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대하여..
지수화
삶의 본질의 상당부분은 고통이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행복을 바라는 한은 우리의 삶은 불행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이쪽에서 보면 앞이요 반대편에서 보면 뒤지만, 결국은 하나의 대상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있다. 때문에 누구나 불행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이라는 동전은 ‘타인과의 비교’라는 은행으로부터 발행이 된다.
우리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해 있다. 나 아닌 다른 대상들은 잘 보나 오직 자신만은 보지 못하는 게 우리의 눈이다. 스스로가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밖을 보며 다른 대상들 또는 타자와 비교를 한다. 그 비교에서 낫고 못함, 만족과 불만족 그리고 행복과 불행이 나온다. 그 비교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을 보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이 불행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눈을 감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고통이란 무엇일까? 고통을 느끼게 하는 인식의 대상으로는 육체와 정신이 있다. 육체에 가해진 힘에의 저항이 고통이고, 정신에 가해진 힘에의 저항이 또한 고통이다. 고통은 그렇게 ‘외부 힘’에의 저항을 통해 ‘어떤 느낌’으로 나에게 전해진다. 결국 육체에 가해진 힘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을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주관적인 ‘마음’일 것이다. 육체에 가해진 힘이 동일하다고 해도 사람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고통의 정도는 다르며, 만약 그 외부의 힘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통이 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는 인식주체는 외부의 힘에 저항을 할지말지를 결정하는 그 마음이며, 그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이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음의 주체는 지금 여기 있는 ‘나’다. 결국 그 고통을, 그리고 그것을 느끼고 있는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여기 있는 ‘나’를 이해한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그 ‘나’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으며, 따라서 고통에 대해 이해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 같다.
고통의 가장 중심, 근본에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지(無知)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스스로가 자신을 알지 못하기에 남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알고자 한다. 누군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기분 좋아하고 누군가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불쾌해 한다. 그것이 곧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말하는 좋은 사람도 아니요, 누군가가 말하는 나쁜 사람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나일뿐, 누군가가 말하는 그 나가 아니다. 다만 ‘나’를 스스로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환경 속에서, 타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며,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키려 한다. 그 외부 환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은 바로 그곳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무지로부터.
인디언들은 14세(13세 같기도 하다.)가 되면 홀로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며칠이고 자신에 대해 돌아보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라본다. 어느 날,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깨닫게 되면 산을 내려온다. 그리고 그 인디언 아이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추장으로써, 누군가는 치료사로써, 누군가는 사냥꾼으로써, 누군가는 인디언 전사로써, 또는 평범한 인디언으로써 각자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추장 또는 치료사라고 해서 지위가 높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자질을 갖추었을 뿐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아니다. 다를 뿐이기에 그저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추장이 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치료사가 되고자 하는 것도 없다. 모두는 각자의 삶의 몫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것은 그 부족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쓰이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서로 존중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다면 남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가 감당해야 할 몫에 대해서 자랑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너’가 아니기에 ‘나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 길 위에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이분법적인 개념의 갈림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사회의 우리들은 다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불행해지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포함된 전제는 지금은 아직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는 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끊임없이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욕망의 중심에는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가 숨어 있으며, 성공과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을 부정하고 있는 보다 높은 기준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 끊임없는 욕망을 예쁘게 포장해 놓은 것이 더 나은 다음 순간의 행복이다. 그리고 고통은 바로 이 행복으로부터 온다. 각자가 바라는 행복에 이르지 못했을 때에 불행이라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행복을 바라는 한 행복에 이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바라는 순간이란 항상 아직 오지 않은, 또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명사회의 우리가 빠트린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타인을 통해, 사회적 위치(지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려야 하고 또 불안해해야 한다. 바깥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에 대한 평가도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버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아니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고통을 선택하는 고행자들 또는 금욕주의자들도 궁극적으로는 다함이 없는, 최고의 행복(至福)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안다면 그런 사람은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매 순간이 그렇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至福)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는 생각조차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듯, 물고기가 물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헤엄치는 것이 아니듯, 그 속에 있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전제 되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을 때 누군가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으며,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서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만큼의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나’로써 나의 삶의 몫을 감당하며 나의 삶을 살아갈 뿐이니 더 행복해질 것도 말 것도 없다. 그저 ‘나’로써 살아갈 뿐이다. 있는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행복에 대해서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감정적인 어떤 흥분,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며, 나아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행복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대상으로서의 행복은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행복의 그림자인 불행을 만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 지복(至福)에 이르는 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신에 대한 앎을 통해 자연스럽게 행복이라는 공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곧, 행복은 행복이라는 의식을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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