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사대명작 신해(新解) 


글/탄진(撣塵)


문학은 인류 문명의 중요한 전달매체로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예술형식이다. 수천 년의 문명 세례를 거치며 풍부한 역사 풍모와 문화 정수를 간직한 중국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찬란하고 천고에 빛나는 작품을 꼽으라면 『수호전(水滸傳)』, 『삼국연의(三國演義)』, 『서유기(西遊記)』, 『홍루몽(紅樓夢)』 등 사대명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인류문명을 풍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인류 발전의 발자취를 기록했고 사람의 사상을 자윤(滋潤)하며 사람의 도덕과 지조를 도야(陶冶)하게 했다. 이들 사대명작의 역할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류 발전의 전반 과정을 놓고 볼 때 지금은 인류가 신기원(新紀元)으로 나아가는 경계점에 해당한다. 뒤돌아보면 성현(聖賢)과 선철(先哲)들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마음의 양식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데 단지 정신적인 측면의 요구만 해결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세상일의 미혹 중에서 사람들에게 미래로 나아갈 길을 암시해준다. 

인생이란 연극과 같다. 사실 인간 세상도 한편의 연극이며 전반 인류 역사의 흥망성쇠, 왕조의 교체, 전쟁과 평화 등도 모두 연극이다. 단지 사람들이 연극 속에서 늘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고 진정으로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할 뿐이다. 몸은 비록 연극 속에 있어도 마음은 연극을 벗어난 사람의 "조용한 관조(靜觀)"만이 이것이 진실로 연극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자면 오직 마음을 수련하며 "도를 닦지 않아도 이미 도(道) 속에 있는" 그런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 그들은 세속을 멀리 떠나 혼자 수련하거나 혹은 온갖 창상(滄桑)을 두루 겪으며 마음이 담담해졌다.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일을 통찰하고 생사를 꿰뚫어보며 인생의 의미를 투철히 깨달은 대덕지사(大德之士)만이 가능하다. 동시에 그들은 세상 사람을 제도하려는 큰 뜻을 품었지만 오히려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기(天機)를 통찰할 수 있음에도 말할 수 없었고 단지 "야사(野史)"에 속하는 소설을 이용해 "농담이나 촌스런 말"로 "말겁(末劫)"시기의 세인들에게 경고하고자 했다. 

역사의 연관성(連貫性)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시간상으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 역사상 출현한 각종 사물의 연계에서도 표현된다.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후자가 전자보다 더 의미가 있다. 매 하나의 사물, 매 하나의 인물은 역사의 수레바퀴처럼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이는 역사에 대해 계승하고 총결하며 미래에 대해 전달하고 열어주는 작용을 한다. 어떤 것들은 역사상 천년이 지난 후에 그 속에 함축한 진정한 함의가 비로소 드러나기도 한다. 사대명작이 바로 이런 역할을 맡았다.

사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왜 지금을 "말겁"시기라고 하는가? 간단하게 보이는 이런 문제들이 도리어 끝없는 내포를 함축하고 있다. 대법 법리의 지도하에서 사대명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해본다면 일부 답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사대명작의 주제 분석

(1) 『삼국연의(三國演義)』--천고에 관통된 "의(義)"


사람은 신(神)이 만든 것이다. 중국문화 역시 신이 사람에게 전해준 것이다. 『삼국연의』속에는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자취가 도처에 존재한다. 천상의 변화, 세사(世事)의 변천, 기인이사(奇人異事), 신묘한 지모는 모두 신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 소설을 지은 나관중(羅貫中)은 고금에 통하고 백가(百家)를 두루 섭렵했기에 이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취지는 도리어 여기에 있지 않다. 물론 이 책은 지모를 중시하며 제갈량, 조조, 주유, 사마의, 육손, 강유 등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신묘불측한 책략을 지니고 있다. 비록 이들 고인(古人)들의 지혜 역시 확실히 주제의 하나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표현한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삼국의 역사이야기인가? 아니다, 사실 칠에 허구 삼이란 말이 있듯이 소설은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역사이야기는 단지 작가가 표현하기 위한 전달매체에 불과하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야기를 보다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생동감 있게 만들어 사람이 구비해야 할 특징인 의(義)이다.

"연의(演義)"란 "의"를 풀이했다는 말이니, 책이름에서도 이미 이런 뜻을 표시하고 있다. 물론 "연의"는 일찍이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일종 소설의 체제로 되어버렸지만 그것의 진실한 원뜻은 바로 책속에 등장하는 각종 인물들의 활동을 통해 "의(義)"의 내포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가 표현하는 내포와 이야기, 인물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의"를 제기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단지 한 글자의 표면적인 의미에 불과한 것이 아닌데 그 어떤 정의도 "의"의 내포를 정확히 확정지을 수 없다. 단지 약간의 것을 서술하는 작용만 일으킬 뿐이다. 그러나 『삼국연의』를 통해 사람들이 얻는 것은 도리어 영원한 생명력과 참조할 내포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삼국연의』는 인류 생존의 바탕이 되는 숭고한 품성을 포용하고 있다.

좀 분명히 말하자면 삼국의 이런 저런 흥망성쇠, 은혜와 원한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물의 희로애락, 충효와 반역은 모두 "의"를 둘러싸고 진행된다. 사실 고대에는 수많은 "연의(演義)" 소설이 있었지만 『삼국연의(三國演義)』와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책에는 "의"에 대해 확실히 아주 세밀한 묘사가 있다. 조조 진영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서서(徐庶)가 단지 말 한 마디로 조운(趙雲)을 구한 것은 유비에 대한 은의(恩義)이다. 조조(曹操)가 울면서 원소(袁紹)를 장례지낸 것 역시 "간웅(奸雄)"의 의(義)에 대한 이해와 행동이다. 맹획이 "일곱 번 풀려난" 은혜에 감동해 귀순한 것은 제갈량의 "의"에 감복한 것이다. 

또한 의리의 대명사 관우(關羽)는 "의"를 극한까지 풀어냈다. 조조가 3일마다 작은 잔치, 5일마다 큰 잔치를 베풀어주고 적토마를 하사하며 정후(亭侯)에 봉했지만 유비를 그리는 관우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조조의 이런 융숭한 은혜에 대해 관우는 그 은혜를 갚지 않고는 떠날 수 없다는 의리지사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유비를 찾아가기 위해 "다섯 관문을 돌파하고 여섯 장수를 목 베며" 단기로 천리를 갔으니 "의"가 여기에 이르러 가히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이 눈물을 흘릴 정도가 되었다.

나는 어릴 때 『삼국연의(三國演義)』를 읽다가 관우가 너그럽게 조조에게 길을 내준  "화용도(華容道)"에 이르면 제갈량이 왜 관우를 조운이나 장비로 바꾸지 않았을까 아주 의아해하곤 했다. 만약 관우를 대신해 장비가 화용도를 지켰더라면 조조는 죽은 목숨이 아닌가? 파룬궁을 수련하고 나서야 비로소 명백해졌는데 모든 것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 제갈량이 이렇게 배치한 것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인사(人事)를 행한 것이다. 관우가 조조를 풀어준 것은 관우의 "의"를 더욱 완전하고 풍성하게 했다. 나관중의 저서는 정밀로 "의"의 현오(玄奧)함을 깊이 체득한 것이다.

수련자들은 사물을 볼 때 종종 본질을 보아낼 수 있다. 필자에게도 이런 인식이 있을 수 있음은 전부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리훙쯔 선생님은 『북미순회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삼국연의』는 하나의 "의(義)"를 말하였다. 한 조대(朝代)를 경과하면서 세 개의 세력이 서로 겨루는 중에서 충분히 "의(義)"의 내포를 표현해 냈다. 게다가 한 조대(朝代)라는 이렇게 긴 시간을 경과하면서 이 "의(義)"의 심층문화를 표현해 냈으며, 오늘날 법을 전할 때 인류는 "의(義)"에 대하여 비로소 깊은 인식이 있게 되었으며, 의(義)가 무엇인지, 그것의 표면과 내포가 어떤 관계와 심층의 반영을 이끌어내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은 단지 이 글자의 표면만 알 수 없으며 내포 속에서 무엇이든 모두 명백해야 한다. 물론 『삼국연의』 중에서는 사람의 지모(智謀) 등의 내포도 표현하였다." 

신은 사람을 창조했고 또 사람에게 세간의 일체와 사람이 구비해야 할 사상의식 및 도덕표준 등을 배치해주었다. 그러나 이 일체는 사람 자신이 실천 중에서 만들어내야 했다. 인류는 여러 차례 문명을 거치며 오늘까지 걸어왔는데 어떻게 조금씩 완벽하게 했는가? 리훙쯔 선생님께서는 『북미순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 어떠한 내포도 없고, 그 어떠한 감당능력이 없으며, 이 공간의 일체 사물에 대해 인식하는 그 어떠한 하나의 완전한 사유개념이 없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곧 기나긴 세월을 경과하면서 사람의 사상이 점차적으로 풍부해지고 그의 내포와 감당능력이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표현은 일에 부딪혀도 놀라지 않고, 침착하고 냉정하며, 이지적으로 사고하고, 심지어 창조능력도 있다. 사람이 이러한 사상, 정상적인 사유상태를 구비할 수 있는 이것은 기나긴 역사의 세월 속에서 신(神)이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사람의 매 한 걸음은 모두 신이 배치한 것이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었다. 사실 어찌 사람의 운명뿐이겠는가, 세간의 일체 배치는 모두 신이 의도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사상을 풍부하게 하고 있다.

(2) 『수호전』--살아 숨쉬는 강도들의 군상(群像)


창녀에게 "열녀문"을 세워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강도들에게 "공덕비"를 세워줌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강도들에 대해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민간 전기가 있어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강도들에게 이런 "공덕비를 세워주는가?" 이 속의 역사연원은 무엇인가? 설마 후세인들에게 이런 강도들의 행위를 본받게 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답할 수 없다.

한번 각도를 바꿔 생각해보자. 사람이란 선악(善惡)이 함께 존재하며 이는 상생상극의 이치가 독립적 개체인 사람 몸에서 반영된 것이다. 상생상극은 일체를 제약하며 일체는 또 상생상극의 이치를 나타냈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자면 사람에게는 불성(佛性)과 마성(魔性)이 있는 것으로 인간세상에서는 또 선과 악, 좋고 나쁨으로 표현된다. 단지 사회도덕과 윤리가 사람들에게 각자 악을 "억누르고 선을 발양"하도록 요구할 뿐인데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사회가 안정되고 조화로우며 각자 자신의 일을 편안히 할 수 있다. 반대로 인류의 부패는 매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기 마련이며 인류의 죄악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빨리 자신을 도태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는 평온하고 안정적인 자연이나 우주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 고대에는 아주 내포가 깊고 철리(哲理)가 상당히 현묘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관이 있는데 이는 사실 인생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인의 가치관은 상당 부분 사회의 도덕관에서 결정된 것이다.

기왕 "악(惡)"이 사람이 본래 갖고 있는 것이라면 사람이 사회에서 생활하는 중의 일체는 모두 선악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악을 억누르는" 것은 필연적이며 이는 도덕층면의 요구이다. 단지 "악"만을 말한다면 사람이 늘 시시각각 도덕의 관조 하에서 존재하거나 행동할 수는 없으며 사회도덕 역시 이 일보까지 관계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악"의 표현은 또 필연적인 것이다. 이성을 지닌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악"이 표현될 때에도 준거할 것이 있어야 한다. "성(聖), 용(勇), 의(義), 지(智), 인(仁)"은 전국시대 강도의 대명사인 도척이 후대에 남긴 강도의 "도(道)"이다. 강도들도 현실 중에서 생활하는 사람이기에 사회 환경을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의 산물이며 사회를 벗어나 단독으로 생존할 수는 없다. 강도의 "도"를 벗어나면 사람들은 "악"해지기 시작하며 곧 따를 "도"가 없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수호전에 나오는 강도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이미 백성들의 내심 깊은 곳에 "강도"에 대한 인정과 접수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한 개체 생명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의 "악"에 대한 태도 역시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강도는 이렇게 사람들 영혼의 깊은 곳에서 광범위한 생존 공간이 있다.

사람은 이성적인 동시에 아주 복잡한 존재이다. 어떤 때는 사물에 대해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실제 현실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난다. 사람들이 이규(李逵)의 천진하고 솔직하며 지극히 효성스런 것을 받아들이면 그가 사람을 죽이고 겁탈하며 인육(人肉)을 먹을 때 이미 더 이상 이규의 인성이 어떠한지 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따지지 않게 된다. 십자파(十字坡)의 장청(張靑)과 손이낭(孫二娘)의 의협(義俠)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인육 작업장의 죄악을 덮어 갚춘다. 왜각호(矮脚虎) 왕영(王英)의 호색(好色), 고상조(鼓上蚤) 시천(時遷)의 도둑질 등은 "호한(好漢)"들의 의리를 풀어내기 위한 양념에 불과하다. 이처럼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왜 이런 사람들을 위해 "공덕비"를 세워주는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또한 인류가 생존하고 발전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며 사람의 "악"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표현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잘 다스려지고 안정적인 사회에서라면 이렇게 많은 강도들이 나타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관(官)에서 핍박해 백성들이 반항"한다는 것은 아주 도리가 있다. 인류는 바로 이렇게 발전한 것으로 일어나고 몰락하며 흥망하고 쇠퇴한다. 강도가 나타나는 환경은 반드시 어지러운 난세(亂世)로 혼란이야말로 강도들이 생겨나는 온상이다. 사람들이 탐관오리를 아주 미워하는 것은 일정 정도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반항을 일으킨다. 이런 의식의 표현이 바로 그들의 마음속에서 "호한(好漢)"이 인민을 위해 폭력을 제거하고 선량한 백성들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 "호한"들이 무협과 의리를 행하는 방식은 단지 "악으로 악을 제거"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강도"에 대한 정의는 이미 자연적으로 "호한"을 연역해냈다. 이 책의 저자 시내암(施耐庵)이 강도들을 그려낸 본의는 긍정적인 묘사방법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 "악"을 규범 하는 동시에 정치를 담당한 자들에게는 경계로 삼게 하며, 또한 사람들에 마음속에 강도에 대한 완전하고 풍부하며 분명한 개념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3)『서유기(西遊記)』——완전한 수련이야기


『서유기』는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세인들은 『서유기』를 즐겨 읽긴 하지만 그것이 함축한 것, 다시 말해 작가가 특별히 표현하고자 하는 실질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서유기』가 세상에 나온 이후 이 책을 단순한 낭만주의 신화소설로 여기며 그 요지를 언급하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더구나 작가 오승은(吴承恩)이 일부러 숨기거나 감춘 것도 아니다.『서유기』가 표현하는 주제는 분명하고 똑똑하지만 사람들은 수련의 각도에서 깨닫지 못하고 단지 기괴한 모양의 온갖 요괴와 마귀들이 기기묘묘하게 변하는 세부적인 이야기만 감상하면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작가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의 이야기는 당승(唐僧 삼장법사)이 서천(西天)으로 경서를 구하러 가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사실 이는 애초부터 이 소설이 수련 이야기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동시에 당승이 경서를 구하기 전의 전생과 경력(經歷) 역시 수련에 속하는 동시에 그가 "경서를 구하는 과정"을 위해 전면적이고 완전한 길을 깔아주었다. 손오공(孫悟空)이 펼치는 수많은 신통(神通)은 수련에 어느 정도 소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헛소리가 아니다. 천기(天機)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승은은 아주 함축적인 방식을 사용해 표현했다. 손오공이 처음 당승을 따를 때 죽인 여섯 강도의 이름이 안간희(眼看喜), 이청노(耳聽怒), 비후애(鼻嗅愛), 설상사(舌嘗思), 의견욕(意見欲), 신본우(身本憂)이다. 또 이 이야기가 나오는 제목이 "마음 원숭이가 바로 잡히니 여섯 도적이 흔적 없이 사라지네(心猿歸正 六賊無踪)"이다. 보다 명백하게 말하자면 여섯 도적이란 바로 승려들이 실천해야 할 "육근(六根) 청정(清净)"이다. 그럼 육근이란 무엇인가? 바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이다. 여기까지 도달하자면 오직 마음을 바로잡은 후라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수련은 상당히 고생스러운 것으로 금강부동(金剛不動)한 심지(心志)가 없으면 원만할 수 없다. 수많은 승려들이 종일 그곳에 앉아 가부좌하고 경을 외우는데, 다른 사람은 그의 내심 경지의 승화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수련하고 있다. 그가 가부좌하고 경을 외우고 마음을 닦는 과정이 바로 자신을 바로잡고 "여섯 도적"을 청리하는 것이다. 표현해내자면 겉으로는 아주 간단한 법리이지만 이 일보까지 도달하려면 끊임없이 수련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고 자신의 "안, 이, 비, 설, 신, 의"에서 오는 교란을 제거해야 한다. 오승은이 세인에게 알려준 방식은 바로 손오공이 여섯 강도를 때려죽인 것으로 구체화, 형상화시켰다. 오직 사람만이 우리 이 표면세계의 환상을 너무나도 중하게 본다. 본래 인류사회의 일체는 모두 환상이고 실질적인 것이 아니다. 오승은이 『서유기』를 창작함에 있어 진실로 마음을 다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승이 경을 구하는 과정에서 구구 팔십일 난(難)을 거쳤다. 겉으로 볼 때는 이상야릇하고 천변만화한다. 그러나 사실 난마다 모두 고험이었고 난마다 모두 수련자의 사람 마음을 겨냥해 온 것이다. 여인국을 지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색욕지심(色慾之心)을 버리겠는가? 여섯 개의 귀가 달린 원숭이가 없다면 어떻게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경을 구하는 과정에 부딪친 사람이나 요귀도 마찬가지로 어느 한 가지 일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모두 여래 부처님이 특별히 안배해 놓으신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수련자가 의지가 확고하다면 넘지 못할 화염산(火焰山)은 없으며 반드시 원만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만약 사도(師徒) 네 사람을 한 수련인의 몇 가지 방면으로 본다면 작가의 의도를 더욱 쉽게 볼 수 있다. 수련계, 특히 불교에서는 "마음 원숭이를 가두고 의식의 말을 거둔다"는 말이 있다. 소위 마음 원숭이와 의식이란 말을 굴복시킨다는 것인데 이는 자신의 경솔하고 불안한 마음을 조용히 하여 입정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또 가장 추측하기 힘들고 가장 복잡한 것으로 그것은 거의 한 사람의 일체를 다 포함한다. 앞 문장에서 제기한 마음 원숭이가 바로 잡히니 여섯 도적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바로 한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은 후 육근이 자연히 청정해짐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숭이로 마음을 비유해 마음원숭이라고 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주로 "공(空)"의 이론을 말하며 "오공(悟空)"이란 이름을 "마음 원숭이(心猿)"에게 사용하는 것은 아주 합당한 것이다. "마음 원숭이"를 가두면 자연히 의식이란 말(意馬) 굴복시킬 수 있다. 의마(意馬)란 바로 곧 당승이 타고 다닌던 "백룡마(白龍馬)"를 가리킨다.

다시 저팔계(豬八戒)를 보자. 사람이 수련의 문에 들어서면서 시종 준수해야 할 것이 바로 계율(戒律)이다. 왜 계률을 지켜야 하는가? 한편으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남긴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수련자의 행위를 단속해 수련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수련자에 대해 말하자면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다. 속인 사회의 일체는 모두 수련자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 탐욕, 나태, 명리, 질투, 각종각양의 사람마음의 집착은 모두 수련인의 다리를 끌어당긴다. 어떤 때는 아주 정진하지만 어떤 때는 돼지처럼 배불리 먹고 실컷 잠만 자면서, 안일함을 추구한다. 저팔계는 바로 수련자의 이런 방면을 형상화한 대표이다.

한 수련자로서 말한다면 정진하는가 여부는 종종 한 사람의 심성(心性)을 가늠한다. 단, 동시에 한 사람의 일상 행동과 수련태도도 아주 중하게 보아야 하는데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이 늘 깨끗하고 수련인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무거운 책임을 달게 감당하고 부지런히 아무런 원망도 없는 사오정(沙悟净)이 표현한 것은 바로 수련인의 이 방면이다.

당승은 겉으로는 아무 능력도 없지만 오직 하나의 반석 같이 확고한 마음이 있고 견정하고 청성(淸醒)하며, 사악한 마(魔)의 교란에도 미혹되지 않는 진각(眞覺)의식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며 후퇴하지 않는 견정한 신념은 필연적으로 수련자의 원만을 성취시킨다.

물론 책에서 표현한 것은 네 사람의 개성이 뚜렷한 수련자의 형상이다. 네명의 사도(師徒)는 백마를 포함해 각자 자신의 과위를 성취한다.

끝으로 독자들이 쉽게 간과하기 쉬운 대목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당승이 여래(如來)의 둘째제자인 금선자(金蟬子)가 환생했다는 대목이다. 불법(佛法)을 소홀히 대해 동토(東土)로 쫓겨나 환생했으나 간고한 수련을 거쳐 마지막에 정과(正果)를 이룬다. 이는 아주 큰 한 가지 문제를 설명하는데 바로 사람의 내원은 모두 간단하지 않은 것으로 마땅히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도리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람으로 환생한 것은 아마 "하늘의 법(天法)"을 위반했거나 아니면 특수한 사명을 띠고 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 세상에 온 것은 곧 수련을 통해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만약 수련을 잘하면 또 금선자와 같이 "정과를 성취"해 "전단공덕불(旃檀功德佛)"로 될 수 있다. 동시에 수련할 생각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불법(佛法)에 대해 절대로 경솔히 하거나 함부로 모욕하지 말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법을 비방하고 부처님을 비방"하는 큰 죄이기 때문이다!

(4)『홍루몽(紅樓夢)』—- 세상을 각성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는 걸작


이번 기 인류 문명 소설 창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는 바로 『홍루몽(紅樓夢)』이며, 이는 장차 역사에 의해 입증될 것이다.

『홍루몽』의 탁월한 성취는 단지 인물들의 형상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이나, 줄거리 구성의 배치, 사회풍모의 전면적이고 진실한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며, 『홍루몽』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바로 그 심후(深厚)하고 현오(玄奧)하며 간결하면서도 풍만한 주제의 표현에 있다. 또한 이 일체는 모두 서로 포용하고 있다.

『홍루몽』의 내용이 너무나도 풍부하고 호번(浩繁)하기 때문에 "홍학(紅學)", 즉 『홍루몽』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까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홍루몽』의 주제 역시 역대로 수많은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왜『홍루몽』의 영향은 이토록 심원하고 오래가는가?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홍루몽』안에서 맴돌다 "홍루(紅樓)"를 벗어나지 못하고 "몽(夢)"만 보게 된다. 특히 현대인들은 종종 소위 "역사적인 제한"이란 말로 『홍루몽』을 제멋대로 평론한다. 심지어 그 이론으로 "속편" 창작을 지도하려 하는데 정말로 부질없는 짓을 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의 주지(主旨)의 높이는 작가의 사상 경지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게 높은 사상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곧 작가가 작품 중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을 전면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홍루몽』의 주제는 첫 회에 이미 아주 명백하게 알렸고, 5회 때 진일보로 알렸다. 작가 조설근(曹雪芹)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불도(佛道) 양가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조설근은 수련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도 필연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점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이 『홍루몽』을 인식하는 기초이자 전제이다. 

작가는 제 1회 머리말에서 "이번 회에 "꿈(梦)"과 "환상(幻)" 등의 글자를 쓴 것은 독자들의 눈을 깨우치려는 것인데 곧 이 책을 쓰는 주지이다." 파족(跛足) 도인의『호료가(好了歌)』와 견사은(甄士隐)의 오묘한 해석은 인생에 대한 수련인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니 문외한이 어찌 두 사람의 어리석은 듯한 대화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도인의 몇 마디 말이 견사은을 제도했지만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명리의 마당 중에서 뒹굴면서 미혹되어 깨여나지 못하는가?

제 5회에서 조설근은 이 책의 인물과 구성에 대해 아주 간결하게 개괄하고 배치했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가 이미 이 책에 대해 아주 익숙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에게 있어 이 책을 완성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사전에 이미 이 작품을 전부 완성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십년을 열독하며 다섯 번이나 수정했다."라고 분명히 했다.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작가의 사상경지에 서서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있다면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우리 이 물질세계를 가장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며 소위 일체는 모두 환상이요 몽환(夢幻)이라고 한다. 인생은 가장 무상한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불가에서 볼 때 사람 중의 행복은 복으로 칠 수 없다. 사람은 인간세상에서 본래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 때문에 수련이 있는 것이다. 수련의 목적은 자신을 해탈하고 승화해 천국에 가려는 것이다. 사람 중에서 원만한 일이 있는가? 인생은 본래 불완전한 것으로 설사 세간의 일체를 얻을지라도 역시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마음의 갈망은 끝이 없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어느 한 상태에만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은 수련자가 말하는 "청정"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속인사회로 말하면 "완전"한 것은 잠시이고 "불완전한 것"은 영원하다. 불완전한 가운데 영원히 완전한 것을 추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원만한 결과를 말하는데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이 작용을 일으킬 뿐이다. "정이 있는 사람은 결국 가족을 이룬다." 실제상 바로 사람들의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다. 사실 설사 사람의 소원대로 정말 이뤄져, 아름다운 혼인을 한다 해도 수련자의 눈에는 "아름다운 원만"이 아니다.

누구인들 『홍루몽』이 완전한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80회까지 쓴 후 갑자기 사라지는가? 때문에 일을 벌이길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책 중 인물의 성격, 전체적인 줄거리 전개에 따라 각기 다른 "속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원작자인 조설근의 각도에서 보자면 책속의 일체 배치를 적당하게 펼쳐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만한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이 책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그는 왜 이렇게 처리했는가? 그가 의도적으로 상식적인 이치를 벗어나 세상을 놀라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경지가 일반인의 그것을 훨씬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한 의도는 바로 그가 세간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았고 심지어 더욱 먼 곳도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이렇게 처리한 것이다. "전부"를 다 보려는 것은 사람마음이며, 원만히 서술하는 것은 오히려 가장 중요한 내용을 표현한 후 곧 그렇게 나란히 사라지는 것만 못하다. 마치 인류에게 겁난(劫難)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정지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더 유리하다.

『홍루몽』의 위대하고 심오함은 조설근이 책의 후반부를 가볍게 삭제해 그 일부만을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함부로 속편을 창작하려는 것은 개 꼬리에 담비꼬리를 잇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전부 버려야한다.

사실 조설근의 안배에는 또 그의 독창적인 예술 구상이 있다. 우리 천천히 이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2. 4대 명작의 특수한 사명


수련의 각도에서 보자면 전반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변화는 일치하는 것으로 모두 규칙적이다. 이번 기 인류 문명의 역사는 이미 산생, 발전, 흥성, 쇠퇴의 전 과정을 지나왔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말법시기에 전륜성왕(轉輪聖王)께서 세상에 내려와 법을 바로잡고 사람을 구도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적으로 누적된 일체 문화는 모두 정법을 전하기 위하여 기초를 다진 것이다.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 전수하신 法輪大法(파룬따파)는 ""불법"은 입자(粒子)∙분자(分子)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더욱 작은 것에서 더욱 큰 것에 이르기까지, 일체 오묘한 비밀[奧秘]을 꿰뚫어보는 것으로서,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고 빠뜨린 것이 없다. 그는 우주의 특성 "眞(쩐)∙善(싼)∙忍(런)"의 부동(不同)한 층차의 부동한 논술로서, 다시 말해서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道)"이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법(法)"이다."(『전법륜』「논어」) 

파룬따파가 드러낸 우주법리는 오늘날 대법제자들의 수련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있다.

우리 다시 처음 화제로 돌아가 보자. 사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왜 지금이 바로 "말법(末法)" 시기에 처해 있다고 하는가? 이것은 수련계의 공통적인 인식으로, 불교, 도교, 기독교를 막론하며, 또 어떠한 수련방법이나 각 민족의 자기 민족의 기원에 관한 전설을 포함해 모두 공통적인 의미를 표현한다. 바로 사람은 천상에서 온 것으로, 자신의 죄업(罪業)이 인간세상에서 고생을 겪음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종 종교와 많고 많은 수련방법이 있는데, 사람이 생사윤회를 뛰어넘어 천국세계로 되돌아간다는 이것은 모든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이자 최고 인생목표이다.

(1) 드높은 의리와 바른 믿음으로 우주를 진감


"삼국" 이야기는 이미 천오백년 가량 지났지만 나관중(羅貫中)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책으로 완성되었다. 의론이 분분하던 백년 "의(義)"가 어찌 이다지도 왕성한 생명력이 있는가? 사실 전해지는 과정 중에서 곧 "의"를 인간 세상에 전파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인들의 "의"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다른 어떠한 국가의 사람들과도 비할 바가 아니다. 물론 "신주(神州)" 땅에서 발생한 특정한 내포가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은 모두 등한시 할 수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삼국연의』, 『수호전』, 『서유기』가 모두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 역시 원인이 있다. 중화민족의 전성시기를 말하자면 물론 대당(大唐)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국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화, 풍속, 사회적인 통치는 물론 세계적인 영향 등을 종합적 정황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청나라와 중화민국(中華民國) 혹은 중공(中共)이 정권을 장악한 이 몇 십 년을 보면 중화대지에 어째서 사람들이 칭찬하는 "의"에 관한 인물이나 이야기가 없는가? 설사 있다 해도 사람들은 "삼국" 이야기와 같이 그렇게 유전(流傳)해 내려가진 않을 것이다. 인생의 냉막함 역시 전반 사회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오늘까지 퇴화된 것이다. 오늘날 매체는 세계 각지에 동시에 뉴스를 전파할 순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이상 영웅의 공간은 사라졌고 또 점차적으로 "의"의 표준을 낮췄다. 사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의 도덕 수준이 완전히 떨어진 것이다. 인성의 자사(自私)는 이미 사람의 "의"를 훼멸시켰다. 특히 중공이 정권을 장악한 몇 십 년 동안 사람의 일체는 모두 중공에게 농단되어 중국인들의 사상 깊은 곳에 있는 전통적 "의"에 대한 가치는 중공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심지어 청나라 말기의 거지인 무훈(武訓)이 구걸해서 모은 돈으로 학교를 만든 "의"거 조차도 공격 당했으니 또 무슨 "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의"는 갈수록 단지 하나의 글자로 변해버렸고 그것이 마땅히 갖춰야 할 내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의"는 필경 역사상 중국인들에게 일종 특유한 문화적 특질로 존재해왔다. 나관중은 "연(演)""의(義)"한 동시에 "의"에 대해 전면적이고 투철하게 표현했다. 또 후인들을 위해 "의"의 가치를 분명히 지적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의"에 대한 이해가 강제로 제거되긴 했지만 아직도 사상 깊은 곳에는 "의"에 대한 특유한 이해가 남아있다.

이것이야말로 중국인이 중국인이 될 수 있는 원인이다.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 현대 중국어로 파룬따파를 전하신 것은 중국인 특유한 문화적인 내포를 투철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도덕이 미끄러져 내겨가긴 했지만 사람들이 일단 진정한 불법(佛法)을 접촉하게 되면 마음속 깊이 감춰져 있던 불성(佛性)이 깨어날 것이다. 사람들이 법의 홍대(洪大)함과 정심(精深)함을 이해하게 되면 사람들의 도덕의식의 자아가 소생하는 것도 날이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 대법이 부당하게 박해를 받을 때, 대법제자들은 대법에 대한 존경과 확고한 믿음으로 수시로 일체를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해 걸어 나왔다. 이런 "의(義)"거(擧)는 전무후무한 것으로 우주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한 페이지의 역사가 지나간 후 사람들은 오늘날 대법제자들은 확실히 그들이 할 일을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의"라는 글자로 대법제자들이 법을 실증한 장거(壯擧)를 형용한다면 도리어 너무 부족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명의 본원에서 우러나온 대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의한 것으로 한 생명이 아무런 이유도 없고 또 아무런 이유도 필요하지 않으며 모두 그것을 위해 일체를 버린 본성의 체현이다. 

왜냐하면 "대법(大法)"은 일체 생명의 근본이며 생명의 일체 근본이기 때문이다!

(2)자고로 "정법(正法)은 만나기 어려우니" 만고의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기자


『서유기』는 하나의 완전한 수련이야기를 쓴 것으로 이 중에 가장 의미 있는 한마디는 "무릇 사람 몸은 얻기 어렵고, 중토(中土)에서 태어나기 쉽지 않으며, 정법은 만나기 힘들다. 이 세 가지를 구비한 사람은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없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제 64회에 나온다)그런데 이 구절은 앞뒤 단락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작가가 삼장법사의 입을 빌려 이 한 마디를 한 것은 바로 이 책을 서술한 진심을 토로한 것이니 정말이지 작가의 고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중토(중국)에 태어난 사람들이여, "정법"이 널리 전해지는 때에 이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자! 분명한 것은 삼장법사 시기에는 "정법"이 없었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가 굳이 서천으로 경을 구하러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파룬따파의 모든 수련자들은 진정한 "정법"은 곧 파룬따파임을 단 한 사람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이 바로 "정법"의 시기이다. 마치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유유한 만사는 눈앞에 지나가는 구름에 불과하나 속인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망망한 천지는 어찌하여 생겼는고 중생의 지혜를 무력하게 하노라."(『홍음』「대법은 미혹을 파하노라」)

파룬따파는 92년부터 전해지기 시작했다. 짧디 짧은 7년 동안 수련인의 수가 1억을 넘어 신속히 발전했다. 또 완전히 현대적인 매체 선전에 의지하지 않고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다." 중공이 탄압한 8년 동안 파룬따파는 도리어 이 기간에 전 세계를 풍미했다. 지금까지 『전법륜』은 이미 20여종의 문자로 세계 80여개 국가에서 전해지고 있다. 그럼 왜 파룬따파는 이렇게 큰 생명력이 있는가? 대법제자들은 모두 아주 똑똑히 알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생생세세 찾아 헤맸던 진정한 "정법"ㅡ파룬따파를 얻었다. 파룬따파는 우주의 특성으로 수련인의 일체를 지도하며 수련인은 우주의 연화원리에 따라 연마한다. 파룬따파는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일체를 완벽히 해석했고 전반 인류역사의 기원과 그 본질을 밝혔다. 일체를 포용하며, 일체에 제한되지 않는 박대정심(博大精深)한 법리는 바로 수련자들에 의해 실천하고 있다. 파룬따파는 확실히 인류, 물질이 존재하는 각개 공간, 생명 및 전반 우주를 원만하고도 똑똑히 설명한다.


(3)도적에게도 "도(道)"가 있음과 중공의 무도한 악행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금 사회를 "말법(末法)"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말법이란 무엇인가?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는 "말법은 불교의 말법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인류 사회는 도덕을 유지할 심법의 단속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말은 간결하지만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투철하다. 우리는 수호전』을 결합하여 오늘날 인류도덕이 파괴된 정도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들은『수호전』에 등장하는 강도에 대해 명확한 인식이 있는데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강도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특정한 참조물이 있다. 역사상 장각(张角), 황소(黄巢), 홍수전(洪秀全)과 같은 인물들은 모두 강도의 대표이다. 이들은 살인을 밥 먹듯이 했지만 중공은 "농민 기의(起義)"의 "영수"라며 이들을 떠받든다. 왜 그런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중공 자신이 바로 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강도는 인류 동서고금의 모든 강도를 초월했다. 강도에게도 하나의 최저한 선이 있는데 그 선을 넘어서면 부하들을 호령할 수 없다. 양산박의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한다(替天行道)"는 깃발은 이 점을 나타낸다. 중공의 말을 따른다면 과거의 강도들은 그들의 "역사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공은 수시로 "역사적 한계"란 말로 남을 평가하지만 종래로 자신을 평가하진 않았다. 어떤 때는 자신을 대조하긴 하지만 강도 행위의 논리와 근거를 찾기 위해서이다. 중공의 사악함은 "역사적 한계"가 없는 것으로 완전히 "상생상극" 이치의 제약을 초월한 것이다. 목적에만 도달할 수 있다면 일체 원칙을 모두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왕영(王英)이 색을 좋아하자 송강(宋江)이 호삼낭(扈三娘)을 소개해줌을 통해 송강이 사람마음을 농락하는 간계를 볼 수 있지만 중공 경찰이 파룬궁 여자 수련생을 강간하거나 여성 수련생의 옷을 벗겨 남자 감방에 밀어 넣는 만행은 중공의 포학과 후안무치함을 폭로했다. 장청(張靑), 손이랑(孫二娘)이 인육(人肉)을 팔 때도 "삼등인"에 대해서는 피했는데 여기에는 범인에 대해 도망갈 길을 열어주는 것을 포함한다. 설사 사람을 잡을지라도 최소한 "몽혼약"으로 사람이 혼미해진 후에 잡았다. 그러나 오늘날 중공이 파룬궁 수련생들의 장기를 산 채로 적출해 폭리를 취한 행동은 많은 경우 마취약조차 쓰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된다. 동시에 개별적인 범죄행위가 아니라 집단적 범죄이고 중공의 전반 체제 내에서 서로 협력하고 일치한 노력에서 완수된 것이다. 

중공이 이런 것들은 역사상 일체 음험, 악랄, 비열, 저급하고 후안무치한 마왕이라 해도 비할 바가 못된다. 왜냐하면 중공의 망나니 본성과 망나니 수단이 아주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상상하는 사람의 최저 한계를 완전히 넘어섰을 뿐 아니라 강도의 선마저도 넘었기 때문이다. 중공은 완전히 "이 지구상에서 전대미문의 사악이다!"

(4)『홍루몽』에서 깨어나는 날이 3퇴로 자신을 구할 때


『홍루몽』의 원래 이름은 『석두기(石头记)』이다. 독자들은 작가의 참인 듯 거짓인 듯한 필법에서 대황산(大荒山) 무계애(無稽崖) 청경봉(青埂峰) 절벽의 그 돌을 주의하지 않을 수 있는데 모두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귀주(貴州) 평당(平塘)현 장포(掌布)향에서 2002년 한 개의 돌이 발견되었다. 돌 위에는 "中國共産黨亡"이라는 여섯 개의 큰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 돌이 천연적으로 형성된 것임은 중국 과학원 전문가들의 현지조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중공 중앙 텔레비전에서도 이 기이한 돌을 보도한 적이 있다. 단, 마지막 글자 "亡"자를 일부로 빼놓고 보도했다. 『홍루몽』에 나오는 "통령보옥(通靈寶玉)"에 대해 그것을 진실로 여기는 사람이 없으니,청경봉 아래의 그 돌을 고찰할 필요는 없겠지만 귀주의 돌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교묘한 일치인가?

하늘이 내린 경고가 아닌가! 절대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

수련의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절대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것이 아니고 긴밀한 내재적 연관이 있는 것이다. 작가 조설근 선생은 천기(天機)를 알고 "보옥"을 빌려 "통령"한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조설근은 돌을 화두로 꺼내 이야기를 연역(演绎)하지 않아도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돌은 책에서 단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이라 돌이 없어도 주제를 전달하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돌"에 대해 독차적인 견해가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세간의 만물에 대해 속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식이 있다. 그의 의도는 직접 오늘날 세상을 놀라게 한 "장자석(藏字石)"을 향한 것이며 아울러 작가의 세간 만상(萬象)에 대한 견해를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완곡한 예술 기법으로 "말법"시기에 세인들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다.——"석두기"에서 기록한 내용은 바로 "중국공산당망"의 여섯 개 큰 글자이다.

조설근은 문장의 대가라 만약 큰 붓을 휘둘러 돌을 썼다면 과거와 미래를 두루 관통할 수 있다. 여와(女娲)가 하늘을 기운 것 곧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오늘날 "장자석" 즉 인류가 직면한 큰 겁난을 쓴 것이다. 그의 필법에는 허와 실이 있는데 여와가 하늘을 기울 때 남은 그 돌에 문자가 있는 것이 실(实)이고 오늘날 나타난 이것을 책에서는 언급할 수 없는 것이 허(虚)이다. 오직 전 인류의 원래 면모를 아주 진실하게 압축한 한 부의 명품만이 이런 걸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한 글자도 사용하지 않고 풍류를 다 담았다고 할 수 있다.『홍루몽』이 감당한 역사적 사명은 바로 이런 결함이 있어야만 완전한 것이 될 수 있다.

중공이 가장 두려워하는 책이 파룬따파 경서이다. 이것 외에 『9평 공산당』은 중공이 감히 제기하지도 못한다. 이 책에서 유발된 "3퇴"의 큰 물결은 노도와 같은 장관이 되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여기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4대 명작의 작가들이 모두 학식이 깊고 천문과 지리에 능통하며 음양에 밝다는 것이다. 오승은은 고금 천하의 일들을 참고해 책에 한마디를 남겼다. 조설근은 말법의 현재 상황을 더욱 투철히 알고 책의 "결말"을 통해 세인을 각성하게 했다. 그의 의도는 오늘날의 중국을 가리킨 것이다. "홍루(紅樓)"란 지금 중공 사악의 빌딩을 비유한 것이고 "꿈(梦)"이란 모두 허망한 환상이란 의미이다. 중공의 역사와 현 상황을 보면 이 얼마나 합당하게 책속의 현기(玄機)를 표현한 것인가? "홍루"에 미혹되어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면 빌딩이 무너짐에 따라 같이 땅속에 묻히고 말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억울하게 생명만 바친다." 홍루의 진상을 아는 사람은 자연히 홍루에서 벗어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꿈속에 있는 사람을 깨워줄 사명을 지닌 사람은 오직 수련자뿐이다. 책에 등장하는 한 명의 승려와 한 명의 도사는 책을 관통하며 단지 구성의 필요성 때문이거나 작가가 주제를 전달하는 편리 때문만은 아니며 또 구도 방식을 명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바로 사람들더러 홍루에 대한 미혹을 버리고 자연의 본성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오늘날 수련인만이 다시 말해 대법제자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임무이다. 

꿈에서 깨는 데는 시기를 따져야 하는가? 『홍루몽』 문장이 중단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홍루몽』은 동서고금에서 가장 큰 예언서이다. 특수한 시기가 도래하지 않으면 진면모를 드러내지 않는다.『홍루몽』이 각성하게 하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도 "홍루"속에 미혹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오직 천상의 변화에 순응하고 사악한 중공의 각종조직에서 탈퇴해야만 절망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

최근에 4대 명작이 모두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도 절대 우연이 아니다. 4대 명작이 함축하고 있는 천기 역시 확실히 "누설"할 시기가 된 것이다. 단지 오늘날 중공의 현상과 인민의 생존위기만을 말한다 해도 중공이란 빌딩은 이미 기울어졌다. 여기에 뒤따를 "하늘의 징벌"은 아직도 그 속에 미혹된 사람들에겐 정말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전반 인류 문명 발전의 과정에서부터 볼 때 4대 명작의 탄생은 그 필연성이 있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예술적인 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마음의 양식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중화 민족의 특유한 조성 부문이고 전체 중화 민족 민족성을 형성하고 충실하게 하는데 대해, 중국인의 도덕관념, 가치관, 지향과 품행 그리고 생활정취를 양성하는 방면에서 모두 적극적인 인도와 교화 작용을 했다. 종합해 보자면 4대 명작은 이런 기능이 있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두 가지 큰 방면의 표현인데 그것은 바로 "의(義)"와 "수련(修煉)"이다. "의(義)"의 표현에서는 『삼국연의』와『수호지』에 각기 중점이 있고 서로 대조를 이룬다. "수련"의 표현 방면에선 겉으로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곡이나 가사만 다른 작품이다. 『서유기』는 신화이야기로 "수련"을 묘사한 것으로 형상이 있고 생동감이 있으며 구체적인 느낌을 준다.『홍루몽』도 "수련"인데 이를 이해하자면 아주 높은 "오성"이 필요하다. 수련인이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바로 "정(情)"이다. 육친정(亲情), 남녀 간의 정, 친구간의 정, 부모와의 정, 일을 하면서도 정을 말하며, 사랑하고 미워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등이 모두 정이다. 『홍루몽』의 또 다른 이름으로 『정승록(情僧錄) 』이 있다. 『석두기』를 베껴 쓸 때 공공도인(空空道人)이 "공(空)으로 인해 색(色)이 드러나니 색에서 정이 생기고 정으로 색에 입문하니 색에서부터 공(空)을 깨닫는다."라고 한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홍루몽』의 주제는 또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춘(春)"색을 간파하면 자연히 "공"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4대 명작의 찬란한 명성은 인류가 흥성에서 쇠퇴로 넘어가는 과정 중에 일정 정도 인류를 규범하고 인류 문명의 방향을 인도했으며 대법의 홍전(洪傳)을 위해 특별한 공헌을 했다.『삼국연의』의 "의"는 이미 사람 특유의 내재적인 특질이 되었고 『수호전』 "호걸"들은 부면적인 방면에서 사람 내심의 잠재의식을 표현함과 아울러 사람들에게 필요한 경고를 준다. 『서유기』는 수련과 "정법"의 전달에 일정한 인도작용을 했고 『홍루몽』은 예술적으로 인류사회의 현실과 그 필연적인 방향을 재현했다.

4대 명작은 역사의 깊은 곳에서부터 걸어 나와 마치 4개의 찬란한 별과 같이 역사의 하늘에서 빛을 뿌리며 세인들을 위해 휘황한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형상과 생생하고 선명한 계시를 준다.

(끝)



【명혜망 2008년 1월 5일】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08/1/5/169571p.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