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오상태에서 본 장기 병업(7-13)
[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11. 법공부가 단지 책을 읽고 법을 듣고 법을 외우는 형식에 그칠 뿐, 자신을 대조하지 않고 안으로 찾아보지 않으며 법에 동화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법공부하는 시간이 아주 길다, 하지만 법공부 할 때 그냥 책을 읽기만하고 듣거나 외우기만 한다. 어떤 사람은 ‘전법륜’ 전체를 외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여러 권의 ‘각지 설법’을 외울 수 있어 수련생들의 부러움을 자아낸다. 모두들 그가 법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수련생 여럿을 만나 보았는데 몇 사람은 장기적으로 병업 중에 있었고 그들 자신도 문제가 어디에 걸려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총체적으로 공부는 해도 깨닫지 못하는데 있음을 보았다. 엄격하게 말해서 바로 법공부가 형식에 흐르고 마음이 법에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책을 읽을 땐 늘 일심불란(一心不亂)한데 어찌 마음이 법에 있지 않다고 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석가모니는 정념(正念)을 말했는데,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경을 읽어 진정하게 그가 수련하는 그 한 법문의 세계를 진동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각자(覺者)를 불러 올 수 있다.”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으면 법을 외우는 것이 아주 좋고 또한 마땅히 할 수 있다. 일심불란하게 책을 읽으면 신체 내외, 수련하는 세계의 일체가 모두 아주 현묘한 변화를 발생하며, 마음과 염두가 순정할수록 변화가 더 크다. 하지만 일반 사람은 모두 보지 못하며 법공부의 재미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그냥 법공부를 견지해 나가는 것 역시 아주 대단하며 깨달음에 따라 원만한다. 그러나 만약 편파적으로 ‘전법륜’ 중에 말씀하신 “염불함에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염(念)해야 하는데, 마음속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대뇌의 기타 부분이 모두 염(念)해 마비됨으로써 아무것도 모르며, 일념(一念)이 만념(萬念)을 대체”하는 것만 중시하고 극단으로 이해한다면 법공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자신을 대조하는 마음이 없고, 보거나 외우지만 오히려 법의 내포를 깨닫지 못하며, 마음은 시간을 다그쳐 책을 읽는데 있고, 책을 외우는 것이 형식에 흘러 아주 빨리 책을 읽고 묵념은 더욱 빠른데 마치 스캐너처럼 단숨에 외우기를 해치운다. ‘다 외우고 나서 얼른 다른 일을 해야지.’ 이렇게 법공부 하면 신체 내외에도 변화가 발생하고 세계도 부단히 발전하겠지만 다만 본래 경지에서만 완벽해질 뿐 층차의 제고는 없다. 장기적으로 이렇게 나간다면 역시 한 층차에서 지체하게 된다. 만약 극단적으로, 습관적으로 이렇게 나가면서 자신을 대조하지 않고 안으로 찾지 않는다면 법공부는 스님이 경을 읽는 것처럼 석가모니 그 법문의 방향으로 빗나간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당신은 대법에서 말씀하신 석가모니 그 법문의 형식으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련생에게 건의하는 바, 책을 읽고 외우는 것을 천천히 하라. 한 단락을 다 읽고 나서 자신의 평소 언행, 일하는 심태, 모순에 부딪혔을 때의 심태, 특히 첫 일념이 대법에 부합되는가, 어떤 것이 더욱 좋은 방법인가, 더욱 높은 표준이 있는지 대조를 좀 해보라. 이렇게 안으로 찾을 수 있다면, 모 한 단락 법리에 대해 더욱 새롭고 더욱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인데 그게 바로 경지의 승화이고 이와 동반하는 것은 심신의 변화로서 깨닫지 못하면서 법공부를 하느라 읽고 외우는 것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홍음-착실한 수련(實修)’에서 말씀하셨다.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일마다 대조하고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 어떤 사람은 단지 다른 수련생과 비교하고는 자신이 그래도 괜찮다면서 왜 이렇게 법공부해도 병업이 장기적으로 없어지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실은 다른 한 층의 내포를 홀시한 것이다. 법공부할 때 법에 대조하면서 공부해야 하며, 대법에 대비하면서 자신을 수정해야 하고, 법공부 중에 수시로 안으로 자신을 찾아보고 대조하면서 자신을 개조하고, 언행을 개선하며, 심태를 승화하면서 반드시 더욱 높은 층의 표준에 부합되게 해야만 비로소 끊임없이 고층차에서 증오한 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진실하게 법공부 중에서 자신을 대조해 보는 심태를 품고 배우는 한편 조용히 법의 내포를 깨달을 수 있다면 정법의 일을 하는 것도 갈수록 잘할 것이다. 이렇게 양성순환을 할 수 있고 습관적으로 이렇게 법공부를 한다면 한 가지 상태가 있을 것인데 바로 일부러 깨닫기 위해 내포를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이 법공부가 어느 단락에 이르면 자동적으로 멈추어지면서 이 단락 법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이 있게 되는데 아무리 민감하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몸이 뜨거워지거나 진동하거나 홀연 분발하게 되고 마음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법에서 정진 승화한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층차의 돌파로서 본성적인 일면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이다
공부는 하지만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았지만 해내지 못하는 수련생은 이런 상태가 있기가 아주 어렵다. 문제가 쌓이면 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사실 만약 그들이 하기 시작했다면 그들의 병업은 진작 말끔히 없어졌을 것이고 지금까지 쌓여있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법해’에서 말씀하셨다. “사실 우리 이 법은 모두 이미 아주 명료하게 말했는데 당신이 맞추어 대조하려고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달렸다.”
12. 주식 투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법해’에서 말씀 하셨다. “사부: 증권매매는 바로 도박이라, 다른 사람의 돈을 가지는 것이다. 증권매매를 하는 어떤 사람은 가산을 탕진하는데 당신은 어떤 기분인지 아는가? 수련인은 이런 일을 절대 할 수 없다. 그 마음을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또 마작하는 것 말이다. 마작할 수 있는가는 당신이 나한테, ‘선생님, 제가 도박을 해도 됩니까?’라고 물어보기만도 못하다. 연공인인 당신이 어떻게 이 心性(씬씽)을 가늠하는가, 당신 자신이 이 대법에 따라 했는가?“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식을 사는 등 정상적인 투자도 해서는 안 되는 줄로 여기는데, 그건 극단으로 가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 사실 이 주식 그것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내가 이 회사의 얼마나 되는 주식을 샀다고 말하거나 혹은 얼마나 되는 주식투자를 했다고 하는데, 이런 주식은 단지 일종 정상적인 투자다. 나는 매달 일정한 이윤을 배당받을 수 있으며 나는 결코 그것의 변동에 따라 그것을 조작하지 않는데, 이것은 내가 말하는 그러한 주식투기에 속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꼭 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주식놀음’은, 주식놀음으로 매일 주가표의 변동을 보며 마음은 심지어 그것에 의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뭇 사람 웃음) 당신이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수련하지 못한다. 당신의 마음이 모두 주식에 있는데, 어떻게 수련하겠는가? 그야말로 형편없이 집착하는데, 속인보다도 더 속인이다. 이것이 어디 수련인인가? 전혀 수련하지 못한다. 나는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만약 당신들이 모두 어떤 회사에 일정한 주식이 있어 당신이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당신이 매달 돈을 받을 수 있고, 대량의 시간에 모두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한다면 나는 정말 매우 기쁠 것이다.”
주식시장에 투자한 많은 수련생은 모두 손해를 봤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알다시피, 대륙의 주식시장은 투자자의 돈을 후비는 것이어서 투자자는 사람마다 평균 매해 몇 만 내지 십 몇 만씩 손해를 본다. 돈을 버는 사람은 개별적인데 내가 보기에 명에 큰돈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수련생은 자신이 대법을 수련함으로 남보다 지혜가 있기에 주식시장에 투자하여 돈을 버는 것도 법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잘못 인식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대법을 위반하는 것인데 그래도 법을 실증할 수 있는가? 실은 바로 자신을 실증하는 것으로, 출발점이 틀리고, 형식은 더욱 틀린다. 이 자체가 구세력이 박해하는 구실이다. 어떤 사람은 장기적으로 병마의 시달림 속에 처해 있는데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대법을 위배하는 어떠한 일이든 모두 자신에게 번거로움을 가져올 수 있다
13. 중국본토 노수련생은 사업상 필요한 것도 아닌데 TV보기를 즐기고 인터넷에 접속하기를 즐긴다.
신수련생에게는 이 문제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면 서서히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련을 한지 아주 오래된 노수련생은 늘 TV를 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어떤 사람은 내가 보는 것은 NTD TV 프로그램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 프로그램은 속인에게 보여주는 것이므로 법이 아니다. 정법시간이 이렇게 긴박한데 왜 마음을 세 가지 일에 쓰지 못하는가?
또 어떤 수련생은 대륙 수련생에게 NTD TV 안테나를 설치해 주는데 신경을 쓴다. 만약 집에 속인이 있다면 문제가 크지 않다, 만약 이웃에게 모범을 보이며 그걸 보급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 역시 아주 좋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의 출발점은 이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구실은 여기에 있으나, 최종에는 자신이 그 속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 나는 어떤 노수련생이 바로 이런 것을 보았는데 속인의 TV프로를 보고 싶어 참지 못해한다.
왜, 보기를 좋아하는가? 심태는 TV 프로그램의 정서적 파동에 따라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가령 파동이 일지 않는다면 어찌 그런 것에 이끌려 끝없이 보겠는가? 이런 마음의 파동은 위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주식투자에서 오는 심정의 움직임과 구별이 실은 크지 않은 것으로 날마다 오르내린다. 하물며 속인의 TV 프로그램은 나쁜 물건이 너무 많아 보기만 하면 온 몸에 주입되는 판인데. 인터넷에 접속해 게임을 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해서 인이 배긴 많은 수련생은 모두 장기적인 병업을 가지고 있는데, 그 병업의 반복이 심한 것은 그들이 장기적으로 이 층차에 머물러 있으면서 정진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걸 돌파하지 않은 결과이다.
14. 직접구매를 미끼로 한 다단계 사기
사부님께서는 ‘2004년 뉴욕국제법회설법’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나쁜 일을 하면 안 된다. 지금 서방사회에서 다단계 판매는 이미 없어졌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며 층층이 껍질을 벗기는 것으로, 뒤에 있는 사람일수록 피해가 심하다.
대법제자가 다단계 판매를 한다고? 당신이 온종일 그곳에 머리를 써서 다른 사람의 돈을 뽑아내는 것이 맞는가? 맞지 않다. 정당한 경영이 아니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고, 상품을 교환하는데 당신은 무엇을 하는 건가? 그것은 온갖 머리를 굴려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는 것이다. 할 수 없다! 이 일에 대해 나는 일찍이 말한 적이 있다. 다단계 판매를 할 수 없으며 누구든 하기만 하면 잘못한 것이다. 중국 대륙 대법제자 중 누가 다단계 판매를 한다면 그가 대법제자의 수련 형식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는 장래에 이 일체의 후과(後果)를 감당해야 한다.”
이 설법을 본 후 다단계에 종사했던 많은 동수들이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 왔다. 하지만 대륙에서 다단계를 엄단하는 형세 하에서도 아직 적지 않은 수련생들은 다단계를 직구(직접구매)로 둔갑시키는데, 여전히 다단계, 인터넷, 돈벌이 수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진정한 직구(Dell 컴퓨터 직구, TV직구) 업체들이 다단계 방식으로 하는 것을 보았는가? 사실 그들 수련생은 마음속으로 다단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형식만 바꾸고 잘못을 고치지 않으며, 간판을 바꿔가며 위장하는데 양심이 있는가? 이는 다른 사람을 속이고 다른 수련생들을 속이며 자신을 속이는 행위다. 어떤 수련생들은 심지어 ‘직구를 미끼로 하는 다단계 판매 수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일부는 수련생들까지 끌어다 강의를 듣게 하며, 또 수련생들 사이에 다단계 체계를 세우기도 하는데 이는 대법 자원을 이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수련생들의 수련을 파괴하는 행위다. 만약 그들이 다단계의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며, 어떻게 수련생들을 망치고 어떻게 대법을 파괴했는지 알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그처럼 심각한 병업을 불러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병업은 대부분 치명적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왜 법리에서 생각해 보지 않는가? 왜 사부님께서 그렇게 엄중하게 말씀하셨을까? 왜 법에 따라 하지 않는가? 왜 잘못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각종 이유를 대며 대법의 표면적인 빈틈을 파고드는가? 사실 대법은 그들이 파고들 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수련생들은 다단계를 하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그들 자신만 스스로 속이고 있을 뿐이다. 만약 이처럼 대놓고 대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수련 성취한다면 장래 우주의 법을 파괴할 수 있다. 때문에 구세력은 반드시 그들을 훼멸하려 하고 절대 그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오직 새롭게 시작하고 수련생들에게 조성한 손실을 만회해야만, 최소한 그들에게 이끌려 다단계 판매에 가담한 수련생들을 명백하게 만들어야만 신체 속에 들어간 나쁜 것들을 제거할 수 있고 진정으로 정법 속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수련생들은 다단계 판매를 해서 줄곧 손해를 봤는데 이런 현세현보는 그나마 좋은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곤두박질하여 그 속에서 도를 깨닫게 하는데 바로 이렇게 수련해 오는 것이다.” 조속히 자신을 바로 잡아야 한다. 어떤 수련생들은 다단계 판매를 해서 돈을 좀 벌었는데 포기하기 아쉬워 헤어 나오지 못하는데 장기간 병업이 지속되는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을 바로 잡지 않으면 발정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또 어떤 수련생들은 돈을 벌었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바르게 깨달았다고 여기고 수련생들 속에서 과시하려 하는데 난법 난귀들에게 어느 정도로 이용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주위 수련생들이 모두 이 점을 깨닫게 되어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치명적인 병업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들이 대법 중에서 정진하고 기여했던 것들도 대법을 파괴하는 위장술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15, 돈, 물건에서 문제가 나타났지만 보충하지 않은 것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말씀하셨다. “편직물공장의 수건을 늘 자기 집으로 하나씩 가져갔는데 모든 직원들이 그랬다. 공을 배운 다음에는 그는 가져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집에 가져갔던 것도 도로 가져왔다. 다른 사람들도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누구도 가져가지 않았으며, 어떤 직원 역시 자신이 이전에 가져갔던 것을 모두 공장으로 도로 가져왔는데, 전 공장에 이런 정황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은 이 단락의 법을 보았다. 수련 전에는 이 방면에 문제가 있었으나, 더욱 깊은 내포를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그대로 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사람은 각종 원인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쑥스러워 감춰버렸고 시간이 길어지자 기억이 흐려져 잊어버렸으며, 이 단락을 읽었지만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 부부는 대법을 수련한 지 20년이 되었다. 수련 전에 공장의 작은 책임자였고 말할 가치도 없는 짓을 저질렀다. 회계를 보았던 여자는 공금을 조금씩 빼갔으며, 남편은 공장의 노동자 식사대금에서 조금씩 떼어 십여 위안을 가로챘다. 그러나 대법을 수련한 후에도 줄곧 그것을 보충해 두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직접 당사자에게 전하기 어려우므로 그 돈을 중생구도를 하는 일에 써도 되는데, 본전에 이자를 포함해서 한 푼이라도 모자라서는 안 된다. 그들이 내놓긴 했지만 너무 적었는데, 관건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데 있었다. 후에 엄중한 병업을 얻었는데 어떻게 하든지 낫지 않았다. 그들과 교류했지만 그들은 그래도 속여서 방법이 없었다. 줄곧 병원에서 치료하며 원래 훔쳤던 돈까지 다 써버렸어도 낫지 않고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아주 많이 알려진 유명한 수련생이 병업으로 사망했는데, 그 중 한 가지 원인이 역시 그런 것이었음을 나는 보았다.
또 한 수련생은 대법을 수련한 후, 직무의 편리를 이용해 노동자 급식에서 몇 백 위안을 챙겼다. 젊은 수련생이었는데 병으로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정말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이 우주대법임을 알 수 있다면, 그래도 감히 대법을 위반할 수 있겠는가? 구세력은 이것으로 천벌을 주는데 누구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무릇 가지지 말아야 할 돈과 물건을 가진 수련생이 보충해놓지 않는 것은, 실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천법을 알면서 천법을 범하면 모두 병업이거나 기타 재난이라, 이런 돈을 모두 써 버리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에게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빚진 재물은 여전히 그대로 갚아야 하는데, 금생에 갚지 못하면 내세에 갚아야 한다. 당신이 말해보라, 금세에 갚지 않으면 또 어떻게 수련 성취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수련생에게 될수록 빨리 보충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원모양대로 보충하지 못하면 진심으로 참회하면서 원금과 이자를 합해 그 돈으로 사람을 구하는 대선의 일을 하라.
이는 단지 속인의 돈을 빚진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대법자원 상에서 문제가 나타났는데 문제가 곧 더욱 커진다. 어떤 사람은 여러 수련생이 사람을 구하려고 공동으로 모은 돈을 함부로 쓴다. 어떤 사람은 수련생의 돈을 빌리고 장기적으로 갚지 않아 수련생에게 생활의 곤란을 조성해 주었다. 어떤 수련생은 수련생의 돈으로 자기 생활을 하면서 수련생이 그 돈을 달라고 하면 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빌린 돈을 갚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을 수련하지 않는 자식에게 주어 쓰게 한다. 수련생은 모두 대법의 한 입자이므로 당신이 빌린 그 돈은 대법의 자원이 아닌가? 특히 정진하는 수련생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여유 있는 돈 전부를 사람을 구하는 대법 일에 쓴다. 이러한 죄업이 크게 되면 자식에게 물려진다. 자식이 만약 이런 돈을 쓴다면 장래 모두 천벌을 받게 되며, 많이 쓰게 되면 목숨을 거기에 내 놓아야 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또 이런 생각이 있다. “장래 내가 수련 성취하면 위덕으로 그들에게 갚겠다.” 장래 병업이 짓눌러 내려오면 그는 곧 넘어 갈 수 있겠는지, 수련 성취할 수 있겠는지를 알 것이다. 그가 위반한 것은 우주의 대법인데 어느 층의 하늘에서 그를 올라가게 하겠는가? 만약 반면으로 가서 수련하지 않는다면 그럼 죄는 더욱 커져 자손들에게 화가 미칠 것인데 영원히 인간에 교훈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세력은 줄곧 그들을 반면으로 밀어가려고 애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오직 진심으로 참회하고 착실하게 보충해야만 사부님께서 비로소 그에게 만회해 주신다. 얼마를 만회할 수 있는가는 전부 그의 마음과 행동을 보아야 한다.
16. 중요한 대법 일 맡으면 보험에 든 것으로 여겨
이런 사례는 국내외에 모두 있다. 그들은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숨기고 있다. 내가 이렇게 중요한 대법 실증 일을 맡고 있으니, 혹은 내가 우리 지역의 중요한 대법 자원을 배분하고 있으니, 또 혹은 우리 지역의 그처럼 많은 수련생들의 안전이 나에게 달려 있으니 사부님께서는 반드시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정말 큰 문제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나의 책을 손에 들고 거리를 걸어가면서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리(李) 스승님의 보호가 있으므로 자동차에 부딪힌다 해도 두렵지 않다. 이것은 대법(大法)을 파괴하는 것이며, 이런 사람은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진수(眞修) 제자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수련생들은 위의 법에서 말씀하신 사람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 심태는 큰 번거로움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한 아주 유명한 수련생은 병업의 박해로 세상을 떠났는데 주요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나는 그가 번거로움을 불러온 후에도 이런 마음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면서 마음속으로 ‘사부님께서는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기게 했을까?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건 교란이므로 발정념으로 없애야 한다. 그것은 나를 박해할 자격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안으로 찾지 않고 자신을 개변하지 않았는데 발정념을 한다 해도 그런 교란하는 사악은 낡은 우주의 이치에 의해 보호되고 있으므로 소용이 없었다. 없애버리지 못하자 사부님께 비는데 사실 그가 조금만 안으로 찾으면 사부님께서는 그를 도와주실 수 있었을 것이고 발정념도 작용을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입으로만 안으로 찾았으며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대법에 의심을 갖고 ‘너무 허황하게 말씀하셨고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그가 이런 마음을 줄곧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큰일을 하고 있으니 나는 대근기지인(大根基之人)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내가 수련을 잘했다고 하는데 나는 틀림없이 대근기지인일 것이다.’
사실 그의 법공부는 표면에 머물러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요 원인은 절의 대화상(大和尙)・주지화상(住持和尙)・방장(方丈) 등 이런 사람들이 꼭 대근기(大根基)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방장이 됐고 대화상이 됐지만, 그것은 속인 중의 직위에 불과하며 그 역시 수련 중의 사람으로서, 그는 다만 전업(專業)적일 뿐이다.”라고 하셨고 또 “이 학습반에서도 현재 자신이 괜찮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으며 그 말하는 태도마저 다르다. 자신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하는 이것은 바로 불교 중에서도 아주 꺼리는 것이다. 내가 방금 말한 이것 또한 한 가지 정황으로서, 이것을 자심생마라고 하며 또는 수심이화라고도 한다.”
그는 이런 마음을 버리지 않았는데 또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대근기지인인데 이런 병업도 넘어가지 못하고 상황이 반복되다니. 이 법이 그렇게 큰 위력이 없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되자 구세력은 그를 박해할 구실을 단단히 잡게 됐다. 나는 사부님께서 계속 막아주고 연장해 주시면서 그가 깨닫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런 마음을 설사 조금이라도 버리면 한 고비를 넘기고 다른 고비들을 나중에 넘을 수 있었는데 그는 갈수록 의심하면서 입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원망했다. 나중에 원신(元神)이 신체를 떠난 후에도 기회를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직 없어지지 않은 사상업에 가로막혔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구세력은 즉시 그를 ‘무형의 안개’ 속에 가두어 육신이 철저히 죽어버린 후에야 교란을 멈췄는데 명백해진 후에는 이미 늦었다.
17. 큰 난이 없는 수련생과 주위 수련생들을 병업 가상으로 생사를 고험
이런 상황도 국내외에 모두 있다. 해외에는 원래 그렇게 큰 난이 없다. 대륙에서는 주로 큰 난을 겪지 않은 수련생들을 겨냥한다. 구세력의 박해 구실은 병업이라는 큰 관으로 수련생들이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지 여부를 고험한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싱가포르법회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우리 극소수 수련생들이 세상을 떠났다. 어떤 이는 원만을 이룬 사람이고 어떤 이는 파괴한 사람이므로 나는 이 방면에 대한 입장을 표시하지도, 말하지도 않겠다. 그러나 그것의 출현은, 나는 우리 수련생에게는 생사고험이라고 여긴다. 당신의 몸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거의 당신 몸에 떨어진 것 같은, 당신의 느낌은 보증하고 이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생사 고비의 고험이다. 한 사람이 생사를 내려놓지 못하면 그는 절대 원만을 이룰 수 없다.”
때로는 수련생에게 눌러진 병업이 그다지 크지 않음에도 매우 심각한 것처럼 표현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가상이지만 당사자들은 미혹되는데 법리가 똑똑하지 못하면 정말 겁을 먹게 된다.
사실 이것도 정체에 대한 고험이므로 모두 바르게 깨닫고 모두 확고하면 매우 빨리 지나갈 수 있다. 가상이기는 하지만 방심할 수 없다. 이런 생사고험에서 당사자의 승화는 주위 수련생들을 이끌 수 있고, 주위 수련생들의 승화 역시 당사자를 이끌 수 있다. 그러므로 수련생들은 모두 안으로 찾고 모두 관을 넘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당신에게 또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게 만들어 주어, 이 공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수련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도대체 수련하여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당신으로 하여금 분간치 못하게 한다. 장래에 다시금 당신에게 이런 정황이 나타나게 할 것이며 당신에게 이런 착각을 조성해 주어, 당신으로 하여금 그가 마치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가짜처럼 느끼게 하는데, 바로 당신이 견정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 당신은, 당신이 꼭 견정불이(堅定不移)하다고 하는데, 이런 마음이라면 그때에 가서 당신은 정말로 견정불이할 수 있으며, 당신은 자연히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心性(씬씽)이 이미 제고되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당신은 그처럼 불안정한데, 만약 현재 당신에게 이런 마난(魔難)이 나타나게 한다면, 당신은 전혀 깨닫지 못하며 전혀 수련할 수 없다.”
가상의 고험은 정법 수련의 큰 관이다. 여러분은 밀레르빠의 수련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밀레르빠의 사부는 직접 각종 가상을 만들어 내어 그의 믿음을 고험했다.
많은 대륙 대법제자들은 모두 반복적인 생사고험에서 걸어오면서 반복적으로 자신을 성취했다. 하지만 압력이 그리 크지 않은 환경에서 구세력은 여전히 반복적인 병업 가상으로 수련생들에게 한번 또 한 번 이런 고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사실 모두 좋은 일이다. 반드시 바른 깨달음과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정과를 깨닫는 과정일 수 있다. 대도(大道)는 간단하고 쉽다. 그동안의 성과는 무의식중에 이런 데서 체현될 수 있다. 병업 때문에 법에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구세력에게 빈틈을 타게 된다.
18, 인생의 처지가 아주 순탄하고, 고생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하며, 고생을 겪는 내포를 이해하지 못해 작은 난이 큰 고비로 되다.
큰 고생을 겪어보지 않으면 고생을 견디는 능력이 안 된다. 이러한 수련생은 대법 수련 중의 고생을 겪는다는 내포를 깊이 이해하기는 아주 어렵고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정진요지-경지)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하신 말씀 “心性(씬씽)은 德(더)[德(더)는 일종 물질이다]를 포괄하고; 참음(忍)을 포괄하며; 깨달음(悟)을 포괄하고; 버림(捨)을 포괄하는데, 속인 중의 각종 욕망과 각종 집착심을 버리는 것이며; 또한 고생을 겪을 수 있어야 하는 등등 여러 방면의 것을 포괄한다.”를 읽기도 했지만 얼마 안 지나면 고생을 겪는 것 역시 씬씽의 중요한 부분임을 잊어버린다.
나는 이러한 수련생을 보았다. 비슷한 병업 현상이 나타났을 때 다른 수련생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여전히 법 공부, 연공을 견지하면서 버텨 2, 3일이면 곧 지나가 버렸지만, 그녀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거나 누워 있으면서도 책을 보지 못하고 그저 법을 듣기만 한다(정신은 쉴 새 없이 다른 데 가 있다). 열흘, 반달씩 끌다가 나중에는 견뎌냈다. 하지만 이 부분 병업을 소멸했으나 사상은 승화되지 못했고, 고생을 낙으로 삼는 경지와는 반대로 멀어졌다. 여전히 고생에 부딪히면 원망심이 생기고, 고생 중에 위덕을 쌓는 것을 교란으로, 박해를 받는 것으로 여겨서 심성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다음번에 똑같은 마난이 또 오고, 쌓일수록 커져서 나중에는 작은 고비가 큰 고비로 되어 버린다.
고생을 참으며 고비를 넘지만 심성을 제고하지 않는 이런 방법은 과거의 세간소도와 같은 것이지 직지인심인 대법수련이 아니다. 고생을 견디지 못하는 그녀의 이런 마음은 세간소도보다도 못하고 법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수 없으며 장기간 감성적 인식에 머물러 있게 된다.
고생을 견디지 못하는 이런 사람(수련하지 않는 속인도 마찬가지)의 가장 직접적인 후과로는 바로 자신의 아이를 응석받이로 나쁘게 키우고 심지어 어린이 제자를 망치게 된다는 것이다.
19, 지나치게 자식의 응석을 받아주고 귀여워하는 중, 노년 수련생
최근 듣자니 한 중년 수련생이 병업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구세력이 그녀를 박해한 구실을 보여주셨다. 그 중 한 가지가 놀랍게도 지나친 사랑 때문에 대법제자를 망친 것이었다.
수련생이 자세하게 그녀의 상황을 소개했다. 나는 들으면서 추적조사를 해보았다. 이 문제가 비교적 전형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아주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앞으로 더 깊은 교류를 할 것이지만, 여기서 먼저 간단히 언급하겠다.
그녀의 딸은 근기가 아주 좋아 인간에 와서 법을 얻고 정과를 얻을 그런 사람이었다. 전형적인 표현으로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 학업을 팽개치고 엄마에게 이끌려 천안문에 가서 대법을 실증하였던 것이다. 그녀도 큰 고생을 겪었고, 가정환경이 부유하지 않아도 그녀는 될수록 딸을 고생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부님이 ‘전법륜’에서 하신 “누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서, 부모에 대해, 자녀에 대해서도 모두 잘 대하고,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말씀을, 아이를 고생시키지 않고 손해 보지 않게 하는 게 아이에게 좋은 것으로 이해했다. 하여 곳곳에서 아이를 고려하고, 될수록 아이의 요구를 만족시키면서 무엇을 요구하면 될수록 만족시켰다. 자신은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아이만큼은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했다. 기점이 속인의 가장 차한 지나친 사랑의 경지(속인은 아이를 받들어 키우는 것은, 아이를 해치는 것과 같다고 한다)에 있었고, 고층차에서 보면 바로 좋고 나쁨을 가리지 못했다. 아이는 ‘홍음’ 중의 ‘고생을 낙으로 삼다’를 외웠지만 겨우 입으로만 이해했을 뿐 동화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해서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양성해 낸 아이는 무엇을 하고 싶으면 무엇을 하고야 마는데 제멋대로다! 어렸을 때에는 ‘홍음’을 외울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어려서부터 먹기를 좋아하고 노는 것을 탐했으며, 게으르고 향수를 누려 커서는 이제 수련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고생을 너무 크게 겪는다면 당신은 곧 수련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조그마한 고생이고 작은 업력 덩어리이지만 이런 아이들로 말하면 바로 큰 고생인데 어찌 수련하겠는가? 하물며 그녀는 병업으로 사망했으니 아이에게 심리장애를 조성한 것이다. 금세에 이 아이가 다시 대법으로 들어가기가 너무너무 어려운 것이다. 이후의 환경은 그렇게 큰 압력이 없을 것인즉 돌아갈 조건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큰 대근기의 각자가 이처럼 사람 중에서 망가지게 됐으니 죄업이 크지 않는가? 실제로는 수련생을 망가뜨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지 ’선‘이란 방법을 썼을 뿐이지만 이런 ’선‘은 조금 높은 경지에서 보면 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아주 정진하던 어린이 제자가 크니까 정진하지 않으면서 수련하는 둥 마는 둥했다. 심지어 법 공부도 연공도 하지 않는데 모두 수련생들의 속인 관념의 오염으로 초래된 것이다. 가정환경이 보통인 수련생에게는 이런 상황이 비교적 적고 가정환경이 부유한 수련생에게 비교적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많은 중, 노년 수련생은 자녀를 응석받이로 키우고도 자신은 승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법에 대한 이해가 속인에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표준을 가늠하는 것도 속인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법 공부하고 정진한다는 것은 형식일 뿐이고, 법리적으로 정진하지 못하고, 이성적으로 승화하지 못하며, 자신의 병업도 수차례 되풀이 된다. 게다가 어린이 제자를 잘 이끌지 못한 죄과로 병업은 정말로 넘기 어렵다. 반드시 속인의 관념을 근본적으로 개변하는 게 비로소 수련이다.
20. 노 수련생의 각종 욕망이 장기적으로 버려지지 않아 안일심을 자양했으나 각종 구실로 덮어 감춰
수련으로 말하면 색욕은 가장 주요한 고비다. 이것은 수련생들이 교류를 많이 했으므로 여기에서 다시 말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욕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속인 중의 각종 욕망과 각종 집착심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많은 노 수련생은 읽기는 했는데 자신과 대조하지 않는다.
맛있는 것을 먹기 좋아하고, 듣기 좋은 것을 듣기 좋아하고(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만 들으려 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교란이라고 여김), 속인 중에서 보기 좋다고 여기는 것을 보기 좋아하며, 물질 향수를 좋아하고, 돈 쓰기 좋아하는 등, 실은 이 모두가 속인의 욕망이다. 그러나 이런 수련생은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 욕망에 습관이 되어 갈수록 안일심을 자양하고도 느끼지 못한다.
사실 이런 수련생은 정진하는 수련생의 집에 가 보라. 자신이 만약 이런 환경에서 생활하고 수련한다면 자신은 견뎌낼 수 있겠는지를 보라. 사부님께서는 ‘미국법회 설법’에서 말씀하셨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라면 당신은 곧 이 한 관(關)을 넘긴 것이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를 해낼 수 있는가? 더 부유한 수련생 가정환경에서 부러워하지 않음도 해 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가정환경이 못한 수련생의 환경에서 장기적으로 이 점을 해 낼 수 있는 것도 버리는 게 아니겠는가? 그래도 즐겁고 기쁘게 정진할 수 있는가? 해 낼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것이다. 물질 향수 이 관을 당신은 정말로 넘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수련생은 해내지 못했다. 생활 표준을 조금 낮추니 먹는 문제에서 모두 견뎌내지 못하고, 시간이 길어지면 기타의 것도 다 견뎌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안일심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교훈이 있다. 한 수련생은 원래 아주 고생을 즐겁게 겪었고 육신은 고생스러운 수련을 거쳐 정백체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에 환경이 크게 바뀌고 압력이 없어졌으며 생활도 좋아지자 안일심이 조금씩 자양되기 시작했고 각종 욕망도 올라왔는데 이런 욕망이 올라오자 심성은 곧 떨어졌다. 지금은 고생을 할 수 없고 고생만 하면 괴로워지고 신체도 따라서 나빠져 시커멓게 되고 병업도 나타났다. 오히려 수련에 신심을 잃게 됐다. 왜냐하면 더는 고생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21. 작은 울타리에서 수련하고 정체 협력에 용해하지 않으며, 인터넷 교류를 보면서도 자신을 그 중에 용해시키지 않는다.
어떤 수련생은 자기와 마음 맞는 작은 울타리에서만 수련하면서 현지의 정체 협력에 용해하지 않아 자신에게 병업이 있어도 장기적으로 넘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수련생이 와서 교류하지도 못하게 하는데 정체 협력에서 자발적으로 떨어져 나간 것과 같다. 이럴수록 병업은 더욱 넘지 못하고 한 번을 겨우 넘기면 다음번에 또 온다. 법리상에서 근본적인 승화가 없고 심성에는 근본적인 개변이 없으니 관을 전혀 넘지 못한다.
한 수련생은 밍후이왕의 교류 문장을 보고 확실히 자신의 부족함을 찾아냈다. 하지만 자신의 방법상 차이와 심성 표면의 차이만 보았을 뿐이다. 사실 만약 자신을 그런 교류문장 속에 용해시킨다면, 자신이 만약 그런 마난에 처했다면 자신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일까? 어떤 때에 견디기 어려울까? 어떤 염두가 나올까? 무엇 때문일까 등을 생각할 것이다. 이러면 자기 심층의 집착심이 폭로될 것인데 그것들을 일일이 제거해 보라. 이렇게 수련생의 심득을 보면 마치 자신이 똑같은 관, 난을 넘는 것과 같이 직지인심이 되며 그런 마음을 버리면 제고가 무척 빠를 것이다.
사실 장기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다고 스스로 여기는 수련생은 인터넷에서 정진하는 그런 수련생처럼 해보라. 이것은 인위적으로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보기를 찾는 것도 아니다. 이건 ‘비학비수’(홍음-착실한 수련)로서 하기만 하면 당신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인데, 다른 사람의 고생을 당신이 견딜 수 없다는 것에서 많은 집착심이 폭로돼 나올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아내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한다”를 해 보라. 꼭 될 수 있다. 우선 당신의 고생을 겪는 능력이 제고되면 심성 자체도 제고될 것이고 법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있을 것이며 수련에서 경지의 돌파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서서히 정체에 용해되어 승화 중에 있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피차 이끌며 승화하는 중에서 또 주의해야 할 것은, 절대로 서로 간에 깔보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을 깔보는 것은 자신을 깔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정체로서 피차 포용하는 마음이 홍대해야 한다. 그는 당신 세계의 일부분이고 당신은 그의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것처럼 당신 가운데 내가 있고 내 속에 당신이 있다. 우주의 구조는 실은 이러한데 그는 바로 당신의 좌우 양손과 같다. 가령 이러한 정체를 형성할 수 있다면 구세력 스스로 탄복하며 물러설 것이다. 여러분의 일체에 용해됨에 영향 주는 어떠한 관념, 피차의 어떠한 관념이든 모두 구세력이 박해를 가중하는 빌미가 될 것이다.
대법의 매 입자는 정말로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여 갈래 맥이 한데로 이어지게 하여, 맥이 없고 혈(穴)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정체 협력이 이런 정도에 도달할 수 있다면 사악이 ‘정곡을 찌르려’ 해도 찌를 수 없을 것이며, 박해도 절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개인마다 자아를 내려놓고, 사심을 내려놓으며, 관념을 내려놓고 공동 노력할 것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병업 속에 있는 수련생은 어떤 사람은 원인이 모두 다방면인데, 어떤 사람은 위에서 말한 문제의 거의 절반을 포괄해 이젠 아주 위험하다. 그렇게 큰 누락을 더 이상 마음을 활짝 열지 않고 단단한 결심을 내리지 않고 바로 잡고 보완하지 않는다면 남들이 아무리 도와준다고 해도 쓸모없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홍음2-사도은’에서 말씀하셨다. “제자가 정념이 족하면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 마음속으로 정말로 인식할 수 있고, 정말로 할 수 있으며, 정말로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이러한 큰 고비는 꼭 넘길 수 있다.
사실 이런 병업은 모두 예전에 고비를 질질 끌며 넘었거나 심성관을 넘지 못해 쌓인 것이며, 잘못에 또 잘못을 저질러 날이 가면서 쌓여 큰 고비로 된 것이다. 이런 교훈은 다른 수련생의 거울로 되기에 충분하다.
이상은 개인의 체득으로서 타당하지 못한 곳은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끝)
문장발표: 2014년 10월 2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0/24/2992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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