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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원시보
[세상만사] ‘솔로몬의 영화’
김정돈 | boogangdon@hanmail.net


[대기원시보] ‘솔로몬의 영화(榮華)’란 고대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 솔로몬이 누린 부귀영화를 말한다. 그는 지혜가 뛰어나 그 지혜를 ‘솔로몬의 지혜’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현자와 시인으로 칭송되기도 했는데, 구약 성경 잠언(箴言)에는 그가 쓴 것으로 여기는 격언과 교훈이 실려 있다. 솔로몬이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평안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솔로몬이 어머니 ‘밧세바’와 선지자 ‘나단’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자 그의 빼어난 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며 이스라엘은 전례 없는 번영과 풍요를 누렸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이는 성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다.



만년에 솔로몬은 독재를 일삼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 하느님을 예전처럼 잘 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응징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 화근이 자손에게 미쳐 솔로몬이 세상을 떠난 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나누어지면서 쇠망의 길을 걸었다. 이 또한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일깨운다.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영광을 흠모했는데, 이러한 ‘솔로몬의 지혜’ 역시 신이 준 영광이다. 그런데 만약 이를 믿고 인간이 교만해져 신의 뜻을 거스르면 신은 사람에게 준 영예를 다시 거두어들이고 새 시대를 연다. 바로 신의 손에서 벗어난 무신문화(無神文化)의 한계와 인간의 타락에 대한 신의 준엄한 꾸짖음으로 인간이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그리고 이는 또 만물이 성주괴멸 하는 이치이기도 하다.



인간은 현대과학의 물질만능주의에 이끌려 갈수록 신을 부정하지만, 오히려 인간은 신이 만들었다고 성경에서 말했다. 인류의 과학은 마치 토끼 그림에 뿔 그리듯이 세상을 기형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과학이 만든 요지경 속에 갇힌 인간은 환상에 사로잡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과 양심을 팽개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믿지 않고 과학을 신봉하는 것은 마치 들판에서 양을 쫓아버리고 늑대를 기르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이 바라는 행복의 지름길은 천인합일(天人合一)에 있다. 자연의 섭리는 억지나 거짓이 없이 언제나 조화롭다. 다만 인간 스스로가 변해 천지와 뒤틀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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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현장법사가 생사의 위기에서 자비를 나타내자
강도들 천벌 받아
 
 
[밍후이왕] ‘서유기’ 중에 당승(삼장법사사제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온 일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그러나 실제로 삼장법사의 모델인 현장(玄奘)법사는 혼자 고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왔다그는 고생을 두루 다 겪고 수만 리를 걸어 19년 만에 영예롭게 돌아왔다사서에는 당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현장법사를 맞이하는 성대한 장면을 도인과 속인이 모두 달려가 맞이해도시가 기울고 시장이 장사를 멈췄다고 기록했다그 후 현장법사는 19년간 불경을 번역한 후 공성원만 했다현재 시안(西安)의 대안탑(大雁塔)은 현장법사가 고대 인도의 불탑을 본떠 지은 것이다.

'西安大雁塔前的玄奘塑像'
시안의 대안탑과 현장법사 동상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은 그의 두 제자가 현장법사의 경험에 따라 적은 것으로 귀한 역사자료다그 중 한 단락 가장 험악한 생사의 위기가 있었다.
 
현장법사가 중인도 지역에 갔을 때 어느 날 그는 현지인 80여 명과 함께 배를 타고 갠지스 강을 따라 아야목거국으로 가는데 나무가 가려 강변에서 강도선 10여 척이 나타났다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어떤 사람은 놀라서 물에 뛰어들어 도망을 쳤다.
 
현장법사는 강도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자들을 거의 모두 교화시켰다그러나 이번 강도는 달랐는데 재물도 약탈하고 잘생긴 남자도 한 명 데려가 그들이 믿는 여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제사를 지내는 시기가 거의 이를 무렵이어서 걱정하던 강도들은 현장법사를 보자마자 이렇게 우람하고 잘생긴 승려로 제사를 지내게 되다니 정말 행운이다라고 말했다현장법사가 선행을 권해도 소용이 없었고 함께 탄 사람들이 애걸해도 소용이 없어 모두 잡혀 갔다.
  
강도들은 제단을 다 수리해 놓고 두 강도가 칼을 들고 현장법사를 제단으로 데리고 올라갔다현장법사는 가망이 없는 것을 보고 도적에게 앉아서 원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강도들은 현장법사의 도량과 냉정함에 놀라 스스로 물러갔다단 아래에서는 일행이 통곡하는 소리가 가득했다현장법사는 성심껏 경을 암송하며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나 미륵진경을 듣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와 그를 죽인 강도들을 구도하겠다고 소원을 빌었다.
 
생사의 난에서 불문각자(佛門覺者()자비의 경지를 증오하자 천지도 감동되었는지 천지가 강도들의 안색을 바꾸었다삽시간에 검은 바람이 사방에서 일고 모래가 날리고 돌이 뒹굴며 파도가 높이 일어 배가 뒤집히려 했다강도들은 놀라서 무릎을 꿇고 하늘에 절을 하며 사람들에게 이 승려가 누구인지무슨 신분인지 물었다어떤 사람이 이분이 바로 동토(東土당나라에서 경을 구하러 온 현장법사이십니다천신이 노하였습니다어서 빨리 참회를 하세요!”라고 말했다강도들은 얼른 현장법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이때 현장법사는 단정하게 앉아 입정에 들어 수미산(須彌山)의 3층천을 날아지나 불계의 장엄함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파도가 점차 멎고 강도가 올라가서 손으로 현장법사를 건드렸다현장법사는 출정(出定)하며 때가 됐습니까?”라고 물었다강도가 칼을 휘두르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강도들은 현장법사가 아직 좌화(坐化-앉은 채로 입적)하지 않았다고 환호하며 얼른 다가가서 잘못했다고 빌었다현장법사는 그들에게 불법을 알리며 일시적인 이익을 탐하여 끝없는 악과(惡果)를 심어 놓지 말라고 했다그리하여 강도들은 그 살인하는 사교를 버리고 오계(五戒)를 받고 정도(正道)에 귀의했다그 후 그들은 현장법사의 위덕과 구도 받은 기쁨을 사람들에게 알렸는데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의 풍운돌변은 우연의 일치인가어디에 그런 우연한 일치가 있겠는가그때 천지가 진노하고 광풍파도가 인 것은 사교 강도에 대한 경고였다강도들은 재물을 빼앗고 살인을 하여 이미 많은 죄업을 지었는데 수련하는 사람을 살해하면 더욱 큰 죄업을 짓게 된다그들이 일시적으로 방향을 잃었으나 본성이 소멸되지 않아 끝내 불법의 교화 아래 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역사는 하나의 거울이라 오늘 세상 사람들의 득실을 비추어 낸다현재 중국공산당은 15년간 진선인(眞善忍)’ 불법 수련자를 잔혹하게 박해해 수십만 명이 노동교양을 받고 3천여 명이 박해로 사망한 것이 확인됐다그와 동반하는 것은 중국의 기후이상가뭄과 홍수천재인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이것이 천벌이 아니란 말인가하늘의 경고가 아니란 말인가?
  
현장은 당시 경고했다일시적인 이익을 탐하여 끝없는 악과를 심지 말라밍후이왕에서 파룬궁수련생을 박해해 보응을 받은 실례를 대량 보도했고 많은 사람이 진상을 알고 악을 버리며 선을 행해 복을 얻은 사례도 있다선악에는 반드시 보응이 있거나 현세현보(現世現報)혹은 사후에 보응하는 이것은 역사의 규율이다사람마다 모두 이 규율에서 자신의 미래를 심어 놓게 될 뿐이다.
 
 

문장발표: 2013년 10월 31
문장분류천인지간>문사만담
원문위치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0/31/282031.html
대기원시보


시간들

안현미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시인 황동섭의 시 읽기



열일곱 걸음은 그보다 훨씬 먼 길입니까?
아비의 쌈지는 단단히 매어져 풀어지지 않았고 이제 난 얇은 지갑을 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애벌레의 애벌레가 애벌레를 먹듯이 나비의 몽유도원가는 길이 그렇습니까?
사람의 일은 끝없는 욕망과 분노를 쌓는 일이며 은총(恩寵)의 돌층계를 쌓는 일은 시간의 일입니다
내 가슴속에 관솔로 남아 불 댕기는 당신은 비 맞고 썩어 문드러진 고주밥이었거니 무덤덤한 침묵은 당신이 흥얼대던 음악입니까?
나를 연주하는 당신의 뜻대로 안개를 헤치고 에둘러 예까지 왔으니 잘 못 든 오솔길을 탓하지 마십시오
오늘 아침 고목에 앉아 울어 쌌던 뻐꾸기가 간곡히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의 곡비(哭婢)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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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원시보
고통에 대하여..

지수화

삶의 본질의 상당부분은 고통이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행복을 바라는 한은 우리의 삶은 불행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이쪽에서 보면 앞이요 반대편에서 보면 뒤지만, 결국은 하나의 대상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있다. 때문에 누구나 불행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이라는 동전은 ‘타인과의 비교’라는 은행으로부터 발행이 된다.

우리의 눈은 항상 밖을 향해 있다. 나 아닌 다른 대상들은 잘 보나 오직 자신만은 보지 못하는 게 우리의 눈이다. 스스로가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밖을 보며 다른 대상들 또는 타자와 비교를 한다. 그 비교에서 낫고 못함, 만족과 불만족 그리고 행복과 불행이 나온다. 그 비교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을 보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이 불행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눈을 감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고통이란 무엇일까? 고통을 느끼게 하는 인식의 대상으로는 육체와 정신이 있다. 육체에 가해진 힘에의 저항이 고통이고, 정신에 가해진 힘에의 저항이 또한 고통이다. 고통은 그렇게 ‘외부 힘’에의 저항을 통해 ‘어떤 느낌’으로 나에게 전해진다. 결국 육체에 가해진 힘이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을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주관적인 ‘마음’일 것이다. 육체에 가해진 힘이 동일하다고 해도 사람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고통의 정도는 다르며, 만약 그 외부의 힘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통이 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는 인식주체는 외부의 힘에 저항을 할지말지를 결정하는 그 마음이며, 그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이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음의 주체는 지금 여기 있는 ‘나’다. 결국 그 고통을, 그리고 그것을 느끼고 있는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여기 있는 ‘나’를 이해한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그 ‘나’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으며, 따라서 고통에 대해 이해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 같다.

고통의 가장 중심, 근본에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지(無知)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스스로가 자신을 알지 못하기에 남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알고자 한다. 누군가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기분 좋아하고 누군가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불쾌해 한다. 그것이 곧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말하는 좋은 사람도 아니요, 누군가가 말하는 나쁜 사람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나일뿐, 누군가가 말하는 그 나가 아니다. 다만 ‘나’를 스스로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환경 속에서, 타인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며,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키려 한다. 그 외부 환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은 바로 그곳으로부터 오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무지로부터.

인디언들은 14세(13세 같기도 하다.)가 되면 홀로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며칠이고 자신에 대해 돌아보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라본다. 어느 날, 자신에 대해 이해하고 깨닫게 되면 산을 내려온다. 그리고 그 인디언 아이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는 추장으로써, 누군가는 치료사로써, 누군가는 사냥꾼으로써, 누군가는 인디언 전사로써, 또는 평범한 인디언으로써 각자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디언 사회에서는 추장 또는 치료사라고 해서 지위가 높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자질을 갖추었을 뿐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아니다. 다를 뿐이기에 그저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추장이 되고자 하는 것도 없고 치료사가 되고자 하는 것도 없다. 모두는 각자의 삶의 몫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것은 그 부족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쓰이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서로 존중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다면 남을 부러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가 감당해야 할 몫에 대해서 자랑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너’가 아니기에 ‘나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 길 위에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이분법적인 개념의 갈림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사회의 우리들은 다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불행해지기 위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포함된 전제는 지금은 아직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는 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끊임없이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 욕망의 중심에는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가 숨어 있으며, 성공과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을 부정하고 있는 보다 높은 기준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 끊임없는 욕망을 예쁘게 포장해 놓은 것이 더 나은 다음 순간의 행복이다. 그리고 고통은 바로 이 행복으로부터 온다. 각자가 바라는 행복에 이르지 못했을 때에 불행이라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행복을 바라는 한 행복에 이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바라는 순간이란 항상 아직 오지 않은, 또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명사회의 우리가 빠트린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타인을 통해, 사회적 위치(지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려야 하고 또 불안해해야 한다. 바깥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에 대한 평가도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버려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아니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고통을 선택하는 고행자들 또는 금욕주의자들도 궁극적으로는 다함이 없는, 최고의 행복(至福)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안다면 그런 사람은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매 순간이 그렇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至福)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는 생각조차 없을 것이다. 우리가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듯, 물고기가 물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헤엄치는 것이 아니듯, 그 속에 있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전제 되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을 때 누군가의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으며,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서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만큼의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나’로써 나의 삶의 몫을 감당하며 나의 삶을 살아갈 뿐이니 더 행복해질 것도 말 것도 없다. 그저 ‘나’로써 살아갈 뿐이다. 있는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행복에 대해서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감정적인 어떤 흥분,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며, 나아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대상으로서의 행복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대상으로서의 행복은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행복의 그림자인 불행을 만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 지복(至福)에 이르는 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신에 대한 앎을 통해 자연스럽게 행복이라는 공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곧, 행복은 행복이라는 의식을 넘어서 있는 어떤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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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지성
화(禍)와 복(福)은 수시로 바뀐다

글/서옥림(徐玉琳)

[SOH] 루이스는 나의 오랜 환자로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기만 하면 한방치료부터 한다. 아울러 온 가족이 다 한의학을 신뢰하고 어디가 불편하기만 하면 일단 한약, 침, 뜸부터 생각한다. 오랫동안 이렇게 하자 나는 그녀의 생활과 각종 방면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녀는 식당을 운영하는데 하루 종일 장시간 일하는 관계로 아주 고생스럽다. 루이스는 아주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끊임없이 바쁘게 지낸다. 이렇게 한 결과 작은 집이 큰 집으로 바뀌고, 낡은 차가 새 차로 바뀌었으며, 조그마한 음식점이 큰 식당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줄곧 이런 아름다운 소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십수 년간 고생스런 날들을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형편이 좀 나아질 무렵이 되자 그녀의 나이는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고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풍파가 밀어닥쳐 소리소문 없이 잔혹한 현실이 되었다.
 
그녀는 췌장암에 걸렸는데 그것도 말기였다. 수술 후 의사는 그녀에게 당장 식당 문을 닫거나 팔라고 충고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만에 식당 확장을 위해 부지를 찾고 대출을 알아보던 사람이 갑자기 문을 닫고 영업을 중단하자, 부동산 중개인과 대출업자도 모두 정신이 멍해졌다.
  
그녀는 비참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왔다. 비록 남편이 그녀에 대한 연민 때문에 자신이 외도한 사실을 잠시 알리지 않으려 했지만 막 수술을 끝낸 그녀를 속일 순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남편의 외도는 설상가상이었다.
 
“선생님, 나는 지금 망망대해에 떠 있는 외롭고 초라한 배처럼 느껴져요. 당장이라도 이 생명을 끊고 싶지만 또 생각해보면 좀 부질없는 것 같아요. 원래 그리 길지 않을 거라면 왜 하필 촛불이 다 타버린 마지막 찰나에 다시 바람을 불어넣을까요? 병원에서는 항암치료를 받으라고 하는데 저는 마치 계속 벌을 받는 것처럼 느껴져요. 앞으로 남은 매 순간이 더 이상 편안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까지 듣고 나니 내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활짝 웃던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곤혹스런 표정으로 변한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루이스, 당신은 스스로 곧 세상을 떠날 거라고 믿나요?”
  
“아니요.”
 
“당신은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고 더는 질병에 맞서고 싶지 않은가요?”
  
“아니요.”
 
“봄날 산등성이에 활짝 핀 작은 꽃송이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 작은 꽃송이 역시 엄동설한의 고통을 겪어낸 후 피어난 것이랍니다. 산골짜기의 작은 시냇물을 본 적이 있나요? 그 시냇물도 얼음과 눈 속에서 조금씩 녹아내려 이뤄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곤경과 어려움에 처해 있고, 목숨이 위태로운 준엄한 고비에 처해 있어요.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당신에게 진정한 용기가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요? 사람의 가장 큰 성공은 식당을 크게 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중에서 자신과 싸워 이기고 곤란에 맞서 진정으로 자신이 사람이 된 의미를 깨닫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마치 자신에게 독백하듯이 가볍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선생님, 그럼 우리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대체 누가 통제하고 있을까요? 대체 누가 사람의 수명을 결정하는 걸까요?” 루이스의 어두웠던 안색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고 눈빛 속에 한 가닥 희망이 드러났다.
  
“글쎄요, 과연 누굴까요?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 아닌가요? 당신의 생생세세, 당신의 업력의 보응, 당신의 인과순환 등은 정말이지 당신 자신의 것이랍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말을 꺼냈다.
  
“….”
 
침묵 속에서 루이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금도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다시 새롭게 하기에는 이미 늦은 건 아닐까요? 이 병은 복(福)일까요, 아니면 화(禍)일까요? 어쩌면 제 생명은 이제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닐까요?” 그녀는 마치 과거의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떠나는 그녀의 그림자를 보면서 선인들의 말씀을 떠올렸다.
“화란 복이 의지하는 것이요, 복이란 화가 잠복된 것이다(禍兮福所倚,福兮禍所伏).”
사실 세상에 절대적인 화와 복이란 없으며 모두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다. 애석한 것은 사람은 종종 단지 눈앞의 작은 것만을 본다는 것이다.

[ 對중국 단파라디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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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중국
‘재상의 뱃속에서는 배도 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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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중국] 중국에서는 도량이 큰 인물을 빗대 ‘재상의 뱃속에서는 배도 저을 수 있다(宰相肚里能撑船)’는 말이 있다. 좋은 지도자는 정확한 지도력과 행동력, 그리고 큰 인내력과 너그러움을 겸비한 인물일 것이다. 이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덕목이다.

 

중국 송나라 시기, 세 명의 황제를 보필한 부필(富弼)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도량이 넓고 너그러웠다. 그는 ‘송사(宋史)’에 의하면 다음과 같았다.

 

“검소하고 예의 바르며, 타인에게 이야기할 때는 비록 상대가 자기보다 젊고 사회적 지위가 낮더라도 똑같이 상대를 존중하며 이야기했다. 그는 침착성이 있으며 공손하고 분별없이 화내지 않았다. 그의 천성은 선량하고 악을 싫어했다.”

 

부필은 타인에게 욕을 먹어도 욕설이 귀에 닿지 않았다. 마치 욕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인근에 있던 지인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욕하고 있습니다.” 부필은 말했다. “아마, 다른 사람을 욕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인은 다시 부필에게 말했다. “그 남자가 당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습니다.”

 

부필은 조용히 “이름이 같은 사람은 많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큰 소리로 욕하던 사람은 부필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 조용히 물러났다.

 

부필은 아들들에게도 항상 타일렀다. “관용은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정직하고 검소하며 친절하면 그 인물은 무엇이든 완수할 수 있다.”

 

한편 명나라 시대 원료범(袁了凡)은 분노에 대한 대처법을 남겼다. “만약 분노가 폭발하면 스스로 타일러라. 모든 사람에게는 결점이 있다. 다른 사람이 예의가 부족해도 왜 거기에 자신이 움직이는가? 분개하는 이유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디. 만약 타인의 태도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덕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자신을 바로잡아 그에게 모범을 보이면 좋다.”

 

“만약 타인이 자신을 욕하고 험담해도 화낼 필요는 없다. 넓은 하늘로 향해 타오르는 불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기 마련이다. 만약 비방 중상을 받았을 때 자신을 방어하려 하면, 그것은 마치 누에가 비단을 토해내 누에고치를 만들어 내듯 결국 자신을 껍질에 가두어 버리게 된다. 분노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단지 자기 자신에게 해만 끼칠 뿐이다.”



허민 sscn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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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 인권개선 `중국몽` 실현되길
2013-11-11 17:19:11 

중국 5세대 지도자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국몽(Chinese Dream)`을 주창한다.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에 대응해 미국을 견제하고 중국 국민 개개인의 꿈 실현과 이를 기반으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실제는 `중국몽`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 관리 횡포, 국가와 국민의 인명 경시 풍조, 표현의 자유 억압 등 중국 인권의 민얼굴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최근 행상을 하던 부부가 도시질서관리단(城官)에게 구타를 당해 남편이 즉사했다. 시신을 치워 증거를 인멸하려던 지방정부는 지역주민들에게 저지를 당했다. 딸은 범죄자들에 의해 성매매업소에 넘겨졌는데, 이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이던 탕후이 씨가 지방관리의 보복 조치로 노동교화소에 보내졌다. 그는 네티즌들 노력과 여론의 힘으로 결국 풀려났지만, 터무니없이 적은 보상금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1971년부터 2009년까지 3억건이 넘는 강제 낙태와 불임 시술이 시행되었다. 정부의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 때문이다. 자녀를 두 명 이상 낳으면 감당하기 벅찬 벌금을 내야 한다. 몰래 낳은 자녀는 교육ㆍ의료 혜택 사각지대에 놓인다. 최근에는 두 돌이 채 못 된 아이가 계획생육국 공무원 차에 고의로 치여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부모가 한 자녀 정책 위반 벌금 납부에 불응한 대가였다. 정부가 국민을 사람이 아닌 그저 숫자로만 보기에 가능한 처사다. 

장기 기증자가 많지 않은 중국에서 매년 1만건 이상 장기 이식 수술이 행해진다. 사형수와 파룬궁 수련생들이 가족 동의 없이 장기 밀매와 이식 수술을 위해 살해된다. 캐나다 인권변호사 데이비드 메이터스는 중국 병원에 생체장기은행 시스템이 있다고 증언했다. 산부인과 병원 의사가 신생아를 빼돌려 인신매매단에게 수차례 넘기기도 했다. 의사조차 생명을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민주화 인사를 반체제 인사로 분류하여 차별하는 것은 낯선 소식이 아니다. 이들 자녀는 교육권이 박탈당하고 가택연금을 당한다. 심각한 아동 인권침해다.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시진핑 정부는 가장 많은 인권활동가들을 구금하고 있다. 외국인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한국인 김학철 씨는 파룬궁과 관련된 실상을 알리려다 옥에 갇혀 갖은 폭행과 팔이 꺾이는 고문을 당했다. 

이 같은 실상은 국내외에 알려지지 않도록 엄격하게 통제된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권 문제는 중국 사회의 안정과 부흥을 위한 중대 과제다. 인권을 외면한 채 위대한 부흥을 꿈꾸는 것은 `중국의 꿈`이 아니라 `시진핑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오히려 `모두가 기회를 박탈당하는 나라`로 전락해 결국 `중국의 악몽(Chinese nightmare)`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시진핑 정부가 자국민 인권 보호를 증진하는 체계를 구축하여 진정한 `중국몽`을 실현하기를 바란다. 

한국은 `강 건너 불`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웃 국가로서 중국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발전 경험이 있는 한국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기대는 크다.

 중국과 교류가 활발한 만큼 한국은 중국 정부의 다양한 인권 침해 현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인권은 국가 주권의 영역인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다. 중국 국민이 인권을 인식하도록 돕고, 사람과 생명을 중시하는 문화를 확산시켜야 할 것이다. 

[서창록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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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지성

다중성격(多重性格)은 외래 영체(靈體)의 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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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서옥림(徐玉琳)

 

[SOH] 다중성격(多重性格)은 다중인격이라고도 하는데 한방과 양방에서 진단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한의학에서는 다중성격의 원인을 사람이 자신의 주의식(主意識)을 포기한 후 일종 외래 영체(靈體)의 교란을 받거나 통제되어 귀신들린 증상이 나타난다고 보는데 표현되는 것도 주의식이 뚜렷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환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마치 전혀 다른 여러 사람이 같은 육체를 점유하는 것과 같은 이런 질환은 임상에서 아주 드문 편이다.

 

아래 사례는 어떤 다중성격 인물에 관한 실화이다.


캐롤린(Carolyn)은 당뇨병 때문에 치료를 받았던 여자 환자이다. 처음 치료한 지 일주일 후 그녀의 당뇨병 증상은 사라졌지만 다시 왔을 때는 간염(肝炎)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이처럼 매 번 올 때마다 한 가지 큰 병을 앓았는데 매번 그 병에 상응하는 증상과 화학검사, CT 검사 결과와 의사의 진단서가 있었다.


그녀는 이처럼 복잡한 여러 병들이 동시에 얽혀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여러 가지 질병을 앓는 환자라면 응당 병이 고황(膏肓)에까지 깊이 들어가 고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나를 찾아올 때마다 도리어 유행을 타는 모던(Modern) 소녀처럼 나타났다.


더 재미있는 것은 매번 그녀가 나를 찾아올 때마다 복장이 모두 달랐다는 점이다. 아메리카 토착 인디안 복장부터 아프리카 식 긴치마, 18세기 불란서 귀족의 예복에서 일본의 기모노, 진(jeans) 차림에서 중국식 의상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변화무쌍함은 보는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표정이나 말투까지도 완전히 자신이 착용한 복장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치료해주었으나 늘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이곳은 진료실이지 무대나 공연장이 아니다. 대체 그녀는 어떻게 된 일일까? 그녀가 올 때마다 서로 다른 증상을 보이는데 이것은 그녀의 서로 다른 복장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한번은 내가 그녀의 가정에 대해 물어본 후에야 겨우 작은 실마리를 얻었고 이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음은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저는 다른 도시에서 이곳으로 이사 왔어요. 우리 집에는 삼남매가 있었는데 아버진 유명한 변호사였죠. 그분은 아주 열심히 일을 하셨고 건강에도 주의를 기울여 아주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이셨어요. 우리 가족은 아주 행복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져버렸어요.


어느 날, 아버님이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다가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당시 너무나 놀라 온 몸이 마비될 정도였지요. 하지만 더 놀라운 일은 뒤에 나타났어요. 아버지에 대한 추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아주 교양 있어 보이는 흑인 부인이 3명의 성인 자녀들을 데리고 추도회장에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혹시 시간과 장소를 착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장소를 잘못 찾으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와 다섯이 함께 찍은 사진을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에! 아버지에게 또 다른 가정이 있고 다른 부인과 그녀 소생의 3명의 자식이 있었을 줄이야!’ 그들은 20년을 함께 살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아득해졌습니다.

  

이때 어머니와 할머니가 들어오셨는데 어머니는 분명히 줄곧 속아왔고 이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다른 방으로 불러 추도회 시간을 변경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결국 우리 두 가족은 각기 시신의 한편에 서서 커다란 의문과 분노를 지닌 채, 이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떠나보냈습니다.


아버진 줄곧 분신술(分身術)을 써왔던 겁니다. 제 기억으로 아버진 줄곧 저희들과 함께 했습니다. 아버진 우리들의 생일 파티에 한 번도 빠지신 적이 없었고, 중요한 명절들은 일일이 챙기셨어요. 저는 단지 아버지가 늘 할머니 댁에 자주 가신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쪽 집 이복형제들 중 한 명으로부터도 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즉 아버진 항상 그들과 함께 있었으며 성탄절, 추수감사절, 생일 등에도 늘 같이 계셨다는 겁니다. 단지 그 역시 아버지가 늘 출장을 자주 간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아버지가 변호사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며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만 할머니만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추도회를 하기 전에 할머니는 그 쪽 집의 두 번째 아내를 찾아가 한마디 말씀만 하셨다고 합니다. ‘이제 연극은 끝났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원래 할머니 집은 아버지의 연극을 위한 탈바꿈장소로 분장실이자 탈의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아버지가 항상 할머니 댁에 간다고만 여겨 ‘효자’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여기까지 얘기하고는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저는 아버지가 그립고 또 그분을 원망하진 않아요. 아버진 분명 아주 고통스럽고 피곤하게 사셨을 거예요. 때문에 갑자기 심장이 마비될 때까지 진정한 휴식을 얻지 못하신 거죠. 제게 있어 그 분은 늘 좋은 아버지였어요.”


캐롤린이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나는 그녀에게 왜 스스로 여러 인물로 분장했는지 물어보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당신 아버지와 똑같지 않나요?”

 

 그녀는 잠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더니 “어떤 때는 나도 대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여러 병의 증상이 전부 나타났고 병에 대한 느낌도 진짜였으며 단지 매번 병이 오는 것이 기이하고 병이 낫는 속도가 빠를 뿐이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나서 나는 그녀의 병이 생긴 근본 원인이 주의식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았다. 정기(正氣)가 부족하면 반드시 사기(邪氣)가 침입하게 마련이다.

  

한의학에서는 인체에 13개의 귀신과 관련된 혈자리(鬼穴)가 있다고 보는데, 이들 혈자리는 인체가 외부 세계와 교류하는 연결통로가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귀궁(鬼宮)은 인중(人中), 귀신(鬼信)은 소상(少商), 귀심(鬼心)은 대릉(大陵)이며, 그 외에도 귀루(鬼壘), 귀로(鬼路), 귀침(鬼枕), 귀상(鬼床), 귀시(鬼市), 귀굴(鬼窟), 귀당(鬼堂), 귀장(鬼藏), 귀신(鬼臣)과 귀봉(鬼封)이 있다.


캐롤린이 더는 외래 영체의 침입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청룡좌전법(靑龍左傳法)과 백호우선법(白虎右旋法)1)을 사용하여 이 혈들을 닫아버렸다. 치료 후 그녀의 정신이 명료해지기 시작했으며 점차 정상상태를 회복했다. 갑자기 높아졌다 낮아지는 그녀의 목소리 톤도 변하기 시작해 정상이 되었으며 그녀의 다중성격 증상도 소실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체내에서 ‘귀기(鬼氣)’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를 통해 보다시피 인체는 사실 의복과 같아서 누가 입으면 그에게 통제당하기 마련이다. 귀혈(鬼穴)이 열렸을 때 만약 주의식이 강하지 못하면 다른 영체가 들어와 인체를 통제할 수 있다. 침 치료를 통해 귀혈을 닫았으므로 그녀는 더는 교란 받지 않게 되었고 이 때문에 다중성격 증상이 소실된 것이다.


이것을 시(詩)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百邪癲狂所爲病(백사전광소위병) 

온갖 사기로 인해 전광(癲狂)2)병이 된 것은


鍼有鬼穴無不應(침유귀혈무불응) 

귀혈에 침을 찌르면 응하지 않음이 없네


此是先師眞妙訣(차시선사진묘결) 

이는 선사께서 주신 진실하고 오묘한 비결이니


猖狂惡鬼無蹤影(창광악귀무종영) 

미친 듯 날뛰는 악귀들이 종적 없이 사라진다네

 

[ 對중국 단파라디오 ⓒ SOH 희망지성 국제방송 soundofhop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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