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북하게 담아드려라’ 고대 저울의 비밀
고대 중국의 저울은 16냥짜리였는데, 16개의 별을 눈금에 새겼다. 앞의 여섯 냥은 남두성(南斗星)의 6개, 그다음 일곱 냥은 북두칠성 7개, 마지막 세 냥은 복(福), 녹(祿), 수(壽)의 세 별이다. 남두성은 생을 주관하고, 북두칠성은 죽음을 주관하며, 복록수는 복, 재물, 수명을 주관한다. 무게를 다는 것을 생사에 관계되는 것으로 여겨 복, 녹, 수 세 개의 별을 관장하는 신선이 상인의 행위를 감독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상인이 만약 다른 사람에게 한 냥을 적게 주면 신선이 그의 복을 줄이고, 두 냥을 적게 주면 재물을 줄이고, 세 냥을 적게 주면 명을 줄인다고 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무게를 달 때 항상 고객에게 이익을 주는 쪽으로 주었다. 그래서 “수북하지 않으면 상인이 아니다(無尖不商).”라고 했다.
고대인은 다른 사람과 양식을 거래할 때 말과 되로 양을 쟀는데, 가득 찬 것을 괄판(刮板)으로 한번 밀면서 평평하게 깎아 많지도 적지도 않게 했다. 괄판이 없으면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한번 깎았는데, 어떤 사람은 교활하게 손바닥을 아래로 눌러 양을 줄였다. 너그럽고 후한 사람은 손등을 조금 위로 올려 손바닥을 비웠고, 수북한 부분이 위로 솟게 함으로써 주는 양을 늘렸다. 조공명은 양식을 팔 때 매번 수북하게 담아 줬는데, 이것이 바로 “수북하지 않으면 상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에서 나온 뜻이다. 수북한 상인은 너그럽고 신용 있는 좋은 상인이다.
‘수북하지 않으면 상인이 아니라’는 것은 상인이 고객에게 이익을 준다는 의미다. 상인의 평판이 좋으면 장사가 자연히 잘된다. 양식을 파는 일 외에도 천을 팔 때 ‘자를 채우고, 세 치를 더한다(足尺放三)’는 말이 있다. 자로 재다가 마지막 한 자를 잴 때 세 치를 더하는 것이다. 또한, 기름과 식초를 파는 상인도 마지막에 고객에게 약간의 덤을 준다. 그래서 수북하게 담아주는 것은 고대 상인이 장사하면서 준수하는 황금률이었고, 성공 비결이었다.
덕을 베풀어 성공하다
청나라 산서 상인 교치용(喬致庸)은 덕을 베풀어 장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태평천국 시대에 자금을 모아 남방에서 차(茶)를 구매하며 끊어진 찻길을 복원했는데,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일꾼들과 함께 남방에서 찻잎을 실어와 상점에 넘겼다. 찻잎 가게 사장이 “찻잎 무게를 한번 달아 주게. 양이 맞는지 봐야지.” 라고 하자, 그의 직원이 무게를 단 후에 기뻐하며 말했다. “사장님, 자루마다 한 근 두 냥입니다.” 교치용이 매 한 근에 두 냥을 더 준 것이었다. 사장이 듣고 몹시 기뻐하며 “어서 다시 한 근씩 포장해!”라고 말했다. 옆에서 광경을 지켜보던 노인은 “끝났어, 앞으로 이 찻길은 모두 교치용 것이야!”라고 했다.
어느 해에는 흉년이 들어 굶는 사람이 속출해 동냥하거나 남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가난한 사람과는 달리 약간의 지식과 신분이 있는 사람들은 동냥하자니 체면이 서지 않았다.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교치용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부러 크게 집을 짓는 공사를 벌여서 벽돌 하나를 옮겨도 음식을 줬다. 체면 때문에 미처 동냥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공사를 돕고 떳떳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천금을 뿌려도 다시 돌아온다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 사람 범려는 월왕 구천의 책사였다. 『도주공 상경(商經)』으로도 불리는 그의 ‘상훈(商訓)’은 일종의 영업 비결을 담은 서적이다. 후세에 그를 상업의 시조, 경영의 신으로 추앙한다. 그는 20여 년 동안 월왕 구천을 보좌해 나라를 다시 일으켰고, 공을 세운 후에는 어떤 포상도 사양하고 빈손으로 떠나 제(齊)나라로 갔다. 범려는 제나라에서 사업으로 자수성가했는데, 사업이 크게 번창하자 제나라 왕이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재상의 인장도 반납한 채 빈손으로 떠나 가족을 이끌고 도(陶) 땅에 도착했다. 여기에서도 범려는 빈손으로 경영을 시작해 19년 동안 세 번이나 천금의 재물을 모았고, 다시 세 번에 걸쳐 모든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백은 이런 시를 지었다. “하늘이 나에게 재주를 내리니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이요, 천금이 모두 흩어져도 다시 돌아오도다!” 이는 곧 범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눈에 높은 관직과 후한 복록, 거액의 재산은 모두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몸 밖의 물건이었고, 버리는 것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었다.
조선 제일 거상 임상옥은 죽기 전 아무 유산도 남기지 않고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다. 서양의 큰 부자, 대 부호의 대부분은 큰 자선가다. 그들은 번 돈을 모두 필요한 사람을 돕는 데 썼다. 사실 재부는 샘물처럼 흐르는 것이다. 설령 금전의 형태가 아니어도 다른 복이 되어 돌아오므로 잃지 않는다.
한번은 범려가 계속 자금 회전이 막혀 어느 부자에게 10만 전을 빌렸다. 1년 후, 부자가 차용증을 들고 빚을 받으러 나섰다가 보따리를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바람에 차용증과 여비를 모두 잃어버렸고, 하는 수없이 빈손으로 범려를 찾아왔다. 차용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려는 그에게 원금과 이자를 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비까지 얹어 주었다. 범려의 어진 마음과 신용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에 장사할 때는 여러 부호가 자발적으로 돈을 들고 찾아왔으므로 범려는 재정적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범려는 장사를 하면서 도덕과 도의를 대단히 중시했다. 그는 19년 동안 잇달아 재산을 가난한 사람과 소원하게 지내는 형제에게도 나누어 주어 금전으로 곤란을 겪지 않게 했다.
손해를 무릅쓰고 후추 8톤 태워
청나라 건륭 시기의 양곡상 오붕상(吳鵬翔)은 일 년 내내 도성에서 장사했다. 어느 해에 오붕상이 후추 8백 곡(斛)을 사들였다. 1곡은 10말이므로, 후추 8백 곡은 대략 오늘날의 8톤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붕상의 직원이 사들인 후추에 독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소식을 들은 후추 공급상은 오붕상에게 반품은 물론이고 환불까지 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붕상은 제안을 거절하고, 반품도 환불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제의 후추를 전부 불태워버렸다.
큰 손실을 본 오붕상에게 어떤 사람이 이유를 묻자, 오붕상은 “만약 공급상이 후추를 회수하면 틀림없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을 해칠 것이다. 그러나 독이 있는 후추를 모두 소각하면 대규모 중독을 피할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건륭 48년부터 49년 사이에 호북(湖北)에 큰 가뭄이 들어 쌀 가격이 폭등했다. 마침 오붕상에게는 사천에서 가져온 수만 석의 쌀이 있었지만, 그는 값이 오른 기회를 이용하지 않고 저가로 판매해 현지 백성들이 난관을 넘길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가 곧 공자가 말한 군자일 것이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가 인을 버리면 어찌 이름을 얻겠는가? 군자는 밥을 먹는 동안에도 인을 어기지 말아야 하느니, 다급해도 반드시 그래야 하며, 망해도 반드시 그래야 하느니라.”
다시 말해서 군자가 만약 인덕(仁德)을 떠난다면 어떻게 군자라 할 수 있겠는가? 군자는 항상 인덕을 어기지 않으며, 설령 가장 긴박한 순간일지라도 반드시 인덕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하고, 망해서 유랑할 때도 똑같이 그래야 한다.
글/ 저우칭(周清)