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박승류
전생이 소였던, 나란히 선 구두의 발목을 보면
우멍한 소의 눈을 보는 것 같다
눈을 끔뻑거리며 쟁기를 끌고 가던 지난날의 소가
환생을 해서 콧김을 뿜으며 현관에 누워 있다
아침이면 은근히 재촉하는 소를 따라
매일같이 생존이라는 봇짐을 지고 길을 나선다
그때마다 그는 나직나직 소를 달래며 걷는다
급하지 않아 급하지 않아 오늘은 모두 다 잘될 거야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소, 문득
여물통이 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밭머리에 서서 먼 산을 한참이나 올려다본다
골목골목 긴 밭이랑에 발자국을 찍어가며 다녀야 하는
계단식 논밭을 오르내리며 쟁기질을 해야 하는
새로운 자신의 일이 생소했던 그날, 처음의 밭이랑은
참으로 길었던 것이야, 눈을 감았다가 뜬다
사래 긴 밭으로 가서 오늘은 기어이
성공을 하고만 싶은 外販을 위해 그는
빼곡히 적힌 방문 예정 고객명부를 또 다시 펼쳐본다
밭을 갈 듯 다시, 소처럼 차곡차곡 걸어가던 그
파종을 하고 거두어들이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바뀐다
서걱이는 발걸음으로 밭이랑을 헤쳐 나가듯
그의 일생은 늘 소처럼 걷는 것이다
어두워지면 잠시 쉬었다가 아침에 또 들로 나가는
눈이 더 깊어진 소 한 마리
이어지는 무실적으로 깊게 패인 愁心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시인 황동섭의 시 읽기
투박해도 생활 속의 자신을 가감 없이 정직하게 표출된 시가 나는 좋다. 이런 면에서 박승류 시인의 ‘구두’는 팍팍한 현대를 살아가는 일상의 고독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여기 우멍한 소의 눈이 대문 옆 외양간에 있다. 동창이 밝았느뇨 노고지리 우지진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들로 나가는 소의 발걸음이 무겁다. 막막하다.
“급하지 않아 오늘은 모두 다 잘 될 거야”
다독이며 나선 골목골목의 긴 밭이랑이 참으로 길다. 빼곡한 고객 명부 중 하나를 찍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긴다. 이리저리 안부 끝에 꺼낸 한 마디에 확 달라지는 눈빛, 바라보기가 민망하다. 처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리! 소란 본래 멍에를 지는 팔자가 아닌가. 여물통을 채우는 일은 생존이다. 철판을 깔고 체면과 비굴을 팔자. 진종일 계단식 논밭을 오르내리며 쟁기질을 했다. 오기를 부렸으나 신통치가 않다.
“눈이 깊어진 소, 무실적으로 깊게 패인 수심”
아내가 있을 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선뜻 집으로 들어서지 못한다.
한참 집 앞을 서성이다가 마음 다잡아 들어서며 큰소리 친다.
“우리 애기, 잘 놀았어?”
구두 뒷굽을 접어 신는 고약한 버릇이 내겐 있다. 구두끈을 조이고, 그래도 헐렁하면 깔창을 넣어 신으시라. 발은 꼭 맞는 집을 원한다. 집이 편해야 만사가 형통이다. 나의 온갖 욕심과 부끄러움을 빤히 알고 있을 너덜거리는 나를 쉽게 버리지 못하니 아빠의 발과 구두를 아들아, 닦아 주렴. 애써 온화한 표정으로 견디는 가장이여, 외로움도 실은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 아닌가. 좀 못났으면 어떠랴, 좀 어리석으면 어떠랴.
유자효 시인은 ‘아름다운 세상’ 의 종결을 이렇게 읊었다.
“세상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으니 당신이 떠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 곳”
박승류·황동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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