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김선(金先)

본문에서 서술하는 것은 20세기 도가의 한 기공사에 관련된 사적(事跡)이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필자가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쓰는 주요 목적은 특정 기공사 자신이나 그의 공파를 선전하려는 것이 아니며 이 기공사의 사례를 통해 세 가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첫째, 공산당이 선전하는 유물론 무신론의 영향을 받아 전통 수련문화와 바른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반례 들고자 한다.

둘째, 이 기공사의 경험을 통해 일찍이 공산사당(共產邪黨)이 얼마나 진정한 수련인을 박해하고 또 그들의 명성을 이용한 통일전선으로 자신들을 미화하고 금칠을 했으며 또 계속해서 정신(正信)수련을 파괴했는가?

셋째, 이 기공사는 다른 정파(正派) 기공사처럼 그들이 세간에 나온 진정함 목적은 오늘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을 위해 길을 깔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가 본말을 뒤바꾸면 이 기공사의 진정한 사명을 위배하는 것이 된다.

1. 도가의 기인

이 기공사는 1984년 시해(尸解)로 세상을 떠났는데 인간세상에서 104세를 살았다. 풍우가 몰아친 청나라 말기와 전쟁으로 세상이 혼란했던 민국시기 및 붉은 마귀가 설치던 공산사악주의의 여러 차례 정치운동을 거쳤고 20세기 기공 열조 중에 기공을 위한 길을 까는데 열중했고 마지막에 자신의 사명을 완성한 후 제때 산으로 돌아가 나중에 대법이 전해지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했다.

그의 성이 이(李) 씨이므로 우리는 그를 간단히 이도장(李道長)이라 부르겠다.

1990년대 초 내가 아직 어릴 때, 고향에 가보면 현지 농촌의 많은 집 거실에 모두 이도장의 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수도인이었기 때문에 80이 넘은 노인들도 모두 그를 “도인 어르신”이라 불렀다.

이도장은 젊었을 때 글공부를 했으며 재능이 뛰어나지만 문약한 수재(秀才)였다. 하지만 약혼녀가 그곳의 비관(匪官 도적같은 관리)에게 해를 당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외지에 나가 무예를 배웠다. 돌아와서 원수를 직접 제거한 후 속세를 등지고 현문(玄門 도가 수련)으로 들어갔다. 전통 도가수련 중에서는 대부분 운유(雲遊)를 해야 하는데 이도장 역시 한때 천하를 주유했다. 그의 말로 하자면 “천강소자(天降小子)가 오주(五洲)를 돌아다녔다.”

동시에 도가에서는 많은 경우 내외겸수(內外兼修)를 하는데 운유 중에 그는 일신에 고강한 무예를 배웠을 뿐 아니라 수련에서 수많은 기적을 만났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화룡진인(火龍真人)의 진정한 전수를 받았다고 했다. 나중에 현지로 돌아와 또 도가의 정심한 의술로 많은 사람을 구제했으며 사람들에게 평화를 말하고 도덕을 엄격히 지키라고 가르쳤다. 여기서는 일부 사례를 들어 기이한 점을 설명한다.

1950년대 성유철도(成渝鐵路 성도에서 중경을 잇는 철도)를 건설할 때 현지에서 인부를 모집하자 이도장도 참가했다. 이도장의 이런 거동은 현지인들이 보기에 “사회를 위한 공헌”으로 여겨졌다. 사실 그의 목적은 그곳 백성들의 마음속에 수련인의 기이함을 남겨놓으려는 것이었다. 예컨대 당시 그가 등록할 때 나이가 이미 70이 되어 온 머리와 수염이 이미 허옇게 되었다. 그래서 젊은 담당자들은 그를 뽑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그들과 팔씨름을 제의했고 결과 70킬로그램이 넘는 일꾼들이 그의 손에 매달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으나 이도장의 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다 신기하다고 전했다.

밤에 잠을 잘 때 그는 늘 흙을 나르는 광주리를 매우 높이 쌓아놓고 그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심지어 어떤 때는 가부좌 중에 머리카락까지 다 곤두섰다.(도사들은 모두 장발을 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어떻게 하느냐고 다 경탄해마지 않았다. 그는 이런 각종의 기이한 일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수련하는 사람은 비범한 능력이 있다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도장이 당시 사람들에게 남겨 준 인상은 늘 도포를 입었는데 겨울에도 옷을 더 껴입지 않고 여름에도 옷을 줄이지 않고 늘 같은 옷을 입었으며 엄동설한에도 난로를 때지 않았고 삼복더위에도 부채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또 잠을 잔 적이 없으며 밤이면 침상에 혼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가뭄이 심했던 해에는 측백나무 열매로 허기를 때웠다. 어떤 사람은 그가 물속에서 오랫동안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미 익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물 위로 올라왔다.

이 도장의 숙명통 공능 역시 아주 강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때 그 촌에 매우 가난한 목공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을 찾아와서 돈 2위안을 빌리러 왔다. 하지만 그가 나중에 갚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여 아무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이도장은 이 목공은 “재물신”이므로 나중에 돈을 빌릴 일이 있으면 그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나중이 이 목공은 노점상으로 약을 팔아 돈을 벌었으며 나중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형 제약회사 이사장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이도장이 한때 한 사람을 데리고 순간 이동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한 사람을 데리고 성도에 가서 연극을 보았는데 그 사람에게 반드시 눈을 감으라고 하며 절대 떠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옷자락을 단단히 잡으라고 했다.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자 그는 그 자리에서 서 있었는데 눈을 감자마자 귀에서 휙휙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이도장이 됐다고 해서 눈을 떠보니 이미 성도의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돌아올 때 그 사람이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들어 이도장이 그를 데리고 가는 중에 눈을 떠서 어찌된 일인지 보고 싶었다. 그는 귀에서 바람 소리가 울리는 것이 들릴 때 갑자기 눈을 떴다. 그러자 그는 단번에 공중에서 떨어져 내렸으며 그곳과 성도 중간에 떨어져 내렸다. 그래서 그는 구걸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도장은 한때 운남(雲南)에서 운유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어느 군벌이 하늘에서 내린 큰 가뭄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어려움을 느끼자 특별히 이도장을 찾아가 비를 내려줄 수 있는지 부탁했다. 이도장은 그 군벌의 마음씨가 선량한 것을 알고 정말 그 지역에 한바탕 비를 내려주었다. 비를 내리게 한 도중에 이도장은 텔레비전의 그런 도사처럼 무슨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군벌에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권한 후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자 그 군벌이 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또 많은 기이한 일이 있는데 여기서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이도장은 1984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이도장은 그의 동문들을 불러 후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문을 닫고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늘 실내에서 주먹으로 벽을 치며 매우 상심한 듯 말했다. “조얼(造孽), 조얼......”이라고 했다. “조얼”은 그 지역 사투리로 ‘가련하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이도장이 당시나 이후에 일부 슬픈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그의 중생에 대한 연민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10월 23일 날 그는 한수의 시를 읊었다. 그리고 가부좌하여 두 눈을 감더니 조용히 떠나갔다.

철도와 기선이 오대주를 다니고
천강소자가 오주를 노닌다.
유불도 역시 동화해 열리고
노나라 말(魯語) 주나라 풍습이 도처를 구한다.

鐵路輪船遍五洲
天降小子五洲遊
儒佛道也同化開
魯語周風遍地救

사람들이 곧 이도장의 시신을 장례 지냈다. 그러나 이어서 매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상여가 나가는 날 관이 갈수록 무거워졌는데 나중에 누가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온통 벽돌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외지인이 돌아와 말하기를 외지 어느 어느 곳에서 이도장을 보았다고 했다. 사실 이것은 바로 도가에서 세상을 떠날 때 늘 사용하는 방법으로 ‘시해’라고 한다. 진정한 수도인은 결코 죽지 않으며 지물화물(指物化物)하여 그의 형상을 만들어 내어 그곳에 앉아서 보통 사람처럼 죽는다. 하지만 진정한 그는 자기의 역사 사명을 완성하고 진작 떠나갔다.

2. 엄격한 심성 요구

이도장은 수십 년간 정심어린 길을 닦았기 때문에 현지에서 명성이 아주 컸다. 그러나 종래 자기의 공능이나 명성으로 돈을 벌거나 무슨 세력 단체를 이끌거나 세운 적이 없었다. 그는 늘 혼자였으며 허름한 작은 집에 살았다. 실내는 극히 간단하고 누추했으며 그저 화로 하나에 탁자 하나였다. 탁자에는 밥공기와 수저 몇 벌이 놓여 있었고 침상이 있었는데 침상은 바로 나무판자 한 장뿐이었으며 이불이나 요도 깔려 있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눕지 않았고 가부좌로 잠을 대신 했기 때문이었다. 그 외 다른 것은 없었다. 그는 이렇게 그곳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만일 실내에 다른 것이 있다면 아마 일부 약초였을 것이다. 그는 사람에게 병을 고쳐주며 기본적인 생활 물자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도장은 비록 공능이 아주 강했지만 그곳 사람들은 그가 직접 공능을 사용하여 병 고쳐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가 유일하게 공능으로 병을 고쳐준 한 가지 일은 매우 오래전인데 이도장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기 전 안질을 앓았다. 그가 집에 돌아가 공능으로 모친의 안질을 고쳤다. 이후 그가 공능으로 병치료하는 것을 본 사례는 거의 없다.

그가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모두 의술을 사용했다. 또 그의 의술은 극히 뛰어나 무슨 난치병이든지 그는 늘 최소한의 약과 가장 평범하고 저렴한 약으로 고쳐주었다. 또한 그가 약을 쓰는 것은 격식에 구애받지 않아서 천지간에 어떤 것이든 그의 손에 오기만 하면 약이 되었으며 결코 약초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병을 고쳐주고 돈을 받지 않았으며 대부분 자기 생활에 쓸 약간의 쌀이나 밀가루만 받았다. 병을 고치러 온 사람이 병이 아무리 엄중하더라도, 아무리 먼 곳에서 온 사람이라도 치료한 후에는 모두 돈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 병원에서 환자를 볼 때 돈을 벌려고 하는 풍조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돈을 벌려고 마음만 먹으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태 이런 것으로 명리를 구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속세에 빠져 사오한 사람, “조용히 돈을 버는” 정치 스님, 정치 도사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이다.

3. 공산당에게 난을 당하다

공산당의 본질은 하나의 마(魔)다. 그것은 단지 세인을 박해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수도인에 대해서는 더욱 뼈에 사무치게 미워한다. 이도장은 1958년 공산당의 잔혹한 박해를 여러 차례 받았다. 그는 차례로 공산당에 의해 “일관도(一貫道)”, “역사반혁명”, “살인범”, “현행 관제분자(管制分子)”, “봉건미신두목” 등의 혐의로 모함을 받았다. 여러 번 지독하게 얻어맞았고 머리카락이 깎이고 수염이 뽑혔으며 이빨이 맞아 부서졌고 팔도 부러졌다. 한번은 그가 어느 지주의 고아를 동정(그 집 식구는 모두 박해로 죽었다)해 약간의 밀가루를 보내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심한 구타를 당했다.

또 한번은 현지 공산당 간부에 의해 커다란 보리수나무에 매달려 강철 끌로 심하게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당 간부는 그가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던져놓고 상관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자기의 모친이 다른 사람에게 시달림을 받아 누워 이미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이도장을 한 대씩 때린 것이 모두 자기 모친의 몸으로 이전된 것 같았다. 이것은 공산당이 수련인을 박해할 때 현세보응에 대한 경고였다.

내가 어릴 때 고향에 돌아가면 이도장이 매달려 얻어맞았다던 그 나무가 아직 있었다. 그 아래 찻집이 하나 생겼는데 이름이 바로 보리수 찻집(黃桷茶園)이었다. 현지 사람들은 이 나무를 언급하기만 하면 곧 그때의 이야기를 안다.

또 한번은 공사(公社)의 사당 간부가 이도장을 잡아 단상에 올리고 “투쟁”하라고 시켰다. 죄명은 “사술을 이용해 사람을 속였다”는 것이었다. 이도장은 사당 간부에게 물었다. 그는 단지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을 뿐이고 돈도 받지 않았는데 어찌 사술이란 말이오? 하물며 당신같은 공산당원도 세간에 사술이 존재한다고 믿소?

그러자 당간부가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많은 사람의 병을 치료해주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당신을 찾아와 병을 보니 분명 당신은 사술이 있소! 당신이 사술이 없으면 어찌 그리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소?”

이도장이 그래서 말했다.

“사술이 만약 병을 고칠 수 있다면 국가에서 왜 더 많은 사술 병원을 열어서 군중들의 병을 치료해주지 않는 것이오?” 당간부는 곧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즉시 이 도장을 주먹과 발을 이용하여 죽도록 때렸다.

이 사건으로부터 공산사당이 수련인을 박해할 때 얼마나 시비가 전도되고 이지를 상실하는지 볼 수 있다. 심지어 무료로 환자를 치료해주는 착한 일을 하는 것조차 ‘사술’이란 명목을 덮어 씌워 박해를 가했으니 그 행위가 이미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나중에 1999년 공산사당이 진선인(真·善·忍)을 신봉해 좋은 사람이 되려는 파룬궁 수련자들을 박해한 것과 아주 유사하다. 시대는 변해도 사당의 사악함은 시종 변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여전히 악마 그대로다.

또 한 번은 이도장이 공사의 사당 간부에게 심하게 얻어맞아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가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그를 그의 처소에 들여놓고는 문을 잠그고 가버렸다. 며칠 후 사람들은 이 나이 많은 노인이 분명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이도장의 집 앞을 지나갈 때 보니 그는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었고 심지어 몸에 상처조차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더니 이도장이 말했다. “내게 숨이 남아 있기만 하면 스스로를 고칠 수 있네.”

4. 인연 있는 이들이 대법수련에 들어올 길을 깔다

이도장은 스스로 제자를 거의 거두지 않았고 설사 몇 명 제자에게 가르쳐준 것도 모두 일부 의약(醫藥)분야의 것이었다. 필자가 알기에 이는 도가 문파의 특징일 뿐 아니라 이도장에게는 더 깊은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진정으로 수련할 수 있는 대법을 얻는데 장애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부친이 젊었을 때 이도장의 “도인 어르신”이란 큰 명성을 듣고 선도(仙道) 수련 등의 일에 대해 몹시 동경하셨다. 어느 날 그는 일백여 리의 길을 걸어 도장이 사는 곳으로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려 했다. 그러나 이도장은 다만 자기 일만 하면서 그를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친은 그곳에 멋쩍게 서 있다가 그냥 돌아와야 했다.

한번은 부친이 또 이도장이 있는 곳을 찾아가자 그가 의자를 가져와 부친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부친은 즉시 매우 놀라면서 기뻐했다. 왜냐하면 그는 거의 어떤 경우에도 직접 의자를 옮겨 권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유명하거나 부자라도 마찬가지였다. 앉은 후 이도장은 부친 앞에 서서 몸을 굽혀 두 손으로 의자를 만지며 마치 어린이처럼 기뻐했고 때로는 어린이처럼 머리를 숙이고 웃으며 말했다. “응, 정말 그렇군!” 부친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나중에 이도장은 향을 한줌 가져와 피우려 했다. 부친은 이도장은 ‘이미 득도한 사람인데 아직도 향을 올리는가. 그럼 이 도장 위에 더 높은 선도(仙道)가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친이 즉시 일어나서 역시 향을 한줌 집어 이도장처럼 더 높은 선도에게 향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이 도장은 부친 수중의 향을 빼앗으며 말했다. “당신은 향을 올리면 안됩니다.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부친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설마 자신이 도인 어르신 위의 그런 선도보다 더 높단 말인가? 이 문제를 부친은 당시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이도장이 또 부친에게 한마디 했다. “당신은 이후에 나보다 나을 겁니다.” 부친은 그 말을 듣고 또 영문을 알 수 없어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부친은 이도장이 이미 도를 이룬 신선이라고 생각했으며 세간의 부귀와 권세도 다 그와 비할 수 없는데 이후에 그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하니 무슨 뜻일까? 당시 부친 생각에 아마 이도장은 부친이 근기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도장에게 선도를 연마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이도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부친은 운이 좋아 대법을 수련하게 되었다. 이도장이 그때 그에게 한 말과 행동을 생각하고는 마침내 알았다. 현재 수련인이 더욱 중대한 사명이 있고 더욱 높은 과위를 성취하려는 것이구나. 그래서 설사 이도장이라도 감히 이런 인연이 있는 사람을 가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오늘의 수련을 교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도장이 의자를 옮겨와서 앉게 하고 향을 올리지 못하게 하며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은 이후에 나보다 나을 겁니다” 등의 말을 한 것은 모두 일종의 격려이자 암시였다. 부친이 이후에 더 높은 대법을 수련할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

한번은 모친이 이도장 집이 있는 길을 지나다 한 중년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닭 한 마리를 들고 있었는데 역시 이도장의 집으로 간다고 했다. 그 부녀는 우리 모친에게 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도장의 성질이 기괴하여 걸핏하면 사람을 욕하니 먼저 물건을 좀 주어 야단을 미리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친은 “나는 아무 생각하지 않고 빈손으로 왔는데 이미 다 왔으니 먼저 가서 이야기하세요.” 그러자 간 후에 이도장은 직접 의자를 가져와서 모친에게 앉으라 하였으며 닭을 들고 온 그 중년부인은 전혀 거들떠보지 않았다. 게다가 또 욕을 하면서 그녀를 몹시 난처하게 만들었다.

모친은 앉아 기다렸는데 이 도장은 직접 몇 마디 했다. 뜻밖에 이 간단한 말은 모친에게 일생 매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첫마디는 “가난을 미워하지 말게.”였다. 당시 모친은 부친과 결혼하려 했지만 집이 너무 가난한데다 형제들 중에서도 부친이 가장 불쌍했다. 이런 사람은 당시 이치에 따르면 결혼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도장은 모친에게 “가난을 미워하지 말게”라고 일깨워 주었다. 나중에 모친은 부친과 결혼한 후 확실히 매우 간고한 세월을 지냈다. 하지만 어쨌든 지나왔으며 또 운 좋게 두 분 다 파룬따파 수련 속으로 들어왔다.

이 도장이 모친에게 해준 두 번째 말은 “자네는 가서 지과등(地瓜藤-고구마와 유사한 덩쿨식물)을 팔아보게. 치료하는 사람마다 다 나을 걸세.” 지과등은 그곳에 보편적으로 자라는 식물인데 약으로 썼다. 모친은 본래 시골 사람으로 의술을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도인 어르신’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대담하게 지과등을 사서 팔았다. 첫날 일 위안을 팔았는데 나중에 믿음이 생겨서 점점 의사 노릇을 하게 되었고 하는 과정에서 정말 한 사람씩 고치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약이 없어 마음대로 집어 사용해도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부친의 약은 아무리 정확해도 약효가 없었다. 우리 집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 집 5식구(삼남매를 포함)는 태어나서 공부하기까지 기본적으로 의술로 돈을 번 것이다. 우리 집은 언니 한 명 외에 모두 수련한다. 특히 1999년 이후 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고 부모님이 박해를 받아 유리실소했다. 나와 오빠는 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돈이 필요했다. 부모님은 떠돌이 생활을 하시는 중에도 매일 시골에 가서 좌판을 펼치고 병을 고쳐 돈을 벌었으며 우리 가족이 생활하고 학교를 다니는데 충분했다.

이도장의 세 번째 말은 “만일 사람의 손발이 탈구되면 두어 번 잡아당기면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아이를 받아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영험하지 않게 된다.”였다. 모친은 그전에 접골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이도장이 이 말을 한 후 그녀는 탈구된 사람에게 접골을 시도했고 정말 쉽게 붙었다. 아울러 나중에 후유증도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 놀다가 팔이 세 번 빠진 적이 있었는데 모친이 다 붙여 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모친이 외숙모의 아이를 받아준 후 다시는 이렇게 해도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수련한 후에 나는 깨달았다. 당시 이도장은 사실 말로 모친에게 의술을 전수해준 것이다. (진정한 도인의 전수는 매우 간단하여 속인처럼 이렇게 몇십 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한마디 말만 전해준다) 그 후 모친이 아이를 받은 후 이 능력을 잃은 것은 필연임을 알았다. 왜냐하면 이런 전수는 일종의 정보인데 그녀는 대법을 수련해야 했기에 더 이상 이전의 정보가 교란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이런 정보는 미리 제거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우리 가족이 수련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릴 때 환경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우리 가족은 불도(佛道) 양가를 믿었으며 세상에는 선도(仙道)와 신불(神佛)이 있고 사람은 마땅히 신불을 숭배해야 하며 인과응보가 존재함을 믿었다. 때로는 늘 불도 양가의 일부 신기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비록 학교, 신문, 텔레비전에서는 늘 소위 “봉건미신을 반대한다” 또는 과학을 믿어야 한다고 방송했고 신불을 믿는 사람은 매우 우매하다는 이런 선전환경 하에 있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신불과 수련에 바른 믿음이 있었고 이런 환경 하에서 파룬따파 수련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도장은 다른 정전(正傳) 기공사들과 마찬가지로 아마 많은 사람들을 도와 중공 사당의 무신론, 유물론 등이 유행하는 환경에서 진정한 대법 수련으로 걸어 들어오도록 했을 것이다.

5. 중공 사당에 이용당하다

현지에서 이도장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공산당은 ‘통일전선’을 위해 이도장에 대해 많은 왜곡을 가했고 그를 이용하는데 힘을 쏟았다.

첫째는 자기의 죄악을 덮는 것이었다. 이도장은 세상에 있을 때 사당 간부의 지독한 몰매와 박해를 받은 적이 있고 그것들이 씌운 악독한 누명을 썼다. 하지만 문화혁명이 끝난 후 중공 사당은 이도장이 당시 박해당한 정황을 묘사할 때 일부 소수의 극히 개별적인 간부의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중공 사당의 일관된 거짓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중공의 박해에는 지시, 명령, 조직, 지도사상이 있으며 또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전국적이고 보편적 운동임을 다 알고 있다. 그것은 일부 사람에게 죄를 미루는 수법으로 그것의 정체적인 ‘위광정(偉光正: 위대하고 광명하며 정확함)’ 형상을 유지하려 했다.

이 역시 중공사당은 전혀 그것의 박해가 잘못임을 인식하지 못한 것을 설명하며 세인들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고 아래 사람이 스스로 주장하여 범한 잘못임을 극력 알리려고 했다. 이 역시 파룬궁을 박해하는 사당 기층의 구성원들에게 중공 사당이 돈을 잠시 주어 천리를 해치는 죄악을 범하게 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 사당은 원래 이용이 끝나면 당신들을 버리고 수시로 당신들을 잡아 방패로 삼는데 이는 그것의 일관된 특성이다.

둘째는 이도장의 명성을 이용해 자기의 추한 모습을 감추고 분칠한 것이다. 중공 사당은 전국의 종교 신앙을 자기 수중에 통제하기 위해 이른바 “애국애교” 한다는 “삼자교회-중공이 인가한 교회-역자 주”를 만들어 나라를 사랑하고 공산당을 사랑한다고 선전하며 공산당 두목을 지지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때 중공 사당 당국은 전문적으로 사람들을 조직해 민중의 소문을 채집하고 이도장의 당시의 일부 언행을 수집하여 모아 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책속에는 많은 엉터리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이도장이 모 주석을 위해 효도복을 입고 사람들에게 모 주석을 사랑하고 옹호하라고 가르쳤으며 공산당이 제국주의를 몰아내었으며 우리는 제국주의가 난리를 피우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또 등소평의 정책이 좋고 등소평이 제대로 판단했으며 등소평 동지의 건강과 장수를 위해 기도했다는 등이었다.

이런 언론은 완전히 모순됨은 말할 것이 없고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가령 이런 말 자체만 보아도 사당 간부의 극에 이른 세뇌선전처럼 징그러운데 선풍도골의 느낌이 어디에 있는가?

중공사당의 깡패 근성으로 볼 때 이렇게 시비를 전도하고 세상을 속이는 말은 책을 쓴 사람의 정치 임무이며 중공 사당이 “거짓으로 폭력에 기름칠을 한다”는 사악한 수단이다. 자고이래로 중국의 수도자는 모두 마음을 세상 밖에 두고 세간의 부귀권력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설사 몸이 겁난을 당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하물며 수련에 성취한 이도장이 어찌 그런 ‘주선율(主旋律)’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중공 사당이 ‘구시기’에 폭력으로 불도의 정신(正信)을 박해한 후 또 ‘신시기’의 부패와 거짓으로 정치 승려, 정치 도사를 개조해 공산당을 따라 빌붙고 아부하게 하기 위함이다.

필자는 여기서 또 다른 일이 하나 생각나는데 중국 근현대 국학대사(國學大師) 중에 오복(吳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동서양 학문에 모두 통달하여 청화대학에 국학원 설립을 주도했고 명성이 높은 “국학 사대금강(四大金剛 역주: 양계초, 왕국유, 진인각, 조원임 등 민국초기 저명한 국학대사 4인을 지칭)”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모셔왔다.

문화혁명 중 오복 역시 마찬가지로 재직하던 학교에서 공산당의 박해를 받았고 심지어 얻어맞아 다리가 부러졌다. 하지만 나중에 오복이 있던 학교의 모 공산당 간부는 염치도 없이 많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오복은 근본적으로 공산당에 찬동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오복이 그때 중공에 의해 심하게 구타당한 까닭은 그가 공산당 이론에 찬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산당 이론을 찬성한 그런 자들은 모두 오복을 박해해서 때린 하수인과 한패들이었다.

셋째는 이도장을 계속 이용해 민중을 우롱했다. 주지하다시피 중공 사당의 CCTV에 민중을 우롱하고 전 국민을 모욕하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바로 ‘과학에 가까이 간다(走近科學)’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이름으로 민간에서 발견한 초상적이거나 신기한 일을 전부 견강부회(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함)하며 무단으로 자연현상이라고 해석한다. 매 편마다 늘 소위 전문가나 원사(院士 과학원 회원) 등을 한 무리 초청해 강단에 세웠는데 나중에는 방송이 중지되었다.

누리꾼들이 늘 ‘과학에 가까이 간다’ 프로그램의 내용으로 유물주의를 뒤집는 우스갯소리로 삼자 ‘과학에 가까이 간다’ 프로 및 ‘전문가’ ‘원사’ 이런 이름들이 현재 중국에서는 이미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이런 비열한 선전 수단은 이도장을 서술하는 책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이 책에는 여전히 이도장이 당시 나타낸 신기한 일과 초상적인 일을 무지막지하게 자연현상이라 해석하거나 혹은 당사자의 환각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어느 한 가지 사건은 그 책에서도 인정했는데 이도장이 미래의 일을 점친 것이다.

이도장이 어느 날 전신에 효도복을 입고 주위 민중에게도 입으라고 하며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곧 소식이 전해져 왔는데 바로 모 주석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들려온 것이었다. 중공 사당은 초상적인 공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데 공산당 수괴를 선전하기 위해서는 초상적인 공능의 존재를 짜깁기해서 만들어 내었다. 이 책을 쓴 사람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착각과 분열이 있겠는가?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필자는 ‘9평 공산당’ 속의 하나의 이치가 생각난다. 절대 공산당이 잘못을 바로 잡을 것이라는 환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수련인에 대해서든 아니든 공산당은 이런 속임수를 이미 여러 차례 해왔다. 공산당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할 때는 아마 그것에 대한 총알받이들의 희생이 진행되고 있을 때이며 동시에 다음 차례의 우롱하는 운동을 시작할 때일 것이다. 먼저 잘못을 바로잡아 당신이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도록 만들고 그 후에 책임을 극소수의 ‘속죄양들’에게 덮어씌우며 그 후 잘못을 은폐하고 계속 분칠을 하면서 최후에 또 계속해서 속이고 우롱할 것이다. 공산당의 사악한 본성은 고칠 수 없으니 오로지 해체할 뿐이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8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