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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글/ 간루(甘露)

[밍후이왕] 고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생활이 고난을 겪는 것을 보고 태양신 아폴로의 불씨를 훔쳐 인류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캅카스산맥의 낭떠러지에 묶어 바람을 맞고 햇볕을 쬐며 독수리가 부리로 간을 쪼아 먹는 고통을 매일 겪게 했으며, 그다음 날 간이 다시 자라나면 또다시 쪼아 먹는 고통을 겪게 하였다. 수천 년 후 헤라클레스는 독수리를 죽이고 프로메테우스를 구원했다.

사마천은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데, 그 죽음에는 태산보다 무거운 것도 있고, 기러기 털보다 가벼운 것도 있다.”라고 말했다. 부친 생전에 다하지 못한 뜻을 이루기 위해 궁형을 받은 후에도 감옥에서 끝까지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에 남겼다.

사실 ‘인(忍)’은 일종의 수양으로서 의미는 매우 광범하다. 일반 사람들은 ‘인’을 단지 참는 것으로만 여긴다. 이는 단지 한 방면으로써 ‘인’에는 인내, 고난, 손해, 인식, 받아들임, 견딤, 책임, 성취, 귀하되 교만하지 말아야 하고 전공을 내세우지 않으며 현명하면서 겸손하고, 강직하면서 인내할 줄 알고 ‘인’ 중에 버림이 있고 강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롭고 타인을 배려하는 등등 여러 가지의 함의를 모두 가지고 있다.

세간에서 “’인(忍)’자는 마음 심자 위에 칼(刀)이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좁은 뜻에서 마음에 칼을 하나 꽂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칼 아래에 있는 마음처럼 모순을 없애고 즉 인내함으로 모순을 없애는 것이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위험에 직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때 즉시 결단하여 적의 사기가 날카로울 때는 피하고 지혜로 모순을 없애 정면충돌을 피하여 불필요한 소모와 손실을 줄여 타인을 위하고 선한 마음으로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인’이란, 마음속에 담아두고 울화가 치미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울화가 가슴에 차면 기가 통하지 않고 우울함이 쌓여 하나로 엉켜 간과 신장이 상하고 간이 상하면 쉽게 분노하고 신장이 상하면 지력이 낮아진다. 지력이 낮아지면 실언하고 말이나 행동거지에 예의가 없다. 그리하여 ‘인’이란 마땅히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감당하고 풀어내는 것으로, 그래야만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과하지욕(胯下之辱)

북송 소식(蘇軾)은 말했다. “필부가 치욕을 당하면 칼을 뽑아 들고 몸을 던져 싸운다. (匹夫見辱, 拔劍而起, 挺身而鬥)” 이는 진정한 용감함이 아니다.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은 갑작스런 침해와 마주해서 상대방과 쟁투하지 않고 인내하며 양보하는 태도를 보여 모순을 풀어내어 상대방에게 내려올 계단을 마련해 준다. 이유 없는 모욕에도 담담하고 태연하게 대할 수 있다.

한신(韓信)의 탁월한 군사 전략과 용병술은 후세 병법가들에게도 경모와 추앙을 받고 있다. (新唐人 ‘笑談風雲’ 제공)

서한의 개국 공신 한신(韓信)의 ‘대인지심(大忍之心)’은 매우 감탄할 만하다. 한신은 소년 시절 보검을 차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한신이 장터에 걷고 있었을 때 한 젊은이가 대중 앞에서 그를 모욕하며 말했다. “네 놈이 덩치는 큼직하게 생겨 밤낮 허리에 칼은 차고 다니지만 사실 네 놈은 겁쟁이일 뿐이야.” “만약 네가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칼로 나를 한 번 찔러 보아라. 그러나 죽기 두렵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라.”

한신은 젊은 사람을 한참 빤히 쳐다본 후에 납작 엎드려 그의 다리 사이로 기어갔다. 모여 있던 구경꾼들은 모두 한신은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훗날 한신이 유방의 대장군이 되어 옛날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던 젊은이를 불러 군중에게 말했다. “이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때 이 사람이 저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 저는 이 자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자를 죽이는 것은 명목이 없었기에 참아내 오늘날의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용서를 비니 한신은 그의 죄를 사면하고 작은 벼슬까지 주었다.

인내하고 양보하는 것은 약하기에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인내하고 양보하는 것은 불필요한 번거로움을 피하고 서로 간에 화목을 위하는 인내하는 자의 드넓은 흉금을 드러내는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와신상담이라는 사자성어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 말 그대로, 장작 위에 누워 쓰디쓴 쓸개를 맛보았다는 것인데, 수십 년을 하루와 같이 이렇게 했다. 월(越)왕 구천(勾踐)이 패배한 후에 수십 년 동안 매일 식사 전에 쓸개를 맛보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의 ‘인’은 하나의 견지와 하나의 책임감이다.

BC 498년, 오(吳)왕 합려(闔閭)는 파병하여 월(越)나라를 공격했다가 월나라에 패하였고 합려 또한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2년 후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병력을 이끌고 월나라를 공격해 패배시키고 월왕 구천은 오나라로 압송되어 오왕의 노복이 되었다.

어느날, 오왕이 병이 들자 구천이 자발적으로 오왕의 똥을 맛보더니 만면에 회색이 감돌면서 오왕 부차를 축하하며 말했다. “똥의 색깔과 맛으로 판단할 때 전하의 몸은 큰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고 치료하셔도 좋습니다.”

3년 후 오왕 부차는 월왕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월나라로 돌아온 후에 구천은 여전히 오나라에서처럼 생활하면서 더욱 근검하게 백성들을 사랑하고 관원들을 위안하며 병졸을 훈련했다.

구천은 자신의 침소에 쓴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을 때나 누울 때나 자주 쓸개를 바라보았다. 식사하기 전에도 먼저 쓸개를 맛보았다.

월왕 구천이 22년 동안 계획한 후에 오나라를 평정한 후 패주(霸主)가 되었다. 구천은 또한 오나라가 점령한 땅을 초(楚)나라, 송(宋)나라, 노(魯)나라에 돌려주었다.

고금동서, 대업을 이룬 사람은 모두 일반 사람 같지 않은 의지력과 반석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

소무목양(蘇武牧羊)

BC 100년 전 흉노족이 한(漢)나라에 호의를 보여 이전의 교우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한 무제는 즉시 소무(蘇武)를 파견해 100여 명을 인솔하고 흉노로 사신을 보내 선우(單于, 흉노족의 군장)를 답례하게 하였다.

소무 일행이 한나라로 돌아가려 할 때 흉노의 내란이 있었다. 소무 일행이 흉노에 구금된 후, 흉노에 귀순할 것을 요구당했다. 선우는 먼저 위율(衛律)을 파견해 금전과 관직으로 소무를 설득했지만, 소무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선우는 명령을 내려 소무를 물도 식량도 끊긴 노천 땅굴에 가두었다. 소무는 땅굴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변절하지 않고 목이 마르면 눈을 먹어 갈증을 풀고 배고프면 몸에 입은 양가죽 옷을 먹었다. 선우는 소무의 의지가 강한 것을 보고 소무의 절개에 탄복하여 차마 그를 죽이지 못했으며, 또한 그를 한나라로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주위 나뭇가지에서 어린잎이 새로 돋아났지만, 한나라로 돌아가는 것은 여전히 기약 없이 막연했다. 소무는 면할 수 없는 슬픈 감정을 느껴 눈물을 흘렸다. 소무는 손을 들어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니 양 한 마리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무에게 매매 짖었는데 마치 그를 위로하는 듯했다.

그래서 선우는 소무에게 북해 일대에 가서 양을 방목하게 하였는데 양이 새끼를 낳아야 한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소무는 유배지에 도착한 후에야 양이 모두 숫양인 것을 알았다. 그는 매일 한나라 조정의 부절(符節)을 걸고 양을 방목했다.

19년 후, 한나라 사신이 소무의 동료를 통해서 그의 상황을 알아채고 그를 북해에서 장안(長安)으로 모셔왔다.

소무가 출발했을 때 한창 장년이었는데 돌아왔을 때 이미 머리가 온통 백발이 되었다. 소무는 흉노로 사신으로 갔을 때 시를 지어 아내에게 이별 인사를 했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떠나는 곳이 전쟁터이니 만날 날 기약이 없어라. 살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고 죽으면 오랫동안 그리워할 것이네(行役在戰場,相見未有期。生當復來歸,死當長相思)”

고대 사람들은 이익 때문에 임금을 배신한 사람을 ‘역모’한다고 인식했고, 죽기를 두려워해 절개와 의리를 포기한 사람을 ‘반역’한다고 생각했다. 소무의 ‘인’은 한나라에 대한 충심이었다. 정의와 절개을 지켜 고생을 인내하고 금전과 관직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꽃이 피고 꽃이 지며 흑발이 백발이 되어도 변절하지 않았다.



원문발표: 2020년 12월 19일
문장분류: 문화채널
원문위치: http://minghui.org/mh/articles/2020/12/19/4167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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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앞 문장에 이어서) 때마침, 4월 6일 이혼하고 9일에 고급인민검찰원에서 우리의 전근을 동의하는 서류가 왔다. 우리의 이혼은 대학에서 삽시에 혼란을 일으켜 사람들이 의논이 분분했으며 큰 관심사가 됐다. 당시 여론은 모두 나에게 집중됐다. 대학교 학장은(나중에 퇴직했음) 루 씨(전남편)와 모순이 매우 커서, 전근한다니 홀가분했으나 이 일로 갈 수 없었다. 이혼 후 루 씨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학장은 루 씨에 대한 화풀이를 나에게 했는데 더는 대학교에 나를 둘 수 없다며 나에게 다른 직장으로 연결해보도록 독촉했다. 루 씨도 나에게 스스로 집을 얻어 나가라고 했다.

나는 학장이 나에게 준 베이징시 전화번호부에 따라 직장을 알아봤다. 여러 곳에 연락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대학생도 찾을 수 없는 직장을, 누가 집도 없고 아이가 딸린 이혼한 사람을 받겠는가?

집을 얻기가 더욱더 어려웠다. 이상한 건 누가 나를 도와 월세방을 알선해주면 모두 계약이 안 됐다.

나는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됐다. 어째서 곳곳마다 막히는가? 나는 자세히 이런 복잡한 정황을 생각해봤다. 이 일에 대한 처리에서 조금 엇나간 것 같았다. 이혼은 그가 제출했고 이혼 후 나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스스로 자신을 주재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그에게 이끌려가고 있는가? 나는 전근 가지 말아야 했다. 하여 대학 당(黨) 위원회에 편지 한 통을 보내 내가 대학을 떠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1. 이혼 전에 나와 루 씨는 부부관계였는데, 그의 업무변동이 곧바로 나의 거취를 결정하고, 따라서 전근하는 것도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혼 후에 나는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또 따라서 전근하는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2. 전근을 제출한 건 루 씨이며 내가 아니다. 지금은 정황에 새로운 변화가 있다. 나는 사실대로 당위에 나의 개인적인 의견과 신청을 제출했다. 나는 전근하고 싶지 않으며 대학의 교육에 자신의 미약한 힘을 보태고 싶다고 적었다. 나는 또 학장을 찾아,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학장은 매우 화가 났었으나 나에 대해 이해하고 선생님들의 반영을 들어보고 내가 매우 좋은 사람이라 여겨 대학 당위는 의논을 거쳐 나를 남겨두기로 했다. 대학 당위가 나를 남기는 데 동의하는 서면 자료를 다시 고급인민검찰원에 보내 재가했다. 얼마 후 고급인민검찰원에서 나를 대학에 남는 것에 데 동의하는 서류가 도착했다. 대학 지도부에서 나를 찾아 담화할 때 이전에 전근하려던 그동안 지급하지 않은 급여는 보충 지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괜찮으며 보충 지급하지 않는 데 의견이 없다고 대답했다. 루 씨가 나에게 집을 얻어 나가라고 한 문제에서 나는 그에게 집을 옮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집에 있는 물건에서 가져갈 것을 모두 가져가며 적게 남길수록 좋다고 말했다. 루 씨는 자신이 셋방을 얻어 나갔다.

대학교수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의논이 매우 많아 별의별 소리가 다 있었다. 내가 가짜 이혼을 제출해 집을 차지하기 위해서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는데 이혼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루 씨가 이혼의 모든 이유를 나에게 미루었기에 당시에 일부 사람은 루 씨에 대해 매우 공감했다. 나는 이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점차 그들도 나에 대해 갈수록 이해할 수 있었다. 이혼이란 난을 나는 이렇게 헤쳐 나왔다.

우리의 이혼은 나에게 있어서 대수롭지 않았으나 아버지와 여동생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화냈고 상심도 컸다. 이 일로 풍속을 어지럽게 했고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여겼다. 이씨 가문에서 장정(丁)이 흥하지 않는데 지금은 또 이런 울화를 겪어야 하니 실로 넘어가기 어려워했다. 여동생들은 전화로 루 씨와 다퉜으며 동시에 가족은 나에게도 화를 냈다. 여동생들은 나를 ‘바보 언니’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전화로 나에게 화를 냈으며 통화 중에 중얼중얼 혼잣말했다. “만 명 중에 너같이 좋은 사람을 찾아내기도 힘든데 어째서 이런 일을 겪고 있니?”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나에게 안심시키는 말을 했다. “샤오리, 괜찮다, 우리 잘못이 아니야, 우리 이씨 가문은 창피한 게 없어.” 아버지의 이 말씀은 루 씨와 올케가 벌인 수치스러운 일에 관한 것이다.

루 씨는 이때 여론의 압력을 느끼고 나에게 질책했다. “당신 집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대하는데 당신도 나서서 말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는 당신이 종래로 그들에게 나에 대해 좋은 말을 하지 않아 그들이 이렇게 하고 있어요.” 사실 우리 사이의 일을 종래로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말이다. 루 씨는 장기적으로 이렇게 사면초가에 휩싸이자 나에게 공을 들였다. 내가 나서서 이런 모순을 조율하길 바랐다. 나의 태도는 어느 쪽이든 참여하지 않으며 말하지 않을 것이나 누구에 대해서도 똑같이 좋게 대하는 거였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지금도 매우 잘 지내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하며 특히 가족에게 내가 이혼으로 어떤 상처를 입은 게 아니며 오히려 더욱 잘 지내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한동안 루 씨와 나의 여동생들은 서로 적으로 지냈다. 루 씨는 당할 수가 없어서 나를 찾아 보호해줄 것을 청했다. 루 씨와 올케는 내가 나서서 한마디 해주기를 바랐다. 내가 나서서 자신들의 혼인을 동의한 것으로 말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혼은 나의 일이므로 내가 동의해야 하나, 결혼은 당신들 일이므로 부모님도 어찌할 수 없는데 어찌 내가 나서서 할 수 있겠는가?

루 씨는 우리 집 근처에 집을 구입했고 그들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들 가족은 여전히 우리 집에 찾아와 물만두를 빚어 달라고 했다. 나도 그들에게 무슨 원한의 말이 없었다. 한번은 창춘에서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왔다가 나의 이런 정황을 목격했다. 그가 말했다. “리리 씨, 너무 힘든 수련을 하고 있군요. 너무 힘들겠어요.” 그는 내가 힘들겠다고 했으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루 씨 그들과 꼭 무슨 인연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생에 내가 고통을 겪고 그들이 나에게 수많은 번거로움을 만들었으나 만약 나의 역사를 펼쳐보면 아마도 내가 생생세세에 그들에게 못되게 굴었으며 이보다 더욱더 나쁜 일을 저질렀고 더 악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이미 나에게서 그렇게 많은 업을 제거하셨고 나를 위해 수많은 고통을 감당하셨는데 이런 조그마한 것은 무슨 대수겠는가? 나는 루 씨에게 조금의 원한도 없었으며 우리가 부부가 아니더라도 친구로 지낼 수는 있지 않겠는가.

내가 마음을 내려놓았을 때 타인이 보기에 불가사의한 관계를 잘 처리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이 점차 조용해졌다. 아버지와 여동생들도 더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어찌 됐든 여전히 친척이라는 걸 고려했다. 왜냐하면, 올케의 친이모는 나의 계모였고 루 씨 지금의 딸은 나의 조카로 어찌해도 친척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관계가 좋아진 후 루 씨는 또 나와 많은 속마음의 말을 했다. 그가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은 당신의 대법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이젠 나는 당신을 책임질 수 없어요. 여기까지 책임질 수 있어요. 이후에는 더욱더 높은 사람이 당신을 책임질 것이요.”

한번은 루 씨의 가족과 함께 식사하러 나갔다. 루 씨가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알고 있어요?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당신을 위하고 있는데 사실은 모두 당신을 둘러싸고 돌고 있어요. 원래는 부부의 인연으로, 지금은 다른 일종 연분으로 나타났으나 여전히 당신을 위하고 있어요.” 루 씨가 나의 조카딸에게 물었다. “네가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니?” 조카딸이 말했다. “이 일체는 모두 큰고모에게 감사드려야 해요.” 루 씨가 말했다. “맞아, 너의 큰고모가 없다면 지금의 너의 일체가 있을 수 없어.” 루 씨의 많은 말에서 나는 때때로 깜짝 놀라곤 했다. 다년간 그는 내 가족으로 사실은 나의 수련을 계속 돕고 있었다. 비록 본인은 그 과정에서 정말로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루 씨의 가족은 나에게 매우 잘했다. 루 씨의 아내(전 올케)는 내가 마음을 모두 수련에 사용하고 바르게 가려는 걸 알고 매우 존중했다.

루 씨는 대법에 대한 태도도 여전히 비교적 좋았다. 1999년 ‘7·20’ 이후에, 베이징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하는 사람이 루 씨의 친구였는데 남편을 취재하여 우리의 이혼을 구실로 잡아 요언을 만들어 대법이 어떻게 좋지 않다고 모함하려 했으나 루 씨가 거절했다. 내가 간수소에 있는 동안에 루 씨는 나를 위해 대법 서적을 잘 보관했고 내가 집에 돌아온 후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책을 나에게 돌려줬다. 나는 그의 선한 행위에 찬양을 보냈다. 내가 집을 떠나 생활할 때 그들 부부는 나의 아들을 돌봤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정신적 압력을 감당했다. 나는 이전의 일체는 모두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대법에 대한 일념으로 그들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나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기원했다.

(상편은 이로써 맺으며, 하편은 아마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가 끝난 후에 다시 게재할 것이다.)


원문발표: 2021년 5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 수련생 교류>안으로 찾아 성명쌍수(性命雙修)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5/17/4216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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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앞 문장에 이어서) 이런 부진한 수련 상태는 1995년 4월까지 지속했다. 창춘의 수련생이 나에게 ‘전법륜(轉法輪)’을 인편으로 보내왔다. 나는 더는 이렇게 지속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부진한 수련 상태에서 어서 벗어나야만 했다. 나는 직장에서 ‘전법륜’을 보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읽었다. 한 번 보고 나서 많은 의문점이 생겼지만, 두 번째 보고 나서는 첫 번째 생겼던 의문점이 너무나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전법륜’을 보고 나서 나는 심득체험을 적었다. 이후의 법공부에서도 이렇게 공부해나가는 걸 좋아했다. 나중에 사부님의 점화로 이런 학습 방법이 세인의 방법이라고 인식하게 된 후 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사부님께서 ‘법을 배우다(學法)’라는 경문을 발표하셨는데, 지식인이 법을 배움에 있어 존재하는 문제를 언급하셨다.

‘전법륜’을 배우면서 나는 많은 걸 깨달았는데, 나의 상태는 모두 법공부가 부족해 조성됐다는 걸 인식했다. 몇 달간 나에게 존재한 문제를 정리하면서 많은 집착심을 발견했다. 큰 집착을 빨리 버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매우 빠르게 자신을 조정했다. 노년 수련생의 도움으로 우리 집 맞은편에 있는 다른 노 수련생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뒤로 우리는 늘 함께 법공부, 연공과 교류를 했으며 나중에는 대법의 일도 함께했다.

남편은 그 여인과 계속 왕래했다. 남편이 항상 이혼을 언급하다가 나의 수련 상태가 정상으로 회복한 후 이혼을 언급하는 횟수가 훨씬 많아졌다. 이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특별히 어려웠다. 내가 이미 대법 노 수련생이고 수련을 이렇게 오래했는데, 이혼한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파룬궁을 수련해서 이혼한 게 아닌가요?”라고 물을 것이고, 수련생은 또 ‘파룬궁 수련생이라면 갈수록 더 좋아야 하고 가정은 갈수록 화목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혼했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법을 파괴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괴로웠으며, 이 때문에 눈물을 적잖게 흘렸다. 남편이 이혼을 언급할 때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되풀이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지탱해나가리라 생각했다.

나는 수련인이기에 반드시 잘해서 남편이 나에 대해 나쁘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가사를 도맡아 했는데, 남편이 친구들을 집으로 부를 때마다 나는 음식점의 주방장처럼 8~10개의 요리를 했다. 남편이 화를 내면 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욕해도 나는 매우 평온했으며 원망도 원한도 없었고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한번은 남편이 욕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내가 웃는 것을 보고 더욱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부으며 “죽은 돼지가 뜨거운 물을 겁내지 않는 것처럼 낯짝이 참으로 두껍군”이라고 말했다. 이후에는 웃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일부러 화를 돋우는 거로 여길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조금의 화도 나지 않았다. 한번은 남편이 집에 돌아와 그 여인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며칠 후 우리 집으로 올 테니 당신은 좀 표현을 잘하라고 말했다. 나는 “오고 싶다면 오라고 해요”라고 대답했다.

며칠 후 우리는 지하철역에 그 여인을 마중하러 갔다. 그녀는 아이 둘을 데리고 왔는데, 한 명은 자신의 딸이고, 다른 한 명은 언니의 딸로 이번에 베이징에 놀러 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남편을 보러 오려고 기회를 만든 것임을 알았다. 지하철역에서 올라온 후 그들 둘은 앞에서 친근히 이야기하며 걸었고 나는 그 뒤에서 걸었다. 이 장면을 다른 사람이 목격했다면 그들이 부부이고 내가 보모인 줄로 여길 것인데, 사실은 관계가 거꾸로 됐다. 집에 도착해 나는 그들에게 성의를 다해 많은 맛있는 음식을 해주면서 대접했다. 그녀가 감기가 들었기에, 나는 약과 물을 갖다줬다.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이 했으며 그들의 관계가 나와 무관한 듯이 했다. 이런 난관 앞에서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모두 법이었다. 나는 파룬따파 수련생이며 내가 여기에서 넘어가지 못할 일이 없고 남들이 이런 일을 매우 중요하게 보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는 매우 작디작은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그들이 매우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초탈한 표현과 선량한 심태에 그녀는 매우 놀라워했다. 그 여인은 조용히 남편에게 물었다. “리리 씨가 우리의 일을 알고 있나요?” 남편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요? 보아낼 수 없는데요.” 그녀는 나에게 감동했고 양심으로 가책을 받아 더는 머무를 수 없다며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그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집에 돌아왔다. 소파에 앉았는데 삽시에 내 신체가 크게 변하는 걸 느꼈다. 비할 바 없이 높게 변했는데, 종래로 느껴보지 못한 신성한 느낌이었다. 그 당시의 상태는 형용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이 문제에서 법의 요구대로 해냈고, 최종적으로 나에게 있는 큰 정마(情魔)를 통제해 철저한 승리를 거뒀다.

이 난관에 많은 수련할 내용이 내포됐다. 인(忍)을 해낼 수 있는지, 질투하지 않을 수 있는지, 정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선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지 등과 여러 방면의 심성과 법리에서 제고할 것이 있었다. 남편은 나의 이번의 표현에 대해 특별히 만족했으며, 또 내가 억지로 꾸며내지 않은 것도 보아냈다. 남편은 “당신이 진선인(真·善·忍)을 매우 잘해냈어요”라며 나를 칭찬했다. 이는 사부님께서 타인의 입을 빌려 격려해주신 것이고, 내가 이번의 고비를 잘 넘긴 걸 인정해주신 것임을 알았다. 그 여인은 돌아가서 며칠 후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에는 “당신은 리리 씨와 이혼하지 마세요. 그녀는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이 그녀와 이혼하면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라고 적혀 있었는데, 앞으로 더는 우리의 생활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밝혔다.

남편은 여전히 나와 이혼할 거라고 떠들었지만, 나는 너무 많이 들어 마이동풍으로 여겼다. 이혼하든 하지 않든 나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 남편이 이혼을 언급했을 때 전과 달랐다. 그는 매우 특별하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남편은 평화로운 심태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당신과 이혼한 후 멀리 떨어지지 않을 거요. 이혼 후 다른 상대를 찾아야 할 건데 누구도 적합하지 않아요. 누구도 당신과 내가 왕래하는 걸 싫어할 것이니,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찾을 거요. 그가 누구인지 알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몰라요, 당신이 정말로 이혼한다면 나도 당신이 나와 왕래하는 걸 바라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그건 안 돼요, 이는 나의 우선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죠. 내가 찾을 상대는 바로 …… 당신 올케요.” 당신과 앞으로 일을 의논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 생각은 너무나 황당하지 않은가. 상식에도 벗어나는 일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안 돼요, 안 돼요. 당신은 그렇게 해서는 안 돼요.” 남편이라는 사람은 일단 무엇을 결정하면 바로 그렇게 실행해 나간다. 그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남편은 이렇게 결정했다.

1995년 말 설날에 남편은 나에게 올케와 조카딸을 데려다 설을 쇠게 했다. 설날이 지난 후 남편은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해나갔다. 이때의 나는 이혼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 느낌이었다. 이때서야 나도 발견했다. 이 일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을 때 이혼과 이혼하지 않는 이런 형식이 나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가 없었으며 어떻게 해도 다 괜찮았다. 어떻게 되어도 여전히 나인 것으로 다 괜찮았으며 무슨 불평이 없었다.

남편이 대학에서 한동안 일한 후 너무나 무미건조함을 느꼈다. 수업이 적어 넘쳐나는 에너지를 사용할 곳이 없었다. 어찌할 것인가? 그는 또 일터를 바꿔 정법대학으로 전근하기로 준비했다. 그는 나까지 전근해갈 수 있게 다 연계해놓았다. 고급검찰대학에서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다가 남편이 반복해서 설득하여 마침내 겨우 동의했다. 정법대학에서 우리 둘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고 정법대학의 발령을 기다렸다. 그리고 고급검찰대학에서 전근을 동의하는 사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대학에서는 우리가 곧 전근할 거라는 걸 모두 알았다. 일터를 옮기는 것과 이혼은 두 가지 일로, 이혼하는 일도 동시에 진행됐다. 그때 남편은 늘 나에게 거듭 말했다. “이혼 후 대학교 모든 여론이 모두 당신에게 집중되게 할 것이요. 모두 당신을 나무랄 것이요.” 그는 나에게 약간의 마음 준비를 하도록 했다. 나는 그에게서 이런 말을 너무 들어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실은 사부님께서 나에게 또 관을 넘길 거라는 점화를 주신 것이다.

1996년 4월 초 남편의 우한대학 박사 동창생이 갑자기 베이징에 일을 보러 왔다. 그녀는 이혼 관련 전문 변호사였다. 남편은 그녀와 만나서 우리의 이혼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고, 그녀에게 우리의 이혼을 위탁했다. 그녀는 흔쾌히 응낙하고 이튿날 집에 찾아와 우리를 도와 이혼신청서를 작성했다. 남편이 이미 그녀에게 우리가 이혼하는 원인을 얘기했는데,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기에 이혼하는 것으로 하려 했다. 그녀가 아침에 우리 집에 도착했고 남편은 일을 보러 외출했다. 나는 남편이 일체를 잘 배치했으므로 이혼하려 한다면 하자고 했는데, 남편을 붙잡고 놓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엄중한 문제를 인식했다. 이혼신청서에 절대로 파룬궁 수련 때문에 이혼하는 걸로 적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았고, 남편이 마음대로 나를 끌고 가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그녀와 종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혼인이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은 오래됐는데, 주로는 쌍방이 장기적으로 개인적인 취미, 성격이 조화롭지 않아 조성된 것으로 이는 파룬궁과 관계가 없고, 만약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면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 후 가정이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연공을 하면서부터 내가 종래로 이혼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전에 이혼을 언급한 것은 1991년 법을 얻기 전이고, 당시에 우리는 이미 이혼한 거나 다름없었으며 서류상 이혼하지 않았던 거라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서 이런 과정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여겨 나의 요구대로 다시 이혼신청서를 작성했다. 아들 루루(陸路)는 나를 따르는 것으로 했는데, 아들도 동의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이미 다 작성했고 그녀도 말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우한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일을 처리한 후 그녀는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베이징에 무엇을 하러 왔는가, 어찌하여 당신들의 이 일만 처리하고 돌아가는가?’

남편은 며칠 내 나와 함께 협의이혼 절차를 밟으려 했다. 이때 올케가 집에 왔다. 남편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한 번 기회를 줄게요. 당신은 파룬궁을 선택할 건가요? 아니면 이 집을 선택할 건가요?” 내는 “나는 둘 다 선택해요”라고 했다. 그는 “다 선택해도 돼요. 그렇다면 당신은 물고기를 잡고 나와 함께 춤추러 가야 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은 내가 이런 것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요? 이것 말고 내가 잘하지 못한 게 있나요? 알려준다면 이후에 고칠게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말하지 못하다가, 잠시 후 또 “안 돼요. 당신은 하나만 선택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 둘 중에서 나에게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파룬궁을 선택할게요”라고 했다. 이렇게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진행했고, 이혼하는 그날, 길에서 마음이 조금 뛰었다. ‘평생토록 법원의 문을 밟은 적이 없는데, 인생은 참으로 무상하구나. 어떤 일에 봉착할지 모르는 게 인생이구나.’

올케도 그날 우리와 함께 갔는데, 법원에서 몇 가지 문제를 질문하고 조금 지나서 끝났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이렇게 마무리 됐다.

법원 문을 나서서 남편은 아직 우리가 이혼했음을 인식하지 못한 듯 함께 집에 가자고 했다. 이때 나는 생각이 들었다. ‘집? 어디가 집인가? 어찌하여 아직도 이렇게 명령조로 말하는가?’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울컥했으나 즉시 자신에게 말했다. ‘이혼했으니 내 생각대로 할 거야.’ 그래서 나는 택시를 불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학교로 갔다.



원문발표: 2021년 5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 교류>안으로 찾아 성명쌍수(性命雙修)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5/3/4216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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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앞 문장에 이어서) 열흘 뒤 사부님께서 연길에서 돌아오셨다. 나는 라오쉬(老徐) 집으로 향했다. 사부님께서 방에서 몇 사람과 담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와 몇몇 연공 친구들은 건넛방 큰 방에서 연공을 했다. 연공을 마치고 난 뒤 사부님께서 다른 일정이 있는 것을 알고 일부 수련생들은 돌아갔다. 사부님께서 일에 관한 연구를 마치신 후 안쪽 방에서 나오셨다. 우리는 사부님을 아파트 입구까지 배웅해드렸다. 사부님께서 돌아가신 후, 계단을 오르려는데 동료와 라오쉬, 샤오쉬의 표현이 조금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나를 보며 웃기만 하고, 말하려다 멈추는 모습이 다소 신비한 비밀을 지키려는 듯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평소에 다들 매우 친숙한 터라 하지 않는 말이 없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더구나 사부님께서 방금 다녀가셨기에 이들은 분명히 나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니 올라가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한 후 샤오쉬에게 물었다. “샤오쉬,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 뭔가가 있지? 나와 관련된 일이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묻지 않을게.” 샤오쉬가 말했다. “말할 수 없어, 말할 수 없어. 아무튼, 좋은 일로 알고 있으면 돼.” 나는 농담을 하듯 웃으며 말했다. “안 돼, 오늘 꼭 나에게 말해줘.” 그는 내가 계속 묻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한마디 물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면 파악할 수 있겠지?” 나는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할 수 있어.” 그가 말했다. “그럼 혼자만 알고 있어.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 돼.” 내가 말했다. “말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샤오쉬가 말했다. “방금 사부님께서 너에 대해 말씀해주셨어. 너는 이미 나한 과위로 수련했다고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어. 우리는 듣고 멍해 있다가 ‘어째서 알아채지 못했을까?’라고 말했어.” 이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원래는 이런 일이었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듣고도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나한’이란 단어도 몰랐고, 좋은 일은 좋은 일이지 하며,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나는 믿었다. 며칠 후 나는 또 사부님을 뵈었는데 사부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기쁜가요?” 나는 조금도 대답할 수 없었고 아무 말도 말하지 못하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사부님께서 내가 이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구나, 그렇지 않다면 묻지 않으셨겠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나한이란 층차를 조금 닦은 것 같은데 이것도 나는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아무렇지 않은데 어떻게 닦아 올라왔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나는 사부님께서 하신 한마디 말씀을 깨달았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1]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며 모두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해주신 것이다. 한번은 몇몇 수련생과 함께 가부좌하고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우리 앞에 앉아계셨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보시며 말씀하셨다. “내 몸 뒤를 보세요.” 아마 사부님께서 천목으로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라고 하셨던 것 같았고, 나에게 공능을 열어주시려는 것 같았으나 당시 나는 오히려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안 돼, 난 봐서는 안 돼. 천목이 열려 앞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생각했다. 창춘에서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이 천목 추구 때문에 문제가 생겼고,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기에 나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번에 알아보셨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몇몇 수련생이 내가 오성(悟性)이 차하다고 푸념했다. 또 한번은 우리 몇몇 수련생이 라오쉬 집에서 연공하고 있을 때 사부님께서 오셨다. 사부님께서는 싱글 침대 옆에 앉으셔서 우리는 사부님 자리 주변에 둘러앉았다. 나는 사부님과 매우 가까이 있었고, 라오쉬가 내 곁에 앉았다. 다들 처음에는 누구도 감히 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그때 라오쉬가 잠깐의 침묵을 깨고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리리,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봐?” 나는 그가 가리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어서 나는 말했다. “그건 다 지나간 일이야.” 사부님께서 “어떤 것을 보았는지 말해보세요.”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말해보라고 하셔서 나는 말했다. 나는 수련 초기에 사부님을 보았을 때, 문인이자 외국인 형상이었던 것을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께서 말씀해주셨다. “당신이 본 것은 맞습니다.” 나는 그 외국인이 어느 나라 사람이었는지 감히 묻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또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에 사람들 속에서 동냥한 적이 있어요.” 왕 씨 수련생은 가부좌 중에 사부님께서 전에 황제였던 것을 보았다고 했고, 사부님께서 맡은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전에 라오쉬가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이 사부님의 어느 한 생이었다고 말해준 기억이 났다.

나의 수련 정황이 단번에 수련생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수련생들 수련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많은 수련생이 문제가 있으면 나를 찾아 물으려 했고, 관을 어떻게 넘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자신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알았으며, 환희심이 일어서는 안 되었다. 그 당시 사부님의 ‘중국 파룬궁(수정본)’이 이미 출판되었고, 우리는 정체적으로 공부하고 외웠고, 단체로 혹은 스스로 공부했으며, 수련생들의 법공부 열정이 매우 높았다. 9월 15일 나는 수업을 마치고 곧장 라오쉬 집으로 향했고, 집에 들어서니 사부님께서 무엇인가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라오쉬 가족들만 있었고, 나는 사부님께 실례를 끼치지 않으려고 조용히 한 쪽으로 앉았다. 사부님께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셔서 나는 사부님 책상으로 다가갔다. 사부님께서는 시 한 수를 짓고 계셨다. ‘홍음’의 ‘인과(因果)’였다. 사부님께서 청색 펜으로 글씨를 쓰신 후 이리저리 보시더니 “글자가 작군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종이를 가져다 글을 쓰셨다. 이번에는 검은색 펜으로 힘주어 큰 글씨로 적으셨다. 나는 사부님께서 글자가 작다고 하신 종이가 책상 옆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사부님께 여쭤보았다. “사부님, 이 종이를 저에게 주시면 안 될까요?” 이에 사부님께서 동의하셨다. 사부님께서는 두 편의 시를 적으셨는데 한편은 ‘인과’, 다른 한편은 ‘미혹 속의 수련’이다. 먼저 ‘인과’를 쓰셨고 다음 ‘미혹 속의 수련’을 쓰셨다.

나는 이 두 편의 시를 보면서 사부님께서 법에서 어찌하여 ‘횡(橫)’이라는 글자를 사용했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라오쉬 아내가 사부님께 여쭈었다. “사부님, 어찌하여 이 ‘횡’자를 쓰셨나요?” 나는 이어서 말했다. “이 ‘횡’자를 사용해야 해요.” 나는 바로 이 ‘횡’자의 함의를 깨달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수련에서 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함을 알려주신 것으로 글자 표면의 뜻은 견정함, 결연함이다. 사부님께서는 “당신들은 돌아가서 잘 깨달아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연길에서 돌아오셔서 이 두 편의 시를 쓰신 후 사부님께서는 ‘파룬궁(法輪功)’을 ‘파룬따파(法輪大法)’로 개명하셨다.

남편이 창춘으로 나를 보러 왔으나 며칠 동안 또 나와 떠들썩했고, 남편이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게 했는데, 술잔을 들고 나에게 말했다. “오늘 당신 술을 마셔야 해. 나랑 한잔해.” 내가 말했다. “저는 안 마셔요.” 남편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며 화를 내며 말했다. “오늘 당신은 마시지 않으면 안 돼. 당신이 마시지 않으면 오늘 이 식사는 누구도 먹을 수 없어.” 내가 말했다. “당신도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알잖아요, 나는 연공해서 술을 마시지 않아요.” 남편은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자 큰 소리로 명령했다. “오늘 당신 반드시 마셔야 해.” 나는 똑같이 말했다. “마시지 않을 거예요!” 친구들이 말려도 남편은 듣지 않았고, 결국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아서 누구도 식사를 못 하고 불쾌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나는 생각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당신이 나에게 한바탕 어떻게 해도 나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법의 요구에 따라 법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면 나는 그대로 할 것이다. 나는 법을 가질 것이며 사람의 것은 필요없다.’ 남편에 대한 나의 이 고험은 바로 사부님께서 ‘인과’, ‘미혹 속의 수련’을 쓰신 그 며칠 뒤였다. 사부님께서 쓰신 시를 되뇌어 보았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느껴졌다. 내가 일찍이 제출했던 심득체험 중에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수련의 길에 고생 있음이 아니라 생생세세 업력이 가로막음이로다”[2] 나는 깨달았다. 고생을 겪는 것은 원래 자신의 생생세세 업력으로 조성된 것으로 다른 사람을 탓할 것이 없으며, 모두 자신이 저지른 나쁜 일과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아서인데 수련에서 업을 갚지 않고서야 어찌 향상시킬 수 있겠는가? 사부님 말씀대로 “마음 굳혀 소업하고 心性(씬씽) 수련하리니”[2] 해야 비로소 자신을 진정하게 향상시킬 수 있다.

사부님께서 보도원들에게 해법을 해주실 거라 우리는 수련생들이 제출한 문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병’에 관련된 문제는 모두 빼놓았고, 중복되는 문제도 다 빼놓았다. 당시 ‘문예지창’에 관한 문제가 매우 많아 샤오쉬에게 그 대부분을 빼라고 했으나 그는 동의하지 않아 질문지에 포함했다. 당시 내가 제출한 문제는 ‘파룬따파의해’ 중에 “우주 중에는 완전히 같은 것이 있습니까?”[3]였다. 이 질문은 지금 보면 지식을 탐구한 것으로 철학에서 ‘세계에 같은 사물이 있는지’에 대한 복사판으로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법에서 해답해주셨다.

9월 18일, 여전히 일난풍화(風和日麗)의 날씨였으며, 길림대학교 작은 강당(禮堂)인 길림대학교 이화학부 7층에서 사부님께서 창춘 보도원들을 위해 해법 해주시는 회의가 개최됐다. 사부님 해법을 듣는 수련생이 약 2백 명의 보도원이었다. 몇몇 신 수련생이 어디에서 소식을 들었는지 참가하여 아마도 사부님의 이번 설법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하신 당시 설법에 겨냥성이 있었던 것으로 이 한 점을 나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수련생들이 제출한 허다한 문제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일부 현상은 나와 연계가 있었으며, 사부님께서 마치 내가 모르는 문제를 해답해주시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남불(男佛), 여불(女佛)의 성별은 수련인(修煉人) 육신의 성별입니까, 아니면 主元神(주왠선)의 성별입니까?”[3]이다. 사부님께서는 부처에 대한 구분, 층차, 상태와 수련의 최종목적에 대해 말씀하셨다. “정법(正法)을 얻고 정과(正果)를 이루면 원만(圓滿)으로 여기는데, 그러면 저희가 어느 정도까지 수련해야만 비로소 원만한 것입니까?”[3] 라는 질문에서도 사부님께서는 정과와 수련의 목표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고,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점오(漸悟)하는 것인데 저희는 언제 점오상태에 들어갑니까?”[3]에서는 천목이 열려 볼 수 있다면 보는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이는 집착하는 것과 다르다고 하셨다. 이런 정황에 대한 사부님의 말씀은 나처럼 당시에 봐야 하는지 보지 말아야 하는지의 관계를 바로잡지 못하는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이었다.

사부님께서 이번에 보도원들에게 하신 설법은 보도원들이 이후 보도원 업무를 잘하도록 하는데 극히 중요한 지도적 의의가 있었다. 이번 설법 후 나는 또 라오쉬, 이 씨 등 몇몇 수련생과 함께 사부님의 설법 녹음 그대로 글로 정리하여 사부님께 드린 후 수정되어 출간을 준비했다. 사부님께서는 그 후로 창춘에 한동안 머무르시며 각 지역 설법 녹음을 정리하여 ‘전법륜(轉法輪)’ 책 출간을 준비하셨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매우 바쁘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사부님께서 하려는 일에 대해 누구도 도움을 드릴 수 없었으며, 이후에는 우리 누구도 사부님께 폐를 끼쳐드리지 않았다.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이미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기에 스스로 더욱 정진하고 착실히 수련하는 것뿐이었다.

남편이 베이징으로 배치받은 후 나는 베이징에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결국 고급검찰대학에 가기로 했다. 그들에게도 형식논리와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부족했기에 나를 채용하는 데 동의했다. 이렇게 고급검찰대학에서 이례적으로 우리 부부를 같은 학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1994년 연말에 정식으로 베이징에 전근하며 대학원장이 우선, 제 시범강의를 들어보고 잇따라 수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내가 근무하는 강의실은 종합강의실로 나를 포함해 두 명이었고, 당시 주임은 중앙당교에서 전근 온 직원으로 역시 철학을 가르쳤다. 아마 그는 혼자였기에 사무실에 침대, 전화, 샤워실 설비까지 갖춘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처음에 출근신고를 했을 때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서지 못하게 사무용 책상을 복도에 놓고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나는 새로운 직장도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고, 어디를 가든 모두 수련이었다. 남편은 조급한 나머지 억지로 책상을 사무실 내로 옮겼다. 주임도 방법이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려 해도 받아들여야 했으며 그의 권한 밖이었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금방 적응하지 못했다. 며칠도 안 되는 사이에 모든 환경이 변했고, 직장 동료와도 익숙하지 않았으며, 주변에 아는 수련생이 없었다. 남편은 내가 베이징에 상경할 때부터 나와 이혼을 하려고 준비했다. 나는 이 모든 일체에 다소 얼떨떨해졌고, 생각 속에 자꾸만 창춘이 떠올랐다.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사부님, 어찌하여 저를 베이징에 배치하셨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창춘이 얼마나 좋았던가. 나의 한 방면에서, 정이 제거되면 다른 방면의 정이 또 나타났고, 늘 베이징은 너무나 생소한 곳으로 여겨졌다. 창춘의 길림대학교가 얼마나 좋은가, 거긴 사람도 익숙했다. 나중에는 꿈에서마저 창춘의 눈이 다른 지역에 내린 눈보다 더 하얗다는 꿈을 꿀 정도로 집착했다.

나는 조금 속수무책으로 어떻게 수련해야 할지 몰랐고, 집에서 몰래 눈물을 흘렸으며, 이후에 집에 있으면 괴로워 자주 울었다. 남편은 나에게 훈계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수련할 생각이 있는 거야, 수련하지 않을 거면 보통사람으로 잘 지내, 잘 수련하려면 수련을 잘 하고, 종일 질질 짜고 어쩔 셈이야!” 나는 남편의 훈계가 틀리지 않는다고 느껴졌고, 마치 사부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 나에게 말씀해주시는 것 같았다. 나의 수련상태가 좋지 않으니 어서 조절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중에 나는 한 노 수련생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본 후 나중에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나의 정신이 너무 긴장된 것을 보고, 노 수련생은 자신의 부인과 함께 나를 데리고 자죽원 공원으로 산책하러 갔다. 나는 수련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일시적으로 환경의 변화가 너무 커 봉폐된 것 같아 어떻게 수련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극도의 고통을 느꼈었다. 노 수련생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로 타일렀다. 나는 매우 괴로웠고 또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비웃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 당시 이런 사람이 있어서 나의 마음속의 말을 할 수 있다는 자체로 매우 위로되었고, 계발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수련생들이 그 당시 나에 대해 진정어린 도움을 준 것이 매우 감사했다.

(계속)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인과(因果)’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파룬따파의해-창춘(長春)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


원문발표: 2021년 4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수(1992.5-1999.7)>수련체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26/4216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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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1994년 설이 지나 남동생의 병이 재발하여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기차를 타고 하얼빈 종양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재수술은 하지 말고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우리 가족들도 동의했다. 집에서 나올 때 나는 사부님의 책(당시 사부님의 첫 번째 책 ‘파룬궁’이 출판되었다)을 가지고 왔다. 기공을 연마하는 친구가 다른 기공 책을 선물하면서 남동생에게 유용할 것이라고 했다.

남동생은 대수술을 두 차례나 받아 원래 모습이 아니었다. 호르몬을 먹어서 체중이 갑자기 절반 가까이 불었고 종양이 신경을 압박하여 몸 한쪽이 마비되어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다. 나와 여동생, 올케가 번갈아 가면서 병간호를 했다. 아버지도 충격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인지 가끔 병원에 와서 보곤 했다. 나는 난을 넘는다고 생각하고 엄격히 자신에게 요구했다. 시간만 나면 책을 꺼내 읽었는데 대법은 나에게 무궁한 힘과 지혜를 주었다. 나는 매일 낙관적이고 평화로운 심태로 우울해 있는 가족들을 대했다. 나는 가족들의 피로를 덜어주려고 많은 일을 혼자 했다. 그리고 최대한도로 정과 좋지 않은 사상을 배척하고 머릿속에 법을 많이 담으려고 했다. 머릿속에 온통 법으로 충만하니 예전의 나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50킬로도 안 되는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었지만, 당시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줬어도 피곤을 몰랐다.

나를 본 가족들도 더는 우울해하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내어 가부좌했다. 그리고 남동생을 부축해 앉히고 연공을 가르치고 파룬궁이 어떻게 좋으며 내 몸의 변화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알려줬다. 남동생은 몸이 허약하여 잠깐 따라 하고는 바로 누워야 했다.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책을 가져온 것이 생각났다. 마음으로 ‘두 권의 책을 가져왔는데 한 권은 법이고 한 권은 다른 책이다. 이것은 나를 고험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난잡한 책은 보지 말자! 나는 줄곧 사부님의 책을 보았는데 나의 변화는 전부 다 파룬궁을 수련하고 생긴 것이 아닌가? 불이법문의 문제가 또 나를 교란하는데 나는 절대 가지지 않겠다’라고 하면서 돌아가서 책을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문득 왜 남동생에게 사부님의 책을 읽어주지 않는가?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부님의 법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한번 다 읽어준 후 남동생에게 혼자서 볼 수 있냐고 물었더니 남동생은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부축하여 앉히고 그가 읽기 쉽게 책장을 넘겨주었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글을 적겠다고 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왜 나의 뇌에 종양이 생기고 왜 조상의 병이 유전되었는지 알려줄 수 있어?’라고 적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당시에 대답할 수 없었다. 동생은 책을 읽었으나 여전히 병을 내려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풀지 못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가?

나는 창춘(長春)으로 돌아가서 수업해야 하므로 병원에서 오래 간호할 수 없었다. 내가 두 번째로 갔을 때 남동생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여동생들은 지쳐서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여동생들이 간 후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보냈으나 나의 몸은 오히려 정상인보다 더 좋았다.

하루는 남동생을 부축해 의자에 앉히고 다른 물건을 잡으러 가는 사이 ‘쾅’하는 소리가 났다. 의자 주위에 넘어지지 말라고 여러 군데 막아놓았으나 남동생은 바닥으로 넘어져 머리를 박았다. 내가 뛰어가서 그의 머리를 들어 올렸더니 이마에는 혹이 나 있었다. 내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으나 너무 무거워서 일으킬 수 없었다.

나는 남동생의 수술 후의 상처를 보면서 아픈 동생에게 내가 상처를 보탰다는 생각에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어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어찌 울 수 있는가? 나는 단번에 눈물을 멈추었다. 그리고 옆 병실로 달려가 두 청년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내가 정에 흔들렸기에 그 관을 잘 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동생들이 나와 교대하러 왔고 나는 베이징의 집으로 돌아왔다. 벽에 걸려 있는 사부님의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눈물이 그렁해서 사부님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자상하고 자비롭게 나를 보고 계셨다. 사부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더 친근하게 느껴졌고 사부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내 마음속에 셀 수없이 많은 것 같았다.

그때 관을 넘으면서 내가 정을 너무 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 나는 혈육의 정 때문에 잘 먹지 못하고 잘 자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고생하더라도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특히 자신의 친인에 대해 더 그러했다. 파룬궁을 수련하고 나는 바로 이 정이 자신을 해쳤고 정에 휘말려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의 설법에서 나는 ‘정이 바로 마(魔)’이고 이기적인 것이며 정에서 많은 집착심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동생은 나를 도와 그에 대한 정을 제거하게 해주고 있고 나를 제고 시켜주고 있으며 내가 제고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렬했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 ‘사부님, 저는 반드시 정을 내려놓을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내가 세 번째로 병원에 갔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나는 자신에게 엄격하게 요구하면서 조금도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자신을 진정한 수련인으로 간주하고 매사에서 법에 부합되게 했다. 우리 자매들이 온 힘을 다해 남동생을 간호하고 있을 때 고향 쑤이화(綏化)에 계시는 아버지가 신장병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에 사람이 없어 아버지 회사에서 사람을 구하여 간호하고 있다고 했다. 며칠 후 나의 고향인 하이룬시에서 소식이 왔는데 큰아버지의 작은아들도 병이 위급하여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큰아버지와 큰엄마는 아이 다섯을 두고 세상을 떠났는데 우리 아버지가 돌봐주면서 키웠다. 일부는 일하고 일부는 가정을 이루었다. 하얼빈시에 사는 이모는 자동차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쳤다. 정말로 화는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내가 그 마음을 내려놓는가 내려놓지 못하는가를 보고 그것들은 모두 나를 겨냥하여 온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나는 심성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일체를 내려놓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했다.

남동생을 돌보면서부터 나는 줄곧 기차를 타고 하얼빈, 창춘, 베이징으로 분주히 오갔다. 내가 베이징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동생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추도식에 참가하라는 전화가 왔다. 나의 마음은 아주 평온했고 속으로 ‘가야 할 사람은 가야 정상이지!’라고 생각했다.

남동생의 일은 나에게 한 가지 도리를 깨우쳐주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친인들이 나의 곁을 한 명씩 떠나도 그들을 붙잡고 싶지만, 어차피 붙잡을 수 없다. 나도 수련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의 아들도 내 옆에서 고통스럽게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고통만 있을 뿐 무엇을 남기려 해도 남길 수 없다. 수련하고 나서 사람이 고생스러운 것은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고생스럽게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집착하는 정을 반드시 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 깜짝할 새에 1994년 8월 중순이 되었다. 나는 수업하러 창춘에 돌아왔다. 수업하기 전에 쉬(徐) 씨 집으로 갔는데 쉬 씨는 며칠 후에 사부님께서 돌아오시는데 함께 마중 가자고 했다. 나는 아주 기뻤다. 줄곧 밖에서 돌아다니면서 많은 관을 넘느라 오랫동안 사부님을 뵙지 못했다. 공항에 가서 사부님을 마중하던 그 날, 나는 분홍색에 무늬 레이스가 달린 산뜻한 투피스로 갈아입었다. 멀리서 사부님께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나는 기쁘기도 하고 격동되기도 했다. 사부님께서는 나와 반갑게 악수를 하면서 언제 돌아왔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한 주가 됐다고 했다. 우리는 공항에서 사부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부님께서는 옌지(延吉)에 가서 설법하기 전에 잠깐 창춘에 들리신 것이었다. 사부님께서 떠나기 이틀 전에 나는 밤을 새워 심득체험을 썼다. 흰 종이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12페이지를 적었다. 나는 인생의 고뇌, 관을 넘은 과정과 관을 넘으면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고달픈지 사부님께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두 마디를 적었다. “나의 사부님은 오로지 리훙쯔(李洪志) 사부님뿐이고 마음엔 오로지 파룬궁뿐입니다.” 파룬궁을 끝까지 수련하겠다는 다짐을 말씀드린 것이다.

우리는 공항으로 가서 사부님을 배웅했다. 공항 대기실에서 우리는 사부님을 에워쌌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부님 자신의 ‘노리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당시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점화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몇 년 후에야 수련의 길에는 크든 작든 어떤 우연한 일도 없다는 것을 점화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나는 심득체험 쓴 것을 드렸다. 사부님께서는 비행기 안에서 나의 심득체험을 읽으셨을 것이다.

(계속)


원문발표: 2021년 4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19/4216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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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진정으로 수련에 들어서니 마난도 그칠 새 없이 찾아왔다. 우선은 몸의 소업이었다. 오후에 수업해야 하는데 오전에 배가 몹시 아파 ‘오후 수업을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했고, ‘그래도 많은 학생의 수업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수업 장소로 갔다. 교실로 들어가서 수업을 시작하자 신기하게 고통이 사라졌다. 마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무사히 수업을 마쳤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다시 아프기 시작해서 곧바로 귀가했다. 너무 아파 도중에 아는 사람을 만났어도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채 지나쳤다. 고통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6층 계단을 뛰어올라 집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오늘 제가 이겨냈습니다.’ 이는 소업이고, 사부님께서 잘 배치해주셔서 수업도 정상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런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전에 편도선염이 발생하면 통증과 함께 목이 붓고 심지어 곪으면서 열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특별했다. 인후가 붓고 곪았지만 열이 없었다. 또 한 번은 고열로 앉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목이 아프지 않다가 또 이틀간 고열에 시달리며 죽만 조금 먹을 수 있었다. 세 번째 날이 되어서야 일어날 수 있었는데 기분이 상쾌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병과 같은 증세였으나 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예사롭지 않은 반응이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장기간 병고에 시달려온 나는 그런 것을 특별히 고험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아마 속인 때 겪은 고통이 너무 많아서인지 수련 후 몸으로 겪는 소업도 많지 않았으며, 주로 심성에서 많이 겪었다.

시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남편(루)이 우한에서 급히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어머니 병이 다 나은 것이다. 남편은 어머니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시어머니 치료비로 마련한 돈 3천 위안(한화 약 52만 원)도 시어머니에게 주었다. 남편과 나는 시어머니에게 준 3천 위안 때문에 크게 다퉜다. 그러나 나는 수련자라는 생각이 들어 더는 다투지 않았고, 3천 위안의 돈도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남도 아닌 시어머니에게 준 것이니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었고, 마음도 편안했다. 만약 수련 전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돈은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로 인한 억울함을 절대 참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당신의 어머니에게 준 돈인데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편은 무슨 일에서나 나의 잘못을 찾아냈고, 별일도 아닌데도 크게 화를 냈다. 그런 것이 원인이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우리 부부는 오랜 기간 그렇게 화합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파경의 위기에 처해 당장 가정이 무너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법을 얻기 전인 1991년 가정이 원만하게 영위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혼 문제를 제기했고 남편도 동의했다. 남편이 집에 왔을 때 이혼신청서를 갖고 왔다. 그런데 행정 절차상 한 가지 서류가 빠지는 바람에 우한으로 돌아가서 다시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아야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직장동료가 사무실로 사람을 보내 우리 부부 사이를 조율했고, 남편의 졸업 시기가 닥쳐오므로 그 후 다시 결정하자고 했다. 이혼 문제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지만, 생활은 역시 계속 조화롭지 못했다. 그러다가 수련자인 내가 이 문제와 관련해 나 자신을 개변시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 더는 내 입으로 이혼이란 말을 언급하지 않았고, 남편을 잘 대해주면서, 내 잘못으로 인해 ‘파룬궁이 좋지 않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남편이 집에 돌아온 후 며칠간 나에게 화만 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은 늘 아파트 밑에 내려가서 전화를 받았으므로,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은 나를 눈치를 채지 못하는 바보로 여긴 건지, 날마다 조금씩 그의 일을 내비쳤다. 그는 “우한대학에서 같은 여자 연수생 친구를 사귀게 되었고, 점차 관계가 좋아졌다”라는 말을 내비쳤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다 털어놓았다. “그가 좋아졌고, 매우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라고 고백했다. 그쪽 여성도 가정이 있었다. 듣는 순간 온갖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단 말인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가?’ 그러나 즉시 ‘나는 수련자이므로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참았다.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없이 괴로운 마음으로 지낸 세월의 일들이 눈앞에 선하게 펼쳐졌다. 남편을 위해 나의 모든 걸 바쳤고, 그동안 나의 생명과 헌신의 대가로 오늘의 명예와 성공을 얻은 남편인데, 그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보답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슬펐다.

풍파는 계속되었다. 바로 그때 헤이룽장에 있는 남동생이 뇌종양이라는 소식이 왔다. 악성일 수 있다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내게 물어왔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남동생의 병은 아버지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남동생은 우리 이씨 가문의 유일한 남자다. 하얼빈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 사범대학에서 외국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약관 33세에 가장 젊은 부교수가 되어 일본 연수까지 마친 젊고 유능한 교수로 슬하에 예쁜 딸아이(5세)도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동생과 각별한 사이였고, 어려서부터 남동생을 돌봐주었으므로 남동생도 나를 가장 신임하며 따랐다. 동생 소식을 들은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동생을 도우러 갔다. 아버지와 여동생들과 함께 남동생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검사를 받으러 갔다. 1993년 여름방학 때 일이다. 당시 남편은 우한대학을 졸업한 뒤 베이징 검찰원 소속 국가검찰관대학으로 발령받아 ‘헌법학’을 강의하면서 학교숙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남편은 베이징역에서 우리 일행을 맞이하여 톈탄병원으로 향했다. 엑스레이 검사결과 악성종양으로 판정되었다. 가족들 모두 괴로워했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수련자이므로 심태는 그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고험을 반드시 잘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은 톈탄병원에서 수술로 대부분 종양을 제거했고, 수술회복 후 아버지의 의견대로 재발을 우려해 산둥 쯔보에서 방사선치료를 받기로 했다. 나는 동생을 따라가지 않고 베이징에 남아 계속 남편과 고험을 넘기로 했다. 그 여성은 끊임없이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남편은 함께 숙소에 있는 나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나에게 그녀의 ‘연서’를 보여줬고, 녹음도 들려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나에게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단 말인가? 어떤 때 남편은 자신들이 함께했던 세세한 내용까지 말했다. 바늘로 한 땀 한 땀씩 찌르는 것 같았지만, 모두 나의 마음을 겨냥해 오는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려는 것 같았다. 남동생의 병과 남편의 행동은 동시에 교차로 진행되었는데 나를 짓누르려는 것 같았다. 남편은 그것도 모자랐는지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친정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도 서슴없이 욕을 했다. 그럼 나는 욕을 하다가 멈춘 남편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통 일반 사람이 아니라 수련자인 나를 돕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그랬어도 마음은 고통스러웠고,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남동생은 잠시 잠잠해져 베이징에서 며칠 더 머물다가 다시 창춘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나의 수업은 다른 교사가 대신 봐주었지만, 나는 계속 수업을 해야 했다. 시간이 나면 늘 쉬 씨 수련생 집에 찾아가 함께 제5장공법을 연마하고 교류했는데, 가끔 사부님도 뵐 수 있었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석가모니 전’이라는 비디오테이프를 가져다 우리 몇 사람에게 보여주셨다. 해외에서 제작한 것으로 석가모니가 법을 전하고 사람을 제도하는 이야기였다. 꽤 긴 시간의 비디오로 석가모니가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해 심산에서 고생하며 수련하고 나중에는 보리수 아래에서 ‘개공개오’한 후 사람을 구도한 이야기다. 이는 내가 처음 부처에 대한 영상을 본 것이다. 며칠 후 사부님께서 오셨다. 우리는 사부님 옆에 둘러앉았다. 사부님께서 물으셨다. “어땠나요?” 영화를 본 소감이 어떠한지 물으셨다. 나는 부처에 대한 지식이 매우 적고 내용도 일부만 알 수 있었으나 하나만은 깊이 느낄 수 있어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석가모니 부처의 수련 시기는 매우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때 바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지금의 이런 수련은 고생스럽지 않으며,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이 없고, 해야 할 일도 전부 하면서 하는 게 아닌가.

창춘의 초기 제자 중 많은 사람은 가정고험을 넘고 있었다. 갓 수련을 시작하면서 고험을 매우 힘겹게 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교무실의 한 동료 교사는 수련 전에는 남편이 늘 아내를 잘 대했으나, 수련 후 갑자기 태도가 변하면서 늘 다툼이 생겼다. 한번은 그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 그래도 참으며 남편을 달랬으나, 아직도 다 내려놓지 못했으므로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녀는 “리리, 나중에 우리 둘이 나가서 함께 살면 이런 일이 없을 것 같다. 둘이서 서로 잘 보살피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러면 안 돼. 그런 게 아니야.” 하고 대답했다. 한번은 여러 명의 수련생과 함께 또 사부님을 뵈었다. 동료가 비슷한 문제를 언급해서 나는 그에게 “모순을 회피할 수 없다”라고 말해 주었다. 사부님께서 나의 견해에 동조해주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박사학위의 부교수라는 직위로 베이징에서 방 3개에 거실이 딸린 집을 배정받았다. 스징산구 융러소구 84동 410호로 큰 평수의 집이었다. 나는 수업이 없을 때는 베이징에서 함께 실내장식을 했다. 집수리가 완성된 후 남편은 아들과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직장을 베이징으로 옮길 수 없어서 홀로 창춘에 남아 있어야 했다. 남편도 시간을 내어 창춘으로 나를 보러 오기도 했다. 그 한동안(1년 반) 나는 창춘에서 일부 활동에 참여했다. 창춘 수련생 제1회 수련좌담회에 참가해 수련생의 발언을 들었다. 그중 많은 수련생이 많은 불교 중의 일을 언급했다. 나는 즉시 그것은 우리가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불이법문’의 문제에 저촉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방면에서 침통한 교훈이 있었으므로 그 문제에 매우 민감했다. 그 문제를 즉시 보도원에게 건의했다. 창춘 수련생들은 정체적으로 한동안의 수련을 거친 후 책임자들이 의견을 모아 법회를 열기로 했다. 이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수련생들은 모두 법회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인식했고, 이번 법회를 통해 ‘파룬궁(法輪功)’ 제자들이 처음 모이는 ‘큰 집결’이라고 칭했다. 우리는 밤새워 가위로 ‘창춘 파룬궁 수련생 심득 교류회’라는 큰 글자를 오려냈다. 그리고 사부님의 시사(詩詞) “공(功)을 수련하는 길은 마음이 지름길이라, 대법은 끝없나니 고생을 배(舟)로 삼을지니라(功修有路心爲徑 大法無邊苦作舟)”라는 글귀도 오려냈다.

내 기억에 지린대학에서 열린 법회 날, 수련생들은 모두 미소를 띠고 성대한 축제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일찍 현장에 도착했다. 그날 날씨는 유난히 푸르렀다. 나는 지린대학 강당 후문에서 그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법회에서 수련생들이 단상에 올라 발언했다. 어떤 사람은 준비해온 발언고를 읽었고, 어떤 사람은 원고도 없이 단상에 올라 파룬궁을 수련한 후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라오궈라는 수련생이 단상에 올라 심득체험을 발표했다. 그는 아내가 단가에 들러 사부님 학습반에 참가하여 학습이 끝난 뒤 일어서서 걸어 나온 과정을 이야기했고, 또 학습반에 참가한 후 아내가 소업했던 이야기도 했다. 부부가 함께 수련하면서 관을 넘을 때 서로 격려한다고도 했다. 아내가 관을 넘기며 고통으로 바닥을 뒹굴 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돼지 잡는 백정이었고, 당신도 그렇게 큰 업을 지었으니 이렇게 소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소업을 하겠는가? 꼭 이겨내야 한다!” 그의 아내는 설법반에 참가한 후 이렇게 큰 변화가 발생했고 자신이 가장 분명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이후 남은 관과 난의 고통 속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날의 법회는 참으로 마음을 격동시켜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법회 진행 과정도 녹화했다. 우리가 돌아와 비디오를 볼 때 나는 육안으로도 비디오에서 상서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수련생들이 입장할 때 높은 하늘에 밀짚모자 모양의 형상이 줄지어 북측 문을 통해 법회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법회장 중심에는 지름이 매우 넓은 큰 빛기둥이 하늘을 찌르듯이 높이 솟아있는 것도 보았다.

며칠 후 사부님께서 다른 지역에서 설법을 마치고 돌아와 법회 비디오를 보셨다. 나중에 쉬 씨 수련생이 말하길, 사부님께서 비디오를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번 법회에 올 것이 다 왔고, 무엇이나 다 있었는데, 나만 없었네.”

쉬 씨 수련생 아내가 작은 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그 말을 듣고 매우 감동했다. 이번 법회가 범상치 않았으며 대단히 상서로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는 쉬 씨 가족과 그 외 평소 잘 알지 못했던 두 명의 수련생과 함께 차를 몰고 사부님 고향 궁주링시로 가서 사부님의 집에 도착했다. 집은 궁주링시 중심에 있는 회색기와 집이었다. 본채에 딸린 집으로 크기가 같은 그리 크지 않은 집이었다. 안채와 바깥채가 모두 동북식의 구들 방이다. 우리는 가지고 간 자로 방 내부와 밖의 모든 곳의 크기를 쟀다. 그것이 우리가 간 목적이었다. 나는 벽의 벽돌을 만지면서 자세히 일체를 보며 생각했다. ‘이곳은 사부님께서 전에 사시던 곳이다. 앞으로 이곳의 모든 것은 기록에 남을 것이며 모두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당시는 사부님에 대해서 더 높이 이해할 수 없었다. 법으로 더 높이 사부님을 인식할 수 없었으나 이 집과 이 지역이 앞으로 매우 깊은 함의가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집안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을 현상해 보니 우리 몸에 백색 광환이 둘러싸여 있었다. 어떤 수련생은 그것을 ‘파룬(法輪)’이라고 말했다.

(계속)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사: ‘홍음-法輪大法(파룬따파)’


원문발표: 2021년 4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수(1992.5-1999.7)>수련체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12/4216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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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사부님께서 초기에 법을 전하실 때 지극히 쉽지 않으셨다. 마의 교란도 매우 컸다. 사부님께서 학습반을 개최하신 후부터 온갖 난잡한 기공이 모두 쏟아져 나왔는데 기공이라 말할 수도 없는 것들로, 그런 공을 연마하는 사람은 만취한 것처럼 비틀거렸으며 공원에 더욱 많았고 난잡했다. 때론 창춘 승리공원에 가보면 무슨 주권(走圈, 원주 둘레를 열 몇 걸음 폭으로 걷는 팔괘장의 수련법), 무슨 기 채집으로 온통 난장판이었다.

초기 사부님 학습반에 참가한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내가 아는 사람으로 류펑차이(刘凤才), 자오제민(赵杰民)이라는 사람이다. 초기의 표현은 경건했으나 나중에는 수련생들 사이에서 자신의 공능을 크게 떠들어댔고, 공능을 추구하는 마음이 극도로 강했으며, 이후에 그들은 누구보다 높다며 자심생마(自心生魔)가 생겨 사부님에 대해 나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항상 사부님으로부터 필요한 공능을 얻어 금전적인 이득을 보려 했고, 사부님께 물품을 요구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할 때면 곳곳마다 다니며 사부님에 대한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모함을 했다. 나는 그들의 이러한 바르지 않은 사람 마음을 알고 있어서 그들과 접촉을 적게 했으며, 나중에 수련생들로부터 이들이 나쁜 일을 저지른 사실을 전해 들었다.

사부님께서 가신 후 나는 좀 막연해져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엇이 진정한 수련인지 깨닫지 못했으며,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내용도 많이 잊어버렸다. 그때는 녹음테이프나 비디오도 없고 책도 없었다. 나는 다시 예전처럼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초에 법을 얻도록 도와준 교원실의 그 동료는 어떤 기공을 매우 잘 연마했다는 또 다른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가보니 그들이 중얼중얼 말을 했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은 정보어라고 했는데 사실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우주어였다. 나는 단지 그들을 보고 조금 호기심이 갔으나 배우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또 곳곳을 다니다 창춘에 있는 큰 사찰에서 동불상 하나를 모셔왔다. 나는 불교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고,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것들을 여태껏 접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절에서 불상을 보니 마음속에 부처님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났다. 나는 수불(修佛)하고 싶어졌고, 어떻게 해야 닦는 것인지, 어디에 부처님이 계시는지 생각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사부님을 기공사로 알았고, 가장 좋은 분이며 가장 바르고 내가 존경하는 기공사였다. 그러나 이것은 수불하는 것과는 같은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나는 그 직장 동료가 이미 불교에 귀의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나도 데리고 귀의하겠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언제 귀의시켜 줄지 물었고, 그녀와 나는 날짜를 정했다. 절로 귀의하러 가는 그날 내가 막 떠나려고 하자 교원실 주임 왕 선생이 찾아와 “리리 씨, 오늘 교원실에서 봄나들이를 갈 거예요, 사진도 찍고. 꼭 참가해야 해요, 지금 바로 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나는 “일이 있어서 곧 가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조급한 심정으로 말했다. “안 돼요. 빨리 가야 해요. 당신만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그때 ‘이건 수불하지 말라는 것인가, 내가 가려고 할수록 나를 가지 못하게 하는데, 무슨 봄나들이 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참가하지 말고 여전히 절에 가서 귀의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때 사부님께서 점화해 주신 것인데, 불이법문(不二法門)이 나를 끌어당겨 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흐리멍덩하게 큰 착오를 범했고, 정말로 마음 아픈 굽은 길로 간 것으로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후회하고 괴롭다. 어찌하여 그렇게 우둔하고 판별 능력이 없었을까.

사부님께서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서둘러 사부님을 뵈러 갔다. 당시 여러 대의 택시를 탔는데 마침 나는 사부님과 한 차에 앉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매우 엄숙하셨고, 한마디 말씀도 없으셔서, 나는 나에게 문제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부님께서 조금 괴로우신 것 같았다. 한참 지나서 내가 사부님께 여쭤봤다. “사부님, 무엇이 주이스(主意識), 푸이스(副意識)인가요?” 사부님께서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제야 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고, 사부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못마땅해하셨음을 알았다. 사부님의 이런 모습에 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불안했지만 나는 또 자신이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몰랐다. 이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사부님께서 초기에 얼마나 어려우셨는지 알 수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사악한 구세력이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실 때부터 파괴를 멈추지 않았고,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그들의 배치가 있었으며, 모든 일마다 사람마다 배치가 있었다. 그때의 교란과 파괴 형식 역시 법을 얻은 수련생이 대법의 문으로 들어설 수 없게 온갖 수단을 취했고, 당시 청성하지 못한 수련생의 상태와 집착을 이용해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악랄한 한 수를 통해 인연 있는 제자가 법을 얻는 것을 가로막았다. 당시 수련생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엄중한 문제를 겨냥하여 사부님께서는 창춘에서 연속 학습반을 개최하셨고, 나도 사부님 설법반에 연속 참가하여 사부님 설법을 열심히 들었다.

사부님께서 학습반을 개최할 즈음인 1993년 4월 초, 시댁에서 갑자기 시어머니께서 후두암에 걸려 선양에 수술하러 가야 하니 나에게 돈을 준비해 달라는 소식이 왔다. 남편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 이 일은 내가 처리해야 했다. 나는 적금해둔 3천 위안(약 51만 원)을 출금해 시어머니께서 병원으로 가실 때 드리려고 했다. 다시 생각을 바꾸어 ‘시어머니께서 사부님 학습반에 참가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처럼의 기회인데 학습반에 참가하면 어머님의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니가 오셨고, 내가 수업 중이라 큰 올케와 함께 6층 계단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수업을 마치고 뵈러 갔을 때 시어머니는 그 자리에 앉아 울면서 우물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왔지?” 이 뜬금없는 말에 나는 부체가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시어머니께서 무엇이나 다 모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승리공원에 천목이 열려 부체를 뗄 수 있는 수련생을 찾아갔다. 이 수련생은 시어머니를 보더니 조용히 나에게 말했다. “두 마리 족제비인데 하나는 목에 감겨있고 다른 하나는 등에 엎드려 있어요.” 그녀가 이 두 마리를 떼어버리자 족제비 두 마리가 울었고, 이 공간에서 표현은 시어머니가 눈물을 흘렸다.

1993년 4월 하순, 사부님께서 지린대학교 강당에서 파룬궁(法輪功) 학습반을 개최하셨다. 나는 아들 루루, 시어머니와 함께 학습반에 참가했다. 사부님께서는 설법중에 ‘불이법문의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고, 이것의 엄숙함을 매우 자세히 말씀하시고 반복적으로 강조하셨다. 나는 단번에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내 문제에 대해 말씀해주신 것이 아닌가?!’ 나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나는 참답게 사부님 설법을 들었고, 이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알아들었다. 본래 이것이야말로 수련을 지도하는 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부님께서는 부처님이 아니신가?! 어디에 가서 찾는단 말인가?!’ 나는 심정이 격동되고 또 부끄러웠다. 나는 귀의증을 버리고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이번에야 깨우쳤습니다. 전에 범한 잘못을 이후에는 절대 범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심각한 교훈으로 연공은 전일 해야 하며 반드시 ‘불이법문의 문제’에서 명심해야 한다. 이번 학습반이 끝난 후 나는 사부님께 짧은 심득체험을 드렸다. “사부님 저는 한마음으로 부처를 수련할 것이며 부처로 수련 성취하겠습니다.” 시어머니께서도 이번 학습반에 참가한 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원래는 목소리가 안 나왔었는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또 통증도 사라졌다. 전에는 배가 크고 뚱뚱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나 10일 학습반에 참가한 후 배도 작아지고, 살이 빠졌으며, 가볍게 걸음을 걸을 수 있어서 매우 기뻐하셨다.

사부님의 학습반 학비는 가장 저렴했다. 신 수련생은 40위안(약 6800원), 노 수련생은 절반 가격인 20위안이었다. 이런 정황마저 기공계의 일부 기공사의 질투와 불만을 샀고, 자신들의 돈벌이에 영향을 준다며 괴로워했다. 당시 학습반에서 받은 비용에서 일부분은 중국 기공과학연구회에 내야 했고, 일부는 창춘 기공협회에 내야 했으며, 장소 대여비용까지 차감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다른 지역에서 학습반을 개최할 때 필요한 자료 비용마저 매우 모자라 책을 만들 돈도 없었다. 나는 더욱 많은 자세한 내용은 모르나 이런 정황의 일부는 나도 경험했고, 일부 실제 정황은 나도 목격했다. 사부님께서 자금이 부족해 책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생겨 나의 심정은 매우 괴로웠고, 눈물을 머금고 사부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내가 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부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고, 사부님께서 몹시 힘드실 텐데!’ 나는 사부님께서 당시 얼마나 괴로워하셨는지 느낄 수 있었다.

창춘에 쉬(徐) 씨(후에 창춘 보도소 책임자가 됨) 일가도 1993년에 개최된 이번 학습반에 참가해 법을 얻었다. 이후의 수련에서 그들 집도 내가 자주 가는 곳이 되었다. 이번 학습반에 참가한 후, 나는 또 사부님께서 개최하신 다음의 학습반에도 참가했다. 내가 강당을 나갈 때는 두뇌가 청성해졌고, 오직 확고한 일념만이 있었다. 오늘 이후부터 나는 착실하게 수련하겠다는 그것 외에는 어떠한 염두도 없었다. 사부님께서 연속 학습반을 개최하시는 과정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졌고, 창춘의 많은 공원에 하나 또 하나의 연공장이 건립됐다. 지린대학교 서쪽에 있는 과학기술청사 문 앞에 작은 화원 같은 공터가 있다. 바닥의 인도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돌이 깔렸었고, 옆에는 인공적인 연못에 물이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사부님께서 친히 이곳과 주변 환경을 정화해주셨고, 그 후로 우리는 이곳에서 연공했다.

(계속)


원문발표: 2021년 4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4/5/4216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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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혜망

글/ 중국 대법제자 리리(李莉), 유편(遺篇)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법을 얻어 착실히 수련

내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헤매며 갈 곳을 모르며 심신이 무너져가는 1992년 여름, 교원연구실의 동료가 나의 집에 찾아왔다. 그녀는 기쁜 심정으로 말했다. “지금 기공 학습반에 참가해 새로 파룬궁(法輪功)이라는 기공을 배우고 있어요, 꽤 괜찮은 거 같아요.” 나는 파룬궁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침대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가르쳐주세요. 지금요.”

그녀는 나에게 포룬(抱輪) 동작을 가르쳐주고 말했다. “조급해 마세요, 파룬궁 학습반에 참가해 배울 수 있어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평소 관계가 매우 좋아 나는 그녀를 믿었다. 며칠 후 나는 아들과 함께 사부님께서 지린(吉林)성 위원회 강당에서 개최하신 대공(帶功) 보고회에 참가했다. 이는 내가 처음으로 사부님을 뵙게 된 날로 그날 사부님께서는 흰색 바탕에 줄이 있는 셔츠를 입으셨다. 키가 매우 컸고 이분은 정말로 바르며 정직하고 올곧아 그 누구와도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아들은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부님 신체에서 금빛이 발산되는 것을 발견했다. 아들도 보았다. 나는 속으로 ‘정말로 보통이 아니시구나, 어찌하여 이렇게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대공 보고회가 끝나자 나는 사부님을 뵈려고 즉시 밖으로 달려나갔다. 사부님께서는 파란색 큰 트럭에 오르셔서 화물을 싣는 적재함에 앉으셨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매우 즐거워하셨고 편안해 보였다. 나는 사부님을 따라가고 싶었다.

여름방학이라 남편이 우한(武漢)대학에서 돌아와 그에게 말했다. “며칠 후 기공 학습반에 참가하려는데 파룬궁이라고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뜻밖에 남편이 시원스럽게 “참가해요. 내가 날마다 자전거로 데려다줄게요.”라고 대답해 나는 매우 즐거웠다.

1992년 9월 7일, 이날은 나의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는 정식으로 사부님의 10일 설법반에 참가했다.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고 너무 설레고 격동됐다. 매일 집에 돌아와서는 기억나는 내용을 남편에게 들려줬다. (지금 생각하면 옳지 않으며, 사부님의 법을 단장취의 해서는 안 된다) 설법을 듣는 나날에 날마다 사부님을 뵙는 기회도 많았다. 중간에 휴식 시간이나 밤에 설법이 끝나면 나는 방법을 대 사부님의 주위를 맴돌았다. 사부님을 더 뵙고 싶었을 뿐으로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으며 사부님께서 어디로 가시면 따라다녔다. 어느 날 사부님 설법이 끝난 후 나는 마지막 남은 몇 명과 함께 사부님을 따라 강당에서 나왔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명의 수련생과 앞에서 걸으셨고 나는 혼자서 뒤에서 따라갔다. 걷다가 나도 모르게 사부님의 발자국을 밟으며 걸었고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사부님의 발자국을 따라서 걸어야지.” 사부님께서 내 말을 들으시고 뒤돌아 나를 보고 웃으셨다.

나는 집에 돌아와 가부좌했다. 가부좌를 틀어본 적이 없어 다리가 고사포처럼 들렸고 몇 분도 안 돼 다리가 매우 아팠고 따라서 배도 아팠다. 나는 즉시 다리를 내리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며칠을 계속 이러했으며 10분도 견지하지 못했다. 어느 한번 가부좌를 틀었는데 역시 다리가 아프기 시작해 내려놓으려고 할 때 사부님께서 나의 우측에 나타나셨다. 양복을 입으셨고 낮에 뵀던 똑같은 모습이었다. 사부님께서 손가락으로 다리를 가리키며 “내려놓지 마세요!”라고 하셨다. 그날부터 나는 가부좌를 하고 아플 때면 될수록 참아내야 하는 것을 알았다.

제3기 학습반을 개최할 때 파룬궁에 관련된 책이 아직 출판되지 않았고 단지 간단하게 적힌 얇은 노란색 갈피의 책이 있었다. 학습반이 끝난 후 나는 혼자서 이 책을 보기 시작했다. 펼친 첫 장은 사부님의 흑백 사진이었다. 나는 자세히 사부님을 보았는데 매우 친절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나의 눈이 조여들기 시작했고 안으로 뚫고 들어갔다. 눈은 초점을 조절하여 맞추듯이 변했으며 조절이 끝난 후 사부님의 사진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잠깐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선명하고 진실했다. 20여 세의 젊은 문인의 중국인 모습이었다가 또 전형적인 서양인 모습으로 깊은 눈동자에 높은 콧대, 두 볼이 패였고 뾰족한 턱으로 영국인 모습인지 미국인 모습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또 다른 모습도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된 나는 조금 두려웠고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해 바로 책을 내려놓았다.

이튿날 다시 책을 들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제 본 것이 진실인가? 만약 오늘 다시 보게 되고 어제와 같은 모습이라면 그건 진실일 거야.’ 나는 단정하게 의자에 앉아 사부님의 사진을 바르게 책상에 세워놓고 바라보았다. 하나하나의 모습이 어제와 똑같았다. 그제야 나는 진실로 받아들였다. 나는 나의 전신사진을 찾아 바라보았는데 역시 여러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원래 네 번 여자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바로 전생에 남자였다. 네 번의 여자 모습은 매우 예뻤다! 지금의 자신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형상은 전보다 너무 큰 차이가 나고 못생겼구나. 어찌하여 나이가 들수록 추하단 말인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보게 된 것을 진실로 받아들였고 또 일부 사부님 전생의 정황도 알게 됐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어째서 외국인으로 태어나셨는지, 어째서 나에게 이런 형상을 보여주시는지 나는 알지 못했고 그때는 좋은 느낌만 들어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보았다면 본 것으로 그러려니 여겼으며 이 일도 단지 몇 명의 수련생과 다른 일로 교류하다 무심결에 언급했었다.

나는 자신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마음은 상쾌하게 몸은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홀가분한 상태로 됐다. 하루는 점심에 낮잠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좌측에 파란색 갈피의 책이 있어서 책 가운데를 열었다. 그랬더니 책 옆에 수정으로 된 매우 아름다운 신발이 나타났다. 투명했고 영롱한 빛을 뿜었다. 이 신발이 좌측 앞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아름답고 예쁘다는 느낌을 받으며 이 책은 어떤 책인지 궁금해졌다. 그때는 몰랐으나 나중에야 이 책이 ‘중국 파룬궁’과 ‘중국 파룬궁(수정본)’ 임을 알았다. 남편이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아들은 사부님의 대공 보고회에 참가하면서 천목이 열려 흰색 벽에서 각종 광경을 볼 수 있어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아들이 본 것에 호기심을 가져 매일 집 벽의 광경을 보라고 했다. 그날 아들이 말해줬다. “오늘은 스님이 보였는데 연로한 스님이었어요. 대머리에 점이 9개 있었어요.” 또 다른 날에는 “오늘은 어린 여자애를 보았는데 손에 생화를 쥐고 있었고 잠시 후에 다시 보니 울고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아들이 본 것에는 각별한 흥미를 느껴 매일 보라고 했는데 차차 추구하는 마음이 형성됐다. 남편이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내가 아들에게 자주 보라고 시키는 것을 보고 크게 화를 냈다. “당신이 매일같이 애한테 보라고 하는데 바르지 않아요.” 그의 화내는 모습에서 나는 청성해졌다. 사부님께서 점화해주신 것이나 그때는 알지 못했으며 더는 아들에게 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들을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연구실의 그 동료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사부님댁에 갑시다.” 나는 듣고 기쁜 심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날도 아홉 살 된 루루(陸路, 아들)를 데리고 갔다. 도착하니 사부님께서 몇 명의 수련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이 너무 작아 우리는 바로 밖으로 나와 사부님을 기다렸다. 이는 처음으로 사부님댁에 찾아간 것으로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앞선다. 사악은 사부님께서 호화로운 주택에 거주한다고 공격했는데 나는 증인으로 나설 수 있다. 그것은 순전히 날조다. 사부님댁은 낡아서 볼품없는, 창춘에서 매우 낡은 층집으로 난방 장치도 없었다. 사부님댁은 4층이었고 집에 들어서면 좁은 통로가 있고 우측에는 아주 작은 주방이며 끝으로 들어가면 작은 방이 있었다. 바깥쪽의 방은 조금 크나 안쪽의 방은 실내장식도 하지 않은 작은 방으로, 가구 몇 개만 있어 매우 간소했다. 벽에는 사부님께서 크레용으로 직접 그린 몇 장의 불가와 도가의 대각자가 걸려있었는데 매우 눈에 띄었다.

사부님께서 그린 그림이 유난히 좋았다. 나중에 나는 왕 씨, 이 씨 수련생과 함께 사모님 직장에 갔었는데 그때 사모님께서 우리에게 사부님께서 그린 그림을 찍은 사진을 선물했다. 그중 한 세트는 내가 보존하고 있다. 사부님댁의 벽에는 또 한 자루의 검이 걸려있었다. 수련생들이 다 돌아간 후 우리는 다른 일이 없었으나 단지 사부님을 뵙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나오셔서 배웅해주셨는데 문 어귀에 이르러 동료가 나와 내 아들을 사부님께 소개해드렸다. 사부님께서는 우선 위에서 아래로 나를 보시고 “매우 좋네요.” 그리고 아들을 위아래로 보시고 “매우 좋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나는 하나의 문제가 생각나 사부님께 질문했다. “사부님, 저는 어째서 물건을 보면 여러 개인가요? 그것이 왜 모두 함께 있나요?” 사부님께서는 조용히 “바로 그런 거죠!”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사부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정상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공간의 본래 모습이 나에게 반영될 때 일부는 이러했다. 나는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누구나 이런 줄 알았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이런 상태였고 어떤 물건을 보아도 모두 여러 개로 보였다. 그것을 나눌 수도 없었고 셀 수도 없었다. 마치 같은 공간과 같은 곳에 함께 섞여 있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 또 전혀 같지 않은 공간에 있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사부님께서 공간에 대해 설법하실 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수련 전에는 눈으로 책을 볼 때 자주 피곤을 느꼈고 늘 글의 행을 잘못 보았고 물건을 보면 흐리멍덩해 실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면 늘 사람과 부딪쳐 그 후에는 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시력은 특별히 좋았다. 이런 선천적인 상태에 대해 전에는 개의치 않아 사람들이 모두 이런 줄로 알았다. 사부님 학습반에 참가해서야 명백해졌다.

제3기 학습반이 끝나고 사부님께서는 베이징으로 설법하러 가셨다. 나는 루루를 데리고 동료와 다른 몇 명의 수련생과 함께 기차역으로 사부님을 배웅하러 갔다. 열차 앞에서 우리는 사부님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사부님, 사부님의 따님, 그 동료와 그의 작은 아들, 그리고 나와 내 아들 루루가 있다. 사부님께서 열차에 오르셨고 출발하기 전 객실에서 밖의 수련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사부님께서 명함 몇 장을 꺼내 몇 명의 수련생에게 주었다. 사부님께서 아직 나에게 건네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께서 주시면 받아야지, 주시지 않는다면 요구할 수 없다며 그곳에 서 있었다. 이때 사부님께서 웃으시며 명함 한 장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이내 받았다. 열차가 천천히 움직였고 우리는 열차가 멀어져가는 것을 보고 그곳을 떠났다.

(계속)


원문발표: 2021년 3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3/29/4216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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