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원시보
서양 한의사(洋中醫)

삽화 권미영

 

사람의 성장에는 여러 단계가 있는 것 같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겼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부끄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젊은 시절엔 자존심을 세우느라 몰라도 아는 척, 다른 사람의 충고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특히 한의학을 처음 배울 때 그랬다. 미국에 유학 온 나는 미국인에게서 한의학을 배웠다.


한번은 임상실습을 하려고 중국에 돌아간 적이 있다. 내가 녹색 꽃무늬 비닐 포장에 담긴 일제 침을 꺼내자 평생 은침(銀鍼)만 사용한 어머니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침은 어떻게 놓는 거니?”라고 물으며 손을 내밀어 합곡혈에 침을 놓아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침관과 침을 꺼내 툭툭 쳤고 침은 가볍게 들어갔다. 침을 뽑으며 득의양양해하는 내게 어머니는 “왜 아무 느낌도 없지?”라며 당신이 쓰시던 중국 침을 꺼내셨다. 그것은 보통 사용하는 침보다 몇 배는 더 굵었고 침관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나는 중국 침은 굵어서 외국인에게 맞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일제(日製) 침을 고집했다.


어머니는 내게 침을 놓는 자세를 보여달라고 하셨다. 옆에 있던 작은 오빠가 침을 맞겠다고 나섰다. 아마 내가 사용하는 침의 느낌을 확인해 보고 싶었나 보다. 어머니는 양릉천에 침을 놓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격자무늬가 그려진 예쁜 고무 밴드로 작은 오빠의 다리에 한번 댔다. 미국 한의대 학생들은 신체 사이즈를 측정하는데 이런 고무 밴드를 사용한다. 위치를 정하고 침을 놓으려 하자 어머니는 엄한 목소리로 “뼈 위에 침을 놓을 작정이냐?”라며 꾸짖으셨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이 자리가 바로 방금 측정한 혈자리예요. 교과서에 나오는 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요”라며 고집을 부렸다.


조심스럽게 혈자리에 침을 놓았지만 작은 오빠는 아프다며 펄쩍 뛰었다. 어머니는 웃으셨고 나는 속으로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통증은 침의 굵기보다 침을 놓는 방법에 달려 있다. 내가 시범을 보여주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곧바로 독일산 이침(耳針) 탐측기를 꺼내 들고는 또 득의양양하게 “이 기계는 귀에서 병이 있는 부위를 찾아낼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기계를 작은 오빠에게 시험했고 기계는 잠시 소리를 내다 내지 않다가를 반복했다. 그런데 소리가 나는 위치는 오빠의 몸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오빠는 “너 설마 내가 임신했는지 확인하려는 건 아니겠지? 설사 독일과 프랑스가 연합해 생산한 기계라 해도 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라며 빈정거렸다.  


어머니는 내게 혈자리는 모두 외울 수 있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외울 필요 없어요, 외국에서는 그냥 번호로 말해요. 가령 방광경에 67개의 혈자리가 있지만 모두 번호로 표시한다고요”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딸을 책망하지 않으려고 참았지만 내 대답에 당신의 인내력의 한계를 넘은 것 같았다. ‘서양에서 유학 중인 한의사’라는 타이틀은 멋있었지만 막상 임상에서 내가 배운 것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어머니는 “너 내일 아침 일찍 병원에 나와 실습하자. 이런 서양물건은 내버려두고 한 손으로 침을 놓고 침감(鍼感)을 느끼고 침으로 보(補)하고 사(瀉)하는 것을 배우거라. 또 불 부항을 뜨고 진맥하고 설상(舌象)을 보는 법을 배우되 경험 많은 중의사를 따라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배울 때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겨야 한다. 사실 너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나는 십여 년간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질병을 마주하게 되면 늘 자신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기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배운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당시 실습하던 때가 내가 의학을 배운 이후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삽화 권미영

 

미국 등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의사나 한의대생은 중국인보다 서양인이 더 많다. 오래전 내가 미국에서 한의과 대학 석사 과정을 밟을 때 30여 명의 학생 중 중국인은 겨우 두세 명 뿐이었다. 의사면허 시험을 볼 때도 시험장에 가득 들어찬 사람 중 검은 머리의 중국인은 역시 극소수였다. 전화번호만 뒤져봐도 미국에서 개업한 수많은 한의사 대부분이 서양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갈수록 많은 한의대가 설립되고 있고 심지어 박사과정을 설치한 곳도 있다.


하지만, 서양인이 한의학을 배우다 보니 전통 한의학 이론에 자신의 사유방식을 더한다. 그들은 우선 자신의 각도에서 한의학을 이해한 후 이를 임상 치료에 활용한다. 이들의 이런 특성 때문에 동양의 한의사와 다른 ‘서양한의사’가 탄생했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도 그리 크지 않지만, 동료한의사만 5명이 있다. 그들 중 한 서양한의사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진료실에 들어가면 ‘난득호도(難得糊塗 역주: 청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정판교가 쓴 시 일부로 어리석은 척하기 힘들다는 의미)’라고 적힌 글자가 눈에 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정판교(鄭板橋)의 시와 글자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는 염소수염을 기르고 중국에서 1930-40년대에 유행하던 은색 실이 달린 안경을 꼈으며 쿵후 신발을 신었다. 종종 앞에는 용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뒤에는 거꾸로 찍힌 일본식 한자가 있는 옷도 입었다. 나는 속으로 좀 우스운 생각이 들어 “옷에 있는 글자는 중국어인가요 아니면 일본어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일본어 역시 예전 중국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라고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그 후 나는 그를 다시 보게 됐다.


그는 비록 서양인이었지만 중국 문화를 진정으로 감상할 줄 알았고 또 몹시 숭배했다. 한번은 그가 내게 ‘심령신회(心領神會)’의 의미를 물은 적이 있어 내가 뜻을 자세히 설명해주자 그는 감동한 나머지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가끔 의술에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토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좋은 동업자이자 동료로 서로 편안하게 의술에 대해 교류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중국에 다녀온 그가 의아해 하며 나에게 물었다. “대륙에서는 십수 년 전만 해도 중의사가 환자를 볼 때 맥을 짚고 설상을 보며 개업을 해도 전통적인 중약(中藥)처방을 했었어요. 비록 약을 달이는 것이 좀 번거롭긴 했지만 치료효과는 아주 좋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왜 중의사조차 청진기는 물론이고 환자에게 직접 주사를 놓나요? 또 중약 처방 속에 대량의 양약성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죠?”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맥 보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니 당신 스스로 느낌을 찾아보라고 하더군요. 나는 아무 느낌도 찾을 수 없어서 배우러 간 게 아닌가요!” 그는 좀 억울한 것 같았다.


“중국은 참 신기한 곳이에요. 한때는 내가 중국 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왜 이 모양이죠? 중의학의 정수는 아마 중국에서 곧 사라지게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나보다 더 조급해 보였다.
바로 이런 서양 한의사들의 노력이 있기에 한방요법은 미국에서 점차 인정받고 있다. 현재 의료보험에서 인정하는 정규치료방법의 하나로 진입했고 한의학을 무시하기만 하던 많은 양의사도 조금씩 생각을 바꾸고 있다. 한방 치료를 받아 본 사람들 역시 그 효과에 주목한다.


중국인도 돌아보지 않는 수천 년의 찬란한 유산을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한 서양인들이 진지하게 발굴하고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시선은 지금 ‘황제내경(黃帝內經)’ ‘상한론(傷寒論)’ ‘금궤요략(金匱要略)’ 등 전통 한의학 경전에 쏠리고 있다.                                     


글/자선(子仙·중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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