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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10. 금전비승(金殿飛升)

민간에서 장삼풍의 성망이 널리 퍼지고 신기한 신선의 자취가 알려지자 백성들은 가가호호(家家戶戶) 그를 살아있는 신선으로 여기게 되었고 천자마저 진동시켰다.

《장삼풍전집》의 기록에 따르면 명 태조 때부터 장삼풍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홍무(洪武) 17년 갑자년 여름 황제가 옛 원나라의 은퇴한 137세 노인이자 무당산 은사 장삼풍을 부르는 조칙을 내렸지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홍무 18년 봄 장삼풍의 제자 심만삼과 구원정을 통해 다시 무당산 은사 장삼풍을 불렀지만 역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홍무 24년 여름 정일사교도합무위천조광범대진인(正一嗣教道合無爲闡祖光範大真人)이자 당시 도교 업무를 총괄하던 장우초(張宇初)가 무당산 은사 장삼풍을 불렀지만 그는 시종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락(永樂) 연간에 시독(侍讀) 호광(胡廣)이 장삼풍이 도법(道法)에 조예가 깊다는 상주문을 올리면서 그가 지은 《첩요편(捷要篇)》을 황제에게 바쳤다. 비록 그 내용이 오묘하고 심오해서 측량할 수는 없었지만 현기(玄機)를 내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 호영(胡濴)은 일찍이 장삼풍과 안면이 있었다. 이에 영락제는 장삼풍의 높은 기상과 고상한 절개를 흠모해 호영에게 명을 내려 천하를 두루 다니며 은사 장삼풍을 찾아보게 했다.

호영이 5년이 넘도록 도성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영락제는 장삼풍을 보고 싶은 마음을 늘 잊지 않았다. 영락제는 속으로 삼풍의 운거(雲車 역주: 신선이 타고 다니는 구름 수레로 여기서는 장삼풍의 자취를 의미)는 정해진 곳이 없지만 언젠가는 무당산에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이에 장삼풍의 제자 손벽운(孫碧雲) 등을 무당산으로 보내 그를 기다리게 하고 또 친서를 내려 뵙기를 청했다.

영락제는 편지에서 “오랫동안 진선(眞仙)을 앙모해 왔으며 친히 의범(儀範)을 받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서 “만물을 초월해 자연과 합체한” 장삼풍의 흉금을 앙모했다.

“짐이 오랫동안 진선(眞仙)을 앙모해 직접 의범을 받들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일찍이 향과 친서를 지닌 사자를 파견해 명산을 두루 다니며 경건히 청하게 했습니다. 진선께서는 도덕이 숭고하고 만물을 초월해 자연과 하나가 되셨으니 신묘하기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짐은 재질이 소략하고 용렬하며 덕행이 얕지만 지성으로 뵙고 싶은 마음을 밤낮으로 잊은 적이 없습니다. 삼가 다시 사자를 파견해 향과 서신을 바치며 경건하게 청합니다. 구름수레와 학가마를 타고 은혜를 베풀어 강림하시길 두 손 모아 기다리며 간절히 앙모하는 짐의 마음을 부칩니다.”

(朕久仰真仙,渴思親承儀範。嘗遣使致香奉書,遍詣名山虔請。真仙道德崇高,超乎萬有,體合自然,神妙莫測。朕才質疏庸,德行菲薄,而至誠願見之心,夙夜不忘。敬再遣使,謹致香奉書虔請。拱候雲車 鶴駕,惠然降臨,以副朕惓惓仰慕之懷)

영락제는 “안거(安車 귀인을 모시는 특별 수레)로 맞이하도록 초청”했는데 그 성실한 뜻과 지극한 예의는 고금에 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장삼풍은 모습을 감춰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회시(回詩) 한 수를 제자 손벽운을 통해 영락제에게 바치게 했다. 시에서 그는 성조께선 본래 “복덕(福德)이 무한하시니” 유일한 바람이라면 폐하께서 “마음을 맑게 다스리시며 아울러 욕심을 막고 덕을 숭상”하시는 것이라 했다. 또 장생의 비결은 바로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줄임’에 달려있다고 했다.

《영락황제께 답하다(答永樂皇帝)》

“황제 폐하께서는 복덕이 무한하십니다. 신은 본래 시골 촌뜨기로 지금 시국에 이로움이 없음에도 폐하의 편지를 받는 은혜가 여러 차례 태화산에 내려오고 수레와 말이 자주 달려 원숭이와 학도 놀랄 지경입니다. 엎드려 폐하께 바라옵건대 부디 마음을 맑게 하여 다스리시며 욕심을 누르고 덕을 숭상하시면 백성에게 복이 되고 주상께도 복이 되며 백성이 장수하고 주상께서도 장수하실 겁니다. 방사(方士)들의 금석(金石 역주: 연단에 사용하는 광물성 약재)은 믿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삼가 시 한 수를 바치오니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따로 부친 3장의 노래는 모두 산에 사는 사람이 욕심을 없애고 몸을 닦는 도리이니 이상한 술법으로 여기지 않으신다면 신의 행운이겠습니다.”

땅과 하늘이 교태해 변화의 공을 이루면
조야(朝野)가 모두 편안하며 치도(治道)가 형통하리.
황극전(皇極殿) 속의 용호(龍虎)는 고요하고
무당산 구름 밖 북과 종소리 맑구나.
신은 초야에 거주해 본래 쓸모없사오니
폐하께서 나무꾼에게 물으심에 의미가 있으리라.
감히 미언(微言)으로 성스런 덕을 수고롭게 한다면
마음 맑히고 욕심 줄이는 게 장생입니다.

地天交泰化功成(지천교태화공성)
朝野咸安治道亨(조야함안치도형)
皇極殿中龍虎靜(황극전중용호정)
武當雲外鼓鍾清(무당운외고종청)
臣居草莽原無用(신거초망원무용)
帝問芻蕘若有情(제문추요약유정)
敢把微言勞聖聽(감파미언노성청)
澄心寡欲是長生(징심과욕시장생)

천기는 가벼이 누설할 수 없사오나
지금은 오히려 맹렬함이 부족할까 걱정입니다.
온갖 마난에 고생스럽고 힘들어도
제가 지금 전하는 건 천지와 통합니다.
폐하께선 저를 찾아 금단(金丹)을 물으시지만
조사께서 남기신 성 장생의 비결입니다.
장생의 비결이 어떠한지 말씀드리자면
도덕이 가득하고 성대함이 좋은 계책입니다.
욕심 줄이고 마음 맑히며 생각을 담담히 하신다면
신선에 어디 특이한 공부가 있겠습니까?

天機不肯輕輕泄(천기불긍경경설)
猶恐當今欠猛烈(유공당금흠맹렬)
千磨萬難費辛勤(천마만난비신근)
吾今傳與天地脈(오금전여천지맥)
皇帝尋我問金丹(황제심아문금단)
祖師留下長生訣(조사유하장생결)
長生之訣訣何如(장생지결결하여)
道充德盛即良圖(도충덕성즉양도)
節欲澄心澹神慮(절욕징심담신려)
神仙那有異功夫(신선나유이공부)

나중에 성조 영락제는 무당산을 대대적으로 수리해 진무대제(真武大帝)를 위한 제례를 올렸다. 또 ‘우진궁’을 건립해 장삼풍의 상을 만들어 제사를 모셨다. 영락 14년에는 상서(尙書) 호광(胡廣)에게 명령해 계속해서 장삼풍을 찾고 방문하게 했다.

어느 날 호광이 한밤중에 무당산에 올라 향을 사르고 눈물을 흘리며 장삼풍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장삼풍이 그의 간절함을 보고는 미리 몸을 날려 도성으로 갔다. 마침 성조가 조회 중이었는데 장삼풍을 보고는 웃으며 도에 관해 물었다.

장삼풍은 방도구진주천애(訪道求真走天涯--도를 찾고 진인을 구해 하늘 끝까지 가다)란 노래를 한곡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태연하게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순식간에 상서로운 채색 구름이 전당에 가득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흩어졌다. 장삼풍이 몸을 날려 떠나니 황제와 신하들이 그 기이함을 찬탄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정말 진짜 신선이 있음을 믿게 되었다.

나중에 명나라 천순(天順) 3년 영종(英宗)이 평소 도덕지사를 공경하자 장삼풍이 그의 정성을 보고 궁궐에 몸을 드러내 알현했다. 이때 장삼풍의 모습은 보라색 얼굴에 창처럼 기른 수염, 머리 뒤까지 늘어뜨린 상투가 마치 현무(玄武)의 모습과 같았다. 배는 불룩하고 어깨가 두꺼우며 허리에 삿갓을 끈으로 매달고 왔다. 영종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신 삼풍은 폐하께서 자신을 닦고 남을 편안히 하시며 사(邪)를 물리치고 정(正)을 숭상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곧 사라져버렸다. 이에 영종이 친히 글을 지어 그를 ‘통미현화대진인(通微顯化大真人)’에 봉했다.

“하늘을 받들어 천운을 이은 황제가 지어서 말하노라. 짐은 선풍도골(仙風道骨)로 천지의 진원(真元)을 얻어 비밀스런 전적과 신령한 문장으로 음양의 정기(正氣)를 수집하길 원했노라. 장생구시(長生久視 장생술)의 술을 돌아보며 초범입성(超凡入聖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경지에 들다)의 공을 이뤘도다. 이 넓은 세상에 한번 만남은 기적처럼 드문 일이다. 그대 장삼풍 진인은 자태가 아름답고 기이하며 고상한 뜻이 홀로 드높았도다. 선록(仙籙 신선의 책)의 비결을 얻고 금정(金鼎)의 영고(靈膏 신령한 고약)를 먹었노라. 순간에 오고가니 실로 조화의 기틀을 얻었도다. 숨고 나타남이 은미하여 건곤(乾坤)의 오묘함에 부합하노라. 이에 특별이 그대에게 통미현화진인을 수여하고 고명을 주어 찬양하노라.”

(《명천순황제칙봉고명(明天順皇帝敕封誥命)》)

또 명 헌종(憲宗) 성화(成化) 연간에 불도(佛道) 양교의 무리들이 멋대로 황명을 훔쳐 작위를 봉하고 불법을 저질렀다. 헌종이 이를 싫어해 과도관(科道官 역주: 명청대 감찰어사)의 상주를 구실로 마침내 승려와 도사들에게 내린 국사 및 진인의 호칭을 없애버렸다. 성화 22년 봄 장삼풍의 뛰어난 풍모와 절개를 표창하기 위해 헌종은 특별히 삼풍을 ‘도광상지진선(韜光尚志真仙)’에 봉했다.

“성화 22년 봄 조칙을 내려 특별히 태화산 은사 장삼풍을 ‘도광상지진선(韜光尚志真仙)’ 주전(周顛)을 ‘선유보화진선(宣猷輔化真仙)’에 봉했다.”(《장삼풍전집 은경편년(隱鏡編年)》)

명나라 가정(嘉靖) 42년 세종(世宗)이 만년에 밀종(密宗)을 아주 좋아했는데 장삼풍이 남경에 출현했다는 것을 알고는 장삼풍의 저작을 전부 찾아오게 했다. 《현요편(玄要篇)》을 읽고는 “우리나라의 진짜 신선이로다(我朝真仙也).”라고 찬탄했다. 이에 장삼풍을 ‘청허원묘진군(清虛元妙真君)’에 봉하고 아울러 장삼풍이 살던 곳에 청허관(清虛觀)을 지어 장삼풍을 제사지내게 했다.

천계(天啟) 3년 명나라 희종(熹宗)이 일이 많은 관계로 궁궐에 단을 설치하고 신선을 찾았는데 홀연 붉은 빛이 자리를 덮고 빛 속에서 장삼풍의 진용(眞容)이 드러났다. 황제가 고개를 숙이고 “진선께서 나를 가르치시고 진선께서 나를 보호하신다(真仙教我,真仙護我)”라고 했다. 내린 말씀이 아주 은밀했는데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황제가 감탄하고는 장삼풍을 ‘비룡현화굉인제세진군(飛龍顯化宏仁濟世真君)’에 봉했다.

명나라와 청나라 4백년 간 장삼풍 진인의 신적(神跡)이 끊어지지 않았고 대명(大明) 황제들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장삼풍을 찾았다. 또 매번 교서를 내리고 작위를 더했으며 도가의 궁관(宮觀)을 수리하고 건축했다.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도(道)를 숭상하는 최고봉을 이뤘으며 체계적인 대명현교(大明玄教)를 형성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166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9. 무당 예언

“무당(武當)의 옛 이름은 태화(太和)인데 현무(玄武)가 아니면 감당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무당이라 한다. 8백여 리에 걸쳐 우뚝 선 72개의 봉우리와 36개의 기이한 암석 및 24개의 그윽하고 깊은 골짜기가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천주(天柱)라 한다.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곳은 자소(紫霄)이며 남쪽 바위 위에는 운무가 서려 있고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청허동천(清虛洞天)을 뛰어넘고 심요복지(深窅福地)를 능가한다.”

이 글은 명나라 영락제의 《어제대악태화산도궁지비(禦制大岳太和山道宮之碑)--황제께서 지으신 대악태화산 도궁의 비》에 나오는 무당산(武當山)에 대한 표현이다.

무당산의 옛 이름은 태화산으로 하늘의 28수 중 ‘익(翼), 한(翰), 각(角), 항(亢)’ 네 별에 해당하며 땅에서는 균주(均州 지금의 호북성) 남쪽에 해당한다. 도가(道家) 동천복지의 하나로 팔괘(八卦)에서는 태괘(兌卦)의 위치에서 발원한다.

“만 리에 걸쳐 돌아가는 모습이 마치 지축(地軸)과 천관(天關)의 모습을 닮아 지세가 웅장하고 아름다워” 현무(玄武 역주: 진무대제를 지칭)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무당이라고 했다. 현대어로 해석하자면 바로 진무대제(真武大帝)만이 이 산을 누르고 천관지축을 안정시킬 수 있는 위덕을 지녔다는 뜻이다.

무당산에는 72개 봉우리와 36개의 기암절벽, 24개의 깊고 그윽한 골짜기가 있다. 가장 높은 곳은 천주봉이고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자소봉인데 남쪽 바위 위에 구름과 안개가 걸려 있고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다. 때문에 ‘항고(恆古)에 둘도 없는 절경이자 천하제일 선산(仙山)’이라 불린다.

진무신(真武神 현무대제)이 태화산에서 도를 닦아 진인(真人)으로 성취된 이래 태화산은 도가 수련의 승지(勝地)가 되었다. 주(周)나라 때 함곡관 관령(關令) 윤희(尹喜)는 자색 기운이 동쪽에서 오는 것을 보고 노자의 오천언(五千言 《도덕경》을 가리킨다)을 얻은 후 무당 삼천문석벽(三天門石壁) 아래에서 은거해 도를 닦았기 때문에 이곳을 은선암(隱仙岩)이라 부른다.

한 무제 때는 장군 대맹(戴孟)을 시켜 무당산에 들어가 약을 채취하게 했는데 대맹이 ‘관직을 버리고 도를 배워’ 나중에 백일비승(白日飛昇 역주: 대낮에 하늘로 날아올라갔다)했다. 또 팔선(八仙) 중의 여동빈은 늘 무당에서 노닐었는데 자기봉(紫氣峰)에 머물며 수련했다.

당 태종 정관(貞觀) 연간에 큰 가뭄이 들자 태종이 균주(均州)태수 요간(姚簡)을 무당산에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그러자 오룡(五龍)이 신령한 모습을 드러내더니 감로 같은 단비가 내렸다. 이에 태종이 어지를 내려 오룡사(五龍祠)를 짓게 했다. 요간은 나중에 온가족을 데리고 무당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도를 닦았다.

송나라 때는 유명한 도사 진단(陳摶)이 무당산 구석애(九石崖)에 은거했다. 명나라 때 임자원(任自垣)이 편찬한 《칙건대악태화산지(敕建大岳太和山志)》에는 “황로(黃老 황제와 노자)가 가르침을 편 이래로 신선과 지인(至人)이 많이 머물렀다.” “양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을 숨기고 시일(時日)을 감췄다. 산이 깊지 않고 숲이 빽빽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으며 오직 한가한 이름이 사람들의 귀에 들릴까 두려워했다. 이 산에서 도(道)를 실증하고 진인(真人)이 되어 올라간 사람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다만 시간이 오래되었고 여러 차례 겁화(劫火)를 거쳤기 때문에 대부분 그 이름을 잃어 버렸다.”라고 했다.

즉 역사가 오래되고 각종 재난과 겁화로 인해 무당산에서 수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남겨지진 못했다. 단지 우뚝한 저 무당산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를 이루고 진인이 되어 올라갔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장삼풍은 원나라 진종 태정(泰定) 갑자년(1324년)에 무당산에 처음 왔다. 그는 “열 달 만에 공(功)을 이뤄 성태(聖胎)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는데 바로 자신의 몸 안에서 수련을 통해 ‘원영(元嬰)’이 나왔다는 의미다.

옥허궁(玉虛宮) 앞 고목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금단(金丹)을 아홉 번 돌려 대도(大道)를 이뤘다. 이때 남긴 시가 《은거음무당남암중작(隱居吟武當南岩中作)--무당산 남쪽 바위에 은거하면서 읊다》이다.

《은거음무당남암중작(隱居吟武當南岩中作)》

은자 장삼풍을 누가 찾을 수 있으리?
아홉층 구름바위 깊고 또 깊은데
막막한 소나무 연기는 먹 없는 그림이요
졸졸대는 계곡물은 현(弦) 없는 금(琴)이로다.
검은 원숭이 나를 따라 속세 근심 소멸하고
흰 학은 사람에 붙어 도심(道心)을 감추누나.
저 황관(黃冠 도사의 관)이 부귀 쫓음 비웃나니
아울러 날 알아주는 이 하나 없구나.

三豐隱者誰能尋(삼풍은자수능심)
九室雲岩深更深(구실운암심경심)
漠漠松煙無墨畫(막막송연무묵화)
淙淙澗水沒弦琴(종종간수몰현금)
玄猿伴我消塵慮(현원반아소진려)
白鶴依人穩道心(백학의인은도심)
笑彼黃冠趨富貴(소피황관추부귀)
並無一個是知音(병무일개시지음)

도를 이룬 후 장삼풍은 자유자재로 자취를 바꾸며 마음껏 노닐었다. 보계 금대관에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원나라가 곧 끝나고 명나라의 대운이 도래할 것을 미리 예견하기도 했다. 또 명나라 홍무 초년에는 무당산에 모습을 다시 나타냈다.

《대악태화산지》에는 장삼풍이 천주봉에서 현제(玄帝)를 참배하고 여러 봉우리들을 두루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산속의 한 노인에게 “이 산이 나중엔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또 제자 구현청(丘玄清)을 오룡에 머물게 하고 노추운(盧秋雲)을 남암(南岩)에 머물게 했으며 유고천(劉古泉), 양선징(楊善澄)을 자소봉에 머물게 하고 “가시나무를 없애고 기와와 자갈을 모아” 나중에 크게 번창할 것을 대비해 기초를 만들게 했다.

장삼풍 자신은 또 전기봉(展旗峰) 북쪽 근처 복지(福地)를 택해 오두막을 짓고 현제를 공양하는 향불을 올렸다. 이곳을 ‘우진궁(遇真宮)’이라 불렀다. 명나라 영락 10년 이곳을 개축해 옥허궁(玉虛宮)이라 했다.

장삼풍은 또 황토성(黃土城)에 복지(福地)를 골라 초막을 지은 후 ‘회선관(會仙館)’이라 했다. 영락제 때 이곳이 우진궁으로 개축되었다. 홍무 22년(1389년) 장삼풍이 소매를 떨치고 멀리 떠난 이후 어디로 갔는지 향방을 모른다.

장삼풍은 무당산에 서운려(棲雲廬), 아미산에 유월려(留月廬)란 오두막이 있었는데 옛 초(楚)나라 지역과 촉(蜀) 땅을 자주 오고가곤 했다. 나타날 때면 청란(青鸞 푸른 난새)를 타고 만 리를 갔으며 들어갈 때는 흰 구름 속으로 사라지며 천지에서 대도(大道)를 행했다.

초와 촉 지역을 자주 왕래하면서
두 명산(名山) 오두막에 편히 누웠네.
고요함 속에 움직임 있으되 고요함이 아니고
한가함 속에 편안하니 곧 한가함이라.
오직 천궐(天闕)에서 자색 편지 내리길 기다리며
단(丹)의 구결 세밀히 연마하며 인간세상 제도하네.
밤에 무당산에서 아미산 달을 마주하니
제자들 이미 폐관에 들어간 것 아득히 떠오르네.

楚蜀頻來自往還(초촉빈래자왕환)
結廬高臥兩名山(결려고와양명산)
靜中偶動仍非靜(정중우동잉비정)
閑裏能安乃是閑(한리능안내시한)
只候紫書來闕下(지후자서래궐하)
細研丹訣度人間(세연단결도인간)
武當夜對峨眉月(무당야대아미월)
遙憶吾徒己閉關(요억오도이폐관)

《내가 다년간 산수를 유람하면서 뜻을 둔 곳은 촉의 아미산과 초의 무당산으로 각각 초막을 짓고 왕래하며 머물렀다. 나서면 청색 난새를 타고 만 리를 가고 들어서면 백운 속으로 사라졌다. 맑고 아름다운 저녁에 무당산 서운려에서 아미산 유월려를 바라보며 이 시를 짓는다(余閱山水多年所嘗留意者蜀之大峨楚之武當因各構一廬爲往來棲真之所出則青鸞萬裏入則白雲一窩佳夕澄清在武當棲雲廬望大峨留月廬作此)》

장삼풍이 무당산에 있을 때 또 납탑도인(邋遢道人)으로도 불렸다. 그는 날씨가 추우나 더우나 상관없이 오직 한 벌의 가사와 도롱이만 입었는데 때로는 며칠에 한 끼만 먹었고 때로는 수개월간 아예 먹지 않았다. 한번 읽은 책은 잊지 않고 전부 기억했다. 노니는 장소는 일정하지 않아서 혹은 하루에 천리를 갈 수 있다고 했다. 해학을 좋아해서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당시 시골 사람들은 이 늙은 도인을 맹수가 물어가거나 맹금류가 채가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랍고 기이하게 여겼다. 이때 장삼풍은 이미 120세에 달했지만 산을 오를 때는 나는 듯이 가볍고 민첩했으며 한겨울에 눈 속에 누워도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과연 장삼풍의 예언대로 명나라 영락 연간에 성조(成祖)는 무당산에 백만의 자금을 투입해 대대적인 토목공사에 나섰다. 당시 공사에 동원된 일꾼과 장인이 30만 명에 달했고 14년간 9개의 궁과 8개의 관 등 33개의 건축물을 완성했다. 무당산은 또 ‘태악(太嶽)’, ‘치세현악(治世玄嶽)’에 봉해졌고 ‘황실가묘(皇室家廟)’로 존중되어 대명(大明) 도교의 제일 명산이 되었다. 무당산은 또 진무대제를 위한 최대의 도량이 되었다.

영락 10년 성조는 장삼풍의 제자 손벽운(孫碧雲)을 시켜 무당산 4곳을 답사하고 측량해 규정을 만들고 건설공정을 기획하게 했다. 나중에는 또 손벽운을 대성남암궁(大聖南岩宮) 주지로 삼았다.

영락제는 정일(正一) 허현자(虛玄子) 손벽운에게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짐은 진선(眞仙) 장삼풍 스승님의 도덕이 숭고하고 신령한 조화가 현묘해 모든 것을 초월하고 고금에 으뜸임을 존경하고 앙모하여 뵙고 싶은 마음이 갈수록 더 간절하다. 사자를 시켜 공경하게 향서(香書 향기 나는 서찰)를 받들고 사방을 찾아다니길 여러 해가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이루지 못했다. 짐이 듣자하니 무당산에서 진인을 만났는데 실로 진선(眞仙) 스승님이었다고 한다. 진선 스승님께서 학을 몰고 다니시는 곳이니 공경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도량을 창건해 경앙하고 흠모하는 정성을 펼치고자 한다. 너는 그 땅을 잘 살피고 넓고 좁은 것을 헤아려 규정을 정하되 모든 것을 들은 대로 하라. 짐이 장차 길일을 정해 건물을 지을 것이다. 너는 마땅히 짐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전력을 다해 서로 협력하는 공을 이뤄야 한다. 공경할지어다! 이에 칙령을 내린다. 영락 10년 3월 초엿새.”

장삼풍의 제자 구현청(丘玄清 구원정邱元靖이라고도 한다)은 명 태조 주원장의 신임을 받았다. 홍무 14년에는 관부에서 그의 어진 재주와 능력을 조정에 천거해 감찰어사를 제수 받았다. 태조는 또 그에게 궁녀 2명을 하사했으나 그는 극력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파격적으로 태상시경에 발탁되었고 2대 조상에게까지 관작을 주는 은혜를 입었다. 홍무 18년(1385년)에는 ‘가의대부태상시경(嘉議大夫太常寺卿)’이 되었다. 매번 천지에 큰 제사를 지낼 때마다 명 태조가 제궁에서 자면서 날씨를 묻곤 했는데 구현청의 상주가 효험이 있었다.

《장삼풍전집》에는 장삼풍이 구원정에게 주는 시가 있다.

《장지파촉시문인구원정(將之巴蜀示門人邱元靖)--장차 파촉으로 가면서 문인 구원정에게 보이다》

苦心苦行守棲雲(고심고행수서운)
大道他年寄與君(대도타년기여군)
莫舍吾廬輕易出(막사오려경이출)
致教人賦北山文(치교인부북산문)

마음 고생 몸 고생으로 서운려를 지키면
언젠가는 대도(大道)가 그대에게 의지할 것이다.
내 초막을 함부로 나오지 말지니
사람을 시켜 북산문(北山文)을 읊게 하네.
역주: 북산문이란 남제(南齊) 때 문장가 공치규(孔稚圭)가 지은 부(賦)의 제목. 일찍이 북산에 은거했던 주옹(周顒)이 끝까지 은거하지 못하고 중간에 나와 벼슬길에 나선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장삼풍이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서 중도에 수련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정진하라고 경계하는 뜻을 담았다.

명나라 임자원의 《칙건대악태화산지》에는 “홍무 연간에 장삼풍이 무당산에서 도제(徒弟) 여러 명을 받았고 영락 이후 각 지역과 문파에서 특별히 선발된 4백 명의 도사들이 모두 장삼풍을 조사로 여겼다.”고 한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134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8. 제세선방(濟世仙方)

2010년 중국대륙에서 이미 실전된 《삼풍장진인신속만응방(三豐張真人神速萬應方)》이란 책이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발견되어 그 사본이 중국에 돌아왔다. 《삼풍장진인신속만응방》은 모두 4권으로 명나라 때 손천인[孫天仁, 용산(容山) 탐현자(探玄子)]이 수집한 도가 의학 전적이다.

이번에 발견된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본은 에도시대(1603~1867년) 초기에 손으로 베껴 쓴 책이다. 명나라의 대의학자 이시진(李時珍)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을 편집할 때 이 책을 참고했고 그중 60여 처방을 인용해 수록하기도 했다.

《삼풍장진인신속만응방》 제1권은 《장삼풍진인비전선방(張三豐真人秘傳仙方)》이다.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은 장삼풍이 원나라 때 천태산을 주유하다 석갑(石匣 돌상자) 속에서 얻은 ‘1권의 약방(藥方 한약 처방집)으로 24개 처방이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영락 20년(1424년) 9월 호영주(胡濴奏)가 무당산에서 삼풍진인으로부터 ‘비오이십사방(秘奧二十四方)’을 받았다고 한다. 《본초강목》에는 이중 신선실소산(神仙失笑散), 종리제세산(鍾離濟世散), 자화지정고(紫花地丁膏), 신선마노병(神仙瑪瑙餅)과 진인벽설고(真人碧雪膏)를 수록했다.

24선방 외에도 《장삼풍진인비전선방》에는 ‘오행론’에 관한 기록이 있어 도가의 오행학설과 사람 몸의 오장 간의 상생상극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또 ‘용호(龍虎)’ ‘황아(黃芽)’ 등 도가연단에 관련된 술어들이 나오고 이외에도 ‘인내(忍耐)’, ‘존덕(存德)’ 등 수심양성(修心養性)의 도가수련내용이 들어 있다.

《삼풍장진인신속만응방》 2권 《외과세계절요(醫科世系節要)》에는 의덕(醫德)과 관련된 논술이 장삼풍의 《의약편(醫藥篇)》과 같이 나온다.

의약편(醫藥篇)

“의도(醫道)는 나라를 살릴 수 있지만 나라를 병들게 할 수 있다. 또 세상의 약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술(術)을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醫之爲道也,能活國亦能病國;藥之於世也,能活人亦能殺人。不可不慎其術也)”

“중(中)에 이치가 있으니 배움에 끝이 없고 행함에 끝이 없다(中有理焉,學之無盡,行之無窮).”

“약은 군신좌사(君臣佐使)로 나뉘고 병은 허실(虛實)과 신구(新舊)로 나뉘는데 평범한 의사들도 모두 말할 수 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성현의 학문에 정통할수록 뜻은 더욱 낮아야 하며 도덕이 높을수록 마음이 더욱 겸손해야 하니 기황(岐黃 역주: 기백과 황제로 전통 한의학을 말함)를 다루는 자 역시 이와 같다.(聖賢學問精而志氣益下,道德高而心懷益謙,操歧黃者亦宜如是)”

“자신을 소홀히 해선 안 되며 자신을 오도해도 안 되고 자신을 기만해도 안 된다. 자신을 속이면 남을 속이게 되고 자신을 오도하면 남을 오도하게 되며 자신을 소홀히 여기면 남을 소홀히 여기게 되는데 그 죄가 몸에 집중된다. 그러므로 이 도(道)는 공을 세우긴 쉽지만 허물을 얻기도 쉽다. 복을 쌓기는 어렵지만 재앙을 부르는 건 어렵지 않다. 만약 공이 있으면서 허물이 없고 복은 있으면서 재앙이 없으려면 반드시 조심스럽게 자제해야 하는데 맥의 이치는 미세해서 얕은 학문으로는 알기 어렵다.(不可自輕,不可自誤,不可自欺。自欺欺人,自誤誤人,自輕輕人,其罪集於乃躬也。故此道立功易,取過亦易,積福難,招禍不難。欲求有功無過,有福無禍,則必兢兢自持,脈理微細,淺學難知)”

“지금 의사에게 권하노니 환자의 병상에 들어가면 우선 (병이 생긴) 연유를 묻되 약을 가지고 함부로 사람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환자에게 권하노니 의사를 만나기 전에 먼저 그 원인을 알아야 하며 함부로 목숨을 걸고 의사를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목숨을 걸고 의사를 시험하면 그 허물은 자신에게 있고 약으로 사람을 시험하면 그 허물은 의사에게 있다.(今勸爾醫士,入病人之榻,先問從來,勿以藥試人也;今勸爾病家,對醫士之前,先明原故,勿以命試醫也。以命試醫咎在己,以藥試人咎在醫)”

“더욱이 위급한 사람을 도움에 몸값을 높이지 말며 곤궁한 사람을 구함에 돈이나 재물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 그 증후를 환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곧장 구해야 하며 그 증후를 볼 수 없는 사람은 (자신보다) 고명한 의사를 기다림이 온당하고 성실한 선(善)을 쌓는 것이다. 더욱이 그대 유학자 무리들에게 권하노니 신령한 처방을 많이 생각하고 의학의 뜻을 세밀히 연구하되 감추거나 함부로 하지 말며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라.(更宜扶危急莫高身價,救困窮莫計金貲。能洞見其症候者,即行拯拔,不能見其症候者,以候高明,則積穩誠之善也。更勸汝儒學者流,多考靈方,細研醫旨,勿秘勿妄,利己利人)”(《장삼풍전집‧의약편》)

장삼풍은 또 신통을 드러내 세상을 구했는데 명나라 주휘(周暉)가 지은 《금릉쇄사(金陵瑣事)》에 “삼풍의 도롱이와 삿갓”에 관한 신기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장삼풍전집》에는 또 증각서옹(贈角黍翁), 금박교휘(金箔交輝), 몽리전방(夢裏傳方)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삼풍사립(三豐蓑笠 장삼풍의 도롱이와 삿갓)

장삼풍이 기양왕[岐陽王, 명나라 개국공신 이문충(李文忠)]의 집에 놀러갔다가 도롱이와 삿갓을 남기고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 집에 천일 안에 횡액이 닥쳐와 온가족이 먹을 게 없어질 겁니다. 위난이 닥쳤을 때 나의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정원을 맴돌며 내 이름을 부르세요.” 기양왕은 속으로 의심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도롱이와 삿갓을 보관했다.

2년이 지나자 조정에서 갑자기 대대적인 옥사(獄事)를 일으켰고 기양왕 역시 연루되었다. 기양왕의 전 가족이 왕부(王府)에 감금되었고 식량을 주지 않았다. 집안에 남은 식량을 보이는 대로 먹었다. 기양왕이 장삼풍의 말을 상기해 그가 시킨 대로 하면서 장삼풍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정원과 저택의 빈 땅에 모두 벼가 자라기 시작했고 한 달이 못되어 다 자랐다. 온가족이 이 쌀에 의지해 겨우 굶어죽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쌀을 다 먹자 조정에서 사람이 와서 기양왕의 가족들에게 쌀을 공급하게 했다. 이후 기양왕이 다시 장삼풍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번에는 곡식이 자라지 않았다.

이때부터 기양왕은 장삼풍이 준 사립을 신물로 여겼다. 사람에게 병이 있으면 도롱이 위의 종려털을 물에 달여 마시게 하면 병이 바로 좋아졌다. 나중에 동창(東廠 역주: 명나라 때 황제 직속의 사찰기관)을 관장하던 한 태감이 이질에 걸리자 자신의 권력을 믿고 도롱이와 삿갓을 빼앗아갔다. 종려털을 달여 마셨지만 도리어 이질이 더 심해져서 바로 죽어버렸다. 나중에 이 도롱이와 삿갓은 황궁의 수장품이 되었다.

증각서옹(贈角黍翁 쫑쯔 노인에게 주다)

명나라 영종 천순(天順) 연간에 검주(劍州)에 한 노인이 종자(粽子 중국어로는 쫑쯔라 하며 찹살 떡의 일종)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인은 가난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종자를 하나 주곤 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유를 묻자 그는 “(이 행인들은) 모두 아주 피곤하고 배가 고픕니다. 나는 매일 종자를 팔면서 원가에 약간의 이익만 남기면 충분합니다. 많이 남으면 모두 사람들에게 주는데 이런 작은 은혜가 뭐 언급할 거리나 되나요?”라고 했다.

어느 날 오후 3시쯤 종자를 아직 팔지 못했는데 갑자기 한 도인(道人)이 와서는 종자 하나를 달라고 했다. 노인이 하나를 주자 다 먹고는 하나를 더 달라고 했다. 노인이 하나를 더 주자 이번에도 다 먹고는 연달아 수십 번을 달라고 했다. 노인은 그때마다 원하는 대로 다 주었다.

도인이 크게 웃으면서 “당신은 정말 인심이 후하군. 내게 다른 기술은 없고 꾸러미 안에 자색 구슬이 하나 있으니 집에 가져가서 단 아래에 두고 이튿날 열어보면 그 속에 아주 기묘한 것이 있을 게요.”라고 했다.

말을 마친 도인이 표연히 사라지자 노인은 자색 구슬을 갖고 집에 돌아왔다. 도인이 일러준 대로 쌀통 안에 놓았다. 당시 통 안에는 쌀이 아주 조금 남아있었지만 이튿날 열어보니 통안 가득 쌀이 차 있었다. 노인은 웃으면서 “도인이 말씀하신 기묘한 것이 원래 이런 거였구나.”라고 했다.

이에 쌀통의 쌀을 퍼서 종자를 만들었고 3개를 팔면 7개를 나눠주었다. 이튿날 보니 또 쌀이 통안에 가득했다. 이렇게 매일 종자를 팔았는데 그 은혜를 입은 행인들이 모두 노인의 선량함을 찬탄했다.

이렇게 오래되자 노인은 이에 대해 놀랍고 기이하게 느껴 쌀통을 뒤집어 찾아보니 자주색 구슬은 보이지 않았다. 이후 쌀통에서는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도인이 또 와서는 노인에게 말했다. “나는 장삼풍이라네. 그대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이미 아주 많으니 세상을 나서 도를 닦아볼 생각이 있는가?”

하지만 노인은 수도할 생각이 없었다.

장삼풍이 단약(丹藥)을 하나 꺼내 노인에게 주면서 “이 단을 삼키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네.”라고 분부했다. 노인이 단을 삼키자 폐부가 전부 시원해짐을 느꼈다. 장삼풍이 떠난 후 노인은 1백여 살을 살았고 죽을 때 단정히 앉아서 서거했다.

금박교휘(金箔交輝 금박이 서로 빛내다)

명 태조 홍무 초년(初年) 평양(平陽)에 한 도인이 있었는데 진선(真仙) 장금박(張金箔)이라 했다. 그는 금박지를 만드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금박으로 삼았다. 장금박은 도술(道術)을 깊이 숨기고 인간세상을 노닐었으며 늘 금박으로 약을 만들어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는데 기이한 효과가 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또 한 명의 도인이 나타나 자신을 장금점(張金點)이라 하면서 몸에 연한 남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도포 가득 금점(金點)이 붙어 있어서 옷이 밝고 화려해서 금점을 호로 삼았다. 금점은 사람들에게 “병이 있는 사람이 내 도포 위의 금점을 하나 먹으면 질병 하나가 완전히 치유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시험해보니 과연 신기한 효험이 있었다. 장금점은 이렇게 병을 치료하고도 돈을 받지 않았다.

당시 남부지방에 온역(溫疫 유행성 전염병)이 아주 많았는데 장금점은 매일 사람들더러 도포 위의 금점을 전부 떼어가게 했다. 이튿날 장금점이 또 시장에 나오면 금점이 전과 같았다. 이에 사람들이 그를 신선으로 숭배했다.

한 달 후 온역이 통제되자 금점이 “내 일은 다 끝났으니 운산(雲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금점 도포를 벗자 사람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퉜다. 장금점은 금빛으로 변해서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후인들이 듣고는 “이분은 장삼풍이 틀림없고 금점이라 한 것은 장금박과 서로 빛나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몽리전방(夢裏傳方 꿈에 전한 처방)

명나라 때 연주(兗州)에 주생(朱生)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웠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병이 생겨 물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밤낮으로 하늘에 절을 올리며 신에게 자신의 병을 치료해달라고 빌었다.

어느 날 꿈에 한 금색신인(金色神人)이 나타났는데 창 모양의 긴 수염에 도인처럼 홀연히 나타나서는 그를 불렀다.

“너의 공경하는 마음이 진실하니 한 가지 묘한 처방을 전해주겠다. 눈에 넣으면 곧 좋아질 것이다.”

주생이 깨어난 후 꿈속의 기이한 신인을 회상하며 꿈속에서 신인이 알려준 대로 치료하자 이튿날 눈병이 좋아져 다시 볼 수 있었다. 주생은 신인의 묘방(妙方)이 영험한 것에 감사하며 하늘을 향해 향을 사르고 성심껏 예배를 올렸다.

어느 날 주생이 연성(袞城)에 가는 길에 장선관(張仙觀 장삼풍 신선을 모신 도관)에 들렀다. 주생이 들어가서 고개를 들어보고는 문득 장삼풍 신선의 얼굴이 꿈속에 봤던 신인과 똑같음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숙연히 일어나 공경하면서 장삼풍이 전한 신묘한 선방을 세상에 널리 알릴 것을 발원했다. 지금 이 선방(仙方)이 《본초강목》에 기재되어 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122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6. 학이 귀주에 이르다

귀주(貴州) 중부 평월현(지금 귀주성 복천시)의 복천산(福泉山)은 역사가 유구한 곳이다. 한 무제가 차란국(且蘭國)을 평정한 후 이곳 야랑후(夜郎侯)를 야랑왕(夜郎王)에 봉했다. 장삼풍은 일찍이 이 산을 좋아해서 “숭산 곳곳이 선경이로다(崇山處處有仙鄉)”고 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출판된 《장선유사(張仙遺事)》는 많은 시부(詩賦)와 신선의 자취를 기록하고 있다. 복천산은 산 위에 샘이 하나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전설에 따르면 원래 ‘복천’의 샘물은 주민들이 마시기에 부족했지만 장삼풍이 첩취봉(疊翠峰)을 등진 어느 산에서 귀정(貴定)에 다녀온 후 복천산 위에 우물을 설치했다고 한다.

《야랑(夜郎)》

아침에 곤명을 떠나 야랑에 내려오니
숭산 곳곳이 선경(仙境)이로다.
어년(魚年)에 벽계산에서 신께 제를 올리니
높이 나는 새 길에 내 학도 힘겹구나.
좁은 길 멀리 관색령을 돌아가고
뭇 봉우리 무후강을 완연히 품었구나.
본래 나무가 많고 빽빽해 그윽한 땅인데
남쪽 사람 이곳에 사는 것 너무나 우습구나.

朝別昆明下夜郎(조별곤명하야랑)
崇山處處有仙鄉(숭산처처유선향)
魚年共賽神雞碧(어년공새신계벽)
鳥道高飛我鶴黃(조도고비아학황)
徑遙盤關索嶺(세경요반관색령)
諸峰宛抱武侯岡(제봉완포무후강)
由來木密多幽地(유래목밀다유지)
笑殺南人住此方(소살남인주차방)

《평월부지(平越府志)》에는 장삼풍이 복천산에서 수련하던 곳에 대해 “앞은 고진관(高真觀) 뒤는 예두정(禮斗亭)인데 정자 앞에 욕선지(浴仙池)가 있다. 이 못은 여름에는 넘치지 않고 겨울에는 마르지 않는데 병을 치료할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욕선지는 장삼풍이 짚신을 신고 한발로 밟아서 생겨났다고 한다.

《장선유사(張仙遺事)》에는 장삼풍이 고진관 뒤에 움막을 짓고 수련했다고 한다.

《평월복천산예두음(平越福泉山禮斗吟)》

이 산의 구름과 물 더없이 깨끗한데
밤마다 향을 피워 공경과 정성 표현했네.
머리에 연꽃 이고 북두칠성 향하니
성군(星君)이 나를 위해 장생을 드러내네.

此山雲水盡澄清(차산운수진징청)
夜夜焚香表恪誠(야야분향표각성)
首載蓮花朝北斗(수재연화조북두)
星君爲我著長生(성군위아저장생)

장삼풍은 또 수많은 신적(神跡)을 남겨놓았다. 예를 들면 복천 부근 무승관(武勝關)에 도마파(倒馬坡)가 있는데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백장 절벽 위에 장삼풍이 그림자를 남긴 바위가 있다. “머리에는 화양관(華陽冠)을 쓰고 옆으로 지팡이에 기대 걷는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옆에는 ‘신이 우주를 남긴다(神留宇宙)’는 4글자가 있다. 나중에 현지인들은 복천의 고대문화를 가리켜 삼풍문화라 부르면서 복천을 신화의 세계라고 칭했다.

7. 벽사부정(辟邪扶正)

원명(元明)시기에 이르러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역사상 다시 소도(小道), 방사(方士) 및 요승(妖僧)이 출현해 조야에 가득 차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사람들의 바른 신앙(正信)을 심각하게 교란했다. 장삼풍은 매번 이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술법을 이용해 희롱하거나 징벌하곤 했다.

당시 등상은(鄧常恩)이란 도사가 있었는데 요행으로 태상경(太常卿)이란 고관이 되었다. 그는 사람됨이 극히 음험하고 악독해서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음혼(陰魂)이 흩어지지 않고 마귀로 변화해 등 씨 집에서 장난을 친 것임은 아무도 몰랐다. 등 씨가 도사가 될 때 태항산 서쪽에 마선옹(馬仙翁 마씨 성의 신선)이 있었는데 신전사귀(神箭射鬼)를 부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구하면 영험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제자 진왜아(陳歪兒)를 보내 마선옹의 전술(箭術 화살을 쏘는 술법)을 구해오게 했다.

진왜아가 명령에 따라 길을 가다가 중도에 한 도인을 만났다. 신태(神態)가 비범하고 당당했는데 손에 긴 활을 들고 있었고 허리에는 7개의 화살을 꼽고 있었다.(긴 활의 長은 張을 의미하고 7개는 三丰의 이름 획수가 7인 것을 상징한다. 즉 장삼풍이 변신한 것.) 그는 자칭 활의 귀신(能射鬼)이라면서 백발백중이라고 자랑했다. 진왜아는 그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마침 가는 길이 같아서 동행하게 되었다. 저녁이 되자 어느 무너진 묘에서 밤을 지냈다. 숲속이라 어두운데다 달마저 어두워 죽림의 고목 속에서 “추추” 하는 귀신소리가 들려오자 진왜아는 깜짝 놀랐다.

그러자 도인이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나의 신전(神箭)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창틈으로 화살을 한발 날리자 그 귀신이 슬피 울부짖으며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진 씨는 깜짝 놀라 탄복했다. 이튿날 새벽 머리를 조아리며 도인에게 법술을 전수해달라고 간청했다. 도인은 아주 흔쾌히 신전의 술법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진왜아가 되돌아와 사부를 보고는 말했다. “마선옹은 이미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부님의 복으로 길에서 우연히 신선을 만나 전술(箭術)을 전수받았습니다.” 상은이 이 말을 들은 후 크게 기뻐했다. 이날 밤 달빛이 환할 때 집 정원에 다시 귀신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급히 진 씨를 불러 술법을 펼치게 했다. 상은 자신은 회랑으로 몸을 돌려 반대편 누각 위에서 감시했다.

진왜아가 철저히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귀신 하나가 반대편 누각 위로 날아갔다. 급히 강궁을 당겨 화살을 하나 쏘자 화살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한마디 큰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물건이 쓰러졌다. 불을 켜고 살펴보니 뜻밖에도 등상은이었다. 고개를 돌려 다시 진왜아를 찾아보니 이미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난 뒤였다.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연간에 많은 방사(方士)들이 황제를 속이고 황제에 의해 진인으로 봉해졌다. 차파(劄巴)라는 이름의 한 승려도 황제의 총애를 얻어 대지혜불(大智慧佛)이란 칭호를 하사받았다. 그는 큰 수레를 타고 대궐을 출입하면서 권세와 부귀를 자랑하고 과시하면서 요란하게 거리를 누비곤 했다. 어느 날 차파가 사원에 돌아와 보니 문득 남루한 도포를 걸친 한 도인이 담벼락 위에 시를 적어 자신을 비웃고는 곤단보(坤斷補 곤괘가 끊어진 것을 잇는다는 뜻으로 丰이 된다.)라는 낙관을 남겼다. 차파가 이를 보고는 크게 화가 나 사병들을 시켜 도인을 잡아오게 했다. 갑자기 바람이 몰아치더니 도인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이에 사람들은 모두 이것은 진선 장삼풍이 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수련하는 승려나 도사를 만나면 장삼풍은 칭찬하거나 선물을 주곤 했다. 장삼풍이 기부(夔府 지금의 중경 봉절) 개원사(開元寺)에서 광해(廣海)화상을 만나 7일간 의기투합했다. 헤어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불도에 깊이 들어 속세의 정 끊으니
마치 사마타행(선정수행)과 상응하는 듯하네.
은은한 하늘 꽃 미묘한 상서로움 드러내니
낭랑한 나뭇잎 소리 대승경전 읊는구나.
한가한 낮 밀실에선 구름이 덮어주고
고요한 밤 빈 뜰에는 달빛이 등불 되네.
입정 속에 온갖 상(象)이 아무것도 없으리니
이곳에 온 그 누가 노승을 볼 수 있으랴?

深入浮屠斷世情(심입부도단세정)
奢摩他行恰相應(사마타행흡상응)
天花隱隱呈微瑞(천화은은정미서)
風葉琅琅詠大乘(풍엽낭랑영대승)
室密晝閑雲作蓋(실밀주한운작개)
庭空夜靜月爲燈(정공야정월위등)
定中萬象無何有(정중만상무하유)
到此誰能見老僧(도차수능견노승)

장삼풍은 또 광해화상에게 짚신 한 켤레와 약간의 침향(沈香 귀한 약재)을 남겨놓고 떠났다. 나중에 광해화상이 장삼풍이 남겨둔 짚신과 침향을 영락제에게 바치자 영락제가 상으로 옥환(玉環)과 천불가사(千佛袈裟)를 하사했다.(이상의 시와 기록은 《아미산지(峨眉山志)》에 나온다.)

《장삼풍전집》에는 이런 종류의 일화들을 수집해놓았다. 장삼풍이 방사와 요승을 희롱하며 도덕과 풍속을 만회한 이야기들이 민간에서 아주 생생하게 전해졌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090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4. 감주(甘州)에 신물(神物)을 남기다

고대의 감주(甘州)는 지금의 감숙성 장액시(張掖市)로 하(夏)나라 때 서강(西羌)의 땅이었다. 고대 강족 사람들이 이곳에서 번성했다. 한 무제 때 이곳에 장액군을 설치했는데 “흉노의 팔을 꺾고 나라의 팔을 펼쳐 서역과 통한다(張國臂掖,以通西域)”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이곳은 고대 실크로드의 찬란한 진주였고 자고로 ‘새상강남(塞上江南 변방의 강남)’이란 미칭으로 불려왔다.

명나라 왕조운(王兆雲)이 편집한 《백취쇄언(白醉瑣言)》, 명나라 양의(楊儀)가 편찬한 《고파이찬(高坡異纂)‧장삼풍전(張三豐傳)》 및 《감주부지(甘州府志)‧선석(仙釋)》 등에 모두 장삼풍이 감주에 남겨놓은 몇 가지 신기한 유물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청나라 건륭 시기 《성경통지(盛京通志)‧선석(仙釋)》에는 장삼풍이 일찍이 감주 장지휘원(張指揮園)에서 우화등선했다고 하며 또 다른 지방에서도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고 한다. 도가 대도(大道)의 수련법은 수련성취한 후 자신의 신체를 가져가는데 도가는 성명쌍수(性命雙修)라 육체 역시 수련성취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를 이뤘을 때의 육신은 이미 더는 평범하고 평범한 속인의 신체가 아니다. 이때의 육신은 이미 완전히 다른 공간의 고에너지물질로 전화된 것이라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갈 수 있으며 무소불능(無所不能)하다.

장삼풍 대도(大道)는 진인으로 성취된 후에도 아직 완수하지 못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신통을 사용해 대도문화(大道文化)를 오래고 순박한 민족들에게 남겨놓았다.

감주 서문(西門) 안의 사당은 당시에 삼풍암(三豐庵)라 불렀는데 장삼풍의 회문시(回文詩)가 있다. 회문시란 똑바로 읽어도 시가 되고 거꾸로 읽어도 시가 되는 특별한 문장을 가리킨다.

《회문시(回文詩)》

다리 옆 정원은 버드나무 제방의 굽이를 마주하는데
밤에 달 밝을 때 문이 반쯤 잠겼구나.
멀리서 학을 타고 느즈막히 동(洞)에 돌아와
조용히 거문고 타며 구름을 벗 삼아 앉았노라.
단을 태우려 불을 찾는데 빈 아궁이가 없고
약을 캐고 신선 찾으니 좋은 산이 있구나.
표주박 나무에 걸고 고인이 숨은 지 오래되니
시끄러운 속세소리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 끊어지네.

橋邊院對柳塘灣(교변원대유당만)
夜月明時半戶關(야월명시반호관)
遙駕鶴來歸洞晚(요가학래귀동만)
靜彈琴坐伴雲閑(정탄금좌반운한)
燒丹覓火無空灶(소단멱화무공조)
采藥尋仙有好山(채약심선유호산)
瓢掛樹高人隱久(표괘수고인은구)
囂塵絕水響潺潺(효진절수향잔잔)

이 시를 거꾸로 풀면 다음과 같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시끄러운 속세소리 끊어지고
오랜 은자는 높은 나무에 표주박 걸었노라.
산이 좋으니 약을 캐는 신선이 있고
아궁이 비어 불이 없으니 단을 태울 곳 찾네.
한가한 구름 벗 삼아 앉아 조용히 거문고 연주하고
느즈막하게 돌아오는데 멀리서 학을 타고 온다네.
관문이 반쯤 닫힐 때 밝은 달밤인데
만당의 버드나무는 뜰 옆의 다리를 마주하누나.

장삼풍은 감주에 약호로(藥葫蘆)를 하나 남겨 놓았다. 만약 질병에 걸린 사람이 풀 하나를 호로 속에 넣었다가 이튿날 달여 마시면 금방 호전되었다. 정서총병(定西總兵)이 집에서 잔치를 열어 국경을 지키는 신료들 및 예인(藝人)들을 초청해 잡극(雜劇 중국의 전통연극)을 공연하게 했다. 총병이 약호로를 꺼내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며 재미로 돌려보게 하자 약호로가 갑자기 스스로 깨져버렸다. 약호로는 바로 장삼풍의 신물(神物)이기 때문에 만약 불경하게 대하면 자연히 더는 세상에 남길 수 없는 것이다.

장삼풍은 《촉시제(蜀市題)》에서 자신의 호로에 대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보배임을 밝혔다.

《촉시제(蜀市題)》

아침에 청성에 은거하다 저녁에 아미산에 들어오니
촉(蜀) 중에는 왕래하며 교제하는 사람 많구나.
밝은 대낮이 바삐 사라지는 것을 보며
입으로는 남채화 신선의 답답가를 부르네.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 호로 하나
양천(兩川 지명)의 풍월에 안락한 움막
산림과 저잣거리 마음껏 노닐며
도처에 시를 씀은 무엇을 인정함인가?

朝隱青城暮入峨(조은청성모입아)
蜀中來往閱人多(촉중래왕열인다)
眼看白日忙忙去(안간백일망망거)
口唱藍仙踏踏歌(구창람선답답가)
一個葫蘆無價寶(일개호로무가보)
兩川風月安樂窩(양천풍월안락와)
山林塵市遨遊遍(산림진시오유편)
到處題詩認得麼(도처제시인득마)

장삼풍은 또 감주에 팔선과해도(八仙過海圖 팔선이 바다를 건너는 그림) 1폭을 남겨놓았는데 중간에 수(壽)자가 있었다. 감주 도지휘(都指揮 역주: 명나라 때 지방 군사책임자)가 팔선과해도를 얻은 후 대당(大堂)에 걸어놓았는데 이것이 신물(神物)임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한 친척이 집에 와서 머무는데 밤에 파도가 맹렬히 몰아치는 소리가 들리자 흑하(黑河 강 이름)의 제방이 무너진 것으로 여겨 주인에게 알렸다. 나중에 파도 소리가 그림에서 나온 것임을 발견한 후에야 팔선과해도가 다른 공간과 서로 통함을 알게 되었다.

“장삼풍은 감주에 3가지 물건을 남기고 떠났다. 첫째는 도롱이와 삿갓, 둘째는 약호로로 풀 하나를 그 속에 넣었다가 다음날 끓여 마시면 병이 바로 나았다. 셋째는 팔선과해도인데 가운데 수(壽)자가 있다. 도지휘가 이것을 얻어 당에 걸어놓았는데 기이함을 몰랐다. 어느 날 저녁 친척이 와서 투숙하다 파도가 맹렬히 몰아치는 소리를 듣고는 흑하의 제방이 무너진 줄 알았다. 이튿날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이 괴이하게 여겨 찾아본 후에야 비로소 그 소리가 그림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나중에 황제의 총애를 받던 내관이 가져갔다.”(《백취쇄언》)

여기서 팔선(八仙)이란 도가의 여덟 신선으로 한종리(漢鍾離 종리권), 장과로(張果老), 한상자(韓湘子), 철괴리(鐵拐李), 여동빈(呂洞賓), 하선고(何仙姑), 남채화(藍采和) 및 조국구(曹國舅)를 가리킨다. “팔선이 바다를 건너며 각기 신통을 드러낸다(八仙過海,各顯神通)”는 내용은 중국 민간에 가장 널리 퍼진 신선이야기다.

장삼풍은 또 다른 시에서 여동빈과 함께 동정호에 놀러간 이야기를 언급했다.

《동정호에서 여순양선생을 따르다(洞庭䎸呂純陽先生)》

이번에 뵈니 인연이 없진 않은데
도를 방문하고 진인 찾길 수십 년이었네.
고상하게 펄펄 날며 풍적(風笛 악기)을 부시고
웅장하고 늠름하게 용천검 차셨도다.
해악(海嶽)에서 이 땅에 오시어
손으로 호수구름 떨치며 먼 하늘 바라보시네.
원컨대 선생을 배워 부지런히 구도하리라.
동정에서 갈라져 서천(西川)에 이르렀네.

這回相見不無緣(저회상견불무연)
訪道尋真數十年(방도심진수십년)
雅度翩翩吹風笛(아도편편취풍적)
雄風凜凜佩龍泉(웅풍름름패용천)
身從海嶽來斯地(신종해악래사지)
手拂湖雲看遠天(수불호운간원천)
願學先生勤度世(원학선생근도세)
洞庭分別到西川(동정분별도서천)

5. 파촉에서 난새를 부리다

《환촉음(還蜀吟)--촉에 돌아와 읊다》

육합이 내 집이오 해와 달은 내 촛불.
내 비록 요동 사람이지만 촉에서 노니니 다시 촉에 돌아온 것 같네.
옅디옅은 무산의 구름 구부러진 아미산의 달
곱디고운 금강 물결 화목한 파자국(巴子國 춘추시대 제후국)이여.
도처에서 현풍(玄風)을 드러내며 미친 듯이 즐거워하네.
난새를 어디서 멈출까나? 다시 청성에 와서 묵노라.

六合是我家(육합시아가) 二曜爲我燭(이요위아촉)
我雖遼東人(아수요동인) 遊蜀似還蜀(유촉사환촉)
淡淡巫山雲(담담무산운) 彎彎峨眉月(만만아미월)
鮮鮮錦江波(선선금강파) 熙熙巴子國(희희파자국)
到處闡玄風(도처천현풍) 顛狂自恰悅(전광자흡열)
鸞馭止何方(난어지하방) 又到青城宿(우도청성숙)

《환촉음(還蜀吟)》에서 장삼풍은 파촉(巴蜀)과의 인연을 말했다. 여기서 파촉이란 현재의 사천성에 해당하며 중화의 역사문화가 집결된 곳이다. 옛날 사람들은 상하(上下)와 동남(東南), 서북(西北)을 육방(六方)이라 칭했고 육방이 서로 이어진 것을 육합(六合)이라 했으니 바로 천지 사이를 뜻한다. 이요(二曜)란 해와 달을 가리킨다. 장삼풍은 난새와 선학을 타고 사방을 마음껏 노닐었는데 천지 사이를 집으로 삼고 해와 달을 촛불로 삼았으니 이 시에는 도를 얻은 사람의 대자재(大自在)함이 흘러넘친다.

장삼풍은 촉 지역 및 이곳 사람들과 전생의 인연이 있었다. 때문에 “촉에서 노니니 다시 촉에 돌아온 것 같네” “도처에서 현풍을 드러냈다.”

장삼풍은 또 《입촉(入蜀)》에서 “가장 사랑하는 건 아미봉 정상의 달”이라고 노래했다.

《입촉(入蜀)--촉에 들다》

웅장한 검문 촉 땅의 산 높고 높아
날아서 오가는 학마저 힘겨웁구나.
만 개의 봉우리 빼어나게 아름답고
천 겹 푸른 산 몇 번이나 만나려나.
때때로 목동의 피리소리 가을 풀에 들려오고
곳곳에 바람소리 저녁파도처럼 울어대네.
가장 사랑하는 건 아미산 정상의 달
도인 옷자락 위에 맑고 고운 빛 비추네.

劍門雄壯蜀山高(검문웅장촉산고)
飛去飛來鶴亦勞(비거비래학역로)
萬點蒼尖分曆落(만점창첨분력락)
千重碧嶂幾周遭(천주벽장기주조)
時時牧笛吹秋草(시시목적취추초)
處處樵風吼暮濤(처처초풍후모도)
最愛峨眉峰頂月(최애아미정봉월)
清暉白上道人袍(청휘백상도인포)

명나라 홍무 연간에 태조 주원장은 아들 주춘(朱椿 역주: 태조의 11번째 아들)을 촉왕(蜀王)에 봉했다. 당시 이 지역은 안정되어 있어 사람들이 편안히 즐겼다. 장삼풍이 어느 날 사대부의 복장인 네모난 관에 넓은 띠를 입고 신채를 드러내며 촉왕을 찾아와서는 도를 닦도록 권했다. 하지만 촉왕 춘은 도(道)를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장삼풍이 나이가 들었어도 더 건강하고 날아갈 듯 가볍게 걷는 것은 부러울 따름이라 그를 잡아두고 싶었다. 하지만 장삼풍은 웃으면서 이렇게 읊었다.

《제현천관기촉왕(題玄天觀寄蜀王)--현천관에서 촉왕에게 부치다》

대수롭지 않게 자라 낚시를 끝내며
웃으며 돌아와 도연명을 본받네.
벽도(碧桃 푸른 복숭아)에 꽃 피니 봄은 한창인데
취죽(翠竹 비취색 대나무)에 새순 나와 마디가 높아지네.
마음에 봉궐의 용과 기린 같은 모임 품었으나
몸은 귀성(龜城 성도)에서 동분서주 하는구나.
하필이면 종남첩경을 논하는가?
벼슬욕은 내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네.

等閑釣罷海中鼇(등한조파해중오)
一笑歸來祖晉陶(일소귀래조진도)
花吐碧桃春正好(화토벽도춘정호)
筍抽翠竹節還高(순추취죽절환고)
心懷鳳闕龍鱗會(심회봉궐용린회)
身寓龜城馬足勞(신우구성마족로)
何必終南論捷徑(하필종남논첩경)
宦情於我似鴻毛(환정어아사홍모)

역주: 종남첩경(終南捷徑)은 '종남산(終南山)이 지름길'이라는 뜻으로, 출세를 이루기 위한 편법을 비유한 고사성이다. 중국 당(唐)나라 때 노장용(盧藏用)과 사마승정(司馬承幀)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당나라 때 노장용이란 서생이 있었는데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했음에도 관리로 임용되지 못했다. 이에 장안(長安) 근처 종남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노장용이 은자로 행세한 지 오래지 않아 유명해졌고 원하는 대로 조정 관리로 등용되었다. 한편 이때 천태산에 사마승정이란 도사(道士)가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한 은자로 명성이 높았는데,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한 번은 사마승정이 황제의 부름을 받아 하산했다가 관직을 사양하고 천태산으로 돌아가던 길에 노장용이 그를 배웅하다 종남산을 가리키며 “참으로 훌륭한 정취가 있는 산입니다”라고 했다. 노장용의 말 뜻인즉 벼슬을 하고 싶으면 도성이 가까운 종남산이 은거하기에 좋은데 왜 하필 천태산으로 돌아가느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사마승정이 냉소하면서 “내가 보기에는 종남산은 단지 관리가 되는 지름길일 뿐이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노장용이 매우 부끄러워했다.

장삼풍은 촉왕에게 자신이 사실 장삼풍임을 알리고 장차 해도(海島 신선이 사는 곳)의 선인(仙人)과 함께 멀리 노닐 것이며 번왕(藩王) 노릇이 비록 좋긴 하지만 아무것도 구함이 없어야만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촉왕은 “우리 스승님 장량의 술법 깊이 얻어 조용히 단전을 기르며 곡신을 지키시네(吾師深得留侯術,靜養丹田保谷神)”라며 그를 보냈다. 촉왕은 장삼풍의 충고 덕분에 나중에 번왕의 지위가 깎이는 재앙을 피해갈 수 있었다.

장삼풍은 또 일찍이 성도환위(成都環衛) 강지휘(姜指揮)의 집에 기숙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장삼풍은 머리에 늘 큰 삿갓을 쓰고 다녔는데 아무리 작은 문으로 드나들어도 걸림이 없었다. 그가 손가는 대로 말라버린 매화 가지를 꺾어 땅에 심자 매화가 자랐는데 특이하게도 꽃송이가 아래를 향했다. 이 때문에 당시 성도에서는 ‘조수매(照水梅)’가 있다는 설이 돌았다.

《성도류제강씨가(成都留題姜氏家)--성도 강씨 집에 시를 남기다》

오고가며 중생을 제도하나니
호로병으로 금강성(錦江城 성도)에서 놀았네.
몸에 대도(大道)를 품어도 아는 사람 없으니
오직 사랑하는 매화가지 땅에 심을 뿐.

往往來來度有情(왕왕래래도유정)
葫蘆遊戲錦江城(호로유희금강성)
身藏大道無人識(신장대도무인식)
只愛梅枝插土生(지애매지삽토생)

《공주지(邛州志)》에는 “장삼풍이 명산(名山)을 운유하다 성도에 이르러 청양궁(青羊宮)에서 한달 넘게 머물렀고 나중에 대읍현(大邑縣) 학명산(鶴鳴山)에 왔다. 학명산은 북으로 청성산, 남으로는 아미산, 서쪽으로 무중산(霧中山)과 인접한 도가의 명산으로 24동이 있다. 산에 돌로 만든 학(石鶴)이 있는데 천년에 한번 울고 이 학이 울면 신선이 나타난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장삼풍이 산에 들어올 때 석학이 다시 울었다. 장삼풍은 《학명산》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학명산(鶴鳴山)》

술 마시며 공주(邛州 사천 서창시)에 와 푸른 산에 들어오니
천애객(穿崖客)이 흰 구름 지고 돌아왔네.
스물 넷 신선동을 자유롭게 노니는데
돌 학이 기뻐하더니 울면서 나는구나.

沽酒臨邛入翠微(고주임공입취미)
穿崖客負白雲歸(천애객부백운귀)
逍遙廿四神仙洞(소요입사신선동)
石鶴欣然嘯且飛(석학흔연소차비)

《장삼풍전집》에는 “홍무(洪武) 말에 어떤 도인이 공주의 학명산에서 노닐었다. 산에는 24동이 있는데 24절기와 대응한다. 도인이 산에 들어갈 때 돌 학이 다시 울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기이하게 여겼다. 반년을 머물다 천곡동(天谷洞)에 들어가서는 나오지 않았다. 동문(洞門)에 ‘삼풍이 이곳에서 노닐다(三豐遊此)’는 4글자를 남겼는데 이때가 이미 일백여 년이 지났다.”라고 기록했다.

학명산의 적지 않은 명승고적이 장삼풍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방선암(訪仙岩 신선을 찾는 바위), 영선각(迎仙閣 신선을 맞이하는 누각), 천곡동(天谷洞), 장신선사(張神仙祠 장 씨 신선의 사당), 장신선사당기비(張神仙祠堂記碑), 영선각기비(迎仙閣記碑) 등이다.

영락 15년(1417년) 용호산 도사 오백리(吳伯理)가 명 성조(成祖)의 어지를 받들어 황제의 편지를 지니고 학명산에 들어가 진선(真仙) 장삼풍을 초대하기 위해 영선각을 세웠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012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2. 거부 심만삼을 도화

명청(明淸)시대 필기소설 중에는 장삼풍 및 그 제자들의 사적에 관한 내용이 아주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내용은 바로 장삼풍과 천하갑부 심만삼(沈萬三)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신묘불측(神妙不測)한 살아 있는 신선이고 또 한 사람은 강남 제일의 갑부라 이들의 일화가 미혹에 빠진 세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장삼풍전집》에 따르면 심만삼의 부는 당시 천하 으뜸이라 장삼풍이 연금술을 시도할 수 있는 근원이 되었다.

심만삼의 집은 원래 장강(長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인 주장(周莊)으로 처음에는 지역의 평범한 어민에 불과했다. 원나라 순제 지정(至正) 19년(1359년) 우연히 한 도사를 만났는데 “신채(神采)가 맑고 고상하며 거북 같은 외모에 학 같은 골격, 큰 귀와 둥근 눈, 큰 키에 창모양의 수염을 지녔다.”

심만삼이 보니 그는 “머리에 언월관(偃月冠 반달 모양의 관)을 쓰고 손에 삿갓과 도척(刀尺 칼자)을 들었는데 춥거나 덥거나 늘 삿갓 하나에 아무 장식도 없는 누더기 옷 한 벌만 걸치고 다녔다.” 또 보니 “하루에 천리를 다녔고” 밥을 먹을 때면 “한말 이상을 먹거나” 또는 “수개월을 먹지 않고 벽곡(辟榖)했는데” 음식을 먹지 않아도 용모가 여전히 풍만하고 윤기가 있었다. 심만삼은 이에 그가 방외(方外)의 이인(異人)임을 알았다.

심만삼은 본래 “마음이 너그럽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장삼풍에 대해서는 더욱 “극진히 모셨다.” 어느 날 장삼풍이 술에 취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이를 들은 심만삼이 오체투지(五體投地)하면서 장삼풍을 조사(祖師)로 모시고 가르침을 청했다.

“어리석고 속세에 찌든 저를 구제해주시기 바라오며 부나 장수 따위는 감히 바라지 않겠습니다.” 장삼풍이 이에 그를 도제(徒弟)로 받아들이고 연금술을 가르쳐주었다. “이에 약재를 준비하고 날짜를 선택해 제련을 시작했다.” 칠칠 사십구 일간 화로에 불을 피웠지만 이루지 못하자 장삼풍이 탄식해마지 않았다.

심만삼은 스스로 기연(機緣)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여겨 이에 전 재산을 투입하고 또 갖고 있던 배와 그물까지 다 팔아서 모은 돈으로 다시 제련했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연금(煉金)이 절반 정도 되었을 때 갑자기 불이 나서 연금을 하던 단로(丹爐)와 초가집마저 전부 불타버리고 말았다. 심만삼은 자신에게 복이 없음을 깊이 탄식했고 장삼풍 역시 그에게 더는 연마하지 말라고 권했다.

심만삼 부부는 추호의 원망하는 마음도 없이 장삼풍에게 다시 제련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돈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부부는 어린 딸을 팔기로 상의했다. 장삼풍은 부부의 뜻이 정말로 굳센 것을 보고는 속으로 기뻐했다.

결국 장삼풍은 “다시 구리, 철에 수은을 뿌려서 황백(黃白 금과 은) 및 옥석(玉石)을 모두 이루고 이어서 장생(長生)하게 했다.” 장삼풍은 또 심만삼이 나중에 변방으로 유배당하는 재앙이 닥칠 것을 미리 알고 떠나기 전에 당부했다. “동남쪽에 왕기가 크게 성하니 서남쪽에서 자네와 만날 것이다.(東南王氣大盛,當晤子於西南也)”

이에 심만삼이 “화로를 설치하고 제련을 크게 하자” 1년이 못되어 “천하제일의 갑부가 되었으며” “무릇 가난하거나 궁핍하거나 재난을 당한 사람을 만나면 널리 베풀었다.” 심만삼은 또 무역을 하면서 “전국을 두루 다녔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심만삼이 취보분(聚寶盆 보배를 모으는 화분)을 얻었기 때문에 재물이 끊이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심만삼을 가리켜 “자산이 거만에 달하고 전답이 옛날 오(吳)나라 땅보다 넓다”고 했다.

한편 《전남천약(滇南踐約)》의 기록에 따르면 명 태조 홍무(洪武) 연간에 남경성(南京城)의 성벽이 홍무문(洪武門)에서 수서문(水西門)까지 붕괴되었다. 그런데 성벽 아래 수괴(水怪)가 잠복한 굴이 있어 성벽을 쌓기만 하면 다시 무너져 내리곤 했다. 주원장이 심만삼을 불러 “네 집에 보배를 모을 수 있는 화분이 있다는데 흙을 모아서 문(門)을 만들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심만삼이 감히 따지지 못하고 명령을 받들어 성벽을 건축했다. 막 기초를 세웠는데 3분의 1이 무너졌다. 심만삼이 몰래 연단해서 만든 금을 투입해 겨우 완성할 수 있었고 거만금을 소비했다. 이때 주원장은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어 했다. 심만삼을 불러 “우리 군사가 백만인데 일인당 한 냥이면 충분할 것이다.”라며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심만삼은 원하는 대로 돈을 주면서도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홍무 25년(1392년) 심만삼이 태조 주원장에게 죄를 지어 온가족이 요양(遼陽)으로 쫓겨났다가 나중에 운남(雲南)으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온갖 마난을 거친 후 운남에서 다시 장삼풍을 만난 후 공성원만하여 백일비승(白日飛昇)했다.
심만삼 일가족은 모두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 장삼풍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유금릉증심만삼(遊金陵贈沈萬三)》--금릉에서 노닐며 심만삼에게 주다
 
진회(秦淮 강 이름)의 너그러운 대부호가
부귀영화는 저녁노을 같음을 간파했네.
달밤에 배를 띠워 녹주를 사면서
그대 날 따르며 단사(丹砂) 물음에 감동했네.
황중(黃中)의 오묘한 이치 어느 누가 알리오?
백하(白下 남경의 지명)의 영웅이란 이는 과장이라.
전 재산 들여 도법(道法) 깨닫길 원하니
같이 있던 처자식도 한탄하지 않는구나.

秦淮落落大漁家(진회낙락대어가)
看破浮雲似暮霞(간파부운사모하)
乘月泛舟沽綠酒(승월범주고록주)
感君從我問丹砂(감군종아문단사)
黃中妙理何人識(황중묘리하인식)
白下英雄此個誇(백하영웅차개과)
願把貲財參道法(원파자재참도법)
一堂妻子不咨嗟(일당처자부자차)

《별삼만(別萬三)--삼만과 헤어지며》

뭇 영웅 어지럽게 모두 정벌하는데
나는 선생과 도를 담론하네.
지금 동남쪽에 왕기가 성하니
언젠가 서남에서 그대와 만나리라.

群雄擾擾盡征戡(군웅요요진정감)
我與先生把道談(아여선생파도담)
今日東南王氣盛(금일동남왕기성)
他年晤子到西南(타년오자도서남)

《장지운남선기고인병서(將之雲南先寄故人並序)》--운남으로 떠날 친구에게 미리 부치다 및 서문

나는 홍무 2년 기유년부터 24년 신미년까지 무당산에서 23년을 거처했다. 이 사이에 단경(丹經)을 저술하고 맑은 휘파람 불며 자취를 감추고 구름과 학을 타고 다녔다. 근자에 듣자하니 심만삼이 조정에 죄를 지어 운남으로 유배를 간다는데 그 사위 여(余)군도 연좌되었다 한다. 서남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내가 실행할 때가 되었는가? 이에 이 글을 적어 먼저 멀리 외진 곳에서 수자리 하는 사람을 위로한다.

호리병 속 해와 달 동천 속의 봄 맞으며
이 몸이 23년간 정(靜) 속에 있었는데,
멀리 운남으로 유배간단 소식 듣고
남만(南蠻)의 비바람에 옛 벗을 떠올리네.

壺中日月洞中春(호중일월동중춘)
二十三年靜裏身(이십삼년정리신)
遙知遠徙雲南客(요지원사운남객)
蠢雨蠻風憶故人(준우만풍억고인)

《전남회심자삼산겸증령천여십사(滇南會沈子三山兼贈令倩余十舍)》

일가권속이 노니는 신선
장인과 사위가 함께 운남에 사니
옥간(玉澗)의 사위는 여십사요
빙청(冰清)의 늙은 장인은 심삼산이라.
모두 상아 때문에 재앙을 당하니
역린을 건드리기 전에 이미 용안을 범했구나.
오늘 내가 제(齊) 땅에서 와서 제도하리니
대단(大丹)이 돌아옴이 전투에서 승리해 개선하는 것보다 낫도다.

一家眷屬小遊仙(일가권속소유선)
翁婿同居滇海間(옹서동거전해간)
玉澗郎君余十舍(옥간랑군여십사)
冰清老丈沈三山(빙청노장심삼산)
都因象齒能爲禍(도인상치능위화)
未觸龍鱗早犯顏(미촉용린조범안)
今日我來齊度脫(금일아래제도탈)
大丹還勝大刀環(대단환승대도환)

《심선양 여비하 두 여선에게 주다(贈沈線陽余飛霞兩女仙)》

“선양선녀(線陽仙女)는 설진양(薛真陽)의 뛰어난 제자로 심삼산(沈三山 심만삼)의 큰 딸이다. 약관의 나이에 속세를 떠났다가 부친이 운남으로 오자 홀연히 문안인사를 왔다. 여 씨의 딸과 함께 대약(大藥)을 복용하고는 신선이 되어 날아올라갔다. 여 씨의 딸은 바로 여십사의 딸이니 서평후(西平侯) 목춘(沐春)의 부인인데 외가 쪽에서 외단(沐春)을 전수받았다. 비하(飛霞)는 내가 준 호(號)이며 일찍이 작은 전기(傳記)가 있다.”

여십사는 자식이 없는 게 아니고
심만삼 역시 아들이 있네.
선고와 조카딸은
낭원(閬苑 곤륜산 정상 신선의 정원)의 두 영지로
나의 천원약(天元藥)을 먹고
곤명지(昆明池)에서 날아올랐네.
노인이 눈웃음 지으니
내 제자들 예쁘고 천진하구나.

十舍非無子(십사비무자)
三山亦有兒(삼산역유아)
仙姑與妹女(선고여매녀)
閬苑兩靈芝(낭원양영지)
服我天元藥(복아천원약)
飛升昆明池(비승곤명지)
老翁開笑眼(노옹개소안)
吾道屬嬌癡(오도속교치)

3. 운남에 남긴 신선의 자취

운남(雲南)은 중국의 축소판으로 이곳의 여러 민족들은 중원과 천 갈래 만 갈래로 연계되어 있다. 예를 들면 경파족(景頗族)은 자칭 ‘포희(袍姬)’라 하는데 주(周)나라 민족과 동성인 희(姬)성의 씨족이다. 오늘날 경파족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명을 참조해보면 그들의 조상이 이주하는 과정 중에 예전에 머물렀던 지역을 거슬러 찾을 수 있다.

또 납서족(納西族)은 단지 북방에서 이주해왔다는 설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을 통해 볼 때 납서 고악(古樂)은 내용이 대부분 중원(中原)지역의 궁정음악과 동경음악(洞經音樂 도교음악)이다. 역사적으로 천고영웅이 중국 오천년 역사문화의 정화(精華)를 운남에 가져와 그곳에 남겨놓은 것이다.

장삼풍은 무당산에서 23년을 거주하다 심만삼이 조정에 죄를 짓고 운남으로 유배를 간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홍무 25년 가을 무당산을 떠나 운남으로 와서 서남쪽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실천했다. 장삼풍은 민간에서 운유하면서 여러 차례 신이(神異)를 드러냈고 수많은 신화를 남겨놓아 이곳 오래된 민족들을 고통과 재난에서 구원해주는 대신선(大神仙)이 되었다.

운남 대리(大理) 낙등촌(諾鄧村)의 호두산(虎頭山)에는 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건축물들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 도관이 바로 장선사(張仙祠 장삼풍을 모시는 사당)다. 안에는 장삼풍 진인의 상을 조각해놓았고 기둥 앞에 걸린 대련에는 “납탑은 자칭 삿갓 하나와 누더기 한 벌만을 사랑한다 말하지만 신선이 탈화되어도 이 세상과 이 백성 잊지 못하네.(邋遢自稱名只愛一蓑一衲;神仙隨脫化不忘斯世斯民)”라고 붙어 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012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6. 태극진전(太極真傳) 어디에?

“태극권을 배우는 것은 입도의 기초가 된다.(學太極拳,爲入道之基)” 그러나 장삼풍은 태극권을 수련하는 심법(心法)을 남겨놓지 않았고 다만 동작만 전해져 내려온다. 때문에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태극권 연마를 배워 도를 닦을 수 있는지 모른다.

태극권의 자세(架子)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현재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이 세계적으로 수억 명에 달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속에 장삼풍이 남겨놓은 동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어떤 이들은 태극권을 신체를 단련하는 건강체조로 여기며 내외겸수하는 태극권의 내포를 이해하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도가 무공(武功)문파에서는 “조사만 언급할 뿐 스승은 언급하지 않으며(言祖不言師)”, “3자에게 도를 전하지 않는(六耳不傳道)” 전승습관이 있다. 때문에 도제를 선별하는 요구가 아주 엄격해서 차라리 전수하지 않을지언정 결코 함부로 전수하지 않았다. 또 전수하는 사람 사이에 마음으로 전하고 입으로 전수할 뿐이라 역대로 그림이나 문자를 남기지 않았다. 설령 기록이 있다 해도 대개 구결로 된 은어(隱語)를 많이 사용해 암시할 뿐이라 전인(傳人)이 아니면 그 속의 오묘한 비밀을 깨달을 수 없다.

장삼풍이 태극권을 창립한 후 여러 유파에서 모두 태극권 이론을 흡수했고 모두들 장삼풍을 조사로 삼았다. 예를 들면 무당 태을신검문(太乙神劍門)의 전인은 자신의 검법이 장백산의 사부로부터 얻은 것으로 17대를 가전(家傳)되어 왔다고 한다. 역대 사부들이 모두 ‘조사를 말하고 사부는 언급하지 않는’ 사훈(師訓)에 따라 장삼풍 조사는 말하지만 자기 사부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역시 장삼풍 조사가 전했다는 것만 알뿐 역대 사부들의 이름은 모른다. 청나라 말기 봉천(奉天) 북진현(北鎮縣)의 《무당단파검술(武當丹派劍術)》에서는 “무당검술은 바로 동현진인(洞玄真人) 장삼풍이 진무(真武)로부터 전수받은 대법(大法)이다.”라고만 했다. 이런 특수한 원인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도문(道門) 중의 사람들조차도 오직 조사 장삼풍만 알뿐 역대 전인(傳人)이 누구인지 모른다.

한편 민간에서는 태극권이 민간에 유입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장삼풍 태극권의 원래 모습과는 차이가 아주 멀어졌다. 가장 주요한 원인은 민간의 태극권은 수련과의 연결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수련내포가 담긴 동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태극권 자세를 바꾸지 않았지만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 실전되었다. 예를 들어 앞서 황백가가 자신이 전수받은 태극권이 마치 혜강의 《광릉산》처럼 세상에서 전수가 끊어진 것에 대해 슬퍼한 것과 같다.

또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감수에 근거해 태극권 자세를 바꿨으며 이렇게 여러 대를 지나면서 고쳐져 오늘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일찍부터 면모가 완전히 달라졌다. 또 어떤 이는 스스로 문파를 만들어 장삼풍 조사의 명성을 패괴(敗壞)시켰으며 더욱 심한 자는 태극조사(太極祖師)라는 이름마저 찬탈해 천지를 놀라게 했다.

오늘날 현대의 내가권(內家拳)은 장삼풍을 기치로 삼으며 여러 문파가 생겨났다. 배우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지면서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천하무적의 영웅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들은 초능력과 공능(功能)을 동경하고 기교가 뛰어난 쿵푸영화에 도취하지만 실제로 무술연습이나 무술시합 중에서 태극권의 장법(章法)을 제대로 체현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안에 진정한 공부가 없기 때문이며 출수한 자세 역시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안에 진정한 공부가 있다면 앞서 소개한 장송계처럼 맨손으로 수백 근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 3개를 절단할 수 있다. 이는 단번에 목숨을 앗아갈 수 있으며 사람이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다. 지금 사람들은 태극권 동작 속에 이렇게 뛰어난 기술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1950년대에 들어와 태극권은 중국에서 체육활동의 하나로 대대적으로 보급되었고 1980년대에는 전례 없는 기공(氣功)열풍이 일어났다. 태극권은 동작이 느리고 완만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효과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기공 애호가들을 끌어들였다. 이를 통해 천지와 우주에 대한 중국 전통문화의 인식을 새로 사고하게 했고 생명의 내원과 존재의 진실한 의미에 대해 사고하게 했다.

1992년 리훙쯔(李洪志 이홍지) 선생은 “우주 최고의 특성 ‘眞(쩐)·善(싼)·忍(런)’에 동화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우주 최고의 특성을 지도로 삼아, 우주의 연화(演化)원리에 따라 수련하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세상에 전했다. 파룬따파는 성명쌍수(性命雙修)하는데 “파룬따파에서 성(性)을 닦음이란 心性(씬씽)을 닦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心性(씬씽)수련을 첫 자리에 놓으며 心性(씬씽)을 공이 자라는 관건으로 본다.” “명(命) 닦음이란 장생지도(長生之道)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연공을 통하여 本體(번티)를 개변해, 本體(번티)를 잃지 않고 主意識(주이스)와 육체가 합일, 정체(整體)로 수련 성취하는 것이다.”(《파룬따파대원만법(法輪大法大圓滿法)》)

이에 태극권을 연습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파룬따파 수련으로 들어와 대법과 인연을 맺었다.

제4장 시방을 도화해 많은 자취를 남기다

《대월과무공비행지잔(帶月過武功飛行至棧)--달빛에 무공을 지나 잔도까지 비행하다》

누더기 옷에 빈랑 표주박 깔끔하지 못해서
밤에 위하 서쪽을 날아서 지난다.
흰 구름 큰 소리로 양산 기러기를 부르고
차가운 달은 노점(魯店)의 닭을 재촉하네.
출세하여 진촉의 길을 여러 번 노닐었는데
마애에서 스스로 오고간 제목을 보네.
험한 잔도를 평지처럼 다니니
비로소 난거(鸞車 신선의 수레)가 말발굽보다 나음을 알겠노라.

布衲榔瓢欠整齊(포납낭표흠정제)
夜來飛過渭河西(야래비과위하서)
白雲叫破梁山雁(백운규파양산안)
涼月催回魯店雞(양월최회노점계)
出世多遊秦蜀路(출세다유진촉로)
摩崖自看往來題(마애자간왕래제)
身行險棧如夷坦(신행험잔여이탄)
始識鸞車勝馬蹄(시식난거승마제) 

역사적으로 도가는 중생을 널리 제도함을 중시하지 않았고 수진양성(修眞養性)과 성명쌍수(性命雙修), 신통술류(神通術類)를 연마하는 것 등을 중시하며 역대로 단독전수해 왔다. 신통법술(神通法術)을 현대인들은 초능력 또는 특이공능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사람의 본성이다. 사람의 눈(육안)으로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인간세상에서의 표현에 불과하다. 다른 공간에서 진정한 연화(演化)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볼 수 있거나 똑똑히 볼 수 있다.

대도진인(大道真人)이 성취하는 것은 “천지처럼 오래 살고 일월처럼 밝아(與天地同久,日月同明)”, “만겁에 신이 존재하며(萬劫存神)”, “형신이 오묘함을 갖춰 도와 더불어 진에 합하는 것(形神俱妙,與道合真)”이니 신성하기가 비할 바 없다.

장삼풍은 대도에서 진인이 된 후 대지대혜(大智大慧)하여 우주의 진상을 환히 알았고 사람들을 위해 태극신권(太極神拳)을 남겨주었지만 오히려 심법만은 남기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불도(佛道)를 초월하는 대도(大道)대법(大法)이 있음을 알려주었지만 불도를 초월하는 이 대도대법을 남겨놓진 않았다.

장삼풍은 도를 성취한 후 속세에 크게 은거해(大隱朝世) 사방을 운유하면서 인연 있는 사람들을 도화(道化)했다. 이에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도를 숭상하고 신을 공경했으며 가가호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살아있는 신선(活神仙)이 되었다.

명나라 때 임자원(任自垣)의 《대악태화산지(大嶽太和山志)》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은 손에 방척(方尺 직각자)을 들고 다니며 춥거나 덥거나 늘 홑옷을 입었으며 때로는 궁벽한 산골에 있거나 때로는 시끄러운 시장을 다니며 사방을 운유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하루에 천리를 가는 것을 보았다. 장삼풍은 한번 본 것은 다 기억할 수 있는 재주를 지녔고 농담을 잘했으며 옆에 누가 있든지 의식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방술(方術)의 비결을 물으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교의 경서에 대해 물으면 거침없이 설명해주었고 말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전적으로 도덕(道德) 인의(仁義)와 충효(忠孝)에 근본 했으며 길흉화복을 함부로 말하거나 사람을 속이는 말은 없었다. 때문에 마음(心)으로 신(神)이 통하고 신(神)이 도(道)와 합해 매사에 모두 선견지명이 있었다.

1. 보계금대관—죽었다 다시 살아나다

보계(寶雞) 금대관(金台觀)은 섬서성 보계시 북쪽 교외의 능원산(陵原山) 위에 있다. 고대에는 보계를 진창(陳倉)이라 불렀다. 그러다 당나라 숙종 지덕(至德) 2년(757년) “석계가 우는(石雞啼鳴)” 상서로운 조짐 때문에 보계로 바꿨다. 보계는 역사가 유구해서 태호복희(太昊伏羲)가 일찍이 진창을 다스린 적이 있다.

주나라 문왕(文王) 역시 이곳에 나라를 세운 적이 있고 초한(楚漢)이 서로 다툴 때 한신(韓信)이 “겉으로는 잔도를 수리하면서 몰래 진창을 건너” 최종적으로 한실(漢室)의 천하를 다진 곳이다. 삼국시대 때는 촉한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이 5차례에 걸쳐 위나라를 북벌하기 위해 헌신한 곳으로 그는 보계 오장원에서 선서(仙逝)했다.

장삼풍은 일찍이 보계 진창산 아래에 움막을 짓고 수련한 적이 있다. 나중에 도를 이룬 후에 또 금대관에서 수년을 머물며 《보계만행(寶雞晚行)》, 《소려제벽(小廬題壁)》, 《귀진(歸秦)》 등의 시를 지었다.

《보계만행(寶雞晚行)》

문득 진봉을 노닐다
표연히 보계에 이르네.
물 따라 흐르는 길은 먼데
저녁구름 산 아래 낮게 깔리네.
마주보는 세 봉우리 우뚝 섰는데
관심은 거처하는 침상.
띠풀 엮어 잠시 발을 멈추면
나는 또 반계 늙은이(老磻溪 강자아)로다.

倏爾遊秦鳳(숙이유진봉)
飄然到寶雞(표연도보계)
路隨流水遠(노수유수원)
山壓暮雲低(산압모운저)
對面三峰立(대면삼봉립)
關心一榻棲(관심일탑서)
結茅聊息足(결모료식족)
吾亦老磻溪(오역노반계)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장삼풍이 보계 금대관에 있을 때 한번은 7일간 혼이 떠난 적이 있었다. 원나라 지정(至正) 26년 병오년(1366년) 늦가을 장삼풍의 나이 120살 때 그는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서거를 기리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 하지만 시신을 매장하려던 날 다시 살아났다. 되살아난 후 제자 양궤산(楊軌山)에게 게(偈)를 하나 주었는데 원나라의 멸망과 명나라의 탄생을 예언했다.

《대원 지정 26년 병오년 늦가을에 금대관에서 유혼 7일 만에 돌아와 양궤산에게 주는 게(大元至正二十六年丙牛暮秋金台觀遊魂七日歸來付楊軌山一偈)》

원기가 희미해져 태청으로 돌아가
다시 주작을 따라 요경(瑤京)에서 내려왔네.
박상(剝床) 7일만에 혼이 다시 돌아오니
천하가 일제히 일월이 밝음을 보는구나.

元氣茫茫返太清(원기망망반태청)
又隨朱雀下瑤京(우수주작하요경)
剝床七日魂來複(박상칠일혼래복)
天下齊看日月明(천하제간일월명)

장삼풍의 신적(神跡)이 보계에서 끊이지 않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장삼풍이야말로 진정한 신선이라고 여겼다. 금대관은 장삼풍 덕분에 천하에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장삼풍의 조묘(祖廟)가 되었다. 장삼풍이 금대관의 정신(正神)이 되자 이곳을 찾아와 참배하는 남녀신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향불이 흥성해졌다.

명나라 천순(天順 1457~1464) 연간 이부우시랑(吏部右侍郎) 장용완(張用浣)이 금대관에 《장삼풍유적기(張三豐遺跡記)》란 비석을 세웠다. 이 글에서 그의 부친이 장삼풍을 직접 만난 장면을 서술했다. 비문에서는 장삼풍이 떠날 때 “발이 땅을 밟지 않았다.”고 했다. 장삼풍은 금대관을 떠날 때 구절등장(九節藤杖)과 혼원의(混元衣)를 남겨놓았다.

명나라 말기인 1611년 보계현령 주병연(朱炳然)이 또 이 두 가지 물건을 보고는 비석에 시를 새겨놓았다.

구장에는 여전히 아홉 마디 남았는데
노을 옷은 오수전보다 가벼워 보이네.
노래 마치고 신선을 생각하며 휘파람 길게 부니
저녁노을 온산을 붉게 비추네.

鳩杖尚留九節在(구장상류구절재)
霞衣猶見五銖輕(하의유견오수경)
歌罷懷仙一長嘯(가파회선일장소)
昔陽紅照萬山明(석양홍조만산명)

보계에는 또 장삼풍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온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나라 건륭 연간에 금대관을 중수했다. 그런데 나무를 세우면 이튿날이면 기둥과 들보가 무너지곤 해서 며칠간 실패를 거듭했다. 이에 공사 책임을 맡은 회장(會首)의 마음이 타들어갔다. 어느 날 저녁 회장이 선방에서 조는데 학발동안(鶴髮童顔)에 도롱이를 입은 한 노도사를 보았다. 그는 오른 손에 구절등장 왼손에 검고 반짝이는 물건을 들고와서는 말했다. “내가 보계에 다년간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하고 두터우며 선행과 베풀기를 좋아하는 걸 잘 안다. 이에 고향 친지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특별히 신철(神鐵) 2덩이를 보내니 내일 나무를 세우고 기초 위에 두면 초석이 견고해지고 건물이 평안해질 것이며 세속의 일도 무사태평할 것이다.”

회장이 깜짝 놀라 깨어났는데 깨어난 후에야 비로소 꿈인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두 덩이 호미철판(鐵鋤板)이 있었다. 이튿날 꿈에서 시킨 대로 작업하자 과연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삼청전(三清殿)이 새로 수리되어 개축되었다. 사람들은 나중에야 비승동(飛升洞)에 모셨던 장삼풍의 유물 중에서 도롱이, 도포, 구절등장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김을 매던 호미 2개가 나무자루만 남고 쇠로 된 부분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비로소 기둥을 고정시킨 신철이 장삼풍이 사용하던 호미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삼청전은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치긴 했지만 기초만은 아주 튼튼했는데 이 두 개의 호미철판이 줄곧 처마기둥 아래를 지탱하고 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011

정견망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4.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명나라 왕종악(王宗嶽)은 《태극권경(太極拳經)》에서 무술에 비록 아주 많은 문파가 있고 문파간에 구별이 있지만 대개 장대한 자가 약한 자를 깔보고 느린 자가 빠른 자를 피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때리고 손이 느린 자가 손이 빠른 자를 피하는 타법(打法)은 단지 일반 속인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태극권은 그렇지 않다. 장삼풍은 《태극권가결(太極拳歌訣)》에서 손이 빠르기 때문도 아니고 손이 느리기 때문도 아니며 태극권이 능히 태극의 공능(功能)을 연마해낼 수 있다고 했다. 즉 의념으로 태극을 지휘해 공능으로 권법을 연마하기 때문에 사용할 때 아무런 힘도 쓸 필요가 없다.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보고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역주: 4냥이란 아주 적은 힘으로 천근이란 큰 힘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라 했다.

장삼풍은 또 《태극권을 배우려면 반드시 신을 수렴하고 기를 모아야 한다는 주장(學太極拳須斂神聚氣論)》에서 “주먹이 도달하기 전에 의념이 먼저 도달하며 주먹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에도 의념이 도달할 수 있다. 의념(意)은 신(神)의 부림을 받는다.(拳未到而意先到,拳不到而意亦到。意者,神之使也)”라고 했다.

또 ‘의념을 쓰고 힘을 쓰지 않음(用意不用力)’이 태극권의 10가지 요소 중 하나다. 《태극권가(太極拳歌)》에서도 만약 어떻게 체(體)와 용(用)을 구별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의기의 임금이 오면 골육의 신하가 온다(意氣君來骨肉臣)”라고 했다. 즉 의기를 군왕으로 보고 신체골육이 힘쓰는 것을 따르는 신하로 보았으니 의념은 신(神)이 부리는 것이다.

“태극권이란 그 고요함이 마치 움직이는 것 같고 그 움직임이 마치 고요한 것 같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으면 이기(二氣)가 서로 사귀어 태극의 상(象)을 만든다. 안으로 그 신(神)을 수렴하고 밖으로 그 기(氣)를 모은다. 주먹이 도달하기 전에 의념이 먼저 도달하며 주먹이 도달하지 않아도 의념이 도달한다. 의념이란 신의 부림을 받는다. 신기(神氣)가 이미 합쳐지면 태극의 위(位)가 정해진다. 그 상이 이미 이루어지고 그 위가 이미 정해지면 인온(氤氳)이 화생하는데 이를 칠이(七二)의 수라 한다.

태극권에는 모두 13가지 세(勢)가 있는데 붕(棚), 리(捋), 제(擠), 안(按), 채(採), 열(捩), 주(肘), 고(靠), 진보(進步), 퇴보(退步), 우고(右顧), 좌반(左盼), 중정(中定)으로 팔괘와 오행의 상생상극을 따른다.

그 허령(虛靈 자연스럽게 힘을 빼는 것), 함발(含拔 가슴을 안으로 품어 기를 단전에 가라앉히고 기를 등에 붙이는 것), 송요(鬆腰 허리를 느슨히 하는 것), 분허실(分虛實 허실을 나누는 것), 침추(沉墜 어깨와 팔꿈치를 아래로 느슨히 늘어뜨리기), 용의불용력(用意不用力 의념을 사용하고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 상하상수(上下相隨 위와 아래가 협동해서 같이 움직이는 것), 내외상합(內外相合 안과 밖이 서로 화합하는 것), 상련부단(相連不斷 서로 이어져서 끊임이 없는 것), 동중구정(動中求靜 움직임 속에서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은 태극권의 십요(十要)로 배우는 자들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다.”《태극권을 배우려면 반드시 신을 수렴하고 기를 모아야 한다는 주장》

장삼풍 《태극권가(太極拳歌)》

십삼세 권가(拳架)를 홀시하지 말라
생각의 근원은 허리에 있다네.
허실의 변화에 반드시 의념을 두어야
기가 온몸에 두루 퍼져 약간의 막힘도 없네.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고 움직임이 고요함과 같아야
적이 변화에 따라 신기를 보일 수 있네.
자세마다 마음에 품고 의도를 헤아리면
공부가 헛되다고 느끼지 않으리라.
시시각각 허리 사이에 주의하고
뱃속을 느슨히 하면 기가 솟아오르네.
미려가 반듯해야 신(神)이 정수리를 관통하고
온몸이 가볍고 매끈해 정수리를 매단 듯하네.
자세히 주의 깊게 추구해야
굴신과 개합에 청경(聽勁 상대의 반응을 듣는 것)이 자유롭네.
입문에 드는 길은 반드시 구전 전수를 받아야 하고
공부가 쉼이 없어야 법이 스스로 닦으리라.
만약 체용을 말한다면 무엇이 표준인가?
뜻과 기가 임금이고 뼈와 살은 신하라네.
상세히 추구하는 의도는 결국 어디에 있나?
연년익수하며 청춘이 늙지 않음이라.
노래여 노래여 140글자는
글자마다 진실로 부합하고 뜻에 누락 없다네.
만약 이렇게 추구하지 않는다면
공부를 허비하고 탄식만 남기리라.
붕리제안을 반드시 진지하게 알아야 하고
위아래가 서로 따르면 남이 들어오기 어렵도다.
상대가 큰 힘으로 나를 쳐오더라도
사량을 이끌어 움직여 천근을 퉁기리라.
공에 떨어지게 이끌어 합하자마자 발출함은
점련첩수와 부주정(不丟頂 상대의 공격을 방치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것) 해야 하네.

十三總勢莫輕視(십삼총세막경시) 命意源頭在腰際(명의원두재요제)
變轉虛實須留意(변전허실수유의) 氣遍身軀不少滯(기편신구불소체)
靜中觸動動猶靜(정중촉동동유정) 因敵變化示神奇(인적변화시신기)
勢勢存心須用意(세세존심수용의) 得來不覺費功夫(득래불각비공부)
刻刻留心在腰間(각각유심재요간) 腹內鬆淨氣騰然(복내송정기등연)
尾閭中正神貫頂(미려중정신관정) 滿身輕利頂頭懸(만신경리정두현)
仔細留心向推求(자세유심향추구) 屈伸開合聽自由(굴신개합청자유)
入門引路須口授(입문인로수구수) 功夫無息法自修(공부무식법자휴)
若言體用何爲准(약언체용하위준) 意氣君來骨肉臣(의기군래골육신)
想推用意終何在(상추용의종하재) 益壽延年不老春(익수연년불로춘)
歌兮歌兮百四十(가혜가혜백사십) 字字真切義無遺(자자진절의무유)
若不向此推求去(약불향차추구거) 枉費功夫貽歎息(왕비공부이탄식)
棚捋擠按須認真(붕리제안수인진) 上下相隨人難進(상하상수인난진)
任他巨力來打我(임타거력래타아) 牽動四兩拔千斤(견동사량발천근)
引進落空合即出(인진낙공합즉출) 黏連貼隨不丟頂(점련점수부주정)

“쳐들면 더 높이고 숙이면 더 깊게 하며, 전진하면 더 길게 하고 후퇴하면 더 급박하게 한다. 깃털 하나도 더할 수 없고 파리도 앉을 수 없다. 남은 나를 모르지만 나만이 남을 안다. 영웅이 가는 곳마다 당할 자가 없음은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이 기예는 방문이 아주 많은데 비록 구별은 있을지라도 대개 힘센 자가 약한 자를 무시하고 느린 자가 빠른 자에게 양보할 뿐이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때리고 손이 느린 자가 손이 빠른 자에게 양보하는 것은 모두 선천적으로 자연적인 능력이지 힘을 배워서 하는 행동은 아니다. 사량발천근이란 구절을 살펴보면 분명히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칠팔십 노인이 여러 사람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을 보면 빠른 것이 또 무슨 작용을 하겠는가?”(仰之則彌高,俯之則彌深,進之則愈長,退之則愈促。一羽不能加,蠅蟲不能落。人不知我,我獨知人。英雄所向無敵,蓋由此而及也。斯技旁門甚多,雖是有區別,概不外壯欺弱,慢讓快耳。有力打無力,手慢讓手快,是皆先天自然之能,非關學力而有爲也。察四兩撥千斤之句,顯非力勝。觀耄耋能禦眾之形,快何能爲?)(왕종악 《태극권론(太極拳論)》)

《태극권가(太極拳歌)》에서 “홀연히 숨고 홀연히 드러남에 나아가면 길어지고 깃털 하나도 더하지 못하니 지극한 도에 감춘다(忽隱忽現進則長,一羽不加至道藏)”라고 했다. 태극권은 겉으로는 ‘느리고 완만하며 둥글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의념만큼이나 빠르다. 팔구십 노인이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 역시 모두 태극권의 현묘하여 예측이 어렵기 때문이다. 태극권은 홀연히 숨었다고 홀연히 나타나는데 고심하기가 끝이 없고 나아가고 물러남에 시작과 끝이 없으며 깃털 하나 더할 수 없고 파리조차 내려앉을 수 없다.

태극권을 또 장권(長拳)이라고도 하는데 “장권이란 마치 장강이나 큰 바다처럼 도도하고 끊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 공간에서 끝이 없다는 것은 공능이 다른 공간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은 나를 모르고 나만이 남을 알 수 있으며 영웅이 가는 곳마다 무적이 될 수 있다.

장삼풍은 《귀진(歸秦)》이란 시에서 “물(物) 밖에 소요하는 몸 그 누가 알랴(誰識逍遙物外身)?”라고 했다. 태극권을 성취한 사람은 몸 밖에 몸이 생기는데 옛날 사람은 오행을 벗어난 신체를 말했다. 겉보기엔 그곳에 있지만 사실 그곳에 있는 게 아니다.

장삼풍 《귀진》

촉에서 진으로 와 진을 떠나지 않고
서진에 오래 머무니 진 사람처럼 보이네.
보계 바위 이에 시 구절을 적으니
물 밖에 소요하는 몸을 그 누가 알랴?

自蜀來秦不避秦(자촉래진부피진)
西秦久住似秦人(서진구주사진인)
寶雞石上題詩句(보계석상제시구)
誰識逍遙物外身(수식소요물외식)

5. 구전심수와 불이문(不二門)

장삼풍은 《태극권을 배우려면 반드시 신을 수렴하고 기를 모아야 한다는 주장》에서 태극권을 배우는 사람에게 불이법문(不二法門 역주: 한 법문에서만 전일하게 수련함을 의미)을 엄격히 요구했다. 태극권은 다른 무술과 다르게 연마하는 것이 단지 근골이나 피부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내외겸수의 내함과 기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불이법문’을 엄격하게 요구한다. 《대도론》에서 장삼풍은 유석도 3교 모두 정교(正敎)로 모두 우주의 보다 높은 대도(大道) 아래에서 방편적인 법문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수련 중에서는 오직 한 법문만을 선정해야 하며 뒤섞어 수련할 수 없다.

장삼풍은 정공(靜功)은 태극권의 일부이며 “사려를 멈추고 정욕을 끊으며 진원을 지킬 수 있음(息思慮,絕情欲,保守真元)”이 심성 공부라고 말했다. 정공과 태극권은 마치 채약연단처럼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정공이 없다면 “장생 대도에 오를 수 없다.(不能登長生大道)” 무림에서 “권법 연습은 연공이 아니며 늙으면 다 허사다(練拳不煉功,到老一場空)”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장삼풍은 《태극권가》에서 “입문에 드는 길은 반드시 구전 전수를 받아야 하고 공부가 쉼이 없어야 법이 스스로 닦으리라.(入門引路須口授,工夫無息法自修)”라고 했다. 태극권은 내수공법(內修功法)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사부의 구전심수를 받아야 한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꼿꼿이 앉아 사려를 멈추고 정욕을 끊으며 진원을 지키는 이것이 심공이다.(冥心兀坐,息思慮,絕情欲,保守真元,此心功也)”(《태극행공설(太極行功說)》)

“기왕 이 행공의 오묘한 구결을 얻었다면 모름지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성실히 하며 마음을 조용히 하고 욕심을 끊어야 한다. 머리부터 해나가면 점차 상승하고 올라가 대도를 증오할 수 있다. 장생불로의 기초는 곧 여기에서 비롯된다.(既得此行功奧竅,還須正心誠意,冥心絕欲,從頭做去,始能逐步升登,證悟大道。長生不老之基,即胎於此)”(《태극행공설》)

“만약 태극권법을 얻었지만 행공의 오묘함을 몰라서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는 연단을 하는데 채약을 하지 않거나 채약은 했으나 연단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장생대도(長生大道)에 올라갈 수 없다면 외면 공부에 불과하며 결코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반드시 공권(功拳)을 함께 연마해야 한다. 대개 공(功)은 유(柔)에 속하고 권(拳)은 강(剛)에 속하며 권은 동에 속하고 공은 정에 속하니 강유(剛柔)가 서로 돕고 동정(動靜)이 서로 원인이 되어야 비로소 태극의 상을 이룰 수 있다. 서로 도와서 행한다면 실제로 사용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렇게 태극권을 연마하는 자는 반드시 행공(行功)의 묘한 쓰임을 먼저 알아야 하고 행공하는 자는 반드시 태극의 오묘한 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若才得太極拳法,不知行功之奧妙,挈置不顧,此無異煉丹不采藥,采藥不煉丹,莫道不能登長生大道,即外面功夫,亦決不能成就。必須功拳並練,蓋功屬柔而拳屬剛,拳屬動而功屬靜,剛柔互濟,動靜相因,始成爲太極之象。相輔而行,方足致用。此練太極拳者所以必先知行功之妙用,行功者所以必先明太極之妙道也)(《태극행공설》)

“안심정성(安心定性), 염신취기(斂神聚氣)를 구하려면 가부좌를 빼놓을 수 없으니 행공(行功)의 법은 폐지할 수 없다.”

“심성(心性)과 신기(神氣)는 서로 따라서 작용하기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성이 안정되며 정신이 수렴되고 기가 모이면 일신(一身) 중의 태극이 이뤄지고 음양이 어우러지며 동정이 합해져서 전신의 팔다리와 백맥이 원활하게 유통되어 달라붙거나 막히는 곳이 없다. 그러면 나의 법을 전수할 수 있다.”(《태극권을 배우려면 반드시 신을 수렴하고 기를 모아야 한다는 주장》)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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