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룬궁 정보센터

1. 파룬궁은 무엇인가

 

 

 

배경

파룬궁(法輪功)으로 알려진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진(眞)ㆍ선(善)ㆍ인(忍)을 원리로 하는 중국의 전통적인 심신수련법이다. 파룬따파는 단순한 명상이나 기공을 넘어서 자신을 도덕적으로 승화시키고,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을 갖도록 몸과 마음을 동시에 수련하는 것을 중시한다.

파룬궁은 오랜 기간 단독으로 전수되어 오다가 1992년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에 의해 처음으로 대중에 전파됐다. 당시 중국에는 운동, 무술, 명상, 호흡 수련법 등이 급속하게 확산되는 ‘기공 열풍’이 불고 있었다. 파룬궁은 다른 기공과는 달리 회비나 등록비가 없고, 동작이 간단하고 배우기 쉬우며, 수련 효과가 뛰어나 별도의 광고 선전 없이 자발적으로 확산됐다.

1992년과 1993년 베이징 동방건강박람회에서 리훙쯔 선생님은 연속 명예상과 최고인기 기공사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1998년 중국 국가체육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7천만 이상의 중국인들이 매일 아침 공원에서 파룬궁을 수련했다. 일반인 뿐만 아니라 베이징 현역 군 장성, 국무원 관리, 고위 당위원 등 각계각층 수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우고 연마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중국 정부는 탁월한 건강 증진 효과를 인정하며 파룬궁 수련을 적극 장려했지만, 수련인 수가 크게 늘어나자 공산당 정부와 정보기관은 파룬궁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1999년 4월 25일,  언론의 왜곡보도에 항의하던 파룬궁 수련자들이 톈진에서 무고하게 체포되자 전국 수련자들은 합법적인 수련 환경과 수련의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평화 청원을 열게 된다. 3개월 후인 7월 20일, 당시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파룬궁 탄압을 결정했고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처럼 파룬궁에 대한 왜곡선전과 소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중국에서 수많은 수련생들이 고문, 감금, 강제노동, 강제 장기적출 등 반인륜적인 박해를 받고 있다. 한편 미국, 캐나다, 호주, EU, 대만 등 세계 각국 정부와 의회, 인권 단체, 언론매체, 의사회 등은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지지하며 박해를 반대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함께 수양

파룬궁(法輪功)의 정식 명칭은 파룬따파(法輪大法: Falun Dafa)이며 자기 자신을 닦는 심신 수련법이다. 신체를 단련하는 5가지 공법과 파룬궁 서적 ‘전법륜(轉法輪)’을 통한 인격 수양으로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다. 다음 영상은 파룬궁 수련 소개와 해외 파룬궁 수련자들의 실제 수련 효과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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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의 수련 원리

파룬궁의 수련 원리는 진(眞)ㆍ선(善)ㆍ인(忍)에 근거하며 성실히 수련하는 사람은 신체의 건강, 스트레스 감소, 안정된 마음과 도덕성 향상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우주의 연화원리(演化原理)에 따라 수련하며, 우주의 최고 특성-眞(쩐)・善(싼)・忍(런) 표준에 따라 우리의 수련을 지도한다.” -리훙쯔(李洪志), 파룬따파 창시자

 

파룬궁의 다섯 가지 공법

파룬궁 공법은 서서 행하는 동공(動功) 4가지와 앉아서 가부좌하는 정공(靜功) 한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다섯 가지 공법은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독특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동작이 간단하고 부작용이 없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

 

파룬궁 서적과 비디오를 포함한 모든 자료는 다음 사이트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http://www.FalunDafa.or.kr (한국어)
http://www.FalunDafa.org (다국어)

 

 

2. 파룬궁은 왜 박해받는가?

 

 

 

왜 중국공산당은 파룬궁을 박해하는가

파룬궁 수련자들은 진(眞)ㆍ선(善)ㆍ인(忍) 이념을 생활 속에 실천함으로써 90년대 중국의 사회도덕을 개선하고 국가 보건에 큰 이바지를 했다. 이러한 파룬궁의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이 박해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법을 준수하는 수십만 사람들을 강제 노동수용소나 감옥에 감금해 고문과 죽음에 직면하게 했을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공산당이 폭력과 투쟁, 그리고 독재를 존립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역사적으로 천안문 학생 민주화 운동 탄압, 위구르나 티베트인 등 소수 민족 탄압, 기독교 등 각종 신앙 탄압 등 무수한 탄압사례가 있다.

 

파룬궁의 인기와 성장

1998년 중국 정부 조사에 따르면 당시 파룬궁 수련자는 7천만에서 1억에 달해 중국의 공산당원보다 더 많았다. 미국의 위클리 월드뉴스도 당시 파룬궁 수련자를 6,500만 이상으로 추산했다. 1992년 파룬궁 공개전수 이후 7년 만에 이뤄진 기하급수적인 성장이었다. 이런 성장은 중국 당국이 초기에 파룬궁을 적극 권장한 것도 한 요인이 됐다. 결국 파룬궁은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가장 큰 단체가 됐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일당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단체, 종교, 언론과 교육기관을 통제하기를 원했고 자신들보다 더 큰 단체를 용납하지 않으며 이 기준에 벗어나면 탄압 대상이 될 수 있다.

 

장쩌민의 질투심

파룬궁 박해는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 장쩌민의 독단적인 결정이다. 하지만 당시 주룽지 총리 등 정치국 상무위원회 다른 구성원들은 파룬궁이 평화적이고 정치적 야망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장쩌민의 탄압 결정은 당시 큰 인기를 끌던 파룬궁과 그 창시자에 대한 대중의 호감을 질투하는데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실제로 장쩌민이 파룬궁에 나열한 죄명 중 한 가지는 황당하게도 “파룬궁이 공산당과 인심(人心)을 쟁탈하려 한다”였다. 장쩌민의 탄압 정책에 따라 당기관지 인민일보 역시 “공산당원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지 못한다”고 발표했다.

 

이념의 차이

중국의 모든 종교와 영적 수행은 당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책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며 이를 거부한다면 탄압을 받을 수 있다.

일부 공산당 지도자들은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대립되는 파룬궁의 진선인(眞善忍) 원칙 및 파룬궁 수련자들의 부처나 신에 대한 믿음을 두려워했다. 중국공산당 관영언론 신화통신은 박해가 시작된 이후 “리훙쯔(파룬궁 창시자)의 설법은 사회주의 윤리와 문화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발표했다.

또한 파룬궁의 높은 도덕적 원칙이 당이 이끄는 공산주의 전술을 훼손할까 봐 우려했다. 예컨대 당이 언론을 통제해 거짓 언론을 발표하면 파룬궁은 진실[眞]을 말할 것이고, 당에서 분쟁을 선동하면 파룬궁은 선행[善]을 내세울 것이며, 당이 폭력을 사용할 경우 파룬궁은 비폭력과 인내[忍]를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파룬궁의 높은 도덕적 원칙은 공산당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됐다.

 

 

3. 파룬궁 연표

 

 

 

1) 파룬궁의 전파와 성장

ㆍ1951년~1963년: 1951년 5월 13일, 중국 지린(吉林)성 궁주링(公主岭)시에서 태어난 리훙쯔 대사(大師, 파룬궁 창시자)는 이른 나이부터 수련을 시작했으며 각종 공파 사부들의 법문을 전수받았다.

ㆍ1980년~1990년: 중국 전역에 걸쳐 ‘기공(氣功) 붐’이 일어나 태극권과 같은 기공 공법을 공원 등지에서 연마하는 것이 유행됐다. 기공 서적 발행과 기공에 대한 과학계의 연구도 풍부하게 진행됐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수 천만 명이 2천여 종의 각종 기공을 연마한 것으로 추산된다.

ㆍ1992년: 리훙쯔 대사는 1992년 5월 13일부터 파룬궁을 공개 전수하기 시작했다. 중국기공과학연구회는 파룬궁을 직속 공파로 비준했고 파룬궁연구분회(약칭 파룬궁연구회)가 설립됐으며 리훙쯔 대사는 중국기공과학연구회의 직속기공사 칭호를 받았다. 파룬궁은 이후 중국기공과학연구회의 허가를 받고 전국적으로 공개 전수를 할 수 있게 됐다.

ㆍ1992년~1994년: 리훙쯔는 대사는 중국 전역에서 54회의 전수반을 진행하며 2년간 파룬궁을 공개전수 했다. 보통 전수반은 하루의 2시간씩, 한 차례에 8일에서 10일간 진행됐다. 파룬궁 전수반은 각지 국영 기공협회의 지지를 받아 조직됐고 한 차례 강의 참가자는 보통 수백에서 수천 명에 달했으며 만석으로 입장권을 구하지 못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ㆍ1992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동방건강박람회에서 리훙쯔 대사는 최고상을 수상했다. 다음해인 93년 12월, 베이징에서 열린 동방건강 박람회에서 리훙쯔 선생은 재차 최고상인 ‘변연(邊緣)과학진보상’ 그리고 ‘특별 금상’과 ‘대중에게 환영받는 기공사’ 칭호를 수여 받았다. 당시 박람회에서 리훙쯔 대사는 기공사 중 가장 많은 상을 수상했다.

ㆍ1993년 4월: 첫 번째 수련서적 ‘중국 파룬궁’이 군사의문(軍事誼文)출판사에서 발행됐다. 이 서적의 발행으로 파룬궁은 대중에게 더욱 널리 알려졌고 수정판이 같은 해 12월 발행됐다.

ㆍ1993년~1994년: 1993년 8월 31일, 중국공안부 소속인 중화견의용위(見義勇爲) 재단은 중국기공과학연구회에 편지를 써서 전국 제3차 견의용위 선진분자 표창대회 대표들에게 건강회복을 위한 무료 치료를 제공한 리훙쯔 대사에게 감사드렸다. 중국공안부에서 주관하는 ‘인민공안보’는 9월 21일자 기사에서 “공안부의 선진분자들이 (리훙쯔 대사에게서) 치료를 받고 나서 보편적으로 아주 좋은 효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같은 해 12월 리훙쯔 대사는 중국공안부 소속인 중화견의용위 재단의 영예증을 수상했다.

월간지 ‘문예지창(文藝之窓)’은 1994년 4월호, 5월호와 8월호에서 파룬궁과 창시자 및 파룬궁의 건강효과와 사회적 이로움을 자세히 소개했다. 중국 지린성 기공과학연구회는 5월 6일 리훙쯔 대사를 최고의 ‘기공 대사(大師)’라고 선언했다.

ㆍ1994년 8월 3일: 미국 휴스턴시는 리훙쯔 대사에게 명예시민과 친선대사 칭호를 수여했다. “우리는 오늘 휴스턴시 전체 공직자를 대표해 선생님이 그동안 존경할만한 일을 하면서 이루어 낸 뛰어난 성과와 인류에게 사심 없이 베푼 귀중한 공헌과 봉사를 치하합니다.”

 

그밖에 파룬궁 국제 수상 목록:
수상목록보기

ㆍ1994년 9월: 파룬궁 공법교육 비디오테이프가 베이징TV 예술중심출판사에서 정식 출판됐다.

ㆍ1994년 12월: 중국에서 공개 진행된 마지막 파룬궁 전수반이 중국 북동부 도시 다롄에서 개최돼 약 6천 명이 참가했다.

ㆍ1995년 1월: 리훙쯔 대사의 주요저서 ‘전법륜(轉法輪)’의 첫 발행식이 베이징공안대학 회의장에서 1월 4일 거행됐다. 출판사는 국무원 TV방송부에 속하는 중국TV방송국 출판사였다.

ㆍ1995년 3월 13일: 리훙쯔 대사는 프랑스 주재 중국 대사의 초청으로 파리에 있는 중국대사관에서의 강의를 시작으로 해외 파룬궁 전수를 최초로 시작했다. 리 대사는 파리에서 7일간 열린 전수반을 마치고 5월에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두 번째 전수반을 열었다.

ㆍ1996년: 파룬궁 수련서적 ‘전법륜’이 1월, 3월, 4월 등 수개월에 걸쳐 베이징에서 베스트셀러로 기록됐다고 ‘베이징청년보’, ‘베이징만보(北京晚報)’ 등이 보도했다.

ㆍ1996년: 리훙쯔 대사 미국 이주.

2) 박해의 징후

ㆍ1996년 6월: 파룬궁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탄압의 첫 번째 징후가 나타났다. 전법륜이 베스트셀러로 등재된 직후인 6월 17일, 중국관영 언론 ‘광명(光明)일보’는 ‘가짜 과학[僞科學]을 반대하는 경종을 길게 울려야 한다’란 평론을 발표해 파룬궁이 미신을 선전한다고 주장했다. 7월 24일, 중국중앙선전부 소속 신문출판사는 전국 각지 신문출판국을 향해 내부 문서를 보내 ‘전법륜’, ‘중국 파룬궁’ 등 파룬궁 서적의 출판과 발행을 금지했다.

ㆍ1997년 초: 중국 공안부가 파룬궁을 ‘사이비교(사교)’로 지정하려는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조사와 증거 수집을 진행했다. 하지만 전국 각지 공안국은 조사 후 모두 “아직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고 조사는 이로써 중단됐다.

ㆍ1997년 3월 17일: 중국 ‘다롄(大連)일보’에 실린 ‘무명 노인이 묵묵히 봉사하다’란 기사에서 고령의 노인 성리젠(盛禮劍)이 파룬궁을 수련한 후 마을사람을 위해 무상으로 1100여 미터 도로를 수리한 사실을 전했다.

ㆍ1997년 9월: 미국 ‘시카고 타임즈’는 ‘사람과 과학: 파룬궁의 깨우침’이란 연재문장을 싣고 파룬따파가 인류의 신과학에 대한 탐구를 일깨워주었다고 전했다. 같은 해 11월 리훙쯔 대사는 처음으로 대만 타이베이시에서 강연을 가졌고 파룬궁이 정식으로 대만에 전해졌다.

ㆍ1998년 5월: 중국국가체육총국이 파룬궁에 대해 전면 조사를 진행했다. 같은 해 9월 의학 전문가 팀이 광둥성의 파룬궁수련생 12,553명을 대상으로 표본추출조사를 진행한 결과 질병을 제거하거나 신체가 건강해진 유효율이 97.9%라고 발표했다.

ㆍ1998년 5월: 베이징 TV방송국 ‘베이징터콰이(北京特快)’ 프로그램에서 방송국 기자를 파견해 베이징 위위안탄(玉淵潭) 파룬궁연공장에서 인터뷰할 때 수련생들이 파룬궁의 좋은 점들을 소개했다. 그런데 장면 중간에 중국과학연구원 원사 허쭤슈(何祚庥)가 파룬궁을 공격하고 파룬궁이 봉건미신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삽입됐다. 이 프로그램 방송 후 베이징과 허베이의 수백 만 파룬궁수련생들이 편지를 쓰거나 혹은 직접 방송국을 찾아가 프로그램 내용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다고 지적했다.

ㆍ1998년 6월 2일: 베이징TV방송국은 상황을 파악한 후 방영된 파룬궁 관련 프로가 방송국이 설립된 이후 가장 심각한 실수였음을 시인하고 다시 파룬궁에 대한 긍정적인 보도를 내보냄으로써 이에 대해 사과했다. 보도 책임자 한 명이 이후 해고됐다.

ㆍ1998년 7월 19일: ‘중국경제시보’는 ‘나는 일어날 수 있었다!’란 제목으로 허베이성 한단(邯鄲)시의 가정주부 세슈펀(謝秀芬)이 16년간 반신불수 상태에서 파룬궁을 연마해 걷는 능력을 회복했다고 보도했다.

ㆍ1998년 7월 21일: 중국 공안부 1국은 공정(公政)[1998] 제555호 ‘파룬궁 조사 시작에 관한 통지’를 발표해 파룬궁을 이른바 ‘사교’로 지칭했다. 공안부는 이에 근거해 파룬궁에 대해 ‘먼저 죄를 결정하고 나중에 조사하는’ 행동을 개시했고 파룬궁 보도원(연공동작을 지도하는 일종의 자원봉사자)의 통화와 행적을 감청, 감시했다. 파룬궁 연공장을 금지하고 연공하는 군중을 강제로 쫓아냈으며 집을 수색하고 사사로이 가정에 침입해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ㆍ1998년 8월 11일: ‘베이징일보’는 ‘아침 연공[晨練] 소개’ 문장을 실으면서 특별히 파룬궁을 제기하고 파룬궁수련생들의 연공 장면을 함께 실었다. 같은 해 상하이TV 방송국이 두 차례에 걸쳐 파룬궁이 상하이 및 세계 기타 국가에서 광범위한 환영을 받는 상황을 보도했다. 이 보도는 1억 명이 파룬궁을 연마한다고 언급했다.

ㆍ1998년 하반기: 군중들이 편지를 보내 파룬궁 수련자를 불공정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차오스(喬石)를 수반으로 하는 중국전국인민대표대회 일부 퇴직 간부들이 파룬궁에 대해 수개월 간 상세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이후 차오스 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파룬궁은 국가와 국민에게 100가지 이익이 있을 뿐 한 가지 해로운 점도 없다”란 결론을 내리고 연말에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조사보고를 올렸다.

ㆍ1998년 8월 23일: ‘중국청년보’는 ‘생명의 명절’이란 제목으로 98년 중국 선양(瀋陽)에서 열린 아시아스포츠대회에 참여한 1,500명 규모의 파룬궁 시범 팀의 훌륭한 자세와 파룬궁의 효과를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ㆍ1998년 10월 10일: 중국국가체육총국은 창춘(長春)과 하얼빈(哈爾濱)에 조사연구팀 팀장을 파견해 파룬궁에 대해 조사를 진행한 후 파룬궁이 몸을 건강히 하는 효과와 사회를 안정시키고 정신문명에 대해 촉진작용이 있다는 것을 긍정했다. 조사팀은 당시 7천만 명이 중국에서 파룬궁을 수련한다고 보고했다.

ㆍ1998년 11월~12월: 중국 ‘양청(羊城)만보’는 광저우 열사능원 파룬궁 연공장에서 5천 명이 참가한 대형 아침연공을 보도하고 동시에 심한 반신불수로 전신 70%이상이 마비된 광저우에 소재한 피혁적위(皮革迪威) 회사 직원 린찬잉(林嬋英)이 파룬궁을 연마한 후 걷는 능력을 회복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선싱시보(深星時報)’도 컬러 사진 7컷과 함께 파룬궁의 긍정적인 효과를 보도했다.

ㆍ1999년 2월 14일: 중국국가체육총국 대표가 미국 위클리 월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파룬궁과 기타 기공은 한 사람당 매년 의료비 1천 위안(18만 원)을 절약할 수 있게 한다. 만약 연공인이 1억 명이라면 천억 위안(18조 원)을 절약할 수 있다. 주룽지 총리는 이 사실에 대해 몹시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ㆍ1999년 4월 11일: 중국과학연구원 원사 허쭤슈(何祚庥)가 중국 톈진교육대학의 ‘청소년박람’ 잡지에 ‘나는 청소년이 기공을 연마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란 문장을 발표하고, 1998년 베이징TV방송국에서 거짓으로 판명된 사례를 재차 언급하며 근거 없이 파룬궁을 비난했다.

ㆍ1999년 4월 18~24일: 톈진의 파룬궁수련생들이 톈진교육대학과 기타 관련기관에 가서 파룬궁의 진실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며칠 간 파룬궁 수련생 수천 명이 현장에 도착했고 톈진시 공안국은 무장경찰 300여 명을 동원해 상황을 설명하는 파룬궁수련생들을 구타하고 내쫓았으며 45명을 체포했다. 일부 수련생들이 피를 흘리고 부상을 당했다.

ㆍ1999년 4월 25일: 베이징, 톈진, 허베이 등 지역에서 올라온 1만여 명 파룬궁수련생들이 베이징국무원 신방(청원)사무실이 소재한 중난하이(中南海) 밖에서 청원했다. 국무원 총리 주룽지(朱鎔基)가 직접 수련생들을 면담했다. 청원 대표는 톈진에서 체포된 파룬궁 수련생을 석방하고, 파룬궁 수련 군중에게 안전한 수련환경을 제공하며, 파룬궁 서적의 출판을 허락해달라는 세 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주룽지 총리와의 면담 직후 톈진에서 체포된 수련생들이 석방됐고 청원한 파룬궁수련생들은 저녁 9시 무렵 현장을 조용히 떠났다.

그날 밤 중국공산당 총서기 장쩌민(江澤民)은 중공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및 기타 관련 지도자들에게 “공산당이 만약 파룬궁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편지를 썼고 이 편지는 내부 문건으로 층층이 아래로 전달됐다.

ㆍ1999년 5월 30일: 해외 파룬궁수련생들이 창간한 파룬궁 수련 관련 사이트 밍후이왕(明慧網)이 중문 및 영문으로 개설됐다.

ㆍ1999년 6월 6일: 중국 당국에서 처음으로 ‘4.25’ 청원에 참가한 파룬궁수련생 100여 명을 심문했다.

ㆍ1999년 6월 7일: 장쩌민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 강화(講話)에서 “파룬궁 문제는 아주 깊은 정치사회적 배경 및 복잡한 국제적 배경이 있다”, “1989년 정치풍파(천안문 사건) 이후 가장 엄중한 한 차례 사건”라고 말했다. 강화 내용은 6월 13일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비밀리에 전달됐다.

ㆍ1999년 6월 10일: ‘중앙 610사무실’이 설립됐다. 그 임무는 대규모 파룬궁 탄압을 계획하고 실시하는 것이다.(탄압 후 ‘610사무실’은 정식 부[部]급 상설기구가 됐음) 전국 각급 ‘610’ 조직은 1만여 개였고, 전문직과 겸직인원을 합하면 종사자는 백만 명에 달했다. 운영 경비는 충분히 제공됐고 권력은 일반 공안, 검찰, 법원 등 정부 기관과 사법 기관을 초월했으며 각 기관에 조사, 체포, 기소, 재판 등 파룬궁 탄압 직무를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ㆍ1999년 6월 14일: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및 국무원 판공청 신방국 책임자는 발표문에서 “사람들이 모종 공법(功法, 주로 파룬궁을 지칭)에 대해 믿거나 믿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파룬궁을 탄압한다는 소문은 유언비어”라고 주장했다.

ㆍ1992년 5월~1999년 7월: 파룬궁이 전 세계 40여개 국가에 전해지고 파룬궁을 배우고 연마하는 인원이 7천 만에서 1억에 달했다.

ㆍ1999년 7월 19일: 장쩌민은 고위층 회의에서 정식으로 안건을 지정해 전면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한다고 선포했다.

3) 박해 개시와 평화적인 청원

ㆍ1999년 7월 20일: 중국 전국에서 통일적으로 파룬궁 보도원들을 체포하고 가택수색을 시작했다. 같은 날, 파룬궁 수련생 수만 명이 소식을 듣고 국무원 신방사무실에 가서 청원하다 체포됐으며 베이징시 펑타이(豊台)체육관, 스징산(石景山)구 체육관 등 각 대형 체육관에 감금됐다.

ㆍ1999년 7월 22일: 탄압이 정식 시작됐다. 중국공산당 당기관지 ‘인민일보’는 ‘리훙쯔라는 인물과 사실(李洪志其人其事)’란 장편의 비판 문장을 싣고, 민정부는 ‘파룬따파 연구회를 금지함에 관한 통고’를 발표했으며, 공안부는 파룬궁 활동에 대한 ‘6가지 금지’ 통고를 발표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은 ‘공산당원은 파룬따파 수련을 허락하지 않음에 관해’란 통지를 발표했다. 각지 공안은 계속 파룬궁 수련생들을 체포하거나 혹은 강제로 그들을 경찰국에 데려가 조작된 선전물을 보게 했으며, 가택 수색으로 파룬궁 서적과 음성자료 등을 강탈해 소각했다. 동시에 수십 만 파룬궁 수련생들이 베이징과 각 지방 정부 기관에 가서 평화적인 청원을 시작했다. 청원하는 군중은 쫓겨나거나 혹은 체포됐다.

ㆍ1999년 7월 22일: 리훙쯔 대사가 성명을 발표해 각국 정부, 국제기구와 선량한 사람들에게 중국에서 발생하는 위기가 해결되도록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ㆍ1999년 7월 23일: 캐나다 정부가 중국 외교부에 항의문을 보내 파룬궁 탄압을 비난했다.

ㆍ1999년 7월 27일: 리훙쯔 대사는 미국주재 중국대사관에 자신이 서명한 편지를 건네 중국 정부가 즉각 파룬궁 탄압을 멈추고 평화로운 대화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같은 날 미국 국무부는 성명을 발표해 중국 정부에게 파룬궁 탄압 행위를 자제할 것을 호소했다.

ㆍ1999년 7월 28일: 중국공안부는 리훙쯔 대사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면서 정권 전복을 시도했다고 고발했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은 이에 대한 협조를 거절했다.

ㆍ1999년 7월 29일: 미국 파룬궁수련생들이 워싱턴DC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탄압 중단을 호소했다.

ㆍ1999년 8월 16일: 중국 헤이룽장성 자무쓰(佳木斯)시 수인중학교 고(高) 12반 17살 여학생 천잉(陳英)이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다 압송되어 돌아오는 길에 경찰의 욕설과 구타, 공갈 협박을 받고 기차에서 뛰어내리다 사망했다. 이는 파룬궁 관련 사이트 밍후이왕이 발표한 파룬궁수련생이 핍박에 의해 사망한 첫 번째 사건이다.

ㆍ1999년 10월 16일: 밍후이왕은 파룬궁수련생이 정신병원에 감금된 보도를 처음으로 실었다. 장쑤성 파룬궁수련생 청중(誠種)이 1999년 9월 28일 우진(武進)시 제3인민병원(정신병원)에 보내져 강제로 약물을 복용당하고 전기고문을 당했다.

ㆍ1999년 10월 25일: 중국중앙TV ‘신원롄보(新聞聯播)’에서 장쩌민이 프랑스 방문 기간, 르피가로 신문사 기자의 질문에 대답할 때 “파룬궁은 사교”라고 지칭한 장면이 방영됐다. 이 프로를 본 파룬궁수련생 수백 명이 천안문광장과 인민대회당에 가서 청원하다가 체포됐다.

ㆍ1999년 10월 28일: 파룬궁수련생 30여 명이 베이징 시외에서 비밀리에 기자회견을 열고 실명과 실제 모습으로 CNN, 로이터 통신, AFP 통신, 뉴욕타임스 등 서방 주요 언론사 베이징 특파원을 초청해 인터뷰를 가졌다. 이로써 파룬궁이 탄압받는 상세한 상황이 중국 국내에서 최초로 서방 언론에 전해졌다. CNN과 로이터 통신은 당일 뉴스를 발표했고 ‘뉴욕타임즈’,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 유럽 여러 신문에서는 다음날 기자회견을 보도하면서 대형 사진들을 게재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수련생들은 나중에 연속 체포됐으며 그 중 딩옌(丁延), 차이밍타오(蔡銘陶)는 2000년 박해로 사망했다.

ㆍ1999년 10월 30일: 중국전국인민대표자 대화 상임위원회는 ‘사교조직을 금지하고 사교활동 방범과 처벌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켰고 각 언론사는 최고인민법원, 최고인민검찰원이 ‘사교조직을 만들고 조직하고 이용한 범죄사건에 구체적으로 법률을 응용하는 약간의 문제에 관한 해석’을 발표했다. 이 ‘결정’과 ‘해석’은 파룬궁을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파룬궁 탄압을 위한 법적 근거로 사용됐다.

ㆍ1999년 11월: 중국사법기관은 1일, 이미 수개월 간 감금된 적이 있는 전 파룬궁연구회 회원 인 리창(李昌), 왕즈원(王治文), 지례우(紀烈武), 야오제(姚潔)을 언론에 발표하고 체포를 집행했다. 12일에는 처음으로 파룬궁수련생에 대하여 형을 선고했고 파룬궁수련생 쑹웨성(宋岳勝), 천위안(陳元), 장스룽(江詩龍), 량위린(梁玉琳)은 2년에서 12년 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 외 수련생 수백 명이 노동개조 3년형을 받았다.

ㆍ1999년 11월 18일~19일: 미국 의회 상원과 하원은 각각 중국 정부에게 파룬궁 탄압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218호 상하 양원 공동결의안 및 관련 217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ㆍ1999년 12월31일~2000년 1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온 파룬궁수련생 수 천명과 일본에서 온 파룬궁수련생 40여 명, 대만, 호주에서 온 파룬궁수련생 수십 명이 천안문광장에서 연공하고 파룬궁 현수막을 펼치다가 체포됐다.

ㆍ2000년 1월 5일: AFP통신은 중국 해외의 비밀정보원이 이미 해외 파룬궁수련생 1000여 명의 블랙리스트를 수집했다고 보도했다.

ㆍ2000년 1월 9일: 호주의 백인 파룬궁수련생 세 명이 베이징 신화사 총부에 가서 호소문을 건네다 구류, 심문당한 후 강제 출국 당했다. 이는 백인 파룬궁수련생이 처음으로 중국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호소한 사건이다.

ㆍ2000년 2월 4일~5일: 중국 각지와 미국, 일본, 호주에서 온 파룬궁 수련생 수천 명이 천안문광장에서 청원하다 폭력적인 체포를 당했다.

ㆍ2000년 3월 23일: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는 홍콩에서 파룬궁을 포함한 정신운동에 대한 중국 당국의 탄압을 강력히 비난했다.

ㆍ2000년 4월: 파룬궁 수련생은 세계시민협회 회원 신분으로 제56차 UN인권대회에서 중국정부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여성을 탄압한 문제에 대해 특별 발언을 했다. 같은 달 13일, 최소한 파룬궁수련생 200명이 천안문광장에서 UN인권위원회가 중국 인권을 비판하는 의안을 표결할 것을 촉구하다 체포됐다.

ㆍ2000년 5월 13일: 해외 10여 개 국가와 도시 파룬따파불학회가 공동으로 매년 5월 13일을 ‘세계 파룬따파의 날’로 지정했다. 이날 중국 대륙의 파룬궁수련생 수백 명이 천안문광장에서 청원하다 체포됐다.

ㆍ2000년 8월: 파룬따파 정보센터(Falundafa Information Center)가 미국 뉴욕에서 설립됐다.

ㆍ2000년 8월 29일: 홍콩 파룬궁수련생 주커밍(朱柯明)과 베이징 파룬궁수련생 왕제(王杰)가 중국최고검찰원에 장쩌민과 공산당조직부장 쩡칭훙, 중앙정치국 비서 뤄간을 법을 위반하고 파룬궁을 박해했다며 고발했다. 주커밍과 왕제는 9월 7일 베이징에서 체포됐다.

ㆍ2000년 9월: 30여개 국가에서 온 파룬궁 수련생 2천여 명이 뉴욕에 모여 UN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참가하러 온 중국대표단에 청원하고 아울러 기자회견, 행진, 단체연공 등 체계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ㆍ2000년 10월 1일: 중국대륙에서 파룬궁수련생 수천 명이 파룬궁이 이른바 ‘사교’로 지정돼 탄압된 지 1년이 된 것에 항의하기 위해 천안문광장에서 청원하다 체포됐다. 6일과 26일에도 같은 이유로 수천 명이 체포됐다.

ㆍ2000년 10월: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마싼자(馬三家) 노동수용소에서 파룬궁수련생들에게 강제로 수련을 포기시키기 위해 여성 파룬궁수련생 18명의 옷을 벗긴 후 남자 감방에 집어넣었다.

ㆍ2000년 10월 28일: 해외 파룬궁수련생들이 제작한 ‘방광명(放光明)’ 파룬궁 TV프로그램이 북미 위성을 통해 위성과 일부 유선을 통해 방송됐다. 이 방송이 시청 가능한 지역은 미국, 캐나다와 멕시코 등지였다.

ㆍ2000년 10월 30일: 파룬궁 TV프로그램 ‘파룬궁의 진실한 이야기’가 미국 버지니아주 30채널에서 처음 방송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