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글/ 송명(宋明)

【정견망】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많든 적든 수련의 다양한 형식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데 가령 출가해서 도를 닦는 도사나 출가 수행하는 승려들이다. 이외에도 몇 가지 신화소설 속의 이야기들을 다 아는데 예를 들면 ‘팔선과해(八仙過海)’나 ‘서천취경(西天取經)’ 등이다.

다시 말해 불도신(佛道神) 및 수련의 개념에 대해 오늘날 사람들이 믿든 믿지 않든 모두 들어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운운중생(芸芸眾生) 중에서 대체 어떤 사람만이 문을 열고 들어와 수련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가? 또는 신불(神佛)은 대체 어떤 사람을 선택해 제자로 삼는 걸까?

《삼국연의》 제68회에서 “좌자(左慈)가 조조를 희롱한” 수련신화 이야기가 나온다. 좌자가 아미산에서 30년간 도를 배우고 3권의 천서(天書) 얻었다. 그는 조조와 인연이 있어 그에게 수행을 권고하러 가서는 이렇게 권한다.

“대왕께서는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오르셨는데 왜 물러나지 않으십니까? 빈도(貧道)와 함께 아미산에 들어가 수행하시죠? 3권의 천서를 전수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권력에 미련이 남아 그의 말을 믿고 배우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좌자를 해치려고 했다. 나중에 좌자가 여러 차례 점화해주었지만 어떻게 해도 결국에는 깨닫지 못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팔선득도전(八仙得道傳)》 제95회와 96회에는 한상자(韓湘子)가 숙부인 한유(韓愈)를 점화하라는 여동빈의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한유는 한상자가 돌아와 다년간 도를 배우러 떠나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화를 낸다. 나중에 한상자가 비록 여러 차례 한유의 전생 내원에 대해 일깨워주고 신령한 감응까지 보여주었지만 한유는 “세속의 생각이 너무 강해 대도(大道)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불골(佛骨)에 대한 간언으로 황제에게 죄를 지어 멀리 수자리를 살기 위해 영남 조주(潮州)지방으로 귀양을 떠났다. 가는 길이 험해 온갖 고생을 다 겪고 마침내 남관(藍關)에 이르러서야 명리에 대한 마음이 담담해져서 마침내 대도를 믿게 되었다.

한상자는 이에 탄식하면서 말한다. “세인들은 명예와 이익을 위해 허둥지둥 뒤쫓다가 결국에는 다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는 너무나 뻔한 결말이다. 어찌 가련하지 않은가?”

한편 한유는 《좌천지남관시질손상(左遷至藍關示侄孫湘)-조주로 좌천되어 가는 도중 남관에서 질손 상에게 보이다》라는 시에서 “진령에 구름 걸렸으니 집은 어디에 있고 남전관에선 눈이 막혀 말도 나가지 못하네(雲橫秦嶺家何在,雪擁藍關馬不前)”라는 천고의 명구를 남겼다. 여기서 종손 상(湘)은 바로 한상자를 가리킨다. 이 시는 바로 한유가 당시 마음을 돌려 도를 깨닫기 직전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명리에 대한 마음이 너무 무거운 사람은 수련의 길이 있어도 문으로 들어올 수 없다. 마치 옛날에 어떤 사람이 “나는 허리에 10만 관(貫)의 돈을 두르고, 학을 타고 양주로 날아가고 싶다(腰纏十萬貫 騎鶴上楊州)”는 소원을 발한 것과 같은데 수련을 잘 모르는 세인들의 어리석은 망상이다.

[역주: 이 말은 양주학(楊州鶴) 고사에 유래한다. 옛날에 네 사람이 각자 자기의 소원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양주자사(楊州刺史)가 되고 싶다고 하고, 한 사람은 많은 재물을 얻기를 원하고, 한 사람은 학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나머지 한 사람이 “나는 허리에 10만 관(貫)의 돈을 두르고, 학을 타고 양주로 날아가고 싶다”고 했다. 즉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명예도 갖고 싶고 이익도 취하고 싶고 거기다 수련해서 고층차로 갈 생각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니 수련의 길에 입문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도가(道家)에서는 사부가 도제(徒弟)를 찾는데 대체적으로 만 명 중에 한 명 꼴로 고르는게 흔하다. 세인들에게 있어 이는 마치 아득히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반면 불가(佛家)에서는 널리 제도함[普度]을 중시하므로 이보다는 기회가 많은 것이 아닌가? 불경에서는 석가모니 당시에 “도를 얻은 사람이 숲처럼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불가의 제자에 대한 요구가 그리 엄격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부동한 층차의 수련표준은 법문이 다르다고 해도 일정하게 정해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보다 수련하기 쉬웠던 게 아닌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 역시 당시 인도가 오독(五毒)이 가득한 세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사실 수련에 대해 말하자면 도가에서 말하는 사부가 도제를 고르는 일이든, 불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련할 수 있으면 누구나 수련하는 것이든, 전제는 다 대도(大道) 또는 불법(佛法)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수련 자체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당신이 인식할 수 있으면 그럼 수련하고 인식할 수 없다면 그럼 수련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또는 당신이 형식적으로는 수련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수련을 모른다면 역시 수련해 올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수련 자체를 인식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진정으로 대도와 불법을 인식할 기회가 있을 수 있는가?

사람은 신(神)이 만든 것으로 신은 사람을 만든 후 사람에게 사람이 되는 도리와 표준을 남겨주었다. 중국에서는 이것이 바로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도리인데 예의염치(禮義廉恥)와 삼강오륜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초월해 올라가고 보다 높은 경계의 생명이 되려면 자연히 보다 높은 요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동한 층차에서 수련의 표준이다. 그렇다면 사람에 합당하려면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또한 사람이 수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이다. 또 가늠하는 표준을 말하자면 사람의 각도에 설 수 없다. 또는 인류가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왔기에 자신이 아는 도덕수준으로 평판하기도 쉽지 않다.

“真(쩐)ㆍ善(싼)ㆍ忍(런)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1]

“인류의 도덕표준마저 비뚤어졌고 변화가 일어났으며,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표준마저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속인 중의 일이다. 이 우주의 특성 真(쩐)ㆍ善(싼)ㆍ忍(런)의 표준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으로서, 그는 변하지 않는다.”[1]

“사람으로서 우주의 真(쩐)ㆍ善(싼)ㆍ忍(런), 이 특성에 순응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좋은 사람이고, 이 특성에 어긋나게 행하는 사람은 진정 나쁜 사람이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신이 꼭 정말로 나쁜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다고 해서 당신이 꼭 정말로 좋은 것도 아니다. 수련자로서, 이 특성에 동화하면 당신은 곧 도(道)를 얻은 사람인데, 바로 이렇게 간단한 이치다.”[1]

1992년 파룬궁(法輪功)[또는 파룬따파(法輪大法)]이 중국에서 전해져 나왔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파되는 방식으로 1억 명이 파룬궁 수련으로 들어왔다. 특히 1999년 7월 20일 중공사당(中共邪黨)이 파룬궁을 불법으로 잔혹하게 박해한 이후 파룬궁은 오히려 세계로 진출했다. 파룬궁은 비단 굴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반박해로 지금까지 걸어왔다.

지금 세상에서 파룬궁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며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 무고하게 중공사당의 박해를 받는 외에도 파룬궁은 이미 세계 1백여 개 나라와 지역에 전파되었고 파룬궁 관련 서적은 이미 40여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지난 몇 십 년간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표창을 받았다.

이렇게 세상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데에서 억만 명이 파룬궁을 인식할 때까지 그 가운데 얼마나 많은 힘겹고 고달픈 일들이 있었고 얼마나 많은 신기한 견증이 있었겠는가! 억만 파룬궁 수련자들은 지금 자신들이 직접 겪은 경험으로 현재 발생 중인, 겉으로는 아주 평온하고 일상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거대하고 웅장한 현대의 수련신화(修煉神話)를 말하고 있다.

이 신화는 만고(萬古)이래 인류의 오랜 역사를 초월하고 관통하는 것이다. 과거에 무쇠 신이 닳을 때까지 도를 찾으며, 수없이 많은 윤회 속에서 희망이 없는 가운데 기다려온 것은 바로 지금 파룬따파다. 이 우주대법은 이미 매 사람의 눈앞에 와있다.

바로 다음과 같다.

만고의 천문이 열리니
중생은 법을 위해 왔노라
천하에 복음을 전하니
누가 아직도 배회하는가?

萬古天門開,
眾生為法來。
福音傳天下,
誰人還徘徊?

(계속)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node/118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