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에 해당되는 글 60건

정견망

사대명작 신해(新解) 


글/탄진(撣塵)


문학은 인류 문명의 중요한 전달매체로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예술형식이다. 수천 년의 문명 세례를 거치며 풍부한 역사 풍모와 문화 정수를 간직한 중국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찬란하고 천고에 빛나는 작품을 꼽으라면 『수호전(水滸傳)』, 『삼국연의(三國演義)』, 『서유기(西遊記)』, 『홍루몽(紅樓夢)』 등 사대명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인류문명을 풍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 발전의 발자취를 기록했고 사람의 사상을 자윤(滋潤)하며 사람의 도덕과 지조를 도야(陶冶)하게 했다. 이들 사대명작의 역할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류 발전의 전반 과정을 놓고 볼 때 지금은 인류가 신기원(新紀元)으로 나아가는 경계점에 해당한다. 뒤돌아보면 성현(聖賢)과 선철(先哲)들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마음의 양식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데 단지 정신적인 측면의 요구만 해결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세상일의 미혹 중에서 사람들에게 미래로 나아갈 길을 암시해준다. 

인생이란 연극과 같다. 사실 인간 세상도 한편의 연극이며 전반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 왕조의 교체, 전쟁과 평화 등도 모두 연극이다. 단지 사람들이 연극 속에서 늘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고 진정으로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할 뿐이다. 몸은 비록 연극 속에 있어도 마음은 연극을 벗어난 사람의 "조용한 관조(靜觀)"만이 이것이 진실로 연극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자면 오직 마음을 수련하며 "도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는" 그런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 그들은 세속을 멀리 떠나 혼자 수련하거나 혹은 온갖 창상(滄桑)을 두루 겪으며 마음이 담담해졌다.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일을 통찰하고 생사를 꿰뚫어보며 인생의 의미를 투철히 깨달은 대덕지사(大德之士)만이 가능하다. 동시에 그들은 세상 사람을 제도하려는 큰 뜻을 품었지만 오히려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기(天機)를 통찰할 수 있음에도 말할 수 없었고 단지 "야사(野史)"에 속하는 소설을 이용해 "농담이나 촌스런 말"로 "말겁(末劫)"시기의 세인들에게 경고하고자 했다. 

역사의 연관성(連貫性)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간상으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 역사상 출현한 각종 사물의 연계에서도 표현된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후자가 전자보다 더 의미가 있다. 매 하나의 사물, 매 하나의 인물은 역사의 수레바퀴처럼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이는 역사에 대해 계승하고 총결하며 미래에 대해 전달하고 열어주는 작용을 한다. 어떤 것들은 역사상 천년이 지난 후에 그 속에 함축한 진정한 함의가 비로소 드러나기도 한다. 사대명작이 바로 이런 역할을 맡았다.

사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왜 지금을 "말겁"시기라고 하는가? 간단하게 보이는 이런 문제들이 도리어 끝없는 내포를 함축하고 있다. 대법 법리의 지도하에서 사대명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해본다면 일부 답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사대명작의 주제 분석

(1) 『삼국연의(三國演義)』--천고에 관통된 "의(義)"


사람은 신(神)이 만든 것이다. 중국문화 역시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것이다. 『삼국연의』속에는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자취가 도처에 존재한다. 천상의 변화, 세사(世事)의 변천, 기인이사(奇人異事), 신묘한 지모는 모두 신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소설을 지은 나관중(羅貫中)은 고금에 통하고 백가(百家)를 두루 섭렵했기에 이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취지는 도리어 여기에 있지 않다. 물론 이 책은 지모를 중시하며 제갈량, 조조, 주유, 사마의, 육손, 강유 등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신묘불측한 책략을 지니고 있다. 비록 이들 고인(古人)들의 지혜 역시 확실히 주제의 하나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표현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삼국의 역사이야기인가? 아니다, 사실 칠에 허구 삼이란 말이 있듯이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이야기는 단지 작가가 표현하기 위한 전달매체에 불과하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야기를 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생동감 있게 만들어 사람이 구비해야 할 특징인 의(義)이다.

"연의(演義)"란 "의"를 풀이했다는 말이니, 책이름에서도 이미 이런 뜻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연의"는 일찍이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일종 소설의 체제로 되어버렸지만 그것의 진실한 원뜻은 바로 책속에 등장하는 각종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의(義)"의 내포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가 표현하는 내포와 이야기, 인물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의"를 제기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단지 한 글자의 표면적인 의미에 불과한 것이 아닌데 그 어떤 정의도 "의"의 내포를 정확히 확정지을 수 없다. 단지 약간의 것을 서술하는 작용만 일으킬 뿐이다. 그러나 『삼국연의』를 통해 사람들이 얻는 것은 도리어 영원한 생명력과 참조할 내포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삼국연의』는 인류 생존의 바탕이 되는 숭고한 품성을 포용하고 있다.

좀 분명히 말하자면 삼국의 이런 저런 흥망성쇠, 은혜와 원한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물의 희로애락, 충효와 반역은 모두 "의"를 둘러싸고 진행된다. 사실 고대에는 수많은 "연의(演義)" 소설이 있었지만 『삼국연의(三國演義)』와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책에는 "의"에 대해 확실히 아주 세밀한 묘사가 있다. 조조 진영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서서(徐庶)가 단지 말 한 마디로 조운(趙雲)을 구한 것은 유비에 대한 은의(恩義)이다. 조조(曹操)가 울면서 원소(袁紹)를 장례지낸 것 역시 "간웅(奸雄)"의 의(義)에 대한 이해와 행동이다. 맹획이 "일곱 번 풀려난" 은혜에 감동해 귀순한 것은 제갈량의 "의"에 감복한 것이다. 

또한 의리의 대명사 관우(關羽)는 "의"를 극한까지 풀어냈다. 조조가 3일마다 작은 잔치, 5일마다 큰 잔치를 베풀어주고 적토마를 하사하며 정후(亭侯)에 봉했지만 유비를 그리는 관우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조조의 이런 융숭한 은혜에 대해 관우는 그 은혜를 갚지 않고는 떠날 수 없다는 의리지사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유비를 찾아가기 위해 "다섯 관문을 돌파하고 여섯 장수를 목 베며" 단기로 천리를 갔으니 "의"가 여기에 이르러 가히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이 눈물을 흘릴 정도가 되었다.

나는 어릴 때 『삼국연의(三國演義)』를 읽다가 관우가 너그럽게 조조에게 길을 내준  "화용도(華容道)"에 이르면 제갈량이 왜 관우를 조운이나 장비로 바꾸지 않았을까 아주 의아해하곤 했다. 만약 관우를 대신해 장비가 화용도를 지켰더라면 조조는 죽은 목숨이 아닌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나서야 비로소 명백해졌는데 모든 것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제갈량이 이렇게 배치한 것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인사(人事)를 행한 것이다. 관우가 조조를 풀어준 것은 관우의 "의"를 더욱 완전하고 풍성하게 했다. 나관중의 저서는 정밀로 "의"의 현오(玄奧)함을 깊이 체득한 것이다.

수련자들은 사물을 볼 때 종종 본질을 보아낼 수 있다. 필자에게도 이런 인식이 있을 수 있음은 전부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리훙쯔 선생님은 『북미순회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국연의』는 하나의 "의(義)"를 말하였다. 한 조대(朝代)를 경과하면서 세 개의 세력이 서로 겨루는 중에서 충분히 "의(義)"의 내포를 표현해 냈다. 게다가 한 조대(朝代)라는 이렇게 긴 시간을 경과하면서 이 "의(義)"의 심층문화를 표현해 냈으며, 오늘날 법을 전할 때 인류는 "의(義)"에 대하여 비로소 깊은 인식이 있게 되었으며, 의(義)가 무엇인지, 그것의 표면과 내포가 어떤 관계와 심층의 반영을 이끌어내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은 단지 이 글자의 표면만 알 수 없으며 내포 속에서 무엇이든 모두 명백해야 한다. 물론 『삼국연의』 중에서는 사람의 지모(智謀) 등의 내포도 표현하였다." 

신은 사람을 창조했고 또 사람에게 세간의 일체와 사람이 구비해야 할 사상의식 및 도덕표준 등을 배치해주었다. 그러나 이 일체는 사람 자신이 실천 중에서 만들어내야 했다. 인류는 여러 차례 문명을 거치며 오늘까지 걸어왔는데 어떻게 조금씩 완벽하게 했는가? 리훙쯔 선생님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 어떠한 내포도 없고, 그 어떠한 감당능력이 없으며, 이 공간의 일체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그 어떠한 하나의 완전한 사유개념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곧 기나긴 세월을 경과하면서 사람의 사상이 점차적으로 풍부해지고 그의 내포와 감당능력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표현은 일에 부딪혀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고 냉정하며, 이지적으로 사고하고, 심지어 창조능력도 있다. 사람이 이러한 사상, 정상적인 사유상태를 구비할 수 있는 이것은 기나긴 역사의 세월 속에서 신(神)이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사람의 매 한 걸음은 모두 신이 배치한 것이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었다. 사실 어찌 사람의 운명뿐이겠는가, 세간의 일체 배치는 모두 신이 의도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사상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2) 『수호전』--살아 숨쉬는 강도들의 군상(群像)


창녀에게 "열녀문"을 세워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강도들에게 "공덕비"를 세워줌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강도들에 대해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민간 전기가 있어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강도들에게 이런 "공덕비를 세워주는가?" 이 속의 역사연원은 무엇인가? 설마 후세인들에게 이런 강도들의 행위를 본받게 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답할 수 없다.

한번 각도를 바꿔 생각해보자. 사람이란 선악(善惡)이 함께 존재하며 이는 상생상극의 이치가 독립적 개체인 사람 몸에서 반영된 것이다. 상생상극은 일체를 제약하며 일체는 또 상생상극의 이치를 나타냈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자면 사람에게는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이 있는 것으로 인간세상에서는 또 선과 악, 좋고 나쁨으로 표현된다. 단지 사회도덕과 윤리가 사람들에게 각자 악을 "억누르고 선을 발양"하도록 요구할 뿐인데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사회가 안정되고 조화로우며 각자 자신의 일을 편안히 할 수 있다. 반대로 인류의 부패는 매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기 마련이며 인류의 죄악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빨리 자신을 도태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자연이나 우주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 고대에는 아주 내포가 깊고 철리(哲理)가 상당히 현묘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관이 있는데 이는 사실 인생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인의 가치관은 상당 부분 사회의 도덕관에서 결정된 것이다.

기왕 "악(惡)"이 사람이 본래 갖고 있는 것이라면 사람이 사회에서 생활하는 중의 일체는 모두 선악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악을 억누르는" 것은 필연적이며 이는 도덕층면의 요구이다. 단지 "악"만을 말한다면 사람이 늘 시시각각 도덕의 관조 하에서 존재하거나 행동할 수는 없으며 사회도덕 역시 이 일보까지 관계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악"의 표현은 또 필연적인 것이다. 이성을 지닌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악"이 표현될 때에도 준거할 것이 있어야 한다. "성(聖), 용(勇), 의(義), 지(智), 인(仁)"은 전국시대 강도의 대명사인 도척이 후대에 남긴 강도의 "도(道)"이다. 강도들도 현실 중에서 생활하는 사람이기에 사회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의 산물이며 사회를 벗어나 단독으로 생존할 수는 없다. 강도의 "도"를 벗어나면 사람들은 "악"해지기 시작하며 곧 따를 "도"가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수호전에 나오는 강도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이미 백성들의 내심 깊은 곳에 "강도"에 대한 인정과 접수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한 개체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의 "악"에 대한 태도 역시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강도는 이렇게 사람들 영혼의 깊은 곳에서 광범위한 생존 공간이 있다.

사람은 이성적인 동시에 아주 복잡한 존재이다. 어떤 때는 사물에 대해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실제 현실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난다. 사람들이 이규(李逵)의 천진하고 솔직하며 지극히 효성스런 것을 받아들이면 그가 사람을 죽이고 겁탈하며 인육(人肉)을 먹을 때 이미 더 이상 이규의 인성이 어떠한지 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따지지 않게 된다. 십자파(十字坡)의 장청(張靑)과 손이낭(孫二娘)의 의협(義俠)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인육 작업장의 죄악을 덮어 갚춘다. 왜각호(矮脚虎) 왕영(王英)의 호색(好色), 고상조(鼓上蚤) 시천(時遷)의 도둑질 등은 "호한(好漢)"들의 의리를 풀어내기 위한 양념에 불과하다. 이처럼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왜 이런 사람들을 위해 "공덕비"를 세워주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또한 인류가 생존하고 발전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며 사람의 "악"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표현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잘 다스려지고 안정적인 사회에서라면 이렇게 많은 강도들이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관(官)에서 핍박해 백성들이 반항"한다는 것은 아주 도리가 있다. 인류는 바로 이렇게 발전한 것으로 일어나고 몰락하며 흥망하고 쇠퇴한다. 강도가 나타나는 환경은 반드시 어지러운 난세(亂世)로 혼란이야말로 강도들이 생겨나는 온상이다. 사람들이 탐관오리를 아주 미워하는 것은 일정 정도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반항을 일으킨다. 이런 의식의 표현이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서 "호한(好漢)"이 인민을 위해 폭력을 제거하고 선량한 백성들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 "호한"들이 무협과 의리를 행하는 방식은 단지 "악으로 악을 제거"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강도"에 대한 정의는 이미 자연적으로 "호한"을 연역해냈다. 이 책의 저자 시내암(施耐庵)이 강도들을 그려낸 본의는 긍정적인 묘사방법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 "악"을 규범 하는 동시에 정치를 담당한 자들에게는 경계로 삼게 하며, 또한 사람들에 마음속에 강도에 대한 완전하고 풍부하며 분명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3)『서유기(西遊記)』——완전한 수련이야기


『서유기』는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세인들은 『서유기』를 즐겨 읽긴 하지만 그것이 함축한 것, 다시 말해 작가가 특별히 표현하고자 하는 실질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서유기』가 세상에 나온 이후 이 책을 단순한 낭만주의 신화소설로 여기며 그 요지를 언급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더구나 작가 오승은(吴承恩)이 일부러 숨기거나 감춘 것도 아니다.『서유기』가 표현하는 주제는 분명하고 똑똑하지만 사람들은 수련의 각도에서 깨닫지 못하고 단지 기괴한 모양의 온갖 요괴와 마귀들이 기기묘묘하게 변하는 세부적인 이야기만 감상하면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작가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의 이야기는 당승(唐僧 삼장법사)이 서천(西天)으로 경서를 구하러 가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사실 이는 애초부터 이 소설이 수련 이야기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동시에 당승이 경서를 구하기 전의 전생과 경력(經歷) 역시 수련에 속하는 동시에 그가 "경서를 구하는 과정"을 위해 전면적이고 완전한 길을 깔아주었다. 손오공(孫悟空)이 펼치는 수많은 신통(神通)은 수련에 어느 정도 소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헛소리가 아니다. 천기(天機)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승은은 아주 함축적인 방식을 사용해 표현했다. 손오공이 처음 당승을 따를 때 죽인 여섯 강도의 이름이 안간희(眼看喜), 이청노(耳聽怒), 비후애(鼻嗅愛), 설상사(舌嘗思), 의견욕(意見欲), 신본우(身本憂)이다. 또 이 이야기가 나오는 제목이 "마음 원숭이가 바로 잡히니 여섯 도적이 흔적 없이 사라지네(心猿歸正 六賊無踪)"이다. 보다 명백하게 말하자면 여섯 도적이란 바로 승려들이 실천해야 할 "육근(六根) 청정(清净)"이다. 그럼 육근이란 무엇인가? 바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다. 여기까지 도달하자면 오직 마음을 바로잡은 후라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수련은 상당히 고생스러운 것으로 금강부동(金剛不動)한 심지(心志)가 없으면 원만할 수 없다. 수많은 승려들이 종일 그곳에 앉아 가부좌하고 경을 외우는데, 다른 사람은 그의 내심 경지의 승화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수련하고 있다. 그가 가부좌하고 경을 외우고 마음을 닦는 과정이 바로 자신을 바로잡고 "여섯 도적"을 청리하는 것이다. 표현해내자면 겉으로는 아주 간단한 법리이지만 이 일보까지 도달하려면 끊임없이 수련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고 자신의 "안, 이, 비, 설, 신, 의"에서 오는 교란을 제거해야 한다. 오승은이 세인에게 알려준 방식은 바로 손오공이 여섯 강도를 때려죽인 것으로 구체화, 형상화시켰다. 오직 사람만이 우리 이 표면세계의 환상을 너무나도 중하게 본다. 본래 인류사회의 일체는 모두 환상이고 실질적인 것이 아니다. 오승은이 『서유기』를 창작함에 있어 진실로 마음을 다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승이 경을 구하는 과정에서 구구 팔십일 난(難)을 거쳤다. 겉으로 볼 때는 이상야릇하고 천변만화한다. 그러나 사실 난마다 모두 고험이었고 난마다 모두 수련자의 사람 마음을 겨냥해 온 것이다. 여인국을 지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색욕지심(色慾之心)을 버리겠는가? 여섯 개의 귀가 달린 원숭이가 없다면 어떻게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경을 구하는 과정에 부딪친 사람이나 요귀도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가지 일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모두 여래 부처님이 특별히 안배해 놓으신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수련자가 의지가 확고하다면 넘지 못할 화염산(火焰山)은 없으며 반드시 원만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약 사도(師徒) 네 사람을 한 수련인의 몇 가지 방면으로 본다면 작가의 의도를 더욱 쉽게 볼 수 있다. 수련계, 특히 불교에서는 "마음 원숭이를 가두고 의식의 말을 거둔다"는 말이 있다. 소위 마음 원숭이와 의식이란 말을 굴복시킨다는 것인데 이는 자신의 경솔하고 불안한 마음을 조용히 하여 입정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또 가장 추측하기 힘들고 가장 복잡한 것으로 그것은 거의 한 사람의 일체를 다 포함한다. 앞 문장에서 제기한 마음 원숭이가 바로 잡히니 여섯 도적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바로 한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은 후 육근이 자연히 청정해짐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숭이로 마음을 비유해 마음원숭이라고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주로 "공(空)"의 이론을 말하며 "오공(悟空)"이란 이름을 "마음 원숭이(心猿)"에게 사용하는 것은 아주 합당한 것이다. "마음 원숭이"를 가두면 자연히 의식이란 말(意馬) 굴복시킬 수 있다. 의마(意馬)란 바로 곧 당승이 타고 다닌던 "백룡마(白龍馬)"를 가리킨다.

다시 저팔계(豬八戒)를 보자. 사람이 수련의 문에 들어서면서 시종 준수해야 할 것이 바로 계율(戒律)이다. 왜 계률을 지켜야 하는가? 한편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남긴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수련자의 행위를 단속해 수련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수련자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다. 속인 사회의 일체는 모두 수련자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 탐욕, 나태, 명리, 질투, 각종각양의 사람마음의 집착은 모두 수련인의 다리를 끌어당긴다. 어떤 때는 아주 정진하지만 어떤 때는 돼지처럼 배불리 먹고 실컷 잠만 자면서, 안일함을 추구한다. 저팔계는 바로 수련자의 이런 방면을 형상화한 대표이다.

한 수련자로서 말한다면 정진하는가 여부는 종종 한 사람의 심성(心性)을 가늠한다. 단, 동시에 한 사람의 일상 행동과 수련태도도 아주 중하게 보아야 하는데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이 늘 깨끗하고 수련인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무거운 책임을 달게 감당하고 부지런히 아무런 원망도 없는 사오정(沙悟净)이 표현한 것은 바로 수련인의 이 방면이다.

당승은 겉으로는 아무 능력도 없지만 오직 하나의 반석 같이 확고한 마음이 있고 견정하고 청성(淸醒)하며, 사악한 마(魔)의 교란에도 미혹되지 않는 진각(眞覺)의식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며 후퇴하지 않는 견정한 신념은 필연적으로 수련자의 원만을 성취시킨다.

물론 책에서 표현한 것은 네 사람의 개성이 뚜렷한 수련자의 형상이다. 네명의 사도(師徒)는 백마를 포함해 각자 자신의 과위를 성취한다.

끝으로 독자들이 쉽게 간과하기 쉬운 대목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당승이 여래(如來)의 둘째제자인 금선자(金蟬子)가 환생했다는 대목이다. 불법(佛法)을 소홀히 대해 동토(東土)로 쫓겨나 환생했으나 간고한 수련을 거쳐 마지막에 정과(正果)를 이룬다. 이는 아주 큰 한 가지 문제를 설명하는데 바로 사람의 내원은 모두 간단하지 않은 것으로 마땅히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도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람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 "하늘의 법(天法)"을 위반했거나 아니면 특수한 사명을 띠고 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 세상에 온 것은 곧 수련을 통해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만약 수련을 잘하면 또 금선자와 같이 "정과를 성취"해 "전단공덕불(旃檀功德佛)"로 될 수 있다. 동시에 수련할 생각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불법(佛法)에 대해 절대로 경솔히 하거나 함부로 모욕하지 말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법을 비방하고 부처님을 비방"하는 큰 죄이기 때문이다!

(4)『홍루몽(紅樓夢)』—- 세상을 각성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는 걸작


이번 기 인류 문명 소설 창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는 바로 『홍루몽(紅樓夢)』이며, 이는 장차 역사에 의해 입증될 것이다.

『홍루몽』의 탁월한 성취는 단지 인물들의 형상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이나, 줄거리 구성의 배치, 사회풍모의 전면적이고 진실한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며, 『홍루몽』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바로 그 심후(深厚)하고 현오(玄奧)하며 간결하면서도 풍만한 주제의 표현에 있다. 또한 이 일체는 모두 서로 포용하고 있다.

『홍루몽』의 내용이 너무나도 풍부하고 호번(浩繁)하기 때문에 "홍학(紅學)", 즉 『홍루몽』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까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홍루몽』의 주제 역시 역대로 수많은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왜『홍루몽』의 영향은 이토록 심원하고 오래가는가?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홍루몽』안에서 맴돌다 "홍루(紅樓)"를 벗어나지 못하고 "몽(夢)"만 보게 된다. 특히 현대인들은 종종 소위 "역사적인 제한"이란 말로 『홍루몽』을 제멋대로 평론한다. 심지어 그 이론으로 "속편" 창작을 지도하려 하는데 정말로 부질없는 짓을 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의 주지(主旨)의 높이는 작가의 사상 경지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높은 사상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곧 작가가 작품 중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홍루몽』의 주제는 첫 회에 이미 아주 명백하게 알렸고, 5회 때 진일보로 알렸다. 작가 조설근(曹雪芹)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불도(佛道) 양가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조설근은 수련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도 필연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점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이 『홍루몽』을 인식하는 기초이자 전제이다. 

작가는 제 1회 머리말에서 "이번 회에 "꿈(梦)"과 "환상(幻)" 등의 글자를 쓴 것은 독자들의 눈을 깨우치려는 것인데 곧 이 책을 쓰는 주지이다." 파족(跛足) 도인의『호료가(好了歌)』와 견사은(甄士隐)의 오묘한 해석은 인생에 대한 수련인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니 문외한이 어찌 두 사람의 어리석은 듯한 대화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도인의 몇 마디 말이 견사은을 제도했지만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명리의 마당 중에서 뒹굴면서 미혹되어 깨여나지 못하는가?

제 5회에서 조설근은 이 책의 인물과 구성에 대해 아주 간결하게 개괄하고 배치했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이미 이 책에 대해 아주 익숙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에게 있어 이 책을 완성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사전에 이미 이 작품을 전부 완성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십년을 열독하며 다섯 번이나 수정했다."라고 분명히 했다.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작가의 사상경지에 서서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있다면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우리 이 물질세계를 가장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며 소위 일체는 모두 환상이요 몽환(夢幻)이라고 한다. 인생은 가장 무상한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불가에서 볼 때 사람 중의 행복은 복으로 칠 수 없다. 사람은 인간세상에서 본래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 때문에 수련이 있는 것이다. 수련의 목적은 자신을 해탈하고 승화해 천국에 가려는 것이다. 사람 중에서 원만한 일이 있는가? 인생은 본래 불완전한 것으로 설사 세간의 일체를 얻을지라도 역시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음의 갈망은 끝이 없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어느 한 상태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은 수련자가 말하는 "청정"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속인사회로 말하면 "완전"한 것은 잠시이고 "불완전한 것"은 영원하다. 불완전한 가운데 영원히 완전한 것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원만한 결과를 말하는데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이 작용을 일으킬 뿐이다. "정이 있는 사람은 결국 가족을 이룬다." 실제상 바로 사람들의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다. 사실 설사 사람의 소원대로 정말 이뤄져, 아름다운 혼인을 한다 해도 수련자의 눈에는 "아름다운 원만"이 아니다.

누구인들 『홍루몽』이 완전한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80회까지 쓴 후 갑자기 사라지는가? 때문에 일을 벌이길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책 중 인물의 성격, 전체적인 줄거리 전개에 따라 각기 다른 "속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원작자인 조설근의 각도에서 보자면 책속의 일체 배치를 적당하게 펼쳐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만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이 책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그는 왜 이렇게 처리했는가? 그가 의도적으로 상식적인 이치를 벗어나 세상을 놀라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경지가 일반인의 그것을 훨씬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한 의도는 바로 그가 세간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았고 심지어 더욱 먼 곳도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이렇게 처리한 것이다. "전부"를 다 보려는 것은 사람마음이며, 원만히 서술하는 것은 오히려 가장 중요한 내용을 표현한 후 곧 그렇게 나란히 사라지는 것만 못하다. 마치 인류에게 겁난(劫難)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정지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더 유리하다.

『홍루몽』의 위대하고 심오함은 조설근이 책의 후반부를 가볍게 삭제해 그 일부만을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함부로 속편을 창작하려는 것은 개 꼬리에 담비꼬리를 잇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전부 버려야한다.

사실 조설근의 안배에는 또 그의 독창적인 예술 구상이 있다. 우리 천천히 이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2. 4대 명작의 특수한 사명


수련의 각도에서 보자면 전반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변화는 일치하는 것으로 모두 규칙적이다. 이번 기 인류 문명의 역사는 이미 산생, 발전, 흥성, 쇠퇴의 전 과정을 지나왔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법시기에 전륜성왕(轉輪聖王)께서 세상에 내려와 법을 바로잡고 사람을 구도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적으로 누적된 일체 문화는 모두 정법을 전하기 위하여 기초를 다진 것이다.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 전수하신 法輪大法(파룬따파)는 ""불법"은 입자(粒子)∙분자(分子)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더욱 작은 것에서 더욱 큰 것에 이르기까지, 일체 오묘한 비밀[奧秘]을 꿰뚫어보는 것으로서,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고 빠뜨린 것이 없다. 그는 우주의 특성 "眞(쩐)∙善(싼)∙忍(런)"의 부동(不同)한 층차의 부동한 논술로서, 다시 말해서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道)"이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법(法)"이다."(『전법륜』「논어」) 

파룬따파가 드러낸 우주법리는 오늘날 대법제자들의 수련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있다.

우리 다시 처음 화제로 돌아가 보자. 사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왜 지금이 바로 "말법(末法)" 시기에 처해 있다고 하는가? 이것은 수련계의 공통적인 인식으로, 불교, 도교, 기독교를 막론하며, 또 어떠한 수련방법이나 각 민족의 자기 민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을 포함해 모두 공통적인 의미를 표현한다. 바로 사람은 천상에서 온 것으로, 자신의 죄업(罪業)이 인간세상에서 고생을 겪음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종 종교와 많고 많은 수련방법이 있는데, 사람이 생사윤회를 뛰어넘어 천국세계로 되돌아간다는 이것은 모든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이자 최고 인생목표이다.

(1) 드높은 의리와 바른 믿음으로 우주를 진감


"삼국" 이야기는 이미 천오백년 가량 지났지만 나관중(羅貫中)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책으로 완성되었다. 의론이 분분하던 백년 "의(義)"가 어찌 이다지도 왕성한 생명력이 있는가? 사실 전해지는 과정 중에서 곧 "의"를 인간 세상에 전파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인들의 "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다른 어떠한 국가의 사람들과도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신주(神州)" 땅에서 발생한 특정한 내포가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은 모두 등한시 할 수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가 모두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 역시 원인이 있다. 중화민족의 전성시기를 말하자면 물론 대당(大唐)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국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화, 풍속, 사회적인 통치는 물론 세계적인 영향 등을 종합적 정황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청나라와 중화민국(中華民國) 혹은 중공(中共)이 정권을 장악한 이 몇 십 년을 보면 중화대지에 어째서 사람들이 칭찬하는 "의"에 관한 인물이나 이야기가 없는가? 설사 있다 해도 사람들은 "삼국" 이야기와 같이 그렇게 유전(流傳)해 내려가진 않을 것이다. 인생의 냉막함 역시 전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오늘까지 퇴화된 것이다. 오늘날 매체는 세계 각지에 동시에 뉴스를 전파할 순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이상 영웅의 공간은 사라졌고 또 점차적으로 "의"의 표준을 낮췄다. 사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의 도덕 수준이 완전히 떨어진 것이다. 인성의 자사(自私)는 이미 사람의 "의"를 훼멸시켰다. 특히 중공이 정권을 장악한 몇 십 년 동안 사람의 일체는 모두 중공에게 농단되어 중국인들의 사상 깊은 곳에 있는 전통적 "의"에 대한 가치는 중공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심지어 청나라 말기의 거지인 무훈(武訓)이 구걸해서 모은 돈으로 학교를 만든 "의"거 조차도 공격 당했으니 또 무슨 "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의"는 갈수록 단지 하나의 글자로 변해버렸고 그것이 마땅히 갖춰야 할 내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의"는 필경 역사상 중국인들에게 일종 특유한 문화적 특질로 존재해왔다. 나관중은 "연(演)""의(義)"한 동시에 "의"에 대해 전면적이고 투철하게 표현했다. 또 후인들을 위해 "의"의 가치를 분명히 지적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의"에 대한 이해가 강제로 제거되긴 했지만 아직도 사상 깊은 곳에는 "의"에 대한 특유한 이해가 남아있다.

이것이야말로 중국인이 중국인이 될 수 있는 원인이다.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 현대 중국어로 파룬따파를 전하신 것은 중국인 특유한 문화적인 내포를 투철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도덕이 미끄러져 내겨가긴 했지만 사람들이 일단 진정한 불법(佛法)을 접촉하게 되면 마음속 깊이 감춰져 있던 불성(佛性)이 깨어날 것이다. 사람들이 법의 홍대(洪大)함과 정심(精深)함을 이해하게 되면 사람들의 도덕의식의 자아가 소생하는 것도 날이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 대법이 부당하게 박해를 받을 때, 대법제자들은 대법에 대한 존경과 확고한 믿음으로 수시로 일체를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해 걸어 나왔다. 이런 "의(義)"거(擧)는 전무후무한 것으로 우주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한 페이지의 역사가 지나간 후 사람들은 오늘날 대법제자들은 확실히 그들이 할 일을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의"라는 글자로 대법제자들이 법을 실증한 장거(壯擧)를 형용한다면 도리어 너무 부족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명의 본원에서 우러나온 대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의한 것으로 한 생명이 아무런 이유도 없고 또 아무런 이유도 필요하지 않으며 모두 그것을 위해 일체를 버린 본성의 체현이다. 

왜냐하면 "대법(大法)"은 일체 생명의 근본이며 생명의 일체 근본이기 때문이다!

(2)자고로 "정법(正法)은 만나기 어려우니" 만고의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기자


『서유기』는 하나의 완전한 수련이야기를 쓴 것으로 이 중에 가장 의미 있는 한마디는 "무릇 사람 몸은 얻기 어렵고, 중토(中土)에서 태어나기 쉽지 않으며, 정법은 만나기 힘들다. 이 세 가지를 구비한 사람은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없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제 64회에 나온다)그런데 이 구절은 앞뒤 단락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작가가 삼장법사의 입을 빌려 이 한 마디를 한 것은 바로 이 책을 서술한 진심을 토로한 것이니 정말이지 작가의 고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중토(중국)에 태어난 사람들이여, "정법"이 널리 전해지는 때에 이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자! 분명한 것은 삼장법사 시기에는 "정법"이 없었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가 굳이 서천으로 경을 구하러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파룬따파의 모든 수련자들은 진정한 "정법"은 곧 파룬따파임을 단 한 사람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이 바로 "정법"의 시기이다. 마치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유유한 만사는 눈앞에 지나가는 구름에 불과하나 속인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망망한 천지는 어찌하여 생겼는고 중생의 지혜를 무력하게 하노라."(『홍음』「대법은 미혹을 파하노라」)

파룬따파는 92년부터 전해지기 시작했다. 짧디 짧은 7년 동안 수련인의 수가 1억을 넘어 신속히 발전했다. 또 완전히 현대적인 매체 선전에 의지하지 않고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다." 중공이 탄압한 8년 동안 파룬따파는 도리어 이 기간에 전 세계를 풍미했다. 지금까지 『전법륜』은 이미 20여종의 문자로 세계 80여개 국가에서 전해지고 있다. 그럼 왜 파룬따파는 이렇게 큰 생명력이 있는가? 대법제자들은 모두 아주 똑똑히 알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생생세세 찾아 헤맸던 진정한 "정법"ㅡ파룬따파를 얻었다. 파룬따파는 우주의 특성으로 수련인의 일체를 지도하며 수련인은 우주의 연화원리에 따라 연마한다. 파룬따파는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일체를 완벽히 해석했고 전반 인류역사의 기원과 그 본질을 밝혔다. 일체를 포용하며, 일체에 제한되지 않는 박대정심(博大精深)한 법리는 바로 수련자들에 의해 실천하고 있다. 파룬따파는 확실히 인류, 물질이 존재하는 각개 공간, 생명 및 전반 우주를 원만하고도 똑똑히 설명한다.


(3)도적에게도 "도(道)"가 있음과 중공의 무도한 악행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금 사회를 "말법(末法)"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말법이란 무엇인가?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는 "말법은 불교의 말법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인류 사회는 도덕을 유지할 심법의 단속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말은 간결하지만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투철하다. 우리는 수호전』을 결합하여 오늘날 인류도덕이 파괴된 정도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들은『수호전』에 등장하는 강도에 대해 명확한 인식이 있는데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강도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특정한 참조물이 있다. 역사상 장각(张角), 황소(黄巢), 홍수전(洪秀全)과 같은 인물들은 모두 강도의 대표이다. 이들은 살인을 밥 먹듯이 했지만 중공은 "농민 기의(起義)"의 "영수"라며 이들을 떠받든다. 왜 그런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중공 자신이 바로 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강도는 인류 동서고금의 모든 강도를 초월했다. 강도에게도 하나의 최저한 선이 있는데 그 선을 넘어서면 부하들을 호령할 수 없다. 양산박의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한다(替天行道)"는 깃발은 이 점을 나타낸다. 중공의 말을 따른다면 과거의 강도들은 그들의 "역사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공은 수시로 "역사적 한계"란 말로 남을 평가하지만 종래로 자신을 평가하진 않았다. 어떤 때는 자신을 대조하긴 하지만 강도 행위의 논리와 근거를 찾기 위해서이다. 중공의 사악함은 "역사적 한계"가 없는 것으로 완전히 "상생상극" 이치의 제약을 초월한 것이다. 목적에만 도달할 수 있다면 일체 원칙을 모두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왕영(王英)이 색을 좋아하자 송강(宋江)이 호삼낭(扈三娘)을 소개해줌을 통해 송강이 사람마음을 농락하는 간계를 볼 수 있지만 중공 경찰이 파룬궁 여자 수련생을 강간하거나 여성 수련생의 옷을 벗겨 남자 감방에 밀어 넣는 만행은 중공의 포학과 후안무치함을 폭로했다. 장청(張靑), 손이랑(孫二娘)이 인육(人肉)을 팔 때도 "삼등인"에 대해서는 피했는데 여기에는 범인에 대해 도망갈 길을 열어주는 것을 포함한다. 설사 사람을 잡을지라도 최소한 "몽혼약"으로 사람이 혼미해진 후에 잡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공이 파룬궁 수련생들의 장기를 산 채로 적출해 폭리를 취한 행동은 많은 경우 마취약조차 쓰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된다. 동시에 개별적인 범죄행위가 아니라 집단적 범죄이고 중공의 전반 체제 내에서 서로 협력하고 일치한 노력에서 완수된 것이다. 

중공이 이런 것들은 역사상 일체 음험, 악랄, 비열, 저급하고 후안무치한 마왕이라 해도 비할 바가 못된다. 왜냐하면 중공의 망나니 본성과 망나니 수단이 아주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상상하는 사람의 최저 한계를 완전히 넘어섰을 뿐 아니라 강도의 선마저도 넘었기 때문이다. 중공은 완전히 "이 지구상에서 전대미문의 사악이다!"

(4)『홍루몽』에서 깨어나는 날이 3퇴로 자신을 구할 때


『홍루몽』의 원래 이름은 『석두기(石头记)』이다. 독자들은 작가의 참인 듯 거짓인 듯한 필법에서 대황산(大荒山) 무계애(無稽崖) 청경봉(青埂峰) 절벽의 그 돌을 주의하지 않을 수 있는데 모두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귀주(貴州) 평당(平塘)현 장포(掌布)향에서 2002년 한 개의 돌이 발견되었다. 돌 위에는 "中國共産黨亡"이라는 여섯 개의 큰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 돌이 천연적으로 형성된 것임은 중국 과학원 전문가들의 현지조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중공 중앙 텔레비전에서도 이 기이한 돌을 보도한 적이 있다. 단, 마지막 글자 "亡"자를 일부로 빼놓고 보도했다. 『홍루몽』에 나오는 "통령보옥(通靈寶玉)"에 대해 그것을 진실로 여기는 사람이 없으니,청경봉 아래의 그 돌을 고찰할 필요는 없겠지만 귀주의 돌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교묘한 일치인가?

하늘이 내린 경고가 아닌가! 절대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절대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것이 아니고 긴밀한 내재적 연관이 있는 것이다. 작가 조설근 선생은 천기(天機)를 알고 "보옥"을 빌려 "통령"한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조설근은 돌을 화두로 꺼내 이야기를 연역(演绎)하지 않아도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돌은 책에서 단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라 돌이 없어도 주제를 전달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돌"에 대해 독차적인 견해가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세간의 만물에 대해 속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식이 있다. 그의 의도는 직접 오늘날 세상을 놀라게 한 "장자석(藏字石)"을 향한 것이며 아울러 작가의 세간 만상(萬象)에 대한 견해를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완곡한 예술 기법으로 "말법"시기에 세인들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다.——"석두기"에서 기록한 내용은 바로 "중국공산당망"의 여섯 개 큰 글자이다.

조설근은 문장의 대가라 만약 큰 붓을 휘둘러 돌을 썼다면 과거와 미래를 두루 관통할 수 있다. 여와(女娲)가 하늘을 기운 것 곧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오늘날 "장자석" 즉 인류가 직면한 큰 겁난을 쓴 것이다. 그의 필법에는 허와 실이 있는데 여와가 하늘을 기울 때 남은 그 돌에 문자가 있는 것이 실(实)이고 오늘날 나타난 이것을 책에서는 언급할 수 없는 것이 허(虚)이다. 오직 전 인류의 원래 면모를 아주 진실하게 압축한 한 부의 명품만이 이런 걸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한 글자도 사용하지 않고 풍류를 다 담았다고 할 수 있다.『홍루몽』이 감당한 역사적 사명은 바로 이런 결함이 있어야만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다.

중공이 가장 두려워하는 책이 파룬따파 경서이다. 이것 외에 『9평 공산당』은 중공이 감히 제기하지도 못한다. 이 책에서 유발된 "3퇴"의 큰 물결은 노도와 같은 장관이 되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여기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4대 명작의 작가들이 모두 학식이 깊고 천문과 지리에 능통하며 음양에 밝다는 것이다. 오승은은 고금 천하의 일들을 참고해 책에 한마디를 남겼다. 조설근은 말법의 현재 상황을 더욱 투철히 알고 책의 "결말"을 통해 세인을 각성하게 했다. 그의 의도는 오늘날의 중국을 가리킨 것이다. "홍루(紅樓)"란 지금 중공 사악의 빌딩을 비유한 것이고 "꿈(梦)"이란 모두 허망한 환상이란 의미이다. 중공의 역사와 현 상황을 보면 이 얼마나 합당하게 책속의 현기(玄機)를 표현한 것인가? "홍루"에 미혹되어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면 빌딩이 무너짐에 따라 같이 땅속에 묻히고 말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억울하게 생명만 바친다." 홍루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자연히 홍루에서 벗어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꿈속에 있는 사람을 깨워줄 사명을 지닌 사람은 오직 수련자뿐이다. 책에 등장하는 한 명의 승려와 한 명의 도사는 책을 관통하며 단지 구성의 필요성 때문이거나 작가가 주제를 전달하는 편리 때문만은 아니며 또 구도 방식을 명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바로 사람들더러 홍루에 대한 미혹을 버리고 자연의 본성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오늘날 수련인만이 다시 말해 대법제자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임무이다. 

꿈에서 깨는 데는 시기를 따져야 하는가? 『홍루몽』 문장이 중단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홍루몽』은 동서고금에서 가장 큰 예언서이다. 특수한 시기가 도래하지 않으면 진면모를 드러내지 않는다.『홍루몽』이 각성하게 하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도 "홍루"속에 미혹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오직 천상의 변화에 순응하고 사악한 중공의 각종조직에서 탈퇴해야만 절망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

최근에 4대 명작이 모두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도 절대 우연이 아니다. 4대 명작이 함축하고 있는 천기 역시 확실히 "누설"할 시기가 된 것이다. 단지 오늘날 중공의 현상과 인민의 생존위기만을 말한다 해도 중공이란 빌딩은 이미 기울어졌다. 여기에 뒤따를 "하늘의 징벌"은 아직도 그 속에 미혹된 사람들에겐 정말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전반 인류 문명 발전의 과정에서부터 볼 때 4대 명작의 탄생은 그 필연성이 있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예술적인 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마음의 양식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중화 민족의 특유한 조성 부문이고 전체 중화 민족 민족성을 형성하고 충실하게 하는데 대해, 중국인의 도덕관념, 가치관, 지향과 품행 그리고 생활정취를 양성하는 방면에서 모두 적극적인 인도와 교화 작용을 했다. 종합해 보자면 4대 명작은 이런 기능이 있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두 가지 큰 방면의 표현인데 그것은 바로 "의(義)"와 "수련(修煉)"이다. "의(義)"의 표현에서는 『삼국연의』와『수호지』에 각기 중점이 있고 서로 대조를 이룬다. "수련"의 표현 방면에선 겉으로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곡이나 가사만 다른 작품이다. 『서유기』는 신화이야기로 "수련"을 묘사한 것으로 형상이 있고 생동감이 있으며 구체적인 느낌을 준다.『홍루몽』도 "수련"인데 이를 이해하자면 아주 높은 "오성"이 필요하다. 수련인이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바로 "정(情)"이다. 육친정(亲情), 남녀 간의 정, 친구간의 정, 부모와의 정, 일을 하면서도 정을 말하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등이 모두 정이다. 『홍루몽』의 또 다른 이름으로 『정승록(情僧錄) 』이 있다. 『석두기』를 베껴 쓸 때 공공도인(空空道人)이 "공(空)으로 인해 색(色)이 드러나니 색에서 정이 생기고 정으로 색에 입문하니 색에서부터 공(空)을 깨닫는다."라고 한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홍루몽』의 주제는 또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춘(春)"색을 간파하면 자연히 "공"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4대 명작의 찬란한 명성은 인류가 흥성에서 쇠퇴로 넘어가는 과정 중에 일정 정도 인류를 규범하고 인류 문명의 방향을 인도했으며 대법의 홍전(洪傳)을 위해 특별한 공헌을 했다.『삼국연의』의 "의"는 이미 사람 특유의 내재적인 특질이 되었고 『수호전』 "호걸"들은 부면적인 방면에서 사람 내심의 잠재의식을 표현함과 아울러 사람들에게 필요한 경고를 준다. 『서유기』는 수련과 "정법"의 전달에 일정한 인도작용을 했고 『홍루몽』은 예술적으로 인류사회의 현실과 그 필연적인 방향을 재현했다.

4대 명작은 역사의 깊은 곳에서부터 걸어 나와 마치 4개의 찬란한 별과 같이 역사의 하늘에서 빛을 뿌리며 세인들을 위해 휘황한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형상과 생생하고 선명한 계시를 준다.

(끝)



【명혜망 2008년 1월 5일】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1/5/169571p.html




정견망

인과응보를 믿습니까?

작자: 대법제자

【정견망】

필자의 친척 중에 작은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어릴 때 “고모부, 장사를 하면 어떻게 돈을 벌어요?”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한근을 팔 때 9냥 어치만 준단다.” 당시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때 나는 이웃집 할머니로부터 선악(善惡)에는 보응이 따른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인과응보를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속으로 ‘무게를 속여 돈을 벌어서 잘 지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성장한 후 나는 고모부의 장사가 잘되지 않고 살림이 빠듯해진 것을 발견했다. 아들들은 전부 멍청했고 억지로 장가를 보냈지만 살기가 어려웠다. 이는 무게를 속여 현세(現世)에 보응을 받은 것이 아닌가?

중학교 다닐 때 우리집 앞에는 노점상이 많았다. 모두들 학생들의 돈을 벌려는 것이다. 그중 한 노점상 할머니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물건을 사러오는 사람을 척보기만 해도 한눈에 그의 돈을 얼마나 빼낼 수 있을 지 안다.” 다시 말해, 속일만한 사람을 알아챌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질량을 속이거나 남을 곤경에 빠뜨려 재물을 버는 것을 정당하게 돈을 버는 방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전통문화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했을까? 정견망에 실린 문장(《一杆空心“發家”秤 招致幾樁因果報》)에서 이 문제를 잘 설명해준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청나라 말기 북경 동쪽 노룡 지역에 조덕방(趙德芳)이란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형편이 아주 좋았고 사람이며 재물이 모두 풍족했다. 슬하에는 아들이 셋이나 있었고 또 각자 결혼해 아내가 있었다.

그가 60세 되던 해에 세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잘 들어라. 당초 나는 남을 속여 출세했으며 마음을 속여 이익을 취했고 맨손으로 집안을 일으켰다. 내가 가업을 세운 것은 바로 속이 빈 저울이다. 천칭에 수은을 채우면 물건을 살 때 20냥을 한근으로 쳐서 살 수 있는데(옛날에 16냥을 한근이라 했다) 팔 때는 14냥을 한근으로 했다. 20년 전 나는 수천 근의 면화를 샀는데 한 근마다 4냥을 더 얻었다. 면화를 파는 손님은 손해를 보아 밑천을 물어주고 화병으로 한을 품고 죽었다. 내 마음속에 이 일이 늘 부끄럽고 편안하지 못하구나. 또 약재상이 하나 있었는데 역시 나 때문에 죽었다. 또 있다... 오늘 나는 이런 가업이 있을 뿐 아니라 자손이 가득하다. 하지만 죽은 상인들을 생각하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고 편히 잠을 잘 수 없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나는 오늘 이후부터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기로 했다. 이제 너희들 앞에서 이 속이 빈 천칭을 부수고 더는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세 아들이 듣고 말했다.

“아버님 진작 그렇게 하셨어야지요. 저희는 모두 아버님을 지지합니다.” 노인은 즉시 그 저울을 부수어 버렸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말처럼 착한 일을 하고 선을 베풀었다.

하지만 풍운을 예측 못하듯이 뜻밖에 조원외가 저울을 부수어 버리고 착한 일을 한 이후 집안은 오히려 불행이 연달았다. 한달도 안 되어 큰 아들이 급사했고 며느리는 다른 사람에게 개가했다. 노인이 큰 아들 장례를 치르자마자 갑자기 둘째가 또 폭사했으며 며느리 역시 개가했다. 그가 둘째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또 셋째가 사망했다. 셋째 며느리는 임신 중이었기에 개가할 수 없었다.

집안에 줄초상이 생기자 노인은 매우 괴로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저울을 속여 검은 돈을 벌 때는 오히려 자손이 그득하고 재물이 잘 일어났는데 이제 좋은 일을 하는데 도리어 상사가 생기는구나. 이것으로 보니 인과응보는 순전히 허구이구만.” 이웃들도 듣고 모두 하늘이 눈이 없어 불공평하다고 했다.

어느 날 셋째 며느리가 출산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삼일이 넘어도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 산파를 여럿 불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어떤 사람은 아이 때문에 산모가 살수 없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산모 때문에 아이가 살 수 없다는 등등 말만 많았다. 노인은 집에 잇달아 불행이 오는 것을 보고 초조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했다.

바로 이때 떠돌이 스님 한 사람이 탁발하러 이 집에 들렀다. 대문 안에서 집사가 말했다. “대사님, 동냥을 다른데 가서 하시면 안 됩니까? 우리집 셋째 부인이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는데 사흘이 지나도 못 낳고 있습니다. 주인어른께서 경황이 없어 접대할 정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불교와는 인연이 없으니 아마 아무것도 희사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자 스님이 말했다.

“아, 걱정 마시고 가서 원외에게 알려주십시오. 이 노승에게 아이를 낳게 하는 출산촉진약이 있으니 이 약을 먹으면 즉시 낳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집사가 이 말을 듣고는 즉시 돌아가 보고했다. 노인은 마침 마음이 조급한 상태인지라 집사의 말을 듣고는 얼른 스님을 청했다. 그래서 스님을 서재로 모셔 상좌에 앉히고 어느 사찰에서 오신 분인지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나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인지라 사찰이 따로 없고 인연 따라 다닙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약을 꺼내주었다. 노인은 얼른 며느리에게 약을 보내고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후 보고가 며느리가 스님의 약을 먹고 아들을 낳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덕방은 손자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스님에게 말했다.

“성승(聖僧)께선 진짜 신선이십니다.”

하고는 즉시 사람에게 분부하여 대청에 한상 크게 차리게 했다. 대화하는 동안 음식이 차려지고 노인은 스님을 청해 자리에 앉게 했다.

노인이 말했다. “스님 제게 한 가지 이해하지 어려운 일이 있어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스님이 묵묵히 허락하자 그는 장탄식을 하며 말했다.

“에휴!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과거에 저는 빈 저울로 무게를 속여 남을 해쳤습니다. 몇 년 전 그 저울을 부셔버리고 그때부터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좋은 일을 했는데 뜻밖에 반년도 안 되어 세 아들이 줄초상이 났고 며느리 둘은 개가했으며 셋째 며느리가 겨우 손자를 낳아 그저 자손이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쁜 짓을 할 때는 부자가 되고 집안이 잘 되었는데 선행을 한 후 왜 악보(惡報)를 받아야 합니까? 선악에 보응이 따른다는 설을 모두지 이해할 수 없으니 스님께서 좀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리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선악의 인과응보는 그림자처럼 확실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내 분명히 알려주리다. 당신의 첫째 아들은 원래 당신이 해쳤던 약재상이요. 당신이 그를 죽게 했으니 그가 당신 아들로 태어나 원한을 갚으려 했던 것이오. 둘째 아들은 당신이 속였던 면화상인이요. 그 역시 당신 집에 태어나 집을 망치게 하여 원수를 갚으러 왔던 것이오. 셋째 아들 역시 당신이 빚진 업으로 여러 가지 악연을 지었소. 그는 당신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재난을 주려고 왔는데 당신이 나이 들면 반드시 심하게 아프고 굶어죽게 하려고 틈을 보고 있었소. 당신이 만약 정말 악을 고치지 않았더라면 반드시 이런 종말이 왔을 것이오. 그나마 당신이 악을 고치고 선을 행하여 운명을 바꾸었기에 하늘이 당신을 망치려던 세 아들을 차례로 데려가 큰 화를 모면한 것이오.”

조덕방이 이 말을 듣고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성승의 가르침에 여러 가지로 감사드립니다. 제 우둔함을 알았고 선악과 인과의 천리(天理)를 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손자를 얻었으니 이 아이가 성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진심으로 손자가 아버지 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인지 또 제게 빚을 받으러 온게 아닌 지 걱정스럽습니다.”

스님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의 업보는 이미 다 갚았습니다. 이 손자는 장래 당신 집안을 밝게 해줄 것인데 이는 당신의 선행으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조덕방은 듣고 매우 기뻐하며 선행에 더욱 더 신심이 굳어졌다.

스님이 또 말했다.

“당신은 천칭 저울로 왜 16냥을 사용하는 지 아십니까?”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싶습니다.”

“이것은 북두칠성, 남두육성(南鬥六星), 게다가 복록수(福祿壽) 삼성(三星)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한냥을 덜 주면 복(福)을 손해 보고 두 냥을 덜주면 녹(祿)을 손해 보며 세냥을 덜주면 목숨(壽)을 손해 보며 더 적게 주면 줄수록 손해가 더 많습니다. 나쁜 저울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 지 생각해보시오.”

조덕방은 스님의 말을 듣고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마비되는 것 같아 정말로 두려웠다. 그는 경건하게 재차 스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렸다. 그리고 내심으로 선악인과는 틀림없다는 도리를 믿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나는 고모부가 장사하면서 남에게 질량을 속여 덜 주었기 때문에 아들이 어렵게 살고 또 아들들이 멍청해졌으며 이는 인과응보임을 알았다. 중공은 이것을 타파해야 할 미신이라고 하는데 인과응보의 이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천리는 곧 천리다. 어느 한 사람이나 조직이 억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천리에 부합하고 천리에 순응하면 반드시 부국강병한다. 천리에 위배되고 역행하는 자는 반드시 징벌을 받는다.

‘9평 공산당’을 읽고 나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중공은 천리를 역행하는 사악한 조직으로 중공 정권은 바로 깡패정권이며 서양에서 온 유령이다. 중공은 바로 이 유령이 인간의 인체에 나타난 것으로서 정말 인류를 훼멸하려고 온 것이다. 때문에 그것이 선전하고 행한 짓은 모두 반인류적이고 반우주적이며 반인성적이다.

전통문화는 유신론(有神論)을 말하지만 중공은 무신론(無神論)을 말한다. 또 전통문화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말하며 사람과 대자연이 조화롭게 지내는 것을 말하지만 중공은 투쟁철학을 강조하고 인간관계를 정글의 법칙과 잔혹하고 무정한 계급투쟁의 관계로 본다.

이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윤리가 완전히 뒤집어졌고 전통적인 가치관이 나쁘게 변질되었으며 중공 사당의 거짓, 사악, 투쟁이 처세 표준이 되었다. 중국인들은 중공의 사악한 유도하에 천리를 해치고 있다. 특히 파룬궁 박해 중에 수많은 사람이 공산당 당문화에 이끌려 파룬궁 박해에 가담했다.

물론 파룬궁 진상을 마주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성하고 박해를 중단했으며 대법제자를 선량하게 대했다. 또한 중공 관련조직을 탈퇴하고 진상을 알렸다. 이는 진정한 속죄이자 자신과 가족에게 좋은 미래를 다져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 어리석은 자들은 여전히 박해에 가담하고 있다. 대법제자들이 여전히 자비로 진상을 말하고 박해받는 와중에도 생명을 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인과응보는 하늘의 이치다. 피비린내 나는 파룬궁박해를 도발한 자들(혈채파)는 이미 보응을 받고 있고 두려움에 떨며 단 하루도 편안히 지내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는 중공의 내부 권력투쟁에서 세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은 죄악에 대한 보응이다.

오늘의 선택은 생명의 미래와 영원을 결정할 것이다. 선과 악 앞에서 중공의 유혹 하에서 진선인을 믿는 선량한 민중을 박해하는 공안, 검찰, 법원, 사법, 감옥, 당, 정부 등 관련자들이 부디 하루 속히 지혜로운 선택을 하길 바란다!

발표시간: 2013년 12월 10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25006



TistoryM에서 작성됨
정견망

〖의산야화〗서로 다른 법문(法門)에서의 수련

글:옥림(玉琳) 

【정견망】바비(Bobby)은 나와 같은 진료실에서 10여 년을 근무해왔다. 비록 그녀의 나이가 나보다 약간 더 많긴 하지만 우리는 비슷한 또래로 잘 지내왔다. 그녀는 정신과 의사이고 나는 한의사로서 임상에서 어려운 환자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치료방법에 대해 묻곤했다. 

바비는 힌두교의 일종을 믿었는데 아주 경건한 신도였다. 뿐만아니라 그녀는 내게도 자신의 신앙을 적극적으로 추천했으나 나는 완곡하게 거절한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사람이 왜 신앙을 갖자마자 종교때문에 육식(肉食)을 할 수 없고 녹색 식물만 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향수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수련을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고 여겼다. 

언젠가 한 번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바비, 당신의 사부가 육식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지만 왜 콩으로 만든 인조고기도 못먹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또 신선한 녹색채소만 먹게 한다면 겨울에는 모든 채소가 시드는데 그러면 무엇을 먹어야 하지요?" 

"당신같이 총명한 사람이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하나요? 그것은 녹색 채소가 신선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그녀에게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 어느 한 법문(法門)에서 이렇게 녹색 식물만 먹게한다면 나중에 당신들의 피부색까지도 변하고 말거예요. 마치 홍당무의 캐롯 성분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피부색이 노랗게 변색되는 것처럼요."라고 하면서 약을 올렸다. 

나중에 나는 운좋게 파룬궁(法輪功 역주: 중국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심신단련수련법.)을 만나게 되어 수련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내가 수련을 시작하자 아주 기뻐하면서 더 이상 자신의 법문으로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끌어들이려고도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줄곧 그녀의 뜻을 존중해왔다. 우리는 서로의 믿음과 신앙에 대해 존중하면서 마치 평행선처럼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물론 가끔 그녀가 내게 도전적으로 나온 경우도 있었다. 그녀는 매년 한 차례씩 인도에 다녀오곤 했다. 한번은 그녀가 돌아오자 마자 아주 신비롭게 말했다. "이번에 인도에 가서 사부님이 천정에서 걸어다니시는 것을 뵈었는데……." 

"그래요, 거긴 어떻게 올라갔는데요?" 나는 호기심 있게 물었다. 

"글쎄요, 어쨌든 방안엔 의자나 사다리 같은 건 전혀 없었고 벽이 아주 높아서……." 그녀는 득의양양하게 대답했다. 

"바로 당신 앞에서 일어섰나요?" 내가 또 물었다. 

"내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당시 현장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아! 그래요."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수련을 한 이후 나는 고기에 대한 집착을 아주 빨리 제거했고 평상시에도 별로 생각이 없어졌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닭다리를 점심에 먹기 위해 가져온 것을 그녀가 보았다. 그리고는 "고기를 금지(戒)하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걸어야 할 첫걸음인데 이것마저도 제대로 못한다면 이후에 어떻게 수련을 한단 말이예요!"하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지만, 사실 사람에게 아무런 집착심이 없다면 무엇을 먹던 배를 채우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가 말했다. 

바비는 내 말을 듣고는 잠시 사색에 잠긴 듯 했다. 

우리 병원에는 의사, 간호사 및 직원들이 아주 많아서 하루 일과가 끝날 때 쯤이면 더러운 컵과 접시들이 휴게실에 수북히 쌓이곤 한다. 나는 새벽부터 파룬궁 공법을 연공하는 까닭에 연공후에 습관적으로 그것들을 깨끗이 설거지해왔다. 그런데 내가 자리를 비울 때면 아무도 설거지 하는 사람이 없기에 더러운 접시들이 수북히 쌓이곤 했다. 몇차례 이런 장면을 본 바비는 즉각 "이곳은 당신들의 어머니가 살고 있지 않으니 자신의 설겆이는 스스로 해주세요."라고 큰 글씨로 붙여놓았다. 

다음날 내가 출근해서 그녀가 써놓은 메모를 보고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처럼 모든 접시들을 다 닦아놓았다. 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본 바비는 "저는 제자신이 참 부끄러워요. 왜 저는 구체적으로 실제 상황에 부딪히면 수련의 일을 잊게될까요?" 

나는 그녀에게 수련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생활상의 매 한가지 작은 일에서부터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해야만 수련인의 풍모를 체현한 것이라고.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국에서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은 바비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늘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 내게 묻곤 했다. 박해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을 때도 그녀는 나와 함께 환자와 의사 및 정의로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서명 받는 것을 도와주었다. 

수련을 한 이후 나의 정력은 점점더 좋아졌고 초기에 소업(消業)을 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던 것 외에는 더 이상 무슨 병에 걸린 적도 없었다. 그러나 바비의 신체는 점점더 쇠약해졌다. 보아하니 그녀는 끝내 녹색식물 외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콩이나 쌀로 만든 각종 건강보조식품들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만 불어도 감기에 걸리곤 했다. 

그녀는 매번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병이 하나씩 생겼으며 내게 치료받으러 온 것만도 몇 차례나 된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여행피로에 저항력이 감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중 몇 년 동안에 그녀는 서서히 각종 약물마저 복용하기 시작했다. 각종 종합비타민제, 단백질과 영양성분이 들어간 알약 등등. 그러나 나는 가면 갈수록 더 간단하게 먹었고 하루 두끼만 먹거나 심지어 한끼 밖에 못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신체는 점점더 좋아졌다. 나는 음식이 많이 있으면 많이 먹고 없으면 적게 먹었으며 시간이 있으면 자고 일이 바쁘면 밤을 새기도 했다. 점차적으로 나는 내 몸이 내 필요에 따라 조절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바비가 한켠에서 조용히 나를 관찰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의 생활, 일, 인물됨, 일처리 및 보다 중요하게 한 수련인으로서 일상생활 중의 작은 일들을 대하는 태도 등을 관찰하고 있었다. 


바비(Bobby)가 처음 가부좌를 시작했을 때 내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마하고 무엇을 연마하는지 꼭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부가 외부인에게 공개하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녀는 내게 "가부좌할 때 좋지 않은 것이나 장면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라고 질문했다. 

"당신의 사부님은 뭐라고 하셨는데요?" 

"사부님은 병이 나셨어요." 그녀는 근심어린 어투로 대답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상관하지 말며 마음을 움직이지 말라……."라고 하셨어요. 

얼마 후에 그녀는 또 자신의 사부가 세상을 떠나 다른 사람으로 환생할 거라고 말했다. 임종하기 전에 사부는 30에서 50세 정도의 사람으로 환생할 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두세 명의 사람이 사부가 환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제자들이 혼란스러워한다고 했다. 스스로 사부가 환생했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주 그럴듯한 한두 가지 근거가 있었지만 그중에 진짜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바비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전법륜(轉法輪)』을 주자, 그녀는 아주 소중하게 받아갔다. 만약 책을 보다가 의문점이 있으면 언제라도 내게 오라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세월이 흘렀다. 중국에서는 장쩌민 집단의 파룬궁 탄압이 갈수록 더 극렬해졌기 때문에 나는 세계 각지를 날아다니면서 바쁘게 보냈다. 워싱턴 DC에서 의원들의 서명을 받는가 하면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UN회원국 대표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등 나는 아주 분주하게 살았다. 나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는 "혹시 그러다 한의사를 그만두고 정치 로비스트가 되는 건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중국 대륙에 있는 많은 동수들이 체포, 감금, 고문을 당하고 있으며 인신의 자유를 잃었고 심지어 생명마저 잃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이런 박해를 제지하기 위하여 정부나 국제기구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며 나는 수련인으로서 정치에는 아무런 흥미가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내말을 듣고 나서 감동한 듯이 "당신들은 정말도 대단해요……"라고 했다. 

내가 파룬궁 박해를 반대하는 활동으로 바쁠 때 그녀는 마침 병든 개 한 마리를 데려다 길렀다. 그러나 이 강아지는 곧 그녀의 생활에 엄중한 문제를 초래하였다. 우선 당뇨병에 걸렸고 연이어 신(腎)부전에 걸려 매주 투석치료를 해야 했으며 매일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래서 강아지를 동물병원에 데려다 주는 일이 그녀의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지쳐버렸고 뿐만 아니라 동물은 의료보험이 되지 않는 관계로 많은 돈을 소비해야 했다. 

가끔 나는 개는 개에 불과하며 생명은 윤회하므로 설령 개가 빨리 죽는다고 해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니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만약 많은 치료비를 부담해가면서 개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한다면 다음 윤회를 방해하게 되어 오히려 원망을 들을지도 모른다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해주었다. 

결국 어느 날 바비의 개는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몇 날 몇 일을 슬피 울었다. 이 몇 년간 그녀는 강아지 치료비로 자신의 저축을 거의 다 날려버렸다. 그 개는 아마도 그녀에게 빚을 받으러 왔던 모양이다. 

소도(小道)수련법문에서는 이런 몸 밖의 물건에 대해 명확한 이치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바비의 수련은 아주 고생스럽고 꽤 오래 수련했지만 여전히 사람이 왜 살며 수련이란 무엇인지 몰랐다. 그녀는 표면형식에 있어서는 아주 근엄하게 준수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도리어 미혹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다른 주(州)에 볼 일이 있어서 간 적이 있는데, 핸드폰에 병원 동료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왔다. "바비가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어요……" 

나는 즉각 비행기를 타고 바비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문밖에서 출입을 거절당했다. 병원 측에서는 누구도 들여보낼 수 없다고 했다. 바비가 위험한 고비를 지나고 약간 회복된 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했다. 

"당신이 보기에 내가 수련하지 않거나 종래로 수련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그녀가 물었다. 

"당연히 있지요" 

"그게 뭔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왔잖아요!" 

"당신에게는 바로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이 있잖아요! 또한 늘 자신을 점검하고 주의하며……."그녀를 위로하며 내가 말했다. 

"나는 채식하고 가부좌하며 버려진 동물을 데려다 기르고 사부님도 아주 경건하게 대했어요. 그런데 왜 나는 늘 수련이라는 문의 입구에도 들어서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까요?"그녀가 물었다. 

"수련이란 그 마음을 닦는 것으로 단지 진정으로 각종 집착을 제거할 때라야만 비로소 수련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나는 마치 자신을 깨우치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도 알 테지만 나는 늘 당신을 부러워했어요. 당신은 어떤 일을 해도 늘 여유가 있고 병원에서 환자를 볼 때도 여유가 있어요.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시간에 늦는다거나 건강에 문제가 생기지도 않고. 이 때문에 나는 아주 부끄럽고 창피함을 느낍니다. 처음에 나는 당신이 육식을 꺼리지 않는 것을 보고 곧 수련을 포기하겠거니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러나 이런 문제를 당신은 아주 가볍게 지나쳐 버리더군요. 나는 정말로 불가사의 했어요……." 그녀는 약간 부럽다는 듯이 또 약간 혼란스럽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나는 이 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당신이 준 책은, 첫머리에 나오는 파룬 도형 때문(역주: 바비는 파룬도형에 나오는 卍자 부호를 히틀러의 기호와 혼동하고 있다.)에 놀라서 지금까지 줄곧 읽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책을 덮고는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만약 오늘 집에 돌아간다면 진지하게 한 번 읽어볼께요." 

"아, 제가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 부호는 히틀러의 나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불가의 만(卍)자부호로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거예요."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그녀는 아주 격동적으로 말했다. 자신에게 심장병이 발작했을 때 스스로 이제는 끝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온 하늘 가득히 날아다니는 금빛찬란한 파룬들을 보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혼절해서 두 눈에 별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의심 했지만 아름다운 음악소리와 함께 눈앞에 갑자기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파룬을 보았다고 했다. 그들은 실제로 존재했으며 입체감이 있었고 화려한 색이 있었다. 그녀는 그 어떤 말로도 이 광경을 형용할 수 없다고 감탄하면서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안경을 약간 들어올리면서 감동에 겨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단지 마음속으로 "사부님! 당신께서는 끝내 인연 있는 사람을 찾아서 대도(大道)수련 속으로 이끌어 오셨군요!"라고 되뇔 뿐이었다. 

문장발표 : 2004년 6월 22일 
문장분류 : 인체생명우주>전통한의 
영문위치/중문위치 

정견망

생명의 탐색
--수련인이 보는 우주, 생명 및 인류사회



글/ 일부(一夫) 

【정견망 2005년 10월 9일】
 

"혹시 지금 또 다른 당신이 이 문장과 같은 문장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Scientific American》라는 미국의 저명 잡지에서 2003년에 발표한 《평행 우주(PARALLEL UNIVERSE)》란 글의 첫 문장이다. 이 글은 최근의 천문학과 물리학 방면의 연구 성과를 종합한 것으로 우주 중에는 무수히 많은 우주시공이 존재한다고 지적하였다. 문장에서는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사의 하지만 미래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문관측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2천여 년 전, 중국의 대문장가 굴원(屈原)은 《천문(天問)》중에서 하늘에 질문을 하면서 우주 만사만물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원인을 탐구하였다. 과학연구에 의하면 물질시공과 생명의 오비(奧秘) 무궁무진하며 그들에 대해 말한다면 비교적 깊은 인식을 가질 수 있으므로 우리를 도와 인류사회의 발전 법칙을 알거나 우리 자신의 앞날과 운명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1. ‘또 다른 나’



현재 과학의 주류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주 외에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른 우주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매 하나의 이런 우주공간 속에는 사람마다 모두 하나의 신체 혹은 ‘또 다른 나’(혹은 ‘복사본’)가 있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마치 양파처럼 다른 공간 속에 층층의 신체가 있다. 다른 우주 공간 속에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생명과 물질들이 충만되어 있다. 

 


사진1,2 다세계(Many Worlds Theory) 이론에서 설명하는 ‘또 다른 나’ 설명도로 이 사진들은 2001년 9월 《Disover》에서 제공한 것이다. 



위 사진은 《디스커버》란 미국의 저명한 잡지에 소개된 것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유명한 이론 물리 학자 데이빗 도이취(David Deutsch) 교수가 ‘또 다른 나’를 토론하고 있는 설명도이다. 사진 속에 나오는 백색의 사람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과 교수들의 ‘복사본’을 대표한다. 매 사람에게는 이런 ‘복사본’이 무수히 많이 존재하지만 단지 우리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을 뿐 부동(不同)한 공간 속에서 부동한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과학자들은 우주와 물질의 구조로부터 다른 공간 속의 생명과 물질은 다양성과 복잡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동한 공간의 생명 사이에도 일정한 연관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다른 물질 공간은 어떤 때에 우리 육안으로도 볼 수 있게 드러나기도 한다. 사람들이 ‘신기루’가 하는 것이 바로 다른 공간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사진: 기이한 신기루 광경[화둥(華東) 사이트 보도] 


예를 들면 2005년 5월 23일 화둥(華東) 사진 사이트 보도에 따르면 펑라이(蓬萊) 해안과 펑라이각(蓬萊閣) 및 팔선도경구(八仙渡景區) 동쪽 해역의 상공에 매우 보기 드문 ‘신기루’가 나타났다고 한다. 오후 두시 경 펑라이 해변에 끼어 있던 옅은 안개가 걷히면서 상공에 옅은 황색 띠 모양의 운무(雲霧)가 나타나면서 점차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장관을 연출하였다. 16:50부터 해역 상공의 큰 구름들이 천변만화했는데 공중에서 만개한 진기한 꽃 같기도 하고 항구를 떠나는 큰 배 처럼 바다 멀리에서 서서히 날아오더니 순식간에 펑라이각과 팔선도경구 상공에서, ‘신기루’의 기이한 광경을 사람들 앞에 나타냈다. 마치 한 폭의 정지상태의 고해상도 아름다운 도시의 광경이었다. 안에는 빌딩, 등탑, 넓은 도로 등을 뚜렷히 볼 수 있었으며 천인(天人)과 천마(天馬)가 늘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이번 신기루는 1988년 이래 규모가 가장 크고 지속 시간이 가장 길었으며 또 가장 뚜렷했다. 이번 기이한 광경은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사실 신기루는 바로 다른 공간의 생명과 물질이 우리의 인류공간에 반영된 관경이다. 


중국고대의 과학은 매우 발달하였으며 인체, 생명, 우주에 대해 상당히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생명은 다른 공간과 관련이 있으며 층층마다 신체(身體), 원신(元神 즉, 의식)과 허다한 생명의 요소를 구비한 것으로 생명은 대단히 방대하고 복잡한 것이다. 중국 고대의 사람들은 “하늘 바깥에 또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하늘’은 바로 다른 공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하늘 바깥에 또 하늘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인류공간 외에 또 많고 많은 다른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하늘’은 단지 우리 이 공간 속에서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말할 따름이다. 


중국 고대의 과학은 수련(修煉)을 기초로 하였다. 수련의 실질은 모두 사람의 다른 공간 속의 신체에서 발생하지만 이 공간에서도 반영될 수 있다. 이를테면 수련인은 동년배에 비해 젊고 건강한 등등이다. 수련계에는 역대로 허다한 신기한 현상들이 나타났지만 사실 모두 다 다른 공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1996년 8월 20일, 지린(吉林)의 한 파룬궁 수련생이 아침 연공을 할 때 다른 수련생이 그녀의 연공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적이 있다. 그런데 연공할 때 찍은 사진 속에는 용(龍)이 그녀의 몸 주위에서 호법(護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신기루와 유사한데 모두 다른 공간의 생명과 물질의 광경이 드러난 것이다. 



사람은 다른 물질공간에 상응되는 신체가 있으며 다른 물질공간 및 그 속의 생명과 물질은 진실하게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것은 인류가 생명과 우주를 인식하는데 심원한 영향을 가져다줄 것이며 생명과학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킬 것이다. 




2. 우리는 예전에 친척이나 친구였을 수 있다



생로병사는 인류의 법칙으로, 생사(生死)는 인류의 영원한 화제이다. 기왕지사 사람의 생명이 이처럼 오묘하고 복잡할진대, 그렇다면 사람이 사망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 사망 순간



최근 몇 십 년 이래 과학계에서는 임사체험(臨死體驗 혹은 瀕死體驗이라고도 하는데 영어로는 Near Death Experiences이다)이라고 불리는 연구 영역이 나타났다. 이것은 일부 심각한 부상을 당했거나 혹은 중병(重病)에 걸렸다 의외로 회복한 그런 사람들이 죽음이 임박했을 때의 체험을 가리켜 하는 말인데 현재 생물학, 의학, 심리학과 철학 분야에서 단독 혹은 협동 연구에 있어 뜨거운 화제가 되었다. 


통속적으로 말한다면 임사체험이란 바로 사람에게 ‘영혼(수련계에서는 ‘元神’이라고 하며, 심리학이나 신경학 등의 연구 중에서는 ‘意識’이라고 부른다).’이 있는지 없는지 탐색하는 것이다 


영국의 의사 샘 다니엘(山姆 帕尼尔)은 최초로 ‘영혼(靈魂)’의 객관적 존재와 사람의 의식이 정말로 육체를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과학 실험으로 실증하였다. ‘영혼’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이며 일정한 크기가 있고 날아다니거나 이동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 생명이 존재하는 다른 일종의 형식이며 결코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니다. 사실 일찍이 1930년대에 러시아의 과학자 킬리안 부부는 고주파 전자기장 속에서 사람의 에너지 체(육체의 생존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플라스마 체)를 촬영하였다. 이로부터 인체의 경락이 에너지 체(體)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한편 일본 동경에서는 조용히 ‘알파 3호’란 과학 실험을 하였다. 그 내용은 과학자들이 지원자(모두 죽음을 앞둔 위중한 환자들)들의 두개골 속에 전극을 심고 또 컴퓨터와 연결하여 컴퓨터가 80km 범위 내에서 지원자의 뇌파를 받아 들여 60초 내에 뇌파를 문자로 번역해 컴퓨터 모니터에 나타나게 한 것이다. 


알파 3호 프로젝트를 실시하는 과정 중에 지원자들은 하나둘씩 계속해서 세상을 떠났다. 불적(佛迪)이란 이름의 한 환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3일 후 컴퓨터 모니터에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기대하던 정보가 나타났다. "나는 불적(佛迪)이다. 나는 지금 아주 즐겁고 아무런 고통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습니다……." 이 몇 글자는 20여 차례 반복해서 나타나다가 갑자기 정보가 끊어졌다. 


나중에 23살 난 한 백혈병 환자가 불행하게 죽었는데 이튿날 컴퓨터에서 그녀의 정보를 받게 되었다. "이곳은 아름다움 곳이며 나는 여기에 오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여기는 늘 햇빛이 충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으며 나는 그들을 아주 사랑합니다. 나는 장차……." 여기까지 정보가 나오더니 갑자기 정지됐다. 


알파 3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모두 여기서 전달된 정보의 피드백 결과는 모두 비슷하며 이것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인정하였다. 


많은 연구 발견을 통해 학술계에서는 이미 ‘임사 체험’에 5단계가 있다고 인정받고 있다. 1단계는 편안하고 홀가분한데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57%를 차지한다. 2단계는 의식이 편안하게 체외로 나가는 것을 느끼는데, 이런 감수가 있는 사람이 35%를 차지한다. 3단계는 터널로 묘사되기도 하는 ‘블랙 홀’을 통과하는데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23%를 차지한다. 4단계는 친척이나 친구들과 함께 모이는데 그들의 형상은 크고, 현란하고 색채가 다양하며, 광환이 있는 천사와 같다. 마지막으로 5단계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 

중국에서도 ‘임사 체험’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톈진(天津)의 안딩(安定) 병원에서는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과학적인 각도에서 임사 체험을 연구했다. 그러나 중공의 장기적인 정치의식 상태의 통제로 말미암아 이 분야의 연구에 있어 다른 나라보다 많이 뒤떨어졌다. 외국에서는 이미 생명과학 연구의 중요한 테마로 되었다. 


* 생사윤회에는 국경이 없다



기왕에 사람의 육체가 사망한 다음 의식(원신, 영혼)이 육체를 떠나 모종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러면 의식 역시 새로운 육체와 결합하여 윤회전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중공의 장기적인 당문화의 세뇌로 인해 많은 중국인들은 윤회전생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서양은 학문이 자유롭기 때문에 장기간 윤회와 생사를 연구하는 중에서 풍부한 성과를 쌓아왔다. 미국 버지니아대학의 전(前) 정신병학 계열 주임이자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이안· 스티븐슨 (Ian Stevenson)의 학술저작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은 오늘날 윤회전생 연구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학술적 가치와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참고 서적이다. 그는 또 인생에서 아주 많은 것들이 모두 윤회와 관련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면 태어날 때 생기는 반점, 선천적인 신체장애 등등이다. 그의 연구 보고는 아주 상세하고 연구태도 또한 아주 객관적이며, 사용한 방법에도 빈틈이 없어, 예로 든 케이스들을 윤회 이외의 다른 원인으로는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중에는 한 인도 여자 어린이 스완라다의 윤회 케이스가 기재되어 있다. 스완라다는 3살이 되던 해에 전생의 남편과 아들을 회억해 냈다. 나중에 그녀가 전생의 남편과 아들을 만나 뒤 상대방에 대해 장기적이고 엄밀한 고찰 끝에 그녀가 바로 그들의 잃어버린 가족인 ‘바이야’임을 확인했다. 나중에 스티븐슨 교수는 인도로 찾아가 스완라다와 그녀의 가족을 방문했으며 26명의 증인이 기록을 썼다. 후에 스티븐슨 교수는 또 그녀의 다른 지방의 가족들을 방문했다. 이것은 매우 유력한 케이스이다. 스완라다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중에서도 아주 특수한 하나였는데 그녀의 전생은 줄곧 소실되지 않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최면회귀요법은 이미 서양 사회에서 윤회로 병을 치료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주류의학으로 진입하였다. 심리학자, 최면치료사와 정신병 학자들은 이미 사람이 최면상태에서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으며 허다한 정황들은 머나먼 행성, 성계(星系)와 심지어 다른 우주에서 생활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미국과 타이완의 신경정신과 전문의 천청잉(陣承英)의 최면치료보고서인 《전생과 금생을 초월하다》란 책에는 이러한 케이스가 있다. 타이완에 메이다이(美代)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한 남자의 감언이설에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저축한 200만원(대략 50만 달러에 해당)을 상대방에게 주어 신혼집을 사게 하고 자신은 결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상대방은 이미 결혼을 했고 집에 들어서니 신부는 메이다이가 아니었다. 


메이다이는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젠 정도 다 떨어졌으니 돈이라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상대방은 돈은 그녀가 기꺼이 원해서 준 것이며 또 영수증도 없다면서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메이다이는 매 번 돈을 요구하러 갈 때마다 심한 욕만 먹었다. 메이다이는 심사가 편치 않아 법원에 고소를 하려 해도 승소할 가망이 보이지 않자 최면을 통해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최면 속에서 메이다이는 자신이 어느 한 세(世)에 의지할 곳 없는 노파인 것을 보았다. 어느 한차례 도적이 들이닥치자 그녀는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하면서 그들에게 옆집에 사는 서생(書生)에게 돈이 많으니 그리로 가서 약탈하라고 알려주었다. 도적들은 그녀를 놔두고 옆집 서생의 은전 200냥을 약탈해 갔다. 그 서생이 바로 금생에 그녀의 돈을 갚지 않은 전 약혼자였으며 그 도둑 두목은 바로 금생에 메이다이의 아빠였다! 


몇 년 뒤에 그녀의 아빠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200만원(대만화폐)를 남겼다. 그제야 그녀는 크게 깨닫게 되었다. 전생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기에 금생에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며, 다른 사람이 자신한테 빚진 것도 전부 되돌려 받았다는 것임을. 


윤회와 환생에 관한 많은 연구에서 인생은 인과관계를 따른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람이 한 일체 일은 모두 모종의 방식으로 기록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나쁜 일을 한 것을 다른 사람이 모른 다고 여기는데 이는 완전히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짓이다. 윤회환생에는 국경이 없으며 각기 다른 나라나 다른 인종으로 환생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또 동물로도 환생할 수 있고, 기타 생물 혹은 물질로도 환생할 수 있다. 


물리학의 각도에서 윤회를 본다면 이해하기가 아주 쉽다. 인류가 생존하는 공간은 다만 방대한 우주 중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간 중의 극히 작은 한 공간이다. 사람의 육신은 다만 사람의 많고 많은 신체 중의 하나이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사람의 육체세포는 분자로 구성되었고, 분자는 원자로 구성되며, 원자는 더욱 미세한 양성자, 중성자와 전자 등 더욱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었음을 알고 있다. 사람의 육체가 죽을 때 다만 가장 표면의 한 층의 신체를 벗어 버렸을 뿐이며 사람의 미세한 입자로 구성된 신체는 전혀 죽지 않았다. 화장터의 불은 다만 표면의 육체만을 태울 뿐 미시적 공간 속의 신체는 태울 수 없다. 


인류의 기나긴 환생과 윤회 중에서 우리는 일찍이 친척이나 친구였을 수 있으며 금생(今生)금세(今世)에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다시 인간 세상에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생세세 무수히 많은 고생을 겪은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윤회환생 연구에서는 또 사람마다 거의 다 이전에 중국 사람으로 환생한 적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어떠한 깊은 원인이 있는 것인가? 



3. 인류사회의 주요한 선[主線]




 


橫看成嶺側成峰 : 가로로 보면 산줄기, 옆으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각각 그 모습 다르네 
不識廬山眞面目 :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은 
只緣身在此山中 : 단지 내 몸이 이 산 속에 있는 탓일세



이 시는 소식(蘇軾)이 쓴 《제서림벽(題西林壁)》이다. 

우주공간과 생명은 이처럼 방대하고 복잡하며, 사람이 4차원 공간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마치 여산 속의 아주 작은 구석진 곳처럼 완전히 대천(大千)세계에 속에서 미혹되어 있으므로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볼 수 없다. 인류의 역사와 인생의 의의를 똑똑히 보려면 반드시 인류의 4차원 공간을 초월해야만 한다. 


* 역사의 미궁을 벗어나다


과학의 발전은 우리에게 우주시공과 생명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알려준다. 지금 4차원 시공을 기초로 한 인류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은 모두 단편적이고 단층차(單層次)적이며 지나치게 간단하다. 


각기 다른 물질 공간 속의 생명들은 상호 연계를 가지고 있으며 고(高)에너지 공간 속의 생명은 저에너지 공간 속의 생명을 조종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미시적인 원자핵 에너지는 인류 생존공간의 분자보다 에너지가 더욱 크다. 사람은 미시적인 하에서 상호 대응되는 신체가 있으며 인류 사회는 완전히 고에너지 물질 공간 속의 고급생명에게 제약 받고 있다. 즉 인류사회의 발전은 인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상 고층물질 공간 속의 고층 생명이 통제한 것이다. 일정한 발전법칙에 따라 가는 동시에 인류에게 많은 계시(啓示)를 남겼다. 


예를 들어 일찍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생활 했던 마야인들은 매우 선진적인 역법(曆法)을 갖고 있다. 한 오래된 예언에 의하면 서기 1992~2012년 전후 20년은 ‘지구 갱신기’라고 한다. 지구와 인심(人心)은 곧 은하계 핵심에서 온 에너지에 의해 정화될 것이다. 인류도덕이 보편적으로 엄중하게 아래로 미끄럼질치는 지금 이 시대에 이런 갱신은 사람의 사상과 정신경지의 승화이자 심령(心靈)의 정화(淨化)이다. 


인류의 역사상에서 거의 모든 민족들은 ‘신이 돌아올 것’라는 오랜 전설을 유전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일찍이 2500년 후 즉 지금 시대에 전륜성왕(轉輪聖王, 혹은 法輪聖王이라고도 한다)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정법(正法)하며 또 세속 인연을 끊지 않는 수련방법을 전하실 거라고 예언하였다. 


서양의 《성경》에서도 ‘신이 돌아올 것’임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말해서 인류 역사는 사실 바로 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는 역사이며, 근본 목적은 바로 법륜성왕께서 대법을 전하시기를 기다려 대법에 동화하고 자신의 다른 물질 공간 속의 천국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인류 역사의 주요한 선이다. 인류역사의 일체는 모두 이것을 기점으로 하며, 각 방면의 준비와 배치를 했고 이 주선(主線)을 에워싸고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자신과 인류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황금열쇠이다. 


예를 들면, 인류의 오랜 문명 속에서 중국, 인도, 그리스 등 나라에서는 거의 비슷한 시기인 2500년 전 무렵 노자,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등의 선현(先賢)과 철인(哲人)들이 나타났다. 당시 교통과 통신 상황 때문에 큰 지역의 교류를 할 수 없었는데 이 일체는 우연이 아니다. 사실 역사상의 모든 일체 및 문화대혁명 후기에 기공 고조가 온 것도 모두 오늘날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위하여 길을 닦고 수련과 사람이 되는 근본 이념 및 문화 등을 다지기 위한 것이다.. 


바로 어둠 속에 정해진 수가 있다[冥冥之中有定數]는 것이다. 


* ‘나’는 누구 인가?


사람의 육신 신체는 윤회환생을 겪으면서 끊임없이 변환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유백온(劉伯溫)은 명나라 개국 공신이자 재상(宰相)이며 또 중국의 3대 민간 예언 중 하나인 《소병가(燒餠歌)》의 저자이다. 그는 명나라 초기부터 지금까지 발생한 주요한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언하였다. 특히 法輪大法가 널리 전해지는 것과 法輪大法가 인류 사회에 가져다주는 심원한 의의를 예견하였다. 우리가 처한 시대에 대해 유백온은 일찍이 명태조 주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만조(萬祖)가 하계에 내려오고 천불(千佛)이 세속에 내려오네, 온 하늘의 별과 나한 군진, 하늘 가득한 보살도 이 겁난을 벗어나가 어렵구나. 이에 미래부처님이 내려오시어 도(道)를 전하시니 천상천하의 여러 불조(佛祖)들 금선(金線)의 길을 만나지 못하네.(萬祖下界,千佛臨凡,普天星斗,阿漢群眞,滿天菩薩,難脫此劫,乃是未來佛,下方傳道,天上天下諸佛諸祖,不遇金線之路.)"
 

유백온은 지금 사람들이 모두 내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 사진은 샤오핑 등 파룬궁 수련생들이 창작한 유화 《서약(誓約)》이다. 이 그림에서는 각지의 신선들이 하늘로부터 인간 세상에 내려와 자신의 서약을 이행하는 것을 묘사하였다. 파룬(法輪)이 높은 곳에서 돌고 있고 인물의 신태(神態)는 장엄하고 상서롭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다른 공간을 의미한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현재 인류 사회 속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내력이 있으며 고층물질공간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중국인들은 무신론의 독해(毒害)를 심하게 받았다. 그러나 당신이 믿든 믿지 않든 예전의 당신은 아마 아주 높은 층차의 생명(神)이었거나 혹은 예전에 고층 공간 속의 어느어느 천국세계의 왕(王)이나 주(主)였으나 인간 세상에 내려왔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특별한 사명을 지니고 왔다. 


그러나 사람이 일단 인간 세상에 오기만 하면 인류의 미혹된 공간 속에서 생활하게 되며 자신의 내원을 똑똑히 모른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생세세 윤회 속에서 떠돌고 있다. 그 중 허다한 사람들은 심령 깊은 곳에 자신이 인간 세상에 온 목적을 잊지 않고 온갖 고생을 다하며 대법을 찾고 있다. 그들은 法輪大法가 전파되는 시기를 기다려 능히 ‘眞善忍’에 동화하여 자신의 진정한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마야 예언 속의 ‘지구갱신기’는 1992년부터이다. 그러니 法輪大法가 1992년에 창춘(長春)에서 공개적으로 전해진 이것도 물론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얼마나 되는 사람이 천년에도 만나기 어려운 이 행운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가? 


*사람의 근본문제



"원숭이가 달을 건진다"는 우언(寓言)을 들었을 것이다. 원숭이는 진정한 달이 하늘에 있는 것을 모르기에 헛된 환성의 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는 당연히 헛된 것이다. 사람은 인류 사회 속에 미혹되었기에 자신의 진정한 내원이 ‘천상(天上, 즉, 다른 우주 물질 공간 속의 천국세계)임을 모른다. 


인류가 저층 공간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마치 원숭이가 우물 안에 있는 달을 보는 것처럼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 역대의 수련계에서는 늘 이런 말을 한다. 타향을 고향으로 여기지 말라, 생명의 영원함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허환(虛幻)에 미혹되어 잘 살기만 바라고 난세(亂世)에 아래로 미끄럼질치고 있으며, 탐욕과 욕망 속에 타락하는가 하면 개인의 이익과 이기적인 욕망을 위하여 아귀다툼 하고 있고, 심지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타인과 자신을 해치고 있는데 갈수록 더 깊이 빠져들어 결국에는 아마 영원히 타락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물질 재부(財富)가 증가했다고 여기면서 생활환경이 이렇게 좋은데 왜 천국세계로 돌아가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 사실 이런 한가한 마음은 사람이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 단지 자그마한 안일을 얻은 것에 불과할 뿐이며, 향수와 명리를 추구하는 세월은 아주 빨리 흘러간다. 


마치 물속의 달처럼 진정으로 행복하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하물며 사람은 생로병사가 있고, 고통이 있으며, 재난이 있고, 곳곳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며, 더욱이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임사체험 연구 중에서 다른 공간 속의 생활은 여기 인류보다 나은 것을 발견하였다. 공간의 층차가 높을수록 생활은 더욱 아름답고 더욱 자재(自在)하다. 


그러므로 인생의 진정한 의의는 반본귀진(返本歸眞)이며,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고층 공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이야 말로 진정한 자신의 고향이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고통과 재난을 멀리할 수 있는데 이것이 진정 영원한 자재(自在)와 행복이다. 


인류의 주선(主線)은 바로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며 설치된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인간 세상에 미혹되어 이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4. 중국 근대가 혼란한 근원



중화민족은 일찍이 휘황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 이후 중국은 갖은 고난을 겪었고 심지어 망국(亡國)의 위기까지 마주했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쇠퇴를 중국의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 탓으로 돌렸다. 사실 이는 인류의 사차원 시공에 입각한 천박하고 그릇된 인식이다. 


중국인은 ‘역사를 거울로 한다[以史爲鑑]’는 것을 중시하지만 사차원 시공에 입각하여 역사를 보면 영원히 역사의 미궁에서 걸어 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인류의 진실한 역사와 목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마치 산 정상에 서서야 비로소 구불구불한 산길을 똑똑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우주 공간의 높은 곳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아야 역사의 미궁에서 걸어 나와 인류 역사의 궤적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역사에 대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중국 근대의 혼란과 고난의 원인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출현이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령(邪靈)이 오자, 중국이 쇠퇴



수련인들은, 고층공간의 생명이 중국을 인류의 무대로 배치하여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주 세밀한 준비를 했으며 신이 곧 중국에 돌아가 대법을 전할 것임을 알고 있다. 중국은 ‘신주(神州)’로 칭해졌고 고층공간의 생명이 하세(下世)하면 먼저 중국에서 환생하여 인연을 맺고 중국인이 된 후 다시 다른 국가에 가서 환생하였다. 끊임없이 윤회하고 환생하며 인연을 맺었는데 파룬따파(法輪大法)의 홍전(洪傳)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주 중에는 상생상극이 있고 우주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층층의 공간에 있는 무수한 생명 중에는 한 무리 사악한 세력이 있었는데 지극히 악랄한 교란과 파괴 작용을 일으켰다. 


인류사회는 마치 바둑판과 같다. 사악한 세력은 상생상극을 구실로 파괴를 하며 신이 돌아와 사람을 구도하려면 예수와 기독교도들처럼 박해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아울러 이 일은 전 인류와 관련이 있기에 십악(十惡)을 고루 갖춘 정당을 만들어야 했고 이 악당(惡黨)의 조직적인 힘을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박해했으며 아울러 이 박해를 전 세계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사악한 세력은 하늘을 반대하고, 땅을 반대하고 인류를 반대하는 공산사령(共産邪靈)을 만들었는데 인간세상에서의 표현은 바로 공산당이며, 다른 공간 중에도 대응되는 생명형식이 있었다. 예수의 큰 제자 요한은 황량한 섬에 유배되었을 때 일부 다른 공간에서의 공산당의 원형을 보았다(즉 숙명통 공능이 나타나 미래에 발생될 일을 보았다.) 요한은 붉은 용[赤龍]을 보았고 고대의 뱀과 사탄을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공산당의 다른 공간에서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공간에서 공산당의 원형(原形)은 짐승이자 사령이다. 성경 《계시록》의 기록에서 한 사람이 선서하고 중공조직(공산당, 공청단 혹은 소선대)에 가입할 때 그 짐승은 이 사람의 다른 공간의 신체에 표기를 하는데 속인은 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공능(功能)이 있는 사람은 볼 수 있다. 신이 대심판을 진행할 때 이 짐승의 표기가 있는 모든 사람들은 곧 도태된다. 공개성명을 발표하여 중공조직에서 탈퇴(당, 단 혹은 소선대)하면 신은 다른 공간의 낙인을 지워 중공을 청리하고 사람들을 징벌할 때 응보를 면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엄숙한 일이다. 


사악한 세력은 이 악당(惡黨)을 만드는 동시에 그 이 당을 영도할 사악하고 우둔한 무리를 찾아야 했다. 이것이 바로 저령(低靈)이 환생한 장쩌민(江澤民)이며 그는 인간세상에서 한 막 또 한 막의 추악한 연극을 연출하였다. 


역사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필자는 사악한 세력이 중국인으로 하여금 공산 사령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중화민족의 역사는 유구하고 자고이래 천조(天朝)의 기백이 대단한 대국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중국 전통문화는 도덕을 아주 중시하며 언제나 아주 강한 동화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중국을 통치한 외래 민족도 나중에는 결국 동화되어 버렸다. 이러한 극히 강한 문화적인 친화력과 응집력, 강한 민족적 자신심과 우월감이 있는 정황 하에서 우리는 중국인들이 반(反)우주, 반(反)천리(天理), 반(反)인류적인 공산사령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악한 세력은 사람의 생명을 무시하는데 파괴적인 방식을 이용하여 중국인들로 하여금 공산사령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세밀하고 주도면밀한 배치를 통해 중국의 전통문화를 변이시키고 파괴하여 중국을 쇠약하고 혼란하게 만들었다. 중국인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잃고 전통을 버리게 했으며 공산유령이 중국에 들어올 수 있도록 구멍을 내고 조건을 만들었다. 이 자연사(自然事)는 전반 인류사회에 연관된다. 하여 인류사회에는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이란 두 개의 사회진영이 나타났다. 


여기서는 주로 중국에서 발생한 일을 말하겠다. 사악한 세력이 중국에 공산사령을 진입시키려 한 중요한 일보는 바로 중국을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산업혁명 이후 실력으로 빠른 발전을 했고 또 적극적으로 밖을 향해 확장하였다. 1840년 ‘아편전쟁’은 중국의 문호를 열었고 중국인들로 하여금 서방의 신흥 강국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그 후 몇 십 년 동안 중국은 서방과의 경쟁에서 여지없이 패배했고 큰 치욕을 당했으며 심리적으로 아주 큰 자극을 받았다. 민족 자존심과 자부심은 훼멸되었고 일부 외국세력들이 중국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이 기간에 발생한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의 국력을 크게 손상시켰다. 


이렇게 외부에서 강제로 가해진 치욕과 서양의 무력 앞에 스스로 천조(天朝) 대국으로 여겼던 중국은 내외적으로 곤란에 빠졌으며 사상과 사회 각 방면에서 모두 아주 혼란스럽게 되었다. 그 당시 중국인은 ‘동아시아의 병자[東亞病夫]’로 불렸고 사람들은 일종 강렬한 망국에 대한 위기감이 일어났다. 이런 민족 존망의 위기는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를 구하는 길을 찾게 만들었고 그 중 수많은 지식인들과 청년들이 갈수록 급진적으로 변했다. 


전통을 중국문제의 근원으로 오인하고 나중에는 중국 전통문화와 사상을 철저히 포기하였으며 사상을 전반적으로 서양화하는 데로 돌렸다. 청나라가 멸망한 후 군벌의 혼전과 사회 혼란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극진적인 폭력혁명을 숭상하게 하였다. 이러한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상으로 가득한 혼란스런 형세 하에서 1918년 러시아에서는 볼세비키 망나니들의 폭동이 성공하였다. 일부 과격분자들은 이것이 중국을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 늑대를 집안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산사령은 과학과 민주라는 미명 하에 혼란에 빠진 중국으로 빈틈을 타서 들어오게 되었다. 


그 후 사악한 세력은 공산사령으로 하여금 불미스런 수단으로 중국의 국가 정권을 탈취하게 하였다. 



*중공은 중국 재난의 화근



중국 공산당이 성립된 후 중공은 소련 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에 소속된 지부에 불과했다. 소련 제3인터내셔널의 계획과 지지 하에 중공은 극력으로 원한을 선동하고 폭력혁명으로 국가 정권을 탈취할 것을 꾀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 마오쩌둥(毛澤東)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다"는 폭력형명이론을 제기하여, 때리고, 부수고, 빼앗고, 죽이고, 태우고, 속이는 등등의 수단으로 국가정권을 탈취하였다. 불법적인 "소비에트" 정부를 건립하여 중화민국 정부의 무력탄압을 초래하였다. 중화민국 정부군의 5차례 포위공격에 의해 중공은 이미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고 핍박에 의해 서북부로 도망을 쳤다. 


사악한 세력은 중공을 만든 후 당연히 사용하기도 전에 그것이 소멸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중공을 구하기 위해 중공이 숨 쉬고 발전할 기회를 주었다. 사악한 세력은 천하가 혼란스럽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며 게다가 또 더더욱 혼란을 부추겼다. 이리하여 중국은 혼란스럽고 허약한 국면에서 외국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중화민국의 주의력을 전이시켜 중공에 대한 압력을 풀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침략 군대의 손을 이용하여 대신 살인한 즉 중화민국 정부의 군사력을 소멸하였다. 중공은 이 기회를 이용해 크게 발전하였다. 


이에 1934년 10월 중공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일본에 대한 항전(抗戰)을 구실로 인적이 드문 서북으로 도망갔고(침략자의 부대는 동북에 있었음) 중화민국 정부군은 뒤에서는 "중공 포위공격"을 계속하여 중공이 숨 쉴 기회를 주지 않았다. 1936년 중화민국 정부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이동하여 단번에 중공을 소멸시키려고 준비하였다. 바로 중공이 철저히 소멸될 관건적인 시각인 1936년 12월 항전이란 명목으로 "시안(西安)사변"이 일어나 중공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중화민국 정부는 국공 합작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그 결과 중공은 겨우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중화민국 정부군은 앞에서는 피를 흘리며 전투하였지만 중공은 "1분 항일, 2분 타협, 7분 발전"이란 방침을 만들어 항전이란 명목을 세우고 각계 민중들을 속였다. 항전의 후방이던 옌안(延安)에 숨어 아편을 심고 마약을 밀거래하였다(중공은 '특산품'이라 불렀음) 기회를 빌어 자신의 세력을 발전시키고 정부의 밑뿌리를 파내며 기회를 틈타 근거지를 빼앗았다. 


8년간의 항전을 통해 중국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중화민국 정부군은 340만 명이 사망함으로써 이미 지쳐있었지만 중공의 실력은 오히려 국난 속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2만 명도 안 되던 서북 홍군이 90만 팔로군(八路軍), 30만 신사군(新四軍)으로 발전하여 총 120여만 명의 군대로 발전하였다. 이때 중공은 주먹을 문지르고 손을 비비며 기회를 기다렸다. 소련의 "혁명수출"과 금전적인 지지 하에 항전 승리의 열매를 빼앗았고 겨우 3년이란 시간만에 중국 국가정권을 탈취했으며 마피아식의 독재정권을 건립하였다. 


사악한 세력이 중공을 중국에 강제로 가한 것은 중국의 강대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목적은 중공이 십악을 고루 갖춘 사악한 정도까지 발전시켜, 때가 되면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중공은 정권을 장악한 후 국가건설에는 힘을 쓰지 않고 사악한 망나니 본성을 팽창시켜 끊임없이 정치운동을 발동하고 생명을 짓밟아 6천만에서 8천만에 달하는 중국 인민을 학살하였다. 이 과정 중에 그것의 사악한 정도와 피비린 정도는 끊임없이 성숙되고 강화되었는데, 중공의 행위는 정상적인 정당의 행위가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문화대혁명 때 그것은 중국 전통문화와 도덕을 철저히 훼멸시키고, 신(神)에 대한 사람들의 바른 믿음을 철저히 훼멸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심령(心靈)의 단속을 잃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천지를 두렵워하지 않으며 제멋대로 나쁜 일을 하게 하였다. 또한 사람들의 신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훼멸시켜야 중공은 비로소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아무 속박 없이 나쁜 일을 하도록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중국인들은 고층 공간에서 왔다. 중공의 무신론(無神論)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신을 믿지 않게 하여 사실상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집을 찾지 못하게 했으며 그들이 되돌아갈 길을 끊어버린 것으로 사람을 훼멸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류를 정화(淨化)시키는 주요한 무대는 중국이기 때문에 파룬따파(法輪大法)는 먼저 중국에서 전파되었고 첫 번 째 대법제자의 주체는 중국에 있었다. 아울러 사악한 세력이 중공을 만든 목적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향해 온 것이기 때문에 중공은 다른 어떤 국가의 공산당보다도 더욱 사악하며 동서고금의 일체 사악을 전부 집중하였다. 


그러므로, 중국 근대의 쇠약과 고난의 진정한 원인은, 사악한 세력이 중공이란 암세포를 중국에 들여보내 중국을 파괴하고 귀신과 짐승이 중화대지에 가득 차게 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중국은 재앙을 당했다. 근대 역사에서 중공의 경위를 알게 되면 중공이 왜 그리도 망나니짓을 하고 사악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확실히 많은 사람들은 중공의 오랜 속임수에 미혹되어 중공의 사악한 면모를 똑똑히 보지 못하고 중공에 대해 환상을 품은 채 인류를 해치는 사악과 한 무리가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중공은 중국을 통일하였고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제고되었다.”는 등등을 말한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사실은 정반대이다. 중국의 혼란과 고난은 모두 중공으로부터 온 것이며 바로 중공의 출현 때문에 국가분열과 국토 유실이란 현황을 조성하였다. 과거에 중국의 국제적 지위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관련인사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경제의 세계적 지위는 청조(淸朝) 건륭(乾隆)연대보다 많이 뒤쳐진다고 한다. 당시 중국 국내총생산(GDP)은 전 세계의 51%를 차지했고 손중산 선생이 중화민국을 건립한 초기에 중국의 GDP는 전 세계의 27%를 차지했으며 민국 11년에도 GDP는 여전히 12%에 달했다. 중공이 집권할 때 중국의 GDP는 전세계의 5.7%였으나 2003년 중국의 GDP는 전 세계 2.1%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중공이 통치한 중국경제가 한 갈래 붕괴의 길을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공이라는 사령(邪靈)부체(附體)가 없었던 타이완의 경제발전은 대륙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중공의 오랜 정치운동으로 인해 대다수 중국인들은 혼란을 두려워하고 안정을 원하는데 진정한 혼란의 근원은 바로 중공이다. 그러나 중공은 도리어 ‘안정’을 구실로 다른 세력을 공격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다. 


증공은 또한 중국의 화근(禍根)일 뿐만 아니라 또 인류의 화근이기도 하다. 




5. 파룬궁 반(反)박해의 의미



16세기 프랑스 대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히틀러, 나폴레옹 그리고 여러 차례의 세계대전을 정확하게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제세기(諸世紀)》 예언 중에서 이렇게 말했다. 


“1999년 7월 
앙골모아(Angolmois: 安哥魯亞)왕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공포대왕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그때를 전후로 해서 마르스(Mars:瑪爾斯)가 천하를 통치하게 하는데 
사람들이 행복한 생활을 획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하였다. 




예언은 일반적으로 비교적 어렴풋하기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노스트라다무스가 한 이 예언에서는 시간을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썼는데 이는 아주 드문 것으로 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 아주 중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공의 오랜 정치운동을 통해 사악한 세력이 배치한 중공과 장쩌민은 이미 단련 성숙되어, 그것이 요구하는 사악함과 망나니의 정도에 도달하였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1992년 공개적으로 전해진 후 여러 방면에서 중국에 좋은 점을 가져다주었고 많은 사람들의 신체를 건강하게 하여 국가적으로 거액의 의료비를 절감시켜 주었다. 수련을 통해 수많은 가정이 화목해지고 사회 안정에 아주 좋은 작용을 일으켰다. 


바로 1998년 전(前) 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차오스(喬石)가 보고서에서 말한 것 처럼, "파룬궁은 국가와 인민에 백가지 이로움만 있을 뿐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 그러나 수련인 수가 일억에 달하여 중공 당원수를 초과하자 속 좁은 장쩌민과 독재전제의 중공으로 하여금 아주 질투하게 하였고 두렵게 하였다. 그리하여 1999년 7월 20일 중공과 장쩌민이 서로 이용하여 법을 무시하고 모든 국가기구를 총동원하여 파룬궁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발동하였다. 그것의 사악한 정도와 범위는 예전에 로마제국에서 있었던 예수와 그 제자들에 대한 박해를 훨씬 초월하였다. 


공포대왕이 다른 공간에서 떨어져 내려올 때 다른 공간의 대량의 사악한 생명[요마귀괴(妖魔鬼怪)]도 모두 지구를 향해 내려와 인류를 파괴하였으며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더욱 엄중하게 파괴하였다. 중공은 ‘쩐(眞)싼(善)런(忍)’을 공격하고 좋은 사람을 박해하는 동시에 대량의 사악을 불러들여 나쁘고 사악한 것들이 범람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도덕은 보편적으로 타락하고 탐오와 부패가 만연하며 사회 풍기가 눈에 띄게 하락하였다. 


중국 당대(唐代)의 저명한 예언서인 《추배도(推背圖)》 제41상(象)에는 "99년에 큰 잘못을 일으켜[九十九年成大錯]"라는 한마디가 있는데 이는 바로 99년에 장쩌민과 중공이 독단적으로 파룬궁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발동한 것을 가리킨다. 천고의 큰 잘못을 저질러 중화민족을 재난과 큰 겁난 속에 끌어넣었고 무수한 가정이 풍비박산 났으며 사람이 죽었으며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최소한 2천7백여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중공의 혹형에 학살당했다……. 



*파룬궁 수련생들의 반박해는 세속 정치의 범주를 초월한다



사악은 올바름을 누르지 못한다[邪不壓正]. 자고이래 누구도 인성(人性)과 올바른 믿음[正信]을 이긴 적이 없었다. 그 당시 강대했던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였지만 끝내 실패했다. 장쩌민과 중공은 국가의 모든 힘을 총동원해 파룬궁을 박해했으나 첫 시작부터 실패가 정해져 있었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모두 ‘쩐(眞)싼(善)런(忍)’에 동화되고 심령이 정화(淨化)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정말로 마야인들이 말하는 ‘지구정화’에 의해 도태되지 않으려면 머릿속에 파룬따파(法輪大法)에 대한 좋지 못한 사상이 있어선 안 된다. 


1999년 7월부터 중공 장씨 집단은 일체 매스컴을 움직여 파룬궁을 비방하고 모함하여 진상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독해(毒害)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특히 중국인) 중공의 거짓선전을 믿고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적대시하거나 심지어 박해에 가담하였다. 만약 이런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런 나쁜 사상을 없애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은 중공의 속임수에 의해 자연적으로 막다른 절경(絶境)에 이르게 된다. 이 사람들은 인간 세상에 헛되이 오지 않았으나 중공에 의해 훼멸되는데, 이는 생명이 걸린 대사(大事)이다. 사실 중공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고 현재 국내에서 파룬궁 박해에 참여한 악인(惡人)들이 보응을 받는 사례가 아주 많다. 다만 중공은 사람들이 일단 악보 사실을 알면 수많은 사람들이 중공의 지휘를 듣지 않을까봐 두려워 소식을 봉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박해 당하는 시기에 역사상 일부 정교(正敎)가 박해 당할 때처럼 그렇게 소극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 주동적이며 전면적으로 철저하게 이번 박해를 반대하며 중공의 거짓말을 폭로하여 사람들에게 사실의 진상을 알려야 하며, 이를 통해 진정으로 인류를 보호하는 작용을 일으켜야만 한다. 



미국의 왕즈핑이 그린《정사대전(正邪大戰)》. 이 그림은 파룬궁 수련생이 천안문에서 평화적으로 청원할 때 정(正)과 사(邪)가 교전하며, 다른 공간의 바른 신들이 사악한 마귀와 쓰레기들을 청리하여 천리(天理)를 행하며 인도(人道)를 바르게 함을 표현하고 있다. 사악한 세력은 지옥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파룬궁의 장기적인 반박해 중에서 사악한 세력은 제거되었고 그것이 만들어낸 공산 사령도 신속히 청리(淸理)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전에 없던 탈당열풍이 나타나 중공을 해체하고 있다. 사이트에 중공 조직을 탈퇴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다른 공간의 신체(身體)에 있는 공산 사악의 낙인이 지워져 자신을 구하고 평안을 얻는 작용을 일으킨다. 


이로부터 볼 수 있다시피 파룬궁의 반(反)박해는 세속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근본적인 목적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며 중공의 속임수와 거짓말 속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다.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오랫동안 사심(私心) 없이 노력함으로 인해 형세는 이미 근본적으로 변했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이미 78개 국가와 지역에 전해졌고 파룬궁 진상을 아는 세인들은 갈수록 많아져 국내외에서 갈수록 많고 정의롭고 선량한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일어나 파룬궁에 대한 이번 사악한 탄압을 질책하고 있다. 


걱정스러운 것은, 현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중공을 믿고 있고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파룬궁 수련생들의 진상 알림에 대해 듣지도 않고 파룬궁수련생이 당한 박해에 마비되어 있다. 만약 장쩌민과 중공의 거짓말을 믿는다면 최후에 그것에 의해 순장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오래된 전설이 실현되고 있고 인류의 수수께끼와 진상은 빠른 속도로 인류에게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매 사람마다 생과 사의 선택을 마주하고 있는데 마치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를 믿는가를 보는 것 같다. 정사(正邪)의 사이에 제삼의 선택은 없다. 


만장(漫長)한 우주역사 속에서 사람은 생생세세를 거치며 지나왔지만, 금생(今生)금세(今世)의 선택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부디 파룬따파(法輪大法)와의 만남을 잃지 말고 천만년의 기다림이 물거품이 되도록 하지 않기를 바란다. 

(끝)



문장발표:2005년 10월 10일 
원문위치 :원문바로가기 

 

1 ··· 5 6 7 8
블로그 이미지

파룬궁(法輪功)으로 잘 알려진 法輪大法(파룬따파)는 리훙쯔(李洪志)선생께서 창시하신 고층차의 불가(佛家)수련법이다.

8648ha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