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10. 금전비승(金殿飛升)

민간에서 장삼풍의 성망이 널리 퍼지고 신기한 신선의 자취가 알려지자 백성들은 가가호호(家家戶戶) 그를 살아있는 신선으로 여기게 되었고 천자마저 진동시켰다.

《장삼풍전집》의 기록에 따르면 명 태조 때부터 장삼풍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홍무(洪武) 17년 갑자년 여름 황제가 옛 원나라의 은퇴한 137세 노인이자 무당산 은사 장삼풍을 부르는 조칙을 내렸지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홍무 18년 봄 장삼풍의 제자 심만삼과 구원정을 통해 다시 무당산 은사 장삼풍을 불렀지만 역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홍무 24년 여름 정일사교도합무위천조광범대진인(正一嗣教道合無爲闡祖光範大真人)이자 당시 도교 업무를 총괄하던 장우초(張宇初)가 무당산 은사 장삼풍을 불렀지만 그는 시종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락(永樂) 연간에 시독(侍讀) 호광(胡廣)이 장삼풍이 도법(道法)에 조예가 깊다는 상주문을 올리면서 그가 지은 《첩요편(捷要篇)》을 황제에게 바쳤다. 비록 그 내용이 오묘하고 심오해서 측량할 수는 없었지만 현기(玄機)를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 호영(胡濴)은 일찍이 장삼풍과 안면이 있었다. 이에 영락제는 장삼풍의 높은 기상과 고상한 절개를 흠모해 호영에게 명을 내려 천하를 두루 다니며 은사 장삼풍을 찾아보게 했다.

호영이 5년이 넘도록 도성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영락제는 장삼풍을 보고 싶은 마음을 늘 잊지 않았다. 영락제는 속으로 삼풍의 운거(雲車 역주: 신선이 타고 다니는 구름 수레로 여기서는 장삼풍의 자취를 의미)는 정해진 곳이 없지만 언젠가는 무당산에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이에 장삼풍의 제자 손벽운(孫碧雲) 등을 무당산으로 보내 그를 기다리게 하고 또 친서를 내려 뵙기를 청했다.

영락제는 편지에서 “오랫동안 진선(眞仙)을 앙모해 왔으며 친히 의범(儀範)을 받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서 “만물을 초월해 자연과 합체한” 장삼풍의 흉금을 앙모했다.

“짐이 오랫동안 진선(眞仙)을 앙모해 직접 의범을 받들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일찍이 향과 친서를 지닌 사자를 파견해 명산을 두루 다니며 경건히 청하게 했습니다. 진선께서는 도덕이 숭고하고 만물을 초월해 자연과 하나가 되셨으니 신묘하기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짐은 재질이 소략하고 용렬하며 덕행이 얕지만 지성으로 뵙고 싶은 마음을 밤낮으로 잊은 적이 없습니다. 삼가 다시 사자를 파견해 향과 서신을 바치며 경건하게 청합니다. 구름수레와 학가마를 타고 은혜를 베풀어 강림하시길 두 손 모아 기다리며 간절히 앙모하는 짐의 마음을 부칩니다.”

(朕久仰真仙,渴思親承儀範。嘗遣使致香奉書,遍詣名山虔請。真仙道德崇高,超乎萬有,體合自然,神妙莫測。朕才質疏庸,德行菲薄,而至誠願見之心,夙夜不忘。敬再遣使,謹致香奉書虔請。拱候雲車 鶴駕,惠然降臨,以副朕惓惓仰慕之懷)

영락제는 “안거(安車 귀인을 모시는 특별 수레)로 맞이하도록 초청”했는데 그 성실한 뜻과 지극한 예의는 고금에 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장삼풍은 모습을 감춰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회시(回詩) 한 수를 제자 손벽운을 통해 영락제에게 바치게 했다. 시에서 그는 성조께선 본래 “복덕(福德)이 무한하시니” 유일한 바람이라면 폐하께서 “마음을 맑게 다스리시며 아울러 욕심을 막고 덕을 숭상”하시는 것이라 했다. 또 장생의 비결은 바로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줄임’에 달려있다고 했다.

《영락황제께 답하다(答永樂皇帝)》

“황제 폐하께서는 복덕이 무한하십니다. 신은 본래 시골 촌뜨기로 지금 시국에 이로움이 없음에도 폐하의 편지를 받는 은혜가 여러 차례 태화산에 내려오고 수레와 말이 자주 달려 원숭이와 학도 놀랄 지경입니다. 엎드려 폐하께 바라옵건대 부디 마음을 맑게 하여 다스리시며 욕심을 누르고 덕을 숭상하시면 백성에게 복이 되고 주상께도 복이 되며 백성이 장수하고 주상께서도 장수하실 겁니다. 방사(方士)들의 금석(金石 역주: 연단에 사용하는 광물성 약재)은 믿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삼가 시 한 수를 바치오니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따로 부친 3장의 노래는 모두 산에 사는 사람이 욕심을 없애고 몸을 닦는 도리이니 이상한 술법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면 신의 행운이겠습니다.”

땅과 하늘이 교태해 변화의 공을 이루면
조야(朝野)가 모두 편안하며 치도(治道)가 형통하리.
황극전(皇極殿) 속의 용호(龍虎)는 고요하고
무당산 구름 밖 북과 종소리 맑구나.
신은 초야에 거주해 본래 쓸모없사오니
폐하께서 나무꾼에게 물으심에 의미가 있으리라.
감히 미언(微言)으로 성스런 덕을 수고롭게 한다면
마음 맑히고 욕심 줄이는 게 장생입니다.

地天交泰化功成(지천교태화공성)
朝野咸安治道亨(조야함안치도형)
皇極殿中龍虎靜(황극전중용호정)
武當雲外鼓鍾清(무당운외고종청)
臣居草莽原無用(신거초망원무용)
帝問芻蕘若有情(제문추요약유정)
敢把微言勞聖聽(감파미언노성청)
澄心寡欲是長生(징심과욕시장생)

천기는 가벼이 누설할 수 없사오나
지금은 오히려 맹렬함이 부족할까 걱정입니다.
온갖 마난에 고생스럽고 힘들어도
제가 지금 전하는 건 천지와 통합니다.
폐하께선 저를 찾아 금단(金丹)을 물으시지만
조사께서 남기신 성 장생의 비결입니다.
장생의 비결이 어떠한지 말씀드리자면
도덕이 가득하고 성대함이 좋은 계책입니다.
욕심 줄이고 마음 맑히며 생각을 담담히 하신다면
신선에 어디 특이한 공부가 있겠습니까?

天機不肯輕輕泄(천기불긍경경설)
猶恐當今欠猛烈(유공당금흠맹렬)
千磨萬難費辛勤(천마만난비신근)
吾今傳與天地脈(오금전여천지맥)
皇帝尋我問金丹(황제심아문금단)
祖師留下長生訣(조사유하장생결)
長生之訣訣何如(장생지결결하여)
道充德盛即良圖(도충덕성즉양도)
節欲澄心澹神慮(절욕징심담신려)
神仙那有異功夫(신선나유이공부)

나중에 성조 영락제는 무당산을 대대적으로 수리해 진무대제(真武大帝)를 위한 제례를 올렸다. 또 ‘우진궁’을 건립해 장삼풍의 상을 만들어 제사를 모셨다. 영락 14년에는 상서(尙書) 호광(胡廣)에게 명령해 계속해서 장삼풍을 찾고 방문하게 했다.

어느 날 호광이 한밤중에 무당산에 올라 향을 사르고 눈물을 흘리며 장삼풍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장삼풍이 그의 간절함을 보고는 미리 몸을 날려 도성으로 갔다. 마침 성조가 조회 중이었는데 장삼풍을 보고는 웃으며 도에 관해 물었다.

장삼풍은 방도구진주천애(訪道求真走天涯--도를 찾고 진인을 구해 하늘 끝까지 가다)란 노래를 한곡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태연하게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순식간에 상서로운 채색 구름이 전당에 가득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흩어졌다. 장삼풍이 몸을 날려 떠나니 황제와 신하들이 그 기이함을 찬탄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정말 진짜 신선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나중에 명나라 천순(天順) 3년 영종(英宗)이 평소 도덕지사를 공경하자 장삼풍이 그의 정성을 보고 궁궐에 몸을 드러내 알현했다. 이때 장삼풍의 모습은 보라색 얼굴에 창처럼 기른 수염, 머리 뒤까지 늘어뜨린 상투가 마치 현무(玄武)의 모습과 같았다. 배는 불룩하고 어깨가 두꺼우며 허리에 삿갓을 끈으로 매달고 왔다. 영종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신 삼풍은 폐하께서 자신을 닦고 남을 편안히 하시며 사(邪)를 물리치고 정(正)을 숭상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곧 사라져버렸다. 이에 영종이 친히 글을 지어 그를 ‘통미현화대진인(通微顯化大真人)’에 봉했다.

“하늘을 받들어 천운을 이은 황제가 지어서 말하노라. 짐은 선풍도골(仙風道骨)로 천지의 진원(真元)을 얻어 비밀스런 전적과 신령한 문장으로 음양의 정기(正氣)를 수집하길 원했노라. 장생구시(長生久視 장생술)의 술을 돌아보며 초범입성(超凡入聖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다)의 공을 이뤘도다. 이 넓은 세상에 한번 만남은 기적처럼 드문 일이다. 그대 장삼풍 진인은 자태가 아름답고 기이하며 고상한 뜻이 홀로 드높았도다. 선록(仙籙 신선의 책)의 비결을 얻고 금정(金鼎)의 영고(靈膏 신령한 고약)를 먹었노라. 순간에 오고가니 실로 조화의 기틀을 얻었도다. 숨고 나타남이 은미하여 건곤(乾坤)의 오묘함에 부합하노라. 이에 특별이 그대에게 통미현화진인을 수여하고 고명을 주어 찬양하노라.”

(《명천순황제칙봉고명(明天順皇帝敕封誥命)》)

또 명 헌종(憲宗) 성화(成化) 연간에 불도(佛道) 양교의 무리들이 멋대로 황명을 훔쳐 작위를 봉하고 불법을 저질렀다. 헌종이 이를 싫어해 과도관(科道官 역주: 명청대 감찰어사)의 상주를 구실로 마침내 승려와 도사들에게 내린 국사 및 진인의 호칭을 없애버렸다. 성화 22년 봄 장삼풍의 뛰어난 풍모와 절개를 표창하기 위해 헌종은 특별히 삼풍을 ‘도광상지진선(韜光尚志真仙)’에 봉했다.

“성화 22년 봄 조칙을 내려 특별히 태화산 은사 장삼풍을 ‘도광상지진선(韜光尚志真仙)’ 주전(周顛)을 ‘선유보화진선(宣猷輔化真仙)’에 봉했다.”(《장삼풍전집 은경편년(隱鏡編年)》)

명나라 가정(嘉靖) 42년 세종(世宗)이 만년에 밀종(密宗)을 아주 좋아했는데 장삼풍이 남경에 출현했다는 것을 알고는 장삼풍의 저작을 전부 찾아오게 했다. 《현요편(玄要篇)》을 읽고는 “우리나라의 진짜 신선이로다(我朝真仙也).”라고 찬탄했다. 이에 장삼풍을 ‘청허원묘진군(清虛元妙真君)’에 봉하고 아울러 장삼풍이 살던 곳에 청허관(清虛觀)을 지어 장삼풍을 제사지내게 했다.

천계(天啟) 3년 명나라 희종(熹宗)이 일이 많은 관계로 궁궐에 단을 설치하고 신선을 찾았는데 홀연 붉은 빛이 자리를 덮고 빛 속에서 장삼풍의 진용(眞容)이 드러났다. 황제가 고개를 숙이고 “진선께서 나를 가르치시고 진선께서 나를 보호하신다(真仙教我,真仙護我)”라고 했다. 내린 말씀이 아주 은밀했는데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황제가 감탄하고는 장삼풍을 ‘비룡현화굉인제세진군(飛龍顯化宏仁濟世真君)’에 봉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4백년 간 장삼풍 진인의 신적(神跡)이 끊어지지 않았고 대명(大明) 황제들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장삼풍을 찾았다. 또 매번 교서를 내리고 작위를 더했으며 도가의 궁관(宮觀)을 수리하고 건축했다.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도(道)를 숭상하는 최고봉을 이뤘으며 체계적인 대명현교(大明玄教)를 형성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