이틀간 "세뇌"당했다.) 다시 보름동안 불법으로 수감되었다. 나는 기타 수감인원과 같이 문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당하였다. 그들은 대법제자로부터 주로 경문과 돈을 수색해냈다. 우리는 반드시 하루당 생활비 15위안을 낸 후 물을 가득 담은 큰 그릇 속에서 썩고 더러우며 이가 나간 밥그릇과 간단한 젓가락, 그리고 이른바 소독 종이 두장을 들고 감방으로 들어가는데 한번 들어가면 보름이었다.
점심식사 후 연공을 하는데 1장 공법을 끝내기도 전에 실내의 한 구류된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 다리에 혈관종양이 있네요."
“당신이 어떻게 알지요?”나는 매우 이상하였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들어올 때 얼굴이 아주 익었고 말하는 목소리도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지만 어디서 당신을 보았는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파룬궁을 연마하니까 생각났는데 나는 텔레비전에서 당신을 보았어요. 작년 겨울 내가 고향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은 후 온 가족이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당신이 나오는 장면이 나타났는데 몇 사람이 방 안에 있었고 당신은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하고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 사람이라고 말했지요. 당신이 말하면서 바지를 걷어 올려 우리에게 보여주었지만 곧 당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화면만 나오는데 내레이터(播音員)가 말하기를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했기 때문에 혈관종양이 생겼다고 했어요. 파룬궁이 당신에게 침을 맞지 못하게 하고 약을 먹지 못하게 하여 당신은 지금 이미 불구가 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곳에 왔지요? 원래 불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
"나는 전혀 불구가 된 적이 없습니다. 작년 겨울 경찰에게 잡힌 나는 구치소에 계속 갇혀 있었는데 이번에 방법을 생각하여 베이징에 가서 청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갇힌 것이지요. 당신이 본 텔레비전은 우리가 1999년 10월1일 <<상무조보(商務早報)>신문사에 갔을 때입니다. 그날<<상무조보(商務早報)>신문은 파룬궁이 "x교"라는 글을 실었으므로 우리는 신문사에 가서 그들에게 우리가 파룬궁을 연마한 후 심신(心身)이 이익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말하였고 기자가 기록을 했습니다. 촬영기로 촬영도 했지요. 나는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오른쪽 다리에 선천성 광범위해면상부종형 혈관종양(先天性大面積海綿狀腫脹型血管瘤)이 있어 오랫동안 치료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수술할 때 혈관 한 가닥을 잘라내기까지 했지만 완쾌되지 않았고 오히려 또 소뇌신경을 다쳐 뇌빈혈(腦缺血) 후유증을 얻었습니다. 심할 때는 길을 걸으면 모든 것이 날아가는 듯 하였고 일시적인 실명까지 생겼습니다. 또한 여러 해 동안 광범위하게 심한 황갈색 반점이 나타나 6년 동안 수 만 위안을 들여 미용을 하였지만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파룬궁을 일주일간 연마한 후 얼굴의 점들이 전부 없어졌고 2달 후에는 왼쪽 다리의 혈관종양과 뇌빈혈이 저절로 나았습니다.‘ "
그녀는 놀라서 다시 물었다. "정말입니까. 당신은 원래 파룬궁이 좋다고 말했습니까? 어째서 당신이 텔레비전에 화면이 나올 때 내레이터가 오히려 파룬궁이 나쁘다고 했지요? 이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매스컴이 뉴스에서 새빨간 거짓말을 하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만하였는지 모르겠군요. 직접 눈으로 당신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텔레비전에서 말한 것이 진짜인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 텔레비전에서는 그것을 한번만 방송한 것이 아니에요. 그날 밤 우리가 본 다음, 이튿날 내가 샤워할 때 아들이 나를 부르면서 엄마, 빨리 와서 보세요. 어젯밤에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그 여자가 또 나왔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물었다. "당신이 본 것은 어느 텔레비전방송이지요?" 그녀가 대답하였다. "우리 마을은 스촨 텔레비전방송국 한개 채널만 나옵니다." 내가 또 물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이 일을 조사한다면 당신은 의연히 실증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말했다. "나는 틀림없이 실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장샌비(蒋先碧)라고 해요. 집이 스촨 러즈현 팡성향(四川乐至县放生乡)에 있지요. 나는 도시에서 자전거가게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장물 자전거 한대를 사는 바람에 구류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20여명은 듣고서 모두 놀라워하였다. 모두들 언론매체가 이다지도 흑백을 뒤집어놓고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여 은밀하게 시청자를 기만하는 것은 파룬궁을 먹칠할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인 것을 깨달았는데 무슨 수단인들 해내지 못하랴... ... 그녀들은 파룬궁의 진상을 들은 후 그 당시 절반 이상이 나에게서 파룬궁을 배웠고 또 어떤 이는 돌아간 후에도 연마하겠다고 표명하였다. 또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텔레비전에서 연출한 파룬궁은 가짜임을 반드시 알릴 것이라고 하였다. 감방 안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움에 따라 경찰이 알게 되었고 곧바로 그녀들을 불러내어 만약 그들이 따라서 공법을 연마하면 석방 날짜를 연기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중에서 단호하게 파룬궁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었고 그녀들은 모두 강제로 서있는 벌을 받았다.
구류소에 노(老) 홍군(红军)을 가두다
며칠이 지난 후 경찰은 또 연속적으로 끊임없이 몇 차례나 수감된 적이 있는 70여세 나는 할머니 류찬(劉燦)을 보내왔다.
류찬 할머니는 원래 류쥬자제학교(六九子弟校)의 교장으로 부부 두 사람이 모두 압록강 노 지원군(志願軍)이며 자녀 두 명은 모두 해외에 있었다. 류찬은 파룬궁을 연마하기 때문에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고 돌아온 후 나와 똑같이 구류소와 파출소로 왔다 갔다 하면서 갇혀 있었다.
이번에 그녀가 파출소에 돌아오기 전 남편이 거리에서 찐빵을 사다가 인도의 넘어진 난간에 다리가 부딪쳐 엄중하게 상하여 자립할 수 없어서 매일 차가운 찐빵으로 연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 남편을 돌보기 위하여 죽자 살자 구치소에 있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잰서루(建設路)파출소의 경찰 세 명이 한 발로 노인의 등을 밟고서 손을 뒤로 묶은 후 경찰차 뒤 칸에 던져 넣어, 쭈그린 채 강제로 싣고 온 것이었다.
점심 때 우리는 구류소 내의 슈퍼에 가서 물건을 샀는데 경찰은 우리 몇몇 대법제자들이 류찬과 말을 했다고 강제로 우리를 뜨거운 햇볕에 내리 쬐게 하였다. 내가 산 비누마저 바닥에서 햇볕에 녹았지만 경찰은 70세의 류찬 할머니로 하여금 그늘에 가지 못하게 하여 그녀는 계속 우리와 함께 뜨거운 햇볕 아래 서 있었다. 발은 뜨거운 시멘트 바닥을 밟고 있었다... ...
장기간 반복적으로 감금되었던 나날들
구류소에는 나처럼 반복적으로 오랫동안 불법 수감된 파룬궁수련생들이 아주 많았고 연세가 높은 이들도 많았다.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소장은 대법제자들을 전부 불러 제방 둑(坝子)에 세운 뒤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더 이상 이 곳에 오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이 곳은 아예 당신들이 머물 곳이 아닙니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50도에 못지않고 통풍설비 또한 좋지 못합니다. 환풍기도 큰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는데 당신들 이렇게 많은 노인들이 이 속에 있으면 신체가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대답하였다. "소장님, 우리도 오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보세요, 우리는 도무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또 잡혀오게 되니까요... ..."
나중에 구치소에서 당일 반복적으로 불법 수감되는 수련생들을 접수하지 않자 파출소는 방식을 바꾸어 파출소로 보내진 파룬궁수련생들을 일단 파출소 유치장에 하룻밤 가둔 후 이튿날 다시 불법으로 구치소에 보냈다. 파출소의 유치장은 몹시 비좁아 오로지 몇 평방 미터에 창문 하나 없는 검은 방이며 안에는 또 대소변이 들어 있는 변기통이 하나 있는데 얼마나 오랜 시일에 한번씩 쏟아버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4, 5월에 어두운 방은 악취가 하늘을 찔렀고 구더기와 모기가 무리를 지어 나를 습격하고 온 몸에 달라붙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너무나 피곤하여 잠깐 졸았다. 내가 눈을 한번 떠보니 옆에 두꺼비 한마리가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쫓아내었지만 도망가지도 않았다.
경찰은 보름에 한번씩 나를 파출소에 보냈는데 모두 일요일이었다. 아들은 모두 한번씩 와서 나를 만났다. 후에 경찰 웨이다핑은 모질게도 매번 15일간 구류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10일 구류로 고쳐, 내가 보름마다 아들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하였다. 바로 이렇게 나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5차례나 구류되었다.
오랫동안 불법 수감되어 작은 차는 운전할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할 수없이 남동생에게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그것을 팔아버리게 하였다.
대법제자들은 바로 이렇게 장기간 반복적으로 불법 수감되었다. 경찰들은 파룬궁수련생으로 하여금 신앙을 포기하게 하기 위하여 여름에는 고의적으로 물을 끊었고 십여 평방미터의 방안에 20여명이나 있게 하였다. 대, 소변을 항상 물로 씻어 내리지 못하게 하여 우리는 할 수 없이 종이로 덮었다. 실내는 악취가 하늘을 찔렀지만 대, 소변을 곁에 두고 밥을 먹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리가 보고(報告)를 제출하여 물을 받아 화장실을 청소하겠다고 하니 소장은 마구 욕을 해댔다. "편안하려고 하면 진장(錦江)호텔에 가서 살아라. 이 곳은 바로 이런 모습인데 누가 당신더러 오라고 했는가?" 위에서 검사하러 오면 경찰은 총 개폐기를 열었다.
집단단식과 야만적 음식물 투입
2000년 5월경, 지속적인 불법 수감을 제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5월 하순에 단체로 단식하였다. 이때 소장은 두려워서 우리더러 단식을 포기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못하겠소. 우리가 眞善忍(쩐싼런)을 닦고 진실한 말을 한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우린 집에 가겠습니다."고 하였고 소장은 "당신들은 모두 파출소에서 보낸 사람들이고 우리는 단지 당신들을 감시할 뿐이오. 시간이 되면 그들이 와서 데려갈 것입니다. 우리는 숫자대로 그들에게 보내면 되는데 우리도 당신들을 마음대로 돌려보낼 권리가 없어요."라고 하였다. 이에 우리들이 말했다. "그럼 우리는 생명으로 법을 실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 사람마다 모두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단식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청두시 공안국에 통지하였고 처장 펑쥬웨이와 다른 몇몇 공안국 경찰은 안캉(安康)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한 무리를 데리고 와서 야만적인 음식물 주입을 시작하였다. 경찰은 몇 명의 남자들을 시켜 여자 감방에 들어가 한 사람씩 붙잡아 나오게 한 후 7,8명의 남자들이 대법수련생을 긴 널판자 2대로 이어 맞춘 "침대" 위에 눌렀다. 어떤 자는 머리를 누르고 어떤 자는 손을 누르고 어떤 자는 다리를 누르고 어떤 자는 발을 누르고 어떤 이는 코를 잡았고 어떤 자는 입을 잡고 또 어떤 자는 목을 졸랐다. 한 동안 몸부림친 후 대법수련생이 더 이상 움직일 기력이 없어질 때 간호사는 호스를 밀어 넣었다. 농혈, 거품을 한바닥 토해내고 아파서 눈물을 계속 흘렸으며 숨이 막혀 아주 괴로웠다. 나는 늘 사부님의 경문 『심자명』을 외우면서 그들의 박해를 제지하였다.
나는 스촨(四川)면방직공장의 대법제자 옌딩후이(鄢定慧,여, 50여세)가 음식물을 주입당할 때 여러 차례 농과 혈, 거품을 한바닥 토하는 것을 보았다. 아파서 눈물을 계속 흘리고 숨이 막혀 괴롭지만 여전히 주입하지는 못하였다...
우리는 단체로 단식한 후 고소장을 썼으며 5월24일 어렵게 조건 없이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 많은 친구들이 나를 보러 왔는데 어떤 이는 텔레비전에서 나를 본 후 걱정이 되어 내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사방으로 찾아다녔다고 하였다. 지금 나를 본 후 나를 위하여기뻐하며 또한 텔레비전에서 나에 대한 왜곡된 보도를 본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어머니의 조우 (遭遇)
손님들이 간 후 어머니는 나에게 나와 헤어진 후의 경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전에(1999년 12월3일) 너와 외조카가 함께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후 이튿날 나는 후회하였다. 무엇 때문에 너희들과 함께 가지 않았던가! 후회한 나머지 나는 12월 6일 혼자서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고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진실한 정황을 정부에 반영하였다. 그 결과 민원실에 가지도 못하고 베이징 주재사무소에 갇혔는데 민원실은 이미 공안국으로 변하였다. 베이징 주재사무소 방에는 오직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만 있었고 침대가 없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나는 두 다리를 의자에 올려놓고 몸을 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王)씨 성의 보안이 이를 보고 연공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강제로 나를 밖에 내보내 벌을 서게 하였다. 동수 왕수화(王素华)는 "그녀는 연세가 너무 많아 밖에 서 있으면 너무 추우니 내가 대신 서 있겠다."고 말하였다. 한참 뒤에 그는 나를 발로 차서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틀 뒤, 경찰은 나를 강제로 마약퇴치소에 보냈는데 안에서는 귀청을 찢는 듯한 대법을 비방하는 고음 스피커가 울렸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를 제방 둑으로 내몰아 달리기를 시켰는데 나는 나이가 많아 달리기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또 벌로 서있었고 배고파도 말하지 못한 채 다시 쥬루촌구치소(九茹村拘留所)로 보내졌다. 여전히 밥을 주지 않아 나는 춥고 배고픈 상태로 구치소에서 긴 밤을 지새웠는데 나는 그 고통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다. 구치소에서 늘 한밤중에 나에게 연마 하겠는가 연마하지 않겠는가를 물었고 내가 "연마 하겠다"고 말하자 경찰은 또 나를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 구간에 세워 벌을 주었다. 힘들게 보름을 보내고 나니 비로소 완녠창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이 파출소로 데리고 갔다. 웨이다핑은 나를 속이면서 말하기를, 당신 딸이 연공으로 노동개조 3년형을 받았으니 이제 당신은 딸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또 딸네 집에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점심식사 후에 또 강제로 나를 아들집으로 내쫓았다. 아들집에 간 후에도 조용한 날이 없었고 파출소 사람들은 나의 거처를 살피면서 계속 박해하려고 망상하였다.
2000년 구정 이후, 8살 난 어린 외손자가 학교에 가야 하므로 나는 가만히 너의 집에 왔다(집에는 이미 먼지가 가득하여 나는 3일 동안 청소하였다). 파출소에서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 나를 쫓아낼 까봐 감히 문 밖을 나서지 못하였다. 주말에 어린 외손자가 돌아와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반찬도 아들이 외손자를 데려가고 데려올 때 조금씩 가져오게 하였고 반찬을 다 먹으면 짠지를 먹었고 짠지를 먹고 싶지 않으면 죽에 소금을 넣어 먹었다. 이렇게 먹은 시간이 길어지자 또한 습관이 되었다. 나는 너희 장뤄(江羅) 범죄집단이 어떻게 박해하여도 나에게 숨 한 모금 남아있으면 파룬궁을 연마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머니의 대법에 대한 단호함에 진심으로 위안이 되었다. 또한 장(江)씨 집단이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대법과 대법제자를 박해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만들어 민중을 기만한 것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느꼈다.
제5장, 사실의 진상을 똑똑히 밝히다
대법을 모욕하는 사진전시실 입구에서 진상을 알리다
2000년 6월8일, 정부는 스촨성의 전시관에서 대법을 모함하는 사진전시회를 열었다. 더욱 많은 세인들로 하여금 더는 기만당하지 않고 시비를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여 나는 자신의 경력을 써내었으며 복사지로 몇 부 복사해 내었다. 6월12일 아침 나는 지역경찰 웨이다핑을 찾아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쓴 이 진상자료를 좀 보시오. 내가 직접 베이징에 가서 올릴까요. 아니면 당신이 중앙지도자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웨이경찰이 "나에게 맡기면 내가 당신을 도와 전해주면 될 것이오." 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2부를 주었는데, 그더러 한 부는 나를 도와 위에 전해주고 한 부는 파출소와 사무소에 남겨 서로 돌려 보게 하였다. 그는 승낙하였다.
그 다음 나는 인민남로(南路)전시관에 가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복사해 간 진상자료를 대법비방 사진전시회를 보고 나온 사람들에게 배포하였다. 제목은 『사실의 진상을 밝히고 파룬따파의 결백을 돌려주다』이다.
강제로 집을 수색하다
2000년 6월13일 오후, 완녠창파출소의 경찰 웨이다핑이 나를 파출소로 불러서 갔다. 청두시 공안1처의 펑쥬웨이(冯久伟)는 나에게 누가 이 자료를 썼으며 얼마나 많이 배포하였는지를 물었다. 나는 나 혼자 쓴 것이라고 하였고 그는 나에게 이렇게 놓은 작문수준이 있는지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저녁에 그들은 나의 집을 불법으로 수색하였고 나 개인에 속하는 사유재산을 불법으로 압수해갔다. 대법서적, 카세트테이프, 비디오테이프, 카세트, 신분증, 가부좌용 방석 등이었다. 집을 수색하는 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웨이다핑이 수색한 대법책을 보호하였다. 그 결과 두 명의 경찰은 나를 침대에 넘어뜨렸다. 나의 두 다리는 바닥에 꿇어져 있었고 경찰이 나의 목을 죽으라고 졸라 나는 숨을 쉬지 못했다. 경찰은 한 쪽 무릎으로 나의 등 위를 누른 채 또 나의 두 손을 등 뒤로 한 후 힘껏 위로 잡아당기어 나의 두 팔은 끊어지듯이 아팠다. 나는 많은 경찰들 앞에서 대법책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력함에 대하여 통곡하였다. 어머니는 경찰에게 감시당하여 경찰의 가택수색을 가로 막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질책과 울음소리를 들은 후 경찰에게서 벗어나와 나를 보러 왔다. 내가 경찰에 의해 무참히 당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무더기 대법책이 수색된 것을 보고 70세 가까이 된 어머니는 비통하게 엉엉 울었다. 두렵고, 처참하고, 비장한 분위기가 온 방안에 가득했다. 경찰들은 아예 어머니가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객실로 밀고 가 강제로 앉혔다. 아울러 어머니를 위협하였다. "움직이지 말라. 그녀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 어머니가 대답했다. ”딸의 일이 곧 내 일이다. 너희 경찰들은 참으로 무법천지로구나!" 이어 내가 신발도 신지 않은 정황 하에서 경찰은 나를 아래 3층까지 강제로 끌고 내려가 나의 발등은 층계에 부딪쳐 벗겨졌으며 양말은 마찰되어 구멍이 났다. 그들은 나를 경찰차에 던져 넣고 강제로 파출소까지 실어갔다. 파출소 사무실에서 나는 그들이 빼앗아간 대법책 때문에 상심하여 한 밤중까지 울었다...
나는 오로지 생명으로 대법을 실증할 수밖에 없어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하였다. 이튿날 점심 펑쥬웨이는 또 파출소에 와서 나를 불법으로 심문하였다. 나는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나갔다. 그는 나를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당신, 이 모습에 어디 사장님의 형상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남들은 머리에 혹이 생겼다고 하는데(사람이 멍청함을 말함) 내가 볼 때 당신의 머리에는 농구공이 자랐다. 남(장쩌민을 가리킴)은 파룬궁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좋다고 말한다. 당신이 좋은 것을 알면 마음속으로 알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XX당과 맞서면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진실한 말을 견지하는 것이 어찌 XX당과 맞서는 것인가?" 라고 하였다. 오후에 어떠한 절차도 없는 정황 하에서 그들은 또 나를 강제로 연꽃촌에 위치한 청두시 제2간수소로 보냈다.
이때 나는 이미 11차례나 불법 수감되었다. 11일간 형사 구류된 후 나는 불법 노동개조 1년형을 받고 청두시 제1간수소 닝샤가 좐윈참(宁夏街转运站) 에 보내졌다. 좐윈참에 들어가자마자 감옥의 우두머리가 강제로 400위안 돈을 뜯어 가는데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돈이 없으면 매 맞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보니 돈이 없는 잡범(杂案犯)들은 감옥 우두머리에게 매를 맞아 등이 시퍼렇게 멍들고 허리를 펴지 못하였으며 몸을 뒤척이지 못하였지만 경찰은 상관도 하지 않았다. 안의 생활용품은 밖의 슈퍼에서 파는 것보다 3배나 비쌌다.
보름 후 나는 다시 불법으로 즈중난무스 여자노교소(资中楠木寺女子劳教所)에 보내졌다.
(다음에 계속 이음)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19일
문장갱신: 2004년 8월 13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19/79561.html
논-픽션: <질풍경초(疾風勁草)> ( 5 )
글/중팡츙(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20일】
제4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을 받다
머리말: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수용된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자문자답한다.: 중국에서 제일 큰 사교가 무엇인지 아는가?--강제 노동교양이다!
제1장 진상은 감출 수 없다
길 잃음(迷失)과 귀정(歸正)
2000년 7월 28일 내가 쓰촨성 즈중난무스 여자 강제 노동수용소에 끌려간 후에 경찰은 마약 중독자 한명을 시켜 내 곁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강제 노동수용소에 있는 죄인들은 반드시 감옥 규칙 35조를 외워야 한다. 나는 법을 어긴 적이 없다는 이유로 규칙 외우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경찰은 나의 수면을 박탈하였으며 암암리에 나를 감시하는 자들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나를 감시하는 자들도 이 일에 말려들어 같이 잠을 자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경찰은 ‘유다’까지 파견하여 ‘세뇌’를 시도하였으며 나를 다른 파룬궁 수련생과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3일 후 나는 나와 같이 산에 간 대법제자들이 모두 5중대를 떠나 7중대(파룬궁 대대)로 간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외롭고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 때 나는 아직 법의 이치에서 모든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관념을 가지고 생각하기를 다른 사람이 나보다 교육도 많이 받고 수련한 기간도 길며 전부터 견정한 마음으로 걸어 왔다는 이유로 다른 수련생들이 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본심에 어긋나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을 따라서 ‘회개서’를 썼다. 8월1일 나는 7중대에 가게 되었다.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매일 사부님의 경문을 외우면서 겉과 속이 다른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마음속으로는 매우 고통스럽고 정신이 아득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 기간에 나는 나와 같이 연공장에 있던 왕쉬쯔(남, 28)의 사건을 들었다. 그는 북경에 가서 청원한 탓에 불법으로 강제노동을 받게 되어 멘양(綿陽) 신화수용소에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독방에 있거나 아니면 구타를 당하거나 전기 고문을 받거나 모욕을 받아야 했다. 경찰은 심지어 다른 범인을 시켜 강제로 똥오줌 먹이기도 하였다. 왕쉬쯔는 8개월이나 견지하면서 쩐(眞), 싼(善), 런(忍)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2000년 8월에 박해 받아 세상을 떠났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이부자리에서 뒤척이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3개월을 보냈다. 참 고되고도 긴 3개월 이었다. 사부님의 새로운 경문 <사악을 질식시키자>는 길 잃은 나의 표지가 되었다. 나는 틀렸다는 것을 알고 바르게 시정하여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많은 동수(특히 청두 동수)들과 서로 토론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대부분 엄정성명을 썼고 견정한 마음으로 수련하겠다고 표명하였다. 나도 2000년11월25일에<마음속 말을 당신에게 털어놓다>란 제목으로 문장을 써서 엄정성명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내가 전에 쓴 본심에 어긋나는 모든 글은 무효이다.” 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수련하여 온 과정을 써서 수용소의 우(吳)소장, 관리과의 리쯔챵(李自强) 과장, 7중대 중대장 리쥔(李軍), 그리고 대법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날 나는 대장 장샤오팡(張小芳)으로부터 대회에서 지적을 받았다. 아울러 즉각 두 명의 마약 중독자가 24시간 나를 감시하였으며 다른 동수와 말하는 것을 금하였다. 더는 펜을 들어 문장을 쓰지 못하게 하였고 강제 노동 기간도 3개월 추가 되었으며, 이러한 조치로 나로 하여금 이미 자유를 잃은 환경에서 또 자유를 잃게 하였다. 감옥살이가 더욱 가중된 셈이다.
2001년 4월 경에 펑쥬위는 방송국의 기자들과 7중대를 인터뷰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마침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펑쥬위가 나를 불렀다. 그는 기자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이 사람이 바로 중팡츙입니다. 이전에는 사업하는 분이었는데 참 능력이 대단했어요.”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메라며 마이크는 이미 내 앞에 놓여 있었다. 펑쥬위는 이어서 “중팡츙! 전에 한동안 ‘전화’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또 번복하는 것이지?”라고 물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는 전혀 ‘전화’한 적이 없으며 그런 개념도 없다. 어떻게 변하라고 하는가? 착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변하라고 하는가? 나는 줄곧 파룬따파가 좋다고 여겨 왔는데 오로지 비인간적인 정신적 육체적 시달림을 이겨내지 못하여 어느 순간에 진실을 말하지 못한 것뿐이다. 지금 잘못을 뉘우치고 즉시 시정하려 하고 있으며 계속 진실만 말하려고 한다.”라고 답하였다.
위선적인 연기
2001년 구정이 돌아왔다. 청두시 노동교양 관리국은 강제 노동수용소에 와서 모든 수용인원을 위문하는 공식적인 행정 업무를 수행하였다. 대회가 끝나고 몇몇 작은 소그룹로 나누어 좌담회를 열었다. 소그룹마다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모두 같은 고향 사람이니까 어떠한 어려움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책임지고 해결하여 줄께요.”라고 하였다. 나는 “ TV에서 나의 일을 인용하여 부실적인 보도로 대중을 기만하는 내용을 보도하였다. 나는 진상을 밝히려고 사실을 밝히는 문장을 써서 보냈는데 불법으로 강제 노동수용소에 오게 되었다. 나는 억울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해 왔고 진실을 말하는 것도 죄가 있는가? 나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자 그들은 매우 놀란 표정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어느 구에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청화구’라고 답하였다. “돌아가서 꼭 물어 볼께요.”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결과는 회답이 없었고 무소식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번 좌담회 비디오 촬영한 것을 TV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정부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어떻게 따뜻한 보살핌을 주고.........
경찰은 장기적으로 ‘사오(邪悟)’한 사람을 시켜 나를 찾아와서 말을 나누게 하였는데 그들은 항상 ‘고층차’에서 수련하고 있는 것으로 위장 하였으며 사악하고 그릇되게 깨달은 자신들의 이치를 주장하면서 나를 미혹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교체시켜가면서 대법을 모욕하고 사부님을 비방하는 방법으로 내가 수련을 포기하기를 바랬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듣지 않으면 끝없는 비웃음과 모욕하는 말을 듣게 된다.
사부님은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란 문장에서 “여러분 생각해 보라. 현재 이 하나의 큰 검증은 바로 사부가 계시지 않을 때 대법이 어떠한가, 수련생이 어떠한가의 큰 심사(大考核)이다. 사부가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당신들이 어떻게 가서 하라고 더 알려 줄 수 있는가? 또한 그것들이 사악한 사람을 통제하여 사람의 일체 마음, 일체 집착에 대하여, 전면적이고도 빠짐없이 와해식으로 대법과 제자를 검증하고 있다.” 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법을 외우면서 그들의 사악한 사기극에 흔들리지 않았다.
공산당은 좋다?
경찰은 우리들에게 “공산당은 좋다”라는 노래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나는 부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나는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떨리고 목이 막혀 갑갑하여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여기까지 들어 온 것이 아닌가? 공산당이 좋아서 나처럼 쩐, 싼, 런(眞, 善, 忍)을 믿는 사람들을 강제로 여기에 잡아들여 ‘전화’하려는 것인가?
대장 장쏘팡은 내가 ‘공산당이 좋다’라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은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몰아 세웠다.
살아있는 광고
매번 말할 기회가 있으면 나는 말하였다. TV와 신문에서 발표한 것은 모두 대법을 모욕하고 옳고 그름을 뒤집어 놓은 수작이며, 나는 나를 예로 들어 대법을 모욕하고 대중을 기만하는 것은 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지적하였다. 나는 TV에서 내가 대법을 배운 후에 혈관에 암이 생긴 것도 나았다는 사실을 방영하지 않고 파룬궁을 연마하여 혈관에 암이 생겨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 있다고 허위 선전을 하면서 내가 나가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기에 가두어 놓았다고 말하였다.
나는 중대에서 ‘파룬따파 하오(法輪大法好)’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광고가 되었다. 이 사실은 나중에 간수로 하여금 이를 악물고 욕을 하게 할 정도였다. “입 닥쳐 결국 너는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올거야.....”
제 2장 대법입자
감금되다
2001년7월 나와 다른 10명의 견정한 대법 수련생들은 작은 방에서 같이 감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장기적인 감시와 인신공격을 받으면서 한 발자국도 방문을 넘지 못하게 되었다. 아침6시부터 시작하여 밤10시30분 까지 하루 종일 군인이 앉아 있는 자세를 유지 하면서 두 눈은 수평으로 앞을 보고 허리를 굽히지 못하며 두 손은 무릎에 놓아야 하였다. 앉은 자세에서 눈을 감지 못하며 말하는 것은 더욱 심하게 금지하고 엉덩이를 걸상에서 떼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는 거의 50도가 넘는 고온의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 나는 동수 이광칭의 옷이 땀에 젖어 마른 적이 없는 것을 보았으며 너무 습한 환경이라 곰팡이까지 난 것을 발견하였다. 다른 동수 황리싸는 온몸에 난 옴으로 참기가 어려웠으며 손을 대지도 못하여 옷에는 피와 황색 이물질이 섞여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후에 그녀는 박해 받아 세상을 떠났다. 물까지 주지 않았다. 일주일에 물 한번 주는 것으로 머리 감고 샤워하고 빨래를 해야 했다. 물을 주었다는 표시만 한 것이다. 매일 고온으로 인해 몇 사람이 혼미상태로 들어가는 까닭에 간수는 저녁에 인원 파악을 하고는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대법제자가 무엇 때문에 사악에 의하여 잔혹하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正信)을 견지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대법 중의 한 입자이기 때문이다.” < 대법은 견고하여 파괴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내가 9월에 9중대에 가기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남아 있는 동수들은 계속 그러한 환경에서 견지하여 나갔다. 뿐만 아니라 눈으로 동수들이 비인간적인 박해를 받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면 나와 같은 난무스 여자 노동 수용소에 있는 파륜공 수련생 주샤(여, 32)의 경우이다. 수용소 7중대 중대장 장쇼팡의 지시에 의해 두 명의 마약 중독자가 그녀의 입을 막고 모래땅에 눕혀 끌고 다녔다. 그들은 CCTV 감시 범위에 들어서면 그녀를 풀어주고(CCTV를 피하기 위하여) 말하고 웃는 척하다가 CCTV의 촬영범위를 벗어나면 다시 묶어 끌고 다녔다. 몇 명이 돌아가면서 2명씩 짝을 지어 교대로 계속 진행하였다. 그녀의 등과 다리는 온통 모래였고 피와 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쇼팡은 비록 그녀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식으로 계속 시달림을 주었다. 그는 열 몇 명의 ‘유다’를 시켜 그녀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잡고 손을 비틀고 침을 뱉고 위에 올라서서 때리도록 하였는데 그들이 지쳐 맥이 빠져서야 그만두었다. 그 결과 그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장쇼팡은 마지못해 의사를 불러 살에 들어간 모래를 제거하라고 하였지만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녀는 결국 고액의 치료비용까지 부담해야 했다.
1년6개월의 불법 강제 노동교양과 10개월 동안 연속 3차례의(삐현 펑주 신진 세뇌반) 세뇌를 한 결과, 잔혹한 박해와 비인간적인 시달림으로 그녀는 정신이상이 되었다. 정신과 육체 모두가 인간의 한계를 넘는 잔혹한 핍박을 받은 것이다. 실로 2003년 9월에 펑주에서 세뇌를 하였을 때 그녀는 이미 시달림으로 인해 환각, 헛소리,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악인 허휀후는 그녀를 집에 돌려 보내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계속 세뇌를 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그녀의 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환각, 환청, 헛소리를 하게 했다. 무의식 중에 창문을 때리고 대소변을 아무데서나 보며…… 이런 상황에서 외부의 압력을 받고 악인은 부득불 2004년 4월 2일 그녀를 집에 보냈다. 지금 주샤의 정황은 아직도 집에서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하며 완전히 어머니(70세)에 의지해야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와 동시에 또 문화대혁명 중에서 박해를 받아 정신이상에 걸린 그녀의 아버지를 돌봐야 했으며 4살 난 아이까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온갖 시달림에 최선을 다한 상황이라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하여 나갈 힘이 없었다. 그녀의 남편 왕스린도 대법제자여서 지금 세 번째 불법으로 멘양신화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
장펑칭(여, 50), 경찰에 의해 불법으로 1만 여 위안의 벌금을 낸 후 또 불법구류를 당한 후에 불법으로 강제 수용소에 오게 되었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그녀는 장기적으로 7중대장 장쇼팡에게 전기봉으로 전기 고문을 받았으며 양말로 입을 막아 나무에 매달아 놓은 적이 많았다. 십자가 형태로 문을 등지고 두 손을 양 창문에 매달아 놓은 때도 많았다. 어느 하루 호위대에 있는 남자 경찰이 땅에 눕혀 놓고 밧줄로 목을 졸라 생명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또 한번은 7-8명이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 팔, 다리, 목 등을 고정시키고 호박국을 강제로 먹였는데 호박 덩어리가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한 순간 숨이 넘어갈 뻔하였다. 장평칭은 2002년 5월 석방되어 집에 돌아갔다. 집에 간지 얼마 되지 않은 2003년 8월경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불법으로 피현 구치소에 납치되어 갔는데 그곳에서 이름 모를 약물을 주사하여 정신이상이 되어 기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박해를 심하게 받아 다리도 정상적인 보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비록 2004년 1월에 석방되어 집에 다시 돌아갔지만 지금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에 또 불법납치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감옥에 있는 경찰이나 간수, 범인에게 비열하고 잔혹한 각종 수단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다. 어떤 사람은 춘절 당일 호위대 경찰에게 심하게 맞고 비가 오는 상황에서 나무에 매달려 중도에 의식을 잃은 적이 있었다. 경찰의 지시를 받은 마약 중독자가 강제로 화장실에 끌고 가 피 묻은 화장지를 입에 강제로 넣는가 하면 옷을 벗겨 나체로 거울 앞에 서있게 하고, 모욕을 당하거나 몽둥이로 얻어맞아 의식을 잃은 일이 종종 발생하였다. 물고문을 하였는데 벽돌로 문을 막고 그 안에 물을 채운 다음 대법제자를 강제로 밀어 넣어 그 속에 있게 하였다. 혹은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고 이빨을 강제로 뽑은 일도 있었으며, 지속되는 무더위 속에서 대법제자를 구타한 다음 두 손을 묶고 두꺼운 이불을 덮은 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경찰이 고압 전기봉으로 지속적으로 전기고문을 가한 경우도 있었다. 30여세 여자 수련생이 강제적인 ‘전화’에 굴복하지 않자 800번 이상의 일어서고 앉는 동작을 반복하게 하여 바지가 찢어져 살이 보일 정도였다. 이 수련생은 벌을 받고 1주일이 지난 후에도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으며 화장실에서 가도 앉지를 못했다……
한번 또 한번, 파룬궁 수련생들은 선(善)한 마음으로 감옥의 경찰과 범인들을 감화시켰다. 부단히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주었고 많은 경찰은 파룬궁은 전혀 TV나 매체에서 선전한 것처럼 나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경찰은 공적인 장소에서 그저 겉으로만 우리에게 흉악한 표정을 지을 뿐 사적인 장소에서는 우리에게 “우리도 파룬궁 수련생이 좋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 그러나 우린 다른 사람(장쩌민)이 주는 돈을 받지. 우리는 다른 사람 손에 쥔 총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고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라서 할 뿐이야.”라고 말하였다. 비록 경찰들도 수련자를 박해하여 죄를 지었지만 이들을 시켜 진정으로 대법을 모욕하고 온갖 혹형으로 수련자에게 시달림을 주며 심지어 대법제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진정한 원흉은 장쩌민이다.
정념으로 마굴에서 뛰쳐나오다
9중대는 파룬궁 수련생과 마약 중독자가 섞여있는 중대이다. 그곳에서 매일 경찰은 두 명 이상의 마약 중독자를 시켜 수련생을 감시하면서 대법을 모욕하는 문장을 읽게 하고 일주일에 한 번 강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도록 했다. 나는 계속하여 TV에서 전에 보도되었던 것이 대법을 비방하는 보도라고 주장하면서 다리에 있는 상처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마약 중독자들은 이 사실을 듣고 모두 파룬궁이 억울하다고 여겼으나 마음속으로만 알고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았다.
어느 날 후 간부는 내게 말하기를 “중팡츙, 그저 ‘전화’하지 않아서 그렇지 개인적으로 말하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통하지 않는가? 너무 고집 부리지 말고 ‘전화’하기만 하면 집에 보낼게.”라고 하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전화자’를 시켜 삼박 삼일 동안 나에 대한 ‘전화’공세를 강화하였다. 그들은 “전화’하지 않으면 어떻게 나가? 아니면 여기서 날아 나갈 참인가?”라고 하였다. 나는 “누가 나를 여기에 가두었다면 바로 그가 날 원상태대로 복귀시켜야 해! 착한 사람은 죄가 없으니까?”라고 답하였다. 경찰은 “지금 파룬궁 수련자를 반혁명으로 몰고 있는데 ‘전화’하지 않으면 모두 신쟝에 보내어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고 종신 감금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압력과 협박에 견디다 못해 ‘전화’한 수련생이 집에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난 당당하게 수련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심지어 총살형을 받아도 난 진실만 말할 것이고 사부님을 배신하지 않고 대법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을 지켜 나갈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전화’하지 않는 수련생은 한 명도 놓아 주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1년 이상 더 구속하였다. 그 후로 나는 매일 법을 외우기 시작하였으며 매일 <홍음>을 외우는 외에 기억에 남는 경문 40여 편을 두 번 외우고 나서 잠을 잤다.
대법의 지도 하에서 정념으로 마굴을 벗어나다
2001년 9월30일, 이 날은 나의 만기 석방의 날에서 3개월이나 더 구속 당한 날이다. 오후 3시 경 경찰은 갑자기 나더러 짐을 싸라고 하였다. 나는 신쟝에 가서 종신토록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감금 생활을 하게 되는가 하여 모든 물건을 챙겼다. 대문을 나서 완낸창 파출소 경찰 위따핑과 사무실 사람이 보이자 집에 간다는 것을 눈치 챘다. 나는 따라온 수용소 간부에게 “내 짐을 9중대에 넘겨주세요. 집에 가는데 이렇게 많은 짐은 필요 없어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위(魏)경찰도 차에 짐을 실을 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간부는 “이미 가지고 나온 물건은 다시 돌려보내면 안되지.”라고 하였다. 나는 알았다. 내 짐을 중대에 돌려 보내면 다른 대법제자들은 내가 집에 갔다는 것을 눈치 챌 것이 아닌가? 경찰은 기타 견정한 대법제자를 속이지 못할 것이 아닌가?
어디를 가더라도 여전히 수련한다
차에서 위경찰은 내게 물었다. ‘중팡츙 아직도 수련을 계속하는가?’ 나는 ‘한다.’라고 말하였다. 차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수련을 계속하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비웃었다. “교훈이 아직도 적어? 좀 깨어나야 하는 것 아니야? 지금 우리 사무실에 이주임이 새로 왔는데 돌아가서 천천히 말하여 주지.”라고 하였다. 가는 길에서 나는 강제노동 수용소에 있는 경찰이 어떻게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나를 박해하였는가를 알려주었다. 대법의 아름다움, 신비함, TV, 신문에서 어떻게 파룬궁을 모욕하였는가를 말해주고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수련이야기를 알려 주면서 그들이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고 사기에 넘어가지 말라고 권유하였다. 경찰은 “강제 노동수용소에 보냈더니 ‘전화’는 커녕 더 견정해졌네! 이번에는 돌아와서 우리를 ‘전화’하네. 우리도 당신처럼 강제 노동 수용소에 들어가라는 건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강제노동 수용된 것은 오로지 진실만 말하고 착한 사람이어서 간 것인데 당신들은 이런 일이 정상이라고 보는가? 냉정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하여 보라.”라고 권유하였다.
저녁 8시 경에 파출소에 도착하였다. 나는 간단한 서류절차만 밟고 집에 가는 줄 알았는데 경찰 위따핑이 말하기를 “소장이 퇴근하였으니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소장이 오면 해결 합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견결히 반대하여 나서며 “아니오. 난 집에 가야 합니다. 난 이미 자유의 몸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을 보고 왜 여기에 있으라고 하는 것 입니까?”라고 묻자 위경찰은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저 여기서 하루 밤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나를 강제로 파출소에 머무르게 하였다.
나는 혼자서 음습하고 좁은 공간에서 지내야 했다. 아침이 되자 나는 연공을 시작하였다. 출근 시간이 되어 소장은 랑모모를 데리고 카메라를 가지고 오더니 위경찰과 같이 방에 들어 왔다. 나를 보자 “사람은 예쁘게 생겼는데 어떻게 여기에 와서도 계속 연공을 하는가?”라고 했다. 나는 “연공인은 어디를 가거나 시간만 있으면 연공을 합니다.”라고 하자 그는 “그럼 오늘 아침에 연공한 것을 다시 한번 보여 줄 수 있나?”라고 물었다. 나는 연공 시범을 보여 주었다. 옆에 있던 사람은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들이 이것을 증거로 삼아 계속 박해하려고 하는지를 몰랐다.
제3장 여파가 가라앉지 않다 (餘波未平)
다시 구치소에 들어가다
오후가 되자 위따핑은 나를 구치소로 압송하려고 하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아무 죄도 없으니 가지 않을 것이다.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다시 구치소에 들어가라고 하는가. 당신들은 법을 어기고 있다. 나는 당신들을 고소할 것이다.”라고 하자 웨이다핑은 “고소하려면 구치소에 가서 하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또 한번 웨이다핑에 의해 쥬루춘 구치소에 압송되었다.
구치소에서 나는 당직 경찰에게 말하기를“ 나는 상소를 제기하려 합니다. 나는 노교소에서 오늘 만기 석방되었는데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파출소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강제로 여기에 데려왔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경찰은 “오늘은 국경일이어서 모두 휴가를 갔으니 3일 날 돌아오면 다시 얘기합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국경일, 99년 국경일에도 나는 여기에 있었어요. 이 몇 년 동안 모든 명절날을 난 모두 감옥에서 보냈어요. 왜 그랬는지 아세요? 오로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진실을 말한 탓에 열 한 번이나 불법으로 구속되었고 심지어 감옥살이 까지 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강제 노동을 받게 되었는지 아세요? 그것은 TV에서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않고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여 반신불수가 되었다.’라고 선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당신들이 제일 잘 알고 있어요. 그것은 내가 노교소에 가기 전에 여기서 열 번이나 구류되었기 때문이죠. 당신들은 당사자 입니다. 결국은 내가 쓴 한편의 문장 때문에 강제 노동 수용을 하게 되었죠. 당신이 말해보세요 억울한가, 억울하지 않겠는가를. 장(江)씨 집단은 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두려워할까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어요?”라고 하자 경찰은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힘들게 3일을 기다렸다. 아침에 경찰이 감방을 검사하러 왔는데 나는 그에게 “나는 상소를 제기하련다"고 말했다. 나는 직접 상소장(申訴)을 양**소장에게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는 내게 이렇게 알려 왔다. “전화를 하여 완년창 파출소에 물어 봤는데 국경일 휴가가 8일까지라고 하니 8일까지 기다리시오.”라고 하였다.
사악이 수단을 다 써도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다
8일 오전 소장 양**의 호출을 받고 나는 소장 사무실에 갔다. 사무실에는 파출소에서 온 경찰 위따핑과 사무실 주임 이챵쥔, 그리고 주민위원회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수련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쓸 것을 요구하면서 쓰면 즉시로 집에 돌려보낸다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좋은 공법을 무슨 이유로 수련하지 않겠어요? 각서를 쓰려했다면 2년 전에 벌써 썼지요. 이제 와서 뭘 쓰겠어요? 당신들은 나를 안지 이미 2년이 되었는데 나와 파룬궁에 대해 모두 일정하게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라고 하자 그들은 “당신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다 좋아!”라고 하였다. 나는 “이것도 파룬궁을 배우고 나서 좋아 진 것 아닌가요? 그럼 당신들이 말해 보세요. 파룬궁이 도대체 어디가 나쁜가?”라고 하자 그들은 “어찌됐던 정부가 나쁘다고 하면 나쁜 것이지 뭐, 우리는 정부의 말을 들을 거야.”라고 하였다.
내가 각서를 쓰지 않는 것을 알고 그들은 즉시로 떠났다. 나는 그들을 붙잡고 그들과 같이 집에 가겠다고 하면서 죽어도 여기에 있지 않겠다고 하였다. 소장 양**는 이런 상황을 보고 나를 만류하면서 “중팡츙, 인내성 있게 15일만 기다려, 며칠 남지 않았으니까.”라고 말했다. 바로 사부님이 <워싱턴 DC 국제법회에서의 설법>에서 말씀한 것처럼“사악 그것이 어떻게 악독한가 만을 보지 말라. 지금 그것은 이미 있는 술수를 다 쓴 것으로 단지 성질을 규정(定性)하는 것을 끊임없이 승급시키는 것과 여론에서 가짜를 조작해 내고 변태적인 심리로 줄곧 그런 수련생들을 핍박하여 무슨 회개서(悔過書)를 쓰게 하고 무슨 싸인을 하게 할 뿐이다. 가짜이고 사람의 마음을 개변 시키지 못할 줄 번연히 알면서도 왜 기어코 이처럼 하는가? 왜 기어코 당신더러 그 싸인을 하라고 하는가? 왜 당신이 기어코 연마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야만 비로소 당신을 풀어주는가? 이쪽에서 연마 한다면 유죄판결을 하고 저쪽에서 연마하지 않는다고 한마디 말을 하면 사람을 풀어줄 수 있는데 이 차이가 너무나 큰 것이 아닌가? 정상적인가? 정상적이 아니다. 그건 아주 뚜렷하지 않는가? 바로 당신더러 떨어지게끔 하고 바로 당신더러 그 한 마디 말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10일 오전 9시쯤에 갑자기 나를 찾았다. 나는 또 무슨 일이 생겼겠지 라고 생각하였다. 문 앞까지 가서야 경찰 위따핑을 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 “가서 짐을 챙겨 집에 갑시다.”라고 하였다. 나는 감방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였다. 같이 있었던 두 대법제자는 나를 보고 “ 15일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라고 묻자 나는 “원래부터 불법인데 규칙상으로 하면 하루도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야.”라고 대답 했다. 후에 그 중 한 여자 아이 펑소윈이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잡혀 들어갔는데 매우 견정하게 나서서 사악을 저지하였다고 들었다. 그녀는 청두전자과학기술대학(成都電子科技大學)를 졸업하였다.
신분증 풍파
내가 집을 산 후 바로 불법 노동 수용소에 들어간 탓에 집에 관한 문서를 처리하지 못하였다. 내 어머니는 9살 애를 데리고 살면서 여기에 관하여 알지 못해 그때까지 방치하여 두고 있었었다. 집문서를 정리하려면 신분증이 필요하였는데 내 신분증은 처음으로 북경에 갔을 때 경찰서에서 몰수 하였으며 파출소에 가서 다시 발급을 받아야 했다.
11월, 나는 호적이 있는 룽탄스(龍潭寺)파출소에 가서 담당 경찰 랴오유량을 찾았다. 그는 만나자마자 “지금 어때요?”라고 물었다. 나는 “지금 집에 돌아와서 많이 나아졌고 오늘 와서 신분증을 재발급 받아서 등기를 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럼 이 일에 대한 인식을 써 오세요.”라고 하면서 종이와 펜을 주었다. 나는 앉아서 진지하게 써내려 갔다. : 파룬궁은 나에게 건강과 생명을 주었다. 그러나 장(江)씨 집단의 박해를 받아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어 집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는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좋다. 법륜대법(法輪大法)는 유례없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 나는 더욱 견정하게 수련을 하려고 한다. 이런 내용을 써내려 갔다. 그는 이것을 보고 노발대발하여 말했다. “이런 인식이면 지금이라도 감옥에 다시 집어넣을 수 있어.” 나는 즉시 일어나 위엄있게 말했다. “당신이 문제 삼을 일이 아니야! 당신 같은 경찰들은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는데 내가 거짓말하는 걸 들어야만 당신 마음이 편하겠어?” 저는 계속 정념으로 저지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나중에는 “그럼 이것을 개인 파일에 보관하여 둘게요.....”라고 하였다.
등기소(辦證中心)에 갔더니 직원이 말하기를 아직도 많은 신청서와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또 룽탄스 파출소에 갔다. 전에 있던 랴오 경찰은 회의를 하고 있어 나 더러 사무실에 가서 도장을 찍어도 된다고 하였다. 나는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계속 발정념을 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서 인사를 하고나서 자신을 소개하고 온 목적을 말했다. 그들은 듣고 놀란 표정으로 “당신이 바로 중팡츙인가? 당신 때문에 우리가 수많은 반성문을 썼고 늘 상사의 비평을 받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본인을 보네.”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법을 얻은 후로 몸이 좋아진 사실과 강제 노동 교양소에 들어간 원인을 알려 주었다. 그들은 나의 말을 듣고 동정하면서 “당신은 참 능력도 좋은 사람이야. 이런 능력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 사무실에 좀 기부하여 보기에 좀 좋게 하면 좋지 않는가? 지금 당신의 상황을 봐 너무 그렇지 않아? 돈도 없고.”라고 했다. 저는 “그렇지! 만약 내가 장(江)씨 집단의 박해를 받지 않고 운수사업을 계속했다면 이 몇 년 사이에 운수 사업이 많이 발전하여 수십만 위안 버는 것은 문제없지요.”라고 답하였다. 신청서를 쓸 때 나는 사실대로 적으려고 했다. 그들은 “북경에 가서 청원을 하다가 주민등록증을 몰수당했다고 하면 안 되고 잘 못하여 물에 빠졌거나 불에 태웠다고 쓰세요.”라고 말 했다. 나는“사부님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라고 하였다. 옆에있던 누군가가 “이것만 보더라도 난 파룬궁이 좋다고 생각해!”라고 말하였다. 결국 아주 순조롭게 신분증을 받고 돌아왔다.
(다음에 계속)
문장 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 발표: 2004년 7월 20일
문장 갱신: 2004년 7월 22일
문장 분류: [인심과 인과]
문장 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20/79562.html
논-픽션 <질풍경초(疾風勁草) > (6)
글/중팡츙
[명혜망 2004년 7월 21일] (이전 글에서 이어짐)
제 5부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머리말: 박해를 반대하며 또 한번 정념으로 사악의 음모를 제지하다.
제1장 정념으로 경찰의 악행을 제지하다.
-족제비가 세배를 하다
매 년 명절이나 4.25, 7.20등 민감한 날짜가 되면 파출소 경찰이나 주민 위원회, 610사무실에서는 각종 명분을 만들어 대법제자를 괴롭혔다.
2001년 12월 22일 완낸창 파출소 경찰 웨이다핑은 사무실 주인 리챵쥔과 달력을 준다는 명분을 걸고 ‘보러’ 왔으며 26일 부녀위원회 주석이 나를 ‘보러’왔다. 28일에는 완낸창 파출소 사무실 그리고 청화구 정치법제위원회 서기 허우웬 등 몇 사람이 집에 와서 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나는 인내성 있게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28일 밤 중 12시에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문 밖에 사람이 손으로 도어 스코프(확인창)를 가려서 나는 복도에 불이 안 켜져 있나 보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열자 갑자기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완낸창 파출소 사무실 주민위원에서 온 사람들 이었다. 주민위원회에 새로 임명된 주임과 웨이다핑은 즉시 내 아들 방에 들어가더니 책상 위에 있는 <전법륜>과 사부님 사진, 경문 한 편을 몰수 하고 나를 파출소로 끌고 갔다. 다음날 나는 강제로 피현 구치소에 불법 압송되었다. 의사가 와서 신체검사를 하였는데 나는 의사보고 “제 몸에 옴이 심하여 접수하면 안돼요.”라고 하였으나 의사는 “어떠한 병이 있어도 우리는 모두 접수야.”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는 한 달 동안 불법 구류되었다.
-꿈에서 금방 깨어난 어린 이씨(小李) 간사(幹事)
2001년 12월 29일 피현 구치소에서 어느 감방에 40여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대법제자가 12명 이었다.
월요일 오후, 감방장(牢頭)이 나더러 나오라고 했다. 내가 방문을 나가자 여(20) 경찰이 큰 소리로 나를 보고 ‘쪼그리고 앉아라!’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서서 마주 보면서 발정념을 하였다.
2분이 지났다. 그녀는 다시 “쪼그리고 앉으라 했는데 못 들었어!?”하고 고함을 쳤으나 나는 조용히 그녀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녀를 향한 발정념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내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열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면서 감방장을 향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귀머거리야, 아니면 벙어리야, 왜 말을 하지 않아!”라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감방장은 겁이 나서 얼굴색이 변하였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내게 와서 “언니, 말하세요. 이분은 여기 간사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다시 2분이 흘러갔다. 나는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말하는 것이 생김새와 너무 다르네요?” 라고 하자 태도가 돌변하면서 호의적으로 말하였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들은 너무 힘들어요.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야근을 하고 매일 80여 명이 드나드는 것을 관리하여야 하니 한 시도 쉴 수가 없어요.” 라고 하였다. 나는 “매일 범인과 실랑이를 하는 것이 무척 짜증나는 줄은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억울하게 여기에 갇혀 있는데, 본래 여기에 있지 말아야 할 사람들에요.”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녀의 말도 많이 부드러워 졌다. “몇 번이나 구류되었던 겁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한 번 알아 맞혀 봐요.”라고 하자 그녀는 “3번, 5번?” 하고 물었는데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마음 놓고 농담하듯 물어보기를 “아무래도 10번은 되지 않겠죠?”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엄숙한 표정으로 “구류 13번, 1년 강제 노동교양, 3개월 추가.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강제 노동교양을 받았었다고요? 우리들이 회의를 할 때 영도가 분명히 강제 노동 교양소에서 ‘전화’된 사람이 100%에 달한다고 하였는데?”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안심하라고 하는 거짓말이고 만약 영도가 말한 것이 진실이라면 지금 난 네 앞에 서 있지 않을 거 아닌가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여기에 들어 왔지 않았습니까?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이 몇 년 동안 장사도 못하고 감옥살이를 하겠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거짓말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내게 일어난 일에 관한 얘기를 계속 들었다. 그녀는 나의 얘기를 듣고 호의로 “돌아간 후에 조심하세요. 다시는 여기에 들어오지 마세요.”라고 하였다. 나는 “우리가 만날 곳은 여기가 아닐 겁니다. 전 조카딸이 있는데 나이는 당신과 비슷한데 예쁘게 생겼어요. 이담에 친구로 사귀어 우리 집에 놀러 와요.”라고 말하였다.
감방에 돌아가자 어느 대법제자가 내게 말하기를: “당신 이만 저만이 아닌데. 어떻게 이 간사를 다 설복시켰어요? 당신 알아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녀를 무서워한다고요. 그들은 (범인) 말을 걸다가 이 간사에게 발각되면 무조건 TV를 끄고 감방 규칙을 20번 써야 돼요! 당신이 일찍 왔으면 좋았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감방에 경제 문제로 들어온 사람(기업의 사장)이 있었는데 밖에서 증거를 수집하다 경찰과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경찰은 “안에서 지내기가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안에서 파룬궁 덕분에 같이 말도 하고 하여 마음이 편하고 시간도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낸창 파출소에서 온 중팡츙과 같이 있어요.”라고 하자 경찰은 “그 사람은 대단한 인물이야, 견정하고 강인한 사람이지.” 라고 하였다
-떳떳치 못한 경찰
아침에 나는 바람 부는 둑 위에서 눈을 감고 2장 공법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얼굴에 통증이 와 눈을 뜨고 보니 누군가 나를 찌르는 것 이었다. 행동이 이상한 경찰이 긴 대나무 막대기로 나를 찌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말은 하지 않고 내가 쳐다보자 도망쳤다.
어느 날 밤 12시경에 당직을 하고 있던 소장이 문을 열더니 대법제자인 텐(田) 아주머니를 보고 짐을 싸라고 하였다. 나는 소장을 보고 “소장님 보세요. 이것이 경찰이 하는 짓입니까? 매 번마다 밤에 사람을 집에 데려가고 왜 낮에는 데리러 오지 않아요? 민중들이 보고 경찰이 착한 사람만 잡아간다고 분노를 일으킬 염려가 있어서 하는 짓이지요?” 라고 묻자 소장은 묵묵히 답이 없었다. 급히 짐을 싸고 있던 텐(田)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오늘은 너무 늦어서 돈을 찾지 못하겠네. 내가 통장을 줄 테니 네가 올 때 좀 갖다 줘! 부탁해.”라고 말했다. 나는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라고 하면서 통장을 받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소장이 “당신은 매일 앉아서 입장(발정념을 가리킴)이나 하고 이렇게 해서 집에 가겠나?”라고 물었다. 나는 “며칠 후면 집에 꼭 갈 거에요. 내가 집에서 연공하고 발정념을 하면 당신들 눈에 보이지 않을 것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소장을 할 말이 없다는 듯 문을 닫고 가버렸다.
-수련은 만일의 경우가 없다
어느 날 오후에 감방의 문이 열리더니 감방장이 “언니 또 동수 한 명이 들어 왔어요.”라고 알려 주었다. 이 분은 문을 들어서자마자 “당신은 어느 구에서 왔으며 그는 어느 구에서 왔는가?” 물었다. 결과 청화구에서 온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청화구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가지 못해! 구치소에서 기한이 되면 수용소에 가고, 수용소에서 기한이 되면 다시 구치소에 돌아오는 거야. 구치소에 가보면 대부분 청화구에서 온 사람들이야. 모두 반복하여 구속되는 사람들이지. 나 자신도 청화구에서 왔어! 바로 수용소에서 이송하여 온 거야.”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말했다. “난 그런 헛소리를 믿지 않아! 난 꼭 집에 돌아가야 돼.”
우리 중에 다음 날이면 만기가 되어 집에 갈 수 있게 된 50여세 된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여태 쓰던 물건을 남겨두고 내일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는 긴장되어 “내일 가더라도 모든 짐을 다 챙겨야겠어! 만일 집에 가지 못하면 어쩌지?” 라고 말했다. 나는 “아주머니의 그 일념은 틀린 것이에요. 수련은 만일이 없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계속 피현(郫縣)의 세뇌반에 남아 있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시멘트 바닥에서 잔 결과 심한 류머티즘에 걸렸고 등이 아파서 허리를 굽히지 못하였다. 다리는 류머티즘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으며 장기간 기침을 하였고 체중이 급격히 줄어 본래 모습을 잃었다. 집의 가족들이 와서 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아 가족들은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였다. ‘세뇌반’에서 보낸 시간도 1년이 지났다. 2003년 2월, 아들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어 어머니를 위하여 시정부에 가서 두 번이나 청원(上訪)을 시도하였다. 시장을 찾아 어머니를 구하려 했지만 도리어 파출소에 잡혀간 후에야 석방되었다. 아들은 “어머니도 구하지 못한 아들이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란 생각에 죽겠다는 마음을 품고 술을 먹고 취한 후,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자살한다고 하였다. 전화를 걸고 창문을 닫고 가스를 틀어...... 경찰이 쫓아 왔을 때 그는 이미 입에서 거품을 물고 정신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 사건으로 경찰은 인명 사건이 발생할까 봐 두려워하여 박해를 받아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된 숨만 붙어 있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 왔다. 나는 한달 동안 구류되었다가 경찰 웨이다핑 사무실 주임 이챵쥔이 나를 파출소로 데려 갔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소장 란(冉)**는 이렇게 내게 물었다. “중팡츙, 돌아가서 어떻게 할 작정인데?” 나는 “의연히 쩐(真), 싼(善), 런(忍)의 이치로 나의 일언일행을 요구하지요.”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듣자 그는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대노하여 “다시 잡아들여!” 라고 고함을 치면서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사무실에서 사라졌다. 걸상에 앉아 있던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일어서며 손으로 책상을 쳤다. 나는 당당하게 말하기를 “당신이 결정할 수는 없어요, 나는 오늘 곧바로 집에 돌아갈 겁니다.”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경찰 웨이다핑은 이런 상황을 보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달려와서 나를 잡더니 “잠깐만 기다리면 동생에게 연락하여 데려가라고 할게.”라고 말 했다. 나는 “내 동생은 장사하느라 바빠요! 시간 없어요! 난 혼자 갈겁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걸상에 앉아 집에 돌아가는 일념을 더 확고히 하였다. 시간이 좀 지나 경찰 웨이다핑은 “중팡츙 잠깐이라도 대기실에 있어 그러면 풀어 줄게. 란소장님의 체면을 좀 봐 줘! 파출소 24시간 대기실에 있으면서 조사하라는 명령에 란소장이 사인했어!”라고 하였다. 나는 “체면? 체면을 세워 달라구요? 그럼 누가 나의 사부님의 체면을 세워 주었습니까? 그 누가 대법의 체면을 세워 주었습니까? 그리고 누가 나에게 체면을 주었어요? 속인 사회에서 난 그보다 더 신분이 있는 사람이고 지위가 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가서 란소장과 면담할겁니다.” 라고 하자 그는 “란소장은 회의 중이야” 라고 하였다. 가보니 확실히 회의 중이었다. 나는 웨경찰이 일하는 사무실에 돌아가 조용히 걸상에 앉아 란소장을 향하여 발정념을 하였다.
5시쯤이 되자 동생은 나를 데리러 왔다. 이것을 본 란소장은 “중팡츙 소문을 들으니 집을 잘 꾸며 놓았다던데, 나도 같이 가서 한번 보자!”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는 집에 돌아왔다.
제2장 인권 박해
-행동을 감시하다
집에 돌아 온 나는 란**소장의 결정에 의해 매일 저녁 9시에 집 전화로 당직실에 전화를 걸어 행방을 보고해야 하였다. 일이 있어 청두를 떠나려면 반드시 보고를 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걸면 거는 것이지 뭐? 그들도 장(江)씨 집단의 박해를 받아 불쌍한데...”라고 생각하였다. 구정이 다가 왔다. 몇 년 동안 고향에 가보지 못한 나는 고향 생각이 났다. 이 일을 말하였더니 가도(街道) 주임 이챵쥔은 “위에 보고하여 결정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단계별 허가를 받고 가도 위원회 사람의 감시를 받으면서 고향 땅을 밟게 되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파출소 소장 란**는 “돌아간 후에 매일 전화로 파출소나 이 주임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해야 한다.”라고 명령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모두 그들이 나의 행동을 장악하려는 것 이었다. (나중에 가서야 나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청두를 벗어날 때 그들에게 보고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그들의 지시대로 한다면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 연공인이 또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라고 생각하였다.
3월에 나는 일이 있어 보고를 하지 않고 고향에 가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저녁에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는데 란**소장이 당직을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전화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휴대폰으로 건 것임을 알고는 “지금 어디에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젠양 고향에 있어요.”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언성을 높이며 “누가 허락하였는데?”라고 물었다. 나는 “내 마음입니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가도 사무실 주임 이챵쥔으로부터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건 전화에서 그는 강경한 어조로 “누가 가는 것을 허락하였어?”라고 물어서 나는 전화를 꺼 버렸다. 집에 돌아가서야 어머니는 나에게 “이챵쥔이 아침 일찍 왔는데 난 그저 네가 일이 있어 고향에 갔다고 하고 가능하면 오늘 온다고 하였다. 오후 1시에 이챵쥔은 또 왔다가 네가 돌아오면 파출소에 가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또 와서 네가 돌아와서 파출소에 가지 않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고 저녁 6시에 와서는 ‘아직도 오지 않았는가?’고 묻자 돌아 왔는데 일보러 나갔다고 .”라고 알려 주었다. 저녁 8시에 또 우리 집에 왔는데 내가 집에 있는 것을 보고 돌아갔다.
-인신자유를 제한하다
2000년 5월부터 지금까지 내가 집에 있거나 없거나 집의 가족과 나를 모두 감시하여 왔다. 완낸창 파출소소장 란**는 매일 저녁 9시에 반드시 집 전화로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보고 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일이 있어 청두를 떠날 때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모두 정념으로 부정하였다.
2003년 5월11일은 엄중한 박해를 받아 반신불수 상태로 된 내가 정상으로 회복되어 문을 나선 첫날 이었는데,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아들에게 신발을 사주려고 나갔다. 이 일을 사보안이 보고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보고 하였다. 결국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2층에 올라서자마자 파출소 경찰과 사무실의 이챵쥔에게 잡혔다. 그들을 보고 나는 “어디에 가는 길이오?”라고 묻자 그들은 “당신을 보러 왔어.”라고 했다. 나는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챵쥔은 3층의 나의 방문을 열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당신들은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닌가요. 여기서 얘기하면 되지 않습니까? 왜 꼭 방에 들어오려고 하는데요?”라고 하자 이챵쥔은 “문을 열어 들어가서 이야기 할게.”라고 하였다. 나는 “방문을 열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챵쥔은 “그럼 당신이 얼마나 버티는가 보자. 우리는 여기에 서서 기다릴 테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하기를 “몇 년 동안 난 당신들을 친구처럼 대해 주었어요! 매번 어떠한 이유로 나의 집에 왔던지 간에 난 모두 과일과 녹차를 드렸고 힘들게 당신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었어요! 그런데 나에게 돌아 온 것은 무엇인가요? 2년 동안의 감옥살이, 혹형, 두 번이나 생명을 잃을 번 하였는데, 지금 나는 경험을 쌓았으니 다시는 당신들이 집에 들어와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겠어요!”라고 하였다.
이챵쥔은 “도대체 문을 열거야 안 열거야!”라고 위협하듯 말했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안 열어요! 방에 들어와서 뭘 하려고 합니까? 당신들이 방에 들어 갈 때 마다 사람을 납치하지 않으면 물건을 가져가고 하였어요! 무슨 좋은 일을 한 적이 있어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경찰은 급히 “오늘은 그럴 생각이 없어! 중팡츙 다시는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마. 당신 때문에 웨이다핑이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야 부부가 모두 실업하였고 아들이 당신 아들만 한데 ..... 그래서 보러 온 거야.”라고 하여 나는 “내가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박해하면 악보를 받기 마련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경찰은 계속하여 “이주임 이 분이 문을 열지 않으면 여기서 말하지요.”라고 하였다. 이챵쥔은 “그럼 좋아, 중팡츙 잘 들어! 지금부터 ‘런허왠’을 한 발자욱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일어난 일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하였다. 나는 반문하였다. “누가 결정한 겁니까, 증거를 내놔요! 만약 증거가 없으면 글이라도 쓰던지요? 이러면 내가 고발할 때 증거라고 있지요! 도대체 그 어느 누가 중팡츙의 인신의 자유를 침범하는가 봅시다.”라고 하자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쓰지 않고 우물쭈물하다가 가버렸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 후 나는 산책하러 나갔다. 보안 요원인 천 씨는 어떤 할아버지를 시켜 나를 미행을 하더니 후에 전화를 걸어 사무실 주임 이챵쥔에게 알렸다. 이챵쥔은 급히 택시를 타고 왔다. 그는 저는 완낸창 “국미”백화점에서 나를 강제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그들의 무리한 행위를 견결히 제지 하였다. 이챵쥔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고 나를 때리려고 시도 하였으나 주위의 사람들이 볼까 봐 보안을 시켰다. 청도은하창신 회사의 당직하는 보안이 이창쥔의 지시를 받고 나를 때리려고 하자 나는 “누가 감히 좋은 사람을 때려요!”하고 말했다. 결국 그는 나의 정념에 억제되어 손을 대지 못하였다. 후에 이챵쥔은 나를 집으로 강제로 끌어갔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장쩌민은 이미 여러 나라 대법제자로부터 다른 나라에서 기소 당하였고 그를 따라 나쁜 일을 계속한다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챵쥔은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오자 이챵쥔은 천과 샤 두 보안에게 “집을 한발자국도 떠나서는 안 된다. 만약 듣지 않으면 때릴 거야! 사건이 벌어 지면 내가 책임져!”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나는 “누가 감히 사람을 때려요! 이것은 인권침해야 당신이 결정할 수 없어요, 내 일은 내가 결정을 내릴 겁니다. 밖에 나가고 나가지 않는 것은 나의 자유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나와 이챵쥔은 집 대문에서 오랫동안 논쟁을 했지만 결과가 없었다. 날이 저물자 이챵쥔은 할 수없이 집에 돌아갔다.
-30만 위안이 11,500 위안으로 변하다
장쩌민이 1999년 7월 20일부터 전면적으로 전국에서 파룬궁을 탄압하여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경제상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나는 원래 재산이 70만 위안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집 한 채와 자가용을 산 돈을 빼고 94년부터 97년까지 노후대책으로 38만 위안을 당지 지방정부에서 개설한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사들였다. 99년 10월 수련한지 6개월 만에 나는 쥬루춘 구치소에 구치되는 기간에 주식은 변질한 도박이라는 것을 깨달고 (나는 수련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도박을 하면 안된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 30만 위안 되는 주식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나는 주식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 아는 사람에게 처리하여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어서 3년이라는 기간을 나는 장기적으로 불법으로 강제 노동 교양소에 구치되어 있었고 반복으로 구치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2002년까지 지속되어 후에 박해를 받아 떠돌아다니는 동안 생활이 힘들게 되자 전에 주식을 부탁하였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분이 말하기를 장기간 주식을 관리하지 않아 30만 위안 되는 가치가 지금은 11500 위안 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왔다. 그 중에서 나의 불법강제 노동교양기간 동안 어머니와 아들의 생활비며 등록금 10000 위안을 떼면 1500 위안이 남을 것 이었다.
내게 남은 1500 위안이 떠돌아다니는 기간의 명줄이 된 셈이었다. 이 돈으로 3개월 집세를 내고 3개월 생활비로 쓰려고 하였다. 하지만 뜻밖에 며칠 후 청두시 광룽파출소 경찰 장쯔등 열 몇 명이 집 수색을 할 때 강제로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내가 보유하고 있던 자가용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매달 관리비용만 나가고 하여 싼값에 팔아버렸다.
-연루
장(江)씨 집단은 탄압에서 연좌제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대법제자에 대한 잔혹한 형벌 이었다. 1999년 11월, 나와 9년 동안 거래를 해 왔던 회사는 압력을 받아 나와의 합작을 포기해야 했다. 이리하여 매달 1만 위안에 달하는 수입이 없어졌다. 나는 직업을 잃었고 어머니는 시골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라 퇴직금도 없었다. 온 가족이 경제적인 수입원이 없어진 것이다. 아들은 중학교 1학년을 다녀야 하는데 단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도시 호적을 올릴 수 없어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 많은 돈을 내고 공부해야 했다.(한 학기에 3000위안, 학비 잡비 제외)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지금 살고 있는 100여 평의 큰집을 다른 사람에게 세를 내주고 가족과 같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작은 집에 살면서 그 차액으로 생활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우리 온 가족이 이러한 곤경이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괴롭힘은 계속되었다. 티오덩허(현재 파출소 합병)파출소 경찰, 런허왠의 경찰 손융, 류잉팡 등은 몇 번이나 내 동생의 가게에 와서 괴롭히며 위협하였다. “당신 누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수배령을 내릴거야.”라고 하면서 “당신 누나 집은 세를 놓아도 안돼! 누가 이사하여 들어가면 내쫓을 거야.”라고 하면서 종일 집 아래에서 감시하며 세 놓는 것을 방해하였다.
-온갖 생트집을 잡아 방해하다
2003 년 4월 아들이 중학교를 가는데 도시호적이 필요하였다.(지금 아들이 가지고 있는 호적은 농촌 호적이다) 국가 규정에 의하면 ①90평 이상의 도시 집을 사면 두 사람의 호적을 신청할 수 있다. ②자녀는 아버지를 따라 호적을 올릴 수 있다. 라는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적을 관리하는 경찰 웨이다핑은 갖은 수단을 다하여 괴롭혔다. "당신의 집은 집문서를 신청하지 않아서 호적을 못 올려!"라고 하여 나는 '아들이 학교 다니는 것인데 3000위안을 빌려서라도 집문서부터 하자'라고 생각하여 서류를 밟기 시작하였다. 웨이다핑은 계속하여 "먼저 토지 증명서를 내고 집문서를 내야 하는데 대개 2만 위안이 들어.”라고 하였다. 나는 경제적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더는 돈을 빌려 토지 증명서와 집문서를 낼 수 없었다. 더 이상 산더미 같은 빗이 가져다 준 정신적 압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 명의로 아들의 호적 문제를 해결하려던 길이 장(江)씨 집단에 의해 막혀 버렸다.
아들이 학교 다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생을 시켜 아들도 모르는 나와 10년 별거한 남편을 찾아 아들의 호적을 그한테로 올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재지 집도 허문 것이어서 그도 역시 세를 내고 사는 형편이다. 그의 호적도 옮겨가야 하는 판인데 아들의 호적을 그가 있는 곳에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후에 생각하여낸 방법은 아들 아버지의 호적을 내가 살고 있는 완낸창 파출소로 옮기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 하면 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경찰 웨이다핑은 "반드시 아버지가 사는 파출소에 가서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는 증명을 떼야 한다."고 말하여 주었다. 증명을 가져다주었으나 웨이다핑은 또 "아들 아버지의 회사에서 그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고 증명해야 한다." 고 알려 주었다. 또 증명서를 떼어왔지만 이번에는 "아들 아버지가 사는 주민위원회에서 그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는다. 라는 증명을 하여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나에게 생트집을 잡는 것이 아닌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쩐, 싼, 런(眞, 善, 忍)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으로 되려고 하는 것이 죄가 있단 말인가? 여성, 아동보호법은 말로만 그쳐도 되겠는가? 밖에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주민위원회에서 뭘 안다고 증명을 하여 줄 것인지? 그리고 그전에 있던 호적도 돈으로 산 것이라, 호적을 올릴 수 없었다. 학교에서 통지서가 왔는데 이번 학기에 반드시 나머지 비용 만 위안을 모두 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해마다 9000위안을 내야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비싼 등록금을 놓고 나는 학교 보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학교를 다니지 않을 수는 없다. 그는 필경 12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애다. 문제는 이와 같이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아주 많고, 학교를 중단해야 하는 애들도 아주 많으며,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가정도 아주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사회 각 계층에 많은 도움을 보내어 나의 집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특히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며 진정하게 인권을 체현시켜 모든 어린이들로 하여금 유쾌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장하여 줄 것을 호소한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협하다
집에 있지 않으면 나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하여, 완낸창 가도 사무실 주임 이챵쥔은 계속 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나의 어머니를 5번이나 협박하였다.
2003 년 2월 박해를 받아 침대에 누워있었고 언니도 병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70세 되는 어머니는 비통을 참고 나를 보살폈다. 11살 밖에 되지 않는 아들도 초등학교 6학년이라 힘들고 고된 공부를 밤늦게 하고는 나의 기저귀를 갈아 댔고, 더운 수건으로 다리와 발의 딱딱한 살을 찜질하여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경찰 웨이다핑과 진씨 보안은 나의 집에 뛰어 들어와 나를 괴롭히면서 가지고 있는 대법 책을 몰수 하고 나를 체포하려고 했다. 우리는 정념으로 그들의 악행을 제지하여 나서자 그는 책을 돌려주었다.
웨이 경찰이 간 후에 어머니는 나에게 알려주기를 "네가 간 후에 그들이 몇 번이나 여기에 와서 괴롭혔어"라고 하였다. 사무실 주임 이챵쥔과 웨이다핑은 3000위안을 내라고 위협까지 하였는데 어머니는 "지금 밥도 못 먹는 형편인데 돈이 어디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이챵쥔은 "그러면 TV와 세탁기를 다 팔아야지"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람은 이러하다. 웨이다핑이 나에게 "난 위에 늙은 노인이 계시고 밑에는 애가 있어 방법이 없네! 만약 중팡츙이 매달마다 나에게 2000위안을 주면 당신을 위하여 일할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말에서 그들의 모든 행위는 돈을 위해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江)씨 일당은 바로 국민이 피땀으로 번 대량의 돈으로 이런 사람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악인을 도와 나쁜 일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돈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마음으로 대법을 수호하고 있다.
완낸창 파출소 사람들은 몇 번이고 나의 집에 와서 위협하고 괴롭혔다.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걸음을 좀 걷자 2003년 4.25 직전에 나를 찾으러 왔다. 점심 때라서 객실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웨따핑과 이챵쥔은 갑자기 집에 들어오더니 나를 납치하려고 하였다. 나는 발정념을 하여 그들의 배후에 조종하고 있는 사악을 제거하기 시작하였으며 나는 주불의 제자다. 다른 어떠한 배치도 요구하지 않고 승인하지 않는다는 강한 정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때 아들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의 집에 와서 아들 호적 문제를 논의 하려고 들어섰다. 이것을 본 그들은 아들의 아버지에게 신분증 출시를 요구하였는데 "신분증은 집에 있어!"라고 아들의 아버지가 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같이 가서 신분증 확인하러 집 문을 나서게 되어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되돌아 왔는데 두 사람은 문 밖에서 고함을 지르며 벨을 누르고 전화까지 하면서 문을 발로 찼지만 나의 정념에 제지 되였고 더 이상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번의 위험은 이럭저럭 넘어갔다.
2003 년 7.22 전날 오후에 광룽아파트 단지 사무실에 있는 두 사람이 집에 와서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나는 정념으로 사악을 제지하면서 문을 열지 않았다. 저녁 11시에 파출소 리커(李科, 발음대로 썼음) 등 두 명이 또 집에 와서 문을 열라고 반 시간 이상 괴롭히었다. 나는 도어 스코프(門鏡)에서 내다보니 파일을 뒤지고 있었다. 대략적으로 기록된 사람을 찾아 대법제자를 감금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문을 열지 않으면서 정념으로 제지 하였다.
7.22일 11시가 넘어서 집을 나서자 2층 계단에서 완낸창 파출소 경찰이 찾아온 것을 보았다. 경찰은 문을 열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경찰은 "중팡츙, 요즘 어디에 나간 적이 있어? 집에 책은 아직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나가지. 매일 나가서 일을 보고 있어. 지금 바로 일이 있어 나가는 중이예요?"라고 하면서 계단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경찰도 저와 같이 내려갔다. 경찰은 앞에서 있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얼마 내려가지 않았는데 완낸창 파출소 소장 란**가 경찰을 데리고 아파트 밑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나를 납치하려고 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매우 자연스럽게 그들이 계단을 오르지 못하게 하는 정념을 발하고는 3층 집으로 올라가서 문을 닫고 발점념을 하였다. 시간은 정확히 모르는데 얼마 후에 그들은 가버렸다.
10월 1일 오전에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이 집에 와서 나를 괴롭혔다. 도오 스코프로 보니 알지 못한 중년 남자였다. 경찰이라고 짐작하고 정념으로 제지하였다. 경찰은 장기적으로 시간과 때를 가르지 않고 와서 괴롭혔고 우리도 조건반사가 되어 문 벨이 울리거나 전화가 울리면 먼저 경찰인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문으로 가는 동안 발정념을 하면서 문 벨을 누르는 사람(그들을 시키는 사람을 포함)이나 뒤에 있는 사악한 것을 제거한 후에 도어 스코프에서 보고 문 열 것을 결정하였다. 어머니와 애는 몇 번이고 나를 납치하는 현장을 목격하여 문 벨이 울리면 습관상으로 공포감을 느껴 아들의 어린 마음에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
-불법으로 집을 수색하고 감금하다
몇 년 동안 경찰은 나의 집을 5번이나 불법 수색을 강행하였으며 그중 4번은 아무런 서류를 제시 하지 못하였다. 완낸창 파출소 경찰은 합법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실제로는 불법으로 많은 것을 강행하였으며, 대담하게도 그들이 증인으로 내세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폭행하였다.
경찰은 매번 나를 불법으로 납치 할 때 마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썼으며 강도와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대법에 관여한 모든 물건을 가져갔을 뿐 더러 이런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집에 있는 물건을 훔쳐갔다. 2002년 9월 박해로 인하여 떠돌아다니는 동안 완내창 파출소와 주민위원회는 악행을 그치지 않고 불법 수색을 강행하여 주민위원회 주임은 집에 있는 에어컨에 쓰는 선을 가져갔다. 후에 어머니가 경찰 웨이다핑을 재삼 추궁하서야 비로소 내 동생이 되찾아왔다. 그들은 심지어 11살 나는 아들의 570위안 세배 돈을 훔친 적도 있었다.
나에 대한 불법 구치는 밥을 먹는 듯 하였고 무법천지였다. 나는 대략 통계해 보았는데, 1999년 7.20 후로 약 38개 단위나 소속기관이 박해에 동참하였으며 불법 구류는 29차례이고 총 날짜 수는 743일에 달하였다. 그중에서 형사구류는 4차례이고 93일이며, 치안구류는 10차례이고 140일이다. 그 중 치안구류는 10차례이고 140일이다. 감금, (북경주재 사무소, 칭양구 마약제거 중심, 올림픽체육장 완낸창 파출소) 13차례이고 25일이다; 아무런 허가 없이 형사고문이 1차례이고 30일이다,(바이푸룽 호텔 및 병원). 강제노동교양 1차례, 아울러 기한을 3개월 초과하였고 455일이다.
내가 뒤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후에 내가 잔혹한 박해를 받아 두 번이나 생명을 잃을 번 한 사연이다.
(다음에 계속)
문장 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 발표: 2004년 7월 21일
문장 갱신: 2004년 8월 8일
문장 분류: [인심과 인과]
문장 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04/7/21/79563p.html
논-픽션:< 질풍 경초(疾風勁草) >(7)
문장/중팡츙(钟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22일】
제6부 대법 중에서의 바른 믿음
머리말: 정법 중 나는 대법의 신기함을 몸소 체험했다.
제1장 도깨비 세상
-경찰과 강도
요즘 민간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하고 있다. 옛날 도적떼(土匪)는 심산 속에 있었는데 지금 도적떼는 공안내부에 있다. 십악(十惡)에 독해된 이 세상은 정말 너무나 엉망진창이다. 동수가 진상자료를 나누어 주다가 잡혔는데 나도 말려들었다. 2002년 4월 2일 오전, 호적관리경찰(戶警) 웨이다핑(魏大平)이 내가 파출소에 도착 신고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출소에 데려다 놓고 전화를 걸겠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하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때 청화(成華)구 610, 완낸창(萬年場)파출소, 사무소와 젠양(簡陽)시 610, 국안대(國安隊), 윈룽전(雲龍鎭) 파출소 등 10여 명이 우리 집을 벌컥 뒤집어 놓았는데 심지어 베란다에 놓아둔 타구[역자주: 가래나 침을 뱉도록 만든 그릇]도 뒤져 보았다. 내가 집에 돌아갔을 때 집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영화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다. 어떤 경찰은 계속 트렁크와 옷장을 뒤집으면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기회를 타 이득을 보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먼저 번에 집을 수색하면서 집수리하고 남은 에어콘선 한 묶음을 가져갔다.) 갑자기 핸드폰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어떤 사람은 못 봤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전에 확실히 보았으나 지금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들은 웨이다핑과 다른 한 경찰에게 억지로 나를 3층에서 끌어 내리라고 하였는데 나의 두 무릎과 발등이 계단에 긁혀 피가 났다. 끌려가면서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경찰이 좋은 사람을 붙잡아 가요. 경찰이 좋은 사람을 붙잡아 갑니다... ..."
우리 집 아래층에는 찻집이 있는데 그때 진상을 모르는 군중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주고 천안문 분신사건, 쓰촨(四川)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나를 모함한 사실, 경찰들이 집 수색하는 기회를 틈타 나의 핸드폰을 훔친 사실 등을 이야기 했다...
호적 경찰 웨이다핑 등은 내가 진상 이야기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했다. 사악은 워낙 노출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억지로 나를 경찰차에 밀어 넣으려 했다. 내가 단호히 협조하지 않고 계속 진상을 이야기하며 밀고 당기는 와중에 원피스 옷깃 단추까지 떨어졌다. 나중에 경찰은 나의 핸드폰을 몰래 다른 방에 갖다 놓았다. 핸드폰은 못 가져 가고 11살 나는 아들의 세뱃돈 570원을 훔쳐가 버렸다. 그들은 다시 나를 억지로 젠양시 간수소에 보냈다.
-개가 여동빈(吕洞宾)을 물다
나는 집에서 젠양시 간수소로 끌려갔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자하는 것이 죄가 없고 간수소에 감금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단호히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결국 윈룽진 파출소의 현 소장 정융창(郑永强)이 한발로 나의 등허리를 밟고 있다가 (당시 나는 원피스만 입고 있었다.) 발로 감방에 차 넣었다.
비록 몸은 감옥에 있어도 나는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간수소에서 범인들에게 규정한 모든 것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 점호하고 숫자를 보고하며 감옥규칙 외우는 것을 거절하고 평시대로 연공하고 법을 외우고 입장하여 정념을 내보내었다. 이로 인하여 황씨 경찰이 원씨 보안을 시켜 억지로 나에게 차가운 수갑과 족쇄를 채웠다. 나는 의연하게 선의로써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내가 연공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에는 죄가 없다. 당신들은 자신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서라도 파룬궁 수련생들을 잘 대우해야 한다." 황씨 경찰은 "아직도 감히 씨부렁거리다니" 하면서 원씨더러 큰 자물통을 가져다 나의 수갑과 족쇄를 한데 잠궈 내가 허리도 펼 수 없고 밥도 못 먹게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사회에서 접촉한 일체 사람은 모두 진상을 똑바로 밝혀줄 대상이므로 진상을 똑바로 밝히는 가운데 체현해 낸 것은 대법제자의 자비요 세상 사람의 구도(救度)이다." 라고 하셨다.(『북유럽법회 전체 수련생에게))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진상을 똑똑히 밝히는 이 문제에서 여러분은 아주 잘 하였다. 동시에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이 일 역시 위대한 것이며 자비로운 것이다. 보건대는 우리가 한 장의 전단지를 한 속인에게 주었고 보건대는 우리가 진상을 속인에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 주겠다. 만약 법을 바로잡는 일이 결속된 후에 인류는 곧 다음 장의 일로 진입할 것인데 머리 속에 "우주대법은 나쁘다"는 것을 지닌 이 사람, 이 생명은 첫 번째로 도태될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 중에서 더없이 나쁜 생명보다도 더 나쁘며 그가 반대하는 것은 우주의 법이기 때문이다."(『북아메리카 대호구법회에서 하신 설법))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나는 모든 방법을 다하여 내가 수련한 후 몸에 나타난 기적과 이 몇 년간 무단히 받은 박해를 써내어 직접 황씨 경찰에게 주면서 소장에게 전달하여 그들이 정면으로 파룬궁을 이해하고 대법제자를 잘 대해 줄 것을 요구 하였다. 그들은 본 후 선량한 마음과 동정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오히려 위협하면서 "당신이 전에 십 여일 구류 당했었는데 그래 또 단식해서 나가겠다는 말인가? 이번에는 다를 걸. 두고 봐."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장기간 나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우고 핍박하여 나는 단식하고 단수하면서 박해에 저항하였다. 나흘 후 그들은 나에게 야만적으로 음식물을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원씨 보안은 나를 침대에서 억지로 끌어내린 후 7~8 명이나 달려들어 나를 사형침대(死刑床)에 올려놓고 머리, 손, 발을 눌러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한편 또 목을 조이고 코를 비틀면서 새끼손가락만큼 굵은 비닐호스를 나의 콧구멍으로부터 나의 위에까지 억지로 꽂아 넣었다. 호스가 너무 굵어서 오랫동안 애써도 호스가 들어가지 않아 콧구멍의 피와 입안의 거품을 잔뜩 토하게 되었는데 눈물이 나도록 아팠다. 겨우겨우 들어가면 그들은 혹독하게 강냉이 죽을 부어 넣어 나중에 강냉이 죽이 호스로 도로 흘러나올 때에야 멈추고는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가? 대법제자들은 세인들을 구도하기 위해 왔는데 도리어 당신들에게 이렇게 박해를 받고 있다니? 당신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짓는지 아는가? 여동빈이 오죽하면 짐승을 구도하지 사람을 구도하지 않겠다고 했겠는가. 사람은 정말 구도하기 어렵다.
-모두 장쩌민이 해친 것이다.
윈룽진 파출소의 경찰은 내 집에 있는 대법 자료의 출처와 유통경로를 알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썼다. 그는 나의 첫사랑 옛 친구를 데리고 왔다. 친구는 전화를 받자 나는 듯이 달려왔다고 했다. 그는 평소 그렇게 선량하고 바르게 살던 내가 족쇄와 수갑을 차고 절뚝거리면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보안에게 책망하듯 물었다. "저 사람이 무슨 죄를 범했기에 저 모양이 되었소? 수갑의 녹이 손목에 묻도록 끄르지 않는단 말이요?" 경찰이 말했다. "저 사람은 감옥규칙을 지키지 않고 안에서 입장(立掌)하고 연공하였으며 다른 수련생에게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고 또 금식하였소." 친구는 내가 이 정도로 박해받은 것을 보고 매우 괴로워하고 가슴 아파하면서 "당신이 연공하지 않겠다는 말만하면 내가 금방 데려나갈 수 있소. 이 경찰들은 모두 나의 친구들이요. 하필 여기서 이 고생을 할게 뭐요?" 라고 말하였다. 나는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나는 나의 양심을 배반하기 싫었다.
코로 음식물을 투입할 때 원씨 경찰은 위협조로 말했다. "밥을 먹지 않으면 너의 친구더러 돈을 지불하게 하겠다. 한번 투입하는데 50원씩 말이야. 그래도 안 먹으면 너의 외사촌 오빠더러 직접 투입하게 하겠다." 외사촌 오빠는 전에 윈룽진 경찰이었는데 젠양시로 전근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점검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 서있는 사람들이 숫자를 보고하자 감방장이 감방 검사를 나온 경찰에게 "침대에 한 사람 앉아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경찰은 "당신은 왜 내려가서 인원 점검을 안 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나는 죄인이 아니오." 라고 대답하면서 경찰을 보는 순간 나도 몰래 "오빠"하고 외쳤다. 본래 외사촌 오빠가 간수소로 전근하여 온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 우리는 이곳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나중에 면담할 때 나는 시간을 틀어쥐고 외사촌 오빠한테 진상을 알렸다. 오빠가 내게 말했다. "네가 여기에 있어도 나는 조금도 도와 줄 수가 없구나. 파룬궁은 일반 안건과 달리 그들이 모든 걸 주관하니 말이다. 나는 정말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너 같은 여걸이 오늘 이 지경에 이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모든 것은 장쩌민 때문이에요." 라고 내가 대답했다.
-사형상(死刑床)
젠양시 간수소에서 나는 오래 동안 사형침대(死刑床)에 묶여 있었다.
형틀침대는 철판으로 만들어 졌는데 작은 구멍 몇 개는 밧줄을 매기 위해 뚫어 놓은 것이었다. 한사람이 누워서 겨우 손을 놓을 수 있게 만들었으며 엉덩이 부위에 큰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대소변을 보면 이 큰 구멍으로 흘러내려가게 되어있다. 그들은 나를 반듯이 눕혀 사형 침대에 묶어 놓았다. 밧줄은 젓가락만큼 굵은 삼바였는데 두 사람이 목에서 두 팔을 비끌어 맨 후 한바퀴 돌려 침대에 홀쳐 매놓고 다시 위에서 아래로 침대에 꽁꽁 묶어 놓아 머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턱 아래의 밧줄이 파고들어 몹시 아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두 팔이 아프기 시작했고 연이어 목, 잔등이 몹시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가 마치 일년처럼 지루하였다. 처음에는 화장실에 가는 시간외에 하루 종일 침대에 묶어 놓았다. 나는 발정념하고 사부님 경문을 외우면서 아픔을 참았다. 사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련이란 곧 어려운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든지 간에, 사악이 미친 듯이 박해하고 생사에 관계되거나 할 때, 당신이 여전히 수련의 이 한 갈래 길에서 확고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이 어려운 것이며, 인류사회 중의 어떠한 일도 수련 길에서의 행보를 교란할 수 없게끔 하기란 어렵다.”(《길))
나중에 그들은 나에게 음식물을 강제로 주입시키고는 오히려 화장실에 못 가게 하면서 나에게 고통을 가했다. 방광에 소변이 가득 차서 극한에 이르렀는데 어떤 방법을 써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이마에는 땀이 났고 속옷이 다 젖었다. 이런 고통은 정말 일각이 삼추 같았다. 부득이 한 상황이라 나는 다른 사람들보고 나의 밧줄을 풀어 달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나의 이 가장 기본적인 요구마저 혹독한 물매를 면치 못했다.
범인의 두목 리잉(黎英)이 주먹으로 나의 가슴을 쥐어박았고 사형수 마약범은 자신의 수갑으로 나의 머리를 내려 쳤다. 나는 발정념으로 그들 배후의 사악들을 제거한 후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래도 덕은 남겨 두라.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대한 것을 장래에 꼭 받아낼 것이다." 두 사람은 한쪽으로 나를 때리면서 한편으로 욕하는 것이었다. "너는 真、善、忍(전,싼,런)을 수련하니까 참을 수 있겠지." 결국 나의 머리가 수갑에 맞아 두 곳에 구멍이 뚫어져 선혈이 목을 타고 흘러 내려 옷깃을 적셨고 베개를 적셔 놓았다. 판씨 경찰이 들어오면서 "싸다. 누가 너더러 밥을 먹지 말라고 했나."라고 말했다.
원래 이 모든 것은 경찰이 범인들에게 지시하여 제멋대로 하게 한 것이다.
바로 그날 낮 한시가 넘자 지난날 살인마같이 기세가 당당하던 원씨 보안이 갑자기 애처로운 모습을 해가지고 범인 두목 리밍에게 "나 곧 갈 겁니다."라고 말하였다. "어디로 가는데?" "나도 잘 몰라. 친구를 찾아보고 직장이 나면 당신 보러 올거요." 분명한 것은 그가 현세현보를 받아 해고당한 것이다.
내가 단식, 단수한지 반달이 되었고 또 상처가 엄중하여 생명이 위기에 처했다. 간수소에서는 내가 그곳에서 죽으면 책임을 질것이 두려워 먼저 젠양시 법원과 국안대에 알렸다. 여러 사람이 내 신체가 정말 허약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청두시 완낸장 파출소의 경찰과 판공실의 리챵쥔(李强軍) 등에게 나를 청두로 데려가라고 통지하였다.
젠양시 간수소에서는 그들의 죄증을 덮어 감추고 다른 사람들이 나의 상처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 청도의 경찰이 나를 데리러 왔을 때 나에게 목이 낮은 티셔츠를 입게 한 후(내게는 겉옷이 없다.) 부축하여 데리고 나갔다. 완낸창 호적경찰 웨이다핑이 나를 데려 가려고 하다가 나의 머리와 목에 많은 핏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찌된 일이요?" 나는 "범인들이 때린 거예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소장 중xx가 "누가 감히 당신을 때릴 수 있소?"하고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서 나는 그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이미 발생한 이 일체를 감히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웨이 경찰은 나를 때린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후에야 나를 데려갔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
내가 젠양 간수소에서 나올 때 파출소에서는 나더러 서명하라고 하였다. 나는 형사 구류 통지서에 "체포"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저녁 7시 전후에 그들은 또 나를 진(進)시 6병원에 보냈다. 나는 그들의 위선을 보아냈다. 그들은 나를 치료한 후 계속하여 박해하려 한다.나는 단호하게 그들과 협조하지 않고 정념으로 제지하여 퇴원을 요구했다. 퇴원 후 파출소에서는 사무실의 황xx더러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면서 24시간 감시하게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경문 『치사(致詞)』 중에서 “대법제자로서, 지금 한 일체는 모두 대법과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제압시키는 것이다. 진상을 똑바로 알림은 사악에 대한 폭로인 동시에 사악을 억제하는 것이자, 박해를 감소하는 것이고, 사악을 폭로하는 동시에 민중 두뇌 속의 사악에 의한 유언비어와 가상(假象)의 독해(毒害)를 깨끗이 제거하는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는 최대의 자비이다. 왜냐하면 미래에는 몇 십억 사람이 법을 얻게 되는데, 만약 사람의 두뇌 속에 대법을 저촉하는 사상이 담겨 있다면, 이 한차례 사악이 지나가면, 인류는 큰 도태가 시작될 것이고, 아마 법을 얻을 인연이 있는 사람 또는 더욱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체는 모두 위대하고 자비로운 것이며 자신의 최후의 길을 원만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이 박해를 받는 진상을 요해하게 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나는 정념으로 사부님께서 가지해 주시기를 바랐고 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 진상을 말하고 중생을 구도하게 해 주시며 절대로 그들이 계속 박해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기회가 왔다. 나를 감시하는 황xx가 나보고 같이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오자고 하였다. 나는 계속하여 발정념을 하면서 황xx 배후의 일체 사악을 청리한 후 사부님께서 나를 가지해 달라고 빌었다. 채소 살 때 그를 그곳에 멈춰 세워 주시고 내가 빠져 나가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세가지 일을 잘할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결국 진짜로 내가 원하던 대로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나는 쓰라린 가슴을 안고 마음속 고통을 참으면서 70세 나는 노모와 11살 나는 아들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게 되였다.
제2장 혹형과 학살
-특무와 조우하다
떠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임시 청두시 광룽시루(光榮西路) 시장 아파트 6층 22호를 세 얻어 살게 되였다. 2002년 12월 9일, 나는 다시 불법적으로 납치를 당했다. 사실은 이러하였다.
오후 2시 30분경, 나는 역전에 가서 화물을 부치고 나서 임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큰 보따리를 맨 사람이 차고 앞에 앉아 있었는데 낮 익어 보였다. 수련하기 전에 주식시장에서 만났던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개의치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멜빵을 메고 채소 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가 나를 따라 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손에 든 채소를 땅에 내려놓고 신발 끈을 묶으면서 그가 앞서 가길 바랐다. 그는 뒤에 멈추어 서서 더 나가지 않았다. 나는 걸으면서 발정념을 하였는데 그는 줄곧 나의 뒤를 따랐다. 6층까지 올라온 후 멈춰 서서 그가 앞서 가길 기다렸다. 그는 다가오더니 나더러 방문을 열라는 것이었다. 나는 " 당신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문을 열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경찰증을 꺼내 보였다. 이때에야 나는 똑바로 그를 쳐다 보았다. 갑자기 한사람이 뇌리를 스쳤다.--샤오위 (小雨)
며칠 전 동교(東郊)의 동수가 샤오위라는 "동수"를 내게 소개하여 CD만드는 방법을 배워 주었는데 내가 배운 후에 그는 씨디 라이트(刻錄機)를 나한테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샤오위는 겨우 몇 분밖에 이야기 하지 못하고 일이 있다고 하면서 급히 가버렸다.
그는 다리 후리치기로 나를 땅에 넘어뜨리고 나의 두 손을 등 뒤로 비틀어 올린 후 한쪽 무릎으로 나의 등을 눌렀다. 나는 큰소리로 "사악이 좋은 사람을 잡아가요!"하고 외쳤다. 이때 아래서 많은 경찰들이 뛰어 올라왔고 나의 손에서 키를 빼앗았다. 나는 또 큰 소리로 "문을 열지 못한다."하고 외쳤다. 그러나 그들은 한참 애쓰더니 끝내 문을 열었다. 이리 하여 실내에 있던 한 동수-단식 3개월 하다가 집에 돌아 온지 한주도 안 되는 동수마저도 납치되었다.
그들은 나의 두 손을 뒤로 틀어서 밧줄로 묶은 후 객실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또 밧줄로 두 발을 묶었다. 어떤 사람이 샤오위(가명. 실명은 모름)에게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요?"하고 묻자 그는 "바로 그야. 틀림없어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집을 수색할 때 나는 샤오위가 혼자말로 "씨디 라이트는 왜 없지? 옮겨 갔나?"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말 속에서 나는 이 사람이 바로 며칠 전 내게 CD를 배워주던 샤오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와 소개 해주던 동수 외에 아무도 그 일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나에게 씨디 라이트 조작 방법을 배워주고 돌아 간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기계가 고장이 났다. 호출해도 회답이 없었고 전화를 해도 집에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기계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며칠 뒤에 찾아오려고 했는데 소개한 동수만 알고 있었다. 기계 고장은 샤오위가 간 뒤의 일이라 그는 내가 그날 씨디 라이트를 집에 가져 온 걸로 생각하고 나의 방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때, 나는 그를 내게 소개해주던 동수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요. 동문의 동수들이 자료를 만들기 위해 아껴먹고 아껴 쓴 돈을 모두 그가 관리하게 하고 있소. 또한 자료를 사이트에 올리고 다운받는 일들을 모두 그가 책임지고 있어요." 맙소사! 본래 그가 공안의 밀정이었단 말인가? 한때 11개의 자료실이 파괴되더니 정말 그와 다 연결이 되어 있단 말인가? 며칠 전 나에게 조작 방법을 배워준 후 그냥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감히 더 생각해 내려 갈수 없었다... ...내가 이번에 납치당한 것은 특무 샤오위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몇 년 이래 샤오위는 청두 및 외지의 많은 대법 제자들과 자료 때문에 연결이 되어 있고 많은 동수들과 (특히 자료실의 동수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나온 후 샤오위의 추격을 받아 납치까지 당한 사실을 동수들에게 이야기 하였을 때 모두들 샤오위가 당시 특무였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동수들이여! 피의 교훈을 잊지 말자!
경찰 장즈융(張智用)이 한 치 넓이 테이프로 머리를 몇 바퀴 돌려가면서 나의 입을 봉했다. 비닐 주머니를 머리에 씌워서 경찰 몇 사람이 억지로 나를 6층에서 끌어내려 쌀자루를 던지듯 차에 던져 버리더니 나를 광룽(光榮) 소구(小區) 파출소에 끌고 갔다. 한 경찰이 혹독하게 나의 뺨을 한대 쥐어박더니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나의 온몸은 진흙 투성이었고 얼굴은 꼭 코크스를 줍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또 나를 바이푸룽진(白芙蓉鎭) 호텔 4층으로 옮겨 불법 감금하기 시작하였다.
-정념의 위력
바이푸룽진 호텔에 도착하자 610의 일당은 경찰에게 '창턱 이쪽은 바깥이 큰길과 연결돼 있어 안전하지 못하오. 이 사람이 이리로 뛰어내리지 못하게 감시를 잘해야겠소."하고 말했다.
호텔 4층의 한 방에서 그들은 수갑으로 나를 의자에 묶어 놓고 광룽소구 파출소 경찰들이 24시간 교대로 나를 감시하면서 자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사부님께서 가지해 주시기를 빌면서 발정념을 하였다. 대법의 자료실이 더 파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동수들의 안전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의 진상을 알게 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라도, 층집에서 뛰어내려서라도 나는 여기에서 빠져 나갈 것이다. 그 샤오위라는 자를 폭로하여 그가 더 나쁜 일을 못하게 할 것이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라고 강요하면서 경찰 셰한성(谢寒生 남 30살 좌우)은 주먹으로 마구 쥐어박았다. 손으로 때리다가 지치자 발로 찼고 나중에는 칼자루로 나의 손등을 마구 때렸고 나중엔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아 나의 신발을 벗기더니 신바닥으로 혹독하게 때리는 것이었다. 그는 때리면서 욕하였다. "말 할 거야, 말거야? 말 할래 안 할래? 말 안하면 죽여 버릴 거다. 때려 죽여도 자살이라 할 수 있어. 직접 화장해 버리면 넌 끝장이야. 너... 너 ...도대체 말 할 거야 말거야? " 내가 의연히 말을 안 하자 계속 악담을 퍼부었고 우리 사부님을 공격하였다. 나의 온몸은 퍼렇게 멍이 들었고 화장실도 겨우 벽을 짚고 다녀야 했고 허리도 펼 수 없었다.
그때 사부님께서 『정념으로 사악을 제지하자』는 경문을 발표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대법제자가 사악의 이런 박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사부님께 가지해 달라고 빌면서 발정념으로 셰한성 뒤에 있는 사악을 제거한 후 모든 아픔을 그의 몸으로 전환 시켰다. 정념의 작용 하에 그도 아픔을 느꼈는지 자꾸 방법을 바꾸더니 반나절 안에 폭행을 멈추었다. 나중엔 나를 보면 피했고 경찰이 그더러 들어와 과일을 먹으라고 하자 과일을 들고 밖에 나가면서 나를 감히 정시하지도 못했다.
사부님이 『추풍량』에서 “사악한 무리들아 난폭함을 멈추거라, 천지가 다시 밝아오면 끓는 물에 떨어지리라. 주먹과 발로 인심을 흔들기 어렵거늘, 광풍이 불어오니 가을은 더욱 차갑구나.” 라고 하신 법을 생각하자 나는 악도들은 필연코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반죽음이 되다
그날 내가 또 달거리가 생겨 나이 젊은 여경 차이츙(蔡琼)에게 생리대를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경찰이 집을 수색할 때 가져간 3,000위안에서 계산하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차이츙이 생리대를 사온 후 나더러 이름과 주소, 집에 있는 모든 자료의 출처와 배포경로를 말한 다음에야 쓸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단호하게 협조하지 않자 그녀는 나에게 생리대를 건네주지 않았다. 나의 바지 몇 개가 모두 피투성이 되어 사람들 보기가 민망스럽게 되어도 시종 입을 다물고 있자 비로소 할 수없이 생리대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경찰은 장시간 나를 의자에 묶어 놓고 잠을 못 자게 하였다. 눈만 감으면 경찰은 무정하게 냉수를 퍼부었다. 실습경찰 뚱보(루저우 사람, 泸洲人)가 새로운 도구(사람을 때리는 전문 도구임. 딱딱한 비닐로 만들었는데 두 치 가량 넓고 한 자 가량 길다.)로 심하게 때리면서 연기를 콧구멍에 쏘이고 술을 얼굴에 퍼부었다. 나는 술이 눈에 들어가 눈물을 흘렸다. 뚱보 경찰은 루저우에 돌아가기 전 다른 경찰에게 "그녀가 타협하기만 하면 당장 나에게 전화를 해주오. 이 기쁜 소식을 기다릴 것이요. 그녀가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봅시다 "하고 말했다.
경찰 단쉐쥔(旦学军)이 당직 설 때면 나는 여전히 경찰에게 진상을 얘기하였다. 그는 "우리가 당신을 자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당신의 의지를 꺾으려는 것이요."하고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나를 암만 그렇게 하여도 그건 헛수고이고 아무런 작용도 못 일으킬 것이요." 하고 말했다. 그는 실습경찰 앤루(彦露)와 궈칭(國慶) 두 사람을 시켜 갖은 수단으로 나를 구타하였다. 단식, 단수 5일 만에 나는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며칠동안 나의 머리 속에는 가끔 경문 <<정념 정행>>이 떠오를 뿐이었다. “대각자는 고달픔을 두려워하지 않거늘,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어졌네. 생사의 집착이 없거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구나." 많은 시간은 경찰들에게 진상을 말하느라 머리를 쉴 새가 없었다. 혼미 상태에서 나는 실내의 모든 가구가 우리 집의 가구와 똑 같아 보였고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이렇게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모진 마음을 먹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때 그들은 미친 듯이 번갈아 나를 흔들면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마구 때렸고 냉수를 머리에 쏟아 부었다(때는 12월이었음). 나는 경찰 단쉐쥔이 명령하는 소리를 들었다. "흔들어, 계속 흔들어, 힘껏 흔들어. 냉수 한 대야를 가져와. 또 가져 와. 계속 퍼오란 말이야. 힘껏 해봐. 깨어나나 안나나 보자." 계속하여 그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고 물을 나의 몸과 머리에 퍼 붓는 소리를 들었으며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내 몸을 때리는 짝짝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들이 헐떡이는 소리도 들었다. 그 뒤로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얼마나 지났는지 나는 추위를 느끼며 깨어났다. 온몸은 흠뻑 젖어 있었고 손목은 붉은색 스웨터에서 빠진 물에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침에 교대하러 온 여경찰은 이 광경을 보고 또 마구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저녁때가 되자 경찰 리커(李科. 발음 데로 적은 것임)가 형사 구류 통지서를 보내왔다. 나는 단호하게 이 일체를 부정하였다. 관리쯤 되어 보이는 경찰이 나에게 물었다. "중팡츙,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봐." 나는 단호하게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는 화가나 이를 갈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렇게 물어도 대답을 안 하더니 집에 가고 싶다고? 오늘 밤엔 내가 당직 설 차례인데 다시 한번 너를 혼내 줄 거야. 기다려봐." 나는 발정념을 하였다. 네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밤 꼭 나갈 것이다. 나중에 그 경찰은 당직 서러 오지 않았다.
나는 발정념으로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그냥 이렇게 박해를 받을 수 없습니다.층집에서 뛰어 내려서라도 나는 오늘 나가서 "동수"라는 샤오위를 폭로하여 다른 동수들이 모두 그를 알게 하여 더는 우리 대법 제자들 속에서 계속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장시간 견정히 발정념을 하자 오른쪽 수갑이 열렸고 조금 후에 왼쪽의 수갑도 열렸다. 나는 나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침 5시, 경찰들이 교대시간이 되자 실습 경찰 궈칭이 근무하게 되였다. 나는 계속 발정념을 하여 두 경찰이 깊이 잠들라고 하였다. 7시쯤 되자 그들은 끝내 잠들었다. 나는 지금 방문을 연다면 그들이 문소리에 놀라 깰 것이다. 하물며 나의 신이 방 저쪽 창문아래에 있음에랴. 나는 층집에서 뛰어 내려야 나갈 수 있는 희망이 크고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벽 모서리를 짚고 하리를 구부리고 방을 지나 신을 신고 창문턱에 올라서서 아무 주저심도 없이 몸을 던져 4층에서 뛰어내렸다. 혼미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이 "인중을 눌러."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은 후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오후 5시쯤 되어 깨어났는데 내가 승용차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차에는 경찰이 지키고 있었는데 아무런 구급 처치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층집에서 뛰어 내린 후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9시간 동안이나 내가 차에 누워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내가 죽은 후 몰래 화장해 버리려고 했단 말인가? 내가 살아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들은 할 수없이 오후 6시경에 나를 병원으로 실어 갔다.
병세가 너무 중하여 병원에서 접수하지 않자 그들은 나를 이환루(一環路) 시싼돤(西三段) 골상(骨傷)병원 입원처 11호에 보내 주었다. 나중에 실습경찰의 말에 의하면 둘러서서 구경하던 군중이 120에 전화를 걸었기에 그나마 병원에 실려 왔다고 말했다.
-백가지 고생이 한번에 들이 닥치다
골상 병원의 검사 결과는 골반 삼각구(三角區) 골절, 오른 다리 골절, 왼쪽 발 손상, 하반신 완전 마비상태였다. 병원의 양(楊) 주임은 "당신 복부에 이미 피가 가득하므로 수술을 해야 하오." 하고 말했다. 나는 "수술하지 않을래요. 나는 돈이 없어요."라고 했다. 양주임은 "당신이 감금되어 있는 기간에 사고가 발생했으므로 경찰이 이미 2만원을 지불했소."하고 알려 주었다. 나는 이 모든 돈이 인민들의 피땀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후에 수술 마취사가 "수술하면 위험하니 하지 마세요."하고 알려 주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줄곧 수술을 하지 않았다,
나는 병원에서 그들에게 진상을 얘기하는 외에는 언제나 발정념을 하였다. 법을 암기하는 시간도 적었다. 한사람이 나의 호실에 들어 올적마다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나 때문에 오므로) 나는 즉시 그한테 발정념을 하였다. 그들이 링거 병을 들고 들어오면 나는 이렇게 발정념하였다. ‘모든 약물이 나한테는 무효다. 대법제자는 단호히 승낙하지 않는다. 사부님 가지하여 주십시오. 모든 약물은 다시 뿜어나가 나를 박해하는 모든 악인, 악경과 사악한 낡은 세력들한테로 가라.’ 결국 약물이 나한테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했다.
한번은 그들이 다리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었는데 오히려 다리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상처가 화농하여 고름이 흘러나오는 바람에 다시는 약을 바르지 못했다. 지금도 나의 오른쪽 무릎 아래에 엄지손가락만큼 큰 허물이 나 있다. 또 한 번은 양주임이 "다른 병자는 이 약물 링거를 맞으면 모두 살이 찌는데 이 사람은 왜 아무 반응이 없지?"하고 놀래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이야기 하였다. 한번은 나를 감시하는 사람한테 텔레비전이나 매스컴이 보도한 파룬궁 기사는 모두 가짜이므로 쉽게 요언을 믿지 말라. 당신에게 해롭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단도직입적으로 나한테 "지금의 매스컴은 오직 년 월일만이 진짜일 뿐이요."하고 대답했다.
매일 광룽소구 파출소의 경찰들이 교대로 나를 감시하였고 24시간을 침대에 묶어 놓았다. 나에 대한 계속되는 박해에 저항하기 위해 나는 또 병원에서 단식, 단수를 24일간 하였다. 코로 음식을 투입하기 위해 위에 호스를 꽂아 놓아 아주 고통스러웠다. 후에 나는 발정념을 하였다. “사부님 가지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제자는 이런 박해를 단호히 감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념의 작용 하에 나를 지키고 있던 사람이 "당신의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 견딜 수가 없구먼."하고 말하였다. 의사와 간호사들도 냄새가 난다고 접근하기를 꺼렸다. 경찰은 하는 수없이 나더러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으라고 하여 호스를 뽑을 수 있었다. 나는 위에서 뽑아낸 호스가 이미 검은 색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때 간호사가 "당신은 식사를 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또 호스로 투입할 것이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발정념을 하였다. 네 말은 소용없다. 그는 내가 의연히 단식하자 의사를 불러와 계속 호스를 꽂아 나를 박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사는 오히려 "이 사람의 위가 이미 수축되어 있으므로 호스를 꽂으면 위험하오. 꽂지 마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때 나는 이미 몹시 여위여 뼈밖에 남지 않았고 사람 모양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본래 110근 정도 나가던 체중이 겨우 60여근밖에 남지 않았다. 전신(얼굴을 포함해)의 피부가 벗겨지고 있었고 입술은 갈라 터져 딱지가 일어났고 두 다리는 자줏빛이 나고 몹시 부어있어 바지를 입을 수없게 되었고 오랫동안 바로 누워 몸을 움직이지 못하여 두 발꿈치가 썩으면서 고름이 흘렀다. 근육이 위축되어 수혈할 때 혈관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손목 정맥혈관을 세 바늘 꿰맬 정도로 베었어도 혈관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중엔 새해 휴가를 낸 간호장을 병원으로 불러 한참 고생을 한 끝에 겨우 혈관 하나를 찾아 수혈한 뒤 다시는 침을 빼지 못하고 장장 24시간을 유지하였다.
광룽소구 파출소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진뉴(金牛)구 610에 통지하였다. 610은 몇 사람이 보고 확실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확인하고 나서 2003년 1월 10일 오전에 병원 구급차로 실고 온 다음 관룽소구 파출소의 경찰들이 들것에 담아 나를 집에 들여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 나의 하반신은 이미 벌써 완전 마비상태였고 자활능력이 없었다. 병원에서 도뇨관으로 소변을 보았고 단식하여 대변도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 온 후 음식을 조금씩 먹어도 대 소변을 배출할 수가 없었다. 배가 공처럼 부풀어 올라도 오줌을 눌 수가 없었고 그 고통을 참기가 너무 어려웠다. 10일, 보름이 지나도 대변을 보지 못해 배가 아파 작은 공기로 밥을 먹어도 몇 번씩 쉬어가며 먹어야 했다. 집식구들은 내가 아파하는 모양과 이마에 솟은 땀을 보면서 모두 나 몰래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오랫동안 한 가지 자세로 반듯이 누워 있었으므로 나의 등은 말할 수 없이 아팠고 두 발꿈치도 그냥 고름이 흐르면서 좀처럼 낫지를 않았다....
(다음에 계속)
문장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발표: 2004년 7월 22일
문장갱신: 2004년 7월 24일
문장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22/79564.html
논-픽션: <질풍경초 (疾風勁草)> (8)
글/중팡충(鐘芳琼)
명혜망 2004년 7월 23일】(앞글에서 이어짐)
제 3 장 신이 창조한 기적
나는 매일 침대에 누워 70세 노모(老母)와 11살 되는 아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매일 법공부와 발 정념을 견지하였고, 노(老), 소(小)의 보살핌으로 기적은 또 다시 나의 몸에서 나타났다. 1개월이 지나 앉을 수 있었고, 2개월 후 일어나 연공할 수 있었으며, 3개월째는 걸을 수 있었다.
2003년 9월 초, 나는 과일과 해바라기, 사탕을 사 들고, 자전거를 타고 정형외과(骨伤)병원으로 가서 예전에 내게 관심을 기울여 주었던 의사, 간호사들을 방문하였다. 정형외과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주치의 양성원(杨生文)을 만나 그에게 인사를 했으나 그는 이미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내가 바로 당신이 다리를 이어준 그 파룬궁 입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바로 당신입니까? 다리를 자르지 않았는데 다 낳았습니까? 어떻게 낳았지요?” 하며 놀라워했다. “파룬궁을 수련했습니다, 저는 오늘 당신들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시간을 내어왔습니다. 함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는 흔쾌히 나를 2층 의사사무실에 데려가 들어가면서 말했다. “봐라. 누가 왔는가?” 그러나 의사와 간호사 중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나는 자신을 소개했다. “제가 바로 오래 전 골반골절에、다리가 부러졌던 11번 병실의 파룬궁 중팡츙입니다. 오늘은 병원에 있을 때 저를 보살펴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리고자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멍해있었다.
양주임은 놀라서 “다리가 낳았습니까? 당신이 한번 걸어 보세요.”라고 했다.
내가 사무실을 두 번 왕복하여 걸었더니 그는 내가 정상인 것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당신은 어느 병원에서 치료했기에 효과가 이렇게 좋습니까? “
나는 말하였다. “치료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간 후, 줄곧 집에서 파룬궁 법공부하고 연공을 하여 3개월이 지나 걸을 수 있었습니다.”
양주임은 말하였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당신이 이 정도로 회복할 수 있다면 이것은 기적입니다. 내가 오늘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지 못할 것입니다.”
간호사 류민이 이어서 말하였다. “그녀의 골반은 당시 삼각부위 분쇄성(粉碎性) 골절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회복하는건 그야말로 불가사의합니다. 파룬궁이 이렇게 좋다면 집에서 계속 연마하십시오. “
나는 대답하였다. “그렇지요! 파룬궁을 이해하고 파룬궁을 접촉했던 사람들은 모두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수련합니다. 그러나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자 장쩌민은 질투심이 생겨 파룬궁을 X교로 내몰고 심지어 파룬궁 수련하는 사람들을 반혁명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저는 오른쪽 하지가 선천성 광범위해면상부종형 혈관종양(先天性大面積海綿狀腫脹型血管瘤)에 걸렸었는데 몇 년을 치료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고, 수술할 때 혈관 한 가닥을 잘라내기까지 했지만 완쾌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뇌신경을 다쳐 뇌빈혈(腦缺血) 후유증까지 얻었습니다. 심할 때는 길을 걸을 때 비틀비틀 거렸고, 일시적인 실명까지 생겼습니다. 또한 얼굴에는 여러 해 동안 넓은 부위에 심한 황갈색 반점이 나타나 6년 동안 수 만 위안을 들여 미용을 하였지만 치료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파룬궁을 일주일간 연마한 후 얼굴의 점들이 전부 없어졌고 2달 후에는 왼쪽 다리의 혈관종양과 뇌빈혈이 저절로 나았습니다. 나는 집에서 부지런히 장사를 하면서 노인을 보살피고, 아들을 돌봤으며, 속인들이 마작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여유시간에 법 공부하고, 연공하였는데 공안경찰에게 불법으로 감옥에 감금되어 속인이 상상할 수 없는 혹형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나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최근에 나는 또 기차역에서 화물을 운반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붙잡혔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해 보세요. 나의 70 노모와 11살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당신들과 같이 진상을 모르고 방송과 뉴스의 거짓에 속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문에 나는 한명의 대법제자로서 대법 중의 한 입자로서 모든 것을 바친다 해도, 심지어 생명까지 바치면서라도 나는 전력을 다하여 세인들에게 우리가 박해 받은 진상을 알릴 것이며, 대법의 초상적(超常的)임과 아름다움을 당신들에게 알려 주어 더욱 많은 세인들로 하여금 우리들이 박해 받은 진상을 이해하도록 하고, 아름다운 미래가 있게 할 것입니다.”
류민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넘어져 상하여도 밥을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무쇠라면 밥은 강철이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신체야말로 본전입니다. 당신은 너무 어리석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생명의 진귀함을 알고 매우 소중히 여기는데, 대법제자들은 더욱 자신의 생명을 아낍니다. 우리들도 생명을 사랑하며, 또 가족들과 천륜(天倫)을 함께 누리기 바라지만, 쩐, 싼, 런(眞, 善, 忍)의 광명한 법리는 생명으로 지켜야 할 소중한 것입니다. 국민 동포들의 정의와 양심도 진귀한 가치가 있고, 이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근본이며, 대법제자들은 사악을 폭로하는 것을 통하여 진상을 알리고 민중들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만약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해 각성할 수 있다면 이미 생명을 바친 대법제자 그들의 피는 헛되지 않으며, 내가 오늘 받은 무수한 고통도 헛되지 않습니다.”
류민은 말하였다. “당신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찍 우리들에게 말하였더라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었지요.” 양주임이 말하였다. “종일 24시간 내내 경찰이 감시하는데 그녀가 무슨 기회가 있어 우리들에게 이것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간호사 류민은 이어서 물었다. “그럼 천안문 분신사건은 진짜입니까, 아니면 가짜입니까? 좀 말해 보세요.”
나는 당신들에게 설명하겠습니다. 《전법륜》제7강의에는, “살생 이 문제는 아주 민감한바, 연공인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의 요구도 비교적 엄격하기에 연공인은 살생을 하지 못한다.”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자살하면 죄가 더욱 큽니다. 우리 연공인은 닭, 물고기를 먹어도 모두 죽은 것을 사는데, 가서 분신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당신들 의사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화상환자들은 모두 살을 내놓아야 하는데, 텔레비전에서 보았다시피 그렇게 꽁꽁 싸매서 뭘 하려는 것입니까? 화상 환자들의 방에서 격리복을 입지 않고 자유롭게 인터뷰할 수 있습니까? 12살의 류쓰잉은 기관지 절개수술을 하고 4시간 후 말을 하였는데 목소리가 그렇게 또렷할 수가 있겠습니까? 류보룽 할머니는 그렇게 많은 휘발유를 마시고 불을 붙이기 전에 후회하고는, 곧 기자의 취재를 받았는데, 그래도 아무런 증상이 없다는 말인가요? 도대체 마신 것이 사이다인가, 아니면 휘발유인가? 또 속인들의 입장에서 분석해 본다면, 왕진둥은 사람이 다 검게 타버렸는데도 사타구니에 끼고 있던 페트병만은 여전히 타지 않는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는가? 경찰은 1분 내에 소화기를 4개나 들고 왔는데, 천안문 경찰들은 소화기를 들고 순찰하는지요? 무엇 때문에 소화 담요를 뒤덮어 즉각 불을 끄지 않고 기다렸다가 왕진둥이 "파룬궁" 구호를 외친 다음에서야 소화 담요를 덮었습니까?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연기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들은 자세히 생각해 보았습니까? 또 연공인의 동작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한번만 봐도 가짜인 것을 압니다. 텔레비전에는 더욱 많은 누락이 있어서, 당신이 비디오테이프를 슬로우 모션으로 분석한다면 모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천안문 분신 사건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당신 자신이 한번 분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들은 후 말하였다: “오늘 직접 눈으로 당신 파룬궁을 보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모두 신문과 뉴스의 파룬궁이 진짜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진상을 알게 되어서 무척 기뻤다.
2004년 3월 이후부터 내가 박해 받은 일부 경력이 폭로되면서, 청화구 정치법제위원회 서기 하오우웬(郝武元)은 구 정치법제위원회의 사람과 티오떵허(跳䠬河)파출소의 경찰을 데리고 내 동생 가게에 두 번이나 가서 일을 방해하였으며, 또 위선적으로 말하였다. "너의 둘째 누나를 집으로 옮겨와 있게 해라. 우리들은 그녀를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남몰래 나의 고향에 가서 나의 행방을 조사하였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현재까지도 핍박에 의해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고 있다. 나의 불쌍한 어머니는, 사방으로 숨어 다니는 딸과 간신히 한번 만났지만 몇 분 후 빨리 떠나야 했으며, 나의 불쌍한 아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잃고, 장(江)씨 집단의 야만적인 탄압 하에서, 또 한 번 어머니와 헤어져야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믿는다. 먹장구름은 영원히 하늘을 가리지 못할 것이다. 장(江)씨 건달 집단이 세상을 속이는 거짓말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며, 우리들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후기: 나는 당신에게 말하련다.
선량한 사람들이여! 나의 이야기를 본 후,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좋으면 집에서 수련하면 되지 문장까지 쓸 필요가 있나?”
사부께서는 <이성> 중에서 “착함을 타격하는 것은 틀림없이 사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것들이 수련생과 대법을 파괴하고 해치는데 채용한 행위는 모두 극히 사악한 것이고, 면목 없는 너절한 것이라, 노출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반드시 그것들의 사악함을 세인들더러 알게끔 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세인들을 구도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마음을 비우고 한번 생각하기 바란다. 당신은 내가 직접 겪은 경력과 당신이 예전에 TV에서 이해한 파룬궁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대법이 내 몸에서 일으킨 여러 가지 기적은 나를 개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득을 얻게 하였다. 현재 대법은 전 세계 60여 개 국가에 전해졌으며, 1,200여 개의 포상을 받았고(2004년 5월까지 통계한 것임), 파룬궁(法輪功) 창시자의 저작은 30여종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발행되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마음을 닦고 신체를 건강히 하는 신기한 효과는 세계인으로부터 보편적인 인정을 받았는데 유일하게 중국 대륙에서 장(江)씨 집단에 의해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5년 동안 민간에서 전하는 소식이 실증하기를, 적어도 968명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 받아 치사하였다.(2004년 5월까지의 통계임) 2001년 10월 말,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통계한 바는 당시 붙잡힌 파룬궁 수련생 중에 박해 받아 죽은 사람 수는 1,600여명에 달하였고, 불법 판결을 받은 사람이 적어도 6,000명 되며, 불법적인 노동 교화를 받고 있는 사람의 수가 10만 명이 넘었다. 이외에도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은 세뇌반에 납치되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았으며, 세뇌반과 노교소(勞敎所)에서 여성들을 강간하고, 임산부를 강제로 유산시키는 등 성적 박해를 엄중하게 자행하였다. 그들은 또 수 천 명의 대법제자들을 정신병원 혹은 노교소에 보내어 중추신경을 파괴하는 약물을 주사하였다. 무수한 대법제자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고 있다.
당신은 파룬궁을 똑똑히 이해하기 바란다. 그들은 나와 같이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다. 왜 그들이 박해를 받아야 하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겪고, 감수하고 실증한 “파룬따파는 좋다(法輪大法好).” 라는 이 한마디 진실한 말을 했다고 하여 이처럼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때문에 당신들은 절대로 장(江)씨 집단에게 함부로 이용당하여 대법 수련생들을 박해하지 말 것이며, 또 잘 이해하지 못하고서 맹목적으로 대법이 나쁘고, 대법제자들이 나쁘다고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한다. 대법제자들은 가장 선량한 단체이다, 세계는 쩐, 싼, 런(眞, 善, 忍)이 필요하며, 전 세계가 “파룬따파는 좋다! (法輪大法好)”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인연이 있는 당신들이여! 소중한 당신들이여! 꼭 대법을 선하게 대하고,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시라! 이는 바로 당신 자신을 선하게 대하는 것이다. 아시는가? 오늘날 대법을 박해한 사악의 우두머리가 이미 미국, 벨기에, 독일, 스페인, 한국, 캐나다 등 여러 국가에서 법정에 기소되었고, “전 세계 장쩌민 공개심판” 대 연맹은 이미 성립되었다. 파룬궁과 대법제자를 박해한 모든 사악들은 머지않아 그 모두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 앉게 될 것이다.
당신이 파룬궁을 하루 속히 이해하기를 희망하고, 대법과 대법제자들을 선하게 대하고, 하루 속히 당신을 바른 위치에 올려놓기를 희망하며,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이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기원한다.
부기: 아래는 박해에 동참한 회사와 개인 전화번호이다.
(주: 악인은 “&”; 진상을 알아야 하는 사람은 “#”)
청두(成都)지역번호: 028
티오떵허(跳蹬河)파출소: 84126643
티오떵허지역 류잉팡(刘应芳): 13666190200 (#)
호적(户籍) 경찰 쑨융(孙勇): 13881936443 (#)
꽝룽(光荣) 쇼취(小區) 파출소: 87656434
리(李)소장: 89845906 13708055906 (#)
경찰 장쯔(张智): 88012728 (#)
부소장: 88151930 (#)
완낸창(万年场)파출소: 84457853
호적경찰 웨이다핑(魏大平): 88035031 (&)
사무실 주임 리챵쥔: (인터넷에서 검색하기 바랍니다) (&)
잰양(簡陽)시 지역번호: 0832
윈룽쩐(云龙镇)파출소: 7761165
쩡융챵(郑永强) 소장: 7761116 13088305006 (&)
리칭린(李庆林) 지도원: 13183949385 (#)
쒸창허(徐长和) 경찰: 7761128 (자택) (#)
청화구 정치법제위원회서기 하오우왠(郝武元) 사무실: 84372800 자택: 84307297 (&)
청화구 공안분국(公安分局): 83261024, 86406411
(끝)
문장 완성: 2004년 7월 16일
문장 발표: 2004년 7월 23일
문장 갱신: 2004년 7월 24일
문장 분류: [인심과 인과]
원문 위치: http://www.minghui.ca/mh/articles/2004/7/23/795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