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원시보


시간들

안현미



침묵에 대하여 묻는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침묵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다


태백산으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갔던 여름이 있었지요
그때 앞서 걷던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당신만큼 나이가 들면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그 나이만큼 되어 시간은 내게 당신같은 사람이 되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어 말라죽은 나무 옆에서 말라죽어가는 나무를 쳐다보기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바람은 안개를 부려놓았고 열일곱 걸음을 걸어가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시간을 따라갔으나 나의 시간은 그곳에 당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 수수께끼 당신에 대하여 묻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대답인

당신을 침묵과 함께 놓아두고 죽은 시간


열일곱 걸음을 더 걸어와 다시 말라죽은 나무들을 보러 태백에 왔습니다
한때 간곡하게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은 인간의 일이었지만
그 사랑이 죽어서도 나무인 것은 시간들의 일이었습니다



시인 황동섭의 시 읽기



열일곱 걸음은 그보다 훨씬 먼 길입니까?
아비의 쌈지는 단단히 매어져 풀어지지 않았고 이제 난 얇은 지갑을 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애벌레의 애벌레가 애벌레를 먹듯이 나비의 몽유도원가는 길이 그렇습니까?
사람의 일은 끝없는 욕망과 분노를 쌓는 일이며 은총(恩寵)의 돌층계를 쌓는 일은 시간의 일입니다
내 가슴속에 관솔로 남아 불 댕기는 당신은 비 맞고 썩어 문드러진 고주밥이었거니 무덤덤한 침묵은 당신이 흥얼대던 음악입니까?
나를 연주하는 당신의 뜻대로 안개를 헤치고 에둘러 예까지 왔으니 잘 못 든 오솔길을 탓하지 마십시오
오늘 아침 고목에 앉아 울어 쌌던 뻐꾸기가 간곡히 나이기를 바랐던 사랑의 곡비(哭婢)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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