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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낙산대불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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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러산에 위치한 거대한 미륵 대불상인 ‘낙산대불’

 

[시사중국] 대자연에는 매우 많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신상(神像)이 있다. 그 중 하나인 천연 와불(臥佛-누워있는 불상)은 쓰촨성 러산(樂山)에 있는데 이 와불 심장부에는 대불상(일명 낙산대불)이 위치하고 있다. 낙산대불의 묘한 위치는 마음(心)을 수련해야 곧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천기를 나타낸다.


낙산대불은 당대(唐代)시기 우수한 예술작품 중 하나로 미륵불을 의미한다. 당시 왜 이처럼 거대한 미륵불을 만들었을까. 당나라 시기와 미륵불 숭배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불교 교의에 따르면, 미륵불은 3대 부처님 중 미래 부처님으로 그는 미래세계의 광명과 행복을 상징한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 사후 몇 년 후에 부처 지위를 대신할 것이고, 우화림원(于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널리 불교 교리를 전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불경에는 미륵이 태어나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되도록 빨리 인간세계에 찾아올 것을 갈망한다. 또 3천년 마다 한번씩 피는 꽃인 우담바라가 피면 미륵불이 도래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중국 당나라 무주(武周) 시기, 여황제 측천무후는 일찍이 ‘대운경소(大雲經疏)’를 편찬하도록 명령해 그녀 자신이 미륵이 환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백성들의 미륵 숭배 관념에 따라해 그녀가 남존여비 시대에 제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측천무후의 강력한 미륵불 제창은 결국 전국 예술가들에게 미륵불 제작 풍조를 일으켰다. 측천무후 시대 20여 년 후, 당나라 유명 스님 해통(海通) 역시 낙산대불을 조성할 때 자연스럽게 미륵불을 선택했다.

 

어떤 사람이 아마도 한가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왜 낙산대불의 미륵불은 보통 절에서 볼 수 있는 뚱뚱하고 배가 나온 일반 미륵불상과 다른가?

 

▲ 미륵불이 환생한 것으로 알려진 계차스님, 늘 포대를 매고 동냥해 포대화상으로도 불린다.

이 미륵불은 중국 당나라말 계차(契此)스님 외모에 근거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늘 포대를 하나 짊어지고 동냥을 했다고 해서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도 불리는 계차스님은 절강성 봉화(奉化)현 사람이다. 그는 늘 선행을 즐겨하고 날씨와 사람의 길흉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입적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륵 진실한 미륵이여(彌勒眞彌勒), 천백 억의 몸으로 나타나(化身千百億), 수시로 세인들에게 나타나니(時時示世人), 세상 사람들은 절로 모르니라(世人自不識)”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모두 그가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여겼다. 항상 웃고, 넓은 마음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포대화상은 이후부터 미륵불을 상징하게 됐다.

 

사실은 중국 불교문화 중에 미륵불상 모양은 여러번 큰 변화를 거쳤다. 첫 번째 단계는 인도에서부터  전해져 들어온 것이며, 두 번째는 ‘중국 특색’의 고대 미륵불이다. 세 번째는 현재 보통 절에서 볼 수 있는 포대화상 미륵이다.

 

낙산대불은 이 중에 ‘중국 특색’을 갖고 있는 미륵불이다. 낙산대불 전체 외모는 세속을 초월한 모습으로, 머리 위에 상투, 넓은 양어깨, 높고 긴 눈썹, 둥글고 곧은 콧구멍은 모두 전통 불교 규정에 따라 디자인됐지만 그의 표정은 한족의 특징을 갖고 있다.

 

어깨가 넓지만 가는 허리를 가진 조기 인도불상 형태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튼튼한 양어깨와 풍만한 가슴 등은 통통한 체형이 미적기준이 된 당나라 시기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또 낙산대불이 앉아 있는 모양도 인도 불상의 ‘가부좌’식과 다르다. 낙산대불은 물을 다스리는 큰 부처의 이미지에 맞춰 제작됐는데 이 안정된 자세는 당시 배를 젓는 사람이 부처님을 믿고 험난한 격류를 돌파할 수 있는 자신감을 부여했을 것이다.

▲ 낙산대불은 사진에서 보이는 천연 와불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 수당(隋唐)시기는 불교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로 많은 불상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절대다수 불상이 모두 홍위병들에게 파괴됐다. 불상 뿐 아니라 염제능(炎帝陵)으로부터 절, 도교 사원, 공자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전통문화 유산이 소실됐다. 낙산대불 뒤에 있는 오우사(烏尤寺)의 5백 나한 역시 홍위병이 하나하나 깨뜨려 현재는 모두 머리가 없는 채로 남아 있다.

 

오직 낙산대불만은 이 같은 위기를 모면했는데 강을 끼고 위치해있으며 높이가 무려 70미터에 달해 홍위병들이 감히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운좋게 낙산대불의 장관을 볼 수 있고 이 불상이 위치한 심장 부위를 기준으로 더 큰 낙산 천연와불이 존재하는 의미를 알게 됐다.



허민 sscnk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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