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금궁(金弓)

당승(唐僧)이 겉으로 드러낸 가장 뚜렷한 마음은 두려운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를 두렵게 하는 요사(妖邪)는 더욱 그의 고기를 먹고 싶어 하고 그 본성을 어지럽게 만든다.

한번은 당승이 문득 높은 산 험한 길을 보고는 요괴가 있을까 두려워했다. 오공은 이곳은 서천(西天)에 이미 가까운 곳으로 부처님 계신 곳이 근방이라 절대 요괴가 없을 거라면서 안심시켰다. 하지만 당승은 저번에 다른 절의 승려가 천축까지 2천 리가 남았다고 했다면서 여전히 근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오공이 당승에게 아직도 ‘심경(心經)’을 외우고 있는지 묻는다. 당승은 당연히 잊지 않았고 늘 외우고 있다고 대답한다.

오공은 단지 외기만 했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층차 상의 법리는 언어로는 말해낼 수 없는 것이다. 경문(經文)을 능숙히 암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진정으로 현실 속에서 법리의 요구에 따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즉 “일마다 대조하여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事事對照 做到是修)”(홍음 ‘착실한 수련’ 중에서)

당승 사도 네 사람과 용마가 서방정토를 눈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겪은 난은 우리가 한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마(妖魔)가 길을 막는 것도 아니고 또 혼군(昏君)이 멸불(滅佛)한 것도 아니어서 겉으로 보면 하찮고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다.

도중에 선행을 베풀길 좋아하고 만 명의 승려에게 보시하려는 소원을 낸 구원외(寇員外)를 만난 것이다. 공교롭게도 당승 일행 4명을 더하면 만(萬)이란 숫자를 채우게 된 원외는 더욱 정성껏 일행을 접대한다. 게다가 팔계는 시종 음식을 탐하는 마음을 제거하지 못했고 원외가 만류하자 먹는데 정신이 팔려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면 다른 취경인들의 마음은 영산에 가있어 하루 속히 길을 나서려 했다.

결국 당승이 팔계를 꾸짖으며 길을 나서려 하자 원외는 성대하고 거창한 환송연을 베풀어준다. 결과적으로 이 일은 그 지역 강도들을 끌어들였고 한밤중에 구원외의 집을 약탈해 원외를 죽여 버린다. 원외의 처는 분노에 눈이 멀어 당승 일행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다.

이 억울한 옥사에 대해 오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는 본래 당승이 겪어야만 할 난(難)이었다. 만약 속인이 이런 난을 당했다면 진상을 모르는 사람은 분명 선악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천리(天理)를 의심하고 원외가 만 명의 승려를 대접했는데 도리어 불의의 해를 입어 죽었다고만 여길 것이다.

때문에 취경인이 이 난을 해결하자면 천하에 진상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사실 원외의 선행은 이미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속인은 사실 마땅히 미혹과 윤회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 만약 원외가 부처님을 공경하고 승려에게 보시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운명은 아마 사후 계속해서 업력윤보 중에서 전세(轉世)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선념과 선행은 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재난을 미리 도래하게 했고 앞당겨 좋은 곳으로 가게 했다. 지장보살은 그를 선연부(善緣簿)를 관장하는 책임자로 삼았다.

동시에 삼장에게 여전히 물건에 집착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금란가사를 너무 중히 여기는 것이다. 오공은 이 기회를 이용해 당승이 이런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했다. 또 관부에 이 물건을 보여주어 취경인들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도록 준비한 것이다. 결국 원외의 혼이 이승으로 돌아와 사건의 진상이 크게 드러났고 또 선악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천리를 입증했고 당승 일행은 다시 여정에 올랐다.

뒤이어 서천에서 접인불(接引佛)이 바닥이 없는 무저선(無底船)에 이들을 태워준다. 오공은 당승이 생사의 집착에서 벗어나 육신을 벗고 환골탈태하도록 도왔다. 여기서 금란가사에 대한 집착은 사람의 관념과 정으로 각자(覺者)를 대하는 것을 상징하고 자금(紫金)발우에 대한 집착은 속인 중의 군주에 대한 충성을 상징한다.

물론 속인에게는 당연히 이런 윤리 관념이 있어야 하지만 수련인이 되었다면 그것에 집착해선 안 된다. 진경(眞經)은 얻기 어려우니 사람들에게 그 진귀함을 알게 하고 물건에 대한 당승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당승은 글자가 없는 무자경을 만나는 난을 겪어야 했고 최후에야 비로소 진경을 얻는다.

본래 마땅히 원만해야 했지만 관음보살이 조사해보니 난(難) 하나가 부족했다. 이에 하나를 보충해 취경인들이 물에 빠지는 난을 겪게 한다. 경을 햇빛에 말리는 과정에 몇 페이지가 손상되자 당승이 이를 애석하게 여긴다. 이때 오공이 그를 일깨워준다.

“천지가 완전하지 않은데 이 경전이 완전했기 때문에 이제 바위에 붙어 찢어진 것입니다. 바로 불완전한 경전이 불완전한 것에 대응하는 오묘한 뜻이 깃든 일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즉 겉으로만 보면 보살과 여래가 마지막 한 난의 보충을 소홀히 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여전히 각자(覺者)의 장악 속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대법수련자라면 더욱 구우주(舊宇宙)의 흠결과 부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사존께서 항고에 있어본 적 없는 원용하고 여의한 법리를 세간에 가져오지 않으셨다면 구우주는 제아무리 노력을 다한다 해도 자신을 구할 방법이 없다.

이때 당승 일행의 심성은 이미 그들이 닦아야 할 최고 표준에 도달했고 다만 세간에 아직 다 처리하지 못한 일만이 남았다. 바로 진경을 중토 대당(大唐)에 가져가는 것이다. 팔계도 전처럼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하지 않았고 오공 역시 마음을 비우고 심성을 거두어 예의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경전을 전하는 일을 마친 후 이제는 귀위(歸位)할 때가 되었다. 각자의 심성 높이에 따라 각기 다른 과위를 얻었다. 당승은 전단공덕불에 봉해졌고 손오공은 투전승불이 되었으며 사승은 금신나한 용마는 팔부천룡, 팔계는 정단사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공이 전체 수련과정 중에서 심성과 오성이 가장 높았고 현장과 차이가 많았음에도 최종적으로 두 사람의 과위가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오공의 수련은 거의 미혹이란 문제가 존재하지 않고 무엇이든 다 일목요연했다. 반면 현장은 근기가 아주 좋고 내력이 상당했지만 미혹이 아주 심해서 사실상 고생을 크게 겪어야 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으며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오직 일편단심 자신을 수련했는데 이런 미혹 속에서 표현된 심성 역시 낮지 않았고 겪은 고생은 더욱 많았다. 때문에 원만한 후에 과위가 높은 것이다.

사오정은 근기와 오성에 한계가 있었지만 견정하게 수련했고 원망이나 후회가 없었으며 심성 수련 역시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나한의 정과를 얻게 된다.

용마는 내내 비록 가장 고생스러웠지만 심성상의 수련을 거의 겪지 않았고 마치 심산속의 사람이 오랫동안 고생을 겪으며 공을 자라게 하는 것과 같아서 수련이 늦고 과위도 높지 않아 최종적으로 삼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팔계는 심성을 닦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본성이 너무 미혹되었고 또 색심과 질투심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과를 얻지 못한 게 당연한 이치였다.

여기에 이르러 각자의 수련이 결속되었고 수많은 은혜와 원한의 연원도 다 평형되었다. 또 이 과정에 사람을 해치는 수많은 요정들을 제거했고 무도한 혼군들을 징벌했으며 선악에 보응이 있다는 천리를 분명히 드러냈으며 정교를 널리 알렸다. 장차 대승불교가 중원에 널리 전해지게 했으며 또한 박대정심(博大精深)한 수련문화가 중국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 대대손손 깊이 뿌리내리게 했으며 장래 대법이 널리 전해지기 위해 부처님을 믿고 하늘을 공경하는 문화기초를 다져주었다.

비록 중공악당의 피비린내 나는 수십 년 통치 아래 모든 역사와 윤리도덕이 다 왜곡되었고 서유기 역시 겁난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정법의 형세가 변화함에 따라 장래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역사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중에는 서유기 이야기에 대한 이해와 평가도 포함된다.

본인은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자이자 서유기 애호가로서 서유기의 수련이야기에 대해 개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간단한 주석을 달아보았다. 분명 층차에 한계가 있을 것이니 보다 박대한 내함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명시해주기 바란다.
(전문완결)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36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