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9. 무당 예언
“무당(武當)의 옛 이름은 태화(太和)인데 현무(玄武)가 아니면 감당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무당이라 한다. 8백여 리에 걸쳐 우뚝 선 72개의 봉우리와 36개의 기이한 암석 및 24개의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가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천주(天柱)라 한다.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곳은 자소(紫霄)이며 남쪽 바위 위에는 운무가 서려 있고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청허동천(清虛洞天)을 뛰어넘고 심요복지(深窅福地)를 능가한다.”
이 글은 명나라 영락제의 《어제대악태화산도궁지비(禦制大岳太和山道宮之碑)--황제께서 지으신 대악태화산 도궁의 비》에 나오는 무당산(武當山)에 대한 표현이다.
무당산의 옛 이름은 태화산으로 하늘의 28수 중 ‘익(翼), 한(翰), 각(角), 항(亢)’ 네 별에 해당하며 땅에서는 균주(均州 지금의 호북성) 남쪽에 해당한다. 도가(道家) 동천복지의 하나로 팔괘(八卦)에서는 태괘(兌卦)의 위치에서 발원한다.
“만 리에 걸쳐 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지축(地軸)과 천관(天關)의 모습을 닮아 지세가 웅장하고 아름다워” 현무(玄武 역주: 진무대제를 지칭)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무당이라고 했다. 현대어로 해석하자면 바로 진무대제(真武大帝)만이 이 산을 누르고 천관지축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위덕을 지녔다는 뜻이다.
무당산에는 72개 봉우리와 36개의 기암절벽, 24개의 깊고 그윽한 골짜기가 있다. 가장 높은 곳은 천주봉이고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자소봉인데 남쪽 바위 위에 구름과 안개가 걸려 있고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때문에 ‘항고(恆古)에 둘도 없는 절경이자 천하제일 선산(仙山)’이라 불린다.
진무신(真武神 현무대제)이 태화산에서 도를 닦아 진인(真人)으로 성취된 이래 태화산은 도가 수련의 승지(勝地)가 되었다. 주(周)나라 때 함곡관 관령(關令) 윤희(尹喜)는 자색 기운이 동쪽에서 오는 것을 보고 노자의 오천언(五千言 《도덕경》을 가리킨다)을 얻은 후 무당 삼천문석벽(三天門石壁) 아래에서 은거해 도를 닦았기 때문에 이곳을 은선암(隱仙岩)이라 부른다.
한 무제 때는 장군 대맹(戴孟)을 시켜 무당산에 들어가 약을 채취하게 했는데 대맹이 ‘관직을 버리고 도를 배워’ 나중에 백일비승(白日飛昇 역주: 대낮에 하늘로 날아올라갔다)했다. 또 팔선(八仙) 중의 여동빈은 늘 무당에서 노닐었는데 자기봉(紫氣峰)에 머물며 수련했다.
당 태종 정관(貞觀) 연간에 큰 가뭄이 들자 태종이 균주(均州)태수 요간(姚簡)을 무당산에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그러자 오룡(五龍)이 신령한 모습을 드러내더니 감로 같은 단비가 내렸다. 이에 태종이 어지를 내려 오룡사(五龍祠)를 짓게 했다. 요간은 나중에 온가족을 데리고 무당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도를 닦았다.
송나라 때는 유명한 도사 진단(陳摶)이 무당산 구석애(九石崖)에 은거했다. 명나라 때 임자원(任自垣)이 편찬한 《칙건대악태화산지(敕建大岳太和山志)》에는 “황로(黃老 황제와 노자)가 가르침을 편 이래로 신선과 지인(至人)이 많이 머물렀다.” “양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을 숨기고 시일(時日)을 감췄다. 산이 깊지 않고 숲이 빽빽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으며 오직 한가한 이름이 사람들의 귀에 들릴까 두려워했다. 이 산에서 도(道)를 실증하고 진인(真人)이 되어 올라간 사람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다만 시간이 오래되었고 여러 차례 겁화(劫火)를 거쳤기 때문에 대부분 그 이름을 잃어 버렸다.”라고 했다.
즉 역사가 오래되고 각종 재난과 겁화로 인해 무당산에서 수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남겨지진 못했다. 단지 우뚝한 저 무당산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를 이루고 진인이 되어 올라갔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장삼풍은 원나라 진종 태정(泰定) 갑자년(1324년)에 무당산에 처음 왔다. 그는 “열 달 만에 공(功)을 이뤄 성태(聖胎)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는데 바로 자신의 몸 안에서 수련을 통해 ‘원영(元嬰)’이 나왔다는 의미다.
옥허궁(玉虛宮) 앞 고목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금단(金丹)을 아홉 번 돌려 대도(大道)를 이뤘다. 이때 남긴 시가 《은거음무당남암중작(隱居吟武當南岩中作)--무당산 남쪽 바위에 은거하면서 읊다》이다.
《은거음무당남암중작(隱居吟武當南岩中作)》
은자 장삼풍을 누가 찾을 수 있으리?
아홉층 구름바위 깊고 또 깊은데
막막한 소나무 연기는 먹 없는 그림이요
졸졸대는 계곡물은 현(弦) 없는 금(琴)이로다.
검은 원숭이 나를 따라 속세 근심 소멸하고
흰 학은 사람에 붙어 도심(道心)을 감추누나.
저 황관(黃冠 도사의 관)이 부귀 쫓음 비웃나니
아울러 날 알아주는 이 하나 없구나.
三豐隱者誰能尋(삼풍은자수능심)
九室雲岩深更深(구실운암심경심)
漠漠松煙無墨畫(막막송연무묵화)
淙淙澗水沒弦琴(종종간수몰현금)
玄猿伴我消塵慮(현원반아소진려)
白鶴依人穩道心(백학의인은도심)
笑彼黃冠趨富貴(소피황관추부귀)
並無一個是知音(병무일개시지음)
도를 이룬 후 장삼풍은 자유자재로 자취를 바꾸며 마음껏 노닐었다. 보계 금대관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원나라가 곧 끝나고 명나라의 대운이 도래할 것을 미리 예견하기도 했다. 또 명나라 홍무 초년에는 무당산에 모습을 다시 나타냈다.
《대악태화산지》에는 장삼풍이 천주봉에서 현제(玄帝)를 참배하고 여러 봉우리들을 두루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산속의 한 노인에게 “이 산이 나중엔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또 제자 구현청(丘玄清)을 오룡에 머물게 하고 노추운(盧秋雲)을 남암(南岩)에 머물게 했으며 유고천(劉古泉), 양선징(楊善澄)을 자소봉에 머물게 하고 “가시나무를 없애고 기와와 자갈을 모아” 나중에 크게 번창할 것을 대비해 기초를 만들게 했다.
장삼풍 자신은 또 전기봉(展旗峰) 북쪽 근처 복지(福地)를 택해 오두막을 짓고 현제를 공양하는 향불을 올렸다. 이곳을 ‘우진궁(遇真宮)’이라 불렀다. 명나라 영락 10년 이곳을 개축해 옥허궁(玉虛宮)이라 했다.
장삼풍은 또 황토성(黃土城)에 복지(福地)를 골라 초막을 지은 후 ‘회선관(會仙館)’이라 했다. 영락제 때 이곳이 우진궁으로 개축되었다. 홍무 22년(1389년) 장삼풍이 소매를 떨치고 멀리 떠난 이후 어디로 갔는지 향방을 모른다.
장삼풍은 무당산에 서운려(棲雲廬), 아미산에 유월려(留月廬)란 오두막이 있었는데 옛 초(楚)나라 지역과 촉(蜀) 땅을 자주 오고가곤 했다. 나타날 때면 청란(青鸞 푸른 난새)를 타고 만 리를 갔으며 들어갈 때는 흰 구름 속으로 사라지며 천지에서 대도(大道)를 행했다.
초와 촉 지역을 자주 왕래하면서
두 명산(名山) 오두막에 편히 누웠네.
고요함 속에 움직임 있으되 고요함이 아니고
한가함 속에 편안하니 곧 한가함이라.
오직 천궐(天闕)에서 자색 편지 내리길 기다리며
단(丹)의 구결 세밀히 연마하며 인간세상 제도하네.
밤에 무당산에서 아미산 달을 마주하니
제자들 이미 폐관에 들어간 것 아득히 떠오르네.
楚蜀頻來自往還(초촉빈래자왕환)
結廬高臥兩名山(결려고와양명산)
靜中偶動仍非靜(정중우동잉비정)
閑裏能安乃是閑(한리능안내시한)
只候紫書來闕下(지후자서래궐하)
細研丹訣度人間(세연단결도인간)
武當夜對峨眉月(무당야대아미월)
遙憶吾徒己閉關(요억오도이폐관)
《내가 다년간 산수를 유람하면서 뜻을 둔 곳은 촉의 아미산과 초의 무당산으로 각각 초막을 짓고 왕래하며 머물렀다. 나서면 청색 난새를 타고 만 리를 가고 들어서면 백운 속으로 사라졌다. 맑고 아름다운 저녁에 무당산 서운려에서 아미산 유월려를 바라보며 이 시를 짓는다(余閱山水多年所嘗留意者蜀之大峨楚之武當因各構一廬爲往來棲真之所出則青鸞萬裏入則白雲一窩佳夕澄清在武當棲雲廬望大峨留月廬作此)》
장삼풍이 무당산에 있을 때 또 납탑도인(邋遢道人)으로도 불렸다. 그는 날씨가 추우나 더우나 상관없이 오직 한 벌의 가사와 도롱이만 입었는데 때로는 며칠에 한 끼만 먹었고 때로는 수개월간 아예 먹지 않았다. 한번 읽은 책은 잊지 않고 전부 기억했다. 노니는 장소는 일정하지 않아서 혹은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다고 했다. 해학을 좋아해서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당시 시골 사람들은 이 늙은 도인을 맹수가 물어가거나 맹금류가 채가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랍고 기이하게 여겼다. 이때 장삼풍은 이미 120세에 달했지만 산을 오를 때는 나는 듯이 가볍고 민첩했으며 한겨울에 눈 속에 누워도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과연 장삼풍의 예언대로 명나라 영락 연간에 성조(成祖)는 무당산에 백만의 자금을 투입해 대대적인 토목공사에 나섰다. 당시 공사에 동원된 일꾼과 장인이 30만 명에 달했고 14년간 9개의 궁과 8개의 관 등 33개의 건축물을 완성했다. 무당산은 또 ‘태악(太嶽)’, ‘치세현악(治世玄嶽)’에 봉해졌고 ‘황실가묘(皇室家廟)’로 존중되어 대명(大明) 도교의 제일 명산이 되었다. 무당산은 또 진무대제를 위한 최대의 도량이 되었다.
영락 10년 성조는 장삼풍의 제자 손벽운(孫碧雲)을 시켜 무당산 4곳을 답사하고 측량해 규정을 만들고 건설공정을 기획하게 했다. 나중에는 또 손벽운을 대성남암궁(大聖南岩宮) 주지로 삼았다.
영락제는 정일(正一) 허현자(虛玄子) 손벽운에게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짐은 진선(眞仙) 장삼풍 스승님의 도덕이 숭고하고 신령한 조화가 현묘해 모든 것을 초월하고 고금에 으뜸임을 존경하고 앙모하여 뵙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더 간절하다. 사자를 시켜 공경하게 향서(香書 향기 나는 서찰)를 받들고 사방을 찾아다니길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이루지 못했다. 짐이 듣자하니 무당산에서 진인을 만났는데 실로 진선(眞仙) 스승님이었다고 한다. 진선 스승님께서 학을 몰고 다니시는 곳이니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도량을 창건해 경앙하고 흠모하는 정성을 펼치고자 한다. 너는 그 땅을 잘 살피고 넓고 좁은 것을 헤아려 규정을 정하되 모든 것을 들은 대로 하라. 짐이 장차 길일을 정해 건물을 지을 것이다. 너는 마땅히 짐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전력을 다해 서로 협력하는 공을 이뤄야 한다. 공경할지어다! 이에 칙령을 내린다. 영락 10년 3월 초엿새.”
장삼풍의 제자 구현청(丘玄清 구원정邱元靖이라고도 한다)은 명 태조 주원장의 신임을 받았다. 홍무 14년에는 관부에서 그의 어진 재주와 능력을 조정에 천거해 감찰어사를 제수 받았다. 태조는 또 그에게 궁녀 2명을 하사했으나 그는 극력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파격적으로 태상시경에 발탁되었고 2대 조상에게까지 관작을 주는 은혜를 입었다. 홍무 18년(1385년)에는 ‘가의대부태상시경(嘉議大夫太常寺卿)’이 되었다. 매번 천지에 큰 제사를 지낼 때마다 명 태조가 제궁에서 자면서 날씨를 묻곤 했는데 구현청의 상주가 효험이 있었다.
《장삼풍전집》에는 장삼풍이 구원정에게 주는 시가 있다.
《장지파촉시문인구원정(將之巴蜀示門人邱元靖)--장차 파촉으로 가면서 문인 구원정에게 보이다》
苦心苦行守棲雲(고심고행수서운)
大道他年寄與君(대도타년기여군)
莫舍吾廬輕易出(막사오려경이출)
致教人賦北山文(치교인부북산문)
마음 고생 몸 고생으로 서운려를 지키면
언젠가는 대도(大道)가 그대에게 의지할 것이다.
내 초막을 함부로 나오지 말지니
사람을 시켜 북산문(北山文)을 읊게 하네.
역주: 북산문이란 남제(南齊) 때 문장가 공치규(孔稚圭)가 지은 부(賦)의 제목. 일찍이 북산에 은거했던 주옹(周顒)이 끝까지 은거하지 못하고 중간에 나와 벼슬길에 나선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장삼풍이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서 중도에 수련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정진하라고 경계하는 뜻을 담았다.
명나라 임자원의 《칙건대악태화산지》에는 “홍무 연간에 장삼풍이 무당산에서 도제(徒弟) 여러 명을 받았고 영락 이후 각 지역과 문파에서 특별히 선발된 4백 명의 도사들이 모두 장삼풍을 조사로 여겼다.”고 한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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