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혜망
나의 수련 이야기  
 

 

작자: 흑룡강성 하얼빈 대법제자  
 

 

【정견망】
 

나는 흑룡강성 하얼빈의 농촌 대법제자다. 배운 게 많지 않아 글을 쓸 줄 모르므로 오랫동안 투고를 한적 없었다. 사부님은 내 수련 이야기를 써내도록 점화하셔서 비로서 글 쓰는 법을 배웠으며 동수의 도움으로 정리해낸다.
 

 

특이했던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은 전에 큰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양가의 기반이 아주 튼튼했다. 그러나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부친의 집은 가산을 모두 빼앗겼고 조부모님도 심한 구타를 당했다. 날마다 밖에 나가서 비판을 당해야 했다. 부모님은 그 옆에 서 있었다. 집안에 먹을 양식도 없어 친척들이 조금씩 도와주어 겨우 난관을 넘겼다.
 

 

내가 출생했을 때 집이 매우 곤란하여 내가 출생한 후 병이 있었는데 집에선 밤낮 반드시 불을 켜야 했으며 켜지 않으면 곧 시끄럽게 울어대었다.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는데 방에 아무리 낮이 밝아도 불을 끄기만 하면 나는 즉시 일어나 앙앙 크게 울었다. 그 때 초가 매우 비쌌는데 부모님은 방법이 없어 기름통을 하나 만들어 심지를 꽂고 미약한 불빛을 붙여 지냈다. 내가 7살이 될 때까지 불을 붙였다. 집안 식구들은 내가 왜 이런 병을 얻었는지 고민했다.
 

 

할아버지는 도를 닦던 분이셨는데 많은 제자가 있었고 모두 공능이 있었으나 문화혁명 때 박해받아 환속했다. 아버지는 내가 이런 것을 보고 걱정이 되어 할아버지에게 아들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할아버지는 부처님의 등을 지키던 승려가 전생한 것이라고 하셨다. 부모님은 이렇게 해서 나의 특이한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고 내가 불을 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매우 선량했다. 벌레나 작은 동물을 죽이지 않고 성격도 내향적이며 다른 사람과 사귐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을 해도 혼자 다니며 했다. 어떤 아이는 내가 그녀와 놀지 않는다고 욕을 했으나 나는 여자 아이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하고 나무에 기어오르는 등 매우 활동적이었다.
 

 

내가 말을 안 듣고 다루기 어렵게 되었을 때 부모는 내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선악에 보응이 있으며 윤회전생 신선이 수도하는 이야기 등이었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가장 조용했으며 가장 말을 잘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매우 길었다. 어떤 때 하루저녁에 이야기를 다 마치지 못해 2,3일 걸려야 했다. 기억이 가장 깊은 것은 부모님이 할아버지 제자들의 이야기를 해주실 때였다.
 

 

할아버지의 제자 중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높은 배나무 꼭대기에 큰 배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그 제자분에게 따 달라고 매달렸다. 그 제자는 너무 높아서 딸 수 없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할 수 있다고 했다. 갑자기 그 제자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쪽에 누가 오는가 봐?”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커다란 배 두 개가 그 할아버지 제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들은 공능이 있으나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게 매우 유감이었다.
 

 

할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제자가 있었는데 집에 와서 배가 고프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더러 밥을 갖다 주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밀가루와 약간의 물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대로 했다. 그 도제는 물로 밀가루 반죽에 몇 번 튀기더니 면을 다리에 죽 펼치자 면이 곧 익어서 떡이 되었다.
 

 

어머니는 또 이런 제자를 보았다고 했다. 우리집에 와서 그는 한손으로 밥을 하며 다른 손은 소매 속에 숨겼는데 어머니가 그에게 두 번이나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 번째 물었을 때 그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그는 자신이 삼세(三世)의 일을 안다고 했다.
 

하나는 부잣집 공자였는데 부친의 젊은 아내를 사랑하여 그녀와 몰래 도망쳐서 윤리를 흔드는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목숨이 수명이 짧아져서 얼마 안되어 죽었고 지옥으로 가서 징벌을 받았다고 했다.
다시 태어났을 때 축생의 길로 들어서 돼지가 되었는데 영통하여 자기의 전생을 알았다. 잘 먹어서 살이 쪘으므로 주인은 이 돼지는 내년이 되면 200근이 될 테니 잡아먹어야겠다고 했다. 그는 살이 찌면 곧 잡혀죽는다는 말을 듣고 그때 이후부터 단식을 하여 그저 약간의 죽만 먹어 피골이 상접했고 주인은 너무 말라도 기를 수 없으니 잡아 죽여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듣자 어떻게 해도 죽을 운명이니 실컷 먹자고 생각하여 먹기 시작했다. 죽을 때가 되어 주인의 솥에 물이 끓기 시작하자 그것을 묶으러 왔다. 주인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마구 도망치기 시작했고 주인은 쫓아왔다. 필사적으로 일백 여리를 달리자 움직일 수 없어서 어느 절로 들어갔다. 그곳에 공능이 있는 스님이 있는 것을 알고 그의 도움을 청하려고 생각했다. 불상의 뒤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주인은 숨을 헐떡거리며 이곳에 도착했다.
 

 

스님은 “이곳의 돈을 다 줄 테니 저 돼지를 죽이지 말라. 저 녀석은 사람이 전생한 것이므로 죽기를 두려워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인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고 반드시 저놈을 잡아야겠다고 했다. “저놈은 너무 나쁩니다. 물이 다 끓었는데 도망쳤으며 이렇게 멀리 쳤으니 우리는 그것을 쫓아오느라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방법이 없자 스님은 돼지에게 말했다. “네 운명이 이럴 수밖에 없으니 이제 돌아가거라”고 말했다.
 

 

주인이 돼지를 메고 돌아갈 때 화가 나서 말하기를 몇 번이나 칼로 찔러 죽인다고 말했는데 너무나 두려웠다. 그러나 이 돼지는 돌아간 후 양순하게 탁자에 누워 있어서 주인이 매우 놀랐다. 피살될 때 매우 고통스러웠는데 돼지는 죽은 이후 원신이 바로 분리되지 않고 한칼 한칼 찔리며 죽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줄곧 고기를 화로 가마 속에 넣어 익을 때까지 원신은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수련하지 않는 사람도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고기를 먹으면 정말 큰 죄를 짓는다고 했다.
 

 

이렇게 죽은 후 다시 전생할 때 염라대왕이 말했다.
 

“이번에 너는 사람으로 될 수 있는데 하나의 기호를 남겨야 한다. 네 한손은 돼지 발굽의 모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또 비교적 괜찮은 집의 부호에 태어났다. 그들 부부는 줄곧 아들이 없었는데 중년이 되어 아들을 얻지 매우 기뻐했다. 아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했는데 한쪽 손이 돼지 발굽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를 버리지 않았고 성년이 되자 그들의 집의 가산을 이용하여 며느리를 맞아하도록 했다. 혼례하는 당일 신방에 들어가자 그는 돌연 인생의 의의를 알았고 의연히 집을 떠나 수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부모의 신화이야기 중에서 나는 천국 세계를 동경하며 늘 어머니에게 물었다. 사람은 죽어야 하나요 ? 나도 죽나요? 그렇게 물으면 어머니는 너는 언제나 끝없는 이야기를 묻느냐고 말씀하셨다.
 

 

우리집 큰 백구
 

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에서 공부를 그만 두었다. 그때 학교는 매우 혼란했다. 당시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고 많은 아이들이 연애만 하여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나무 심는 기술을 닦았다. 나무 기르기를 좋아했는데 집에 비닐하우스가 있었고 과수원이 있었다. 일이 없을 때면 줄곧 식물 기르기를 연구했다. 이 때문에 나는 그곳 농업 기술자가 되었다. 우리집에 큰 백구를 한 마리 길렀는데 일어서면 사람만큼 키가 컸고 체중이 60킬로가 넘었다. 그놈은 가장 좋은 친구인데 나는 어디를 가도 그녀석이 따라다녔고 따라다니지 못하게 해도 내가 돌아올 때가 되면 수백 미터를 마중하러 나왔다. 백구는 세번이나 나를 구했다.
 

한번 내가 과수원에 갔을 때 봄이었는데 정원의 과수나무에 꽃이 만개하고 향기가 코를 찔렀다. 나는 무릉도원같은 과수원에 누워 편안함을 즐겼다. 가다보니 나무 아래 큰 동굴이 있는데 무엇인지 모르고 큰 돌을 들어 입구를 막았다. 바로 이때 옆에서 반척 정도 되는 큰 쥐가 튀어나와 나에게 덮쳐왔으며 나를 물기 시작했다. 나는 발로 그것을 찼으나 찰수록 더 심하게 물었고 내가 도망가면 그놈은 따라왔다. 바지를 물고 놓지 않았다. 내가 급히 백구를 부르며 쥐가 나를 무니 빨리 와서 도와 달라고 했다. 백구는 내 말을 듣자마자 맹렬하게 달려오더니 쥐를 입에 물었다. 그 쥐는 죽은 후에도 물은 것을 놓지 않았다. 나는 쥐의 주둥이를 잡아 열었고 백구의 입에서도 선혈이 흘렀다. 나는 백구에게 덕분에 내가 살았다고 했다.
 

 

두 번째. 내가 밤에 자전거를 타고 언니네 집에서 돌아와 어느 집 입구를 지나는데 그 집에서 갑자기 두 마리 큰개가 달려 나와 한 마리가 한쪽씩 내 바지를 물며 나를 잡아당겼다. 내가 끌려가려는 그 손간 하얀 그림자가 번쩍 하더니 우리집 백구가 제때에 내 앞에 나타났다. 왕왕 두 번 짖자 그 개들은 놀라 도망갔다.
 

 

세 번째 시장에서 참외를 사서 돌아올 때 날이 이미 저물었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거의 집에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길옆 풀섶에서 두 남자가 내 길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나를 며칠 지키고 있었으니 그들을 따라가자고 했다. 그들은 한 사람은 나를 끌고 다른 한 사람은 자전거를 끌고 갔다. 이 위급한 시각 백구가 또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석이 미친 듯이 짖으며 두 부랑자에게 달려들었고 그들은 놀라서 멀리 줄행랑을 쳤다.
 

 

수련 후 나는 이것이 나와 백구의 인연이며 전세에도 내가 구해준 적이 있는데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집 개가 되어 나를 보호했던 것임을 알았다.
 

 

 

남편 이야기
 

내 성격이 독특해서 결혼을 할 나이가 되어도 나는 출가하지 않아 부모님은 매우 근심했다. 몇 군데 알아보았으나 늘 깨졌다. 한번은 거의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나는 전기에 온몸이 감전이 되었다. 이런 정황은 이전에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내가 도를 범한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나는 곧 26-7이 되었다. 그때는 농촌에서 이 나이에 가정을 이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부친이 병이 났고 집에 일할 사람이 없어서 나는 시장에 나가서 채소를 팔고 있었다. 이때 큰 언니가 내게 사람을 하나 소개해주었는데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내가 보니 이 사람은 키가 작고 평범하게 생긴데다 가정도 궁하고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나쁜 마음이 생겼다. 우선 결혼을 승낙하고 내 일을 좀 돕도록 한 다음 일이 끝나면 내가 차버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는 우리집에서 보름 이상 일을 열심히 했다. 그는 나를 좋아했고 일할 때 나를 보면 나는 그에게 보고 싶지 않으니 고개를 돌리라고 말했다. 마지막 그날 일하다 밤 10시가 넘었을 때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늦었는데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면 안 되냐고 말했다. 나는 안 된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 이후에 영원히 올 필요 없다고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모친은 이것을 보고 너는 어찌된 아이가 이러냐고 말했다.
 

 

나는 그와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했는데 열흘 후 그는 또 우리집에 와서 모친에게 사정을 구했다. 나에게 잘해주겠다고 했다. 모친은 그에게 설득당해 나를 권했다. 나는 그가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에 차마 어쩌지 못해 며칠 더 있으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는 결혼을 준비했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의 외질녀, 모친은 언니 모두 함께 권했다. 나도 생각해보았다. 내 이전의 사귀던 그 몇 명의 남자는 백구가 보면 늘 왕왕 짖었는데 이번 남자가 오면 백구는 물지 않을 뿐 아니라 그와 매우 사이좋게 지냈다. 그가 백구의 발을 밟아도 백구는 물지 않으니 설마 우리가 정말 집안 식구란 말인가? 이렇다면 나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시집가기로 했다. 그러나 마음은 편안하지 않아 늘 우울했다. 온 몸에 질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을 얻은 후 수련하다
 

내게 있어 기공이란 줄곧 길거리에서 무술을 연마하며 기예를 공연하는 그런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아이의 팔을 비틀었다 다시 붙이는 것을 보았는데 기공에 대해 좋은 인상이 없었다. 파룬궁이 전해 나와 어떤 사람이 매우 좋다고 해도 나는 그게 얼마나 좋은지 알지 못했다.
 

 

1999년 1월 5일 나와 넷째 언니가 상의하여 파룬궁 연공장에 가서 한번 보자하고 저녁에 우리가 연공장에 갔다. 당시 그는 우리에게 사부님의 녹음을 틀어주었는데 사부님의“논어”의 한마디인 ‘불법’은 가장 정심하다를 들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파룬궁은 불법 수련이구나. 어려서부터 신선세계를 동경했고 수련하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하는지 고뇌했지만 단번에 찾지 않았는가? 또 출가할 필요도 없으니 이것이 내가 찾고 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마음속으로 격동했다.
 

 

이후 매일 아침에 연공하고 저녁에 법공부가 끊이지 않았다. 하루 종일 즐겁게 지냈다. 연공한지 보름이 안 되어 이전에 여러 해 시달렸던 병증과 식물과민성 증상 가래 심장병 등이 다 나았고 몸이 가볍고 힘이 들지 않았다. 성격도 좋아져서 교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접근하기 쉬웠으며 특히 남편에게 태도가 좋아져서 이전에 늘 그를 못본체 하고 미소를 짓지 않았는데 이제 큰 변화가 있었다. 그도 이상하게 느껴 무슨 공법이 당신을 이렇게 변하게 하느냐고 말했다. 그럼 이 책은 천서이니 잘 보라고 했다. 남편도 이에 대법 수련으로 들어왔다. 식구들도 대법 수련으로 신체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오빠 숙모 언니 동생 등 모두 잇달아 법을 얻었다.
 

 

천목이 열리다
 
수련한지 며칠 안 되어 나는 천목이 열렸다. 어느 날 혼자 집에서 연공하는데 2장 공법을 할 때 바깥문에서 삐걱하는 소리를 들었다. 주의하지 않았는데 아마 남편이 왔나보다 했다. 이후 아무 소리가 없었고 나도 주의하지 않고 계속 연공했다. 이때 내 머리 위에 두정포륜 때 두 손이 좀 무거웠으며 누군가 위로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눈을 떠보니 세상에! 금색의 커다란 용 한 마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했는데 매우 두려워 연공장에 동수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동수는 어쩌면 다른 공간의 마일지도 모른다 했으나 내 마음속으로 마같지 않았다.
 

 

나중에 어느 날 남편과 방안에 있는데 또 우리집 바닥에 두 마리의 큰 용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는 황금색이며 다른 하나는 백색이었다. 용의 비늘은 곡식 까부르는 키(簸萁)만큼 컸다 나는 집이 이렇게 작은데 어떻게 이렇게 큰 용이 앉을 수 있을 까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은 다른 공간에서 본 것이었다.
 

 

내가 본 바를 남편에게 알려주고 보라고 했더니 그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했다. 나는 조급하여 어째서 안보이냐 분명히 여기 있는데 라고 했다. 당시 두 마리 용이 어찌된 일인지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사부님의 설법을 보고서 비로소 대법 수련을 하면 천룡팔부가 호법을 하는 것임을 알았다. 알고 보니 내가 본 용은 바로 나의 호법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줄곧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줄로만 알았다. 알고 보니 사람마다 다 천목이 열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부님은 나를 점화 하셔서 왼손에 두 글자 “수구”를 보았으며 오른쪽에는 하나의 큰 눈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후에 무엇을 보아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는 것임을 깨닫고 수구를 이해했다. 수련은 더욱 가치가 있고 대법은 진귀한 것임을 알고 수련에 정진했다.
 

 

법을 실증하고 박해에 반대
 

1999년 7월 중공이 파룬궁에 대해 진압을 하고 텔레비전에서 날마다 중공 일언당의 거짓을 방송하여 세인들을 독해시켰다. 당시 매우 괴로웠으며 이렇게 좋은 공법을 어떻게 왜 연마하지 못하게 할까? 이렇게 좋은 사부님이 모함을 당하는데 내가 좌시할 수 있는가. 나는 대법이 억울하며 사부님의 결백함을 믿었다. 7월 19일 나와 식구들이 성 정부에 가서 청원을 했고 다른 사람도 다 갔는데 나와 식구들만 파출소에 끌려가 밤 한시가 넘어서야 풀려났다.
 

 

2000년 10월 12일, 나는 언니, 동생, 올케, 남편과 북경에 가서 대법을 위해 파룬궁은 좋다는 바른 말을 하기로 했다. 우리집에 어머니 혼자 집에 남았으나 우리가 북경 가는 것을 매우 지지 했다. 나중에 어머니 말을 들으니 우리가 가던 그날 밤 사부님이 보러 오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비록 수련하지 않지만 사부님의 설법을 본적이 있어서 대법을 믿었고 줄곧 천목이 열려 있었다. 어머니는 놀랍게도 사부님이 오셨는데 말씀을 안 하시고 미소를 짓더니 가버렸다고 했다. 모친의 설명을 들으니 나는 눈물이 단번에 솟아났다. 사부님, 제자를 위해 이렇게 걱정을 하시는군요. 이 노인의 딸은 모두 북경으로 정법을 하러 떠났고 혼자 집에 남아 있는데 일부러 보러 오시다니요. 그렇게도 자비로우시군요.
 

 

우리 몇 명은 순조롭게 천안문 광장에 도착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파룬따파하오”를 외쳤다. 전국 각지에서 온 대법제자는 모두 이곳에서 경찰에게 한무리씩 잡혀 차에 올랐다. 우리 몇 명도 흩어졌다. 나와 언니, 올케는 경찰에 끌려 파출소 앞까지 끌려갔고 그곳에 많은 대법제자가 갇혀있었다. 당시 나는 대법에 대해 아직 똑똑하지 않았는데 어느 경찰에게 이끌려 어느 방으로 갔는데 경찰이 물었다. “뭐하러 왔어요?”
 

 

나는 “대법은 좋은 사람이 되고 도덕이 되돌아 올라오라고 하는데 왜 연마를 못하게 하는 거여?”라고 말했다.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며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법하러 온거요, 호법하러 온거요?” 나는 정법도 하고 호법도 한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데려갔다. 나중에 나와 올케는 성 사무처에 가는 도중 어느 작은 차가 우리를 맞이하러 왔는데 우리 경찰은 그녀들은 파룬궁이 아니며 놀러온 사람이라고 하여 이 마음씨 좋은 경찰은 우리를 놓아주었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은 또 북경에 들어갔다가 체포되었고 우리집은 수색 당했으며 경찰이 나더러 연마를 할 거냐고 물었다. 연마한다고 말하기만 하면 체포되었다. 나도 체포되어 간수소에 두 달 이상 갇혔다.
 

 

그때 이후 우리집은 늘 경찰이 소란을 피우고 뒤졌다. 2004년 1월 9일 하얼빈 자료점이 파괴되었고 체포된 동수가 견디지 못해 내 이름을 말했다. 나와 남편은 하얼빈 동력분국 남강분공 홍기 파출소 등에 끌려갔는데 잡혀갈 때 두 대의 차에 설흔여명의 경찰이 왔고 나는 앉아서 발정념을 하고 있었다. 다섯명의 경찰이 나를 들었으나 움직이지 못했다.
 

 

당시 아들이 울면서 경찰에게 말했다. 아저씨 우리 엄마를 놓아주세요. 엄마를 잡아가면 누가 나를 돌봐줘요? 내 마음은 매우 쓰렸다. 이때 경찰이 나를 들어 올렸다. 그들이 집을 뒤질 때 그들에게 진상을 말해주며 당신들은 인민의 경찰이 아니요 ? 어떻게 좋은 사람을 잡아 가는거요 라고 했다. 그들 중 한 악경이 말했다: “우리는 바로 강 모모가 돈을 주어 키운 토비(도적)이요.” 라고 했다. 그들이 나를 문밖으로 밀어낼 때 “파룬따파하오”라고 소리 질렀다.
 

 

그들은 내가 신은 양말을 벗겨 입을 틀어막고 나를 강제로 차에 태워 파출소로 데리고 갔다. 다음에 철제 의자에 묶었다. 두 악경이 나에게 진상자료는 누가 주었냐 돈을 얼마나 주었냐 등등을 물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자 그들은 때리기 시작했다. 내 머리를 잡아 힘껏 벽에 부딪쳐 마침내 나는 혼절했다. 처음 깨어났을 때 온몸에 물이었고 계속해서 나를 때렸다. 구두발로 나를 찼다. 나는 또 기절했다. 두 번째 깨어났을 때 나는 병원에 누워 있었고 네명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되고 나는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네명의 경찰이 모두 잠들었으면 했다. 그러자 그들은 긴 침대로 문을 막더니 그곳에 누워 잠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그들이 막은 침대를 옮겨 놓고 막 도망가려 했다. 바로 그때 옆방에서 다른 병자가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당시 다른 공간의 사악이 너무 많아 사악이 병자를 조종하여 소리를 내게 한 것이다) 그들이 깨었다. 내가 도망가려는 것을 알고 더욱 단단히 감시했다. 그들은 간수소로 나를 보내려고 했는데 두 번다 실패하자 그들은 가짜 심전도 등을 만들어 나를 노교소에 보내려고 했다. 당시 나는 구세력이 안배한 길을 걸었는데 속으로 노교소에 가면 얼마나 무서울까 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렇게 틈을 타게 되어 불법으로 노교소 3년 판결을 받았다. 악으로 가득한 만가(萬家) 노교소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노교소에서 “3서”를 쓰라고 하는 내가 쓰지 않자 벽돌 방에 꿇어앉게 했으며 그래도 쓰지 않자 벽에 묶어놓고 전기곤봉으로 감전시켰다. 사악이 나를 박해하는 온갖 수단에도 나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고 사부님이 나 대신 감당하셨다. 그들이 전기 곤봉으로 감전시킬 때 나는 눈도 뜰 수 없었다. 한번 갑자기 눈을 떠보니 곤봉에서 자색의 불꽃이 퍽퍽 튀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겁이 났다. 이때야 비로소 아픔을 느꼈다. 이때 나는 경찰에게 진상을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나를 작은 방에 집어넣었는데 나는 계속해서 말했으며 최후에는 가장 사악한 경찰도 나는 좋은 사람이라 하며 다시는 때리지 않았다. 이 기간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대신 삼서를 쓰게 하여 나의 손을 끌어다 손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수를 채워 전향율로 계산했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번 발표한다. 사악이 나를 핍박하여 손도장을 누른 소위 각종의 3서는 모두 승인하지 않으며 폐기한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할 것이며 사악의 안배는 원하지 않는다. 노교소에서 고생스러울 때 사부님의 법을 외웠으며 한번은 사부님이 멀리서 노교소에 오시는 것을 보았다. 우리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계셨는데 눈에는 눈물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노교소에서 박해를 견디지 못해 전향된 수련생을 가슴 아파 하신다. 이것을 보고 나도 울었다. 그 간난의 세월, 나는 사부님의 법을 외워 자신을 격려하며 법에 대해 믿음에 의지하여 길고 긴 3년의 시간을 지나왔다.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나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여라
 

《홍음2》 <정념정행>
 

 

노교소에서 만기가 되어 나올 때 그곳의 610은 불법으로 나를 심문했다. 연마할거냐 아니냐고. 나는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신이 고치지 않으면 계속 고쳐야 할 것이라고 했으나 나는 당신들은 상관없으며 사부님의 말만 들을 것이라고 했다. 때가 되자 나는 다음날 오빠가 맞이하러 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오자 파출소 악경이 놓아주지 않았다. 또 나를 세뇌반에 보내려고 해서 나는 한달 동안 떠돌아 다녔다. 집에 돌아오자 경찰은 소문을 듣고 또 소란을 피웠다.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너희들 오너라, 진상을 말해주려고 했는데 왔으니 헛되이 돌아가지 않게 해주겠다. 그러면서 문을 활짝 열어놓아 그들을 뛰어나가 맞이했으며 예의로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들에게 무슨 과일을 먹겠느냐 우리 과수원에 와서 따가라고 했다.
 

 

그들은 대법제자가 경영하는 기업이 이렇게 좋은지 보고 좀 의외임을 느껴 당신 집에 과수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하며 아니면 당신들이 나를 3년이나 노교소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 집을 더 관리 했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노교소에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해서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당신들은 아들 딸, 부모 형제도 없느냐? 우리는 집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나를 박해했으니 이게 옳은가 생각해보라. 내가 연마할거냐 아니냐를 묻는데 이 질문을 하려면 나는 영원히 할거요. 나는 계속해서 진상을 알려주고, 문화혁명이 끝난 후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았느냐 위에서 당신들에게 시킨 일이 좋은 일이 아니다. 나중에 도망갈 길을 남겨 놓기 위해 좋은 사람을 박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들은 그럼 집에서 연마하라, 나가서 알리지 말라고 했다. 나는 무엇이 알리는 것이라고 하느냐? 당신들이 우리집에 와서 말하면 되느냐? 내가 우리 오빠 언니 집에 가서 알려도 안되는 것이냐? 그들은 된다 된다 하며 다시 오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 이후 그들은 정말 다시는 우리집에 오지 않았다.
 

 

중생구도의 신적(神跡)
 

북경에서 돌아온 후 시내 구역의 일부 어느 동수와 연락이 되어 그곳에서 자료를 뿌리고 있었다. 우리 지역에는 십여 명의 동수가 있어 사람들은 2,3명씩 한조가 되어 자료를 나누어 주는 것은 도보로 했다. 먼 곳은 40여리 돌아오면 80여리 였다. 아들이 겨우 8,9세 되었는데 역시 어른과 함께 중생구도의 중임을 맡았다.
 

 

한번은 나는 아들과 한조가 되어 먼 길을 걸어갔다가 돌아올 때 아들이 엄마 나 걷기 힘들어, 차가 있으며 얼마나 줗을까 하고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차 한대가 우리 옆에 섰다. 우리가 보니 먼 친척이었는데 차를 몰고 일을 보고가다 그곳을 지나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사존의 감은을 표현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나와 아들이 어느 마을에서 자료를 뿌리다가 악인에게 뒤를 밟혔다. 아들이 내게 말하자 나는 두려워 말라하고는 우리가 하는 일은 가장 바른 일이다 하며 나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이 나를 뒤따라 뭐하는거요? 그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그러면 나를 뒤따라 뭐하는거요? 하면서 계속 걸었는데 그 사람은 멍하게 그곳에 서서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쩌면 정념으로 그를 고정시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또 한번 다른 사람에게 꼬리를 밟혔는데 나는 당신 뭐하러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소를 찾으러 왔다고 했는데, 소는 저기 있다 하면서 손으로 길을 가리키며 가보라고 했더니 그는 순순히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또 한번은 언니 아들과 함께 어느 순찰차에게 종적이 밟혔다. 우리는 옥수수 밭으로 들어가 달렸다. 한참 달린 후 우리는 이랑에 엎드렸다. 왜냐하면 순찰차의 전조등이 옥수수 밭으로 향해 쓸며 비추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갈 때가 되어 우리는 비로소 울퉁불퉁한 옥수수 밭을 지나갔다. 내 신은 구멍이 나서 샜으며 두 발에는 이미 물집이 많이 생겼다. 나온 후 방향을 몰라 집을 찾지 못했다. 나는 TV 송신탑에 가로등이 있지 않느냐 밝게 비치는 곳이 우리집 방향이라고 했다. 내 생각이 이는 내가 두려운 마음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은 단순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 우리는 나는 듯이 달려 십여 리의 길을 우리 몇 명이 십분도 안 되어 정말로 정시 발정념 시각에 도착했다. 아무리 먼 곳도 우리는 늘 발정념 시각 이전에 돌아왔다. 우리가 신의 일을 할 때 정말 신이며 생각한대로 이루어진다. 동시에 사존이 항상 보호하심에 감사드린다.
 

 

농촌은 연말이면 집집마다 주련(柱聯)을 붙이는데 집안에 죽은 사람이 있을 때만 안 붙인다. 농촌에는 집집마다 대문이 있다. 최근 몇 년은 주련을 대주는 동수를 찾지 못해 대문에 주련을 붙이지 못했다. 나는 시장에 가서 속인을 찾아 겨우 붙였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정월 초오일에 대련이 떨어졌다. 사실 나는 속인의 대련이 시커먼 것을 볼 수 있는데 나는 정말 붙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금년은 어떻게 하지? 생각하니 사실 너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서예를 하는 동수에게 한 폭을 써달라고 하자고 생각했다. 이때 동수에게서 이미 두 폭의 작은 주련을 가져왔고 정 안되면 이것이라도 붙이되 속인의 주련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련을 대충 상자 속에 넣고 다음날 열어서 붙이려 할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작은 주련 속에 큰 두루마리가 있었다. 주련을 넣은 상자는 내가 분명히 깨끗하게 청소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두루마리를 열어서 보니 뜻밖에 큰 대련이었고 거기에는 두 줄로 다음처럼 써져 있었다.
 

法正乾坤 日月增輝
(법이 우주를 바로잡고 일월이 더욱 밝다)
 

人心歸正 福祿臨門
(인심이 돌아오니 복록이 문에 임한다)
 

 

가로 폭에는
 

天賜洪福
(하늘에서 큰 복을 내려주네)
 

라고 적혀 있었다. 또 두 개의 큰 복(福)자가 있고 그 위에는 불광보조 예의원명(佛光普照,禮義圓明)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이것이 사부님이 나의 급한 마음을 보고 보내준 것임을 알았다. 나는 사존께 무릎을 꿇고 몇 번이나 고개를 찧어 사존에 대한 감격을 표시했다. 그 대련은 금빛이 번쩍이며 길가는 행인이 길을 멈추고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없고 모두 매우 부러워했다. 여기서 하나 희망컨대, 능력이 있는 동수는 대련을 만들 때 일부 대문의 대련을 만들어 농촌 중생의 요구를 충족 시켰으면 한다.
 

 

중생 구도의 길에 사존의 자비로운 보호가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고 신기한 일은 너무나 많다. 자기가 잘 수련하여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하여야만 사도은에 보답할 수 있다.
 

 

 

안으로 찾아 병업관을 넘다
 

몇 년 전 언제인지 모르는데 집에서 창고에 쥐가 나타났다. 동수에게 물어보니 아마 어렸을 적에 동굴을 막아 비교적 큰 쥐가 나를 물었을 때 그 쥐가 아닌가 했다. 이 쥐는 우리집 창고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먹고 사람을 해를 끼쳤다. 나는 기분이 나빠 남편에게 쥐약을 사서 뿌리자고 했다. 큰 놈 두 마리, 작은 놈 4마리 다 합해 일가족 6마리였다. 당시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법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동시에 신당인의 연극 <달마전기>를 보고 있었는데 곧 병업의 반응이 오기 시작하여 오장 육부가 칼로 찌르는 듯이 아파왔다, 선혈을 토했다. 너무 아파 방바닥에서 굴렀다. 안으로 찾아보며 아마 TV를 보아서 그런가보다 했다.
 

 

나는 열려 수련하기 때문에 이런 장면을 본적이 있었다: 당나라 시대에 회창 년간에 불교를 없앨 때 500명의 스님을 모두 가두고 석가모니 부처를 믿는가 안믿는가 물었다. 믿는다고 하면 머리를 자르고 안 믿는다고 하면 놓아주었다.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믿는다고 했고 그들은 나의 머리를 베었는데 현재의 사람 머리보다 몇배나 컸고 고통도 느꼈다.
 

 

내가 고통스럽게 시달리고 있을 때 몽롱한 중에 어떤 음성이 말했다.
“너는 석가모니의 제자이다. 석가모니의 제자는 모두 열반의 길을 걷는데 네가 원만하려면 열반해야 한다.” 나는 이때 단번에 깨어났다. “우리 대법은 열반의 길을 걷지 않는다. 이것은 마이다. 구세력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니 나는 너희들의 말을 듣지 않겠다.”
 

 

내가 또 잠들었을 때 나는 달마가 나를 따라가자 하면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TV연극 <달마전기>를 보는 것처럼 착각했다. 그러나 병업은 낫지 않았다. 그것은 근본 집착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연후에 두 번 또 쥐를 보았는데 그때는 단번에 알았다. 내가 살생한 업이구나. 비로소 고통스러운 모습이 마치 쥐가 약을 먹고 감당하는 듯이 시달리는 것임을 알았다. 나는 사부님의 선해의 법을 외우며 이 쥐와 선해를 시작했다. 쥐들은 동의했고 나의 병증은 즉시 소실되었다. 또한 신체는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졌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수련은 너무나 엄숙하다는 것을 느꼈다. 매 하나의 난관이 만일 사부님과 대법에 의지하지 않으면 정말 넘을 방법이 없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에 감사드린다.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법에 맞지 않은 곳이 있다면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발표시간: 2013년 3월 26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17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